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8

게셰 텐진 남카 중관 해석

 대자대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법에 대해 능통하신 역대 스승들과 특히 반야의 의미에 대해 설법하신 은혜로운 스승들께 절하여 귀의합니다. 중관에 대해 할 수 있을 만큼 해석하겠습니다. 

1. 삼전법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세 번의 법륜을 굴리셨다. 이를 삼전법륜이 라고 한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그 해에 사성제에 대해 설법하신 사성 제 법륜이고, 두 번째는 그 다음해에 굴리신 무상법륜, 세 번째는 바이샬리 지역 등에서 굴리신 선변법륜(분별법륜)이다. 

삼전법륜을 설함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불교의 사대학파가 생겨났다. 첫번째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유부와 경량부가 생겨났고, 두 번째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중관학파 가 생겼으며, 마지막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유식학파가 생겨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러한 설법을 모두 통칭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팔만대장 경을 핵심요약하면 반야경이라 할 수 있고, 이를 더 요약하면 반야심경이다. 그 중 에서도 핵심은 보리심과 공성, 이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 큰스님들 말씀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여 “위로는 보리를 구 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보리심의 마음이 다. 즉 중생을 돕고자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보리심은 뿌리는 바 로 자비심이다. 둘째, 공성에 대한 것은 입중론을 통해서 말하겠다.

2. 입중론에 대해

반야경의 직접적 주제는 공성이며, 간접적 주제는 도의 체계이다. 그 중 공함의 체 계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용수논사께서 해석하셨다. 용수논사께서는 중관이취육론을 저술함으로써 심오한 공성에 대해 상세하게 밝히셨다.

그 중 하나인 『중론』은 중도의 심오한 의미를 논리로써 확립한 논서이다. 이 논서 에서는 실유론자들이 증익한 ‘아’와 ‘법’의 자성을 부정하여 유무의 두 가지 극단을 제거한 실상을 확립했다. 

『중론』의 주석인 『입중론』은 인도어로 ‘마드야마까와따라(Madhyamakāvatāra)’, 티벳어로는 ‘우말라죽빠’라고 하며, 그의 의미는 ‘『중론中論』에 들어간다(入)’라는 것 이다. 

사실 『중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월칭논사께서는 중론의 의미 를 중점적으로 해석한 『입중론』과 그의 게송을 중점적으로 해석하신 『명구론』을 저 술하여, 용수논사의 의도를 자립논증학파와 공통되지 않으며 유식학파와도 차별화 된 귀류논증학파의 방식으로 풀어내셨다. 

월칭논사께서 쓰신 중론의 주석서를 『입중론』이라고 하는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 다. 첫째는 심오한 공성의 의미를 설하고, 둘째는 광대한 도의 체계를 설하기 때문 이다.

첫째, 『입중론』이 심오한 공성을 설함으로써 『중론』에 들어간다고 하는 방식은, 유 식학파와 달리 외경外境과 식識 둘 모두 언설로 성립한다고 주장하며, 자립논증학파 와 달리 자성自性으로 성립하는 것이 언설로도 존재하지 않음을 밝힘으로써 『중론』 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둘째, 『입중론』이 광대한 도의 체계을 설함으로써 『중론』에 들어간다고 하는 방식 은, 광대한 도道의 차제를 기술함으로써 『중론』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중론』 자체 에서는 광대한 도의 차제를 설하지 않았지만, 『입중론』은 용수 논사의 또 다른 논 서인 『보만론』에 나타난 가르침으로 보완하여 범부지에서 무학도無學道까지의 수행 체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성불하기 위해 두 가지 자량이 필요함 입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세속과 승의의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백조 왕은 많은 백조들을 앞서 가서 선행의 바람의 힘으로써 승자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 ) 육지보살六地菩薩인 백조 왕은 광대한 도의 체계와 심오한 도의 체계, 즉 이 제二諦의 도道인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오랫동안 쌓아온 자량이라는 ‘바람 의 힘’을 받아 ‘승자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 

일체지의 경지를 얻길 원한다면 육지보살이 행하는 것을 배워서 방편인 보리 심과 지혜인 공성에 대한 인식, 이 두 가지 날개로써 정진해야 한다. 지혜와 방편이 부족하여 단편적인 도를 수습한다면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육십송여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선근으로 모든 중생이 복덕과 지혜자량을 쌓아

복덕과 지혜자량으로 생긴 색신과 법신을 얻게 하소서.2) 

보만론에서는

왕이여, 붓다들의 색신은 공덕자량에서 생긴 것이며 법신은 지혜자량에서 생긴 것이네.3)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자량은 부처를 얻는 원인이니 요약하면, 이러한 공덕과 지혜에 항상 의지하소서.4)

라고 설하였다.

