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
최근 수정 시각:
분류
불|སངས་རྒྱས་ 석가모니불과 날란다 17 논사(論師)[1] | ||
법|ཆོས་ 티베트식 불교 경전 뻬차(dpe cha) | ||
승|དགེ་འདུན་ 묀람(smon lam)[2]에 참가한 티베트 불교 승려들 | ||
규모 | 약 1800만 ~ 2000만 명[3] | |
분류 | 대승 불교 (Mahayana Buddhism) 금강승 불교 (Vajrayana Buddhism) | |
성립 | A.D. 7세기 송첸감포 왕 재위 시 | |
분포 | ||
사상 | 중관(귀류논증), 후기 밀교 | |
종파 |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 |
명칭 | 한국어 | 티베트 불교 |
영어 | Tibetan Buddhism |
1. 개요2. 명칭: 라마교?3. 역사: 인도 대승 불교의 도입4. 현교5. 밀교6. 수행 체계
6.1. 개요6.2. 연원6.3. 특징6.4. 스승의 중요성6.5. 귀의6.6. 마음 동기6.7. 삼사도(三士道)6.8. 샤마타와 위빠샤나6.9. 소(小) 보리도차제6.10. 관련 문헌
7. 강원의 교육과정8. 종파9. 환생자(뚤꾸) 제도9.1. 환생자(뚤꾸)의 정의9.2. 환생자 제도의 토대9.3. 환생자 선정과 교육9.4. 환생의 불교적 원리와 관련 사례9.5. 환생과 심신문제(Mind-body problem)9.6. 환생자 제도의 위기9.7. 환생자에 관한 오해와 스승의 선택 문제
10. 한국 불교와의 교류11. 지역별 보급12. 기타티베트 라싸(Lhasa)에 위치한 포탈라궁(Potala Palace) |
허공계가 남아 있는 한, 중생이 머무는 한,
저 또한 여기 머물러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게 하소서.《입보살행론》〈회향품〉
여래(如來, tathāgata)는 오온(五蘊)이 아니며
오온과 분리되어 존재하지도 않고
여래에 오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오온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여래가 오온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니
여래는 누구인가?《중론》〈관여래품〉[4]
1. 개요[편집]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불교의 한 종파. 주된 분포 지역은 중국(중국령 티베트 자치구 포함)[5], 부탄, 몽골(중국령 내몽골 자치구 포함), 러시아의 몇몇 공화국(칼미크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투바 공화국) 등이며, 믿는 지역이 가장 넓은 편인 불교 종파이다. 티베트 불교를 밀교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티베트 불교는 대승의 현교와 밀교를 모두 포괄하므로 대승 불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현대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 뗀진 갸초(Tenzin Gyatso) |
2. 명칭: 라마교?[편집]
과거 '라마교'라고 통칭되었고 현재에도 간간히 그렇게 불리나 엄밀히 말해 부정확하고 비하적인 표현이다. 라마교라는 것 자체가 라마를 섬긴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밀교의 영향이 강한 티베트 불교의 관습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주며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스승(라마)을 붓다와 하나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통칭되었던 것이다.
대승 현교(顯敎)에서도 스승을 붓다의 화신, 혹은 붓다 그 자체로 보는 견해가 있다.《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라고 하였으며 《대고경(大鼓經, Mahabheriharaka-sutra)》[6]에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하자 석가모니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닝마빠의 고승 빼뚤(Dza Patrul) 린뽀체의 설명처럼 현교의 견해에서도 스승은 불보(佛寶)에 해당하며 붓다 그 자체인 스승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스승의 권속과 제자, 도반들은 승보(僧寶)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밀교(密敎)에서 스승의 몸(身)은 승(僧), 스승의 말씀(口)은 법(法), 스승의 마음(意)은 불(佛)로써 스승은 곧 삼보의 총합이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 스승을 중시하는 경향은 현밀(顯密)이 발달한 인도 대승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승과 삼보께 귀의하는 인도 날란다 사원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 티베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칫 라마교라는 단어가 인도 불교와 티베트 불교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서양[7] 및 한국 학계에서도 라마교 혹은 라마 불교라는 용어 대신 티베트 불교로 용어를 고치고 있다. #
대승 현교(顯敎)에서도 스승을 붓다의 화신, 혹은 붓다 그 자체로 보는 견해가 있다.《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라고 하였으며 《대고경(大鼓經, Mahabheriharaka-sutra)》[6]에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하자 석가모니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닝마빠의 고승 빼뚤(Dza Patrul) 린뽀체의 설명처럼 현교의 견해에서도 스승은 불보(佛寶)에 해당하며 붓다 그 자체인 스승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스승의 권속과 제자, 도반들은 승보(僧寶)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밀교(密敎)에서 스승의 몸(身)은 승(僧), 스승의 말씀(口)은 법(法), 스승의 마음(意)은 불(佛)로써 스승은 곧 삼보의 총합이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 스승을 중시하는 경향은 현밀(顯密)이 발달한 인도 대승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승과 삼보께 귀의하는 인도 날란다 사원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 티베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칫 라마교라는 단어가 인도 불교와 티베트 불교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서양[7] 및 한국 학계에서도 라마교 혹은 라마 불교라는 용어 대신 티베트 불교로 용어를 고치고 있다. #
3. 역사: 인도 대승 불교의 도입[편집]
일본 티베트 대표부 사무소의 게쉬 소남 겔젠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티베트에 불교가 소개된 것은 3세기경 28대 하토토리넨첸(lha tho tho ri gnyan btsan) 왕 때이다. 토착 전설에 따르면 왕은 도대시마똑 육자진언과 금으로 된 탑을 선물 받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밀스럽게 왕궁에 모셔 공양 올렸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기록은 7세기 송첸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05-650)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8세기 티송데첸 (Khri srong lde btsan) 왕 (755–794)이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타락쉬타(Śāntarakṣita)와 티베트에서 '제 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인도로부터 초빙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벳에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다.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티벳에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 티벳에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양자의 수용 여부를 두고 여러 이견이 있었다. 티송데첸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8]의 승려인 화상[9] 마하연(摩訶衍)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가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사원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까말라쉴라가 승리하면서 인도불교가 티벳에서 주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10]
티베트는 인도와 히말라야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11] 하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또한 티벳 문자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역경할 목적으로 창제되었고, 티베트어역 경전은 충실한 직역이라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왕가의 후원 하에 대대적으로 역경을 한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 아비달마, 《현관장엄론》계열의 바라밀 전통, 중관과 유식의 제 논서, 불교논리학(인명학), 밀교 등 인도 대승불교의 거의 모든 전통들을 받아들여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현교, 대승밀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교학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티샤[12] |
또한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인도를 오가는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 예컨대 린첸상포(Rin chen bzang po) (958-1055)와 마르빠(Mar pa chos kyi blo gros) (1012-1097)와 같이 구법을 위해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와 불교 문헌을 수집하고 인도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반대로 인도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의 확장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넘어온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 (982-1054) 같은 인도인 스승들도 있었다.
13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인도로 진출하자 큰 변화가 있었다. 무슬림은 이교도인 불교와 힌두교를 박해하였는데, 힌두교와 달리 출가 승단과 재가 신도의 구분이 명확했던 불교는 승원이 파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쇠멸한다.[13] 인도 각지에 있던 불교 승가 공동체는 티베트, 네팔, 남인도로 흩어졌다. 이 때 승려 상당수가 경전을 가지고 티베트로 피신하면서 위끄라마쉴라 사원에 있던 전적(典籍)이 티베트로 옮겨져《티베트 대장경》의 기원이 된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의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티베트 불교도들 스스로도 인도 최대 불교대학인 날란다(Nālandā)사원과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의 학통(學統)과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한다.
다큐 《Indian Roots of Tibetan Buddhism》 |
4. 현교[편집]
4.1. 개요[편집]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총체(總體)인 문수보살[14] |
현교(顯敎)는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이란 뜻으로 언어 문자상으로 설시된 가르침이며 일반적인 소승과 대승 가르침을 뜻한다. 밀교(密敎)는 '은밀히 전수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다른 말로 금강승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바른 수행과 실천을 위해 먼저 바른 견해가 세워져야 함을 강조하고, 성급하게 수행법만을 익히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을 '마음을 바꾸는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교학 역시 수행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학과 수행을 하나로 보고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를 고루 강조하는 것이 날란다 대학의 전승을 이은 티베트 불교의 특징이다. 박은정, 《티베트 불교 힘의 원천, 승가교육제도》
경전 못지 않게 논서를 중시하는 논장(論藏) 위주 불교라는 특징도 있다. 중국 불교가 특정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종파불교인데 비해, 티베트 불교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단 논장을 주로 학습한다. 경전이 형성된 지 이미 수백 년 이상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경장 만으로는 본래 뜻을 알 수 없으며, 보살 선지식들이 경장을 해설한 논장에 의지하여야 경장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 논장을 주로 학습하는 이유이다. 또한 '쌉쩨(과목科目, sa bcad)'라고 하는 목차를 세세하게 달아 경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티베트 불교의 불법(佛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대승열반경》의 사의법(四依法)을 따른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라.《대승열반경》 제6권 ‘사의법(四依法)’
권오민 교수의 《티베트에서의 불교 철학 입문》에서 설명하였듯이 여기서 요의경(nītārtha-sūtra) 이란 경에서 설한 그대로의 뜻(yathārutārtha:如說義)이 바로 경의 뜻인 경을, 불요의경(neyārtha-sūtra)이란 경에서 설한 바와는 다른 별도의 뜻(abhiprāya: 別意趣, 密意)을 갖는 경을 말한다. 요의경과 불요의경의 구분은 불교 학파마다 다르다. 티베트 불교에서 주류를 이루는 귀류논증중관학파는 《해심밀경》의 3시(時)법륜 중 첫번째 초전법륜과 제3법륜은 공성(空性)에 대해 설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불요의로 판정하고 제2 무상(無相)법륜을 요의경으로 삼는다.
19세기 닝마빠의 대학승 미팜(Mipham) 린포체는 《지혜의 검(The Sword of Wisdom)》에서 사의법(四依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19세기 닝마빠의 대학승 미팜(Mipham) 린포체는 《지혜의 검(The Sword of Wisdom)》에서 사의법(四依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4.2. 교학과 수행의 일치[편집]
문을식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의 《요가 상캬 철학의 이해》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philiosophy)은 주로 논리적, 사변적, 분석적 방법을 통해 지혜(sophia)를 얻지만 인도의 철학(darśana)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지혜(jñāna, prajñā)를 얻는다.
- 듣고 배워서 얻어진 지혜(śruta-prajñā):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검증되고 실험되어 온 옛 성현(ṛṣi)들의 경험과 탐구 결과를 듣고 배우는 방법(聞, śruta, śramaṇa) 이다. 이것은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노력이 포함되는 활동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문혜(聞慧, śruta-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경전이나 논서들의 텍스트를 이해, 해석하고 현대언어로 번역하고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방법인 정언량(正言量, śabda-pramāṇa)이 있다. 단, 디그나가(Dignaga)는 정언량 혹은 성언량(聖言量) 또한 비량(比量)의 한 종류로 보고, 인식의 근원은 비량과 현량(現量) 뿐이라는 이량설(二量說)을 주장하였으며 티베트 불교에서도 이를 따른다. 성언량을 비량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곧 성현의 말일지라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경우에만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anumāna-prajñā): 바깥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것과 스스로의 경험을 자료로 하여 그것을 논리적, 합리적 기준(yukti, anumāna)에 맞추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견해와 주장과 견주어 토론하고 논쟁하며, 더 나아가 그런 자료들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지적 공유물이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화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를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수혜 그리고 스스로의 지적 경험을 자료로 하여 의심하고 비판하고 토론하고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논리적 방법인 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이다.
-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bhāvana-prajñā, samādhi-prajñā): 마지막으로 문혜와 사혜로부터 얻어진 언어적, 개념적 관념적 지혜를 체험적이고 직접적이며 직관적 지혜로 변환시키는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를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 또는 삼매의 지혜(三昧慧, samādhi-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사혜에 기초하여 요가행법을 실천하는 것(現量, yogī praktiasa, sākṣātkāra)이 있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직접적 지각(知覺)인 현량(現量) 중에서도 유가사의 선정(禪定)상태에서 대상을 지각하는 유가현량(瑜伽現量)에 해당한다.
안성두 서울대 교수는 《불교의 이해》에서 겔룩빠의 창시자인 쫑까빠의 견해에 의거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聞) 사유(思)하는 교학과 수행(修)의 불가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쫑까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을 상호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보다 우선적인 과정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쫑까빠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聽聞)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
또한 쫑까빠는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직접적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다.
4.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편집]
티베트 불교는 비판적 분석과 판단을 중시한다. 권오민 경상대 교수가 《티베트에서의 불교 철학 입문》등에서 언급하였듯이 불교의 믿음(信, śradha, 또는 勝解, adhimukti)은 확신이며, 이는 우선적으로 비판적 분석/판단에 의한 것이다. 문사수 중 사유의 과정에 해당하는 비판적 분석 혹은 탐구 고찰을 사택(tarka, 혹은 覺觀), 간택(pravicaya, 혹은 思惟觀察)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말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금(金)을 감정하듯이 분석적으로 의심을 갖고 경전을 배우고 사유하고 수행하면서 불법의 진리를 수행자 본인이 직접 확인해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비판적 분석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기에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16]라고 말하였다. 또한 법회에서 다음과 같은 경전의 어구를 즐겨 인용하며 경전을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달라이 라마는 비판적 분석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기에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16]라고 말하였다. 또한 법회에서 다음과 같은 경전의 어구를 즐겨 인용하며 경전을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구들과 지혜로운 이들이여, 금을 태우고 자르고 문지르듯이 나의 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존경한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17]
스승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날란다 대학 같은 고대 인도의 사원 대학에서는 학승(學僧)이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스승을 존경하거나 공경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의 제자 아리야 위묵티세나(Arya Vimuktisena, 聖解脫軍)는 스승의 유식론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중관학파의 견해로 경전을 이해하였다. 티베트에서는 19세기 닝마빠 학자인 주 미팜(Ju Mipham)의 제자 알락 담최 창(Alak Damchö Tsang)이 스승이 쓴 논전의 일부 내용에 반론을 제기한 사례가 있다. 알락 담최 창은 "스승이 훌륭하다고 해도 가르치는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티베트 속담에 "사람은 공경하고 존경하되 그가 쓴 논서는 철저하게 분석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승에 대한 건전한 마음가짐과 수행할 때 의지해야 할 사의법(四依法)[18]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 불교 교학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경향은 대론(對論, rtsod pa)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불교논리학에 기초한 대론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부터 계승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대론은 설법('chad), 저술(rtsom)과 더불어 학자(paṇḍita)의 3가지 주요 활동(mkhas pa'i bya ba gsum)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찍이 불교는 석가모니 재세시 부터 외도(外道)나 불교 내부의 다른 견해를 가진 불교도들간의 대론을 통해 바른 견해를 확립해왔다.
범천스님은 《불교논리학의 향연》에서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대론은 인명자(因明者; 딱셀와; rtags gsal ba)와 발서자(發誓者; 담짜와; dam bca'ba) 간의 문답으로 진행된다. 인명자는 일어선 채로 질문하고, 발서자는 앉은 채로 대답한다.
2) 발서자는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고, 인명자는 발서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발서자를 모순으로 유도해간다.
3) 발서자가 자신이 전에 했던 주장을 뒤에 번복하면 인명자는 왼손바닥에 오른 손등을 내리치며 '차!'라고 외쳐 오류가 발견됐음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인명자의 착각일 경우 발서자는 '찰록' 또는 '차똥'이라고 말해 오류가 없음을 주장한다.
4) 궁극적으로 인명자는 발서자의 근본주장(짜외담짜; rtsa ba'i dam bca'), 즉 논쟁의 시초가 된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아가며, 근본주장이 번복될 경우 발서자의 근본적 패배로 간주된다.
티베트 불교 대론법 소개 영상 |
티베트 불교의 분석적이고 지성적인 성향은 과학자들과의 적극적 교류에서도 드러난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데이비드 봄(David Bohm), 리차드 데이비슨(Richard J. Davidson),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등 세계적인 뇌과학자, 신경생물학자, 인지과학자, 정신의학자, 물리학자들이 달라이 라마, 까르마빠와 같은 티벳 불교 스승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마음과 생명 연구재단(Mind & Life institute)의 강연, 대담과 달라이라마와 과학자들의 교류를 담은 다큐 영화 《The Dalai Lama: Scientist》등에서 티베트 불교와 과학자들 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교류가 담긴 서적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4.4. 견해, 수행, 행위, 결과[편집]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불교 수행을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단계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하게 티베트 불교에서도 불교 수행을 견수행과(見修行果: 견해, 수행, 행위, 결과)라는 네 가지 개념으로 구분한다.
현밀(顯密)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은 견해, 수행(혹은 명상), 행위(Tib. ལྟ་སྒོམ་སྤྱོད་གསུམ་, ta gom chö sum, Wyl. lta sgom spyod gsum) 세 가지로 구성되며, 견해ㆍ수행ㆍ행위를 통해 목표한 결과를 얻는다. 어떤 법문이나 혹은 종파 전체의 교리를 이해할 때도 견해, 수행, 행위, 결과의 4가지 항목으로 분석하면 전체 구조를 쉽게 조망할 수 있다.
현밀(顯密)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은 견해, 수행(혹은 명상), 행위(Tib. ལྟ་སྒོམ་སྤྱོད་གསུམ་, ta gom chö sum, Wyl. lta sgom spyod gsum) 세 가지로 구성되며, 견해ㆍ수행ㆍ행위를 통해 목표한 결과를 얻는다. 어떤 법문이나 혹은 종파 전체의 교리를 이해할 때도 견해, 수행, 행위, 결과의 4가지 항목으로 분석하면 전체 구조를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수행의 단계마다 각기 다른 견수행과(見修行果)가 존재한다. 먼저 윤회와 인과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춰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
대만 중화불학연구소(中華佛學研究所)의 란지푸(藍吉富)가 작성한 《佛教信仰的見修行果》를 참조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견해(Skt. dṛṣṭi; Tib. ལྟ་བ་, tawa; Wyl. lta ba, view)란 법문이나 종파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나 믿음을 의미한다.
1) 법문의 기본 원리, 믿음의 근거, 이론 구조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염불 법문을 예로 든다면 법문의 근거가 되는 경론과 왜 염불이 필요한지, 염불의 정의는 무엇이고 염불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이 견해에 해당한다.
2) 어떤 전승이나 종파의 기본 교리 구조를 말함.
수행자 개인의 견해는 이론적인 지식, 이론의 실천을 통해 얻은 지혜, 궁극적인 깨달음 등 여러 단계로 나뉠 수 있다. 또한 전승이나 종파 교리에 있어서도 단계 별로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수행(혹은 명상, meditation)은 내재적(內在的)이고 개인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은 내재적인 수행인 '수(修)'와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외재적인 '행(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修)는 주로
2) 어떤 전승이나 종파의 기본 교리 구조를 말함.
수행자 개인의 견해는 이론적인 지식, 이론의 실천을 통해 얻은 지혜, 궁극적인 깨달음 등 여러 단계로 나뉠 수 있다. 또한 전승이나 종파 교리에 있어서도 단계 별로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수행(혹은 명상, meditation)은 내재적(內在的)이고 개인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은 내재적인 수행인 '수(修)'와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외재적인 '행(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修)는 주로
- 수행계발(Skt.bhavana; Tib. སྒོམ་, gom, Wyl. sgom)
- 삼매(Skt.samadhi.; Tib. ཏིང་ངེ་འཛིན་, ting nge dzin, W yl. ting nge 'dzin)
- 선정(Skt.dhyana; Tib. བསམ་གཏན་, samten. Wyl. bsam gtan)
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수행은 경전 학습을 통해 얻는 문혜(聞慧, śruta-prajñā)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는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를 요가행법을 통해 직접적, 체험적, 직관적인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Tib. སྤྱོད་པ་, chöpa, Wyl. spyod pa, action)는 앞서 언급했듯이 외재적(外在的)이고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나 태도,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육바라밀을 예로 들자면 선정, 지혜바라밀은 수행에 해당하고 보시, 지계, 인욕 바라밀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진바라밀은 나머지 다섯 바라밀 모두에게 적용된다.
오명불학원(五明佛學院)의 켄뽀 소다지(Sodargye) 스님은 대승 불교 보살의 행위란 오로지 조건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한편 닝마빠의 뒤좀(Dudjom) 린뽀체는 행위란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모두를 잘 관찰하여 그 생각들의 참된 본성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미래를 쫓아가지도,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기쁜 상황에 집착하거나 혹은 슬픈 상황에 압도되지도 않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기쁨과 슬픔, 평안과 고통의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는 위대한 평정(equilibrium)에 머물게 된다.
결과(result)는 견해ㆍ수행ㆍ행위로 구성된 불교 수행을 배우고 실천하여 얻는 성과를 의미한다.
1) 각 전승과 종파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과위(果位). 성문승은 아라한, 대승의 현교(바라밀승)는 삼아승지겁 동안의 수행을 통한 성불, 밀교(금강승)은 즉신성불(卽身成佛), 선종은 견성성불(見性成佛), 정토종은 극락왕생 등등 전승과 종파마다 수행의 궁극적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2) 궁극적인 과위 외에 단계별로 얻는 성과.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외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으며 보살승은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지(菩薩地)가 있다.
수행의 성과는 억지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바른 수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조낭빠의 스승인 제쭌 타라나타(rje btsun ta ra na tha) 는 견해, 명상, 행위의 불가분성과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티베트 지혜의 서》참조.
견해, 명상, 행위를 하나로 묶고 실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마치 창(槍) 하나하나가 모여 한 묶음을 이루듯이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견해 없이는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실재가 있다고 믿게 되고 그래서 윤회가 계속된다. 행위 없는 견해로는 공덕 쌓는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게다가 견해를 기르는 당사자를 허무주의의 심연까지 이끌어 갈 위험이 있다. 명상이 없는 견해와 행위는 땅 속에 묻힌 보물과 마찬가지로 무용하다. 오두막집 밑에 보물이 무진장 숨겨져 있어도 가난한 사람이 그것으로 배고픔을 면할 수 없듯이, 견해와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 엄청나게 많아도 실제 명상 수행을 하지 않으면 수행자는 마음을 다르마(불법)에 계합시킬 수 없다. 즉 견해와 행위가 필요할 때 전혀 유용하지 못할 것이다.제쭌 타라나타(rje btsun ta ra na tha)
4.5. 중관 사상[편집]
중관학파의 개조(開祖)인 나가르주나[19] |
그와 같이 지혜의 빛으로써 광명을 밝힌
자신의 손에 놓은 암라(Amla) 열매처럼
삼계(三界)들이 본래부터 남김없이 발생이 없음을
깨달으니 명언(名言)의 힘으로 멸제(滅諦)로 나아간다.
항상 멸제에 속한 선정(禪定)이지만
의지할 데 없는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고
그는 앞서 성문과 연각들을 남김없이
심식(心識)으로 복종시킨다.
세속과 진여(眞如)라는 거대하고 가벼운 순백의 날개를 펼쳐
백조의 왕은 백조 무리를 이끌며
선한 바람의 힘을 받아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 바다인 피안(彼岸)으로 날아간다.《입중론》〈현전지〉
티베트 불교에서는 종파를 막론하고 중관학파(中觀學派, Mādhyamika) 그 중에서도 귀류논증 중관학파(歸謬論證中觀學派, Prāsaṅgika-Mādhyamika)의 견해를 가장 중시한다.
중관은 유식과 더불어 대승 불교의 양대 사상으로 일컬어진다. 한국 불교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승랑(僧郞)이 중관사상에 기반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의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때는 원효가 삼론종 관련 논서인 《삼론종요(三論宗要)》,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이제장(二諦章)》등을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고려, 조선에 걸쳐 중관 관련 논서가 한 권도 저술된 적 없을 정도로 중관사상은 천 년 가까이 한국 불교에서 잊혀졌고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다.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중관, 유식보다 화엄(華嚴), 법화(法華) 사상이나 정토(淨土), 선(禪)사상이 각광받았다. 이와 달리 인도 고유의 논리적 사유를 요하는 중관, 인명이 발달하였다는 점이 인도-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도 불교의 다양한 학파 중 가장 중요한 네 가지로 소승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대승의 유식학파와 중관학파를 언급한다. 중관학파는 다시 유식 중관학파와 경량 중관학파로 나뉘고, 경량 중관학파를 논리적 관점에서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ātantrika-Mādhyamika)와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로 나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소승보다 대승, 대승에서도 유식보다 중관, 중관에서도 자립논증보다 귀류논증이 더 정견(正見)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라 중관학파 논서 가운데에서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불호(佛護, Buddhapālita)의 《불호근본중론주(佛護根本中論注, Buddhapālita- mūlamadhyamakavṛtti)》, 월칭(月稱, Candrakīrti)의 중론 주석서인 《입중론(入中論, Madhyamakāvatāra)》, 성천(聖天, Āryadeva)의 《사백론(四百論, Catuḥśataka)》을 중시한다.
티베트 불교의 중관학적 견해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자료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 티베트 불교 스님이나 재가 수행자의 저서ㆍ 역서는 대체로 티베트 불교 교학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불교학자들의 저서ㆍ역서는 학자 본인의 독자적인 견해를 따르는 경우도 있어 둘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티베트 불교 교학의 전통적 견해를 배우려면 독학보다는 전통 강원 과정을 모두 이수한 게쉬(Geshe)나 켄뽀(Khenpo)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법맥과 전승을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에서 여법한 법맥을 계승한 스승에게 직접 구전(口傳)과 가르침을 청해 듣는 것은 이해와 공덕(功德) 측면에서 스승 없이 독학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크다.
- 14대 달라이 라마가 일반인을 위해 중관의 핵심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논서이다. 링크의 번역본은 먼저 곽우영이 영문에서 국문으로 번역하였고, 광성사 주지인 게쉬 소남 걀첸 스님과 김웅기가 티베트어 원문을 참고하여 교정하였다. 그 밖에 다른 한국어 번역본들도 있다.
- 샨티데바의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지혜품〉에 대한 14대 달라이라마의 해설서이다. 샨티데바는 〈지혜품〉에서 중관학파의 견해로 인도의 비(非)불교학파들과 불교의 소승, 대승의 유식학파 등 다른 학파들의 견해를 논박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과 닝마의 문헌을 기반으로 〈지혜품〉을 해석하였다. 그 밖에 〈지혜품〉에 대한 비주류적인 해석은 19세기 닝마빠의 학자 미팜 린포체가 지은 주석서 《께따까, 정화의 보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기한 두 저서 모두 최로덴(최연철)이 번역하였다.
- 달라이 라마가 저술한 불교 개론서이다. 소승과 대승이란 용어 대신 '산스크리트어 전승'과 '빠알리어 전승'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인도, 중국, 티베트, 남방 불교 전승의 사상과 철학을 고루 소개하였다. 시중의 다른 불교 개론서들보다 티베트 불교의 교학적 견해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고,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불교 전승의 교리를 비교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동일 역자인 주민황이 번역한 《달라이 라마 사성제》,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도 함께 읽으면 좋다.
-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배우는 《둡타 린뽀체이 텡와(gurb mtha' rin po che'i phreng ba, 종의보만론宗義寶鬘論)》의 번역서이다. 《둡타》는 일종의 학술강요서(學術綱要書) 혹은 종의서(宗義書)라고 할 수 있다. 귀류논증중관학파의 입장에서 외도(外道)와 불교의 소승, 대승 4대 학파의 교리를 서술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어 통역이었던 박은정 나란다불교학술원장이 번역하였다.
- 역시 《둡타》를 권오민 경상대 교수와 그 제자들이 번역한 책이다. 《둡타》의 본문과 더불어 아비달마불교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권 교수의 해설이 함께 실려있다.
- 역시 《둡타》의 번역서이다. 범천스님이 번역하였다.
- 티베트 불교 중관학 전반에 대한 개설서로 랍숨섀둡링(삼학사)의 주지인 게쉬 텐진 남카스님이 저술하였다. 주로 남카스님이 소속된 겔룩빠의 교학적 견해에 기반한 저서이다.
- 《입중론》 (※ 링크를 누르면 pdf 파일이 바로 다운로드됨)《중론》과 함께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중관학 논서인 짠드라끼르띠의 《입중론》한국어역이다. 달라이 라마의 현(現) 한국어 통역인 양지애가 번역하였다. 유튜브에서 《입중론》에 관한 달라이 라마의 법문(한국어 통역본)이나 티벳 게쉬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
-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수학한 바 있는 김현구 전남대 연구교수가 《입중론》〈현전지〉를 중심으로 귀류논증중관학파의 대표적인 논사 짠드라끼르띠의 유식사상 비판에 대해 고찰한 책이다.
- 미륵보살이 설하였다고 전해지는 《미륵오론》중의 하나인 《현증장엄론(현관장엄론)》의 번역서다. 《현증장엄론》은 반야부 경전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주요 논서로써 성불에 이르는 각 단계들과 그 결과인 부처의 법신을 서술하였다. 티베트 강원에서는 본격적으로 중관을 배우기 전에 《현증장엄론》을 중심으로 약 6~7년 동안 반야부 경전의 가르침을 공부한다. 인도의 티베트 불교 대학인 IBD(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s)에서 수학한 한국인 범천스님이 번역하고 관련 논서를 바탕으로 주(註)를 달았다.
- 쫑까빠가 중관의 견해로 대승 경전들을 교상판석(敎相判釋)한 중요한 논서이다. 역시 범천스님이 번역하였다.
- 쫑까빠가 연기법을 설하신 부처님을 찬탄하며 공성과 연기에 대해 논한 《연기찬탄송(rten 'brel bstod pa)》의 해설서이다. 광성사 소남 걀첸 스님이 일반인 불자들을 위해 법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 일본에서 '비판불교'를 확립한 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松本史朗)가 겔룩빠의 창시자 쫑까빠의 중관 사상을 위주로 티베트 불교 사상을 정리한 저서이다. 이태승 위덕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불교학자들이 역자로 참여하였다.
- 인도 후기 중관학파의 대표적인 논사이며 티베트에 처음 불교를 도입한 샨타락시타의 사상에 관한 이태승 위덕대 교수의 연구서이다. 샨타락시타의 저서인 《이제분별론세소》와 《중관장엄론》과의 관련성을 고찰하였다.
- 남수영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가 샨타락시타의 《중관장엄론》을 번역한 책이다. 일본어역을 저본으로 삼고 티베트어역을 참고하였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를 종지(宗旨)로 삼은 티베트 불교에서 유가행 자립논증 중관학파에 속하는 샨타락시타의《중관장엄론》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논서였으나 닝마빠의 미팜린뽀체 등에 의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 티베트 불교에서는 중관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여래장 사상을 해석하였다. 이에 관한 국내 서적으로는 티베트 불교에서 주요 논서로 취급되는 《보성론》과 그에 대한 주석서인 《옥 로댄쎄랍의 보성론요의 여래장품》이 있다. 또한 일부 지면을 할애하여 티베트 불교의 여래장 사상을 소개하는 학술서적도 있다. 《불성·여래장사상의 형성 수용과 변용》, 《여래장과 불성》, 《여래장 사상》 등
4.6. 불교 인식론과 논리학[편집]
중관학과 더불어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해당하는 인명학(因明學, Hetu-vidyā)을 중시한다는 점도 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인명학은 수행 체계와 견해, 사상을 익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초일 뿐 아니라, 명상과 같은 실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이 정합적(整合的)이고 올바른 인식을 통해 얻은 깨달음인지 점검할 때도 필요하다.
한국 불교에서는 초기 통일신라에서 원효, 원측 등이 인명학 관련 논서를 남겼지만,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인명학 전승이 사라졌다. 한국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차이는 인명(因明)과 밀교(密敎)에서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다. 인명과 밀교는 인도 후기 대승 불교 시대를 이끌었던 마차의 양 수레바퀴로 각각 진리 탐구를 위한 분석적, 철학적 도구인 이론과 대승불교 유가행의 완성이다.
인명학은 디그나가(Dignāga, 480~540)와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7세기)가 확립했다. 불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모든 과정은 인명의 범주에 포함된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는 불교의 인명논리학을 집대성하여 종(宗), 인(因), 유(喩)로 이루는 삼지작법(三支作法)을 확립했고, 이후 오지작법의 논쟁 방식이 점차 정립되었다.
《인명칠론(因明七論)⟫ 혹은 《칠부량론(七部量論, Pramanavartikadisapta-grantha-samgraha)⟫은 다르마키르티가 디그나가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를 주석한 (1) ⟪양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 (2) ⟪정량론(定量論, Pramāṇaviniścaya)⟫, (3) ⟪이적론(理滴論, Nyāyabindu)⟫ (4) ⟪인적론(因滴論, Hetubindu)⟫, (5) ⟪관계론(關系論, Saṃbandhaparīkṣā)⟫, (6) ⟪쟁리론(諍理論, Vādanyāya)⟫, (7) ⟪오타론(悟他論, Saṃtānāntarasiddhi)⟫ 등 일곱 가지 주석서를 총칭하는 말이다.
정성준, 《티베트대장경의 번역과 영향》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스위스 로잔 대학의 파스칼 위공(Pascale Hugon)이 작성한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Tibetan Epistemology and Philosophy of Language〉 항목에 나와 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ibetan Epistemology and Philosophy of Language>
참조할만한 국내 자료로는 겔룩빠 강원의 초등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논리학 입문서인 《뒤다(두라)(bsDus grwa)》일부를 게쉬 텐진 남카스님이 번역한 《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와, 이와 관련된 논문인 최경진, 《티벳불교 승원의 논리학 입문서 두라(bsDus grwa)의 연구》등이 있다. 또한 겔룩빠의 학승 뺀첸 쐬남 닥빠(pan chen bsod nams grags pa)가 지은 불교논리학 개론서 《논리학-일체법을 비추는 거울(rtag rigs kyi rnam gzhag chos kun gsal b'i me long)》을 근간으로 범천스님이 재구성한 《불교논리학의 향연》도 있다.
4.7. 자비심과 보리심의 강조[편집]
모든 불보살의 자비의 총체인 관세음보살[20] |
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강조한다. 보리심의 원인으로는 자비심(慈悲心)과 출리심(出離心)을 들 수 있다. 자비심이란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심(慈心, metta)과 모든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비심(悲心, karuna)을 뜻한다. 그리고 출리심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해탈을 염원하는 마음이다. 자비심과 출리심을 원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윤회의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갖게 되며, 이러한 보리심(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유정(有情)을 보리살타, 즉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4.7.1. 세속 보리심[편집]
부처의 대비행(大悲行)과 중생 구제의 사업을 상징하는 따라(Tara) 보살[21] |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두 차원으로 설명하는 이제론(二諦論)에 입각하여 보리심도 세속(世俗) 보리심(속제 보리심, saṁvṛiti cittotpāda)과 승의(勝義) 보리심(진제 보리심, paramārtha cittotpāda)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승의 보리심이란 곧 공성(空性)을 확실히 아는 지혜를 말한다. 반야 지혜를 증득하여 공(空)과 자비가 둘이 아닌(不二) 경지, 개념을 초월한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의미한다. 세속 보리심이란 공성을 아직 완전히 증득하기 전,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대승의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할 때 자비심을 원인으로 하여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보리심이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이라면 주로 세속 보리심을 뜻한다. 로종(lojong) 수행도 주로 세속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이다. 그러나 세속 보리심의 토대는 승의 보리심이며 궁극적으로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은 둘이 아니다.
까말라쉴라는 《수습차제》에서 세속 보리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속 보리심이란 연민심으로 모든 중생을 확실하게 고통에서 건져내기로 서원한 다음,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보리를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첫 마음을 일으키는 것(초발심初發心)이다.
세속 보리심은 또한 《보살지》의 〈계품〉에서 보여준 의궤에 따라 보살의 율의에 청정하게 머무는 스승에게서 보리심계를 받아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와 같이 세속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는 승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수습차제》의 설명과 같이 세속 보리심은 다시 원보리심(願菩提心)과 행보리심(行菩提心)으로 나눌 수 있다. 원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소망이다. 그리고 행보리심은 원보리심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보살계와 바라밀, 사섭법 등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살계(보리심계)를 받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불법승 삼보께 귀의하는 삼귀의계와 성문승의 별해탈계(別解脫戒)[22]를 수지한 상태에서 보살계맥을 여법히 수지하고 있는 청정한 스승에게 보살계를 받아야 한다.
