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1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행사를 치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5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행사였다.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는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었고,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한 채 국정을 농단하고 이권을 차지하는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 연합군에게 패배했지만, 그때 불붙은 민족의식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동학민초들의 염원과 분노는 25년 동안 응축됐다가 1919년 3‧1독립 만세운동으로 폭발했다. 그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9명은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며, 동시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선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천명하였다. 기념사는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여 작성되었다.
문제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반일 투쟁을 전개한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과 최고지도자였던 최시형(1827∼1898) 선생이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있지 않은 데 있다.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최시형이 일제와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1894년 7월 23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겁박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순간이었다. 일본 제국은 같은 해 7월 25일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이유는 척왜(斥倭)을 부르짖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고, 동시에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어, 조선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
1894년 10월 16일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항일전에 나서고자 충북 옥천 청산 문바위에서 북접간부회의를 소집하였고,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총기포령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청산에 모인 동학교도가 10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최시형이 각 접주에게 보낸 통문에는 경복궁을 침범한 왜적을 몰아내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시형의 명령에 의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 8도에서 봉기하였다. 즉 2차 동학농민혁명인 항일 구국투쟁이 발발하였다. 최시형은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일제히 일어나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1월 20일에서 22일까지, 12월 4일에서 7일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과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12월 일본군과 치른 금구의 원평 전투와 태인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태인 전투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는 서로 헤어졌다.
한편,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의 지휘권을 넘긴 뒤에, 자신의 거처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에, 충북 옥천의 청산 문바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최시형은 1894년 11월 10일에 호남으로 갔다. 전북 임실군 소재의 동학 교인인 이병춘의 집에서 이후 9일간 머물렀다. 다시 최시형은 임실군 조항리에 있는 조석휴의 집에서 계속 머물렀다.
최시형이 청산 문바위를 떠난 얼마 뒤에, 동학농민군 학살 현지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최시형 체포에 혈안이 되어 척후대를 청산 문바위로 보내어 수색하게 하였다. 아래는 청산 문바위를 급습한 구와바라 에이지로(桑原榮次郞) 소위가 보고한 내용이다.
"이달 3일 문암읍에서 수괴 최법헌(최시형)을 덮쳤습니다. 이때 빼앗은 서류와, 같은 달 8일 청주에서 수만의 동학도로부터 빼앗은 서류를 통합해서 보냅니다."(「문암읍 동학수괴 최법헌과 청주동학도로부터 탈취한 서류송부」, <주한일본공사관기록>1권)
"상주에서 그 곳 목사가 확언한 바에 따르면, 청산현 문암읍(文岩邑)은 동학도의 소굴로서 수괴 최법헌이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같은 날 오후 2시 청산에 도착하자 즉시 1개 분대의 척후를 문암읍으로 파견하였다. 척후는 동학도 3명을 잡아 수괴의 서류 약간을 수집하여 돌아왔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최법헌은 이날 12시 지나 도주했다고 한다."(「문암부근 전투상보」(1894년 12월 4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권)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대장이 1894년 12월 2일 군대를 이끌고 청산으로 가서, 3일에 척후대를 청산 문바위로 보내 최시형을 체포케 하였다. 척후대는 서류 약간을 강탈하여 왔다.
다음날 4일에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위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시 최시형을 잡으려고 청산 문바위 마을 입구까지 갔다. 여기에서 동학농민군을 만나 전투를 치렀는데,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위는 편하게 공격하고자 문바위 마을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은 동학최고지도자인 최시형을 체포하고자 하였고, 마을을 소각하였으며, 수많은 서류를 강탈하였던 것이다.
미나미 고시로는 1895년 5월에 작성한 「동학당정토략기」라는 글에서, 자기가 "청산 부근으로 1개 지대를 파견했더니, 이 지대는 많은 적을 쏘아 죽였다. 그러나 우리 측은 한 명도 사상자가 없었다"라고 자랑까지 하였다. 미나미 고시로가 최시형 체포에 얼마나 혈안을 하였는지를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시형 등이 출몰한 곳은 영동·구례·무주 등 산 속이었으며, 또한 이 산에 이틀 있고 저 산에 사흘 있는 등 정처가 없었으므로, 이를 붙잡기가 실로 곤란하였다. 척후대를 보내 백방으로 수색했지만 끝내 이를 잡을 수 없었다. 혹자는 4일 전에 있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5일 전에 도망쳤다고도 하여, 어디에 있는지 거듭 알 수 없었다."(미나미 고시로, 「동학당 정토략기」, <주한일본공사관기록>6권)
이처럼 미나미 고시로는 최시형을 체포하고자 척후대를 백방으로 보내 수색케 하였던 것이다. 최시형이 산 속에서 수시로 거처를 바꾸어서, 끝내 잡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최시형이 무사히 임실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때, 손병희의 동학군이 임실군 갈담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손병희가 최시형을 음력 11월 19일에 만났다.
