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입력2020.01.21. 오후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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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전봉준 장군... 정부,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오마이뉴스 박용규 기자]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인 대표 인물이 전봉준 장군이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전봉준의 얼굴이 나온다. 우리 국민들은 전봉준에 대해서 대체로 고부 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를 고쳐나간 인사로 알고 있다. 조선왕조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고 한 인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전봉준이 우리 역사 발전에 기여한 점은 항일투사로 맹활약을 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으로서 혁혁하게 활동한 인물이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봉준이 항일 구국 투쟁의 선봉장이었음을 수많은 연구 성과를 통해 입증하였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났다. 그 뒤 동학농민혁명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2019년 5월 11일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행사를 치렀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적용 대상자)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전봉준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을 반대하여,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에 맞서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사령관 전봉준(1855∼1895)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이었던 전봉준이 일본 제국의 일본군과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전봉준은 일본군과 어떻게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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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의 모습 전봉준 동상

ⓒ 박용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겁박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같은 해 7월 25일 일본 제국은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데에 나섰다.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이유는 척왜(斥倭)을 부르짖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고, 동시에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어 조선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에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지배되지 않으려면 초대받지 않고 들어온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거병한 것은 외세의 국권 침탈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는 구국투쟁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같은 해 8월 전라도 남원 땅에서 들었다. 당시 그는 전라도 지역을 순시하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폐정 개혁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1894년 10월 8일에 전라도 삼례에 도착하여 대도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군에게 다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통문에서 그는 "충의지사(忠義之士)는 같이 앞장서서 정의를 부르짖으라"고 호소하면서 "이 의거에 호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한 무도(無道)한 자"라고 질타하였다. 그러자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였다. 이후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충청도 은진, 논산, 공주에 이르며 동학농민군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봉준은 <전봉준 공초>에서, 2차 거병 이유를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고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전봉준을 심문할 때에는 일본 영사가 참가하였다.



심문자 : 다시 군대를 일으킨 연유는 무엇인가?

전봉준 : 일본이 개화라 일컬으며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림이 없고, 또 군대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가 저녁에 왕궁을 격파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선비와 인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로운 군대(의병)를 규합하여 일본과 싸워 이 사실을 일차로 따지고자 함이었다.



심문자 : 일본군의 대궐 침범을 어느 곳, 어느 때에 들었느냐?

전봉준 : 7월 사이에 남원 땅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심문자 : 재차 기포는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하였다는 연고로 다시 봉기하였다고 하니, 다시 봉기한 뒤에는 일본군에게 무슨 조치를 하려고 하였느냐?

전봉준 : 대궐을 침범한 연유를 따져 묻고자 함이었다.



심문자 : 그렇다면 일본군이며 외국인으로 경성에 거주하는 자를 모두 몰아내려고 했느냐?

전봉준 : 그렇지 않다. 외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군대를 거느리고 경성에 주둔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략하는가 하는 의심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의 최고지도자 최시형도 1894년 10월 16일 항일전에 나서라고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일제히 일어나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12일경에 손병희 통령이 동학농민군 5천 명을 이끌고 논산에 이르렀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이끌고 온 동학농민군 부대와 연합하였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형제의 우의를 맺어, 전봉준이 형이 되고, 손병희가 동생이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향해 나아갔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같은 해 11월 20일에서 11월 22일까지, 12월 4일에서 12월 7일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과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죽창과 창·칼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과 신식 기관총 등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동학농민군 학살의 전담 부대였던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미나미 고시로 소좌 휘하의 모리오 마사카즈(森尾雅一) 대위가 지휘한 제2중대가 12월 4일과 5일에 걸친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대량 학살하였다.



전봉준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일본군이 먼저 공주를 차지하였으니, 사태가 접전하지 아니할 수 없어,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사를 점고한즉 남은 자가 불과 3천여 명이요, 그 뒤에 또 2차 접전 후 점고한즉 군사가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패주하여 금구에 이르렀다." (<전봉준 공초>)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의 군사가 3천여 명으로 줄어들고, 급기야 남은 군사가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전사자가 많았음을 밝힌 증언이라고 하겠다.