티베트 불교의 보살계는 18개의 근본 계율과 46개의 보조 계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계율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러 경우에 걸쳐 가르친 계율이며 산스크리트어 경전에 산재해 있었다. 이를 아상가(Asaṅga), 샨티데바(Śāntideva), 짠드라고민(Candragomin) 등이 수집하여 구성한 보살계율이 지금의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보살계이다. 양정연 한림대 교수의 《대승 보살계의 사상과 실천》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의 보살계는 대체로 《유가사지론》 〈계품〉의 보살계와 《입보살행론》, 《대승집보살학론》 의 보살계를 통합하여 구성되었다고 한다. [23]
《18 근본타죄》
1) 자찬(自讚)과 타인 비방의 타죄: 이익과 공경 받는 것을 탐해서 자신을 칭찬하고, 공덕을 갖춘 남을 비방하는 것.
2) 법(法)과 재물을 베풀지 않은 타죄: 괴로운 이나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법과 재물을 줄 수 있으면서도 인색함으로 인해 주지 않는 것.
3) 참회해도 듣지 않고 꾸짖은 타죄: 다른 이가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등 법도에 맞게 사과하는데도 듣지 않고 성난 몸짓과 말로 대응하는 것.
4) 대승(大乘)을 버리고 유사법(類似法)을 설시(說示)한 타죄: 보살의 경장에 대해 ‘이것은 불설(佛說)이 아니다.’라는 등으로 배척하고 유사법을 좋아하고 남에게 설시하는 것.
5) 삼보(三寶)의 재물을 빼앗은 타죄: 삼보에 돌아갈 물건을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훔치거나, 남을 시켜 훔치거나, 빼앗거나, 방편을 써서 얻는 것.
6) 정법(正法)을 배척한 타죄: 도(道)의 가르침을 완전히 설시(說示)한 삼승(三乘)의 경장(經藏)에 대해 ‘이것은 불설(佛說)이 아니다.’라고 비방하는 것.
7) 승복을 빼앗은 등과 퇴속시킨 타죄: 계율을 지니거나 지니지 않은 출가자에게 악의로써 승복을 빼앗거나 때리거나 감옥에 집어넣거나 퇴속(退俗)시키는 등의 행위.
8) 무간죄(無間罪)의 타죄: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승단을 분열시키거나 여래(如來)의 몸에서 악의로 피를 내게 하는 등의 오무간죄.
9) 전도견(顚倒見)을 취(取)한 타죄: 인과(因果)나 윤회 등을 없다고 보는 것.
10) 마을 등을 파괴한 타죄: 마을이나 도시, 지역, 국가 등을 파괴하는 것.
11) 마음을 닦지 않은 이에게 공성(空性)을 설시(說示)한 타죄: 공성을 설시할 근기가 아닌 대승(大乘)의 발심자에게 공성을 설시하여, 두려움으로 인해 발심에서 물러나 소승(小乘)의 마음을 내게 하는 것.
12) 완전한 보리(圓覺)로부터 물러나게 한 타죄: 완전한 보리에 발심한 이에게 ‘육바라밀행과 성불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성문, 독각의 발심을 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가 더 쉽습니다.’ 따위의 말을 해서 그 대상이 완전한 보리의 발심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것.
13)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배척한 타죄: 별해탈계에 법답게 머무는 이에게 ‘별해탈계가 청정하면 뭐합니까? 원만한 보리에 발심하고 대승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하면 삼문(三門)의 일체 악행이 소멸하게 됩니다.’ 따위의 말을 하여, 그 대상이 별해탈계를 버리게 하는 것.
14) 소승(小乘)을 통해서는 탐진치 번뇌를 끊을 수 없다고 본 타죄: 성문(聲聞), 독각(獨覺)의 승(乘)을 아무리 배워도 번뇌를 남김없이 끊을 수 없다고 비방하고, 성문, 독각의 깨달음으로써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
15) 전도설(顚倒說)의 타죄: 이익과 공경을 받기 위해 대승(大乘)을 드러내고, 독송하고, 설시(說示)하면서, 자신은 이익과 공경 받는 따위를 보지 않는 대승의 수행자이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등의 말을 하거나, 공성(空性)을 설시(說示)하면서 ‘이것을 명상하십시오. 그리하여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요해(了解)하면 저와 같이 될 것입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해서 상대방이 그 의미를 알아듣는 것.
16) 삼보로부터의 압수물을 받아 취(取)한 타죄: 왕이나 대신(大臣) 등이 삼보에게서 압수한 재물이나, 승단이나 비구로부터 벌칙으로 압수한 물건 등을 자신에게 바칠 때 받아 취(取)하는 것.
17) 지(止)를 배척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이의 물자를 송경자(誦經者)에게 주는 타죄: 지(止)에 집중하는 선정 수행자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줄 물자를 가져다 송경자들에게 주는 것.
18) 보리심을 버린 타죄: 보리심을 잃어버리는 것.
다음은 보살계를 받을 때 보리심을 발한 제자가 스승 앞에서 서원하는 의식문 중 하나이다. "나와 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습니다."는 원보리심에 해당하며,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나의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최고의 보살행을 하겠습니다."는 행보리심에 해당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일으키기》
삼보께 제가 귀의합니다.
모든 악업을 참회하며
일체중생의 선업을 수희찬탄하고
마음에 부처의 깨달음을 지니겠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완전한 깨달음 얻을 때까지 제가 귀의합니다.
나와 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습니다.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나의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최고의 보살행을 하겠습니다.
모든 중생 돕기 위해 부처 이루게 하소서.
보살계를 받은 수행자는 18개 근본 계율과 46개 보조 계율을 지키며 육바라밀과 사섭법을 배우고 실천한다. 아래는 제 10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게쉬 체왕 쌈둡(Geshe Tsewang Samdrup)이 보살계율에 대해서 설명한 짧은 논서인 《보살계율보만》[24]이다.
4.7.2. 승의 보리심[편집]
앞서 설명하였듯이 승의(勝義) 보리심은 곧 공성(空性)을 확실히 아는 지혜를 뜻한다. 공(空)은 허무주의, 단멸론(斷滅論)이나 절대주의, 상주론(常住論)과는 다르다. 반야 중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일체 만법(萬法)은 상호의존하여 발생(緣起, pratītya-samutpāda)하므로 고정불변한 실체인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으며(無自性, niḥsvabhāva), 이를 공(空, śūnya)이라고 한다.
-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므로(緣起有)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실체로써 존재(執有)한다는 상견(常見)을 여읜다.
- 고정불변하는 실체인 자성이 결여된 자성공(自性空)이므로 일체 현상, 혹은 작용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作用空)하는 단견(斷見)을 여읜다.
- 그러므로 공은 곧 상견과 단견을 여읜 중도(中道)이다. 달리 말하면 연기성공(緣起性空)으로, 연기즉공(緣起卽空)이며 공즉연기(空卽緣起)라고 할 수 있다. 《중론》에서는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중(madhyamā)의 실천(pratipad)이다."라고 말하였다.
공성에 대하여《잡아함》의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은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이 존재가 사라지면 다른 존재가 계속한다(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고 말했으며,[37]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법들의 경우, 화합 인연으로 발생한 법에는 자성이 없느니라. 만일 자성이 없다면 ‘법이 없다’는 말이 되느니라. 따라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 그런가? 일체의 법은 그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일체법에 자성이 없음을 알야야 하느니라(諸法和合因緣生法中無自性。若無自性,是名無法。以是故,須菩提!菩薩摩訶薩當知一切法無性。何以故?一切法性空故。以是故,當知一切法無性)."고 말했다.
또한《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말했고, 쫑까빠의 《연기찬탄송》에서는 "그러므로 '의존해서 성립하는 것’들은 본래부터 자성이 없지만 자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일체법이 환영과 같다고 설하셨다."라고 설명하였다.
보살은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의 실천을 통해 공성에 대한 지혜를 얻어 승의 보리심을 획득한다. 승의 보리심을 획득하였을 때 보살은 집착과 애씀 없이, 개념을 초월하여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진정한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이룰 수 있다.
까말라쉴라는 《수습차제》에서 승의 보리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승의 보리심이란, 세간을 벗어난 것이며 모든 희론을 여읜 것이고, 극히 밝은 것이며, 수승한 의미의 영역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며, 흔들림이 없으며 바람 없는 곳의 버터불처럼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성취는 항상 공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요가를 수습하여 익숙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4.7.3. 사무량심 수행[편집]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에서 사무량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무량심이란 자애, 연민, 기쁨, 평등(慈悲喜捨)이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뜻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무량(無量)이라고 부르는 것은 먼저 편파성이 없으므로 무량한 중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욕계심(欲界心)의 다섯 가지 장애[38]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선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초선(初禪)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범천(梵天)의 이름을 따서 사무량심을 사범주(四梵住)라고도 부르는데, 범천의 존재들의 마음은 온순하다.
사무량심은 《자애경(Metta-sutta)》과 《청정도론(Visuddhimagga)》 같은 빠알리 어 경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수행이다. 상좌부 전승에 따르면 사무량심 명상만을 할 경우 다음 생에 범천(梵天) 등의 색계(色界)에서 환생할 수 있지만, 이 명상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삼법인(三法印)의 통찰을 위한 유연하고 집중된 마음인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무량심 수행은 먼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무량심을 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상이 익숙해지면 사랑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적(원수), 일체 중생 순으로 대상을 확대한다.
대승 불교에서 사무량심은 《보살장경(Bodhisattva Piṭaka sutr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무량심은 보리심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보리심 수행에 앞서 먼저 사무량심을 수행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사무량심을 수행할 때 사용되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사무량심은 《자애경(Metta-sutta)》과 《청정도론(Visuddhimagga)》 같은 빠알리 어 경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수행이다. 상좌부 전승에 따르면 사무량심 명상만을 할 경우 다음 생에 범천(梵天) 등의 색계(色界)에서 환생할 수 있지만, 이 명상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삼법인(三法印)의 통찰을 위한 유연하고 집중된 마음인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무량심 수행은 먼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무량심을 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상이 익숙해지면 사랑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적(원수), 일체 중생 순으로 대상을 확대한다.
대승 불교에서 사무량심은 《보살장경(Bodhisattva Piṭaka sutr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무량심은 보리심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보리심 수행에 앞서 먼저 사무량심을 수행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사무량심을 수행할 때 사용되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갖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 없는 행복(해탈)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가까움과 멂, 애착과 증오 없는 평등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와 ~의 원인들"이라는 구절은 특별히 자애와 연민을 일으킬 때 덧붙인다. 이는 중생들이 업(業)과 인과(因果)의 법칙을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이해해서, 행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만들고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더이상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이다.
또 다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또 다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평등 속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그렇게 머물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들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들을 갖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좋은 세계에 환생하고 해탈의 더 없는 행복을 잃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 그들이 그것들을 떠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위의 형태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처음에 언급된다. 이는 나머지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이 특정 대상에게 편파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위의 형태는 (1) 소망 (2) 발원 (3) 결심 (4) 요청의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술할 보리심 수행 가운데 하나인 ‘칠종인과법’의 요약이기도 하다.
《현관장엄론》에서는 사무량심이 선정(禪定)을 수반하지 않는 이상 무량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무량심에 대한 명상은 보리심을 증장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고, 선정을 개발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다.
상좌부 전승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사무량심만 수행하면 지혜가 발현되지 않아 범천에서 환생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주체인 나 자신과, 사무량심의 대상인 일체 중생과,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행위 세 가지 모두 상호의존적이므로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대한 지혜가 수반될 때[39]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4.7.4. 보리심 수행[편집]
티베트 불교는 보리심을 모든 수행의 동기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성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해탈로 이끄는 것이 목적임을 잊지 않게 한다. 또한 보리심을 단순히 강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을 키우는 구체적인 수행법이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리심을 훈련하는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의 전승으로는 로종(lojong)이 있다. '마음 다스리기'라는 뜻의 로종에는 보리심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무착보살의 1) 인(因)과 과(果)에 대한 일곱 가지 가르침(칠종인과법)이고, 다른 하나는 용수보살의 2) 자신과 남들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교환하는 것(자타상환법)이다.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을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고찰함으로써 자신의 심성이 보리심에 가까워지도록 수행한다. 칠종인과법보다 자타상환법이 더욱 심오하고 상근기들에 적합한 수행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권장되는 수행법이다.
1.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
(1) 모든 중생이 수많은 전생 가운데 우리의 부모 아니었던 적 없는 것을 인식함.
(2) 그들이 우리의 부모였을 때 베풀었던 친절에 대해서 고찰함.
(3)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함.
(4)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람.
(5)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람.
(6)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위대한 결심.
(7) 그 결과 모든 중생을 위해 부처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이룸
2.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중생들 역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기심과 자기 집착으로 남들을 희생시키며 죄책감과 근심, 두려움을 얻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행복을 원하면 행복한 타인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행복해진다. 따라서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 자신의 행복에서 타인의 행복으로 목표를 전환하는 것을 자타상환법이라고 한다. 자타상환법을 장애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나,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무아(無我)와 나와 남이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성(緣起性)을 인지해야 한다.
자타상환법과 관련된 티베트 불교 특유의 자비명상으로 통렌(tonglen)이라는 것이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눈 앞에 있다고 시각화한 다음, 사랑과 자비, 행복 등 긍정적인 에너지를 날숨에 실어보내고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에너지와 고통을 들숨을 통해 대신 흡수하는 명상법이다. 이를 통해 남과 나 사이의 분별을 없애고 자비심을 키운다.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는 자기 자신이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로 타인의 업을 대신 받지는 않으며 자비심의 증장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다.
4.7.5. 관련 문헌[편집]
날란다 사원에서 《입보살행론》을 설한 샨티데바[40] |
로종과 관련된 문헌으로는 《보행왕정론(보만론)(Ratnāvalī)》, 《보살지(Bodhisattvabhūmi)》,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 《마음을 다스리는 8가지 게송(수심팔훈, 수심팔송)(Tib. བློ་སྦྱོང་ཚིགས་རྐང་བརྒྱད་མ་, lojong tsik kang gyéma; Wyl. blo sbyong tshigs rkang brgyad ma)》, 《수심칠요(Tib. བློ་སྦྱོངས་དོན་བདུན་མ་, lojong dön dünma, Wyl. blo sbyong don bdun ma)》, 《보살행37송(Tib. རྒྱལ་སྲས་ལག་ལེན་སོ་བདུན་མ་, gyalsé laklen so dün ma, Wyl. rgyal sras lag len so bdun ma)》 등이 있다.
《수심팔훈(修心八訓, བློ་སྦྱོང་ཚིགས་རྐང་བརྒྱད་མ་》[41]
게쉬 랑리 탕빠(dge bshes glang ri thang pa) 著, 양지애 譯
소원을 들어주는 모든 보석보다
더 소중한 모든 존재를 위하여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니
언제나 제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마음 깊이
다른 사람을 윗사람으로 받들게 하소서.
그 무엇을 행하건 내 마음을 잘 살피기를
그리고 나와 남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단호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매우 부정적이며 고통에 억눌려
성품이 밝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치 귀한 보물을 찾은 듯이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남들이 나를 시기하여
부당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도
좌절은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는 그들에게 바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몹시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변함없이 그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요약하면 이익과 기쁨은
직간접으로 내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께 드리며
내 어머니의 모든 상처와 고통은
은밀히 내가 떠맡게 하소서.
이러한 모든 행이 세속 팔풍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영임을 깨달아
애착 없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국내에 번역된 관련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일부 서적은 절판된 점 참고 바람)
#보행왕정론(보만론)
#친우서(권계왕송)
#보살지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
#수심칠요
#보살행37송 #수심팔훈 #기타
5. 밀교[편집]
5.1. 개요[편집]
모든 불보살의 힘(力)의 총체이자 밀승의 가르침을 결집한 금강수보살(Vajrapani)[42] |
인도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밀교는 티베트 뿐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다른 국가로 전래되었지만 지금까지 법맥이 끊기지 않고 독자적인 밀교 종단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티베트와 일본뿐이다.[43] 일본에는 중기 밀교까지 전해진 반면 티베트에는 후기 밀교까지 전래되었다. 밀교부에 해당하는 방대한 경전들이 존재하며 또한 티베트 불교 종파별로도 각자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과 문헌을 갖고 있다.
밀교는 다른 말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금강'이라는 것은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것을 뜻한다. 방편과 지혜를 분리시키지 않고 합일시켜 단단하게 하기 때문에 금강승이라고 한다. 금강승은 '방편승(方便乘, upayayana)'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승보다 많은 선교 방편들을 구족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승을 '과승(果乘, phalayana)'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과로써 도를 삼기 때문이다. 수행의 결과인 불과(佛果)를 수행방편으로 이용하여 수행자 자신을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는 청정인식을 갖게 한다.
금강승은 밀승(密乘, guhyayana)이라 칭하기도 한다. 반드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르침과 수행은 비밀로 남아있어야 하며 밀교 수행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관정이나 금강승 수행에 대해서 남에게 알리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다. 자칫 자기중심주의, 오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불교학자이자 티베트 불교 수행자인 최로덴(최연철)은 《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딴뜨라(Tantra, rGyud)라는 용어는 밀교 경전들에 근거한 수행 전통을 말한다. 딴뜨라(Tantra)라는 말의 본뜻 역시 연속(連續) 계속(繼續) 본속(本續) 밀주본속(密呪本續) 비밀본속(秘密本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티벳어로는 ‘규(rGyud, 續)'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딴뜨라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관상(觀想)의 과정들, 의례절차, 상징들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깊은 철학적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을 활용한 수행을 통하여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체계화되어 있다. 즉 ‘딴뜨라’는 모든 수행 양식과 관념들 그리고 다양한 상징물들과 함께 구전 전승되고 있는 의례 의식과 광범위한 경론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5.2. 밀교의 기원과 역사 서술 방식[편집]
5.2.1. 전통적 관점[편집]
지금강불(Vajradhara)과 84명의 마하싯다(mahasiddha)[44] |
중암스님이 번역하고 증주(增註)한 《밀교의 성불 원리》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금강승은 석가모니불의 보신불(報身佛)[45]인 지금강불(持金剛佛, Vajradhara)에 의해 설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강불은 오종성불(五種性佛)의 덕성을 하나로 모은 대보신불(大報身佛)로 밀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부처이다. 금강승의 가르침은 무상유가의 법기(法器)로 알려진 업과지(業果地)[46]의 남섬부주 유정들을 위해서 단지 한 생애에서 성불할 수 있도록 최상의 근기를 대상으로 설한 비밀의 방편도(方便道)로 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상요가부 딴뜨라의 가르침은 대승 가운데 대승이며 최상승법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 비밀 금강승의 가르침이 남섬부주에 출현한 것은 오로지 석가모니불의 시대이며, 과거의 연등불이나 미래의 미륵불 때는 금강승의 가르침이 설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 수명이 100세에 불과한 오탁악세에 출현한 석가모니불의 교화 대상인 현세의 남섬부주 중생들이 금강승의 큰 연분(緣分)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오직 과거의 현전왕불(現前王佛),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문수사리불[47]이란 세 분의 부처가 출현한 세 겁 때의 중생들만이 금강승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금강승과의 인연은 매우 희유한 인연이며 숙세의 매우 큰 선근 공덕 없이는 접할 수 없다고 한다.
빠드마삼바와 "나처럼 여기고 보라" 불상(佛象)[48] |
티베트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이자 아미타불(Amitabha)의 화신으로 알려진 구루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의 전기 《빼마 까탕》에서는 밀교와 만나는 희유한 법연(法緣)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귀담아 잘 들으십시오! 티베트의 선근자들이여!비밀진언의 금강승이 출현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니,
과거의 8억 4천만의 제불여래도 설하지 않았으며,
연등불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도 설하지 않았으며,
미래에 오시는 제불여래들도 역시 설하지 않으니,
그 유정들이 밀교의 법 그릇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과거 겁초에 겁명(劫名)을 일체장엄이라 부르는 때,
현전왕불의 가르침에 밀법이 출현하였으며,
현재불인 석가세존의 교법에 밀교가 출현하였습니다.
다시 천만 겁을 지나 겁명을 꽃 장엄이라 부르는 때,
문수사리불이 출현하여 현재와 같은 시절이 도래할 때,
그 부처님께서 지금처럼 진언밀교를 선양하게 됩니다.
이 세 겁의 유정들이 밀교의 법기가 되기 때문이며,
이 세 겁이 아닌 시절에는 금강승이 출현하지 않습니다."《뻬마 까탕》
최로덴은《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딴뜨라 수행의 전통이 대부분 석가모니(Sakyamuni)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개중에는 가끔씩 다른 세상(타방他方)의 부처가 설한 것도 있으며, 말이 아닌 의식 속에서 전해진 것(意傳)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心傳)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딴뜨라들이 있다. 티벳 불교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관련한 현대의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 최소한 천 년 동안, 불교 딴뜨라들이 출현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본다.
이렇게 석가모니 재세시와 인도에서 딴뜨라가 꽃 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티벳 역사가들 중 17세기의 유명한 역사가인 따라나타(Taranatha)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가 재세시에 직접 딴뜨라의 가르침들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의 근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때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딴뜨라의 기원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큰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수많은 딴뜨라의 경전들이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딴뜨라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딴뜨라는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확실한 법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전통을 따라 성취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법맥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딴뜨라의 경전에는 법맥의 전수자들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딴뜨라의 법을 전해준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5.2.2. 현대적 관점[편집]
크리스천 웨더마이어(Christian K. Wedemeyer) 시카고대 교수의 저서 《Making Sense of Tantric Buddhism: History, Semiology, and Transgression in the Indian Traditions》와 이용현 금강대 교수의 논문을 참조하여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주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딴뜨리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과연 현 시점에서 딴뜨리즘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통해 딴뜨리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substratum model)’의 두 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 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 족의 베다 전통(Vedic tradition)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에 의해 도전받았다. 샌더슨이 ‘종교적 기층’ 가설에 의문을 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되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거나 바이슈나바 딴뜨라거나 불교 딴뜨라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샌더슨의 이론은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웨더마이어 역시 힌두 샤이비즘과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공간을 공유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기에 불교 딴뜨리즘이 전적으로 힌두 샤이비즘(Śaivism)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라뜨나까라샨띠(Ratnākaraśānti)나 아바야까라굽따(Abhayākaragupta) 등 인도의 후기 딴뜨라 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을 문제 삼은 자료가 지금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딴뜨라 불교가 적절한 불교적 의미를 주는 상징주의에 의존하면서, 이교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명확한 의미가 그러한 요소들에 주어지면, 그들의 불순함은 제거되고, 그들은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들로 탈바꿈하였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샥티즘과 샤이비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힌두이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서구 학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Abrahamic religions)의 개념으로 인도 종교를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샤이비즘, 샥티즘, 바이슈나비즘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 내 종교와 사상, 관습들이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처럼 취급되었고, 종교 간의 관계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또한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은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물론이고, 초기에 서구와 일본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데 급급했던 한국 학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정반대의 모델을 내놓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토착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침공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 신체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하게 된다. 서구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한편 정성준 위덕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당시 대승 불교의 중관, 유식 논사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밀교 수행자들이었다. 《유가사지론》으로 대표되는 유가행 이론의 완성 이후 이들은 유가행의 실천을 목적으로 밀교 의궤를 창안하였다. 또한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 경전에 주석을 달았고, 바라밀승의 수학 이후 진언승을 수학하는 대승 교단의 현밀겸수(顯密兼修)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적, 실천적 정통성을 보여준다. 정성준, 《인도밀교의 성립에 나타난 후기중관파와 밀교의 교섭 고찰》
딴뜨리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과연 현 시점에서 딴뜨리즘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통해 딴뜨리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substratum model)’의 두 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 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 족의 베다 전통(Vedic tradition)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에 의해 도전받았다. 샌더슨이 ‘종교적 기층’ 가설에 의문을 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되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거나 바이슈나바 딴뜨라거나 불교 딴뜨라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샌더슨의 이론은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웨더마이어 역시 힌두 샤이비즘과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공간을 공유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기에 불교 딴뜨리즘이 전적으로 힌두 샤이비즘(Śaivism)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라뜨나까라샨띠(Ratnākaraśānti)나 아바야까라굽따(Abhayākaragupta) 등 인도의 후기 딴뜨라 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을 문제 삼은 자료가 지금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딴뜨라 불교가 적절한 불교적 의미를 주는 상징주의에 의존하면서, 이교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명확한 의미가 그러한 요소들에 주어지면, 그들의 불순함은 제거되고, 그들은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들로 탈바꿈하였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샥티즘과 샤이비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힌두이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서구 학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Abrahamic religions)의 개념으로 인도 종교를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샤이비즘, 샥티즘, 바이슈나비즘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 내 종교와 사상, 관습들이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처럼 취급되었고, 종교 간의 관계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또한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은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물론이고, 초기에 서구와 일본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데 급급했던 한국 학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정반대의 모델을 내놓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토착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침공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 신체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하게 된다. 서구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한편 정성준 위덕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당시 대승 불교의 중관, 유식 논사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밀교 수행자들이었다. 《유가사지론》으로 대표되는 유가행 이론의 완성 이후 이들은 유가행의 실천을 목적으로 밀교 의궤를 창안하였다. 또한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 경전에 주석을 달았고, 바라밀승의 수학 이후 진언승을 수학하는 대승 교단의 현밀겸수(顯密兼修)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적, 실천적 정통성을 보여준다. 정성준, 《인도밀교의 성립에 나타난 후기중관파와 밀교의 교섭 고찰》
5.3. 밀교와 현교의 비교[편집]
쫑까빠는 "공성에 대한 견해, 모든 유정의 존재들을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하는 의도(보리심), 육바라밀의 수행에 있어 현교와 밀교 양자는 차이가 없다." 하고 말하였다.
현교와 밀교는 공성(空性)이라는 견해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밀법에서 말하는 공성이라는 것도 결국 대승 현교에서 말하는 공성을 말하는 것이지 더 심오한 공성을 말한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교와 밀교의 공통된 수행도는 곧 보리심이다. 진정한 보리심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밀교의 수행승에 들어갈 수 있다. 보리심을 갖춰야 밀교에 박학다식하고 밀교의 수행을 겸비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밀법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
현교와 밀교 사이에 보리심과 행위인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또한 현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와 밀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처의 과위에 이르기 위한 방편에 있어서는 현교와 밀교가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과위, 불과(佛果)라는 것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로 양상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법신과 색신을 성취하는 방편에 있어서 현교와 밀교의 차이가 있다. 현교에서는 법신을 이루는 지혜와 색신을 이루는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없지만, 밀교에는 지혜와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있다.
밀교 수행자는 스스로를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여 단기간에 복덕을 쌓아 중생 구제를 위한 색신을 이룬다. 동시에 관상의 대상인 본존을 공성(空性)으로 인식하는 지혜로써 법신을 이룬다. 만약 본존을 공성이 아닌 실재하는 무언가로 여긴다면 단지 사견(邪見)에 불과하다. 따라서 밀교 수행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밀교에는 본존의 관상 뿐 아니라 신체 구성요소인 기(氣, prāṇa), 기맥(氣脈, nāḍi), 맥륜(脈輪, cakra), 명점(明點, bindu) 등을 활용하여 색신을 이루는 수행법이 있다.# #
현교와 밀교는 공성(空性)이라는 견해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밀법에서 말하는 공성이라는 것도 결국 대승 현교에서 말하는 공성을 말하는 것이지 더 심오한 공성을 말한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교와 밀교의 공통된 수행도는 곧 보리심이다. 진정한 보리심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밀교의 수행승에 들어갈 수 있다. 보리심을 갖춰야 밀교에 박학다식하고 밀교의 수행을 겸비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밀법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
현교와 밀교 사이에 보리심과 행위인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또한 현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와 밀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처의 과위에 이르기 위한 방편에 있어서는 현교와 밀교가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과위, 불과(佛果)라는 것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로 양상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법신과 색신을 성취하는 방편에 있어서 현교와 밀교의 차이가 있다. 현교에서는 법신을 이루는 지혜와 색신을 이루는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없지만, 밀교에는 지혜와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있다.
밀교 수행자는 스스로를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여 단기간에 복덕을 쌓아 중생 구제를 위한 색신을 이룬다. 동시에 관상의 대상인 본존을 공성(空性)으로 인식하는 지혜로써 법신을 이룬다. 만약 본존을 공성이 아닌 실재하는 무언가로 여긴다면 단지 사견(邪見)에 불과하다. 따라서 밀교 수행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밀교에는 본존의 관상 뿐 아니라 신체 구성요소인 기(氣, prāṇa), 기맥(氣脈, nāḍi), 맥륜(脈輪, cakra), 명점(明點, bindu) 등을 활용하여 색신을 이루는 수행법이 있다.# #
어떤 이는 밀교부를 경. 율. 논 삼장(三藏)밖의 제4장(第四藏)으로 넣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삼장 안에 섭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교부는 경장(經藏) 안에 넣는 것이 타당하다. 밀교부 안에 있는 대부분의 교리가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가운데 정학(定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율장은 주로 계학을 설하였고, 경장은 주로 정학을 설하였으며, 논장에서는 주로 혜학을 설하였다. 밀교부에는 주로 삼매를 성취하는 특별한 방편을 많으므로, 방편 법문을 주로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는 밀교부를 경장의 일부에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쫑까빠도 《밀종도차제광론(sNgags rim chen mo)》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밀교부의 특별하고 심오한 법은 삼마지(三摩地)에서 비롯된다. 계학에서는 현교와 밀교가 약간의 차이가 있고, 공성을 증득하는 혜식(慧識)을 품류(品類)로 나누어 볼 때 혜학도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현교와 밀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정학(定學)의 지(止) 관(觀) 쌍운법(雙運法)에서 구별할 수가 있다."
5.4. 밀교의 분류[편집]
티베트의 학자이자 역사가인 부뙨(Buton)은 밀교를 소작부 혹은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 등 네 부파로 분류하였다. 밀교 네 부파는 수행의례나 방법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작부는 외적인 의례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행부는 《대일경(大日經)》을 위주로 외적인 의례와 내적인 수행을 함께 중시하며, 유가부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심으로 오직 내적인 수행만을 중시한다. 무상유가부의 가르침은 인도 후기 밀교에 해당하며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 없다. 네 탄트라의 수행은 상응하는 근기를 가진 수행자에 근거하여 나눈 것이지,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다.
무상요가 딴뜨라는 방편 부(父) 딴뜨라, 반야 모(母) 딴뜨라, 부ㆍ모 양 딴뜨라의 쌍입(雙入)을 설한 불이(不二) 딴뜨라로 나뉜다. 방편 부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비밀집회 딴뜨라(Guhyasamaja tantra)》와 《야만따까 딴뜨라(Yamantaka tantra)》가 대표적이며, 반야 모 딴뜨라는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 《챠크라삼바라 딴뜨라(Chakrasamvara tantra)》 등이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불이 딴뜨라는 《깔라챠크라 딴뜨라(Kalachakra tantra)》가 대표적인 경전에 속한다.
무상요가 딴뜨라는 방편 부(父) 딴뜨라, 반야 모(母) 딴뜨라, 부ㆍ모 양 딴뜨라의 쌍입(雙入)을 설한 불이(不二) 딴뜨라로 나뉜다. 방편 부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비밀집회 딴뜨라(Guhyasamaja tantra)》와 《야만따까 딴뜨라(Yamantaka tantra)》가 대표적이며, 반야 모 딴뜨라는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 《챠크라삼바라 딴뜨라(Chakrasamvara tantra)》 등이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불이 딴뜨라는 《깔라챠크라 딴뜨라(Kalachakra tantra)》가 대표적인 경전에 속한다.
5.5. 밀교의 수행 요건[편집]
현교, 다시 말해 바라밀승은 부처의 과위를 이루는데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반면 밀승을 수행하면 단기간 내에 자량(資糧)[49]을 쌓아 짧게는 한 생에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티벳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한 삼동(Samdhong) 린포체는 2018년 방한법회에서 현교와 밀교를 도보와 고속철도에 비유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도보보다 고속철도가 훨씬 빠르지만 거쳐가는 경로는 같다. 마찬가지로 밀교도 현교보다 짧은 기간에 성불할 수 있지만 중간 과정을 생략함 없이 거쳐 가는 과정은 동일하다.
밀교는 단기간에 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가르침지만 아무나 밀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미 현교의 수행차제를 두루 섭렵하여 근기가 성숙된 이라야 하며, 오직 불과(佛果)를 증득하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우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자만하여 밀교 수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염원하는 출리심, 다른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과 보리심이 투철하고 공성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사람들이 금강승(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차제(次弟)에 따른 수행과 보리심의 획득,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라고 강조하였다.
출팀 껠상(Tsultrim Kelsang) 오오타니대 교수와 마사키 아키라(正木 晃)는 《티벳 밀교》에서 밀교 수행 이전에 현교 수행을 마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겔룩빠의 경우 20여년 간의 현교 수행을 제대로 마친 사람만이 아무리 젊어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밀교에 입문하게 된다. 현교가 결여된 밀교 만으로는 자칫 체험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시작하였을 때도 각지의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스승들이 저차원의 경지에만 도달해있었음에도 그것을 고차원의 경지라고 굳게 믿고 있어 석가모니를 낙담시켰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다.
밀교는 단기간에 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가르침지만 아무나 밀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미 현교의 수행차제를 두루 섭렵하여 근기가 성숙된 이라야 하며, 오직 불과(佛果)를 증득하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우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자만하여 밀교 수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염원하는 출리심, 다른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과 보리심이 투철하고 공성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사람들이 금강승(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차제(次弟)에 따른 수행과 보리심의 획득,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라고 강조하였다.
출팀 껠상(Tsultrim Kelsang) 오오타니대 교수와 마사키 아키라(正木 晃)는 《티벳 밀교》에서 밀교 수행 이전에 현교 수행을 마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겔룩빠의 경우 20여년 간의 현교 수행을 제대로 마친 사람만이 아무리 젊어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밀교에 입문하게 된다. 현교가 결여된 밀교 만으로는 자칫 체험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시작하였을 때도 각지의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스승들이 저차원의 경지에만 도달해있었음에도 그것을 고차원의 경지라고 굳게 믿고 있어 석가모니를 낙담시켰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다.
밀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으로부터 관정(灌頂, Skt. abhiṣeka, Tib. wang)과 구전(口傳, Skt. āgama, Tib. lung), 구결(口訣, Skt. upadeśa, Tib. tri)을 받아야 한다. 관정은 왕이 즉위할 때 왕의 머리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의식을 통하여 밀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스승으로부터 밀교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또한 스승의 구전(口傳)을 통해 수행법을 전수받고, 수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인 구결 역시 전수받는다. 밀교 수행을 성취하려면, 현교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욱 큰 스승에 대한 신심(信心)이 필요하다. 관정을 주는 스승을 본존의 현현으로 믿어야 하며 만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관정(Abhiṣeka)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가관정(許可灌頂, jenang)이고 다른 하나는 관정(灌頂, wang)이다. 허가관정은 말 그대로 본존에 대한 간략한 성취법이나 명상을 허가받는 관정이다. 일반적인 관정이 궁극적으로 본존의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허가관정은 본존의 공덕을 이어받아 단기간에 가피를 얻는 목적이 크다. 허가관정은 2~3일 간 열리는 관정에 비해 의식이 훨씬 간소하며 관정을 받고 지켜야 할 삼매야계와 수행 의무[50]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따라서 허가관정은 대중적으로 많이 전수되고, 한국에서 열리는 티베트 불교의 관정법회 대부분도 허가관정에 해당한다. 허가관정을 통해 밀법과 본존에 인연을 맺으며 보리심의 종자를 심고 단시간에 많은 죄업과 장애를 소멸할 수 있다. 또한 관정을 주는 아사리(阿闍梨, ācārya)[51]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
참고로 티베트에서는 라마들이 이마에 손을 대어 가피를 주곤 하는데 이를 '손으로 주는 관정' 이라는 뜻의 착왕(phyag dbang)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마정수기(摩頂授記)[52]로 오인하여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티벳 린뽀체 초청법회를 '마정수기 법회'라고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誤導)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5.6. 밀교의 계율[편집]
밀교의 계율은 싸마야(samaya, 三昧耶)라고 부른다. 밀교의 수행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정은 먼저 계를 받고 이를 지킬 것을 맹세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금강승의 밀교계는 매우 엄격하고 지키기 힘들다. 아띠샤(Atisha) 존자는 본인의 삶 중에 '비구계는 조금도 어김이 없이 지켰고 보살계는 간혹 지키지 못했지만, 밀교계를 어긴 것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많다.'고 하였다. 아띠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밀교 수행자는 소승의 별해탈계, 대승의 보살계와 금강승의 삼매야계까지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딴뜨라의 밀교계는 '14가지 근본 밀교계'와 '18가지 부차 밀교계'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밀교계를 어기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부차 밀교계를 어기는 것조차 비구계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 18배나 무거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금강승을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밀교계를 자세히 숙지하고, 관정과 밀교계를 받은 후에는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러한 밀교계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근본타죄(根本墮罪)'를 범했다고 한다. 근본타죄에는 스승을 모욕함, 가르침을 경시함, 함께 금강승을 수행하는 도반과의 불화, 보리심과 공성의 포기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딴뜨라의 밀교계는 '14가지 근본 밀교계'와 '18가지 부차 밀교계'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밀교계를 어기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부차 밀교계를 어기는 것조차 비구계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 18배나 무거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금강승을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밀교계를 자세히 숙지하고, 관정과 밀교계를 받은 후에는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러한 밀교계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근본타죄(根本墮罪)'를 범했다고 한다. 근본타죄에는 스승을 모욕함, 가르침을 경시함, 함께 금강승을 수행하는 도반과의 불화, 보리심과 공성의 포기 등이 있다.