위 게송의 의미처럼 부처의 색신과 법신을 얻기 위해서는 두 자량을 함께 닦 으며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인 법신과 색신 역시 각각 단편單片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인인 방편과 지혜를 함께 닦지 않으면 원인이 분리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또한 색신과 법신의 쌍수雙修를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과에 색신과 법신 두 가지가 있으며, 원인에 지혜와 방편 두 가지가 있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의 대상인 두 가지 진리가 있어야 한다. 

대승보요의론에서

보살은 능숙한 방편에서 벗어난 심오한 법성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방편과 지혜가 쌍수하는 것이 보살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2) 육십송여리론, 61게송.

3) 보만론 3장 13게송. 4) 보만론 3장 14게송.

라고 설하였다. 

4.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입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무아無我는 중생들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법法과 인人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해졌다.5)

사백론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소위 ‘아我’라고 하는 것은, ‘타에 의존하지 않는 사물들의 성품’이다. 그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이다. 이것을 법法과 인人의 구분으로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법무아와 인무아이다.6)

입중론석에서는 유신견은 아我와 아소我所의 상相을 가진 염오혜染汚慧이다.7) 

라고 하였다.

상기 인용문에서는 부정대상인 아가 무엇인지, 이에 대해 두 가지로 구별하는 방식, 이로 인해 두 가지 무아를 분류하는 방식에 대한 귀류논증학파의 주장이 다른 학파들과 다르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월칭보살께서 입중론과 입중론석 등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여러 경經과 용수보살의 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세존의 위신력으로 장로 사리불이 관자재보살 마하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선남자 가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관자재보살 마하살이 장로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어떤 선남자와 

 

5) 입중론 6지 149게송. 

6) 사백론석, 중관부中觀部,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1733. ba, 190쪽. 3줄. 7) 입중론석, 중관부中觀部,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ai, 292쪽, na, 7줄.

선여인 누구든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를 원하는 자는 이와 같이 명확히 알아야 하느니라.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보아야 한다. 

라고 설하였다. 

삼매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대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그와 같이 적용해야 한다. ) 

성대집경聖大集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아我를 어떻게 보는가 그대로 일체중생들을 보아야 하고 일체중생들을 보는 그대로 모든 법을 알아야 한다. ) 

보만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아는 지地가 아니고 수水가 아니며 화火가 아니고 풍風이 아니며 허공(空)이 아니며 식識이 아니니, 모두가 아니라면 그 외에 무엇을 자아라 하겠는가? ) 

자아는 육계六界의 취합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각각의 계 또한 

취합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다. ) 

 

앞 게송의 “자아는”부터 “진실한 것이 아니다”까지는 자아에 대한 아를 부정 하기 때문에 아공을 가리키며, 나머지의 게송은 오온에 대한 아를 부정하기 때 문에 법공을 가리킨다.

자아는 자신이 이름 붙이는 대상인 사대四大, 허공空, 식識 등 육계六界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 모두가 아니라면’이라는 것은 그러한 계界의 취합이 자 아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육계에 의존하여 가설되기 때문에 진실하 지 않다는 것이 인무아이다. 또한 자아가 오온의 각각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취합도 아니며, 또한 각각의 일부와 그것의 취합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공의 의미이다.

뒤 게송의 ‘그와 같이’부터 ‘아니다’까지는 자아가 공한 것처럼 오온 또한 각각 의 부분과 부분의 취합에 가설되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것이 법 무아이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성으로 성립된 자체가 아我이며, 이것이 자아에 성립하 는 것이 인아人我이며, 오온에 성립하는 것이 법아法我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아가 자성으로 공한 것이 인무아이고, 오온이 자성으로 공한 것이 법무아이다.

