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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야 뭐
작성자 바보새 14-04-08 07:13 조회9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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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뭐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5월 8일, 어머니날 밤 9시 57분에 아내 황득순이 긴 병 끝에 아주 그 나라로 갔습니다.
그날 나는 기독교장로 전남노회 교사위원회 초청으로 강연을 하기로 되어있었으므로 새벽 5시에 집을 떠나 광주에 갔었습니다. 이미 여러 날째 생사선을 넘나들기를 몇 차례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생각하고 간 길이었지만, 그 시간이 또 그렇게 마련 된 줄은 몰랐습니다.
광주에 가닿으니 교사회 간부 여러분들이, 통지를 벌써 냈는데 그 통지서가 전달이 되지 않았다 해서,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청중을 모으노라고 바쁠 때에, 서울서 홍남순 변호사님 댁을 통해서, 속히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서서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오후 3시다 저녁 8시의 두 차례의 강연을 하고 밤 10시 40분차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두 차례의 강연을 다 하고,9시 반이 지나서 끝맺는 말을 하는 중에, “지금 이 순간 아마 내 아내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지도 모릅니다.” 하고, 총총히 떠나 침대차에 몸을 던져 한잠을 자고 서울역에 내려 집으로 달려가니, 문간에 “근조”의 초롱이 달려있었습니다. 언뜻 머리속에 나타나는 이 1930년 그때도 5월 9일 이른 아침 이불속에서 채 나오기 전 두드려 깨움을 받아 “남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용동으로 달려갔던 그림이었습니다.
들어가 병풍을 재친 후 덮은 수건을 벗기고 보니 고요히 자는 얼굴이요, 고통할 때는 악이라도 쓰는 듯 꽛꽛하던 몸이 어쩌면 보드럽기가 어린애 같았습니다. 수건을 덮고 나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아내는 누가 지어주었는지 모르나, 이름자대로 순(順)이었습니다. 그저 순종해 산 일생입니다. 열여섯의 소녀로 시집살이를 시작했고, 우리 집안 어른들이 본래 통히 말이 없는 분들이기도 하지만, 스물에 가까운 큰 가족에 밤낮 손님이 끊지 않는 집의 맏며느리로서 불평 한번 없이 섬김으로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내 손위 누님이 결혼하자마자 가정이 행복스럽지 못해, 남편과 함께 우리 집으로 들어와 칠, 팔남매를 한 솥에서 밥을 먹으며 길러냈었도, 그 부엌에서 언제 한번 큰소리 나본 일 없어서, 문중에서 칭찬거리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공산당 천지 되어 숙청당하고 맨손으로 쫓겨나게 될 때, 나는 도리어 당황했어도 그 사람은 까딱이 없었고,1947년 내가 38선 넘어 이리 온 후 한 동안 그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평생에 모르던 행상을 해서 가족을 연명시켰습니다. 그 후 아이들을 끌고 죽음의 선을 넘어 이리 온 것도 그의 용기로 된 것이요, 내가 경찰서, 감옥을 밤낮 드나들 때에 부족 없이 뒷바라지를 해준 것은 그의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순종, 봉사를 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 성실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를 치시지 않고 그를 치셨습니다. 물론 좋아서 구경을 하려 간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세 차례 세계를 돌고 다니는 동안 그는 자주 병으로 눕게 됐습니다. 이성구, 최태사, 박충서 세분 의사님이 치료비를 안 받으시기는 고사하고 보태주시면서까지 자진 늘 치료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 혼자서는 어떻게 감당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나중가서 그 병이 파킨슨병인 것이 판명되고, 그 원인이 신경성으로 되는 것이라 할 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치시기 위해 그를 치신 것” 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칠십이 지나서 정말 인생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의 마땅히 받아야하는 벌을 대 신 받은 것이요, 나의 생애의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희생이 된 것입니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를 내 믿음의 친구로 생각하지 못한 점입니다. 나는 아내의 선생노릇을 했던 간디를 못내 부러워하면서도 그렇게 못했습니다.
입관을 해놓고 아이들이 하는 회고담에서 나는 그들 사이에 어머니 별명이 “나야 뭐”인 것을 알았습니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입니다.
남기고 간 몸을 묻고 돌아와서 아이들이 기념으로 어머니 생전에 쓰던 물건을 나눠가지려 해서 장속을 들추어 보더니 글자그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새삼 듣고 나서 슬프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또 기뻤습니다.
이것을 씨알에게 내놓는 기념물로 합니다.
씨알의 소리 1978. 5월 73호
저작집; 9- 211
전집; 8-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