《14 근본 삼매야계》
1. 금강상사(金剛上師)의 말씀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상사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2. 붓다의 가르침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3. 금강사형제(金剛師兄弟)나 사자매(師姉妹)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4. 중생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5. 보살원행(원보리심, 행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6. 소승ㆍ대승ㆍ금강승을 비방하지 말며,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7. 밀법을 의심하는 중생에게는 금강승 밀법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8.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모두 중생을 깨우치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 밀법에 대해 의혹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10. 중생을 해쳐서는 안되며, 중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11. 밀법을 경시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12. 밀법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하지 않은 중생에게는 밀법을 가르쳐주어서는 안 된다.
13. 금강승 밀법을 수지하는 데 있어서 규정에 따라 법기를 사용하고 공양을 실행하여야 한다.
14. 여성 혹은 지능이 낮은 중생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5.7. 밀교의 수행법[편집]
티베트 밀교 수행은 크게 생기차제(生起次第, utpattikrama)와 원만차제(圓滿次第, 혹은 구경차제究竟次第, sampannakrama)라는 두 단계를 구분한다. 두 차제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생기차제에서는 본존불 수행의 관상과 진언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을 심고 원만차제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케 해주는 법이다. 원만차제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인 상대적인 경계를 인정치 않는 지견(知見)으로 수행한다. 방편을 빌리지 않고 본연의 절대적 진리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 안에는 각 파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을 관하는 본존수행, 즉 본존요가(本尊瑜伽, devatabhisamaya)이다. 시방에 본래 존재하는 불보살은 본존불인 지혜존이 되며,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은 삼마야존, 혹은 계율존(계율의 대상인 부처)이라 부른다.
자신인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본존 만트라를 염송하고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같은 부처라는 자부심(佛慢)과 신심(信心)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고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공성의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 한다. 이를테면 한 가지 수행 안에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다 포함된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 할 때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 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까규빠의 착첸(마하무드라) 수행과 닝마빠의 족첸(마하상디) 수행을 들 수 있다. 두 수행 안에는 지관(止觀)의 두 수행을 다 포함하는데, 선종의 참선과 흡사한 면도 많이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 이러한 원만차제 수행은 스승이 직접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보게 해주고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자가 근기가 익지 않았을 때에는 스승이 많은 방편을 빌려서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끈다. 설오, 《티베트 불교를 만나다》
티베트 불교 안에는 각 파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을 관하는 본존수행, 즉 본존요가(本尊瑜伽, devatabhisamaya)이다. 시방에 본래 존재하는 불보살은 본존불인 지혜존이 되며,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은 삼마야존, 혹은 계율존(계율의 대상인 부처)이라 부른다.
자신인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본존 만트라를 염송하고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같은 부처라는 자부심(佛慢)과 신심(信心)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고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공성의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 한다. 이를테면 한 가지 수행 안에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다 포함된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 할 때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 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까규빠의 착첸(마하무드라) 수행과 닝마빠의 족첸(마하상디) 수행을 들 수 있다. 두 수행 안에는 지관(止觀)의 두 수행을 다 포함하는데, 선종의 참선과 흡사한 면도 많이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 이러한 원만차제 수행은 스승이 직접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보게 해주고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자가 근기가 익지 않았을 때에는 스승이 많은 방편을 빌려서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끈다. 설오, 《티베트 불교를 만나다》
6. 수행 체계[편집]
6.1. 개요[편집]
티베트 불교에는 날란다 사원 전통을 계승한 특유의 불교 교육 체계가 있는데 이를 장춥람림(Jangchub lamrim), 한역으로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라고 한다. 이름을 풀이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매겨진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불법에는 완전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드러낸 요의법(了義法)과 방편으로 설한 불요의법(不了義法)이 있다. 광대한 불법의 바다에서 대소승의 요의법만을 모아 간추린 요의법의 왕이 바로 《람림》이라고 할 수 있다. 《람림》에 의지하면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헤매지 않고 수행이 가능하다. 밀교의 매우 깊은 가르침에 의지하여 한 생에 깨달을 수 있는지 여부도 《람림》의 내용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람림》의 내용은 크게 삼사도(三士道)와 지관(止觀) 수행으로 구성된다.
초펠스님,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
초펠스님,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
6.2. 연원[편집]
흔히 《람림》을 '아띠샤'나 '쫑까빠'와 같은 티벳의 카담파(Kadampa) 스승들이 만들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람림》의 가르침이 석가모니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대승 불교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불로부터 유래한 두 갈래 법맥이 있다. 석가모니불-미륵보살-아상가(무착)으로 이어지는 도의 광대한 실천을 중시하는 법맥(갸첸쬐규)과, 석가모니불-문수보살-나가르주나(용수)로 이어지는 공성의 심오한 견해를 중시하는 법맥(상모따규)이다.
인도의 스승 아띠샤가 전자의 법맥은 스승 '쎌링빠'로부터, 후자의 법맥은 스승 '릭빼쿠주'로부터 이어 받아 두 법맥을 통합하여《람림》이라는 하나의 큰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관한 논서로 《보리도등론(Skt. bodhipathapradīpa; Tib. བྱང་ཆུབ་ལམ་སྒྲོན་, changchub lam drön, Wyl. byang chub lam sgron)》이 있다.
아띠샤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지만 이후 담고 있는 분량에 따라서 '경을 자세하고 넓게 공부한 후 경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자(까담슝빠)', '람림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자(까담람림빠)', '핵심적인 내용만 골라서 수행하는 자(까담담악빠)'라고 하는 세 갈래 법맥으로 다시 나뉘었다.
이를 다시 카담빠 전승의 후계자이자 겔룩빠의 창시자 쫑까빠가 통합하여 《보리도차제광론(Tib. ལམ་རིམ་ཆེནམོ་, Wyl. lam rim chen mo)》를 저술했다. 이 외에도 《람림》과 관련한 여러 논서가 있다.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의 쫑까빠 불상[53] |
6.3. 특징[편집]
《람림》의 가르침에는 네 가지 큰 이익과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이하는 경론에 의거한 나란다불교학술원 게쉬 툽텐 소남스님의 설명이다.
《람림》의 네 가지 큰 이익은 다음과 같다.1) 부처님의 일체 교설에 모순이 없음을 알게 함.
2) 일체 교설을 진정한 가르침(요의법)으로 받아들이게 함.
3) 부처님의 견해를 속히 얻게 함.
4) 일체 죄업들이 저절로 소멸됨.[54]
또한 《람림》의 세 가지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현교와 밀교의 일체 내용을 모두 담고 있음2) 마음을 다스리는 순서를 우선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기 매우 쉬움.
3) 용수와 무착의 교의에 정통한 두 스승(릭빼쿠주와 쎌링빠)의 비전을 보충하였기에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특별함.
그 밖에 경론에서 말씀하신 도(道)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正道)를 말하며, 그것에 부족함과 과함이 없고 수행 자체에 그 어떤 오류도 없다. 또한 상근기 중생만이 아니라 하근기, 중근기 등 각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람림》은 일체 교설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6.4. 스승의 중요성[편집]
《람림》에서는 스승을 도(道)의 근원이라 하였다. 스승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제자 돔뙨빠가 인도에서 온 스승 아띠샤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티베트에서는 토굴 수행 등을 많이 하는데 공덕이 이루어지는 수행자가 많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자 아티샤는 "소승과 대승의 공덕들은 다 스승에 의지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너희 티베트 수행자들은 스승에 대해 평범한 인식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덕을 이루기 어렵다."라고 말하였다.
스승을 부처로 인식하면 부처의 가피를 받고 평범한 인간으로 인식하면 평범한 가피를 얻게 된다. 진제(眞諦)의 차원에서 모든 부처와 마찬가지로 구루 또한 동일한 불성(佛性)[55]을 갖고 있다. 속제(俗諦)의 차원에서 스승에 대한 믿음과 헌신은 외적 스승을 부처로 보는 청정한 인식을 갖게 하여 진제의 불성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길을 갈 때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바르게 갈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을 바르게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야 한다.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따라서 바른 스승을 찾고 바르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쫑까빠가 말하였다.
빼뚤(Dza Patrul) 린뽀체의《위대한 스승의 가르침(Kun bzang bla ma'i zhal lung)》에서는 스승을 의지하기 전에 스승을 관찰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승은 세세생생 귀의해야 할 대상이고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지도자이다. 만일 신중하게 관찰하지 않고 삿된 악지식(惡知識)을 만나면 평생의 선한 자량(資糧)이 악지식에 의해 사라지고 어렵게 얻은 인간의 생(生)도 헛되이 보내게 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선지식을 만났다면 그를 처음에는 법우(法友)나 도반으로 여기고, 경론의 가르침에 따라 6년, 10년, 12년 이상 관찰하며 바른 선지식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함부로 스승으로 섬겨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스승으로 섬기게 되면 스승을 범부(凡夫)로 여기거나 함부로 흠잡는 일 없이 스승에 대한 청정한 인식을 유지해야 한다.
미륵보살의 《대승장엄경론(Mahāyānasūtrālaṃkāra)》에서는 선지식의 요건을 10가지로 말하였다.
1) 계학: 자기 자신을 조복함
2) 정학: 지(止, 샤마타)
3) 혜학: 인무아(人無我)의 지혜
4) 제자보다 뛰어난 공덕
5) 이타(利他)를 좋아하는 정진력
6) 교학: 경율론 삼장에 밝음.
7) 진여의 증득: 법무아(法無我)의 지혜
8) 언변이 좋음
9) 중생에 대한 자애심: 사랑과 자비로 법을 설함
10) 반복되는 설법을 싫어하지 않는 것.
10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계정혜 삼학과 진여의 증득, 중생에 대한 자애심 등 5가지 조건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마저도 찾지 못하면 두어가지 조건이라도 충족하는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성천보살의 《사백론(Catuḥśataka)》에서는 제자의 조건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치우치지 않는 마음(편견이 없음)
2) 지혜(지성)
3) 구도심(求道心)
제자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마음[56]과 같은 신심과 공경심으로 신구의(身口意) 삼문(三門)을 다해 스승을 섬겨야 한다. 선지식 스승을 모시는 법은 마명(馬鳴, Aśvaghoṣa)의《사사오십송(事師五十頌, Gurupañcaśika)》 등 여러 대승 경론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스승을 의지하는 수행법이 제대로 되면, 수행의 큰 문을 연 것과 같다. 이 때부터 제대로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다.
6.5. 귀의[편집]
귀의의 대상인 삼보(三寶)를 나타낸 람림 전승의 촉싱(tshogs zhing)[57] |
다음은 《보리도차제광론》에 의거한 광성사 게쉬 소남 걀첸 스님의 법문 <불법에 들어가는 최상의 문, 귀의>의 요약본이다.
1. 귀의의 원인 귀의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첫째, 윤회의 두려움: 이 생에 우리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죽으며, 죽은 뒤에는 반드시 태어나고 이 태어나는 것은 업(業)에 달려있다. 선업의 힘이 적고 악업의 힘이 크면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로 간다고 생각하여 악취(惡趣)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삼보에 대한 믿음: 삼악도에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불법승 삼보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슴 깊이 일으켜야 한다. 타 종교처럼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구제하는 것과는 달리, 삼보에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 수행하여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원인을 깊게 사유하여야 하며 말로만 귀의해서는 안된다. |
2. 귀의의 대상 1) 귀의의 대상이 삼보임을 안다는 것은 불법승의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불보: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일체 공덕을 갖춘 분을 이름. 법보: 멸성제와 도성제. 멸성제는 번뇌를 제거하는 가르침이고, 도성제는 공덕을 이루는 가르침이다. 승보: 견도(見道) 이상의 성인 상술한 정의는 진제에서의 삼보이며, 속제에서의 삼보는 불상(불보), 십이부경(법보), 구족계를 받은 4명 이상의 승려가 모인 승가(승보)이다. 2) 삼보가 귀의처인 이유 첫째, 삼보 자신부터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둘째, 남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편에 뛰어나고 셋째, 일체 중생에게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자비를 베풀고 넷째, 자신에게 이익이 되든지 안되든지 관계없이 모두의 뜻을 성취케 하기 때문이다. |
3. 귀의하는 방법 1) 삼보의 공덕을 알고 귀의하는 것 ① 부처의 공덕에는 신(身), 구(口), 의(意), 사업(事業)의 공덕이 있다.
- 사업의 공덕 : 부처의 신, 구, 의, 사업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일체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 ② 법의 공덕은 멸성제와 도성제의 공덕이다. ③ 승가의 공덕은 견도(見道) 이상을 얻은 성인(聖人)들의 공덕이다. 2) 삼보의 차이를 알고 귀의하는 것 삼보 각각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귀의하는 것. 무착이 《집학론》에서 6가지 차이[59]에 대해 말한 것을 이해해야 함. 3) 삼보를 인정하고 귀의하는 것 불보는 구제할 수 있는 법을 보여주는 분, 법보는 실제로 구제해주는 법, 승보는 구제해주는 도반으로 인식해야 함. 예를 들어 환자가 병에서 낫고자 할 때 의사와 간호사와 약에 의지하는 것처럼,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벗어날 수 있는 법을 보여준 의사 같은 불보, 실제의 약에 해당하는 법보, 환자를 간호해주는 간호사 같은 도반인 승보에 의지해야 한다. 4) 외도(外道)와 불도의 귀의처의 차이를 알고 귀의하는 것 외도와 불도의 귀의처의 차이를 이해하고서 오직 삼보만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음을 알고서 귀의하는 것. |
4. 귀의하고 나서 행해야 할 것 1) 행하지 말아야 할 것 3가지 ① 불보에 귀의하고서 다른 귀의처를 구하지 않는 것. ② 법보에 귀의하고서 중생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③ 승보에 귀의하고서 나쁜 벗과 어울리지 않는 것. 2) 행해야 할 것 6가지 ① 삼보의 차이와 공덕을 기억하고서 거듭거듭 귀의하는 것. ② 이익을 생각하고서 밤낮으로 귀의하는 것. ③ 은혜가 큰 것을 생각하고서 공양 올리는 것. ④ 남을 귀의하도록 이끄는 것. 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삼보에 의지하는 것. ⑥ 어떤 경우에라도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 것. |
5. 귀의함으로써 생기는 이익 ① 불자(佛子)가 되는 것. ② 모든 계율의 토대가 되는 것. ③ 과거에 쌓은 업장을 줄이고 없애는 것. ④ 큰 공덕을 쌓는 것. ⑤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 ⑥ 사람과 귀신으로부터 해침을 당하지 않는 것. ⑦ 모든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것. ⑧ 속히 성불할 수 있게 되는 것. |
6.6. 마음 동기[편집]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앞서 출리심, 보리심 같은 마음 동기를 강조한다. 마음 동기, 즉 의도에 따라 수행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승법을 수행하더라도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세속적 행복을 위해 수행하면 세속법이 되고,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수행하면 소승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수행이 끝난 후 회향(廻向)[60]을 할 때도 회향의 목적과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번 생만을 위해 회향하면 회향의 공덕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생을 위해 회향하면 다음 생까지 공덕이 이어지고, 더 나아가 일체 중생의 무상정등각을 위해 회향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공덕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난다.
오명불학원(五明佛学院)의 켄뽀 출트림 로죠(Tsultrim lodro) 스님은 경전에 의거하여 마음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 동기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세 가지 동기란 선하지 않은 동기, 무기(無記)의 동기, 선한 동기를 말한다. 먼저 선하지 않은 동기란 이번 생만을 생각하고 이번 생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동기이다. 다시 말해 이번 생의 부, 명예, 건강, 장수 등을 얻고 장애와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 자체는 죄악이 아니지만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 유루(有漏)의 법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번 생만을 위하는 선하지 않은 동기로 수행하면 대원만이나 마하무드라 같은 최상승법을 수행해도 세간법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과보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무기(無記)의 동기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동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방생의 공덕과 이익을 알지 못하면서 타인을 따라 무심코 방생에 동참하는 경우가 무기의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무기의 동기를 선한 동기로 바꾸라고 권한다. 무기의 동기일지라도 선한 동기와 무기의 동기와의 차이는 선한 동기와 선하지 않은 동기와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선한 동기는 삼사도(三士道), 즉 하사도(下士道), 중사도(中士道), 상사도(上士道) 세 가지로 나뉜다. 하사도는 다음 생에 인간과 천상의 삶을 누리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선하지 않은 동기와 하사도의 차이점은 같은 유루의 행복이라도 이번 생만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음 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중사도는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으로 다시 말해 소승불교의 성문, 연각의 발심이다. 상사도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해탈성불을 바라는 보리심으로 대승보살의 발심이다. 중사도와 상사도의 차이는 자비심의 대소(大小)라고 할 수 있다.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자립논증 중관학파와 달리, 대승과 소승은 지혜의 측면에서 차이가 없으며 둘은 자비심의 크기에 따라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소승의 아라한도 인무아(人無我)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아는 지혜를 갖추었다고 본 것이다. 귀류논증파에 따르면 보살 10지 중 제 7지에 해당하는 원행지(遠行地)에 이르러 비로소 보살은 종성(種性) 뿐 아니라 지혜로도 성문, 연각을 압도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이 끝난 후 회향(廻向)[60]을 할 때도 회향의 목적과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번 생만을 위해 회향하면 회향의 공덕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생을 위해 회향하면 다음 생까지 공덕이 이어지고, 더 나아가 일체 중생의 무상정등각을 위해 회향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공덕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난다.
오명불학원(五明佛学院)의 켄뽀 출트림 로죠(Tsultrim lodro) 스님은 경전에 의거하여 마음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 동기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세 가지 동기란 선하지 않은 동기, 무기(無記)의 동기, 선한 동기를 말한다. 먼저 선하지 않은 동기란 이번 생만을 생각하고 이번 생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동기이다. 다시 말해 이번 생의 부, 명예, 건강, 장수 등을 얻고 장애와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 자체는 죄악이 아니지만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 유루(有漏)의 법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번 생만을 위하는 선하지 않은 동기로 수행하면 대원만이나 마하무드라 같은 최상승법을 수행해도 세간법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과보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무기(無記)의 동기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동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방생의 공덕과 이익을 알지 못하면서 타인을 따라 무심코 방생에 동참하는 경우가 무기의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무기의 동기를 선한 동기로 바꾸라고 권한다. 무기의 동기일지라도 선한 동기와 무기의 동기와의 차이는 선한 동기와 선하지 않은 동기와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선한 동기는 삼사도(三士道), 즉 하사도(下士道), 중사도(中士道), 상사도(上士道) 세 가지로 나뉜다. 하사도는 다음 생에 인간과 천상의 삶을 누리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선하지 않은 동기와 하사도의 차이점은 같은 유루의 행복이라도 이번 생만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음 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중사도는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으로 다시 말해 소승불교의 성문, 연각의 발심이다. 상사도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해탈성불을 바라는 보리심으로 대승보살의 발심이다. 중사도와 상사도의 차이는 자비심의 대소(大小)라고 할 수 있다.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자립논증 중관학파와 달리, 대승과 소승은 지혜의 측면에서 차이가 없으며 둘은 자비심의 크기에 따라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소승의 아라한도 인무아(人無我)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아는 지혜를 갖추었다고 본 것이다. 귀류논증파에 따르면 보살 10지 중 제 7지에 해당하는 원행지(遠行地)에 이르러 비로소 보살은 종성(種性) 뿐 아니라 지혜로도 성문, 연각을 압도한다.
6.7. 삼사도(三士道)[편집]
6.7.1.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편집]
《람림》에서는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취합하여 불교수행의 순서에 맞추어 하사도(下士道), 중(中)사도, 상(上)사도의 삼사도(三士道)로 정리했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를 차례대로 세간도, 나한도, 보살도라고 부를 수 있다. 혹은 인천(人天)승, 성문연각승, 보살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절차에 따라 첫 단계인 하사도부터 수행하여야 한다.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인 중사도 수행에 들어갈 수 있고, 중사도 수행이 무르익어야 그 다음 단계인 상사도를 닦을 수 있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의 심성을 갖추고 있고 상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와 중사도에서 익혔던 심성과 통찰 모두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리도차제의 수행은 누적적(累積的)이다.
김성철, 《불교, 정확하고 명쾌하고 자유롭게 - 보리도차제》
김성철,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
김성철,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와 보살도》
삼사도를 다시 그림으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1) 하사도
: 초기 불교부터 석가모니는 전문적인 수행이 어려운 일반 대중을 위해 보시(布施)하고 지계(持戒)하면 생천(生天)한다는 차제법문을 여러 번 설했다. 이처럼 다음 생에 인간, 천상과 같은 선취에 태어나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하사도 수행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십선법(十善法)을 행하고 십악업(十惡業)을 멀리 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하사도의 가르침은 모든 수행의 토대일 뿐 아니라 그 과보로 이번 생과 다음 생에 일시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또한 해탈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들은 이번생과 다음 생에도 팔유가[64] 십구족[65](八有暇 十具足)같은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
2) 중사도
: 아라한이 되어 개인의 해탈열반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을 토대로 하여 교법(敎法)인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익히고 증법(證法)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수행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는다.
3) 상사도
: 부처가 되어 일체 중생을 윤회의 끝없는 고통에서 구제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 중사도의 계정혜 삼학을 토대로 보살승을 수행한다. 보살승에는 바라밀승과 금강승 두 가지가 있다. 바라밀승(현교)의 육바라밀(六婆羅蜜) 및 사섭법(四攝法)과 금강승(밀교)의 밀법(密法)을 수행하여 지혜와 방편을 갖춤으로써 부처의 과위(果位)에 이른다.
자신의 수행 동기가 진정 무엇인지 늘 자문(自問)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수행 동기에 따른 실천이 없다면 진정한 동기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자신이 말로는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정신적 행복보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일체 중생을 위한 수행은 커녕 이번 생을 위한 수행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생을 위한 공부는 엄밀히 말해 람림 기준에서는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 생을 준비하는 하사도(下士道)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생을 위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더라도 분명 이번 생의 이익이 있으며, 비록 마음 동기는 이번 생에 한정되어 있지만 수행의 공덕과 인연법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다음 생과 해탈성불을 이루는 것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삼보와 같은 복전(福田)에 의지하는 업(삼보에 예경, 헌공, 성지순례, 탑돌이 등)은 (1) 출리심, (2) 보리심, (3) 공성의 지혜에 의지한 업처럼 윤회로부터 멀어지는 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보리도차제광론》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본생담》에 나오는 '킴닥 뻴게'라는 사람은 바른 마음동기를 갖추지 못하였지만 우연히 탑돌이한 공덕으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석가모니 재세시에 그가 출가를 원하자 부처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에게 출가할 수 있는 공덕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라한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전생의 공덕을 알려주며 그를 위로하였다. 그가 어느 전생에 파리로 태어났을 때 마른 소똥 위에서 냄새를 맡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 그 소똥이 떠내려가 어느 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출가할 수 있는 공덕이었다.
6.7.2. 보리심의 발심(發心)과 공덕[편집]
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이기에 최종적으로 보살의 보리심(菩提心)[66]을 수행 동기로 삼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쫑까빠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측면에서 성문승ᆞ독각승이 갖는 한계를 《보리도차제광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중사도(中士道)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윤회의 허물을 여러 방면에서 오랫동안 닦고 익혀서 육도 윤회가 불타는 구덩이와 같음을 보고서, 번뇌로 인해 생긴 고통을 완전히 멸하는 해탈 구하려는 마음으로 보배로운 삼학(계정혜)을 배워서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을 얻을 수 있고, 해탈을 얻으면 다시 또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허물 제거하는 것과 공덕 쌓은 것이 일부 만이기에(번뇌장만 제거되고 소지장[67]은 남아 있기에) 자신의 뜻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타(利他)를 이루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쫑까빠는 보리심을 발하여 대승에 입문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라한(성문승‧독각승)의 경지를 이루어도 궁극에는 대승(구경일승究竟一乘)에 들어가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지혜로운 이들은 처음부터 발보리심(發菩提心)으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마명보살의 《섭바라밀다론(攝波羅密多論)》에서『일체중생의 뜻을 이루는 데 힘없는 두 가지 승(성문승‧독각승)을 완전히 버리고 처음부터 대승의 대자비의 가르침에 따라서 몸과 말과 생각을 번뇌의 허물 하나도 없이 오직 이타를 위하는 한 맛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고,『행복과 불행의 모든 법은 꿈과 같음을 보고(모든 법이 무자성이다. 실체가 없다), 무지(無知)의 허물로 떠돌고 있는 낮은(천한) 중생들을 볼 때 최상의 행인 이타의 기쁨 버리고 자신의 뜻을 위해 어떻게 정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보리심을 수행하면 일체 중생의 이익을 얻게 되는 한편 이번 생과 다음 생의 행복, 그리고 해탈까지 모두 자연히 이룰 수 있기에 그 이익이 크다. 다음은 보리심의 공덕에 관한 《입보살행론》〈보리심의 공덕품〉 일부와 달라이 라마의 법문이다.
너무나 얻기 어려운 가만(假滿)의 이 몸을 얻었으니
고귀한 인생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는데도
지금 이것을 이용하여 인간의 몸을 받는 이익을
이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까.
캄캄하게 어두운 밤이라도 천둥이 치면
번개 빛이 잠시 대지를 밝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중생들의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잠시 일어나나이다.
이와 같이 선의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죄악의 힘은 매우 강대하고 무서우니,
수승하고 원만한 보리심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선으로도 그 악을 극복하기 어렵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사유하신 부처님들께서
보리심의 이익이 가징 광대함을 발견하셨으니
중생이 보리심에 의지해서 불법을 수행한다면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지복을
반드시 얻게 되나이다.
존재의 무수한 고통을 극복하기 바라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며
많은 행복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졌다면
결코 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되나이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중생이라도
선서(善逝)의 아들인 불자라 불려지고
신들과 사람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되나이다.
보리심은 가장 수승한 연금액(鍊金液)과 같나니
오염되고 탁한 범부의 부정한 몸을
고귀한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이러한 보리심을 아주 견고히 지켜야 하나이다.
중생의 인도자이신 부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깊이 사유하시고 [보리심을] 매우 존귀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진귀한 보배와 같은
보리심을 굳게 지켜야 하나이다.
다른 선업은 모두 파초와 같아서
열매를 맺고 나면 시들어 버리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난 뒤에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열매를 맺나이다.
큰 두려움이 있을 때 힘 있는 이에게 의지하듯
보리심에 의지하면, 극중한 악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보리심에 의지하지 않는가.
겁말(劫末)의 맹렬한 불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리심은] 온갖 죄업을
일순간에 완전히 소멸시켜주므로
보리심의 공덕은
무량한 것이라서
자애로운 미륵보살은
선재동자께 말씀하셨나이다.
보리심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나니
발원하는 원(願)보리심과
발원한 것을 실행하는 행(行)보리심이나이다.
어디를 가고 싶어가는 것과
실제로 가는 것이 다르듯이,
현명한 이들은 이 두 가지 보리심의 차이를
순서대로 알아야 하나이다.
원보리심에 의해서도, 윤회 속에서
해매는 중생들에게 커다란 공덕이 생기지만
그러나 행보리심처럼
끝없는 복덕이 생기는 것은 아니나이다.
누구든지 보리심을 이르킨 뒤에
무수한 중생들을 해탈시키는 일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 보리심을 바르게 지녀 실천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가, 잠을 자거나 방일에 빠져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더라도
[보리심을 가진] 공덕의 힘에 의해
허공같은 복덕이 끊임없이 생기나이다.
바르고 이치에 합당한 이 공덕들은
《선비청문경》에서
소승의 길로 향하는 이들을 위해
여래께서 말씀하셨나이다.
겨우 중생의 머리 아픈 고통을
없애주겠다는 생각만해도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좋은 의도 이기에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된다면
모든 중생의 한량없는 고통을 없애주고
그들은 모두의 최고의 행복으로 인도하기를
원한다면, 그 한량없는 공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나이까.
아버지나 어머니 그 누구에게, 중생을
요익케 하려는 이토록 큰 이타심이 있었던가.
신이나 성인이나, 혹은 범천(Brahman)이라 한들
누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겠나이까.
중생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꿈에서조차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 적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이를 위해 이런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나이까.
남들은 물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일으키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는 불자의 마음은
유례없는 경이로운 마음이나이다.
모든 중생들의 행복의 원천이고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감로약인
이 보배로운 마음 보리심의 공덕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나이까.
단지 남들을 도우려는 생각만 해도
보물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수승한 공덕을 얻는다는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실제로 행동한다면
당연히 더 말할 수 없는 복덕을 얻게 되나이다.
중생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향해 달려가고
행복을 바라면서도, 무지하기 때문에
행복의 원인들을 원수처럼 물리치나이다.
보리심은 , 행복을 잃어버리고
여러가지로 고통만 받는 이들에게
한량없는 기쁨을 주고
모든 고통을 없애주나이다.
보리심은 무명까지도 없애주나니
그에 비할 선업이 어디에 있으며
그와 같은 선지식이 어디에 있으며
그와 같은 복덕이 어디에 있겠나이까.《입보살행론》〈보리심의 공덕품〉 석혜능 譯
"생각하는 것은 남을 돕고자 생각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대보리도차제》 - 쫑까빠 대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장애를 없애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모든 성취를 가져오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아름다운 용모, 무병장수, 많은 중생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가난함과 괴로움, 슬픔을 없애는 것은 보리심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보리심 수행의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보리심이 일어나게 되면 악업을 정화하고 모든 복덕자량을 쌓는 것입니다.
보리심의 관한 법을 여러분들이 듣고 접한 것은 굉장히 큰 기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최대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체중생들을 성불의 지혜로 내가 이끌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러한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심하세요.제 14대 달라이 라마
처음에는 진정한 보리심을 내기 힘들지만 단계별 수행을 통해 세속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출리심(出離心)[68]을 갖게 되면서 점차 진정한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 언뜻 생각하기엔 윤회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과 일체중생을 위해 열반을 유예[69]하고 윤회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리심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진정으로 윤회의 고통을 인식하고 윤회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 후 다른 이들을 돌아보면, 그들이 겪을 윤회의 고통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즉 보리심은 달리 표현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체 중생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자비심을 발하여 출리심을 확충(擴充)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 유교 등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에서 보편적으로 언급하는 황금률(Golden Rule), 즉 '나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남에게도 똑같이 행하라.'는 법칙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6.8. 샤마타와 위빠샤나[편집]
티베트 불교에서 전승되는 기본적인 수행방법은 샤마타(shamatha)와 위빠샤나(vipashyana)[70], 즉 지관(止觀) 수행이다. 티베트어로 샤마타는 '평화롭게 머묾'이란 뜻의 시녜(zhi gnas), 위빠샤나는 '더 나아가서 봄', '명확하게 봄'이란 뜻의 학통(lhag mthong)이라고 한다. 지관수행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전승된 가장 보편적인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방불교에는 위빠사나로 전승되고 있고, 대승불교에서도 유식(唯識)학파 등에서 지관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불교에서 지관수행은 천태(天台)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승지관의 전통은 티베트 불교 외에는 거의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강원에서 지관 수행을 강조한 《대승기신론》이나 《선종영가집》 등의 논서를 배우지만, 실제 수행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간화선 위주로 수행한다. 따라서 한문문화권에서 대승교학은 교학의 이해로만 그치고 실천으로 증험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유식(唯識)과 중관(中觀)과 같은 교학은 수습하여 증득하지 않으면 본질을 체득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대승지관의 전통을 다시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승의 정신에 입각한 지관수행은 남방의 위빠사나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승규, 《티벳의 지관 수행 체계 연구》
대승의 지관 수행의 목적은 인무아(人無我)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포함한 공성(空性)을 증득하는 것이다. 만법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며 연기(緣起)하기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므로 공(空)하다는 것이 바로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실상이다. 대승의 수행자는 공성을 비량(比量)[71] 뿐 아니라 현량(現量)[72]으로도 바르게 인식하는 견도(見道)의 단계를 거쳐 지혜와 방편을 함께 닦아 일체 중생을 위해 불과(佛果)를 성취한다.
- 반야심경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의미 : 진제(眞諦)인 공성(空性)과 속제(俗諦)인 연기(緣起)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의식의 분별 상(이름, 생각, 인식 등)으로는 각기 다른 두 가립(假立)된 법(法)인 체성일(體性一) 반체이(返體異)(ngo bogcig ldog patha dad)의 관계이다.[73]
지관 수행을 다루는 티베트 불교 논서로는 까말리쉴라의 《수습차제》, 쫑까빠의 《보리도차제광론》 등이 있다. 이들 논서는 《해심밀경》과 같은 대승 경전을 바탕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역시 대승 경전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의 지관 수행과 상당부분 맥락을 같이 한다. 구체적인 샤마타와 위빠샤나 수행법은 티베트 불교 내 종파와 전승마다 다르며 굉장히 다양하다. 현대에는 상좌부 불교, 선불교 등 다른 수행 전통과 결합한 명상법도 개발되었다.
현교의 교학에 따른 지관수행 외에도 밀교의 생기차제나 원만차제 수행 역시 샤마타와 위빠샤나를 함께 닦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원리를 따른다. 예를 들어 밀교 본존의 상호(相好)나 만트라의 염송에 집중하는 것은 샤마타에 해당하며 본존을 관상(觀想)할 때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이 고정불변한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의 상태로 관(觀)하는 것은 위빠샤나에 해당한다.
밀교에는 족첸(dzog chen)이나 마하무드라(mahamudra), 대중관(mahamadhyamika)과 같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고 바로 직지심체(直指心體)하여 본성에 안주하는 명상도 있다.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대중관 등은 동아시아의 선불교, 특히 간화선 이전의 초기 선불교와 유사한 면이 있다. 닝마빠, 까규빠 등은 자파(自派)의 직지심체 요결과 기맥(氣脈)수행이 한 생에 성불 가능한 최상승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의 직접적인 지도와 차제(순서)에 따른 단계별 수행의 성취 없이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같은 최상승법을 익힘은 어불성설이고, 자신과 타인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현대에 들어서 대중에게 많은 밀법이 공개되고 족첸, 마하무드라 관련 서적도 다수 출간되었으나, 책을 읽는 것 만으로 밀교 그리고 밀교 중에서도 최상승법인 족첸, 마하무드라, 대중관, 깔라차크라(시륜금강) 등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대승불교의 불법 수행이 그러하듯 이들 가르침의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진정으로 스승과 삼보에 대한 귀의심, 출리심과 보리심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법맥을 계승한 자격 있는 스승의 직접적인 전수와 지도가 필요하다. 수행의 성취 여부는 전적으로 법맥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 스승의 가피에 달렸으므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붓다 그 자체로 여기는 지극한 신심과 헌신 없이는 수행의 성취가 불가능하다.
일부 상근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먼저 바른 교학적 견해를 갖추고 현교의 지관 수행과 밀교의 예비수행, 구루 요가, 본존 요가(본존 수행) 등을 순서에 따라 완벽히 성취하여 기초가 되는 토대를 탄탄히 쌓은 후에 비로소 스승에게서 관정과 가르침을 받고 족첸, 마하무드라 등의 최상승법에 입문할 수 있다.
마하무드라 수행체계 소개
6.9. 소(小) 보리도차제[편집]
쫑까빠는 람림과 관련하여 《소보리도차제(보리도차제 오도송)(lam rim bsdus don)》, 《중보리도차제(lam rim ‘bring po)》, 《대보리도차제(보리도차제광론)(lam rim chen mo)》, 《삼종요도(도의 세 가지 핵심)(lam gtso rnam gsum)》, 《공덕의 근원(yon tan gzhir gyur ma)》등의 논서를 저술하였다. 그 중 람림의 핵심을 요약한 《소보리도차제(보리도차제 오도송)》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광성사 주지 게쉬 소남 걀첸 스님이 번역하고 목차를 달았다.
1. 문수보살님께 귀의하기
스승이신 문수사리께 귀의합니다.[75]
2. 최고의 능인(能仁)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경 올리기
한량없는 원만한 선행으로 이루어진 몸[身]
무량한 중생의 희구(希求)를 채워주는 말씀[口]
모든 존재를 여실히 보는 마음[意]
석가족의 수장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경합니다.
3. 미륵보살님과 문수보살님께 예경 올리기
비할 바 없는 설법자의 수승한 제자
승리자의 중생제도의 행 모두 짊어지고
무수한 중생계에 화신으로 나투신
미륵보살과 문수보살께 예경합니다.
