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6

간음 후 힘있는 ‘속죄론’ 개진 - 뉴시안

간음 후 힘있는 ‘속죄론’ 개진 - 뉴시안
<함석헌과 한국교회> 간음 후 힘있는 ‘속죄론’ 개진
 박신애 기자 승인 201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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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2

이 사건 이후 함석헌은 “죄는 참말로는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가를 누누이 강조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그의 속죄 과정을 살펴본다. 60년 동안 쌓아온 그의 빛나는 생애를 모래탑에 비유한 그는 이제 남은 30년 생애를 속죄과정으로 채우면서 다시 일어선다.
 
1960년 10월 9일에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18-25)에서 함석헌은 “아아,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라고 절규한다. 이 편지에서 일부를 발췌해보자.

“나는 지금 대한교련(大韓敎聯)에서 주최한 전국교육자대회에 나가서 시민으로서 격려사를 하라고 해서 말을 하고 왔소. 나는 끌려 나간 거요. 아니 나가야 할 내 처지인 줄 알면서도 나갔어요. 지난 18일 일이 터진 후 하루도 평안할 날 없어요.

일반 세상에서는 아직 모르지만 친구들은 내 잘못을 아니 데모를 한 거요. 그래 어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거요. 나도 그리 생각해요. 하지만 그리 아니 되는 점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왔지요. 외국행도 그래 생각한 거요.

글을 써라 말을 해라, 실속 모르는 사회는 자꾸 요구하지요. 매일 몇 사람 혹 청년 혹 원로들이 오지만 속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사회 형편으론 내가 뭐라거나 말해야 할 사정인 것도 알지만 이 이상 더 속임의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유(영모) 선생님, 또 여러 친구들도 다 내가 근신해야 할 것을 말씀들 하지요. 거래는 통 없지요. 참 연옥이에요. 여기다 비하면 이때까지의 풍파는 아무것도 아니요. 형은 순풍의 길이지. 부디 이 앞  배의 파선을 거부하시오.

오늘도 나갈 수 없는 건데 내 사정 모르는 사회는 꼭 나와야 한다고 막 끌어냈어요. 이것이 허위생활 하는 나의 받는 심판이에요. 그래 각오하고 나갔지요. 죽을 각오 하고. 내 마음 아무도 모를 거요. 나는 지금 향리에서 망나니 생활 하던 놈이 갈 곳 없어 돌격대에 지원병 나가는 심리예요. 그밖에는 나의 재생의 길 없어요. 내 죄를 나의 지는 십자가로 속(贖)해야지. 대속(代贖)이 뭐요, 자속(自贖)이지. 나는 죽어야 해요. 이 죽음이나마 이용해보라는 거요. 그래 나는 애써 호소했어요. 나를 봐라, 내 속이 썩은 사람임을 봐라. …사람이 필요하다고, 바른 말 하라고 나한테 오는데, 나 자체가 썩었으니! 아아,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 내가 이 나라 청년 망쳤어요!”
 
또 석진영 님에게 보낸 1965년 6월 2일자 편지(18-159)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편지 고맙게 읽었소. 지나간 일을 또 한 번 생각해보오. 지나간 것도 아니오. 지나가버릴 수가 없지. 무사(武士)의 얼굴에 난 상처가 일생을 두고 말을 하듯이. 문제는 살아났나 못 났나에 있지. 다 아물고 나으면 뼛속까지 났던 상처도 자랑일 수 있고, 열매를 못 맺었으면 곱던 꽃이 되려 부끄러움이지. 세상에서 그어놓은 금을 내가 깨뜨렸던 것이 잘못이지. 남의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 내 죄지.

나와 하나님과의 대결에는 다른 사람은 개입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때의 나의 심경은 <예언자>의 서문에 썼지요.

‘이젠 다 나았어요, 다 잊었어요,’ 나는 그런 소리를 하리만큼 한 성자도 아니고, 양심이 아주 없지도 않고, 영원한 고민을 하면서도 자라자는 마음이지. 가능한 한 속(贖)을 해보아야지."

 또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은 때에 함석헌이 해남에 있는 이준목 목사에게 보낸 편지(18-98)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그의 속죄과정의 하나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내 가슴에서는 지금까지도 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때문에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을 안 것도 많습니다. 씨알의 전체 속에 나를 발견하게 된 것도 탄탄대로식으로만 나갔다면 발견하지 못했을는지 모릅니다.

<씨알의 소리>는 나의 속죄과정의 하나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곡절이 참 많습니다. 다 됐다고 해서 손에 들어온 잡지를 받아들면 병신자식 낳아놓은 엄마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내 자식일까? 이렇게 낳자던 것이 내 마음일까? 찢기고 할퀴고 부러지고 잘리고, 화가 나서 못 살겠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지요.”

함석헌의 부인인 황득순 여사는 1978년 5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그 달 호에 “나야 뭐”(8-392)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사부곡(思婦曲)을 발표하는데, 거기에 “그는 그렇게 순종 봉사를 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성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치시지 않고 그를 치셨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건 후 18년이나 지났지만 간음의 상처는 부인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다. 그때까지 그의 속죄과정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그의 속죄론은 옳기는 하지마는 자신의 범법과 속죄의 체험이 빠진 것이었다. 그만큼 알맹이가 빠진 추상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체험이 있으니 정말로 힘 있게 자신의 속죄론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서 개진한 속죄론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자신의 고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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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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