"적국인 일본에 내 살 길을 구함은 본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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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티 고개에 있음

ⓒ 박용규



12월 8일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노성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경군과 영병에게 고시하고 인민에게 교시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금년 6월 개화 간당이 왜국과 손잡고 밤을 틈타 경복궁을 넘어와 임금을 핍박하고 국권을 제멋대로 하였다...... 살육을 좋아하고 인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어, 우리 동학 교도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멸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斥倭斥和)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할지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 동도창의소."



이렇게 전봉준은 관군에게 골육상전을 그만하고, 척왜의 기치에 동학농민군과 함께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자고 호소하였다.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12월 일본군과 금구의 원평 전투(12월 21일)와 태인 전투(12월 23일)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전봉준은 태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전봉준은 동지 3∼5명과 의론하여 각자 옷을 갈아입고 몰래 서울 한성으로 들어가 정탐하고자 하였다. 그는 12월 25일 입암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학살 현지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아카마쓰 고쿠호(赤松國封) 지대가 전봉준을 추적하고 있었다. 같은 달 26일에 전봉준은 백양사로 피신하였다. 상인 모습으로 바꾸고 혼자서 상경하려고 태인을 떠나 순창으로 들어갔다. 12월 28일 밤에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순창관아에 수감되어 있었다.



12월 30일 미나미 고시로는 아카마쓰 지대로부터 전봉준을 체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같은 달 31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순창에 도착하여 아카마쓰 지대와 합류하여 전봉준을 인계받아 부상을 치료하였다.



1895년 1월 1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자신에게 "동학당은 모조리 죽여 없애라"라고 훈령을 내린 인천병참사령관 이토 스케요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 조선 정부에 전봉준을 체포하였다는 전보를 보냈다. 미나미 고시로는 1월 2일 순창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본부가 있는 나주 초토영으로 전봉준을 이송시켰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대에 대한 지휘권·명령권을 가지고 있었고,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체포·관할권도 가졌다. 조선의 관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조선의 관아도 마찬가지였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체포된 전봉준에 대해 개입하려고 하자, 미나미 고시로는 "전봉준의 압송에 관한 것은 이미 우리 공사로부터 명령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의 참견을 받지 않는다"(<동학당 정토략기>)라고 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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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당 정토경력서>(1895) 표지 동학농민군 학살 집행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

ⓒ 박용규



나주 초토영에서 미나미 고시로는 1월 9일 동학농민군 포로에 대해 취조를 시작하면서, 주한 일본공사관에 전봉준 호송과 전봉준 부상 치료의 건을 보고하였다. 다음은 미나미 고시로가 전봉준을 취조한 공술서의 내용이다.



미나미 : 너희들이 거병한 대목적을 숨기지 말고 말해보라.

전봉준 : 7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가 왕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동지를 모아서 이를 쳐서 없애려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사회와 사상>, 1988. 9, 261쪽.)



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서울 압송 명령에 의하여, 전봉준은 1895년 1월 30일 나주를 출발하여 같은 해 2월 18일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영사관 순사청에 수감되었다. 들것에 실려와 일본공사관 앞뜰에 앉아 있는 전봉준에게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묻자, 전봉준이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이노우에 : 어찌해서 이 폭거를 일으켰는가?

전봉준 : 작년 6월(음력) 일본병이 경성에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함께 물리치려고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우리 동학당의 군, 그 무리들은 훈련이 없고 무기는 완구적인 것이다. 사람, 무기 모두 정예한 일본병에 비길 수 있다고는 본디 믿지 않았던 바, 그렇지만 임금이 굴욕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 죽음을 당하고서 끝낼 결심을 가지고 일어섰다. (위의 책, 256∼257쪽.)



전봉준에 대해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총 다섯 차례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가 1895년 3월 15일, 4월 1일, 4월 4일에 3차례 걸쳐 전봉준을 심문하였다. 조선 정부의 비자주성이 극렬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일본, 그 영사에게 전봉준을 심문하도록 방치한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될 때, 일본인들이 전봉준에게 접근하여,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을 받아 살 길을 구해 보라고 회유까지 하였다. 전봉준은 이렇게 말하여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본은 곧 나의 적국이다.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적국에 살 길을 구함은 본의가 아니라." (오지영, <동학사>(초고본))



법관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는 말을 듣고,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좋겠다. 어찌 컴컴한 적굴(賊窟) 속에서 몰래 죽이느냐."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4월 24일 새벽 2시에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전봉준은 항일 구국 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장본인이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일투쟁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한 전봉준의 업적을 제대로 반영하여, 그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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