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月刊 海印 2005 실상사 화림원 각묵 스님

月刊 海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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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2005년 12월 286호

전북 남원시 실상사, 일주문 대신에 절 대문 구실을 하고 있는 사천왕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들은 텅 비어 있다. 절과 너른 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봉우리, 소설도 입동도 되기 전, 아니 서리도 내리기 전에 눈 모자를 하얗게 뒤집어쓰곤 하는 저 봉우리, 경상과 호남의 경계도 산 이름 하나로 허물어버리고, 수다한 봉우리와 계곡과 개울을 품되, 첫 시작은 모두 하나임을 선언하고 마는 산, 평지 사찰인 이곳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실상사 큰절에 있는 화엄학림은 개혁불사 이후로 1995년에 개설된 조계종 최초의 전문교육기관이다. 승가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사람들에게만 수강 자격이 주어지는 곳, 두 해의 과정을 끝내면 교수 아사리(강사 자격증)가 주어지는 이곳을 졸업한 학인들은 지난해 8기에 이르기까지 일흔 명쯤 된다. 《중론》, 《유식》, 화엄사상사, 화엄 본경, 그리고 《화엄현담》 등을 공부하는 본 수업말고도, 초기 불교, 팔리어, 아비담마 불교, 한문 등의 특강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지는 이곳 학림은 한 해에 두 달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 주일에 나흘 수업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수업 중에 사제간의 의견 나누기에는 격의가 없다.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문들, 그러나 작금의 한국불교가 풀어야 할 ‘교육 부재’라는 문제점은, 문제 의식을 함께 촉발시켜 가면서 격렬한 공부 과정을 거쳐 배출되는 스님들이 강단에 서게 될 즈음에는 적잖은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화엄학림 강사 중 한 분인 각묵 스님은 확신한다.
현재 학림의 강사 스님은 넷, 그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화엄 본경 수업을 ‘의무적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본 《유식》을 강의하고 있는 각묵 스님은 화엄이 전공은 아니지만 수업이 ‘재미있다’. 인도에서 십 년 동안 유학하면서 그가 연찬해온 초기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데나, 상치되는 점을 짚어주면서, 또한 자신도 학인들과 ‘함께’ 배우기 때문이다. 각묵 스님이 큰절에서 천천한 걸음으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화림원을 처소로 삼은 것은 2003년 3월부터이다. 학인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함께 배우는 일의 즐거움이 없지 않지만 그가 금생에 해마치고 싶은 일, 그래서 ‘일의 순번’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당시에 쓰셨던 언어인 팔리어로 적힌 경·율·논 삼장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해 내는 일이다.
칠십년대 중반쯤에 출판물로써 그 징조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던 초기 불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대학 재학 시절 대불련과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던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은 미미한 것이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 안정된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 없어져버린 그로서는 선방의 좌복 위에 앉으려는 마음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모친을 사별한 그의 아린 마음에서 비롯된 삶에 관한 작지 않은 물음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대학 시절에 만난, 구척 키만큼 뿜어내는 기가 엄청났던 스님, 버릴 수 있는 것 다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대답한 그를 향해 벼락처럼 내린 할, 저놈 갖다 묻어버려라! 마조의 할로 백장의 귀가 사흘 동안 들리지 않았다더니, 사흘 동안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일을 몸소 겪으면서 그는 출가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7대 장손의 처지로 뜻을 세우기가 쉽지 않더니, 수련대회에서 사흘 용맹정진 끝에 천배 절을 하고 우물가에서 지쳐 쓰러졌다가, 눈을 뜬 순간에 홀연히 정리가 되었더라 했다.
《선문염송》 수준의 책까지 섭렵해버린 뒤이기도 했지만, 강원 과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방 선원에서 참구하는 세월은 7년, 나름대로 애썼던 시간들이었다. 새벽잠을 이기려고 오후는 불식하고, 주린 배를 물로 채우다 말고 조석으로 백팔배로 몸을 이기려던 시절, 뼈만 남은 그때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20kg쯤 몸무게가 늘어난 지금의 그를 못 알아 본다.
인도행도 ‘수좌식’으로 결정한 일이라며 그는 오늘 웃었다. 마지막 선방, 칠불암에서 결제중이었는데 한 달 보름이나 외국 망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외국행, 푸나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 인도로 떠난 것이 89년이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철학을 전공, 박사 과정을 마치는 동안에 팔리어와 프라크리트어를 익혔다. 인도의 고문헌에 관한 폭넓은 섭렵도 이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엎드려 절하면서 올린 기도는 ‘이생에서 팔리어 삼장을 완역할 수 있게 해주십사’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도로 끝나지 않고,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역경을 위한 방대한 자료 저장도 함께 병행했으니, 지금 그의 컴퓨터에는 경전 주석서만도 일백오십 권 정도, 그리고 20만 단어를 자신이 뽑아 담은, 사전 여덟 권 분량의 자료가 입력되어 있다. (그는 요즘도 국내에서 역경 일에 전념할 형편이 못 된다고 판단이 되면 이 자료가 담긴 노트북 하나만 가지고 외국으로 ‘피신’을 간다)
그가 산문 안팎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1년에 《금강경 역해》(부제: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 분석 및 주해)를 출간하고 난 뒤부터였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싣되, 그의 주관적 과목 나누기(이것도 경전 해석의 관점이 된다)와 함께, 구마라습의 의역과 현장의 직역을 일일이 대조시키면서 역해해 낸 그의 역작물은 경전 연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겨울, 이 책을 교재로 삼아, 그는 논주로서 사부대중 대상의 동안거 간경看經 결제를 이끌면서 논의를 심화시켰다. 참선이 아닌 간경식 결제 형식도 그러했거니와, 승속이 함께 결제에 동참하는 일도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었다. 40명의 스님들, 그리고 일천삼백 명쯤의 일반인이 참여, 한겨울 시린 지리산 자락을 후끈 달구었던 법석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무아’로서, 실체화될 어떤 것도 상정할 수 없다. ‘실체’란 없으며, 그저 인연의 조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는 곧 연기이다. 《금강경》이 설파하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다. 주인공도, 여래장, 불성, 진아, 참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불생불멸의 생명 자리가 따로 있다고 믿는 힌두의 믿음과 다를 것이 없다. ‘공空’을 꿰뚫어보는 것이 ‘반야’이며, 이는 허무가 아니라 ‘연기’인 것이다.”
