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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이뤄진 '중국의 르네상스' 원동력은 유교"
2015-03-19 10:26
디터 쿤 '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중국 송(宋)나라에 대한 후대의 주된 비판 중 하나는 '유약함'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은 물론 전후 왕조들과 비교해도 형편없이 영토가 좁았고, 문치주의에 치중한 나머지 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해 북방 이민족에 내내 시달렸다는 식의 박한 평가다.
송을 쇠퇴하게 했다는 문치주의의 이념적 토대는 물론 유교다. 알려졌다시피 송대는 주희(朱熹)를 위시한 유학자들이 발흥시킨 신유학(성리학)이 이후 중국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한 시발점이었다. 후대 개혁가들로부터 '복고' '보수' '반동' 등 온갖 혹평을 받은 중국적 사고체계가 바로 송대에 정립된 셈이다.
송대 신유학에 대해 그처럼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디터 쿤 독일 비르츠부르크대 교수의 '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는 매우 색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송 왕조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으로 자리잡았다며 그 원동력으로 주저 없이 유교를 지목한다.
물질문명사가인 저자가 각종 사료를 통해 보여주는 송 왕조의 면모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능가하고도 남을 수준이다. 몽골 침입으로 인구가 감소한 13세기에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중국에 살았고, 발달한 농업기술과 토지제도 덕분에 농업 산출량이 증가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기록했다고 한다.
게다가 다양한 형태의 방추차, 생사 감는 기계, 견·마 수력방적기 등 각종 직물 생산장비들이 등장해 유럽의 산업혁명을 방불케 할 만한 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시장과 상업조합이 생겨났고, 화폐경제, 교통수단, 도자기 생산, 광업, 제지, 인쇄, 출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동시대 유럽을 앞섰다.
저자는 왜 유교가 송대의 이같은 번영을 가능케 했다고 봤을까. 그는 먼저 당 말기에서 송 초기로 이행하는 시기 매우 뚜렷한 단절이 발견된다는 데 주목한다. 세습귀족이 몰락하고 새롭게 등장한 송대의 사대부 계층은 유교 이념의 교육을 받고 치열한 과거시험을 거쳐 등용되면서 중국의 전통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추구한 유교 원칙은 무(武)가 아닌 문(文)의 원리였으며, 상류층의 공적·사적 생활을 모두 규제하는 이념이었다. 당대 엘리트 계층이던 사대부는 각종 특권과 혜택, 정치적 영향력, 가문의 명망 등을 누렸지만 더불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관리로서 책무와 왕조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타적 윤리의 소유자여야 했다.
이런 문인 관료층이 떠받친 송의 문치 질서는 다른 어느 왕조보다 유교의 이상적 통치에 근접한 황제들, 실용주의적 분위기에서 행정·경제적 효율성을 이룬 정부, 절제와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사대부 계층, 경제 분야의 발전과 사회적 역동성 등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앞선 모습을 보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렇다면 '무능'이라는 비판을 받는 송의 국제관계도 달리 판단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북방민족 왕조와 무려 4차례나 조약을 맺으며 고개를 숙인 송의 외교가 장기간 평화와 번영을 가능케 한 실용적 외교전략이었고, 유교는 그와 같은 '평화적 공존' 전략을 추동한 이념적 토대였다는 새로운 평가를 내놓는다.
너머북스. 육정임 옮김. 568쪽. 3만원.
연합뉴스 사진
pul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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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은이),육정임 (옮긴이)너머북스2015-03-13
원제 : The Age of Confucian Rule: The Song Transformation of China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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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하버드 중국사> 송나라 편. 이 책의 키워드는 '유교'와 '혁신'이다. 언뜻 상충하는 가치로 보이지만 유례없는 변혁의 시대를 이끈 원동력은 유교 원칙이었다. 긴 역사 과정에서 그랬듯이 21세기 유교가 변신과 부활을 준비 중이다. 과연 유교는 어떤 형태로 우리와 동아시아에 다시 나타날까?