4. 용수보살님과 무착보살님께 예경 올리기
매우 알기 어려운 반야경의 뜻을
바르게 설해주신 세상의 장엄이자
삼계에 완전히 널리 알려지신
용수보살과 무착보살의 발 아래 제가 예경합니다.
5. 아띠샤 스승님께 예경 올리기
두 분의 큰 스승으로부터 바르게 전승된
심오한 견해와 광대한 수행의 법맥
틀리지 않고 완전한 가르침의 보배 지니신
스승 아띠샤께 예경합니다.
6. 선지식들께 예경 올리기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보게 하는 눈이자
행운아를 해탈로 가게 하는 최상의 문을
대자비와 뛰어난 방편으로 바르게 설해주신
선지식들께 예경합니다.
7. 보리도차제 전승의 특징과 비유
세상 모든 지자(智者) 가운데 최고이자
중생계에 널리 알려지신
나가르주나와 아상가 두 분으로부터
바르게 전승된 《보리도차제》는
해탈을 구하는 이들의 모든 원 이루어주기에
여의주와 같은 수승한 가르침이며
훌륭한 모든 경론(經論)의 핵심 모았기에
바다와 같은 큰 가르침이나이다.
8. 보리도차제의 네 가지 위대함
모든 가르침을 어긋남 없이 깨닫게 하고
모든 경론을 요의법으로 알게 하며
부처님의 뜻을 쉽게 깨닫게 하여
큰 허물의 절벽에서도 보호하나이다.
9. 보리도차제를 문사수행으로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
그러므로 인도와 중국, 티베트의 행운아들이
실천하는 최상의 요의법인 삼사도의 차제를
기뻐하지 않을 현자가 어디 있겠는가!
10. 팔만사천대장경의 핵심인 보리도차제를 설하거나 듣는 공덕
모든 경전의 핵심을 모으고 모은 《보리도차제》를
단 한번 설하거나 듣기만 하여도
정법을 설하고 듣는 공덕 크게 쌓을 수 있기에
그 뜻을 새겨야 하네.
11. 예비 수행 - 도의 뿌리인 스승을 의지하는 방법
현생과 내생의 모든 선한 인연의 뿌리는
바른 길 보여주신 선지식임을 알아
부지런히 생각과 행으로 이치대로 의지해야 함을 알고
목숨을 다해 말씀대로 실천하는 공양으로
스승을 기쁘게 해야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76]
12. 하사도 - 유가구족의 몸을 의미 있게 보낼 것을 권함
여의주보다 더 소중하고 단 한번 얻은 유가구족의 이 좋은 몸은
얻기는 어렵고 번개처럼 사라지기 쉬우니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 세속의 모든 일
겨가 바람에 날려가듯 부질없음을 알고
밤낮으로 삼사도의 핵심을 지녀야만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3. 삼보에 흔들림 없이 귀의하고 귀의의 학처를 배울 것을 권함
죽은 뒤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을 자신이 없고
오직 삼보만이 이 두려움에서 구제해 주시니
항상 삼보에 흔들림 없이 귀의하고
귀의의 학처(學處)[77] 에서 물러남 없이 정진해야 하네.
그 또한 선업과 악업의 인과를 바르게 알아
취하고 버리는 것을 이치대로 실천하는 것에 달려있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4. 성불의 길로 가는 자의 자격을 갖출 것을 권하심
최상의 경지 일체종지 이루기 위해서는
유가구족(有暇具足)의 몸 없이 제대로 나아갈 수 없으니
이 좋은 몸 받을 수 있는 부족함 없는 선업을 쌓아
죄와 훼범의 허물에 물든 삼문[身口意]을 정화하고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니
항상 사대치력(四對治力)으로
간절히 참회수행을 해야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5. 중사도 - 고제와 집제의 허물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
윤회의 허물[苦諦]을 힘껏 사유하지 않으면
해탈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 생기지 않고
어떻게 윤회하는지[集諦] 사유하지 않으면
윤회의 뿌리를 끊는 방법 모르기에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출리심을 일으키고
윤회에 묶이는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6. 상사도 - 육바라밀의 바탕인 보리심의 공덕
보리심(菩提心)은 대승의 입문이고
위대한 육바라밀행의 바탕과 의지처이며
두 자량 모두 보리도로 바꾸는 연금액과 같이
광대무변한 선근을 모으는 복덕의 원천이라네.
이와 같이 알고서 용감한 보살들께서는
보배와 같은 보리심을 수행의 핵심으로 여기시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7. 보시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보시행 하는 방법
보시(報施)는 중생의 원을 들어주는 여의주와 같고
인색함의 끈을 잘라내는 최상의 무기라네.
두려움 없는 용기를 일으키는 보살행이며
시방에 명성을 널리 알리는 바탕이라네.
이와 같이 알고서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몸과 재물, 선근 모두 베푸는 뛰어난 행을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8. 지계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지계행 하는 방법
지계(持戒)는 악행의 때를 씻어내는 물이며
번뇌의 열을 식혀주는 달빛이라네.
대중 가운데 수미산처럼 웅장하고
힘으로 누르지 않아도 모두가 공경하게 되네.
이와 같이 알고서 현자들은 수지(受持)한 계율을
자신의 눈동자처럼 청정하게 지키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19. 인욕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인욕행 하는 방법
인욕(忍辱)은 용감한 보살들에게 최고의 장엄이며
번뇌의 불길을 잡는 최고의 고행이라네.
분노의 뱀을 잡아먹는 가루라와 같으며
거친 말의 무기를 막아내는 견고한 갑옷이라네.
이와 같이 알고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욕행을 닦아 익혀야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0. 정진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정진하는 방법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정진(精進)의 갑옷을 입으면
교학과 수행이 상현달(上弦月)처럼 차오르고
말과 행동 모두 의미 있게 되며
시작한 모든 일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네.
이와 같이 알고서 보살들께서는
게으름 모두 없애는 위대한 정진행을 하시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1. 선정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선정 닦는 방법
선정(禪定)은 마음을 다스리는 왕처럼
입선(入禪)하면 흔들리지 않는 수미산 같고
방선(放禪)해도 선(善)의 모든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아
몸과 마음을 큰 경안(輕安)에 이르게 하네.
이와 같이 알고서 최고의 선(禪) 수행자들은
산란함의 적을 물리쳐 늘 선정을 닦는다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2. 지혜바라밀의 네 가지 특징과 지혜 닦는 방법
지혜(智慧)는 심오한 공성을 보는 눈이며
윤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길이라네.
모든 경론에서 공덕의 원천이라 찬탄하며
무지의 어둠 밝히는 최고의 등불로 알려졌다네.
이와 같이 알고서 해탈을 원하는 지자는
이 반야의 지혜를 수많은 정진으로 닦는다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3.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
선정만으로는 윤회의 뿌리 자를 수 없고
선정 없이 지혜만으로도 번뇌를 제거할 수 없기에
공성을 확실히 깨닫는 지혜
흔들림 없는 사마타(止)의 말에 오르게 하고
예리한 무기 같은 양극단 여읜 중관의 논리로
변집견(邊執見)의 모든 대상 제거하여
이치대로 분석하는 힘으로 공성을 깨닫는 지혜 증장시켜야 하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4. 사마타와 위빠사나 함께 닦는 방법
집중명상을 익힘으로 선정을 얻는 것은 물론
분석명상으로도 공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선정 얻을 수 있기에
부지런히 지관 함께 닦는 것[止觀雙修]은 경이롭다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5. 지혜와 방편 함께 닦는 행운아들의 수행 자세
등지(等至)에서 본 하늘 같은 공성과
후득지(後得智)로 본 신기루 같은 공성 이 둘을 수습해
방편과 지혜 함께 닦는 보살의 바라밀행을 찬탄하시네.
이와 같이 삼사도와 지관 함께 닦는 도를 알아
지혜와 방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행운아들이 수행하는 방식이라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6. 밀교 수행
원인승(原因乘) 현교와 결과승(結果乘) 밀교의 두 가지 대승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공통도를 바르게 일으켜
선장 같은 훌륭한 밀교의 스승에 의지해
바다 같은 밀경(密經)에 들어가 요의법을 행함은
이 유가구족의 몸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라네.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실천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행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27. 회향
자신의 《보리도차제》 수행을 더 익히고
다른 행운아들 이롭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기뻐하신 원만 구족한 이 가르침을
알기 쉬운 말로 설한 이 인연 공덕으로
모든 중생 이 청정한 가르침과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존귀하고 거룩하신 쫑까빠 스승님께서 이와 같이 회향하셨으니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 그 분처럼 회향하나이다.
사대치력에 대하여 게쉬 소남 걀첸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행의 길로 나아갈 때 최선을 다해 악업을 버리고 선없을 쌓는 수행을 부지런히 행하기는 하지만, 순간순간 방일(放逸), 즉 게으름과 번뇌가 치성한 탓으로 저절로 악업을 쌓기가 더 쉬워서, 우리들의 신구의 삼문은 항상 죄와 훼범의 허물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업의 장애와 번뇌의 장애 둘 중 특히 업의 장애를 소멸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항상 의지처에 의지하는 힘, 후회하는 힘, 결심하는 힘, 대치(對治)를 실천하는 힘인 네 가지 대치의 힘으로 업장을 소멸하는 참회수행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대치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지처에 의지하는 힘이다. 우리가 짓는 죄에는 위로는 불보살을 대상으로 지은 죄와 아래로는 중생을 대상으로 지은 죄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 죄를 참회하기 위해 귀의와 보리심에 의지해야 한다. 귀의해서 불보살께 지은 죄를, 보리심에 의지해서 중생에게 지은 죄를 없앨 수 있다. 상구보라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의미이기도 하다.
둘째, 마음 속 깊이 후회하는 힘이다. 실수로 독약을 먹었을 때 후회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잘못한 죄에 대해 절절하게 후회해야 한다.
셋째, 목숨 다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힘이다.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기는 쉽지 않지만 한 두 가지라도 버릴 수 있다면 미련 없이 버리고, 그럴 수 없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계를 받아 지은 죄를 참회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결심하는 힘을 말한다.
넷째, 대치(對治)를 실천하는 힘이다. 죄를 참회하기 위해 신구의로 하는 모든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대표적으로 여섯 가지 실천행이 있다. (1)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 (2) 진언을 외우는 것, (3) 경전을 독송하는 것, (4) 공성을 깊이 사유하는 것, (5) 공양 올리는 것, (6) 부처님의 몸에 의지하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이 별로 나지 않는다면 목숨 다해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마음 역시 진심으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대치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은 죄를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악업의 과보를 깊이 생각해서 확신을 얻어야 하며, 이 또한 인과에 대해 깊이 생각해 확신을 얻음에 달려 있다.
보리도차제(람림) 수행자들의 수호존[78] |
"등지(等至)[79]에서 본 하늘 같은 공성과 후득지(後得智)[80]로 본 신기루 같은 공성 이 둘을 수습해 방편과 지혜 함께 닦는 보살의 바라밀행을 찬탄하시네"라는 게송의 의미에 대해 소남 걀첸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성 하나에 집중하는 등지로써 공성을 보는 방식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우리가 허공을 보는 방식과 같다.
일반적인 세속의 텅 비어 있는 '공간'은 경전에서 말하는 '허공'이 아니다. 공간은 유위법(有爲法)이고, 허공은 무위법(無爲法)이다. 우리가 보는 공간을 토대로 만지거나 부딪힘이 없는 그 자체가 경전에서 말하는 허공이다. 허공은 공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가진 여러 특징들 중 하나이다. 공간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허공은 눈으로 볼 수 없다.
허공은 하늘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세속에서 허공을 본다, 하늘을 본다고 할 때는 유위법의 허공과 유위법의 하늘로 바로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허공과 하늘은 무위법의 허공과 무위법의 하늘을 말한다. 즉 공간을 토대로 부딪힘이나 만질 수 없는 그 자체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생각만으로 인식해야 하는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공간과 허공은 체성일(體性一) 반체이(返體異)(ngo bogcig ldog patha dad)로 물과 얼음처럼 하나이다. 염주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염주의 무상(無常)과 염주의 공성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등지로 공성을 보는 방식은 위에서 말한 허공을 보는 방식과 같다. 등지로 본 허공과 같은 공성은 공성에 대해서 집중명상으로 보는 방식, 즉 삼매에서 보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후득지로 본 신기루와 같은 공성은 등지에서 후득지로 나올 때, 또는 입선에서 방선으로 나올 때, 즉 삼매에서 일상으로 돌아올 때 모든 대상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나 없는 환상이나 신기루와 같이 무자성(無自性)으로 보기 때문에 후득지로 본 신기루와 같은 공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등지와 후득지의 관점에서 허공과 신기루와 같은 공성을 보는 두 가지 수행방식을 닦고 또 닦아 익숙해지는 수습을 통해 보시 등 다섯 가지 방편바라밀과 공성을 깨닫는 지혜바라밀, 즉 방편과 지혜를 함께해 보살도를 닦고 저 언덕인 부처의 경지로 가는 것이 모든 불보살이 칭찬하는 바이다.
6.10. 관련 문헌[편집]
아띠샤 이전에 《람림》전승에 영향을 준 문헌으로는 샨티데바의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Skt. Bodhicaryāvatāra)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Skt. Bhāvanākrama; Tib. སྒོམ་རིམ་, Gomrim, Wyl. sgom rim) 》등이 있다.
겔룩빠의 《람림》관련 8대 논서인 《ལམ་རིམ་ཁྲིད་ཆེན་བཅོ་བརྒྱད་ནི། , 람림 티첸 걔》는 다음과 같다.
겔룩빠의 《람림》관련 8대 논서인 《ལམ་རིམ་ཁྲིད་ཆེན་བཅོ་བརྒྱད་ནི། , 람림 티첸 걔》는 다음과 같다.
- 쫑까빠 대사의 대·중·소 『람림』 3가지
『བྱང་ཆུབ་ལམ་རིམ་ཆེན་མོ། 람림 첸모』
『ལམ་རིམ་འབྲིང་པོ། 람림 딩뽀』
『ལམ་རིམ་ཉམས་འགུར། 람림 냠구르』 - 제3대 달라이라마 쏘남갸초의 『ལམ་རིམ་གསེར་ཞུན་མ། 람림 세르슌마』
- 제5대 달라이라마 롭상갸초의 『ལམ་རིམ་འཇམ་དཔལ་ཞལ་ལུང། 람림 잠뻴섈룽』
- 빤첸 롭상최겐의 『ལམ་རིམ་བདེ་ལམ། 람림 데람』
- 제쭌 롭상예셰의 『ལམ་རིམ་མྱུར་ལམ། 람림 뉴르람』
- 닥뽀 나왕닥빠의 『ལམ་རིམ་ལེགས་གསུང་ཉིང་ཁུ། 람림 렉쑹닝쿠』
아티샤의 까담빠 전승은 겔룩빠뿐만 아니라 티벳의 모든 종파에 영향을 끼쳤다. 겔룩빠 외에 다른 종파들의 관련 문헌으로는 닝마빠의 《공덕보장론(Yönten Dzö, Tib. ཡོན་ཏན་མཛོད་, Wyl. yon tan mdzod)》,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Tib. ཀུན་བཟང་བླ་མའི་ཞལ་ལུང་, Kunzang Lamé Shyalung; Wyl. kun bzang bla ma'i zhal lung)》, 까규빠의 《감뽀빠의 네 가지 법(Tib. དྭགས་པོ་་ཆོས་བཞི་, Wyl. dwags po chos bzhi)》, 《해탈장엄론(Tib. དྭགས་པོ་ཐར་རྒྱན་, Dakpo Targyen; or Tib. དམ་ཆོས་ཡིད་བཞིན་གྱི་ནོར་བུ་ཐར་པ་རིན་པོ་ཆེའི་རྒྱན་, Wyl. dwags po thar rgyan, or dam chos yid bzhin nor bu rin po che'i rgyan) 》, 사캬빠의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남(Tib. ཞེན་པ་བཞི་བྲལ་, shyenpa shyidral, Wyl.zhen pa bzhi bral) 》, 《도과론 (道果論, Skt. mārgaphala; Tib. ལམ་འབྲས་,Wyl. lam ‘bras) 》등이 있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남(ཞེན་པ་བཞི་བྲལ་)》[81]- 문수보살이 사첸 꿍가 닝뽀(sa chen kun dga' snying po) 에게 전해준 짧은 게송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존재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게 아니다.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
국내에 번역된 관련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상당 수 서적은 절판된 점 참고 바람)
#아티샤
- 《달라이라마의 보리도등론》 : 아티샤의 논서 《보리도등론》에 대한 14대 달라이 라마와 쪼네닥빠(Co ne grags pa) 린뽀체의 주석이 담겨 있다.
#까말라쉴라
- 《달라이 라마의 수행의 단계》 : 《수습차제》에 관한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번역하였다.
-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 《수습차제》원문 번역과 쌈예 논쟁, 《수습차제》에 관한 해제가 담겨 있다.
-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 : 《수습차제》원문 번역과 간략한 해제가 포함된 책이다.
#겔룩
- 《깨달음에 이르는 길》 : 《보리도차제광론》의 최초 한글 완역본이다. 한국인들이 읽기 쉽게 잘 윤문(潤文)되어 있지만 부분적으로 오역이 있다. 번역이 잘 되었다고 평가받는 영역본 《The Great Treatise on the Stages of the Path to Enlightenment》를 함께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
- 《보리도에 이르는 차제 넓게 설한 것이 여기에 있다》 : 《보리도차제광론》중에 마지막 <관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직역에 가깝게 번역한 책이다. 광성사 게쉬 소남스님이 이 책을 교재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보리도차제광론 1권》 : 비교적 정확한 번역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현재까지 전체의 약 1/5에 해당하는 예비수습 부분만 번역되었다. 앞으로 번역이 마무리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 : 보리도차제에 관한 파봉카(Pabongka) 린뽀체의 논서 《손 안에 있는 해탈》을 초펠스님이 한국어로 편역한 책이다. 보리도차제의 핵심이 읽기 쉽게 잘 편역되어 있어 초심자에게 좋다.
- 《손 안에 있는 해탈과 중관의 열쇠》 : 파봉카 린뽀체의 《손 안에 있는 해탈》과 14대 달라이 라마의 《중관의 열쇠》를 번역한 책이다.
- 《도해 쫑카빠 대사 람림, 깨달음의 길을 말하다》 : 쫑까빠 대사의 일생과 그의 가르침을 그림과 표 등으로 알기 쉽게 요약한 책이다. 또한 겔룩빠와 관련된 티베트 불교의 사상과 역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어 티베트 불교 입문서로도 추천할 만하다.
- 《보리도차제약론》 : 보리도차제의 가르침을 요약한 쫑까빠의 논서이다.
- 《보리도차제의 마르티 일체지로 나아가는 지름길》 : 보리도차제에 관한 8대 논서 중 하나로 5대 빤첸 라마 롭상 예쎼가 저술하였다. 반야, 중관, 인명, 구사, 계율 등 오부대론을 배우지 않으면 《보리도차제광론》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5대 빤첸 라마의 논서는 보리도차제의 핵심을 잘 설명하면서도 실제 수행에 적용하기 쉬워 초심자가 읽기에 좋다.[82]
- 《깨달음의 길》 : 1976년 달라이 라마가 다람살라 법회에서 보리도차제(람림)에 대해 법문한 내용이 담겨있다.
- 《쫑카빠의 도의 세 가지 핵심》 : 도(道)의 세 가지 핵심인 출리심, 보리심, 공성의 견해에 관한 쫑까빠의 논서이다.
- 《티베트불교 수행의 설계도》 : 겔룩빠의 입장에서 티베트불교의 수행 순서와 단계별 가르침을 소개한 책이다.
- 《티베트 불교문화》 : 게쉬 룬둡 소빠가 쓴 책으로 인도 다람살라 티벳도서관에서 티베트 불교 소개 및 티베트어 학습용 교재로 쓰이는 책이다. 전반부는 티베트 불교 문화를 소개하였고 후반부는 보리도차제 가르침을 요약하였다.
#까규
- 《해탈장엄론》 : 밀라레빠의 수제자인 감뽀빠가 까담빠의 보리도차제(람림) 전승과 틸로빠의 마하무드라 전승의 관점에서 저술한 까규빠의 주요 논서이다.
- 《마하무드라 예비수행》 : 마하무드라 전승의 예비수행인 사공가행(四共加行)과 사불공가행(四不共加行)에 관한 잠곤 꽁뚤 린뽀체의 논서이다. 예비수행은 단순히 본수행을 위해 거쳐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수행과 다를 바 없으며, 제대로 수행하면 예비수행만으로도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 《까르마빠 존자님께 배우는 사가행수행》 : 마하무드라 예비수행에 관한 17대 까르마빠와 밍규르 린뽀체의 해설이 담긴 책이다.
- 《번뇌를 지혜로 바꾸는 수행》 : 역시 마하무드라 예비수행에 관한 밍규르 린뽀체의 해설서이다.
#닝마
-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 : 닝마빠의 예비수행에 관한 빼뚤 린뽀체의 논서 《꾼장 라매 섈룽》을 번역한 책이다. 종파를 불문하고 널리 읽히는 유명한 논서이다.
- 《대원만 수행 요결》 : 켄뽀 소다지 스님이 번역한《꾼장 라매 섈룽》의 한역본을 중역(重譯)한 책이다.
- 《마지막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 빼뚤 린뽀체가 현밀(顯密)의 수행 단계별 견해, 명상, 행위를 정리한 논서이다. 현대 닝마빠의 주요 지도자이자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딜고 켄체 린뽀체가 해설을 덧붙였다.
- 《궁극의 행복》 : 역시 현대 닝마빠의 주요 스승인 종사르 켄체 린뽀체가 예비수행에 관해 해설한 책이다.
- 《티베트 지혜의 서》 : 닝마빠의 과학자 출신 승려로 명성 높은 마티유 리카르가 종파를 불문하고 여러 티베트 불교 스승들의 가르침을 모은 후 수행 단계에 따라 편집한 책이다.
7. 강원의 교육과정[편집]
티베트 불교의 최대종파인 겔룩빠는 다른 종파보다 교학을 강조하여 전체 강원 교육과정을 수학하는 데 20여 년 정도 걸린다. 현대교육제도의 초등과정부터 대학원과정까지에 해당하는 기간을 불교 교육에 투자한다고 볼 수 있다.
겔룩빠 외의 타 종파는 보통 9~10년 이상의 강원 과정을 거친다. 강원 과정 이후에도 승려 개인의 자율적인 교학연구는 계속 이어지며, 개중에는 겔룩빠처럼 20년 가까이 강원에서 학습한 후 켄뽀 학위를 취득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타 종파 승려가 겔룩빠 승려보다 교학 수준이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종파 간의 교학적 견해는 대부분 일치하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광성사 소남 걀첸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겔룩빠의 3대 사찰인 데뿡 사원의 로셀링 강원에는 1학년부터 19학년까지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주로 《인명학(因明學)》, 《반야학(般若學)》, 《중관학(中觀學)》, 《율(律)》, 《구사론(俱舍論)》 등 5대 경전을 배우는 교육방법을 체계적으로 잘 갖추었다고 한다. 5대 경전을 주로 배우는 점은 겔룩빠뿐 아니라 다른 종파에서도 동일하다. 소남 걀첸 스님, 《티베트의 큰 강원에서 5대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방법》
강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먼저 예비과정에 들어간다. 맨 처음 출가 서원을 하며 삭발과 승복을 입고 승려로서 사원에 들어간다. 한국 불교의 행자나 원불교의 간사 과정과 비슷하며, 이때 승가의 규율과 의식, 글과 기도문 암송 등을 배우고, 사원 곳곳에서 운력(運力)을 하면서 사원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승려들이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박사학위 격인 게쉬나 켄뽀 자격을 얻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탈락하고 각자에 맞는 직무를 배당받아 승원의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7.1. 5대 경전의 학습방법과 핵심[편집]
5대경을 배울 때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무조건 경전을 외워야 한다.
둘째, 경을 보지 않고 외우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
셋째, 뜻을 알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넷째, 경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자주 보아야 한다.
다섯째,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경의 내용을 깊이 새겨야 한다.
둘째, 경을 보지 않고 외우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
셋째, 뜻을 알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넷째, 경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자주 보아야 한다.
다섯째,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경의 내용을 깊이 새겨야 한다.
5대경을 포함한 불교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基) - 기본 바탕인 세속제와 진제의 이성제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기(基) 즉 기본이 되는 사성제, 진속이제 등 존재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道) 즉 수행은 앞서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에 맞는 오도(五道)와 십지(十地) 등 방편과 지혜의 수행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果) 즉 결과는 존재론과 수행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과 맞는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과위(果位) 즉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 등 부처의 신구의(身口意)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7.2. 문사수(聞思修)의 체계[편집]
티베트 불교는 공부 따로 수행 따로 없이 배움 그 자체를 수행으로 생각하고, 문사수(聞思修, Skt. śruta cintā bhāvanā; Tib. ཐོས་བསམ་སྒོམ་གསུམ་, tö sam gom sum, Wyl.thos bsam sgom gsum)를 통해 경전을 공부한다.
문(聞), 즉 배움으로써 경전의 뜻을 타력(他力)으로 대충 이해하게 만든다.
사(思), 즉 깊게 생각함으로써 경전의 뜻을 자력(自力)으로 확실하게 확신이 생기게 한다.
수(修), 즉 닦음으로써 경전의 뜻을 깊게 마음에 익히게 한다.
사(思), 즉 깊게 생각함으로써 경전의 뜻을 자력(自力)으로 확실하게 확신이 생기게 한다.
수(修), 즉 닦음으로써 경전의 뜻을 깊게 마음에 익히게 한다.
문(聞), 즉 배움이 부족하면 문혜(聞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문혜(聞慧)가 부족하면 사(思), 즉 관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사(思)가 부족하면 사혜(思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聞), 문혜(聞慧), 사(思), 사혜(思慧)의 바탕이 없으면 수(修), 즉 도(道) 닦는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무엇보다 제일 먼저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티베트 강원의 스승들이 늘 강조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 큰 강원에서는 문사수(聞思修)의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하고난 뒤 밀교(密敎)의 깊은 수행법을 배우고 실천 수행한다.
7.3. 기초 과정[편집]
제일 먼저 《듀라(섭류학攝類學)》를 배운다. 《듀라》는 인명학(因明學)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논리 이론을 최초로 배우는 과목으로, 티벳의 스승이신 차빠 최끼 생게가 경량부의 이론 방식을 접목하여 량(量)의 전반적인 의미를 요약하여 ‘듀라’라고 정하였다. <듀라>는 소논리, 중논리, 대논리 세 가지로 나뉘며, 기(基), 도(道), 과(果) 세 가지 중 주로 존재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 《로릭(심류학心類學)》을 배운다. 구체적인 심리학이 아닌 일반적인 마음의 종류, 가령 현량(現量), 비량(比量), 분별심(分別心), 비분별심(非分別心), 육식(六識), 심왕(心王), 심소(心所) 등을 설명한다. 또는 7종심식(七種心識) 즉 현량식(現量識), 비량식(比量識), 재결식(再決識), 사찰식(伺察識), 현이미정식(顯而未定識), 의심(疑心), 전도식(顚倒識) 등을 가르친다.
세 번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다. 진인(眞因)은 과인(果因), 자성인(自性因), 불가득인(不可得因) 세 가지로 나뉘며, 사인(似因) 또한 상위인(相違因), 부정인(不定因), 불성인(不成因) 세 가지로 나뉜다.
네 번째, 《둡타(종의宗義)》를 배운다. 종의는 학파, 교파라고도 부른다. 외도나 불교도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적 바탕(基), 수행방식(道), 그 결과(果) 셋에 대한 교리적 설명 방식 등을 말한다. 간략하게 고대 인도의 외도 5개 파(派)인 논의오파(論議五派; 수론파數論派, 순세파順世派, 승론파勝論派, 폐타파吠陀派, 리계파離繫派)와 불교도의 4대 학파인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 중관학파(中觀學派)로 나눈다.
다섯 번째, 《살람(지도地道)》을 배운다. 보살의 십지(十地)[83]와 오도(五道)[84], 그리고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에 대해 배운다.
이상의 과정을 배우는 데 대략 4년 정도 걸린다.
두 번째, 《로릭(심류학心類學)》을 배운다. 구체적인 심리학이 아닌 일반적인 마음의 종류, 가령 현량(現量), 비량(比量), 분별심(分別心), 비분별심(非分別心), 육식(六識), 심왕(心王), 심소(心所) 등을 설명한다. 또는 7종심식(七種心識) 즉 현량식(現量識), 비량식(比量識), 재결식(再決識), 사찰식(伺察識), 현이미정식(顯而未定識), 의심(疑心), 전도식(顚倒識) 등을 가르친다.
세 번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다. 진인(眞因)은 과인(果因), 자성인(自性因), 불가득인(不可得因) 세 가지로 나뉘며, 사인(似因) 또한 상위인(相違因), 부정인(不定因), 불성인(不成因) 세 가지로 나뉜다.
네 번째, 《둡타(종의宗義)》를 배운다. 종의는 학파, 교파라고도 부른다. 외도나 불교도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적 바탕(基), 수행방식(道), 그 결과(果) 셋에 대한 교리적 설명 방식 등을 말한다. 간략하게 고대 인도의 외도 5개 파(派)인 논의오파(論議五派; 수론파數論派, 순세파順世派, 승론파勝論派, 폐타파吠陀派, 리계파離繫派)와 불교도의 4대 학파인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 중관학파(中觀學派)로 나눈다.
다섯 번째, 《살람(지도地道)》을 배운다. 보살의 십지(十地)[83]와 오도(五道)[84], 그리고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에 대해 배운다.
이상의 과정을 배우는 데 대략 4년 정도 걸린다.
7.4. 5대 경전 과정[편집]
여섯 번째, 《석량론(釋量論)》을 배운다. 석량품(釋量品) 또는 광본양학(廣本量學)이라고도 하며, 고대 인도의 법칭(法稱)보살이 지었다. 이 논서는 자리(自利), 양성립(量成立), 현전(現前)과 타리(他利) 등 4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명칠론(因明七論) 중에서 세 근본이 되는 논서이다. 《둡타(종의宗義)》를 배우고 난 뒤 대략 10년 이상 해마다 겨울철 한 달씩 스님들이 한 절에 모여 집중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일곱 번째, 《반야현관장엄론(般若現觀莊嚴論)》을 7년 동안 배운다. 미륵오론인 《현관장엄론》, 《대승장엄론》, 《중변분별론》, 《법법성분별론》, 《구경일승보성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일체종지, 도지, 일체지, 일체오등현관, 정현관, 차제현관, 찰나오등현관과 법신 등 8가지로 보살도의 모든 수행과 부처님의 경지인 과위(果位)에 대해 설명한 미륵보살이 지은 논서이다.
여덟 번째, 《입중론(入中論)》을 3년 동안 배운다.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의 논서인 《입중론》은 월칭보살(짠드라끼르띠)이 저술하였고, 10품으로 나뉜다. 주로 중관사상 즉 공성(空性)과 연기(緣起)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홉 번째, 《율경근본율(律經根本律)》을 4년 동안 배운다. 인도의 율사 공덕광보살이 4부 율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다. 주로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17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열 번째, 《구사론(俱舍論)》을 2년 동안 배운다. 《아비달마 구사론본송》이라고도 하며, 인도의 세친보살이 저술한 소승의 논서로 본문은 게송체이고 8품으로 나뉜다. 당나라 삼장 현장법사가 범어를 한문으로 역경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교(顯敎)에 대해 기초과정 포함하여 거의 20년 정도 체계적으로 배운다.
일곱 번째, 《반야현관장엄론(般若現觀莊嚴論)》을 7년 동안 배운다. 미륵오론인 《현관장엄론》, 《대승장엄론》, 《중변분별론》, 《법법성분별론》, 《구경일승보성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일체종지, 도지, 일체지, 일체오등현관, 정현관, 차제현관, 찰나오등현관과 법신 등 8가지로 보살도의 모든 수행과 부처님의 경지인 과위(果位)에 대해 설명한 미륵보살이 지은 논서이다.
여덟 번째, 《입중론(入中論)》을 3년 동안 배운다.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의 논서인 《입중론》은 월칭보살(짠드라끼르띠)이 저술하였고, 10품으로 나뉜다. 주로 중관사상 즉 공성(空性)과 연기(緣起)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홉 번째, 《율경근본율(律經根本律)》을 4년 동안 배운다. 인도의 율사 공덕광보살이 4부 율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다. 주로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17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열 번째, 《구사론(俱舍論)》을 2년 동안 배운다. 《아비달마 구사론본송》이라고도 하며, 인도의 세친보살이 저술한 소승의 논서로 본문은 게송체이고 8품으로 나뉜다. 당나라 삼장 현장법사가 범어를 한문으로 역경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교(顯敎)에 대해 기초과정 포함하여 거의 20년 정도 체계적으로 배운다.
7.5. 강원 과정 이후[편집]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 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한다.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에는 겔룩빠의 경우 불교철학박사에 해당되는 게쉬(ge she), 나머지 종파에서는 불교 강백(講伯)에 해당하는 켄뽀(khen po)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 시험(디규), 대론(對論) 시험(쬐규) 등을 거쳐 칭호를 받는데, 겔룩빠에서 남자 수행자는 게쉬(Geshe), 여자 수행자는 게쉬마(Geshema) 칭호를 받는다. 타 종파의 경우 남자 수행자는 켄뽀(Khenpo), 여자 수행자는 켄모(Khenmo)란 칭호를 받는다. 게쉬에도 시험 성적에 따라 아래서부터 도람빠(Dorampa,) 링세(Lingtse), 촉람빠(Tsorampa), 하람빠(Lharampa)의 네 단계가 있다. 게쉬 학위를 얻기 위해선 약 23년, 켄뽀 자격을 얻기 위해선 약 13년이 걸린다. 그 후 밀교의 깊은 수행법을 기간 없이 평생 배우고 실천한다.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에는 겔룩빠의 경우 불교철학박사에 해당되는 게쉬(ge she), 나머지 종파에서는 불교 강백(講伯)에 해당하는 켄뽀(khen po)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 시험(디규), 대론(對論) 시험(쬐규) 등을 거쳐 칭호를 받는데, 겔룩빠에서 남자 수행자는 게쉬(Geshe), 여자 수행자는 게쉬마(Geshema) 칭호를 받는다. 타 종파의 경우 남자 수행자는 켄뽀(Khenpo), 여자 수행자는 켄모(Khenmo)란 칭호를 받는다. 게쉬에도 시험 성적에 따라 아래서부터 도람빠(Dorampa,) 링세(Lingtse), 촉람빠(Tsorampa), 하람빠(Lharampa)의 네 단계가 있다. 게쉬 학위를 얻기 위해선 약 23년, 켄뽀 자격을 얻기 위해선 약 13년이 걸린다. 그 후 밀교의 깊은 수행법을 기간 없이 평생 배우고 실천한다.
게쉬 학위 취득을 위한 대론 시험 영상 |
겔룩빠에서는 게쉬 학위를 취득한 후 규뙤 사원이나 규메 사원으로 대표되는 밀교 사원에 들어가 밀교 교학을 배운다. 밀교 공부와 수행은 평생 배우고 닦는다는 개념이고, 밀교 수행은 스승의 허락과 자격을 얻어야만 행할 수 있으므로, 견고한 현교의 철학적 토대를 갖춘 준비된 사람만이 밀교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
티베트에서는 교학이 갖춰지지 않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것을 '마치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바위산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수행자는 산의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정확한 지도가 있어야 하고, 산을 오르다가 맞닥트릴 수 있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철저한 교학의 토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교학을 철저하게 배우고 닦는 과정에서 이미 수행의 반은 완성된다.