귀류논증학파는 두 아가 요점이 같다고 보기 때문에 부정대상의 아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것을 분류한 측면에서 두 가지 무아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

다. 공함의 토대인 논제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것의 측면에서 두 아로 구별하는 점이 유식과 자립논증학파와도 다르다.

자아라고 이름을 붙이는 대상인 육계도 자아가 아니고, 오온도 자아가 아니라 면, ‘나’는 없는 것인가? 나는 고통과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밥을 먹는 등 행동을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 방식은 무엇인 가?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가설할 뿐이다. 

자아와 오온이 공한 것과 같이 일체제법 또한 그와 같다고 앞에서 말한 삼매 왕경에서 설하였다. 제법이 자성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 제법의 궁극적 실상 이며, 제법의 법성이며, 승의제이기도 하다. 자성으로 성립되지 않은 방식은 어떤 법이든 이름만으로 가설하여 존재할 뿐이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설 된 의미와 대상의 각 부분에서 찾으면 발견되는 것이 없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지혜의 등불을 참고해야 한다.

5. 예시로써 공성을 설명 입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것(마차)이 승의나 세간으로 7가지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지만 분석 없이 오직 세속에만 알려진 것과 같이 여기서 자신의 가지를 의존하여 가립한 것이다.12)

입중론에서는 

마차의 부분들의 취합이 마차가 아니며 

마차와 아我는 같으니.13) 경에서 아는 오온에 의존한다고 말씀하시니 그러므로 오온의 취합은 자아가 아니네.14) 

예를 들어 마차는 마차의 바퀴 등 부분의 취합에 가설할 뿐, 마차의 바퀴 등 각각의 부분과 그것들의 결합, 그의 형태나 색깔 등은 마차가 아니기 때문에 마차는 그 부분 가운데서 찾으면 발견되는 것이 없다. 

또한 염주는 108개의 염주 알로 구성되어 있지만, 염주의 각각의 부분들과 부 분의 조합, 그것의 모양, 색깔 등 어느 것도 염주라 할 수 없으며, 염주 또한 그 부분들이 아니다. 108개의 알로 구성되며, 그 염주에서 알을 하나씩 빼내면 염주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즉 염주는 가립된 부분의 측면에서 발견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염주는 많은 부분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없이 존재하 는 방식 또한 없으며, 이 부분들로 인해 ‘염주’라고 가설될 뿐이다. 

만일 염주가 자신의 부분의 측면에서 성립되거나 염주의 부분 가운데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염주가 자성으로 성립되며, 자신의 측면에서 성립되고, 실제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은 자신의 부분에 의존하여 가립될 뿐

 

12) 입중론 6지, 158게송.

13) 입중론, 6지, 135게송.

14) 오온의결합을인정하는그때, 마차의바퀴등마차의부분들의모임이마차가되는허물이생긴다. 왜냐하면 마차와아는자신의부분의결합에가립되는것이같기때문이다. 

이며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은 없고, 가립된 토대의 부분 가운데 서 찾아도 발견되는 것이 없다. 

6. 참나를 찾는 방식

그와 같이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가설될 뿐이며 오온에서 ‘나’가 성립되는 것 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오온의 측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 역시 이와 같다. ‘나’는 온 등에 가설하지만 오온 가운데 색色도 ‘나’가 아니고 수受도 ‘나’가 아니며 상想, 행行, 식識도 마찬가지로 ‘나’ 아니다. 오온의 다 른 본질이 ‘나’의 사례가 될 수 없다.

홍길동의 오온과 그 부분의 조합을 홍길동이라고 가립하지만, 이 홍길동은 가 립된 토대 가운데 찾으려 하면 그 부분의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 없다. 그러 므로 홍길동은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가립 될 뿐이다.

