2020/10/17

Sunghwan Jo [일간개벽 2019.10.20] 최만리 상소문 길게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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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hwan 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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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개벽 2019.10.20] 최만리 상소문 길게 읽어보기



한글로 쉽게 풀어 쓴 《낭송 세종실록》을 손에 들고 딱 펼쳤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종이 집현전 관원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직무를 그만두고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하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고, 요즘 집현전 관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매일 어느 관원이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강독했는지 정확히 기록해두었다가 월말에 보고하라. 또 매월 10일에 한 번씩 당상관이 주제를 내고 글을 쓰게 하여 1등을 한 글과 순위에 든 글을 모두 월말에 보고하도록 하라.” 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더니 “집현전 관원들이 우수한 글을 써 내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는 필시 집현전 관리들이 학문과 문장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으니, 집현전 관원들이 (...) 공부를 매우 싫어해서 관직을 옮기고자 한다니 집현전 관원들이 이와 같다면 다른 보통의 관리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혼자 만들었을까?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을까? 비밀리에 제작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훈민정음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반대 상소문을 올린 것도 훈민정음이 완성된 이후이다.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집현전 실무 책임자인 최만리조차도 제작단계에서부터 반대를 할 수 없었다. 세종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또 어떤 몸짓을 하며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그를 도운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집현전 학자 중에서도 주류가 아닌 사람들? 후궁과 왕자와 공주들? 혹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궁을 드나드는 다양한 신분의 백성들?

 《15세기-조선의 때 이른 절정》에서는 최만리의 상소문을 이렇게 요약한다.

“최만리 등은 상소문에서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공론을 모으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임금이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 상소문은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을 은밀히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1444년 세종실록에 실렸는데, 전문을 읽어보면 기막힌 내용이 많다. 조목조목 살펴보면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 우리의 스승 어딘은 최만리 상소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드물 거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만리 상소문을 길게 실어보려고 한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세종실록》, 1444년 *

신들이 보건대, 성상께서 제작하신 언문이 지극히 신묘하여 지혜를 발휘하심이 고금을 통틀어 뛰어나십니다. 그러나 신 등의 좁은 소견으로 의심되는 바가 있어 감히 간곡한 마음으로 상소문을 올리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선은 태조 이래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서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중국과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법을 운용하고 있는 이때에 언문을 제작하셨으니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만일 이 소식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게 되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뜻에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1. 옛부터 구주천하의 풍토는 비록 다르지만 각 나라의 말에 따라 문자를 따로 만든 적은 없었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같은 나라만이 각자 자기 나라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말할 것이 못 됩니다. 옛 글에 ‘중화의 문명으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고 하였지, 오랑캐가 중화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옛부터 중국에서는 우리나라가 기자(은나라 폭군 주왕을 피해 동방으로 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전해짐)의 유풍을 따르고, 우리의 문물과 예악은 중화를 따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합향(환약)을 버리고 당랑환(말똥구리 똥)을 취하는 격이나 문명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엄마가 초등 과정 논술 선생님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그땐 집에 어린이 책이 차고 넘쳤다.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사 책도 많았다. 단순하게 그려진 단군 얼굴과 자세하게 그려진 단군 얼굴을 시도 때도 없이 보며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본 동화들은 기자 조선에 대한 설명을 늘 조금 부끄러운 듯 얼버무렸다. 중국에서 누가 와서 한반도를 지배했다니?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험한 말처럼 보였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기자가 와서 조선을 교화시켰기에, 조선이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중국과 같은 문자인 한문을 쓰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이렇게 다른데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 걸까. 몽골, 일본, 티베트, 여진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고 그들과 교류하며 한문과 토착 언어를 아름답게 넘나드는 법을 발전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1.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루하지만, 모두 중국에서 쓰는 글자를 빌려 사용하였기에 중국 문자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서리(하급 관리)나 시종의 무리라도 이두를 익히려면 먼저 책 몇 권을 읽어서 조금이라도 한자를 안 뒤에야 쓸 수 있으니, 이두로 인하여 한자를 알게 되는 자가 많습니다. 이두는 학문을 진흥시키는 일에 일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언문을 쓰기 시작한다면 관리들이 오로지 쉬운 언문만을 익히고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않게 될 것이니 한자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뉠 것입니다. 서리들이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27자의 언문만 익혀도 충분히 출세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성리학을 공부하겠습니까?