8. 종파[편집]
1963년 전(全) 티베트 불교 전승 회의 당시 사진.[85] |
티베트 불교는 크게 닝마빠(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싸꺄빠(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까규빠(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 전승의"), 겔룩빠(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등 4개 종파로 나뉜다.[86]
티베트불교의 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舊派, nyingma)와 신파(新派, sarma)이다. 닝마빠(rNy-ing ma pa)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구파(舊派) 또는 고파(古派)로 번역되는데,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보다 후에 일어난 사캬, 까규, 겔룩, 조낭 등 모든 티베트의 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구파와 신파를 나누는 기준은 경전의 번역이다. 티베트에 인도불교가 도입되던 7~8세기에 티베트의 법왕들이 후원하여 행한 번역을 구역(舊譯), 10~11세기 지방 귀족 세력이 지원하여 행한 이루어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종파 간에 정치적 대립이 빈번하였지만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 이해와 존중이 이루어지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 불교》
8.1. 닝마빠[편집]
닝마빠의 개조(開祖) 빠드마삼바와[88] |
닝마(Nyingma)는 '오래된'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티베트 불교 중 가장 먼저 생긴 종파이다. 8세기 티송데쩬 왕은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초청하면서 밀교 성취자인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대동했다. 빠드마삼바와는 밀교행을 통해 티베트의 토속 종교인 뵌교의 신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토속신들을 제압하여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샨따락쉬따는 왕실의 후원 하에 쌈예사(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닝마빠는 이때 샨따락쉬따가 대동했던 밀교 성취자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가르침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닝마빠는 까규빠와 함께 실수행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교학보다 실수행을 중시하는 점은 두 종파 모두 동일하지만, 닝마는 까규와 달리 명상보다 견해를 좀 더 강조한다. 본연의 지혜를 통해 얻는 가장 핵심적인 견해(Skt. upadeśa; Tib. མན་ངག་, mengak, Wyl. man ngag, pith instruction)를 먼저 알려준 후 그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닝마빠의 전승으로는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인 까마(kama)와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제자들이 비장(秘藏)하고 시절인연에 따라 발견되는 전승인 뗄마(terma)[89]가 있다. 또한 독자적으로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에 해당한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빠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에 해당한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8.2. 사캬빠[편집]
사캬빠의 다섯 창시자들[90] |
사캬빠는 까규빠와 마찬가지로 나로빠의 가르침에 그 기원을 두고 또한 독미 로짜와(Drokmi Lotsawa)라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까규빠와 다른 특징들이 있다. 사캬빠는 쾬(Khon) 일족 자체가 종파가 된 독특한 경우이다. 회색 땅을 뜻하는 사캬(Sa skya) 지방의 일족인 쾬 일족의 쾬 꾄촉겔뽀(Khon dkon mtshog rgyal po)를 종조로 하는 사캬빠 역시 밀교 전통에 근거한다. 사첸 꾄촉겔뽀는 인도에서 요기 나로빠와 밀교승원인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독미 로짜와로부터 헤바즈라 딴뜨라에 근거한 람데(lam ’bras) 전통을 배운다. 수행의 길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밀교에 바탕을 두고 논하는 람데 전통은 사캬빠의 핵을 이루는 중심 교리이다.
사캬빠의 종정인 사캬 티진(Sakya Trizin) 직은 대대로 쾬(Khon)족 남자 혈통에게 계승되었다. (가운데) 제 41대 사캬 티진 (좌) 제 42대 사캬 티진 (우) 갸나 바즈라 린뽀체 (Gyana Vajra Rinpoche) |
8.3. 까규빠[편집]
마르빠 까규의 개조(開祖) 마르빠[91] |
까규란 '구전의 전통(口傳傳統)'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인도의 밀교 요기 띨로빠(Tilopa)를 시조로 삼는다. 띨로빠는 나로빠(Nāropā)를 가르쳤다. 티베트인 역경사 마르빠 로짜와[92](Marpa lotsawa)는 역경사 독미 로짜와 샤꺄예쉐(Drokmi Śākya Yeshé)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 나로빠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마르빠의 가르침인 마하무드라(mahāmudrā)는 이후 밀라레빠(Mi la ras pa)를 거쳐 까규빠로 성립되었다.
까규빠는 명상, 구루 요가, 나로 6법과 같은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까규와 닝마는 모두 실수행을 중시하지만, 까규는 닝마와 달리 명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견해를 익히고 체험해나가는 방식을 따른다.
마르빠에게서 유래한 마르빠 까규빠는 4대 8소 종파로 나뉘어진다. 마르빠 까규의 초기 4대 종파는 깔마 까규(Karma bka' brgyud), 바롬 까규('Ba' rom bka' brgyud), 찰빠 까규(Tsalpa Kagyü), 팍두 까규(Pagdru Kagyü)이다.
이 중 팍두 까규는 다시 8개의 분파로 갈라져 둑빠 까규(‘Brug pa bka' brgyud), 디꿍 까규('Bri gung bka' brgyud), 딱룽 까규(sTag lung bka' brgyud), 마르창 까규(Martsang Kagyü), 슝셉 까규(Shugseb Kagyü), 트로푸 까규(Trophu Kagyü), 얌장 까규(Yamzang Kagyü), 옐빠 까규(Yelpa Kagyü)를 이룬다.
4대8소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종파는 깔마, 바롬, 둑빠, 디꿍, 딱룽 5개 종파들이다. 까루 린뽀체가 속한 상빠 까규(Shangs pa bka' brgyud)는 마르빠 까규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법맥이지만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르빠는 인도의 마이뜨리빠(mai tri pa)와 마이뜨리빠의 스승인 나로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샹빠까규의 창시자인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은 마이뜨리빠와 니구마(ni gu ma) 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니구마는 나로빠의 여자 형제 또는 배우자라고 전해진다.
8.4. 겔룩빠[편집]
겔룩빠의 개조(開祖) 쫑까빠[93] |
겔룩빠의 종조 쫑카빠 롭상닥빠(Tshong kha pa bLo bzang grags pa)는 14세기 동북 티베트 암도의 쫑까 지방에서 태어나서 깔마빠 및 여러 종파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사캬빠의 렌다와 쇤누로도(Red mda' ba gzhon nu blo gros)를 주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까담빠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의 주석서인 쫑까빠의 《보리도차제광론》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로 까담빠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빠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쫑까빠의 개혁을 통해 겔룩빠는 여러 승려와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화주(化主)가 되고 몽골, 오이라트, 청(靑) 왕조 등이 시주(施主)가 되는 최왼(mchod yon) 관계를 맺어 통치계급과도 폭넓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5대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 중 코슈트부의 군사를 빌려 티베트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겔룩빠는 정교합일(政敎合一) 체제를 구축하고 티베트 불교 내의 최대 종파로 부상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1대 달라이 라마는 쫑까빠의 제자 겐둔 둡빠(dGe 'dun grub pa)이다. 그러나 겐둔 둡빠는 생전에 달라이 라마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르러 몽골의 알탄 칸에게 '일체를 성스럽게 아시는 바즈라다라 달라이 라마'라는 존칭을 부여받고, 전전대 전생인 겐둔 둡빠까지 소급하여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3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어 주어 알탄 칸에 보답한다. 4대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이유로 유일하게 티베트인이 아닌 달라이 라마이다.
달라이 라마가 받은 존칭 중 '바즈라다라(Vajradhara)', 즉 집금강(執金剛)은 밀교의 이상적인 부처인 지금강불(持金剛佛)을 지칭하거나 혹은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스승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쓰인다. '달라이(Dalai)'는 몽골어로 '큰 바다(大洋)'라는 뜻이고 '라마(Lama)'는 티벳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1대 달라이 라마를 제외하고 달라이 라마로 선정되면 모두 '바다'라는 뜻의 '갸초(rgya mtsho)'가 들어간 법명(法名)을 얻게 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법명인 '뗀진 갸초(bstan ‘dzin rgya mtsho)'의 '뗀진'은 '가르침(佛法)의 소유자'란 뜻이다. 즉 '뗀진 갸초'란 법명은 '불법의 바다'를 뜻한다.
공식적인 겔룩빠의 종정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겔룩빠의 본산인 간덴 (dGa' ldan)사원의 사원장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이다. 간덴 티빠는 간덴 사원 안의 싸르쩨(Shartse)와 장체(Jangtse) 두 학당의 방장(方丈)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데 임기는 전통적으로 7년이다. 환생자 제도로 선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과 학식, 덕망, 승가 내 경력 등으로 선정되는 직위이다.
8.5. 조낭빠[편집]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빠는 12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 전문 수행가인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ātha)에게서 사사받았다. 후캄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수미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캬빠에서 계를 받았던 될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대에 이르러 융성했다.
조낭빠는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이후 조낭빠는 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정치적ㆍ사상적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졌고 몽골과 암도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한다.
14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러 조낭빠는 비로소 티베트 불교의 정식 종파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빠와 조낭빠의 교학적 입장은 다르다. 달라이 라마는 반야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보는 겔룩빠의 전통적 견해에 따라 조낭빠의 타공을 부정하고, 일체법이 승의적(勝義的)인 차원에서 독자적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랑똥(rang stong), 즉 자공(自空)을 견지한다.
9. 환생자(뚤꾸) 제도[편집]
9.1. 환생자(뚤꾸)의 정의[편집]
티베트 불교의 뚤꾸(Tulku)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같은 존재, 혹은 높은 수준의 성취자(siddha)로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뚤꾸는 응신(應身)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마나카야(nirmanakaya)의 티벳어 의역이다. 중국에서는 '살아있는 부처'란 뜻으로 '활불(活佛)'이라고 번역한다. 한국에서는 통상 '린뽀체'[94] 혹은 '환생자'라 일컫는다.
9.2. 환생자 제도의 토대[편집]
9.2.1. 불신론(佛身論)과 보살사상[편집]
티베트 불교의 환생자 출신인 뚤꾸 퇸둡(Tulku Thondup)은 그의 저서 《Incarnation: The History and Mysticism of the Tulku Tradition of Tibet》에서 환생자 제도의 토대로 (1) 붓다의 삼신(三身) (2) 보리심의 서원(誓願) (3) 업(karma) (4) 환생을 언급하였다. 뚤꾸 퇸둡의 견해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환생자 제도의 토대를 설명할 수 있다.
뚤꾸의 정의와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뚤꾸는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과 보살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부처[95]의 몸, 즉 불신(佛身)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이타행을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현하는 불신(佛身)을 '응신' 또는 '화신'이라고 한다. 중생이 업력(業力)에 의해 불가피하게 윤회하는 것과는 달리 대승의 불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원력(願力)으로 응신을 나투어[96] 자발적인 윤회환생을 선택한다.
뚤꾸란 이러한 대승불교의 불신론, 보살사상과 스승-제자 간의 사자상승(師資相承)[97]을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티베트 불교 고유의 종교적 제도이다. 대표적인 뚤꾸로 흔히들 달라이 라마를 연상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공식적인 초대 뚤꾸는 13세기 환생한 깔마 까규빠의 법왕인 2대 까르마빠(Karmapa) 깔마 팍시(Karma Pakshi)이다. 이후 티베트 불교의 다른 종단과 티베트의 민속 종교인 뵌(Bon)교에서도 깔마 까규빠의 환생자 제도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뚤꾸의 정의와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뚤꾸는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과 보살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부처[95]의 몸, 즉 불신(佛身)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이타행을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현하는 불신(佛身)을 '응신' 또는 '화신'이라고 한다. 중생이 업력(業力)에 의해 불가피하게 윤회하는 것과는 달리 대승의 불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원력(願力)으로 응신을 나투어[96] 자발적인 윤회환생을 선택한다.
뚤꾸란 이러한 대승불교의 불신론, 보살사상과 스승-제자 간의 사자상승(師資相承)[97]을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티베트 불교 고유의 종교적 제도이다. 대표적인 뚤꾸로 흔히들 달라이 라마를 연상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공식적인 초대 뚤꾸는 13세기 환생한 깔마 까규빠의 법왕인 2대 까르마빠(Karmapa) 깔마 팍시(Karma Pakshi)이다. 이후 티베트 불교의 다른 종단과 티베트의 민속 종교인 뵌(Bon)교에서도 깔마 까규빠의 환생자 제도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9.2.2. 윤회와 업[편집]
환생자 중 대표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면, 달라이 라마의 자리는 새로 후임자를 찾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환생한 자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끔 한다. 그렇다면 초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는 같은 인물일까? 둘의 몸만 다를 뿐 영혼은 같다는 설명은 불교적으로 옳지 않다. 불교에서는 영혼이나 아트만처럼 고정불변하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이를 상좌부 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대승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으로 설명하였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일종의 경향성, 연속성은 존재한다.
즉 초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경향성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선대 달라이라마로부터 이어지는 경향성 중에는 선대가 쌓은 공덕(지혜와 복덕)[98]도 포함된다. 이러한 지혜와 복덕이 바로 환생자가 차기 달라이 라마의 직위에 오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의 사후에 법을 전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스승의 공덕을 이어받은 스승 본인의 환생자라 보고 환생자를 찾는다.[99] 인연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보살의 서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법맥의 순수한 가르침을 최대한 오염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그 법맥의 창시자나 주요 스승들이 다시 환생하여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환생자를 찾은 후 그에게 내재된 수승한 자질을 다시 발현시키기 위하여 환생자는 일정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환생자가 교육을 받는 동안 생기는 가르침의 공백은 전생의 제자들이나 다른 스승들이 메꾼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이를 상좌부 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대승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으로 설명하였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일종의 경향성, 연속성은 존재한다.
즉 초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경향성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선대 달라이라마로부터 이어지는 경향성 중에는 선대가 쌓은 공덕(지혜와 복덕)[98]도 포함된다. 이러한 지혜와 복덕이 바로 환생자가 차기 달라이 라마의 직위에 오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의 사후에 법을 전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스승의 공덕을 이어받은 스승 본인의 환생자라 보고 환생자를 찾는다.[99] 인연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보살의 서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법맥의 순수한 가르침을 최대한 오염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그 법맥의 창시자나 주요 스승들이 다시 환생하여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환생자를 찾은 후 그에게 내재된 수승한 자질을 다시 발현시키기 위하여 환생자는 일정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환생자가 교육을 받는 동안 생기는 가르침의 공백은 전생의 제자들이나 다른 스승들이 메꾼다.
9.3. 환생자 선정과 교육[편집]
스승의 사후에 전생 제자들과 다른 고승들은 후보들을 대상으로 여러 단계에 거쳐 전생에 대한 기억, 뚤꾸로서의 자질 등을 검증한 끝에 뚤꾸를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전생에 사용하던 물건을 찾아내거나 전생 제자를 알아보는 방식으로 뚤꾸를 찾곤 하지만 뚤꾸를 찾는 방법이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 밖의 다른 예는 다음과 같다.
- 죽기 전 유언이나 편지로 자신의 내생을 직접 밝힌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으로 환생할지 혹은 정토에 태어날지 등을 밝힌다. 심지어 어느 곳에 태어날지, 부모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환생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명시할 때도 있고 시(詩) 형식으로 암시하는 글을 남겨 해석을 요할 때도 있다
-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전생이 어떠했는지 말하고, 사원에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밝힌다.
-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가진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임에도 자신이 전생에 배운 경전을 강의한다든지, 처음 보는 경전을 한 번만 보고 외운다든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언을 외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낸다.
- 다른 고승들로부터 환생자임을 인증받는다.
- 과거에 경전이나 기록에서 예언된 환생자이다.
- 죽기 전 유언이나 편지로 자신의 내생을 직접 밝힌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으로 환생할지 혹은 정토에 태어날지 등을 밝힌다. 심지어 어느 곳에 태어날지, 부모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환생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명시할 때도 있고 시(詩) 형식으로 암시하는 글을 남겨 해석을 요할 때도 있다
-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전생이 어떠했는지 말하고, 사원에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밝힌다.
-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가진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임에도 자신이 전생에 배운 경전을 강의한다든지, 처음 보는 경전을 한 번만 보고 외운다든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언을 외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낸다.
- 다른 고승들로부터 환생자임을 인증받는다.
- 과거에 경전이나 기록에서 예언된 환생자이다.
뚤꾸들은 대개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비범한 자질을 갖고 있지만, 잠재된 능력을 다시 발현시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뚤꾸 역시 완벽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거나, 여러 생을 거치며 퇴락의 위험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100] 대부분의 뚤꾸는 환생 후에도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과거생에 세운 중생 구제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정진하는 과정을 거친다. 충분한 교육과 수행을 거친 후에는 본격적으로 중생 제도를 위한 전법활동을 펼친다.
9.4. 환생의 불교적 원리와 관련 사례[편집]
불교에서는 생명체가 색(色, 물질), 수(受, 느낌), 상(想, 인식), 행(行, 의지), 식(識, 의식)이라는 오온(五蘊, 다섯 가지 무더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 중 색온은 물질이고 수, 상, 행, 식은 의식 혹은 정신에 해당한다. 생명체가 죽음에 이르게 되면 색온, 수온, 상온, 행온 및 식온의 거친 부분은 소멸된다. 이는 뇌의 일부가 손상되거나 뇌사에 이르는 경우 기억이나 자의식이 훼손당하는 기존의 과학적 연구 사실과 일치한다. 의식과 상호작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제한되면서 의식의 기능에도 제한이 생기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식온의 가장 미세한 부분, 즉 초(超)미세의식은 미세물질과 상호작용하며 계속 유지되고, 이러한 초미세의식이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발생한 수정란과 합쳐져 환생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달라이 라마, U.C. 산타바바라 강연《마음의 본성》1부 2부 3부
사후에도 존재하는 미세의식과 관련된 사례로 티베트 불교의 툭담(tukdam/thukdam, ཐུགས་དམ་)이라고 하는 사후의 특수한 명상을 들 수 있다. 티베트어로 "툭(thuk)"은 마음이나 의식, "담(dam)"은 삼매(samādhi)나 명상 상태를 의미한다. 툭담에 든 고승들은 심정지로 의학적 사망(clinical death)이 선고된 이후에도 수 일 혹은 수 주에 걸쳐 시신이 부패하거나 시반(屍斑), 사후 강직이 발생하지 않고 생전처럼 시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따뜻한 체온[101]을 유지한다.
툭담은 티베트 불교권 지역인 몽골의 경우에만 지난 50여 년간 수십 차례의 사례 보고가 있었다.[102] 툭담은 비단 티베트, 몽골과 같은 춥고 건조한 지역 뿐 아니라 남인도, 대만 등 고온다습한 지역에서도 발생하는 현상이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제 6대 링(Ling) 린뽀체는 1984년 인도 다람살라에서 13일 동안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 2020년 5월 남인도에서 입적한 게쉬 롭상 체링(Lobsang Tsering) 스님이 20일 이상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다고 알려졌다.# 대만에서는 2017년 입적한 도종(Dorzong) 린뽀체가 3주 가까이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고[103], 2020년 7월 역시 대만에서 입적한 게쉬 잠빠 갸초(Jampa Gyatso)가 28일 간 툭담 상태를 유지하여 국립 대만중앙연구원(台灣中央研究院) 소속 과학자들이 혈중 산소 포화도와 맥박, 뇌파 등을 조사한 바 있다.[104]
이처럼 생전에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른 고승들은 바르도(bardo)[105]라는 죽음과 환생 사이의 과도기에 미세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 특히 그 중에서도 밀교 경전에서는 툭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106]
툭담 중 겪는 갖가지 의식과 신체의 변화는 의식을 뇌의 산물로 보는 기존의 과학적 견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툭담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리차드 데이비슨(Richard Davidson) 위스콘신대 교수 #, 스브야토슬라브 메드베데프(Svyatoslav Medvedev)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교수 # # 등이 툭담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착수한 바 있다.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식온의 가장 미세한 부분, 즉 초(超)미세의식은 미세물질과 상호작용하며 계속 유지되고, 이러한 초미세의식이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발생한 수정란과 합쳐져 환생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달라이 라마, U.C. 산타바바라 강연《마음의 본성》1부 2부 3부
사후에도 존재하는 미세의식과 관련된 사례로 티베트 불교의 툭담(tukdam/thukdam, ཐུགས་དམ་)이라고 하는 사후의 특수한 명상을 들 수 있다. 티베트어로 "툭(thuk)"은 마음이나 의식, "담(dam)"은 삼매(samādhi)나 명상 상태를 의미한다. 툭담에 든 고승들은 심정지로 의학적 사망(clinical death)이 선고된 이후에도 수 일 혹은 수 주에 걸쳐 시신이 부패하거나 시반(屍斑), 사후 강직이 발생하지 않고 생전처럼 시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따뜻한 체온[101]을 유지한다.
툭담은 티베트 불교권 지역인 몽골의 경우에만 지난 50여 년간 수십 차례의 사례 보고가 있었다.[102] 툭담은 비단 티베트, 몽골과 같은 춥고 건조한 지역 뿐 아니라 남인도, 대만 등 고온다습한 지역에서도 발생하는 현상이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제 6대 링(Ling) 린뽀체는 1984년 인도 다람살라에서 13일 동안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 2020년 5월 남인도에서 입적한 게쉬 롭상 체링(Lobsang Tsering) 스님이 20일 이상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다고 알려졌다.# 대만에서는 2017년 입적한 도종(Dorzong) 린뽀체가 3주 가까이 툭담 상태를 유지하였고[103], 2020년 7월 역시 대만에서 입적한 게쉬 잠빠 갸초(Jampa Gyatso)가 28일 간 툭담 상태를 유지하여 국립 대만중앙연구원(台灣中央研究院) 소속 과학자들이 혈중 산소 포화도와 맥박, 뇌파 등을 조사한 바 있다.[104]
이처럼 생전에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른 고승들은 바르도(bardo)[105]라는 죽음과 환생 사이의 과도기에 미세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 특히 그 중에서도 밀교 경전에서는 툭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106]
툭담 중 겪는 갖가지 의식과 신체의 변화는 의식을 뇌의 산물로 보는 기존의 과학적 견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툭담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리차드 데이비슨(Richard Davidson) 위스콘신대 교수 #, 스브야토슬라브 메드베데프(Svyatoslav Medvedev)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교수 # # 등이 툭담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착수한 바 있다.
9.5. 환생과 심신문제(Mind-body problem)[편집]
아비달마 불교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연속성을 갖고 있으며 물질과 상호작용한다. 달라이 라마는 1995년 뉴욕 칼라차크라 법회에서《석량론(양평석)》에 의거하여 의식과 물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은 과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는다. 지금의 생에서 전생의 마음이나 의식을 찾아갈 수 있다면, 물질계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이 갖는 연속성의 시초를 무한한 차원에까지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은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 작용하지만 그 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즉 직전의식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식이라는 결과가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의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성질을 지닌다. 의식은 의식 자체의 연속적인 성질에 의해 발생하며 물질 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 물질은 의식이 작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의식이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환생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에 따르면 중관학파는 윤회의 원인인 업(業) 종자의 저장소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기술한다. 하나는 임시적 기반으로 우리 생애 동안 작용하는 심식(心識)의 연속성이다. 다른 하나는 지속적 기반으로 온(蘊)들에 의해 명칭이 붙은 '나'이다. 이 '단지 나'는 성자들의 공성(空性)삼매, 깊은 잠, 죽음 과정에도 존재하며 업 종자를 운반한다. 그렇더라도 '단지 나'는 명칭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아무리 분석해봐도 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정리하자면 불교에서 보는 물질과 의식, 혹은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일원론과 이원론 모두를 배격하는 심신불이론(心身不二論) 내지 심신비이원론(心身非二元論, mindbody nondualism)에 해당한다. 불교의 존재론인 이제론(二諦論)[107]에 따르면 속제(俗諦)의 측면에서 물질과 의식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찰나생 찰나멸하는 연기적(緣起的) 현상의 일부로써, 기능과 특성상 별개의 존재처럼 분류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mindbody dualism)과 달리, 물질과 의식 혹은 물질과 의식에 의존하는 '나' 는 모두 가설(假設)된 개념이며 진제(眞諦)의 측면에서는 일체의 차별을 여읜 공성(空性, śūnyatā)으로써 불이적(不二的), 비이원적(非二元的)인 관계이다.
단, 인도 베단타(Vedānta) 학파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베단타 학파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reality)인 브라만(Brahman)을 상정하지만, 반야중관의 공성은 곧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자성(無自性)에 다름 아니다. 공성 그 자체도 언어로 가설(假說)된 개념에 불과할 뿐, 공성 또한 실체가 없는 공(空空)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반야중관에 의거한 불교의 비이원론은 특정한 실재를 근원으로 상정하지 않고(그러한 '실재'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허구이기 때문에), 속제(俗諦)인 연기(緣起)와 진제(眞諦)인 공성(空性)으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연기적 비이원론(緣起的 非二元論)이다. 또는 희론(戱論, prapañca)[108]에 의해 오염된 지각과 관념을 벗어난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중도적(中道的)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성철 동국대 교수,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 교수 등도 연기와 공의 개념을 현대 심리철학에 접목시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김성철, 《마음과 철학: 불교편》〈용수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
홍창성, 《다시 보아도 마음은 없다》
“마음은 과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는다. 지금의 생에서 전생의 마음이나 의식을 찾아갈 수 있다면, 물질계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이 갖는 연속성의 시초를 무한한 차원에까지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은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 작용하지만 그 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즉 직전의식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식이라는 결과가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의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성질을 지닌다. 의식은 의식 자체의 연속적인 성질에 의해 발생하며 물질 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 물질은 의식이 작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의식이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환생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에 따르면 중관학파는 윤회의 원인인 업(業) 종자의 저장소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기술한다. 하나는 임시적 기반으로 우리 생애 동안 작용하는 심식(心識)의 연속성이다. 다른 하나는 지속적 기반으로 온(蘊)들에 의해 명칭이 붙은 '나'이다. 이 '단지 나'는 성자들의 공성(空性)삼매, 깊은 잠, 죽음 과정에도 존재하며 업 종자를 운반한다. 그렇더라도 '단지 나'는 명칭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아무리 분석해봐도 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정리하자면 불교에서 보는 물질과 의식, 혹은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일원론과 이원론 모두를 배격하는 심신불이론(心身不二論) 내지 심신비이원론(心身非二元論, mindbody nondualism)에 해당한다. 불교의 존재론인 이제론(二諦論)[107]에 따르면 속제(俗諦)의 측면에서 물질과 의식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찰나생 찰나멸하는 연기적(緣起的) 현상의 일부로써, 기능과 특성상 별개의 존재처럼 분류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mindbody dualism)과 달리, 물질과 의식 혹은 물질과 의식에 의존하는 '나' 는 모두 가설(假設)된 개념이며 진제(眞諦)의 측면에서는 일체의 차별을 여읜 공성(空性, śūnyatā)으로써 불이적(不二的), 비이원적(非二元的)인 관계이다.
단, 인도 베단타(Vedānta) 학파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베단타 학파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reality)인 브라만(Brahman)을 상정하지만, 반야중관의 공성은 곧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자성(無自性)에 다름 아니다. 공성 그 자체도 언어로 가설(假說)된 개념에 불과할 뿐, 공성 또한 실체가 없는 공(空空)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반야중관에 의거한 불교의 비이원론은 특정한 실재를 근원으로 상정하지 않고(그러한 '실재'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허구이기 때문에), 속제(俗諦)인 연기(緣起)와 진제(眞諦)인 공성(空性)으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연기적 비이원론(緣起的 非二元論)이다. 또는 희론(戱論, prapañca)[108]에 의해 오염된 지각과 관념을 벗어난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중도적(中道的)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성철 동국대 교수,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 교수 등도 연기와 공의 개념을 현대 심리철학에 접목시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김성철, 《마음과 철학: 불교편》〈용수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
홍창성, 《다시 보아도 마음은 없다》
9.6. 환생자 제도의 위기[편집]
아래는 어떤 달라이 라마 관련 인터뷰이다.
인터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연 15대 달라이 라마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있다면 어떻게 선출한 것인가.'이다. 달라이 라마가 진술한 내용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작성된 무수한 성명서들과 저서들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이 글들을 통해 자신이 후계자를 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 것과 2007년 중국 정권이 통과시킨 법에 대해 거론했다. 해당 법은 어떤 티베트 고승들이 환생될 것이며 환생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지 결정할 권한을 (역설적이게도) 중국 공산당에 부여한다.인터뷰를 통해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의 이전 교학 저서들에서 언급한 교리에 대한 입장을 다시금 언급했다. 티베트와 몽골 고승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은 환생을 통해 계보를 이어간다. 달라이 라마가 거듭 언급한 바에 따르면 고승은 서거 전에 자신의 본질을 후계자에 전수할 수 있고[109], 고승 한 명이 두 사람 이상으로 환생하거나 전혀 환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고승의 뜻에 달렸다.크리스마스에 열린 달라이 라마와의 중요 인터뷰(Bitter Winter, 2018.12.29 >마시모 인트로빈(MASSIMO INTROVIGNE) 영어 인터뷰
정치적 이유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더이상 지속되기 힘든 위기에 처하였다. 또한 달라이 라마의 환생과는 별개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환생자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가령 닝마빠의 대표적인 환생자 스승인 종사르 켄체 린포체(Dzongsar Jamyang Khyentse Rinpoche)는 환생자 제도가 티베트 불교만의 문화이며, 그 문화가 현대 사회에 더이상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음과 자칫 물질주의와 결합하여 불법을 훼손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관련 발언 영상
환생자 제도가 본 취지대로 잘 적용되면 선거로 뽑힌 선출직 지도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 도덕적 권위를 갖게 된다. 실제로 환생자는 사원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사원의 운영과 전법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교황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손꼽히는[110] 달라이 라마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듯 많은 환생자들은 범인(凡人)이 행할 수 없는 여러 업적을 남기며 중생 구제의 사업을 충실히 이끌어왔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 환생자 제도에도 부작용이 존재한다. 가령 환생자의 활동이 사원의 명성과 재정 수입 증대에 직결되다보니 지나치게 타이트한 교육과 전법 스케줄로 환생자를 혹사시키기는 일이 있었다. 또한 환생자의 권위를 뒷배 삼아 환생자의 친족이나 측근들이 사원 운영에 간섭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심지어 환생자의 선정 과정에서부터 이권을 노린 세력이 개입하여 종종 가짜 환생자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또한 환생자가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유폐되거나 암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는 특히 티벳의 봉건제도와 연계되어 더욱 문제가 많았다. 환생자 중 일부는 종교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세속 군주로서 전쟁 등 승려로서는 관여하지 말아야 할 임무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이는 환생자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교합일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환생자 제도와 봉건제가 오랜 시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보니 불가피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정치적 권한을 티벳망명정부에 모두 이양하여 정교분리를 이룬 현대에는 더이상 이러한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생의 증거와 환생자들의 특출한 능력을 직접 목도하고, 굳은 신심과 헌신으로 환생자 스승을 모셔왔던 티베트인들에게 환생자 제도는 제도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달라이라마가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환생자 제도 자체는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9.7. 환생자에 관한 오해와 스승의 선택 문제[편집]
1. 환생자에 관한 오해와 편견들
혹자는 환생자에게 신비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자기 나름의 환상과 기대를 갖지만 이내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가령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달라이 라마가 왜 티베트 침공을 막지 못했는지, 왜 환생자 중에 단명(短命)하거나 혹은 방탕한 생활로 수행자의 위의(威儀)를 저버린 경우가 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의구심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상당 부분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중생 구제란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함을 의미하며, 번뇌를 제거해 줄 최상의 수단은 바로 설법이다. 석가모니는 "중생의 업을 물로 씻을 수 없고, 고통을 부처의 손으로 없앨 수 없으며, 부처의 마음에 있는 깨달음을 중생에게 선물처럼 줄 수 없없으니 오직 부처의 설법만이 해탈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부처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바른 가르침을 설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고 실천하여 업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중생 자신의 몫이다. 따라서 환생자에게는 우선적으로 바른 가르침을 구해야 마땅하다.
물론 불보살이 방편으로 신통을 부려 중생을 돕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의 환생자 스승들에게도 불보살의 모습으로 화현하거나 신통으로 이적(異蹟)을 행한 다수의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신통을 가진 불보살이라도 인과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석가모니도 고국인 카필라(Kapila)국이 멸망하고 친족인 석가(Sakya)족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대면하였을 때, 이것이 숙세의 업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끝내 막지 못하였다. 또한 경전을 보면 목련존자나 용수보살처럼 아라한이나 보살들도 자신이 지은 과거의 업으로 인해 깨달은 후에도 질병을 얻거나 사고를 겪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한편 보살의 사업은 불가사의하여 때로 속세의 기준에서 비난받을 일도 감수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능엄경》에서는 보살, 아라한들이 때로 음녀(婬女), 과부(寡婦), 간사한 도둑(姦偸), 도살하여 판매하는 사람(屠販) 등으로 응신(應身)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였다. 업에 의해 대부분의 중생들은 불보살의 법신이나 보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불보살들은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들과 같은 중생의 모습으로 화신을 나투기도 한다. 또한 불보살들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 하여 여섯 가지 바라밀의 온갖 행, 즉 필요한 온갖 수단과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존재이다.
환생자를 포함한 불교 선지식들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불교적인 관점으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환생자를 신격화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모든 환생자가 반드시 불보살의 화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진정으로 공성(空性)을 깨달은 선지식은 진제(眞諦)인 공성과 둘이 아닌 속제(俗諦)의 인과(因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더욱 인과에 어긋남 없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때로 파격적인 무애행(無礙行)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선지식도 있으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환생자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방식은 후술할 내용에서 다루고 있다.
2. 환생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과 스승의 선택 문제
티베트 내부에서 환생자가 굉장한 존경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환생자 제도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환생자로 선정되면 사원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스승으로 모실 가능성도 커지지만, 반드시 환생자를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대승장엄경론》등의 경론에서 말하는 선지식의 요건 중에 스승이 환생자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환생자라 함은 믿을 만한 법맥의 가르침을 잘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참고 사항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대승열반경》의 <사의법(四依法)>에 나와 있듯 사람이 아니라 법(法)에 의지해야 하며, 바른 법을 전해주는 사람이라면 환생자가 아니라 백정이나 거지라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서구에 처음 티베트 불교가 소개되었을 때, 서구인들은 환생자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별다른 고민 없이 환생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곤 하였다. 그들은 스승의 자격이나 스승과 제자 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이 사전에 스승의 중요성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제자를 받아들이는 우(愚)를 범할 때도 있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가 훼손되고 스승을 거역하거나 모독하는 심각한 업을 짓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환생자 제도와 스승의 선택 문제가 별도의 사안임을 알고, 스승의 자격과 제자의 의무 등을 미리 상세히 숙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스승으로 모시려는 사람이 경전에서 말하는 스승의 자격을 갖추었는지 신중히 관찰한 후에, 확신이 생기면 그 때 자신의 스승으로 선택해야 한다. 스승 또한 아무나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먼저 제자의 자격과 근기를 갖추었는지 살피는 과정을 거친다. 초심자가 처음부터 완벽한 스승을 찾기란 쉽지 않다. 훌륭한 스승을 알아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안목과 능력이 그만큼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환생자에게 신비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자기 나름의 환상과 기대를 갖지만 이내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가령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달라이 라마가 왜 티베트 침공을 막지 못했는지, 왜 환생자 중에 단명(短命)하거나 혹은 방탕한 생활로 수행자의 위의(威儀)를 저버린 경우가 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의구심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상당 부분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중생 구제란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함을 의미하며, 번뇌를 제거해 줄 최상의 수단은 바로 설법이다. 석가모니는 "중생의 업을 물로 씻을 수 없고, 고통을 부처의 손으로 없앨 수 없으며, 부처의 마음에 있는 깨달음을 중생에게 선물처럼 줄 수 없없으니 오직 부처의 설법만이 해탈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부처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바른 가르침을 설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고 실천하여 업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중생 자신의 몫이다. 따라서 환생자에게는 우선적으로 바른 가르침을 구해야 마땅하다.
물론 불보살이 방편으로 신통을 부려 중생을 돕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의 환생자 스승들에게도 불보살의 모습으로 화현하거나 신통으로 이적(異蹟)을 행한 다수의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신통을 가진 불보살이라도 인과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석가모니도 고국인 카필라(Kapila)국이 멸망하고 친족인 석가(Sakya)족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대면하였을 때, 이것이 숙세의 업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끝내 막지 못하였다. 또한 경전을 보면 목련존자나 용수보살처럼 아라한이나 보살들도 자신이 지은 과거의 업으로 인해 깨달은 후에도 질병을 얻거나 사고를 겪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한편 보살의 사업은 불가사의하여 때로 속세의 기준에서 비난받을 일도 감수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능엄경》에서는 보살, 아라한들이 때로 음녀(婬女), 과부(寡婦), 간사한 도둑(姦偸), 도살하여 판매하는 사람(屠販) 등으로 응신(應身)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였다. 업에 의해 대부분의 중생들은 불보살의 법신이나 보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불보살들은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들과 같은 중생의 모습으로 화신을 나투기도 한다. 또한 불보살들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 하여 여섯 가지 바라밀의 온갖 행, 즉 필요한 온갖 수단과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존재이다.
환생자를 포함한 불교 선지식들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불교적인 관점으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환생자를 신격화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모든 환생자가 반드시 불보살의 화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진정으로 공성(空性)을 깨달은 선지식은 진제(眞諦)인 공성과 둘이 아닌 속제(俗諦)의 인과(因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더욱 인과에 어긋남 없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때로 파격적인 무애행(無礙行)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선지식도 있으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환생자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방식은 후술할 내용에서 다루고 있다.