자아가 오온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처럼 오온자체도 각각의 부분에 의지하 기 때문에 공하다. 이와 같이 일체법들이 각각 자신의 부분으로 인해 가립될 뿐이며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유분도 그의 부분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립된 토대의 부분 가운 데 찾으려 해도 발견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법성 또한 자신의 부분에 의존하여 가립되기 때문에 승의로 존재하지 않는가? 또는 가립된 의미를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없는가? 이 또한 그렇다고 주장한다. 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가 말하길 “천신들이여, 열반 또한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면 다른 법들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신들이 말하길 “성자 수보리시여, 열반 또한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는가?” 수보리가 말하길 “천신들이여, 나는 만일 열반보다 더 수승한 법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 역시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한다.” 

귀류논증학파는 식과 그의 대상 둘은 분석한 끝에 발견되는 것이 없다는 점에 서 같고, 분석한 끝에 발견되는 것이 없지만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

다. 또한 일체법은 명칭으로 가설하여 정립하는 것만으로 존재하며, 마음으로 가설해서 존재하는 것을 건립한 정도에 허물이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귀류논증학파의 특별한 특징은 아와 아소의 법들이 자신의 측면에서 성립되지 않고 명칭으로 가립될 뿐이지만 행위의 체계는 매우 타당하다. 왜냐 하면 일체법은 의존하여 가립된 연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월칭 논사를 비롯한 용수논사의 다섯 부자의 의도이다.

7. 유·무의 두 가지 ‘아’

그러므로 많은 경과 논서에서 ‘아’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야 한다. 언설로 존재하는 ‘아’와 언설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다. 전자의 ‘아’ 는 윤회와 열반의 토대가 된 ‘아’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가 없으면 업과業果가 소비되어 정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내가 고통을 겪으면 이것이 내가 전에 지었던 업의 결과이며, 내가 행복을 겪 으면 이것이 내가 전에 지었던 선업의 결과이다. 선악의 업을 짓는 자인 나와 결과인 고락을 경험한 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언설로 ‘나’와 ‘너’라고 분별하는 마음은 언제나 생기고, ‘내가 고통을 원 하지 않고 행복을 원하는 마음’ 역시 저절로 생긴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 하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중생들 마음속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구생俱生이다. 이러한 행복을 원하는 자, 고통을 경험하는 자는 존재해야 한다. 고통 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탈을 원하 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업을 짓는 자, 과보를 경험하는 자, 윤회하는 자, 해탈에 다가가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교의 사대학파 모두가 인정하는 사 실이다. 

후자의 ‘아’는 인아의 ‘아’와 법아의 ‘아’이자 공성 또는 무아를 확립할 때 부 정해야 함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하였고, 아 래에서도 다시 설명할 것이다. 

8. 상견과 단견

경론에서 공성을 중관이라 표현한다. 중관의 의미는 상견과 단견 두 가지를 여 읨을 의미한다. 이 또한 제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확립할 때 자성으로 공하다는 것으로 상견을 제거하고, 연기이므로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이로써 단견을 제거한다. 

예를 들면 걸음을 잘못 디디면 떨어져서 사고가 생기는 곳을 절벽의 끝이라고 하며, 절벽의 양쪽 끝에서 벗어난 안쪽 가운데가 중간이라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이 여기서도 어떤 것을 취하면 악견의 절벽에 떨어져 파멸되는 곳을 극단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가 있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첫째, 외도들이 주, 시바신, 하느님 등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 등은 거친 상견 이다. 자립논증학파 이하의 학파들이 ‘제법이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과, 실유론자들이 ‘제법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들은 미세한 상견이다. 

중론에서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하는 한 이것은 비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15) 라고 설하였고, 명구론에서는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성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비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성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항상한 것(상견)으로 보게 될 것이다.16)

라고 설하였다. 

둘째, 외도들이 업과 과보, 삼보 등이 없다고 인식하거나, 사성제와 전생·후생 이 없다고 인식하거나, 해탈과 일체지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 등은 거친 단견이 다. 그와 같이 자립논증학파 이하의 학파들이 ‘제법이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 등은 미세한 단견이다. 이러한 견 해들을 가진 자를 단견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15) 중론 15품, 11게송.

16) 명구론 15장 243 페이지 5줄, 바라나시티벳불교대학, 2009. 