최시형과 손병희는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충청도와 강원도 방향으로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산맥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잘만 헤쳐나간다면 동학농민군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일본군과 관군도 험준한 산맥에 타고 이동하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울러 최시형과 손병희가 강원도와 충청도에 이미 동학을 많이 포교하여 두었기에, 동학 교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용이하여서 북행하였던 것이다.
최시형과 손병희의 동학군은 충북 영동군 용산 장터에서 3일간 머물렀는데, 최시형이 첫째 날인 1895년 1월 9일에 각 군대의 지휘관들에게 "내일은 작은 전투가 있고 그 다음날은 큰 전투가 있을 터이니, 주의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둘째 날에 민보군 500명이 공격을 해와, 동학농민군이 격퇴하였다.
셋째 날인 1895년 1월 11일에 용산 장터로 관군과 옥천·청산의 민보군 수천 명이 북쪽에서, 경북 봉화 병정 40∼50인과 일본군 800명이 남쪽에서, 전날부터 동학군을 쫓아 달려오던 군인들이 서쪽에서 공격하여 오자, 최시형은 손병희와 함께 소나무 밭에 들어가 돌파할 계책을 상의하였다. 이어서 최시형은 지팡이를 부여잡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당시 최시형의 나이는 68세였다.
"여러 동학 교인과 동학군이 일체로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하늘과 사람의 뜻을 합하여 거느리고 둘러싸서 밀어 붙이면, 한 사람도 손상치 않고 또한 총알 한 개도 맞지 아니하리라."(「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
최시형은 위기를 돌파하는 결단성과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최시형이 명령을 내린 이후, 손병희, 임학선, 이종훈 등 여러 사람이 칼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돌격하여 나아갔다. 동학농민군은 한 사람도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1895년 1월 11일 충북 영동군 용산 장터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용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청산 문바위에 도착하였다. 최시형의 집은 이미 일본군이 급습해 소각해 버렸기에, 전부 불에 탄 채로 있었다. 최시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청산읍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약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행군을 거듭하여 충북 보은 북실(종곡)에 도착하였다. 일본군과 상주 관군이 1895년 1월 12일과 1월 13일 양일에 걸쳐 동학농민군을 북실에서 습격하여,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다. 신영우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이 259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1895년 1월 23일 동학농민군은 충주 외서촌 되자니에서 청주에서 온 관군 수천 명과 일본군과 최후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그 뒤에 최시형과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후일을 도모하고자 최시형과 손병희는 강원도로 숨어들었다. 일본은 최시형을 추격하는데 멈추지를 않았다. 이노우에 카오루 일본공사는 1895년 1월 30일자로 조선의 중앙 관아에 보낸 공문을 통해, 최시형이 충주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으니, 동북지역의 지방관들이 방비하도록 명령을 하달하라고 지시하였다.(「최시형의 향동(向東)에 따른 방비 요청」, <주한일본공사관기록>6권)
이후 조선 정부는 동학혁명군 최고지도자인 최시형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강원도 홍천, 인제, 원주로 숨어들었다. 그는 1895년 7월에 강원도 인제군 최우범의 집에 있으면서, 손병희에게 "지성으로써 공부하여 후일을 준비하라"라고 당부하였다. '외세를 척결하는 일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후일에 잘 준비하여 1919년에 제2의 동학 혁명이며 항일 독립운동인 삼일혁명을 주도하였다.
1898년 4월 6일에 최시형은 강원도 원주군 송골에 있는 원진여의 집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최시형의 재판에 동학농민혁명에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의 대명사였던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판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30일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6월 2일 서울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향년 72세였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적용 대상자)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은 독립유공자가 된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대상요건>에 의하면,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다.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나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항거하였고, 그 반대와 항거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최고지도자 최시형은 여기에 해당한다.
1907년 7월 11일 대한제국의 고종은 동학의 거두 최제우와 최시형의 죄명을 취소하였다. 최제우, 최시형에 대해 죄인 대장에서 지워주었다.(<고종실록>48권) 이로써 최제우와 최시형의 모든 활동은 신원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최시형은 항일 구국 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반일투쟁의 최고지도자로 활동한 최시형의 업적을 제대로 반영하여, 그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바란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었고,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한 채 국정을 농단하고 이권을 차지하는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 연합군에게 패배했지만, 그때 불붙은 민족의식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동학민초들의 염원과 분노는 25년 동안 응축됐다가 1919년 3‧1독립 만세운동으로 폭발했다. 그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9명은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며, 동시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선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천명하였다. 기념사는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여 작성되었다.