2. 환생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과 스승의 선택 문제
티베트 내부에서 환생자가 굉장한 존경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환생자 제도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환생자로 선정되면 사원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스승으로 모실 가능성도 커지지만, 반드시 환생자를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대승장엄경론》등의 경론에서 말하는 선지식의 요건 중에 스승이 환생자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환생자라 함은 믿을 만한 법맥의 가르침을 잘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참고 사항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대승열반경》의 <사의법(四依法)>에 나와 있듯 사람이 아니라 법(法)에 의지해야 하며, 바른 법을 전해주는 사람이라면 환생자가 아니라 백정이나 거지라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서구에 처음 티베트 불교가 소개되었을 때, 서구인들은 환생자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별다른 고민 없이 환생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곤 하였다. 그들은 스승의 자격이나 스승과 제자 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이 사전에 스승의 중요성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제자를 받아들이는 우(愚)를 범할 때도 있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가 훼손되고 스승을 거역하거나 모독하는 심각한 업을 짓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환생자 제도와 스승의 선택 문제가 별도의 사안임을 알고, 스승의 자격과 제자의 의무 등을 미리 상세히 숙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스승으로 모시려는 사람이 경전에서 말하는 스승의 자격을 갖추었는지 신중히 관찰한 후에, 확신이 생기면 그 때 자신의 스승으로 선택해야 한다. 스승 또한 아무나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먼저 제자의 자격과 근기를 갖추었는지 살피는 과정을 거친다. 초심자가 처음부터 완벽한 스승을 찾기란 쉽지 않다. 훌륭한 스승을 알아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안목과 능력이 그만큼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현대 닝마빠의 대표적인 스승이자 《더 컵(The Cup)》등 수 편의 영화를 제작한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종사르 잠양 켄체 린뽀체 (Dzongsar Jamyang Khyentse Rinpoche) |
스승을 찾는 것은 결혼 상대를 찾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티베트의 격언에 따르면 잘못된 결혼은 한 번의 인생을 망치지만, 잘못된 스승을 섬기는 것은 세세생생 수많은 생을 망칠 수 있어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스승을 찾을 때 유용한 종사르 켄체 린뽀체의 몇 가지 조언이다.
초심자는 의구심을 갖고 구루의 배경을 철저히 조사하길 바란다. 구루 주위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그/그녀의 책과 다른 저작물을 읽고, 그/그녀의 소셜 미디어를 평가해보라. 또한 단지 한 명의 구루에만 국한하지 말고, 눈 앞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다른 선택지들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 두어라.
구루가 수많은 추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그/그녀의 진정한 가치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수의 대중은 집단 부인(group denial) 현상을 유발하기 쉽다. 처음으로 흥미를 끄는 사람에게 안주할 수도 있지만, 제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기 전에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스타일, 다양한 법맥의 스승들을 알아보는 것이 현명하다. 그들은 아마도 당신의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특정 타입의 구루를 싫어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바로 그 타입의 구루가 당신에게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랄 지 모른다. #
예외적으로 과거 전생부터 자신과 사제(師弟)의 인연이 있는 선지식은 얼굴을 보기만 하거나 혹은 이름만 들어도 특별한 감흥이 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밀라레빠의 경우 처음에 스승 마르빠의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신심(信心)이 생기면서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오랫동안 스승을 관찰할 필요없이 바로 스승으로 모시기도 한다. 또한 달라이 라마나 사캬 티진, 까르마빠와 같이 명망 높은 법맥 스승들인 경우, 대개 자격이 충분히 입증된 스승들이므로 누구나 스승으로 모실 만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환생자(뚤꾸)에 관하여 달라이 라마가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라마(lama)와 뚤꾸(tulku)는 티베트 사회에서 존경받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칭호들이 단지 사회적 신분이 되어서 어떤 사람들을 뚤꾸나 린포체(rinpoche), 라마라고 부르는 것이 부패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칭호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을 나는 안타깝게 여긴다. 불교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종교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사람의 자격과 자질을 점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스승들은 칭호의 유무와 상관없이 열심히 수행해야 하고, 존경받을 자격을 갖춰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뚤꾸가 전생에 훌륭했던 불교 스승의 환생자로 인정받았으니까 그들이 틀림없이 부처일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서 그들을 활불(活佛)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든 뚤꾸가 부처는 아니며 부처는 커녕 보살도 아닌 경우가 많다.
(중략) 지금의 달라이라마가 된 이후로 나는 단지 불교 승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상기시키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신이 아니다. 또한 지금 인도의 다람살라에 있는 중앙 티베트 행정부는 수상이 이끌고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왕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의 지위가 불교계의 교황 같은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중략)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닝마, 사캬, 까규, 겔룩) 중 어느 종파의 수장도 아니다. 겔룩빠의 수장은 간덴 티빠(Ganden Tripa)로서, 돌아가면서 맡는 직위이고 다른 종파들도 제각기 자신들의 수장을 뽑는다.
10. 한국 불교와의 교류[편집]
10.1. 인적 교류[편집]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통일신라부터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많은 영향을 준 바 있다.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 사신 바상시가 만난 일화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기록되었다. 김무상은 경덕왕 13년(754) 당나라 장안에서 티베트 사신들을 만나 인도 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터인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김화상은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고,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 경전을 독송하여 신심을 일으켰다.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들어갔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으로 자리잡았다.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통일신라부터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많은 영향을 준 바 있다.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 사신 바상시가 만난 일화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기록되었다. 김무상은 경덕왕 13년(754) 당나라 장안에서 티베트 사신들을 만나 인도 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터인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김화상은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고,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 경전을 독송하여 신심을 일으켰다.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들어갔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충렬왕 20년(1294)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오고, 충선왕 즉위년(1298)에는 충렬왕과 충선왕, 공주 등이 티베트 불교 승려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또한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출가하여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충숙왕 1년(1314)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만 8천여 권을 고려에 전해주었다.《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7년(1320)에는 몽골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들어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를 떠나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퍼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駄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가 전한 것이다.
이처럼 원 간섭기에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 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나 티베트 불교의 신도층은 공주의 수행원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 위주로 한정되었다. 고려에서의 티베트 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고려 불교계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연식, 《한국문화사 11.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친원 세력이 축출되면서 티베트 불교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1967년에 제 14대 달라이 라마가 라사판 티베트 대장경 한 질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일이 있다. 이후 2009년 달라이 라마가 기부한 20만 달러 상당의 자금을 토대로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티베트 대장경 역경불사를 담당하는 티벳대장경역경원이 설립되었다.
10.2. 문화 교류[편집]
고려시대 이후에 편찬된 의식집들에서 진언들을 실담문자나 티베트 문자로 표기하고, 관법차제(觀法次第)와 같은 수행법에서 범자로 된 종자자(種子字)를 명상에 채용한다.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한다.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아시아 국가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육자진언(옴 마니 반메 훔) 관련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작된 《마니 카붐(Tib. མ་ཎི་བཀའ་འབུམ་, Wyl. ma Ni bka' 'bum)》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니 카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된 서적인데, 육자진언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을 총망라했다.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 운주사에 조성된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과 쌍와불은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괘불탱화는 티베트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법구이다. 흔히 티베트에서는 이것을 ‘탕카(Thang-ka)'[111]라고 부르는데,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단을 설치하고, 괘불을 봉안한 다음 법회를 열었다.[112]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괘불탱화가 다수 존재하고 큰 법회에서 활용한다. 오래된 괘불탱화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한다.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아시아 국가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육자진언(옴 마니 반메 훔) 관련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작된 《마니 카붐(Tib. མ་ཎི་བཀའ་འབུམ་, Wyl. ma Ni bka' 'bum)》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니 카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된 서적인데, 육자진언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을 총망라했다.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 운주사에 조성된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과 쌍와불은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괘불탱화는 티베트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법구이다. 흔히 티베트에서는 이것을 ‘탕카(Thang-ka)'[111]라고 부르는데,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단을 설치하고, 괘불을 봉안한 다음 법회를 열었다.[112]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괘불탱화가 다수 존재하고 큰 법회에서 활용한다. 오래된 괘불탱화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한국과 티벳의 괘불탱화(탕카) 법회 모습. 티벳에서는 쇄불절(晒佛节) 때 탕카 전용으로 지어진 거대한 벽이나 산자락에 탕카를 전시한다. EBS 세계 견문록 아틀라스 <티베트 불교 최대 명절 '몬람'> |
고려시대 때부터 제작된 금강저(金剛杵)와 금강령(金剛鈴)은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별로 안 쓰이지만, 밀교경전에 의거한 수행법에서는 널리 쓰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금강저는 티베트 계통과 당나라 계통 금강저를 응용한, 한국의 독자적인 형태인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 명종 20년(1190)에 조성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티베트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마니륜통(摩尼輪筒)이다. 2000년대 넘어서 용문사의 윤장대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티베트의 것을 채용한 마니륜통을 제작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법구로 활용한다.
국보 제 328호 예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와 티베트의 마니 콜로(mani khrolo).[113] |
11. 지역별 보급[편집]
11.1. 대한민국[편집]
현재 한국 내에서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 티베트 불교 승단에 소속된 스님들이 한국 내에 상주하며 지도하고 있는 단체들이다.
단체명 | 링크 | 주소 |
세첸코리아 | 서울 종로구 | |
캄따시링 | 서울 성북구 | |
랍숨섀둡링(삼학사원)[114] | 서울 은평구 | |
따시최링(서울티벳불교문화센터) | 서울 강북구 | |
광성사 | 부산 서구 | |
팬대링(대구티벳불교센터) | 대구 달서구 |
이 외에 정기/비정기적인 법회와 수행모임을 개최하는 수행단체는 다음과 같다. 대부분 서구에서 활동 중인 티베트 불교 수행단체의 한국 지부 격에 해당하는 단체들이다.
단체명 | 링크 |
마이트리야 상가 | |
낄라야 넷 | |
텔가 코리아 | |
다르마타 코리아 | |
싯다르타즈 인텐트 코리아 |
티베트 불교 관련 국내 학술기관은 다음과 같다.
유튜브에서 달라이 라마, 켄뽀 소달지(མཁན་པོ བསོད་དར་རྒྱས, Khenpo Sodargye, 索达吉堪布)[115] 등 티베트 불교 스승들 법문의 한국어 통역본도 들을 수 있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네팔, 몽골 이주민들을 위한 사찰도 있다. 이 중 서울네팔법당 텍첸사의 경우 한국인 불자들도 법회에 참여하고 있다.
- 서울 네팔법당 텍첸사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 동두천 네팔법당 용수사 (경기도 동두천시)
- 몽골 간단사 서울 포교당 (서울시 중구 광희동)
이외에도 불교 발전을 위해 한국의 주류 불교와 티베트 불교 사이에 교류를 하는 움직임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4년에 불교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가 참여하는 달라이 라마 방한추진위원회가 결성된 바 있다. 방한추진위는 한국 정부와 조계종 종단에 방한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시민들을 대상으로 달라이 라마 방한 지지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고령의 나이와 건강 상의 이유로 장시간 외국행이 어려워지면서 설립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2019년 해산하게 된다. 단체 차원의 방한 운동은 중단되었지만 방한추진위는 개별적인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달라이 라마 역시 향후 기회가 되면 한국에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
전남 보성군의 대원사에서는 회주 현장스님이 '티벳 박물관'을 세우고, 티베트 불교 승려가 보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티베트풍 탑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티베트 환생자 스승들을 초청하여 수 차례 법회를 개최하였고 최근에는 네팔에서 닝마빠 승려를 초빙하여 티베트 불교 기도 의식도 봉행하고 있다. 공식 사이트
경기도 안성시의 법등사에서는 한국, 대만, 인도 등에서 수학하고 봉녕사 승가대학 교수를 역임한 주지 설오스님이 한국, 대만의 정토종과 티베트 불교 샹빠 까규(Shangpa Kagyu)의 밀교 수행을 겸하는 정밀쌍수(淨密雙修)를 표방하고 있다. 설오스님은 인도 따시종에서 7년 이상 까규, 닝마 법맥의 수행을 전수받고 달라이 라마, 까르마빠 등의 한국어 통역을 맡은 바 있다. 이후 법등사를 창건하고 2010년, 2011년, 2012년, 2015년 네 차례에 걸쳐 샹빠 까규빠의 스승 까루 린뽀체(Kalu rinooche)의 방한법회를 개최하였다.
통도사 울산포교원인 보리원 람림학당에서는 해인사 율원장, 직지사 승가대학장을 역임하고 일본 진언종 총본산 고야산 금강봉사 보성원, 인도 다람살라 규또 사원 등지에서 밀교를 수학한 주지 혜능스님이 한국 등 동아시아 불교와 더불어 상좌부 불교의 니까야, 티베트 불교의 보리도차제 등을 종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혜능스님은 달라이 라마, 까르마빠로부터 관정과 삼마야계를 받고 겔룩빠 전승에서 수행한 바 있다.
11.2. 중화권 및 티베트[편집]
한반도와 일본과는 다르게 중국은 몽골 제국의 행성으로서 직접 지배를 받아서 티베트 불교가 매우 성행했다. 중국령이 된 상태인 티베트 자치구와 칭하이성, 쓰촨성 일부 지역을 포괄한다.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인들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주로 북부 중가리아 지역) 몽골 자치현의 오이라트인들 그리고 동북 3성의 만주족도 많이 믿는다.
티베트는 이름대로 티베트 불교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으나, 중국의 병합과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들 대부분은 독실하게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사실상 티베트 지역의 국교. 그러나 10%정도는 티베트 고유 종교인 뵌교를 믿는다.
한족들도 티베트 불교를 상당히 많이 믿지만[116], 물론 퍼센트나 절대적 수 모두 넘사벽인 도교와 대승 불교, 기독교에 밀린다. 중국 신도들은 사적으로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티베트 독립에 반대하며[117] 이에 관련된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개혁 개방 이후 완화되긴 했지만 중국 정부의 규제도 상당한 편.
티베트는 이름대로 티베트 불교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으나, 중국의 병합과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들 대부분은 독실하게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사실상 티베트 지역의 국교. 그러나 10%정도는 티베트 고유 종교인 뵌교를 믿는다.
한족들도 티베트 불교를 상당히 많이 믿지만[116], 물론 퍼센트나 절대적 수 모두 넘사벽인 도교와 대승 불교, 기독교에 밀린다. 중국 신도들은 사적으로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티베트 독립에 반대하며[117] 이에 관련된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개혁 개방 이후 완화되긴 했지만 중국 정부의 규제도 상당한 편.
대만에는 티베트 불교도가 상당히 많다. 대만에 티베트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 자체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였고 훗날 국공내전 종전 및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중국 대륙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대만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만 대만에서 본격적으로 티베트 불교가 강세를 보이게 된 건 해당 사건들보다도 나중의 일인데, 1982년 이후 인도, 네팔에서 많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대만에 입국하고, 또한 미국에서 밀법을 수행했던 천젠민(陳健民)의 저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만에 티베트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현재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티베트 불교 주요 4대 종파가 모두 대만에 진출한 상태이다. 2003년 기준으로 수도인 타이베이에만 100개 이상, 대만 전체에는 200개 이상의 티베트 불교 센터가 설립되었으며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신자는 약 2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 대만의 티베트 불교 성장세가 지속됨에 따라 티베트 불교 신자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사라 프레이저(Sarah E. Fraser) 하이델베르크대 교수가 2018년 연구에서 인용한 가장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신자 수는 현재 약 50만~60만여 명에 달한다.[118] # 달라이 라마는 1997년, 2001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홍콩과 마카오 또한 상술한 중국 내 티베트 불교 강세 지역에서 망명해온 이들 및 그 후손들이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11.3. 네팔[편집]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가 네팔에 위치하지만, 불교가 아닌 힌두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80%로 우위를 차지한다. 반면 불교 인구는 9~10% 정도에 불과하다. 네팔의 불교는 크게 티베트 불교, 네와르 불교, 테라와다(상좌부) 불교로 구성된다.
네팔은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한 때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 영향으로 셰르파(Sherpa)족 등 티베트버마어파 언어를 쓰는 카트만두 계곡 근처 북부 고지대의 몽골리안계 소수 민족들이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다. 중앙의 네와르(Newar)족은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와르 불교를 믿는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네와르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인근은 성역화되어 전세계 불교 종파들이 세운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네팔은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한 때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 영향으로 셰르파(Sherpa)족 등 티베트버마어파 언어를 쓰는 카트만두 계곡 근처 북부 고지대의 몽골리안계 소수 민족들이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다. 중앙의 네와르(Newar)족은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와르 불교를 믿는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네와르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인근은 성역화되어 전세계 불교 종파들이 세운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11.4. 부탄[편집]
11.5. 몽골[편집]
11.6. 러시아[편집]
러시아의 아시아계 시베리아 소수민족인 부랴트인과 투바인, 칼미크인 등이 주로 믿는다. 이들 중 티베트 불교 신도 인구는 약 70만~15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 2016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불교도의 비율은 투바 공화국 52.2%, 칼미키아 공화국 53.4%, 부리야티아 공화국 19.8%, 자바이칼 변경주 14.6%, 러시아 연방 0.6%이다. #
무신론을 강요하던 소련 시절, 칼미크인 불교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 정부는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면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가했다.[120] 당시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 사원[121]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122]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의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화교들[123] 또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은데 이들은 주로 동북 3성 한족의 후손이다.
무신론을 강요하던 소련 시절, 칼미크인 불교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 정부는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면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가했다.[120] 당시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 사원[121]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122]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의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화교들[123] 또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은데 이들은 주로 동북 3성 한족의 후손이다.
11.7. 인도[편집]
힌두교를 믿는 일반 인도인은 거의 믿지 않으며, 인도 북부의 라다크,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티베트계 지역과 중국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티베트인들이 주로 믿는다.
인도 사회에서 오랜 세월 천대를 받아온 불가촉천민 계층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불가촉천민이라면 티베트인 거주지에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 티베트 불교보다는 신흥 종파인 나바야나(Navayana)를 믿는다.[124] 나바야나는 인도 독립 이후 불가촉 천민들의 지도자였던 암베드카르 박사가 수십만명의 불가촉천민, 평민과 함께 한 불교 운동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도 사회에서 오랜 세월 천대를 받아온 불가촉천민 계층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불가촉천민이라면 티베트인 거주지에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 티베트 불교보다는 신흥 종파인 나바야나(Navayana)를 믿는다.[124] 나바야나는 인도 독립 이후 불가촉 천민들의 지도자였던 암베드카르 박사가 수십만명의 불가촉천민, 평민과 함께 한 불교 운동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11.8. 기타 전세계[편집]
상좌부 불교, 선불교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불교로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절이 있다.[125] 아프리카 불교도들의 따라보살 기도 영상[126] 유럽[127]이나 미국[128], 중남미[129] , 동남아[130], 오세아니아 등지에도 상당한 신자들이 있다. 특히 서구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서구 학계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인도의 마지막 대승 불교의 정통 후계자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131] 중국 불교, 상좌부 불교와 함께 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종파이다.
12. 기타[편집]
12.1. 초야권?[편집]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몽골인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청말민국초기 일부 한족 역사학자들과 신력건(信力建)이라는 현대 중국의 언론인 등이 민담과 전설, 민간풍습을 재구성하여 추측한 주장에 불과하다.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원조비사(元朝秘史)》 등에는 초야권과 관런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원나라 지배층과 결탁한 티베트 라마들 중 일부가 타락하여 민간의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성적 착취를 행하였다는 정황은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밀교의 교리가 악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터넷 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과거 몽골 승려들 중 일부는 성적 금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주장처럼 몽골 승려에게 초야권이라는 명시적인 권리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캠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의 바산자브 테르비쉬(Baasanjav Terbish)는 딴뜨리즘의 성력(性力) 수행만으로는 몽골 승려들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딴뜨리즘의 성력 수행은 범속한 성행위와는 달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 고도의 수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테르비쉬는 딴뜨리즘 뿐만 아니라 세속 사회와의 근접성과 사원의 경제활동에도 주목하였다. 몽골의 승려들은 출산을 돕고 불임 부부의 임신을 축원하며, 결혼할 길일(吉日)을 택해주고 이혼을 허가하는 등 유목민 사회의 신체적, 성(性)적 문제에 관여하였고 일부는 성력 수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속인화(俗人化) 되었다.
또한 불교 사원들이 상업, 운송, 숙박 등 각종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사원의 부가 증대함에 따라 승려들의 사유 재산 소유가 허용되었고, 사원의 부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승려가 자신의 적자(嫡子)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테르비쉬의 주장과 몽골의 매독 전염사(史)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몽골 승려와 유목민 사회 간의 밀접한 관계와 사원의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승속(僧俗)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 속에서 근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매독이 몽골 승려들과 그 친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고 여겨진다.
Baasanjav Terbish, 《Mongolian Sexuality: A Short History of the Flirtation of Power with Sex》
또한 인터넷 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과거 몽골 승려들 중 일부는 성적 금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주장처럼 몽골 승려에게 초야권이라는 명시적인 권리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캠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의 바산자브 테르비쉬(Baasanjav Terbish)는 딴뜨리즘의 성력(性力) 수행만으로는 몽골 승려들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딴뜨리즘의 성력 수행은 범속한 성행위와는 달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 고도의 수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테르비쉬는 딴뜨리즘 뿐만 아니라 세속 사회와의 근접성과 사원의 경제활동에도 주목하였다. 몽골의 승려들은 출산을 돕고 불임 부부의 임신을 축원하며, 결혼할 길일(吉日)을 택해주고 이혼을 허가하는 등 유목민 사회의 신체적, 성(性)적 문제에 관여하였고 일부는 성력 수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속인화(俗人化) 되었다.
또한 불교 사원들이 상업, 운송, 숙박 등 각종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사원의 부가 증대함에 따라 승려들의 사유 재산 소유가 허용되었고, 사원의 부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승려가 자신의 적자(嫡子)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테르비쉬의 주장과 몽골의 매독 전염사(史)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몽골 승려와 유목민 사회 간의 밀접한 관계와 사원의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승속(僧俗)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 속에서 근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매독이 몽골 승려들과 그 친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고 여겨진다.
Baasanjav Terbish, 《Mongolian Sexuality: A Short History of the Flirtation of Power with Sex》
12.2. 밀교와 성(性)?[편집]
1. 밀교와 성(性)에 관한 오해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학자 정성준은 딴뜨리즘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근대학자들은 힌두교의 샤끄띠파의 성을 매개로 한 성력(性力)적인 수행을 좌도밀교(左道密敎, the Left-hand path)라 지칭하여 비판하고, 이에 비해 윤리적이고 사회적 도덕성을 강조한 쉬바나 비슈뉴파 등은 우도밀교(右道密敎, the Right-hand path)라고 말하여 구분하였는데, 이는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속성이 다른 용어를 강제로 결합시킨 말이 되며, 이러한 언어적 오류가 한국불교에도 해명되지 않은 채 답습되고 있는 것이다. 좌도밀교는 원래 ‘힌두딴뜨리즘의 샤끄띠파의 성력(性力)사상이나 그 실천체계’라고 불러야 정확한 말이 된다.
후기밀교의 한 시대에는 관상(觀想)에 의지하더라도 성적(性的) 관상을 실천하는 수행이 전통적인 비구계의 율의를 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와 관련한 대목이 《비밀집회딴뜨라》의 관정의식을 다룬 《제4관정의궤, Sakiptbhiekavidhi》에 전해진다. 저자는 위끄라마실라(Vikramaśilā)사의 육현문(六賢門)의 한 사람인 와기슈와라(Vāgīśvara)로 그는《비밀집회딴뜨라》의 유파인 즈냐나빠다류에 속하며, 현밀(顯密)과 계학(戒學)에 능통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번영한 사원의 학두(學頭)였다.
《제4관정의궤》에는 대론자가 “(반야와 방편의 합일을 상징한) 이근교회(二根交會)의 의식이 어찌 비구의 율의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와기슈와라는 “삼계에 태어난 인간과 제천(諸天) 등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유루(有漏)의 애착을 향수하는 것으로 탐욕을 향수하는 것은 비나야 등에서 금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삼계(三界)를 초월한 신체를 지니고, 유식(唯識)을 자성으로 하는 문수금강(文殊金剛) 등이 현현한 여성들은 그런 류가 아니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론자는 다시 “비나야 등에서 금지되고 있는 외적인 갈마인모(羯磨印母)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정(適正)하다고 할 것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 여기서 갈마인모란 현실세계의 육체를 가진 반야모를 가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와기슈와라는 “진언이취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색 등의 일체의 사물을 자심의 현현(顯現)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문수금강을 본성으로 전변한 갈마인모들도 환(幻)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성적유가를 포함한 관정을 실수(實修)한다 하더라도 청정하며, 과실이 없기 때문에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반면 와기슈와라 후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같은 사원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아티샤(Atiśa)는 그의 명저인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서 “범행자(梵行者)는 비밀과 반야의 관정을 실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고, 계를 범할 시 악취에 떨어지는 죄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있어 와기슈와라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같은 시대의 아브야까라굽타(Abhaykaragupta)는 《금강의 화환(Vajrāvalī)》에서 “일체가 공성이기 때문에 갈마인모도 또한 공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그녀와의 유가도 율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고, 반면에 " ‘결고한 진실을 신해하지 않는 비구’인 경우 갈마인모(磨印母)가 아니라 지인(智印)을 사용한다" 하여 와기슈와라와 아티샤와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사(靑史)》에는 아브야까라굽타 자신은 위끄라마실라사의 학두로 있으면서 평생 비구의 불범계(不犯戒)를 지키며 결정코 성적 유가를 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학자 정성준은 딴뜨리즘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근대학자들은 힌두교의 샤끄띠파의 성을 매개로 한 성력(性力)적인 수행을 좌도밀교(左道密敎, the Left-hand path)라 지칭하여 비판하고, 이에 비해 윤리적이고 사회적 도덕성을 강조한 쉬바나 비슈뉴파 등은 우도밀교(右道密敎, the Right-hand path)라고 말하여 구분하였는데, 이는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속성이 다른 용어를 강제로 결합시킨 말이 되며, 이러한 언어적 오류가 한국불교에도 해명되지 않은 채 답습되고 있는 것이다. 좌도밀교는 원래 ‘힌두딴뜨리즘의 샤끄띠파의 성력(性力)사상이나 그 실천체계’라고 불러야 정확한 말이 된다.
후기밀교의 한 시대에는 관상(觀想)에 의지하더라도 성적(性的) 관상을 실천하는 수행이 전통적인 비구계의 율의를 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와 관련한 대목이 《비밀집회딴뜨라》의 관정의식을 다룬 《제4관정의궤, Sakiptbhiekavidhi》에 전해진다. 저자는 위끄라마실라(Vikramaśilā)사의 육현문(六賢門)의 한 사람인 와기슈와라(Vāgīśvara)로 그는《비밀집회딴뜨라》의 유파인 즈냐나빠다류에 속하며, 현밀(顯密)과 계학(戒學)에 능통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번영한 사원의 학두(學頭)였다.
《제4관정의궤》에는 대론자가 “(반야와 방편의 합일을 상징한) 이근교회(二根交會)의 의식이 어찌 비구의 율의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와기슈와라는 “삼계에 태어난 인간과 제천(諸天) 등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유루(有漏)의 애착을 향수하는 것으로 탐욕을 향수하는 것은 비나야 등에서 금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삼계(三界)를 초월한 신체를 지니고, 유식(唯識)을 자성으로 하는 문수금강(文殊金剛) 등이 현현한 여성들은 그런 류가 아니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론자는 다시 “비나야 등에서 금지되고 있는 외적인 갈마인모(羯磨印母)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정(適正)하다고 할 것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 여기서 갈마인모란 현실세계의 육체를 가진 반야모를 가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와기슈와라는 “진언이취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색 등의 일체의 사물을 자심의 현현(顯現)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문수금강을 본성으로 전변한 갈마인모들도 환(幻)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성적유가를 포함한 관정을 실수(實修)한다 하더라도 청정하며, 과실이 없기 때문에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반면 와기슈와라 후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같은 사원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아티샤(Atiśa)는 그의 명저인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서 “범행자(梵行者)는 비밀과 반야의 관정을 실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고, 계를 범할 시 악취에 떨어지는 죄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있어 와기슈와라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같은 시대의 아브야까라굽타(Abhaykaragupta)는 《금강의 화환(Vajrāvalī)》에서 “일체가 공성이기 때문에 갈마인모도 또한 공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그녀와의 유가도 율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고, 반면에 " ‘결고한 진실을 신해하지 않는 비구’인 경우 갈마인모(磨印母)가 아니라 지인(智印)을 사용한다" 하여 와기슈와라와 아티샤와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사(靑史)》에는 아브야까라굽타 자신은 위끄라마실라사의 학두로 있으면서 평생 비구의 불범계(不犯戒)를 지키며 결정코 성적 유가를 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성을 단순히 성력의 심볼로만 취급한다는 주장도 온당치 못하다. 밀교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남녀 모두 동등한 수행자로 취급되며, 때로는 여성이 스승이 되어 남성 수행자를 지도하는 등 밀교 수행자로서의 여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계율인 사마야(samaya)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리치몬드대 교수인 미란다 쇼(Miranda Shaw)는 《열정적 깨달음: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에서 딴뜨릭 불교는 대승 불교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을 함께하지만, 상징과 의식 분야에서 친밀감과 성(性), 젠더와 체현을 해탈의 길에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인다고 하였다.
남녀가 나란히 등장하는 패턴은 남성과 여성이 착취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서로 일깨워주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다.
여성과 여성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여성의 에너지와 영적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딴뜨릭 종교성의 특징이다.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은 격렬한 지혜의 화염 속에서 즐겁게 춤추며 태연히 번뇌의 시체를 밟는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들은 가부장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깨달은 여성들이었다.
위스콘신대 교수인 리타 그로스(Rita Gross) 또한 그녀의 저서 《불교 페미니즘: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에서 금강승 불교만큼 여성의 정신적 발달과 성숙에 유리한 종교를 찾기 힘들다고 강조하였다. 그로스는 불교 전반에 걸친 남성 중심적 관행과 가부장성, 그리고 비구니 승단 없이 사미니 승단만 존재하는 티베트 불교 교단 내의 열악한 여성수행자의 지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비판하였다.[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 그로스는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다른 어떤 불교 분파보다 여성성을 중시하고, 뛰어난 여성 스승들이 많이 존재하며, 수행에 필수적인 여성 상징들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불교의 가부장성을 극복하고 불교를 성평등적으로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2. 밀교의 성, 육체, 번뇌 개념에 관한 사상적 배경
밀교를 통해 성과 육체, 번뇌를 다룬 내용은 기존의 대승불교(顯敎)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밀교의 교리와 수행체계를 최초로 체계화한 《대일경》은 대승불교사상이 다양한 측면에서 결합된 것으로,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이 경전에 반영되어 있다. 경전의 비로자나여래는 절대법신인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을 계승한 것이지만 보살과 같이 공성에 머물면서 중생구호를 위해 다양한 신변을 나투는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밀교의 붓다들은 열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수용신과 육신을 통해 중생을 직접적으로 구호하는 존재들이다.
현교의 경우 중생의 세계에 드나드는 존재는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포기한 대비천제(大悲闡提)인 대보살들로서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이 그 예이다. 열반을 성취한 현교의 붓다는 열반이라는 절대세계에 도달한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지혜의 광명인 수용신의 범주를 넘지 않으며, 중생의 현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대보살의 몫이다. 그러나 유식계의 논서를 통한 불신론(佛身論)의 전개는 붓다의 몸은 법신, 수용신, 화신의 세 가지가 있으며, 열반의 절대신이라도 삼계의 범주를 다양한 불신을 통해 넘나드는 것으로 이론화하였다.
《대일경》 이후 성립된 《금강정경》에는 중생의 의식과 우주법계의 현상세계가 오불의 속성(屬性)을 지니고, 이에 입각해 현화한다고 보는 부족사상(部族思想)을 체계적으로 설하였다. 오불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촉불, 보생불, 무량수불, 불공성취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도 후기 밀교경전에는 경전마다 다르지만 오불의 범주에 번뇌를 포함시켜, 탐진치(貪瞋癡)와 아만(我慢), 질투(嫉妬)의 다섯 번뇌도 불성의 부족으로서 성불한 붓다에게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의지와 갈망의 대번뇌로 전변한다고 설하고 있다.
《금강정경》에 설해진 부족사상과 번뇌의 긍정은 인도 후기밀교의 성과 번뇌의 긍정이라는 대전제를 이끌어내는 핵심사상이 된다. 그러나 밀교의 긍정은 중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성의 지혜에 입각한 불지(佛智)에 의해 조명되었을 때 비로소 대번뇌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 설해진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수행은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보살이 육신을 사바세계에 둔 채 수용신(受用身)의 몸으로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일체여래의 가르침에 의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지고 있는데, 오상성신의 증금강신(證金剛身)의 수행은 중생의 삼업(三業)의 현실을 신금강, 어금강, 의금강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 이론적 배경은 마음의 자성을 깨닫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이념이 경전을 통해 형식화된 것이다.
한편 대반야경에 소속된 《반야이취분(般若理趣分)》은 공성의 지혜를 통해 정(淨)과 부정(不淨)의 분별을 초월한 보살에게 번뇌와 육체적 현실은 청정한 진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극적인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같은 품은 독립적인 밀교경전으로 조직화되어 《이취경(理趣經)》으로 출현하고, 여기에는 인간의 감촉과 애욕의 수용과정을 17가지로 분류한 ‘17청정구(淸淨句)’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인도후기밀교의 주석은 17청정구를 포옹과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 애락(愛樂)을 향수하는 남녀의 성교(性交)로 해석한 주석서도 존재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밀교화는 외교적 요소를 단기간에 수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반야와 중관, 유식사상 등의 대승불교사상을 점진적으로 반영시켜 경전화된 과정을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밀교화가 외교의 수행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인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장과정에 의해 경전화되고 출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밀교에 있어서 육체뿐만 아니라, 번뇌와 성마저도 불지(佛智)에 의해 관조할 때 현실은 실제(實際)로서 법계의 현현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연원은 연기법의 무아사상으로부터 반야, 공, 유식 등 불교사상의 전개에 따른 것으로 밀교는 딴뜨리즘에 의해 문제시 되었던 성과 번뇌를 전통적인 불교사상의 영역에서 해석한 것이다.
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유식학파의 소의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창녀인 바수밀다(Vasumitra, 婆須蜜多/伐蘇蜜多)를 53선지식 중 하나로 소개하며 탐욕이 지혜로 바뀌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과정을 보여준다. 금강승의 사부ㆍ행부ㆍ요가부ㆍ무상요가부는 각각 관락(觀樂), 소락(笑樂), 집수락(執手樂), 옹포락(擁抱樂)의 〈사락(四樂)〉으로 비유되는데, 그 출처가 바로 《화엄경》〈입법계품〉의 바수밀다 일화이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은 ‘탐욕의 경계를 여읨’이다. 그들의 욕망을 따라 몸을 나타내는데, 하늘이 나를 볼 적에는 나는 천녀의 형상이 되어 광명이 훌륭하여 비길 데 없게 된다. 그와 같이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가 볼 적에는 나도 사람과 사람 아닌 이의 여인이 되어 그들의 욕망대로 나를 보게 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여 나에게 오는 경우에, 내가 그에게 법을 말하면 그가 법을 듣고는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된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나와 말하여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걸림없는 음성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내 손목을 잡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는다. (중략) 어떤 중생이 나를 끌어안으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고 항상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나와 입술을 한 번만 맞추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 이와 같이 나에게 가까이 하는 중생들은 모두 탐욕을 여의는 경계에 머물러 보살의 온갖 지혜가 앞에 나타나는 걸림없는 해탈에 들어간다.”《대방광불화엄경》〈입법계품〉
3. 성적 요가의 원리, 수행 자격, 금기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중관, 유식, 여래장 등 대승 불교 철학과 금강승 고유의 인체 생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금강승의 입문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상 요가 딴뜨라의 성적 요가는 극소수의 자격을 갖춘 최상근기의 수행자-"생각 만으로 땅에 떨어진 열매를 다시 가지에 붙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을 갖춘-에게만 허용된다. 구족계를 수지(受持)한 출가 수행자는 성적 요가를 행할 수 없다. 또한 성적 요가 중에는 복잡하고 때로 위험할 수 있는 수행 절차를 거치며, 반드시 정해진 금기를 준수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1981년 하버드대에서 열린 초청법회에서 딴뜨라와 성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달라이 라마 하버드대 강의》 참조.
문 : 현재 미국에는 성교(性交)와 딴뜨라를 연결시켜서 성교를 수행이라 하고, 성교를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는 책이나 단체들이 많습니다. 전통적인 딴뜨라의 가르침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성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독신생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답 : 사실 딴뜨라에 대해서 오해할 위험이 큽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단계의 의식이 있고, 가장 미세한 의식을 수행에 이용할 때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하는 것은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중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미세한 의식의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고의적으로 제어하고 정지시킬 수 있다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이 작용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미세한 의식이 작용할 뿐 아니라, 그 의식은 방심하지 않고, 예민하고, 명석합니다. 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은 공성과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수행자는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러려면 백보리(白菩提)와 적보리(赤菩提)[135]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을 이동시켜서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딴뜨라 수행에는 성교가 그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통상적인 의미의 성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여섯 가지 근본 요소로 구성됩니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그 중 세 요소는 어머니에게서 받고, 세 요소는 아버지에게서 받는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뼈와 골수와 정액이고, 어머니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살과 피부와 피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여섯 가지 요소는 지, 수, 화, 풍, 맥, 명점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의 물리적 육체라는 특별한 조건으로 인해서, 육체 안의 요소들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의 안에 변화가 옵니다. 예를 들어 재채기를 하거나 하품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성교를 하는 동안에도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잠시 일어납니다.