이 부분을 읽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밀양에서 한국인 한학자와 일본인 한학자가 나란히 앉아서 하는 대담을 들었다. 한국인 한학자는 백발에 흰 한복을 입었고, 일본인 한학자는 상대적으로 젊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인 학자 쪽에서 쏘듯이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서는 가나를 섞어서 한문을 번역해 읽어왔다. 그러므로 원전을 그대로 사용하는 한국(조선)보다 해석에 있어서 왜곡되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에 일본인 학자는 당황했다. 안경을 만지작거리더니 한문을 원형 그대로 사용한 조선에 비해 한문 문장 해석을 폭넓게 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인정했다. 한국인 학자는 한문과 한글로 깔끔하게 분리해서 쓰는 언어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최만리는 이두가 비루하지만 한문을 몇 글자라도 익힐 수 있으니 사용하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 쪽이다. 한국인 학자는 일본인 학자를 ‘오랑캐’와 비슷한 위치로 깎아내리며 한문과 한글이 분리된 언어 시스템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듯 했다. 여하튼 둘 다 한문을 유일무이한 문명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건 똑같은 것 같다.

1. (...)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형옥(소송)에서 억울하고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초사를 읽고서 허위인 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게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옥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은 옥리가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습니다. 언문으로서 재판을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백성들이 글을 읽을 줄 알아도 매를 맞으면 없는 죄도 인정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백성이 문자를 아는 것과 공평한 재판을 내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옥리(감옥 일을 맡는 사람)나 잘 뽑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재판을 받는데, 공정한 소송이 어떻게 가능할까.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일을 하려고 하면 꼭 그것을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훈민정음의 경우에는 문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집현전 학자라지만 이 부분에서는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1. 옛 유학자들이 이르기를 “어떤 것에 빠져서 즐기면 의지와 기백을 빼앗긴다. 심지어 글씨 쓰는 일조차도 선비들이 일삼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빠져 탐닉하면 의지와 기백을 잃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세자가 덕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성인의 학문에 마음을 두어 미진한 것을 궁구해야 합니다. 언문이 유익하다 할지라도 문사들의 육예(禮예, 樂악, 射사, 御어, 書서, 數수) 중에 한 가지일 뿐입니다. 하물며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신을 소모하고 시간만 낭비한다면 세자의 학업을 크게 해칠 것입니다. 신 등이 보잘 것 없는 재주로나마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기에 품은 생각을 숨길 수 없어 감히 성상께 아룁니다.

임금이 상소를 보고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린 상소에 ‘우리 소리를 써서 글자를 만든 것이 모두 옛법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설총의 이두 또한 음이 다르지 않은가? 설총이 이두를 제작한 본뜻은 백성을 위함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두가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또 그대들이 운서(한자들을 분류하여 엮은 일종의 발음 사전)를 아는가? 사성칠음에 자음, 모음에 몇 개 있는가?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또 그대들이 상소문에서 ‘언문은 하나의 새로운 기예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늘그막에 하루 하루 지내기가 힘들어 다만 책을 벗 삼을 뿐이다. 그것이 어찌 내가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해서이겠는가? 내가 매사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내가 이제 늙어서 나라의 모든 공부를 세자에게 맡겼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은 어떻겠는가?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서 공부만 하게 한다면, 나라의 일은 환관들이 하라는 것인가? 너희들은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라 나의 뜻을 잘 알 텐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전에 김문이 말했다. ‘언문을 제작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바꿔 옳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정창손도 말을 바꿔서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도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습니다. 언문으로 번역한 《삼강행실》을 본다고 해서 백성들이 충신·효자·열녀가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도리를 아는 자의 말이겠는가? 너희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열한 자들이다.”

-세종 26년 (1444, 갑자) 2월 20일

이 날의 기록은 조목조목 유명한 것 같다. 세종이 음운학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 《삼강행실》을 만들기 위해 언문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새별의 경우 이런 해석을 했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알려지고 두 달 뒤에 제출된 이 상소문은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중국바라기’가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세종은 이러한 문화적 사대주의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금도 이런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바뀌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세종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낫습니다. 독자적인 문화창조 작업으로 문화사대주의를 극복하려 했으니까요. 세종은 한글 뿐만 아니라 악보도 창제했고 독자적인 달력도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고대 성왕이나 할 수 있는 ‘작(作)’의 작업을 직접 해버린 셈입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읽으면서 ‘언문만 사용하게 되면 옛 글과 소통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한글세대인 내가 많이 들어온 말이고, 혼자서도 했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최만리 상소문에서 나오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훈민정음의 창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옛 글을 읽도록 가르치지 않았던 교육의 잘못이다. K-study의 실종이라고나 할까. 세종은 사대주의를 독자적인 문화창조로 극복하려 했다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창조하여 개벽할 수 있을까.

*세종실록 인용문 출처 : 홍세미 풀어 읽음, 《낭송세종실록》, 북드라망, 2017

**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이 문단 이외의 인용문은 모두 위의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조개 · 박상희

여름 장기 여행을 떠났다가 복학 시기를 놓쳐 얼떨결에 휴학을 했다. 동대문 성곽길을 걷고 정독도서관에 가고 개벽학당 동지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