중론에서 

전에 생겨난 것이 현재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으로 단견에 빠지게 될 것이다.17) 라고 설하였다. 명구론에서는 

왜 사물과 비사물을 보는 것이 있으면 상과 단을 보는 것인가?18)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비존재함이 불가능하기에 상견이다. 전에 생긴 것이 현재 없다는 것, 이것으로 단견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성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상견이 될 것이다. 예전에 머물던 시점에 사물의 자성을 인정하고, 현재 그것이 멸하기에 없다고 인정하면 단견이 되는 것이다.19) 라고 하였다. 또한 명구론에서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즉 모든 것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때는 이것이 전도된 분별이다.20) 

라고 말하였다. 앞의 말씀은 일체법이 공하다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없거나, 있 지 않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전도된 견해라 설하는 것이다.

유와 유변, 무와 무변을 구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악도의 고통이 있다고 보면 상견에 빠지는 것이 아니며, 불지에 허물이 없다고 보면 단견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있다는 것이 상견이 아니며, 없다는 것도 단견이 아님을 알 아야 한다. 

이러한 구별을 하지 못해서 있다고 인식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인식하면 단견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 사견으로 인해 아무것도 작의하지 않는 것이 공 성을 수습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겼다. 

부정대상 또한 아무 때나 파악하여 그것을 부정해서 수습할 때 아무거나 부정 하면 아집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데다가 상견·단견에 빠지는 허물이 생긴

 

17) 중론 15품 11게송. 

18) 중론을인용함.

19) 명구론 15장, 242쪽, 20줄, 바라나시티벳불교대학책, 2009. 20) 명구론 15품.

다. 

요약하면, 앞에서 부정대상을 파악할 때 설한 공성의 부정대상이 무엇인지 먼 저 잘 이해하고, 그 다음 공성을 수습할 때도 그 부정대상을 부정한 자체 그것 을 수습해야 한다. 그러면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상 견과 단견을 잘 파악하면 이러한 착란이 생길 이유가 없다.

9. 두 가지 장애

보통 장애라는 것은 어떤 법을 증득하거나 그 상황을 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장애라고 한다. 어떠한 대상을 보는 것을 방해하여 그것의 실상을 여실 하게 보는 식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Madhyāntavibhāga, dbus mtha' rnam 'byed)에 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번뇌의 장애와 소지의 장애를 말한다. 이것이 모든 장애이다. 그것을 멸하면 해탈할 것이다.21)

라고 말씀하신 대로 장애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뇌장과 소지장이다. 장애를 둘로 분류하는 것은 얻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이 해탈과 일체지 두 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장애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로 해탈에 장 애가 되는 것이 번뇌장의 정의이고, 주로 성불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소지 장의 정의이다. 또한 식 하나가 이제를 동시에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소지 장의 정의이다. 수다원 등 성문·독각의 학인들이 공성을 수습하는 것이 해탈을 위한 것이며 그의 방편은 출리심이다. 보살들이 공성을 수습하는 것이 성불하 기 위해서이며 그의 방편은 보리심이다. 요약하면 공성을 수습하는 것이 성문· 독각의 해탈과 성불 3가지의 공통된 원인이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지혜 의 등불을 참고해야 한다.

수다원 등 성문·독각 학인들이 공성을 수습함으로써 번뇌를 대치하여 해탈로 가고, 보살들은 공성을 수습함으로써 소지장을 대치하여 깨달음에 간다. 

 

21) 중변분별론, 유식부,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42쪽, na, 2줄.

10. 회향

불법의 핵심적 내용인 보리심과 특히 공성에 대해 스승의 은혜로 조금이나마 해석한 것으로써 관심을 가지는 불자님들께 이해를 주고 이를 통해 생기는 공 덕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 지구상 곳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생명과 이 를 돕기 위해 고생하시는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하루 빨리 고통과 고행에서 벗 어나고 지구가 행복과 평화의 원천이 되며, 대한민국의 이 땅에 부처님의 위대 한 가르침이 성장하고 지속되기에 회향합니다. 이번 불교박람회를 준비하신 모 든 분들 인연으로 이 글을 쓰게 되니 관계된 모든 분들께서 세세생생 부처님 의 가르침을 받아 성불의 길을 가기를 기원합니다.   

2020국제불교박람회 - 불교수행프로그램을 위해 입중론의 해석을 삼학사에서 마무리함 

게셰 텐진 남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