문제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반일 투쟁을 전개한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과 최고지도자였던 최시형(1827∼1898) 선생이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있지 않은 데 있다.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최시형이 일제와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모습 최시형 선생 | |
ⓒ 박용규 |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데 나섰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조선의 군사 주권을 강탈하였다. 이때 친일 정치세력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조선이 일본에게 지배되지 않으려면 초대받지 않고 들어온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거병한 것은 외세의 국권 침탈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는 구국투쟁이었던 것이다.
1894년 10월 16일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항일전에 나서고자 충북 옥천 청산 문바위에서 북접간부회의를 소집하였고,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총기포령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청산에 모인 동학교도가 10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최시형이 각 접주에게 보낸 통문에는 경복궁을 침범한 왜적을 몰아내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시형의 명령에 의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 8도에서 봉기하였다. 즉 2차 동학농민혁명인 항일 구국투쟁이 발발하였다. 최시형은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일제히 일어나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1월 20일에서 22일까지, 12월 4일에서 7일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과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12월 일본군과 치른 금구의 원평 전투와 태인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태인 전투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는 서로 헤어졌다.
한편,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의 지휘권을 넘긴 뒤에, 자신의 거처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에, 충북 옥천의 청산 문바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최시형은 1894년 11월 10일에 호남으로 갔다. 전북 임실군 소재의 동학 교인인 이병춘의 집에서 이후 9일간 머물렀다. 다시 최시형은 임실군 조항리에 있는 조석휴의 집에서 계속 머물렀다.
▲ 최시형 선생 기림 비 장일순 선생과 치악고미술동우회가 1990년 4월 12일에 강원도 원주군 송골 앞 도로변에 세움.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 | |
ⓒ 박용규 |
"이달 3일 문암읍에서 수괴 최법헌(최시형)을 덮쳤습니다. 이때 빼앗은 서류와, 같은 달 8일 청주에서 수만의 동학도로부터 빼앗은 서류를 통합해서 보냅니다."(「문암읍 동학수괴 최법헌과 청주동학도로부터 탈취한 서류송부」, <주한일본공사관기록>1권)
"상주에서 그 곳 목사가 확언한 바에 따르면, 청산현 문암읍(文岩邑)은 동학도의 소굴로서 수괴 최법헌이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같은 날 오후 2시 청산에 도착하자 즉시 1개 분대의 척후를 문암읍으로 파견하였다. 척후는 동학도 3명을 잡아 수괴의 서류 약간을 수집하여 돌아왔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최법헌은 이날 12시 지나 도주했다고 한다."(「문암부근 전투상보」(1894년 12월 4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권)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대장이 1894년 12월 2일 군대를 이끌고 청산으로 가서, 3일에 척후대를 청산 문바위로 보내 최시형을 체포케 하였다. 척후대는 서류 약간을 강탈하여 왔다.
다음날 4일에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위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시 최시형을 잡으려고 청산 문바위 마을 입구까지 갔다. 여기에서 동학농민군을 만나 전투를 치렀는데, 구와바라 에이지로 소위는 편하게 공격하고자 문바위 마을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은 동학최고지도자인 최시형을 체포하고자 하였고, 마을을 소각하였으며, 수많은 서류를 강탈하였던 것이다.
미나미 고시로는 1895년 5월에 작성한 「동학당정토략기」라는 글에서, 자기가 "청산 부근으로 1개 지대를 파견했더니, 이 지대는 많은 적을 쏘아 죽였다. 그러나 우리 측은 한 명도 사상자가 없었다"라고 자랑까지 하였다. 미나미 고시로가 최시형 체포에 얼마나 혈안을 하였는지를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시형 등이 출몰한 곳은 영동·구례·무주 등 산 속이었으며, 또한 이 산에 이틀 있고 저 산에 사흘 있는 등 정처가 없었으므로, 이를 붙잡기가 실로 곤란하였다. 척후대를 보내 백방으로 수색했지만 끝내 이를 잡을 수 없었다. 혹자는 4일 전에 있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5일 전에 도망쳤다고도 하여, 어디에 있는지 거듭 알 수 없었다."(미나미 고시로, 「동학당 정토략기」, <주한일본공사관기록>6권)
이처럼 미나미 고시로는 최시형을 체포하고자 척후대를 백방으로 보내 수색케 하였던 것이다. 최시형이 산 속에서 수시로 거처를 바꾸어서, 끝내 잡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최시형이 무사히 임실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때, 손병희의 동학군이 임실군 갈담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손병희가 최시형을 음력 11월 19일에 만났다.