(붓다슈리즈냐나(Buddhaśrījñāna)에 따르면 평상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가령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성적인 희열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그런 경우들이다. 딴뜨라 수행자는 이러한 네 가지 상황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을 때 특별한 명상을 수행하여 미세하고 청명한 빛의 마음(정광명, 淨光明)을 일으킬 수 있다. 정광명은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강렬하며 그 다음 깊이 잠들었을 때, 그 다음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순간의 순으로 약해진다.)
의식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의식의 변화는 성교를 하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딴뜨라 수행에서는 성교를 방편으로 이용합니다. (이 때 수행자는 성적인 희열의 에너지를 참고 그 에너지를 방출, 즉 사정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일 그 에너지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이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욕계에 살면서 아직 욕망을 버리지 못한 어느 딴뜨라 수행자가 수행의 일부로서 고의적으로 마음에 욕망을 일으킨 다음에, 근본 요소들이 변화하고, 포착하기 쉬운 단계들의 마음 대신에 미세한 마음들이 작용하는 동안, 딴뜨라 수행자는 가장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이용해서 공성을 깨닫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두 가지의 상반된 유형(번뇌와 지혜)의 이해를 동시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의식이 공성(空性)을 깨달을 때 욕망을 일으킨 마음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맥과 기와 명점에 변화를 유발하는 집착과 욕망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은 본래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아집我執과 법집法執)입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 인해 나타나게 된 미세한 마음이 공성을 깨달으면, 그 미세한 마음은 욕망을 일으키도록 도왔던 '본래적 존재를 생각하는 의식'을 없애는 치료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결국은 그 나무까지 갉아먹는다는 예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수행들을 하는 사람은 공성과 무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거나 경험을 해야 하고, 둘째로 그런 수행의 목표는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므로 수행자는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이타적인 의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공성을 이해하고 이타적인 의도를 갖지 않으면, 그런 딴뜨라 수행의 기법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무상 요가 딴뜨라의 몇몇 수행들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몸 안의 기가 중맥(中脈)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말한 육체적 변화는 주로 기가 중앙 기맥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결과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방법은 목의 맥도(脉道)들을 죄는 것인데, 그 방법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을 성공할 수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딴뜨라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딴뜨라 수행을 밀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수행한 숙련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수행자가 자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거나 딴뜨라 수행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쌓지 않았다면 딴뜨라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12.3. 승려의 결혼?[편집]
티베트 불교를 대처승을 허용하는 불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빠를 비롯하여 닝마, 까규, 사캬 등 모든 종파의 구족계를 받은 승려는 독신을 지키는 청정 비구이다.
출가 승려와는 별개로 닝마빠 등 일부 소수 종파에는 대승불교의 재가 수행자 전통을 계승한 응악빠(sngags pa, 남성)/응악마(sngags ma, 여성)라는 재가 수행자들이 존재한다. 대승 불교는 재가자 또한 출가자와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대승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등은 종종 재가자 출신의 보살로 묘사되며, 티베트 불교의 빠드마삼바와, 예세 초겔, 돔뙨빠, 밀라레빠 등도 불보살의 과위를 성취한 재가자 출신의 성현으로 여겨진다. 특히 불교 딴뜨리즘의 경우 요기니 딴뜨라(yogini tantra)의 등장 이후 승원 외부의 재가자 요기(yogi), 요기니(yogini)들 중심으로 딴뜨릭 수행이 성행했으며, 출재가자 여부와 신분 계급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수행을 통해 밀교의 성취자인 싯다(siddha)가 될 수 있었다. 최경아, 《인도초기대승의 수행문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재가 수행자인 응악빠/응악마는 밀교 수행자로서 그들만의 특별한 계를 받고 각종 의식을 집전하며 수행에 전념하므로 일반적인 세속의 재가 불자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 있다.[136] 응악빠에는 혈통을 통해 대(代)를 거쳐 이어지는 전승과 법맥의 전수를 통해 이어지는 전승 두 종류가 있다. 사캬빠의 수장인 사캬 티진(sa skya khri 'dzin)의 직위도 쾬(Khon)족 혈통에 의해 계승되는 응악빠의 일종이다.
닝마, 까규 등 소수 종파의 환생자들 중에는 출가 비구인 환생자도 있지만 결혼을 하는 환생자도 있다. 출가 수행자가 되기를 원치 않거나, 성적 요가의 성취를 위해 재가 수행자로 남기를 원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환생자가 수승한 법연(法緣)을 갖춘 환경에서 다시 환생할 수 있도록 태(胎)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환생자들 중에는 뗄된(gter ston)이기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뗄된이란 뗄마(gter ma)라는 빠드마삼바와와 예세 초겔의 보장(寶藏)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컬으며, 주로 닝마빠 수행자 중에 많다. 만약 뗄된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단명(短命)하거나 보장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결혼한 환생자들은 구족계를 받지 않거나, 환계 후 환속한 재가 수행자이며 출가 수행자가 아니다.
출가 수행자, 즉 구족계를 받은 비구, 비구니인 겔롱빠(dge slong pa, 남성)/겔롱마(dge slong ma, 여성)는 결혼을 할 수 없고 성관계도 당연히 가질 수 없다. 구족계를 받은 승려는 무상요가 딴뜨라 수행 가운데 하나인 성력(性力)수행도 행할 수 없다.[137] 따라서 티베트 불교에는 구족계를 받았음에도 결혼한 이른바 '대처승'은 없다. 만일 승려가 결혼을 원한다면 다른 불교 교단과 마찬가지로 구족계를 환계(還戒)하고 환속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빠에는 비구계나 사미(니)계를 받은 승려, 즉 출가 수행자만 존재하며 재가 수행자는 환속한 몇몇 극소수에 불과하다.
티베트 불교에는 많은 재가 수행자 요기들이 있지만, 티베트 불교의 기반은 다른 불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사원(monastery) 중심의 출가불교라고 할 수 있다. 쫑까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경론에 의거하여 재가자의 허물과 출가자의 공덕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쫑까빠는 세속에서 수행하기 어렵고 출가의 공덕이 크기 때문에 재가자는 출가자가 되기를 발원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라밀승은 물론 금강승을 수행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루는데도 출가자가 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또한 쫑까빠는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승계 등 삼종율의(三種律儀)에 있어서 별해탈계가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므로 별해탈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서 재가자는 법을 닦음에 장애가 많으며, 많은 허물에 잘못 집착하는데, 출가자는 이와는 반대로 생사윤회를 끊어버리는 몸으로써, 최고의 출가인이 되었기에 지혜로운 자는 출가를 진실로 기뻐해야 한다.
재가의 허물과 출가의 공덕을 거듭 생각한다면,이미 출가한 사람으로서는 뜻을 견고히 하고, 출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착한 습관을 수립하고 각성해야 하므로 이 도리를 약간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재가자는 부유하다면 그것을 지키는데 고통이 있고, 가난하다면 부를 구하고 고통으로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있다. 이로써 안락이 없음에도 어리석음으로 안락을 삼는데, 이것은 악업의 과보임을 알아야 한다.
《본생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감옥과도 같은 가정을
조금도 안락이라고 생각지 말라.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가정에 머무름은 큰 병이어라.
첫째는 지키려는 데에 번뇌하고
둘째는 구하려는 데에 피로하구나.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어디에도 안락은 없다네.
이에 즐거워하여 어리석다면
죄악의 과보만 익어간다네."
그러므로 많은 물건을 갖추고 만족할 줄 모르고 구함은 출가인의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가자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가정에 머무름은 법과 어긋남으로써 집에서는 법을 닦기가 어렵다.
또 이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이런 등등의 재가의 허물을 거듭 생각하고, 출가하기를 발원해야 한다.
"만일 재가의 업을 한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타인에 죄를 짓는 자에게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네.
만일 법을 행하려 가업을 버리고서도 가정을 돌아본다면
어찌 법을 얻을 수 있으랴.
법의 일은 지극히 평화롭네.
집안의 일이란 완력으로 얻어야 하나니
그것은 법과 어긋나는 허물이 있으므로
자기에게 이로움을 원하는 자라면 누가 집에 머무랴.
(가정은) 자만과 교만과 어리석음과 같은 뱀의 굴.
그것은 적정의 기쁨을 부숴버리네.
참을 수 없는 많은 고통이 있는 곳이니
그 누가 뱀굴과 같은 집에 머무랴."
그리고 또한 조악한 법의(法衣)와 초라한 바리때와 걸식으로서 만족하고 적정처에서 자기의 번뇌를 청정히 하여 타인의 복전이 되기를 발원해야 한다.
《칠동녀인연론 七童女因緣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컨대, 머리를 깎은 자가 되어서
분소의를 걸치고
절(도량)에 머물기를 원하나니
언제나 그렇게 되어 볼까.
앞을 바라보는 것은 멍에의 길일 뿐
손에 든 것은 흙바리때라네.
차별 없이 집에서 집으로
언제나 걸식을 해볼까나.
이양(利養)과 공경(恭敬)을 탐하지 않고
번뇌가시의 수렁을 맑히고
번뇌를 맑게 닦아
언제 마을의 보시 공양처가 되어 볼까나."
(출가자들은) 풀로써 깔개를 하고 지붕 없이 잠을 자며, 이슬과 서리가 옷을 적시고, 조악한 음식으로써 만족해하며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풀자리에 자고 눕는 법락(法樂)으로써 살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칠동녀인연론에서》)
"어느 때 풀섭에서 일어나랴.
서리와 이슬이 옷을 무겁게 적시고
조악한 음식 정도로써
이 내 몸을 탐함이 없는 때이라
나무 곁의 앵무새처럼
푸른색의 보드란 풀이 내 옷이 되어
법이 드러남을 보는 즐거움의 기쁨이 생길 때라야
그때 나는 누워 잘 수 있으리."
선지식 뽀또와는 지붕 위에 눈이 쌓인 후, “어제 밤에 칠동녀 인연을 말한 것과 똑같이 되어서 마음이 기쁘다. 그런 식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것 이외는 다른 것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약초밭과 강기슭에 머물러, 물결의 생김과 무너짐이 자기 몸과 목숨 같음을 생각하고, 삼유의 근본이 모두 나쁜 견해를 생기게 하는 아집을 관찰혜(觀察慧)로써 멸제하고, 윤회의 환락과 염오하고 세간이 환화(幻化)와 같음을 거듭 거듭 사유하고 기원함이란, 다음과 같이 소망해야 하나니, 이 모든 것은 출가한 몫으로서, 이 일을 하는 데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
"어느 때 강기슭 약초밭에 앉아.
물결의 무상함을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의 세간과 똑같을 것이니
거듭거듭 관찰해 보라.
모두가 악견이 되어버리는
신견을 부숴버려라.
윤회의 수용을 즐기지 않음에
내 언제 그리 되어 보랴.
꿈 · 신기루 · 환영 · 구름
심향성(尋香城)과 같은
동(動) 부동(不動)의 모든 세간
내 언제 깨닫게 되랴."
선지식 체까와는, “고행의 산간에 신선의 행동으로서 안주할 수 있다면, 이제야 아버지가 자식을 기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고, 샤라와도 “재가자가 일이 많아 바쁠 때엔 좋은 옷을 잘 차려 입고 그에게 찾아가서 출가가 얼마나 좋은가를 생각하게 하여 미래에 출가의 습기를 심어 놓으라” 라고 하였다.
《용맹장자청문경 勇猛長者請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또한 고통의 본거지인 가정에서 떠나려 하지만 언제 이렇게 행할 수 있으랴. 나 또한 언제 승가의 일, 포살의 일, 해제의 일, 예경의 일에 머무를 수 있을까. 생각하여 이와 같이 출가의 마음을 즐겨야 하리라."
이는 보살이 가정에 머물기에 그렇게 서원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바, 이것은 주로 비구계를 바라야 함을 말함이다.
《장엄경론》에서, “출가 자체가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나니, 이 때문에 서원을 지키는 이는 재가자보다 월등하여라”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수행하는 데에 삶[生]이 출가한 것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방식으로 일체 종지를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또한 출가를 최상의 삶[生]이라고 말한다. 출가의 율의는 삼률의(三律儀) 안에서 바로 별해탈이므로, 거룩한 가르침의 근본인 별해탈을 존경해야 한다.《 보리도차제광론》 청진 譯
계율, 의식, 예법, 복식 등에 있어서도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의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티벳불교의 재가 수행자는 머리를 기르고 백색 의복을 입지만, 출가 수행자는 삭발하고 사프란(saffron)색 가사를 입는다. 하지만 때로 복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경우도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12.4. 육식?[편집]
티베트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경보다는 목축이 주를 이루었다. 식생활도 밀과 보리같은 곡물과 육류, 유제품 위주이며 여기에 차(茶)를 더하여 부족한 비타민 등을 보충한다. 농작물을 구하기 힘든 티베트 민족에게 육식은 불가피한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티베트 민족의 식습관을 두고 육식을 기피하는 동아시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혹 육식이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육식이 계율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율경근본율(Vinayasūtra) 》이나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따르는 법장부 계통의 《사분율(四分律)》, 남방 상좌부 불교의 율장인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등은 모두 '삼정육(三淨肉)'과 같은 예외 사항을 만들어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은 《범망경(梵網經)》의 대승계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범망경》의 대승계가 아닌 《입보살행론(Bodhisattvacaryāvatāra)》, 《대승집보살학론(Śikṣāsamuccaya)》의 대승계와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Śāstra)》 〈계품〉의 대승계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육식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조항이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도가 삼정육을 섭취하는 것은 별해탈계나 보살계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참고로 티베트 불교에도 자발적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과거 까담빠의 아티샤(Atisha)나 닝마빠의 샵카르(Shabkar) 같은 고승들은 평생 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는 닝마빠의 차트랄 상게(Chatral Sangye) 린뽀체, 뻬마 왕걀(Pema Wangyal) 린뽀체나 깔마 까규빠의 17대 까르마빠(Karmapa) 오걘 틴래 도제(Orgyen Trinley Dorje), 밍규르(Mingyur) 린뽀체, 그리고 겔룩빠의 삼동(Samdhong) 린뽀체, 라마 조파(Lama Zopa) 린뽀체 등이 티베트 불교 내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이다.
제 17대 까르마빠의 채식 관련 법문
달라이 라마도 인도 망명 이후 1964년부터 스무 달 가량 완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심한 황달이 발생하고 담낭에 결석이 생겨[138] 담낭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 끝에 채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불가피한 경우에만 육류를 섭취하며, 공장식 축산업을 지양하고 불살생과 채식을 권장하는 법문을 여러 차례 설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생명 존중과 환경 보호를 위해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동물 착취를 줄이고 채식을 하는 것이 보다 자비롭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가령 티벳 북부나 몽골처럼 추운 기후 때문에 대대로 가축에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까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반면 인도는 농작물이 풍부하고 채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세계의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세지를 전했다. 달라이 라마의 메세지처럼 인도 내 티베트 불교 대학이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는 최근 채소와 과일 식단 비중을 늘리고 있으며, 채식 공양만을 하는 사원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육식이 계율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율경근본율(Vinayasūtra) 》이나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따르는 법장부 계통의 《사분율(四分律)》, 남방 상좌부 불교의 율장인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등은 모두 '삼정육(三淨肉)'과 같은 예외 사항을 만들어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은 《범망경(梵網經)》의 대승계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범망경》의 대승계가 아닌 《입보살행론(Bodhisattvacaryāvatāra)》, 《대승집보살학론(Śikṣāsamuccaya)》의 대승계와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Śāstra)》 〈계품〉의 대승계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육식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조항이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도가 삼정육을 섭취하는 것은 별해탈계나 보살계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참고로 티베트 불교에도 자발적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과거 까담빠의 아티샤(Atisha)나 닝마빠의 샵카르(Shabkar) 같은 고승들은 평생 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는 닝마빠의 차트랄 상게(Chatral Sangye) 린뽀체, 뻬마 왕걀(Pema Wangyal) 린뽀체나 깔마 까규빠의 17대 까르마빠(Karmapa) 오걘 틴래 도제(Orgyen Trinley Dorje), 밍규르(Mingyur) 린뽀체, 그리고 겔룩빠의 삼동(Samdhong) 린뽀체, 라마 조파(Lama Zopa) 린뽀체 등이 티베트 불교 내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이다.
제 17대 까르마빠의 채식 관련 법문
달라이 라마도 인도 망명 이후 1964년부터 스무 달 가량 완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심한 황달이 발생하고 담낭에 결석이 생겨[138] 담낭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 끝에 채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불가피한 경우에만 육류를 섭취하며, 공장식 축산업을 지양하고 불살생과 채식을 권장하는 법문을 여러 차례 설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생명 존중과 환경 보호를 위해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동물 착취를 줄이고 채식을 하는 것이 보다 자비롭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가령 티벳 북부나 몽골처럼 추운 기후 때문에 대대로 가축에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까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반면 인도는 농작물이 풍부하고 채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세계의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세지를 전했다. 달라이 라마의 메세지처럼 인도 내 티베트 불교 대학이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는 최근 채소와 과일 식단 비중을 늘리고 있으며, 채식 공양만을 하는 사원도 있다.
닝마빠의 대원만이나 겔룩빠의 무상요가인 깔라차크라 탄트라(Kālacakratantra)에 이르기까지 모든 밀법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한 육식을 금한다. 특히 깔라차크라 탄트라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한다. 또한 외적인 의례를 중시하는 소작(所作) 딴뜨라, 행(行) 딴뜨라에서도 관정(灌頂) 등의 의식을 치를 때 육류, 어패류, 계란, 오신채 등의 섭취를 엄격히 금한다.
무상요가 딴뜨라의 회공(會供, gaṇacakra) 때 청정과 비청정의 집착을 벗어난 '이원성의 초월(不二性, advaya)'을 목적으로 고기, 대소변 등의 부정물(不淨物)을 오종육(五種肉, Sha lnga, sha chen sna lnga)과 오감로(五甘露, bdud rtsi lnga)라 하여 공양물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 후대에는 요거트, 과일즙 등의 온건한 물질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의궤는 무상 요가 수행의 자격과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들이 세간에서 더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용하여 고도의 선정력(禪定力)을 바탕으로 미세한 분별심을 정화시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지 절대 일반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다.
12.5. 복식[편집]
계를 수지한 티베트 승려는 하의로 모두 샴탑이라고 하는 붉은색 통짜 천을 두른다. 전통적인 상의를 보면 종파를 대강 구분할 수 있다. 닝마빠 울렌이라고 하는 차이나 컬러에 소매가 없는 조끼만 입으며 싸꺄빠와 까규파는 울렌 위에 뙨까라고 하는 붉은색 조끼를 덧대입는다. 그리고 겔룩빠는 울렌 대신 뙨까만 입는다. 또한 의식에 쓰는 모자가 겔룩빠는 노란색이어서 황모파(黃帽派), 나머지 닝마빠, 쌰까빠, 까규빠는 붉은 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홍모파(紅帽派)라고도 불린다.
[1] 1. 용수(150~250 / 龍樹 / དཔའ་མགོན་ཀླུ་སྒུབ་ / Nagarjuna)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 Dharmakirt)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세기경?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 Kamalashila)
17. 아티샤(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2] 각 종파 별로 열리는 대(大)기원 법회. 사부대중이 모여 수 일간 기도, 공양, 토론, 명상 등을 하며 불법(佛法)의 지속과 흥왕을 기원한다. #[3] 동아시아권의 대승 불교(Mahayana buddhism)와 남방권의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ism)에 이어 불교 종파 중 규모 3위에 해당한다. # #[4] 《입보살행론》과 《중론》의 게송은 각각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공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온(五蘊)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란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달라이 라마는 아침마다 《입보살행론》의 게송을 사유하며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론》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늘 사유한다고 한다.[5] 티베트인은 티베트 자치구 바깥쪽 쓰촨성, 윈난성, 칭하이성, 간쑤성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혹은 티베트인이 아닌 중국의 다른 민족 중에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다.[6] 용수보살의 탄생을 예언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성(佛性)에 관한 10대 경전 중 하나이다.[7] 초창기 서구의 학계에서도 라마이즘(Lamaism)이라는 단어를 썼다.[8]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9]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10]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은 쌈예 논쟁의 결과를 서로 엇갈리게 기록했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쌈예논쟁 이후 인도불교는 티벳 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고 마하연의 선종은 '화상(和尙)종'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빠의 족첸이나 까규빠의 마하무드라 전승도 '화상종' 아니냐는 타 종파의 비판을 듣곤 하였다.[11] 인도에서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서북쪽 중앙아시아 쪽으로 가장 먼저 불교가 전파되었고 이것이 실크로드와 남중국해를 통해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12]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잠발라(Jambhal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13] 무슬림의 종교 박해는 인도 불교 쇠멸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 외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14] 모든 번뇌를 자르는 반야이검(般若利劍)과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갖고 있다. 반야이검은 번뇌의 줄기를 끊고, 검을 둘러싼 지혜의 화염은 번뇌의 뿌리까지 태워 없앤다.[15] 4종의 암시적인 가르침과 4종의 간접적인 가르침.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16] 2016년 9월 2일 동아일보 A28면[17]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의 논서인 《진실강요(Tattvasaṃgraha)》에서 인용한 경전 어구이다. 현존하는 경전(經, sūtra)에서는 1차 출처를 찾을 수 없으나 《Śrīmahābālatantrarāja》라는 밀교 속전(續, tantra)에서는 거의 동일한 어구를 찾을 수 있다. 가르침의 비판적 수용에 관한 내용은 초기 불교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깔라마 경(Kalama sutta)〉 등 에서도 찾을 수 있다.[18] 《대승열반경》의 〈사의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현교 설명 도입부에 상술하였다.[19] 나가(Naga, 龍)에게서 용궁에 감춰진 반야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0]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4개의 팔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하고 흰 색 몸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정수리에는 근본 스승(本師)인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으며 가운데 양 손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白蓮)을 들고 있다.[21]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본체인 대비심(大悲心)을 상징한다면, 따라보살은 대비의 작용인 대비행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화신(化身)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부처로 알려졌다. 오방불(五方佛) 중의 하나인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asiddhi)의 불모(佛母)로써 불공성취불과 같은 녹색을 띈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도모(度母)로 한역되며, 관련 경전도 한역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다.[22] 성문승의 계율로써 개인의 해탈을 위해 따르는 계율인지라 '별해탈계'라고 한다. 재가자가 따르는 우바새ㆍ우바이계, 출가자가 따르는 사미ㆍ사미니계, 식차마나니계, 비구ㆍ비구니계를 일컫는다.[23] 참고로 동아시아 불교의 보살계는 크게 범망계와 유가계 두 계열로 나뉜다. 법상종 계열에서는 《유가사지론》〈계품〉의 유가계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 조계종을 비롯한 대한민국 주요 불교 종단은《범망경》의 10개 근본 계율과 48개 보조 계율로 이루어진 범망계를 따른다.[24]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승계에 대한 논서인 《the String of Brilliant Jewels: Instructions on the Individual Liberation, the Bodhisattva and the Tantric Vows (So thar byang sems gsang sngag gsum gyi sdom pa'i bslab bya nor bu'i 'od 'phreng)》의 일부이다.[25] 일반인들에겐 죄가 되지 않는 행위에 대해 금지한 계율.[26]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이간어(양설), 악어, 기어 등 10불선업 중의 몸과 말로 짓는 7가지 행위.[27] 공덕을 갖추고 법답게 행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공양 받는 행위.[28] 이익과 공경을 위해 달콤한 말을 앞에서 하는 행위.[29] 상대방의 물건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그것에 대해 찬탄하는 행위.[30] 누구는 나에게 공양을 하고 누구는 안 했다는 식으로 타인을 비난하여 공양 받는 행위.[31]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미끼)을 주는 행위.[32] 다섯 가지 가림(장애). 도회개(掉悔蓋), 진에개(瞋恚蓋), 혼수개(昏睡蓋), 탐욕개(貪欲蓋), 의법개(疑法蓋).[33] 일체 중생을 내가 구제해야겠다는 책임감.[34] 소의대치력(所依大治力), 염환대치력(厭患大治力), 반회대치력(返回大治力), 현행대치력(現行大治力). 1. 소의대치력: 삼귀의와 보리심을 수습(修習)하는 것. 2. 염환대치력: 악업으로부터 이숙(異熟) 등의 삼과(三果)가 일어나는 도리를 명상하고, 자신이 지은 악업들에 대한 큰 후회를 일으키는 것. 3. 반회대치력: 이후로는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십불선업을 단속하는 것. 4. 현행대치력: 반야경 등의 경구를 수지, 독송하는 것. 무아와 광명의 법성을 배우고 본래청정을 믿는 것. 백자진언 등의 특수한 다라니를, 죄업이 소멸되었다는 상징이 나타날 때까지 의식에 따라 외는 것.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 부처님과 탑 등에 갖가지 공양을 올리는 것. 부처님과 대보살님들의 명호를 듣고 수지하는 것.[35] 두 다리를 똑같이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이 땅에 닿지 않게 쪼그리고 앉는 자세[36] 사섭법 :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37] 상좌부 경전인《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산 개울물의 비유로써 설명했다. “산 개울물은 한 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쉼 없이 계속 흘러 내려간다. 바라문아, 이처럼 사람의 삶도 이 산 개울물과 같은 것이다." 산 개울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가므로 한 순간도 동일한 적이 없지만 흘러가는 현상은 지속되며 관찰 가능하다.[38]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39]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한다.[40]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1] 달라이 라마의 《수심팔훈》 법문 링크[42] 상부: (左) 석가모니불 (右) 금강살타보살. 금강수보살은 모든 번뇌와 마라를 항복시키는 분노존(忿怒尊, krodhakaya)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금강저, 왼손에는 갈고리를 들고 있다. 금강수보살은 대세지보살 혹은 금강살타보살의 분노존으로 알려져있다. 분노존의 분노는 번뇌로서의 분노가 공성(空性)의 지혜에 의하여 중생을 위한 대자비로 전환된 형태이다. 이 경우 분노는 오염을 여읜 청정하고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한다.[43] 한국의 밀교는 대부분 조선조 불교 탄압으로 인해 독자적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재 한국에 진각종, 총지종 등 밀교 종단이 있으나 모두 근현대에 새로 창종된 종단들이다.[44] 지금강불의 짙은 푸른색은 허공같이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하고, 금강저와 금강령의 교차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의미한다. 84명의 마하싯다는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밀교 대성취자들이다.[45]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교화 대상인 중생의 근기를 따라 화현한 화신불(化身佛)이다.[46] 업을 짓고 쌓는 힘이 왕성하고 쉽게 성숙해서, 생의 전반에 쌓은 업이 생의 후반에 익는 땅을 말한다.[47] 문수보살이 성불하여 이룬 부처[48] 구루 빠드마삼바와가 생전에 자신과 닮았다며 가피를 내리고 "이제 이 불상은 나 자신과 다름없다"고 한 불상이다. 쌈예 사원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인도 시킴(Sikkim) 국왕의 모후가 찍은 사진만 전해진다.[49] 보리(菩提)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선근공덕 (善根功德)[50] 예를 들어 "진언이나 사다나(sadhana, 본존 성취의궤)를 하루에 몇 번 해야 된다."라는 식으로 관정을 준 아사리가 제자에게 수행 의무를 줄 때가 있다. 만일 이때 수행을 하기로 발원하고 약속했다면 꼭 준수해야 한다.[51] 불교 교단의 스승의 총칭[52]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에 제자가 성불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53] 옹화궁은 청(淸)대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던 옹정제, 건륭제 등에 의해 세워진 황실 전용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본래 강희제 때 환관의 수장인 대내총관(大內摠管)의 자택, 넷째 황자인 윤진(옹정제)의 옹정왕부 등으로 쓰이던 건물을 사원으로 개조하였다.[54] 《람림》을 의지하면 스승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그 죄를 사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러한 죄업이 소멸된다. 또한 무상에 대하여 배움으로써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이기심으로 생긴 죄업이 없어지고 무아를 생각함으로써 자아까지도 없애는 등 지은 죄가 저절로 소멸되는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55] 《보성론》에서는 불성을 불신(佛身)들 중 어느 것으로도 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보면, 불성은 번뇌를 아직 없애지 않은 마음의 공성을 주로 가리킨다.[56] 효자와 같은 마음, 금강석과 같은 마음, 대지와 같은 마음, 산과 같은 마음, 종과 같은 마음, 청소부와 같은 마음, 버팀목과 같은 마음, 충견과 같은 마음, 배(船)와 같은 마음[57] 복전(福田)이란 뜻의 티베트어. 중생이 예배와 공양 등을 하여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대상이므로 복전이라 한다. 역으로 중생은 수행자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수행자의 복전이다. 《입보살행론》〈인욕품〉에서는 수행자에게 있어 부처 뿐만 아니라 중생 또한 동등한 복전이기에 중생을 부처와 같이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법맥과 전승마다 촉싱의 구성은 다르다.[58] 예를 들어 세간의 모든 중생이 각각 질문을 하더라도 각각의 음성으로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것 등[59] 불법승 삼보 각각의 정의를 정확하 알고 귀의하는 것의 차이, 복덕이 늘어나는 것의 차이, 부처를 잊지 않고 늘 억념(憶念)하는 것의 차이, 믿음의 차이[60] 수행, 보시와 같은 선업을 행하여 얻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자신이나 다른 중생을 위해 함께 하는 일을 말한다.[61] 불교의 세계관인 육도 중에 악업으로 인해 환생하는 지옥, 아귀, 축생을 지칭함[62]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무수히 많은 악업을 짓고 선업은 적게 행하여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매우 어렵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은 쉽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수행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63] 사섭법(四攝法)은 다른 중생을 섭수(攝受)하는 네 가지 법을 말한다. 섭수란 자비로 거두어 보살피고 그 마음을 성숙시킴을 뜻한다. 네 가지 법이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일컫는다. 보시섭은 육바라밀의 보시바라밀과 같은 의미이다. 애어섭은 바라밀을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행섭은 대중들이 바라밀과 같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돕는 것이다. 동사섭은 본인 또한 대중들과 함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64] 팔유가(八有暇)는 수행할 수 없는 장애로부터 벗어나 여덟 가지 여유를 갖춘 것을 말한다. (1) 지옥에 태어나지 않은 것. (2) 아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 (3)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4) 오래 사는 신(장수천, 長壽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5)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 (6) 부처님의 존재를 모르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 (7) 감각기관에 장애가 없는 것. (8) 그룻된 견해를 품지 않은 것.[65] 십구족(十具足, 혹은 십원만 十圓滿)은 수행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열 가지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1) 인간으로 태어난 것. (2) 불법(佛法)이 존재하는 땅에 태어난 것. (3)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것. (4)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지 않는 것. (5) 신심을 갖춘 것. (6)부처님께서 세간에 존재하는 것. (7) 정법(正法)이 설해지고 있는 것. (8) 그 가르침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9) 그 가르침을 받는 것. (10) 후원자, 시주자 등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66]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준말로, 자비심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 무상정등정각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다.[67] 소지장(所知障):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미세한 번뇌.[68] 고성제(苦聖諦), 즉 고고(苦苦) · 괴고(壞苦) · 행고(行苦)를 절감하고 진정으로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단순한 염세주의와는 구분하여야 한다. 진정한 출리심은 윤회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깊게 사유하고 세속적 욕망보다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이다.[69] 편의상 열반을 유예한다고 표현했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열반을 이룬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최종적으로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되어 번뇌장(煩惱障) 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까지 제거하고 부처를 이룬다고 본다. 모든 중생은 동일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 등의 경전에 의거한 이러한 견해를 구경일승(究竟一乘)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해심밀경》등의 경전에 의거하여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수행자들의 종성(種性)이 각각 다르고, 한 번 얻은 과위(果位)는 바뀔 수 없다고 보는 견해를 구경삼승(究竟三乘)이라고 한다.[70] 산스크리트어이다. 빨리어로는 사마타(samatha), 위빠사나(vipassana).[71] 추리를 통한 간접적 인식[72] 감각을 통한 직접적 지각[73] 주로 겔룩빠에서 진제와 속제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74] 2002년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에서 뇌신경과학자들이 자비명상(compassion meditation) 중인 밍규르 린뽀체의 EEG와 fMRI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감마파의 증대와 뇌세포 간 감마파의 동기화 증대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밍규르 린뽀체는 이 실험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75] 참고로 티베트의 역경사들이 인도의 경, 율, 론 중 논장(論藏)을 번역하면서 도입부에 삽입하는 일종의 정형구도 '스승이신 문수사리께 귀의합니다'이다. 그러나 《소보리도차제》는 쫑까빠가 직접 지은 저작이므로 이와는 무관하다. 쫑까빠는 실제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알려져 있다.[76]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이란 후렴구 원문은 "수행자 나(쫑까빠) 또한 이와 같이 실천하였으니 해탈을 구하는 그대도 그렇게 행해야 하리라."이다.[77] 귀의할 때 배우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을 의미한다. 귀의의 학처는 수행 체계의 귀의 설명에서 이미 간략히 상술하였으며 자세한 내용은 《보리도차제광론》등의 경론을 참고바람.[78] 상부: 쫑까빠 대사와 두 수제자. 가운데: 관세음보살의 분노존 마하깔라(mahakala, 大黑天) 하부: (左) 야마(yama, 閻魔) (右) 쿠베라(kubera, 毘沙門天). 분노존이란 중생의 거친 업과 장애를 없애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불보살이 분노한 모습으로 화현한 본존을 의미한다. 마하깔라, 쿠베라, 야마는 각각 상사도, 중사도, 하사도를 수호한다.[79] samāpatti. 도달. 성취. 입정(入定). 명상을 즐기는 상태. 명상의 단계. 명상의 성취. 등지(等至). 정수(正受). 입정(入定). 삼마발저(三摩跋底).[80] 근본지(根本智)의 반대로, 여량지(如量智), 권지(權智), 또는 속지(俗智)라고도 말함. 근본지에 의하여 깨달은 후, 다시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해 깨달아 아는 지혜.[81] 2015년 사캬빠 법왕인 사캬티진 존자가 방한하여 직접 법문을 설하였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상)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하)[82] 파봉카 린뽀체의 《손 안의 해탈》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는 ‘룽균(구전口傳, ལུང་རྒྱུན་)’만 있었으나 후대 사람들이 구전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티균(광해廣解, ཁྲིད་རྒྱུན་)’이 나타났고, 티균은 다시 ‘쎼티’, ‘마르티’, ‘냠티’, ‘뇽티’로 나뉘어진다. ‘쎼티(བཤད་ཁྲིད་)’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깊게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고, ‘마르티(དམར་ཁྲིད་)’는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보다는 의술이 뛰어난 의사가 시체를 해부하여 제자에게 오장육부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듯 문장의 핵심을 직접 일러주는 것이다. ‘냠티(ཉམས་ཁྲིད་)’는 스승이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제자의 근기에 알맞게 가르치는 것이며, ‘뇽티(མྱོང་ཁྲིད་)’는 스승이 제자와 같이 살거나 가까이 있으면서 제자가 하나를 완벽하게 깨우칠 때까지 다음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티균’의 방법으로 배우는 것은 업을 녹이는 특별한 비법이며, 불보살들의 불가사의한 가피를 입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83]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84]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85] 앞줄 좌(左)부터 닝마빠의 뒤좀(Dudjom) 린뽀체, 깔마 까규빠의 16대 까르마빠(Karmapa), 사캬빠의 41대 사캬 티진(Sakya Trizin), 겔룩빠의 14대 달라이 라마(Dalai lama), 링(Ling) 린뽀체, 티장(Trizang) 린뽀체, 바쿨라(Bakula) 린뽀체.[86] 참고로 티베트어에서 빠(Pa)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닝마빠를 번역하면 '오래된(닝마) 사람(빠)'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임을 의미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Pa'는 '파'로 표기해야 하지만 초창기 이러한 표기 때문에 '파(Pa)'가 우리말 '파(派)'로 오해되는 일이 잦자 최근에는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어 발음대로 표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티베트어는 엄연히 자음의 기식 유무를 구분하는 언어라서 베트남어처럼 된소리 표기가 허용되어야 하는데도 제대로 된 표기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티베트어를 위한 표기법이 따로 만들어진다면 된소리가 허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황이 비슷한 처지의 언어로는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고전 그리스어 등이 있다. 