그로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면서 겪어야 했던 지독한 충격 속에서도 접지 못한 간화선에 대한 애정이었다. 간화선이야말로 ‘무전제’의 수행이고, ‘무전제’는 바로 ‘무아’라는 초기 불교의 근본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그래서 최상승의 수행법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도그마이다. 간화선이 동북의 전통에 맞는, 팔정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수행 테크닉이듯, 비파사나 또한 구경 열반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니, 실은 자신에게는 그런 구분조차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의 관심은 부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말의 문제, 결국 뜻을 전하는 말의 문제였다. 그는 그 답을 ‘초기 불교’라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팔정도 가운데서도 수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념正念’을 이해함에 있어, 그는 ‘마음 챙김(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적고 있거니와, 한국불교 간화선이 화두를 들되, 면밀하고, 세밀하고, 정밀하고, 엄밀하고, 그리고 간절하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주객을 초월하고 있지는 않은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 자신도 역경을 하는 사람으로서 구마라습이나 현장에 대한 놀라움은 금할 수 없지만, 잘못 옮겨놓거나,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의도’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여긴다. 5세기에 구마라습이, 7세기에 현장이 정착시킨 한문은 현재의 이해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역 경전이란 결국 2차 자료일 뿐이다.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원전을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한역의 오류와, 그 오류를 답습한 우리의 역사까지 객관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작업은 1600년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중국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 자주 불교를 실현할 기회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다. 그는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역경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가 세운 원력의 내용인 바, 팔리어 삼장을 제대로 역출해 내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은 어떤 것일까. 언어학적 이해나 소양, 그리고 아비담마와 이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주석서를 섭렵한 뒤에 얻을 수 있는 경에 대한 안목 등을 꼽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역경의 소양과 깊은 이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를 지금 여기 내 삶에 적용시켜 해탈 열반을 실현하리라는 원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삼장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불사의 메시지는 바르게 읽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이어 말한다.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이 아닐까보냐.
그가 지도 법사로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은 그에게 아비담마의 의미를 다시금 깨우치게 한 소중한 도반인 대림 스님이 이끌고 있는 곳이다. (대림 스님은 남방 불교 부동의 준거, 번역하기 까다롭고 어렵기로 정평이 난 《청정도론》을 번역해 행원문화상 역경상을 받았다) 그가 사문의 몸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홍법과 포교의 뜻은 책으로뿐만이 아니라, 회원 수효가 이천 명이 넘는 곳, 월 회비로 후원금을 내는 회원 수도 적지 않다는 인터넷 까페(다음, 초기불전연구원)를 통하여 열정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초기 불교와 아비담마에 관한 한 다른 어느 사이트보다도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고 자부하는 곳이다.
그에게 한 해에 여섯 달은 다른 어떤 일과도 타협할 수 없는 역경 작업 시간이다. 한참 일에 매달릴 때는 열 시간쯤 사분정근 하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을 한다. 여섯 시간 잠을 자도 나머지 여덟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알고, 포행도 하고 그런다. 열 시간 작업, 눈에는 알 수 없는 흰 반점까지 생겼지만 뭐 괜찮겠죠, 그러면서 하하 웃는 그는 그간 《금강경 역해》를 비롯, 《아비담마 길라잡이》(공역),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대념처경과 그 주석서)를 세상에 내놓았고, 올해가 가기 전에 《디가 니까야》(장부)도 책으로 나오게 된다.
여름내 화림원 맑은 흙벽을 붙잡고 기어올라간 아기 담장이들, 이 늦가을 잎은 다 지고, 잎맥만 바닷가 새 발자국처럼 애잔히 남아 있다. 서쪽 하늘에 낮게 떠올랐던 개밥바라기가 큰절로 내려가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그를 반짝, 하고 맞아주었다. 별의 눈빛이 한결 서늘해졌다. 가을이 또 그렇게 지나가나보았다. 팔리어 삼장을 한글로 완역해 내는 것말고도, 주요 팔리어 주석서, 그리고 《아비담마》, 《중관》, <유식》 등을 비롯한 주요 산스크리트 불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초기 불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도 주요 고전도 번역해보고 싶어하는 각묵 스님, 바람맞이 언덕에서 눈부신 등불처럼 저를 켜들었던 은행나무 잎도 다 지고 만 줄을 알아챌 겨를이나 있으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