최시형과 손병희는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충청도와 강원도 방향으로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산맥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잘만 헤쳐나간다면 동학농민군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일본군과 관군도 험준한 산맥에 타고 이동하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울러 최시형과 손병희가 강원도와 충청도에 이미 동학을 많이 포교하여 두었기에, 동학 교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용이하여서 북행하였던 것이다.
최시형과 손병희의 동학군은 충북 영동군 용산 장터에서 3일간 머물렀는데, 최시형이 첫째 날인 1895년 1월 9일에 각 군대의 지휘관들에게 "내일은 작은 전투가 있고 그 다음날은 큰 전투가 있을 터이니, 주의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둘째 날에 민보군 500명이 공격을 해와, 동학농민군이 격퇴하였다.
셋째 날인 1895년 1월 11일에 용산 장터로 관군과 옥천·청산의 민보군 수천 명이 북쪽에서, 경북 봉화 병정 40∼50인과 일본군 800명이 남쪽에서, 전날부터 동학군을 쫓아 달려오던 군인들이 서쪽에서 공격하여 오자, 최시형은 손병희와 함께 소나무 밭에 들어가 돌파할 계책을 상의하였다. 이어서 최시형은 지팡이를 부여잡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당시 최시형의 나이는 68세였다.
"여러 동학 교인과 동학군이 일체로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하늘과 사람의 뜻을 합하여 거느리고 둘러싸서 밀어 붙이면, 한 사람도 손상치 않고 또한 총알 한 개도 맞지 아니하리라."(「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
최시형은 위기를 돌파하는 결단성과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최시형이 명령을 내린 이후, 손병희, 임학선, 이종훈 등 여러 사람이 칼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돌격하여 나아갔다. 동학농민군은 한 사람도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1895년 1월 11일 충북 영동군 용산 장터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용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청산 문바위에 도착하였다. 최시형의 집은 이미 일본군이 급습해 소각해 버렸기에, 전부 불에 탄 채로 있었다. 최시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청산읍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약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행군을 거듭하여 충북 보은 북실(종곡)에 도착하였다. 일본군과 상주 관군이 1895년 1월 12일과 1월 13일 양일에 걸쳐 동학농민군을 북실에서 습격하여,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다. 신영우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이 259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1895년 1월 23일 동학농민군은 충주 외서촌 되자니에서 청주에서 온 관군 수천 명과 일본군과 최후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그 뒤에 최시형과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후일을 도모하고자 최시형과 손병희는 강원도로 숨어들었다. 일본은 최시형을 추격하는데 멈추지를 않았다. 이노우에 카오루 일본공사는 1895년 1월 30일자로 조선의 중앙 관아에 보낸 공문을 통해, 최시형이 충주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으니, 동북지역의 지방관들이 방비하도록 명령을 하달하라고 지시하였다.(「최시형의 향동(向東)에 따른 방비 요청」, <주한일본공사관기록>6권)
이후 조선 정부는 동학혁명군 최고지도자인 최시형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강원도 홍천, 인제, 원주로 숨어들었다. 그는 1895년 7월에 강원도 인제군 최우범의 집에 있으면서, 손병희에게 "지성으로써 공부하여 후일을 준비하라"라고 당부하였다. '외세를 척결하는 일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후일에 잘 준비하여 1919년에 제2의 동학 혁명이며 항일 독립운동인 삼일혁명을 주도하였다.
▲ 최시형 선생이 관군에 의해 체포된 집 강원도 원주군 송골에 있는 원진여의 집에서 기거함 | |
ⓒ 박용규 |
▲ 최시형 선생 묘소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 | |
ⓒ 박용규 |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대상요건>에 의하면,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다.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나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항거하였고, 그 반대와 항거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최고지도자 최시형은 여기에 해당한다.
1907년 7월 11일 대한제국의 고종은 동학의 거두 최제우와 최시형의 죄명을 취소하였다. 최제우, 최시형에 대해 죄인 대장에서 지워주었다.(<고종실록>48권) 이로써 최제우와 최시형의 모든 활동은 신원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최시형은 항일 구국 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반일투쟁의 최고지도자로 활동한 최시형의 업적을 제대로 반영하여, 그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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