아무튼 논문이나 리포트는 전부 현행 표기법에 따라 거센소리로 쓰는 게 원칙이다.[87] '까마빠'로도 불린다.[88] 좌(左)로 부터 1열: 보신불 금강살타(Vajrasattva), 법신불 보현왕여래(Samantabhadra), 화신불 가랍 도제(Garab dorje). 2열: 아미타불, 백색 따라. 3열: 예세 초겔(Yeshe tsogyal), 빠드마삼바와의 적정존(寂靜尊) 구루 촉게 도제(Guru Tsokyé Dorje), 만다라와(Mandarava). 4열: 빠드마삼바와의 분노존 구루 닥뽀(Guru Dragpo), 호법존 싱하무카(Simhamukha) 5열: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 티송 데첸(Trisong detsen)[89]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 첸모》가 뗄마 전승에 속한다. '바르도 퇴돌 첸모'란 '중음(中陰,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얻게 되는 해탈'이란 뜻이다.[90] 사캬빠의 실질적인 성립은 꾄촉 겔뽀의 손자인 사첸 꿍가 닝뽀부터 시작된다. 지금강불 아래에 꿍가 닝뽀를 위시한 다섯 명의 사캬빠 창시자가 있다. 1. (가운데) 사첸 꿍가 닝뽀(Sachen Kunga Nyingpo) (1092–1158) 2. (왼쪽 위) 소남 체모(Sonam Tsemo) (1142–1182) 3. (오른쪽 위) 제쭌 닥빠 갤첸(Jetsun Dragpa Gyaltsen) (1147–1216) 4. (왼쪽 아래) 사캬 빤디따(Sakya Pandita) (1182–1251) 5. (오른쪽 아래) 도곤 최걀 팍빠(Drogön Chögyal Phagpa) (1235–1280)[91] 좌(左)로부터 1열: 틸로빠(Tilopa), 지금강불(Vajradhara). 나로빠(Naropa). 2열: 성취자(siddha) 마이뜨리빠(Maitripa), 샹빠 까규(Shangpa Kagyu)의 창시자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 3열: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Gampopa). 4열: 깔마 까규(Karma Kagyu)의 창시자 두숨 켄빠(Dusum Kyenpa), 팍두 까규(Pagdru Kagyu)의 창시자 팍모 둡빠(Pagmo drupa).[92] 로짜와(lotsawa)는 '역경사'라는 뜻의 티벳어이다.[93] 1열: 석가모니불 2열: (左) 쫑까빠의 두 수제자 1대 판첸 라마 겔찹 제(Gyaltsab Je), 케둡 제(Kedrup Je) 3열: (左) 문수보살, 문수보살의 분노존 야만따까(Yamantaka), 백색 따라.[94] 린뽀체(rinpoche)란 '보배로운 존재'란 뜻의 경칭이다. 보통 환생자 고승을 가리키는 경칭으로 알려졌지만, 환생자가 아닌 당대에 높은 성취를 이룬 고승에게도 쓰인다.[95] 부처와 보살에 대한 정의는 불교 내 각 종파마다 다르다. 상좌부 불교 참조.[96]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지위를 10지(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견도(見道)에 들어선 초지(初地)보살은 화신 100개를 나툴 수 있다고 한다. 높은 지에 오를수록 나툴 수 있는 화신의 수가 증가하여 부처는 화신을 무한하게 나툴 수 있다.[97] 불교의 용어. 제자가 스승에게서 정법을 받아 이를 상호ㆍ계승한다는 뜻.[98] 지혜는 무루업(無漏業), 복덕은 유루(有漏)의 선업(善業)에 해당한다. 지혜자량은 부처의 법신을 이루며 복덕자량은 부처의 색신을 이룬다.[99] 물론 다음 생에도 환생하겠다는 스승 본인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100] 보살은 수행의 과정에서 종종 삼악도나 성문, 연각의 경지로 퇴락하기도 한다. 반면에 더이상 퇴락하지 않고 깨달음을 잃지 않는 상태를 '불퇴전', '아비발치'라 한다. 구체적으로 보살 52위 중 십주(十住)의 제 7주인 불퇴전주(不退轉住), 십지(十地)의 제 8지인 부동지(不動地) 등을 불퇴전지라고 일컫는다. 그 중 진정한 의미의 불퇴전지는 제 8지인 부동지이며, 부동지에 오른 후에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퇴전함 없이 향상하게 된다.[101] 대개 섭씨 20도 안팎의 체온을 유지한다.[102] 관련 기사 링크(※시신 사진 주의) #1 #2 #3 #4 #5[103] 촉니(Tsoknyi) 린뽀체가 도종 린뽀체의 시신 상태를 설명하는 영상(※시신 영상 주의) #[104] 관련 기사 링크. #1 #2 #3 #4 #5[105] 바르도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으로, 특정한 두 시점 사이의 기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단 중유(中有, antarā-bhava)뿐 아니라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 각각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106] 바르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의 서적들을 참조할 것. 《티베트 사자의 서(개정 완역)》, 《티벳 사자의 여행 안내서》, 《바르도 성취법》, 《달라이 라마, 죽음을 말하다》, 《티베트의 지혜(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등[107] 정확히는 티베트 불교에서 요의로 간주하는 중관학파의 이제론이다. 불교학파마다 이제, 즉 진제와 속제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다.[108] 대상을 분별해서 거기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는 지적 작용.[109] 이 경우는 환생보다는 '소산(emanation)'에 해당한다.[110]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794[111] 탱화의 어원이 탕카라는 설이 있다. 국내에는 화정박물관에 티베트 탕카 컬렉션이 있다.[112] 큰 행사 때 하는 법회 방식이니만큼 이때 절은 법회 참가자로 엄청 소란스러워지곤 했는데, 이 야외 법회마냥 시끄러운 모습을 야단법석이라 한다.[113]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이 들어있고 마니 콜로 내부에는 진언이 들어있다. 글을 몰라 경전이나 진언을 외울 수 없어도 돌리는 것만으로 똑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법구(法具)이다. 붓다가 법륜을 굴리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114] 티벳망명정부의 주한 대표부 역할을 하는 티벳하우스 코리아(Tibet House Korea)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115] 티베트족 자치주 내 최대 사원인 닝마빠 오명불학원의 지도자 중 한 명. 중국 본토 등 중화권에서는 달라이 라마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티베트 불교 스승이다.[116] 대체로 시장 티베트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북 3성의 한족들이 많이 믿는다. 동북 3성의 만주족은 청나라부터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며, 만주 지역 및 일부 퉁구스계 제족들(어원커족, 시버족, 나나이족) 중에서도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부 지역의 몽골인들 또한 티베트 불교를 믿기도 한다. 그 외 내몽골 자치구의 다우르족도 일부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117] 이는 후술할 대만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찬성하는 외성인이기 때문이다. 단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티베트를 지배하는 걸 원할 뿐.[118] 이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신자 수는 10만~20만여 명 정도이다.[119]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도 어린 시절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쓴 이름 '처이발상'도 승려 시절에 받은 법명이었다.[120] 자세한 내용은 종교적 소수자, 타타르의 멍에 문서 참조[121]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긴스키 사원(Ivolginsky datsan)과 치타 근처의 아긴스코예 사원(Aginskoe datsan)[122]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123] 서구권 화교들과 달리 기독교 중에서는 정교회 세가 강하고 불교 중에서는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하다.[124]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미얀마와의 접경지대에 사는 경우에는 상좌부 불교를 믿기도 한다.[125] 케냐, 남아공, 짐바브웨 등[126] 잘 들어보면 티벳어임을 알 수 있다. 흠좀무[127]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폴란드 등 다수의 유럽국가에 티벳불교 사원과 수행센터가 있다.[128] 유명 헐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 우마 서먼 등이 대표적인 미국의 티베트 불교 신자다. 리처드 기어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고 한 때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 우마 서먼은 부친이 미국의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학자인 컬럼비아대 교수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이다. 우마 서먼의 이름 중에 '우마(Uma)'란 퍼스트네임은 대승불교 사상인 '중관'을 뜻하는 티베트어이고 미들네임인 카루나(Karuna)는 '대비심'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129]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티베트 불교 센터가 있다.[130] 대승불교권 국가인 베트남인들과 동남아의 화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도들이 존재한다.[131] 실제로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기 직전과 직후 인도의 승려들과 불경들이 전부 티벳으로 넘어갔기에 마지막 계승자로 보고, 티베트 불교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132] 제 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다.[133] 티베트 고위 승려중 처음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있다.[134]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당시 비구니 구족계는 들어오지 않아 티베트 불교 역사상 비구니 계단(戒壇)이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때문에 한국, 대만, 홍콩, 베트남 등지에서 편법적으로(?) 비구니계를 받은 몇몇 티베트 불교 소속 여승들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티베트 불교 교단 내부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인지라 티베트 불교 내의 비구니 계단 설립은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남자 수행자에게만 허용되던 최고 학위인 '게쉬(dge bshes)'를 여자 수행자에게도 허용하여 '게쉬마(dge bshes ma)' 학위가 수여되는 등 여자 수행자 지위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135]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혈(精血)을 의미한다. 미세한 몸과 의식의 차원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산출하는 질료가 되므로 '보리심'이라고 한다.[136] 둑빠 까규빠의 무문관 수행자인 독덴(rtogs ldan, 남성) / 독덴마(rtogs ldan ma, 여성)는 응악빠처럼 머리를 기르고 흰색 의복을 입은 재가 수행자 복식을 취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이다. 밀라레빠의 수행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독덴은 안으로는 비구계를 지키고 겉으로는 재가 수행자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는 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되 비구의 특권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12년 간의 무문관 수행을 포함하여 일생을 수행에 헌신한다.[137] 승려의 계율을 중시했던 겔룩빠의 창시자 쫑까빠는 대신 중음(中陰)에서 불과(佛果)를 성취했다고 알려졌다. 참고로 닝마빠의 족첸 전승에는 성적 요가를 행하지 않아도 동등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수행법이 전해진다.[138] 의료진은 당시 인도인 측근의 권유에 따른 지나친 견과류 섭취가 담낭 결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 Dharmakirt)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세기경?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 Kamalashila)
17. 아티샤(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2] 각 종파 별로 열리는 대(大)기원 법회. 사부대중이 모여 수 일간 기도, 공양, 토론, 명상 등을 하며 불법(佛法)의 지속과 흥왕을 기원한다. #[3] 동아시아권의 대승 불교(Mahayana buddhism)와 남방권의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ism)에 이어 불교 종파 중 규모 3위에 해당한다. # #[4] 《입보살행론》과 《중론》의 게송은 각각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공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온(五蘊)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란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달라이 라마는 아침마다 《입보살행론》의 게송을 사유하며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론》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늘 사유한다고 한다.[5] 티베트인은 티베트 자치구 바깥쪽 쓰촨성, 윈난성, 칭하이성, 간쑤성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혹은 티베트인이 아닌 중국의 다른 민족 중에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다.[6] 용수보살의 탄생을 예언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성(佛性)에 관한 10대 경전 중 하나이다.[7] 초창기 서구의 학계에서도 라마이즘(Lamaism)이라는 단어를 썼다.[8]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9]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10]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은 쌈예 논쟁의 결과를 서로 엇갈리게 기록했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쌈예논쟁 이후 인도불교는 티벳 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고 마하연의 선종은 '화상(和尙)종'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빠의 족첸이나 까규빠의 마하무드라 전승도 '화상종' 아니냐는 타 종파의 비판을 듣곤 하였다.[11] 인도에서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서북쪽 중앙아시아 쪽으로 가장 먼저 불교가 전파되었고 이것이 실크로드와 남중국해를 통해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12]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잠발라(Jambhal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13] 무슬림의 종교 박해는 인도 불교 쇠멸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 외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14] 모든 번뇌를 자르는 반야이검(般若利劍)과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갖고 있다. 반야이검은 번뇌의 줄기를 끊고, 검을 둘러싼 지혜의 화염은 번뇌의 뿌리까지 태워 없앤다.[15] 4종의 암시적인 가르침과 4종의 간접적인 가르침.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16] 2016년 9월 2일 동아일보 A28면[17]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의 논서인 《진실강요(Tattvasaṃgraha)》에서 인용한 경전 어구이다. 현존하는 경전(經, sūtra)에서는 1차 출처를 찾을 수 없으나 《Śrīmahābālatantrarāja》라는 밀교 속전(續, tantra)에서는 거의 동일한 어구를 찾을 수 있다. 가르침의 비판적 수용에 관한 내용은 초기 불교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깔라마 경(Kalama sutta)〉 등 에서도 찾을 수 있다.[18] 《대승열반경》의 〈사의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현교 설명 도입부에 상술하였다.[19] 나가(Naga, 龍)에게서 용궁에 감춰진 반야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0]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4개의 팔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하고 흰 색 몸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정수리에는 근본 스승(本師)인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으며 가운데 양 손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白蓮)을 들고 있다.[21]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본체인 대비심(大悲心)을 상징한다면, 따라보살은 대비의 작용인 대비행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화신(化身)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부처로 알려졌다. 오방불(五方佛) 중의 하나인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asiddhi)의 불모(佛母)로써 불공성취불과 같은 녹색을 띈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도모(度母)로 한역되며, 관련 경전도 한역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다.[22] 성문승의 계율로써 개인의 해탈을 위해 따르는 계율인지라 '별해탈계'라고 한다. 재가자가 따르는 우바새ㆍ우바이계, 출가자가 따르는 사미ㆍ사미니계, 식차마나니계, 비구ㆍ비구니계를 일컫는다.[23] 참고로 동아시아 불교의 보살계는 크게 범망계와 유가계 두 계열로 나뉜다. 법상종 계열에서는 《유가사지론》〈계품〉의 유가계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 조계종을 비롯한 대한민국 주요 불교 종단은《범망경》의 10개 근본 계율과 48개 보조 계율로 이루어진 범망계를 따른다.[24]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승계에 대한 논서인 《the String of Brilliant Jewels: Instructions on the Individual Liberation, the Bodhisattva and the Tantric Vows (So thar byang sems gsang sngag gsum gyi sdom pa'i bslab bya nor bu'i 'od 'phreng)》의 일부이다.[25] 일반인들에겐 죄가 되지 않는 행위에 대해 금지한 계율.[26]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이간어(양설), 악어, 기어 등 10불선업 중의 몸과 말로 짓는 7가지 행위.[27] 공덕을 갖추고 법답게 행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공양 받는 행위.[28] 이익과 공경을 위해 달콤한 말을 앞에서 하는 행위.[29] 상대방의 물건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그것에 대해 찬탄하는 행위.[30] 누구는 나에게 공양을 하고 누구는 안 했다는 식으로 타인을 비난하여 공양 받는 행위.[31]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미끼)을 주는 행위.[32] 다섯 가지 가림(장애). 도회개(掉悔蓋), 진에개(瞋恚蓋), 혼수개(昏睡蓋), 탐욕개(貪欲蓋), 의법개(疑法蓋).[33] 일체 중생을 내가 구제해야겠다는 책임감.[34] 소의대치력(所依大治力), 염환대치력(厭患大治力), 반회대치력(返回大治力), 현행대치력(現行大治力). 1. 소의대치력: 삼귀의와 보리심을 수습(修習)하는 것. 2. 염환대치력: 악업으로부터 이숙(異熟) 등의 삼과(三果)가 일어나는 도리를 명상하고, 자신이 지은 악업들에 대한 큰 후회를 일으키는 것. 3. 반회대치력: 이후로는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십불선업을 단속하는 것. 4. 현행대치력: 반야경 등의 경구를 수지, 독송하는 것. 무아와 광명의 법성을 배우고 본래청정을 믿는 것. 백자진언 등의 특수한 다라니를, 죄업이 소멸되었다는 상징이 나타날 때까지 의식에 따라 외는 것.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 부처님과 탑 등에 갖가지 공양을 올리는 것. 부처님과 대보살님들의 명호를 듣고 수지하는 것.[35] 두 다리를 똑같이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이 땅에 닿지 않게 쪼그리고 앉는 자세[36] 사섭법 :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37] 상좌부 경전인《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산 개울물의 비유로써 설명했다. “산 개울물은 한 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쉼 없이 계속 흘러 내려간다. 바라문아, 이처럼 사람의 삶도 이 산 개울물과 같은 것이다." 산 개울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가므로 한 순간도 동일한 적이 없지만 흘러가는 현상은 지속되며 관찰 가능하다.[38]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39]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한다.[40]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1] 달라이 라마의 《수심팔훈》 법문 링크[42] 상부: (左) 석가모니불 (右) 금강살타보살. 금강수보살은 모든 번뇌와 마라를 항복시키는 분노존(忿怒尊, krodhakaya)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금강저, 왼손에는 갈고리를 들고 있다. 금강수보살은 대세지보살 혹은 금강살타보살의 분노존으로 알려져있다. 분노존의 분노는 번뇌로서의 분노가 공성(空性)의 지혜에 의하여 중생을 위한 대자비로 전환된 형태이다. 이 경우 분노는 오염을 여읜 청정하고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한다.[43] 한국의 밀교는 대부분 조선조 불교 탄압으로 인해 독자적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재 한국에 진각종, 총지종 등 밀교 종단이 있으나 모두 근현대에 새로 창종된 종단들이다.[44] 지금강불의 짙은 푸른색은 허공같이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하고, 금강저와 금강령의 교차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의미한다. 84명의 마하싯다는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밀교 대성취자들이다.[45]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교화 대상인 중생의 근기를 따라 화현한 화신불(化身佛)이다.[46] 업을 짓고 쌓는 힘이 왕성하고 쉽게 성숙해서, 생의 전반에 쌓은 업이 생의 후반에 익는 땅을 말한다.[47] 문수보살이 성불하여 이룬 부처[48] 구루 빠드마삼바와가 생전에 자신과 닮았다며 가피를 내리고 "이제 이 불상은 나 자신과 다름없다"고 한 불상이다. 쌈예 사원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인도 시킴(Sikkim) 국왕의 모후가 찍은 사진만 전해진다.[49] 보리(菩提)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선근공덕 (善根功德)[50] 예를 들어 "진언이나 사다나(sadhana, 본존 성취의궤)를 하루에 몇 번 해야 된다."라는 식으로 관정을 준 아사리가 제자에게 수행 의무를 줄 때가 있다. 만일 이때 수행을 하기로 발원하고 약속했다면 꼭 준수해야 한다.[51] 불교 교단의 스승의 총칭[52]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에 제자가 성불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53] 옹화궁은 청(淸)대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던 옹정제, 건륭제 등에 의해 세워진 황실 전용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본래 강희제 때 환관의 수장인 대내총관(大內摠管)의 자택, 넷째 황자인 윤진(옹정제)의 옹정왕부 등으로 쓰이던 건물을 사원으로 개조하였다.[54] 《람림》을 의지하면 스승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그 죄를 사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러한 죄업이 소멸된다. 또한 무상에 대하여 배움으로써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이기심으로 생긴 죄업이 없어지고 무아를 생각함으로써 자아까지도 없애는 등 지은 죄가 저절로 소멸되는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55] 《보성론》에서는 불성을 불신(佛身)들 중 어느 것으로도 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보면, 불성은 번뇌를 아직 없애지 않은 마음의 공성을 주로 가리킨다.[56] 효자와 같은 마음, 금강석과 같은 마음, 대지와 같은 마음, 산과 같은 마음, 종과 같은 마음, 청소부와 같은 마음, 버팀목과 같은 마음, 충견과 같은 마음, 배(船)와 같은 마음[57] 복전(福田)이란 뜻의 티베트어. 중생이 예배와 공양 등을 하여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대상이므로 복전이라 한다. 역으로 중생은 수행자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수행자의 복전이다. 《입보살행론》〈인욕품〉에서는 수행자에게 있어 부처 뿐만 아니라 중생 또한 동등한 복전이기에 중생을 부처와 같이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법맥과 전승마다 촉싱의 구성은 다르다.[58] 예를 들어 세간의 모든 중생이 각각 질문을 하더라도 각각의 음성으로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것 등[59] 불법승 삼보 각각의 정의를 정확하 알고 귀의하는 것의 차이, 복덕이 늘어나는 것의 차이, 부처를 잊지 않고 늘 억념(憶念)하는 것의 차이, 믿음의 차이[60] 수행, 보시와 같은 선업을 행하여 얻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자신이나 다른 중생을 위해 함께 하는 일을 말한다.[61] 불교의 세계관인 육도 중에 악업으로 인해 환생하는 지옥, 아귀, 축생을 지칭함[62]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무수히 많은 악업을 짓고 선업은 적게 행하여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매우 어렵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은 쉽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수행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63] 사섭법(四攝法)은 다른 중생을 섭수(攝受)하는 네 가지 법을 말한다. 섭수란 자비로 거두어 보살피고 그 마음을 성숙시킴을 뜻한다. 네 가지 법이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일컫는다. 보시섭은 육바라밀의 보시바라밀과 같은 의미이다. 애어섭은 바라밀을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행섭은 대중들이 바라밀과 같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돕는 것이다. 동사섭은 본인 또한 대중들과 함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64] 팔유가(八有暇)는 수행할 수 없는 장애로부터 벗어나 여덟 가지 여유를 갖춘 것을 말한다. (1) 지옥에 태어나지 않은 것. (2) 아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 (3)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4) 오래 사는 신(장수천, 長壽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5)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 (6) 부처님의 존재를 모르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 (7) 감각기관에 장애가 없는 것. (8) 그룻된 견해를 품지 않은 것.[65] 십구족(十具足, 혹은 십원만 十圓滿)은 수행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열 가지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1) 인간으로 태어난 것. (2) 불법(佛法)이 존재하는 땅에 태어난 것. (3)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것. (4)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지 않는 것. (5) 신심을 갖춘 것. (6)부처님께서 세간에 존재하는 것. (7) 정법(正法)이 설해지고 있는 것. (8) 그 가르침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9) 그 가르침을 받는 것. (10) 후원자, 시주자 등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66]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준말로, 자비심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 무상정등정각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다.[67] 소지장(所知障):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미세한 번뇌.[68] 고성제(苦聖諦), 즉 고고(苦苦) · 괴고(壞苦) · 행고(行苦)를 절감하고 진정으로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단순한 염세주의와는 구분하여야 한다. 진정한 출리심은 윤회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깊게 사유하고 세속적 욕망보다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이다.[69] 편의상 열반을 유예한다고 표현했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열반을 이룬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최종적으로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되어 번뇌장(煩惱障) 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까지 제거하고 부처를 이룬다고 본다. 모든 중생은 동일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 등의 경전에 의거한 이러한 견해를 구경일승(究竟一乘)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해심밀경》등의 경전에 의거하여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수행자들의 종성(種性)이 각각 다르고, 한 번 얻은 과위(果位)는 바뀔 수 없다고 보는 견해를 구경삼승(究竟三乘)이라고 한다.[70] 산스크리트어이다. 빨리어로는 사마타(samatha), 위빠사나(vipassana).[71] 추리를 통한 간접적 인식[72] 감각을 통한 직접적 지각[73] 주로 겔룩빠에서 진제와 속제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74] 2002년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에서 뇌신경과학자들이 자비명상(compassion meditation) 중인 밍규르 린뽀체의 EEG와 fMRI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감마파의 증대와 뇌세포 간 감마파의 동기화 증대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밍규르 린뽀체는 이 실험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75] 참고로 티베트의 역경사들이 인도의 경, 율, 론 중 논장(論藏)을 번역하면서 도입부에 삽입하는 일종의 정형구도 '스승이신 문수사리께 귀의합니다'이다. 그러나 《소보리도차제》는 쫑까빠가 직접 지은 저작이므로 이와는 무관하다. 쫑까빠는 실제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알려져 있다.[76] "해탈을 원하는 저 또한~"이란 후렴구 원문은 "수행자 나(쫑까빠) 또한 이와 같이 실천하였으니 해탈을 구하는 그대도 그렇게 행해야 하리라."이다.[77] 귀의할 때 배우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을 의미한다. 귀의의 학처는 수행 체계의 귀의 설명에서 이미 간략히 상술하였으며 자세한 내용은 《보리도차제광론》등의 경론을 참고바람.[78] 상부: 쫑까빠 대사와 두 수제자. 가운데: 관세음보살의 분노존 마하깔라(mahakala, 大黑天) 하부: (左) 야마(yama, 閻魔) (右) 쿠베라(kubera, 毘沙門天). 분노존이란 중생의 거친 업과 장애를 없애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불보살이 분노한 모습으로 화현한 본존을 의미한다. 마하깔라, 쿠베라, 야마는 각각 상사도, 중사도, 하사도를 수호한다.[79] samāpatti. 도달. 성취. 입정(入定). 명상을 즐기는 상태. 명상의 단계. 명상의 성취. 등지(等至). 정수(正受). 입정(入定). 삼마발저(三摩跋底).[80] 근본지(根本智)의 반대로, 여량지(如量智), 권지(權智), 또는 속지(俗智)라고도 말함. 근본지에 의하여 깨달은 후, 다시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해 깨달아 아는 지혜.[81] 2015년 사캬빠 법왕인 사캬티진 존자가 방한하여 직접 법문을 설하였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상)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하)[82] 파봉카 린뽀체의 《손 안의 해탈》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는 ‘룽균(구전口傳, ལུང་རྒྱུན་)’만 있었으나 후대 사람들이 구전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티균(광해廣解, ཁྲིད་རྒྱུན་)’이 나타났고, 티균은 다시 ‘쎼티’, ‘마르티’, ‘냠티’, ‘뇽티’로 나뉘어진다. ‘쎼티(བཤད་ཁྲིད་)’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깊게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고, ‘마르티(དམར་ཁྲིད་)’는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보다는 의술이 뛰어난 의사가 시체를 해부하여 제자에게 오장육부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듯 문장의 핵심을 직접 일러주는 것이다. ‘냠티(ཉམས་ཁྲིད་)’는 스승이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제자의 근기에 알맞게 가르치는 것이며, ‘뇽티(མྱོང་ཁྲིད་)’는 스승이 제자와 같이 살거나 가까이 있으면서 제자가 하나를 완벽하게 깨우칠 때까지 다음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티균’의 방법으로 배우는 것은 업을 녹이는 특별한 비법이며, 불보살들의 불가사의한 가피를 입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83]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84]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85] 앞줄 좌(左)부터 닝마빠의 뒤좀(Dudjom) 린뽀체, 깔마 까규빠의 16대 까르마빠(Karmapa), 사캬빠의 41대 사캬 티진(Sakya Trizin), 겔룩빠의 14대 달라이 라마(Dalai lama), 링(Ling) 린뽀체, 티장(Trizang) 린뽀체, 바쿨라(Bakula) 린뽀체.[86] 참고로 티베트어에서 빠(Pa)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닝마빠를 번역하면 '오래된(닝마) 사람(빠)'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임을 의미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Pa'는 '파'로 표기해야 하지만 초창기 이러한 표기 때문에 '파(Pa)'가 우리말 '파(派)'로 오해되는 일이 잦자 최근에는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어 발음대로 표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티베트어는 엄연히 자음의 기식 유무를 구분하는 언어라서 베트남어처럼 된소리 표기가 허용되어야 하는데도 제대로 된 표기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티베트어를 위한 표기법이 따로 만들어진다면 된소리가 허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황이 비슷한 처지의 언어로는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고전 그리스어 등이 있다. 아무튼 논문이나 리포트는 전부 현행 표기법에 따라 거센소리로 쓰는 게 원칙이다.[87] '까마빠'로도 불린다.[88] 좌(左)로 부터 1열: 보신불 금강살타(Vajrasattva), 법신불 보현왕여래(Samantabhadra), 화신불 가랍 도제(Garab dorje). 2열: 아미타불, 백색 따라. 3열: 예세 초겔(Yeshe tsogyal), 빠드마삼바와의 적정존(寂靜尊) 구루 촉게 도제(Guru Tsokyé Dorje), 만다라와(Mandarava). 4열: 빠드마삼바와의 분노존 구루 닥뽀(Guru Dragpo), 호법존 싱하무카(Simhamukha) 5열: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 티송 데첸(Trisong detsen)[89]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 첸모》가 뗄마 전승에 속한다. '바르도 퇴돌 첸모'란 '중음(中陰,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얻게 되는 해탈'이란 뜻이다.[90] 사캬빠의 실질적인 성립은 꾄촉 겔뽀의 손자인 사첸 꿍가 닝뽀부터 시작된다. 지금강불 아래에 꿍가 닝뽀를 위시한 다섯 명의 사캬빠 창시자가 있다. 1. (가운데) 사첸 꿍가 닝뽀(Sachen Kunga Nyingpo) (1092–1158) 2. (왼쪽 위) 소남 체모(Sonam Tsemo) (1142–1182) 3. (오른쪽 위) 제쭌 닥빠 갤첸(Jetsun Dragpa Gyaltsen) (1147–1216) 4. (왼쪽 아래) 사캬 빤디따(Sakya Pandita) (1182–1251) 5. (오른쪽 아래) 도곤 최걀 팍빠(Drogön Chögyal Phagpa) (1235–1280)[91] 좌(左)로부터 1열: 틸로빠(Tilopa), 지금강불(Vajradhara). 나로빠(Naropa). 2열: 성취자(siddha) 마이뜨리빠(Maitripa), 샹빠 까규(Shangpa Kagyu)의 창시자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 3열: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Gampopa). 4열: 깔마 까규(Karma Kagyu)의 창시자 두숨 켄빠(Dusum Kyenpa), 팍두 까규(Pagdru Kagyu)의 창시자 팍모 둡빠(Pagmo drupa).[92] 로짜와(lotsawa)는 '역경사'라는 뜻의 티벳어이다.[93] 1열: 석가모니불 2열: (左) 쫑까빠의 두 수제자 1대 판첸 라마 겔찹 제(Gyaltsab Je), 케둡 제(Kedrup Je) 3열: (左) 문수보살, 문수보살의 분노존 야만따까(Yamantaka), 백색 따라.[94] 린뽀체(rinpoche)란 '보배로운 존재'란 뜻의 경칭이다. 보통 환생자 고승을 가리키는 경칭으로 알려졌지만, 환생자가 아닌 당대에 높은 성취를 이룬 고승에게도 쓰인다.[95] 부처와 보살에 대한 정의는 불교 내 각 종파마다 다르다. 상좌부 불교 참조.[96]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지위를 10지(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견도(見道)에 들어선 초지(初地)보살은 화신 100개를 나툴 수 있다고 한다. 높은 지에 오를수록 나툴 수 있는 화신의 수가 증가하여 부처는 화신을 무한하게 나툴 수 있다.[97] 불교의 용어. 제자가 스승에게서 정법을 받아 이를 상호ㆍ계승한다는 뜻.[98] 지혜는 무루업(無漏業), 복덕은 유루(有漏)의 선업(善業)에 해당한다. 지혜자량은 부처의 법신을 이루며 복덕자량은 부처의 색신을 이룬다.[99] 물론 다음 생에도 환생하겠다는 스승 본인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100] 보살은 수행의 과정에서 종종 삼악도나 성문, 연각의 경지로 퇴락하기도 한다. 반면에 더이상 퇴락하지 않고 깨달음을 잃지 않는 상태를 '불퇴전', '아비발치'라 한다. 구체적으로 보살 52위 중 십주(十住)의 제 7주인 불퇴전주(不退轉住), 십지(十地)의 제 8지인 부동지(不動地) 등을 불퇴전지라고 일컫는다. 그 중 진정한 의미의 불퇴전지는 제 8지인 부동지이며, 부동지에 오른 후에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퇴전함 없이 향상하게 된다.[101] 대개 섭씨 20도 안팎의 체온을 유지한다.[102] 관련 기사 링크(※시신 사진 주의) #1 #2 #3 #4 #5[103] 촉니(Tsoknyi) 린뽀체가 도종 린뽀체의 시신 상태를 설명하는 영상(※시신 영상 주의) #[104] 관련 기사 링크. #1 #2 #3 #4 #5[105] 바르도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으로, 특정한 두 시점 사이의 기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단 중유(中有, antarā-bhava)뿐 아니라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 각각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106] 바르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의 서적들을 참조할 것. 《티베트 사자의 서(개정 완역)》, 《티벳 사자의 여행 안내서》, 《바르도 성취법》, 《달라이 라마, 죽음을 말하다》, 《티베트의 지혜(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등[107] 정확히는 티베트 불교에서 요의로 간주하는 중관학파의 이제론이다. 불교학파마다 이제, 즉 진제와 속제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다.[108] 대상을 분별해서 거기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는 지적 작용.[109] 이 경우는 환생보다는 '소산(emanation)'에 해당한다.[110]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794[111] 탱화의 어원이 탕카라는 설이 있다. 국내에는 화정박물관에 티베트 탕카 컬렉션이 있다.[112] 큰 행사 때 하는 법회 방식이니만큼 이때 절은 법회 참가자로 엄청 소란스러워지곤 했는데, 이 야외 법회마냥 시끄러운 모습을 야단법석이라 한다.[113]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이 들어있고 마니 콜로 내부에는 진언이 들어있다. 글을 몰라 경전이나 진언을 외울 수 없어도 돌리는 것만으로 똑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법구(法具)이다. 붓다가 법륜을 굴리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114] 티벳망명정부의 주한 대표부 역할을 하는 티벳하우스 코리아(Tibet House Korea)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115] 티베트족 자치주 내 최대 사원인 닝마빠 오명불학원의 지도자 중 한 명. 중국 본토 등 중화권에서는 달라이 라마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티베트 불교 스승이다.[116] 대체로 시장 티베트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북 3성의 한족들이 많이 믿는다. 동북 3성의 만주족은 청나라부터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며, 만주 지역 및 일부 퉁구스계 제족들(어원커족, 시버족, 나나이족) 중에서도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부 지역의 몽골인들 또한 티베트 불교를 믿기도 한다. 그 외 내몽골 자치구의 다우르족도 일부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117] 이는 후술할 대만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찬성하는 외성인이기 때문이다. 단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티베트를 지배하는 걸 원할 뿐.[118] 이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신자 수는 10만~20만여 명 정도이다.[119]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도 어린 시절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쓴 이름 '처이발상'도 승려 시절에 받은 법명이었다.[120] 자세한 내용은 종교적 소수자, 타타르의 멍에 문서 참조[121]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긴스키 사원(Ivolginsky datsan)과 치타 근처의 아긴스코예 사원(Aginskoe datsan)[122]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123] 서구권 화교들과 달리 기독교 중에서는 정교회 세가 강하고 불교 중에서는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하다.[124]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미얀마와의 접경지대에 사는 경우에는 상좌부 불교를 믿기도 한다.[125] 케냐, 남아공, 짐바브웨 등[126] 잘 들어보면 티벳어임을 알 수 있다. 흠좀무[127]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폴란드 등 다수의 유럽국가에 티벳불교 사원과 수행센터가 있다.[128] 유명 헐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 우마 서먼 등이 대표적인 미국의 티베트 불교 신자다. 리처드 기어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고 한 때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 우마 서먼은 부친이 미국의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학자인 컬럼비아대 교수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이다. 우마 서먼의 이름 중에 '우마(Uma)'란 퍼스트네임은 대승불교 사상인 '중관'을 뜻하는 티베트어이고 미들네임인 카루나(Karuna)는 '대비심'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129]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티베트 불교 센터가 있다.[130] 대승불교권 국가인 베트남인들과 동남아의 화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도들이 존재한다.[131] 실제로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기 직전과 직후 인도의 승려들과 불경들이 전부 티벳으로 넘어갔기에 마지막 계승자로 보고, 티베트 불교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132] 제 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다.[133] 티베트 고위 승려중 처음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있다.[134]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당시 비구니 구족계는 들어오지 않아 티베트 불교 역사상 비구니 계단(戒壇)이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때문에 한국, 대만, 홍콩, 베트남 등지에서 편법적으로(?) 비구니계를 받은 몇몇 티베트 불교 소속 여승들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티베트 불교 교단 내부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인지라 티베트 불교 내의 비구니 계단 설립은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남자 수행자에게만 허용되던 최고 학위인 '게쉬(dge bshes)'를 여자 수행자에게도 허용하여 '게쉬마(dge bshes ma)' 학위가 수여되는 등 여자 수행자 지위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135]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혈(精血)을 의미한다. 미세한 몸과 의식의 차원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산출하는 질료가 되므로 '보리심'이라고 한다.[136] 둑빠 까규빠의 무문관 수행자인 독덴(rtogs ldan, 남성) / 독덴마(rtogs ldan ma, 여성)는 응악빠처럼 머리를 기르고 흰색 의복을 입은 재가 수행자 복식을 취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이다. 밀라레빠의 수행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독덴은 안으로는 비구계를 지키고 겉으로는 재가 수행자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는 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되 비구의 특권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12년 간의 무문관 수행을 포함하여 일생을 수행에 헌신한다.[137] 승려의 계율을 중시했던 겔룩빠의 창시자 쫑까빠는 대신 중음(中陰)에서 불과(佛果)를 성취했다고 알려졌다. 참고로 닝마빠의 족첸 전승에는 성적 요가를 행하지 않아도 동등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수행법이 전해진다.[138] 의료진은 당시 인도인 측근의 권유에 따른 지나친 견과류 섭취가 담낭 결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