송 왕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이었다. 인구는 인류 전체의 절반 정도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누렸다. 이 시대의 창조성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능가했다. 특히 신유학은 송대와 동아시아 사회의 정치와 공적 영역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질문화와 기술사 분야의 전문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학자 디터 쿤(독일 비르츠부르크대) 교수는 혁신의 시대 송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유교라는 원칙이었음을 주지하며, 유교의 가치를 중국의 발전을 방해한 족쇄였다고 보는 근대의 견해를 재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시간과 공간, 사회 계층, 분야, 자료 등 모든 방면에서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1장에서 당의 혼란기와 오대(五代)십국(十國)의 전반적인 역사를 서술하고 2~4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송(宋)의 정치.행정.군사.대외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이것만으로도 한 권의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송대 개론서를 일독한 셈이 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1. 혼란의 시대
불교 박해 | 지방 곳곳의 도적들 | 오대십국 시대 | 거란 제국 | 탕구트(서하) 왕국
2. 모범적인 통치자들
왕조의 건립 | 나라의 통일 | 국가 권위의 중앙 집중 | 인쇄술과 정치 | 문치의 원칙
3. 몰락으로 치달은 개혁
범중엄의 ‘소규모’ 개혁 | 왕안석의 ‘중개’ 개혁 | 요의 몰락과 금의 흥기 | 북송의 몰락
4. 남쪽의 송 왕조
공존으로 가는 길 | 금 왕조의 중국화 | 송의 영광과 고난 | 몽골의 진출 | 알라의 회초리 | 서서히 다가오는 송 왕조의 최후 | 최종 붕괴
5. 세 가지 가르침
유학의 부활 | 주희, 체계적인 유교의 창조자 | 송대의 도교와 불교 | 신유학과 불교 | 주상숭배와 효도 | 요와 금의 불교 | 변화에 직면한 유교와 불교
6. 교육과 과거 시험
과거 시험제도 | 교육 기관 | 진사가 되기 위한 시험 | 고문 운동 | 관직생활, 봉록, 특권
7. 평생의례
송대의 혼례 | 여성의 교육과 재산권 | 거란과 여진의 혼례 | 한족의 장례 관습 | 거란과 여진의 장례 관습 | 혼례, 장례 그리고 중국의 정체성
8. 내면과 외부 세계의 탐험
시, 내면을 드러내는 예술 | 자연과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회화 | 사물에서 이치를 파악하다
9. 도성의 혁신
장안, 천자의 도성 | 개봉, 도시의 새로운 체계 | ‘행재’ 항주 | 장안, 개봉, 항주의 운명
10. 변화하는 산업 세계
농업 생산 | 방직기와 물레방아 | 상품과 사람의 운송 | 천연자원의 개발
11. 화폐와 조세
종이 통화: 교자, 전인 | 지폐: 회자 | 통화 팽창과 대금업 | 양세법 | 송대 조세 부담 | 이민족 정부의 재정 정책
12. 공적 영역에서의 사생활
주택과 가구 | 이동 수단 | 위생과 화장품 | 전족 | 의복 | 오락 그리고 덧없는 세상 | 건강관리와 복지
나오는 말
왕조와 황제 계보
단위 측정
참고문헌
지은이의 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384-385 이 남쪽 수도에서는 매일 아침 절에서 범종이나 목어를 두드려 새날을 선포하고 날씨 상태를 알리면 모든 관리와 평민들은 일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길가에는 장사치들이 나와서 일찍 일어난 사람들의 활기찬 아침을 도와준다는 물약이나 알약을 팔았는데,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기를 자극하거나 낮추어서 몸과 마음의 균형을 알맞게 해준다는 약이었다. 관리들의 삶이 그들의 전문적 직업에서의 경력과 승진에 초점을 두었다면, 평민들은 가능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나섰다.
관리들이나 평민들이나 모두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먹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항주의 어떤 곳들은 대단히 정교한 요리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잡화 시장에 있는 달콤한 콩탕, 과가네 꿀대추, 광가네 걸쭉한 국(갱)집, 전당문 바깥쪽에 있는 송오수 물고기탕집, 직가네 양고기 식사, 장가네 경단, 묘아교에 있는 위대도 고기요리집, 오간루 앞에 있는 주오랑네 꿀전병집 등이 있었다. 그리고 주간 시장이 폐장할 때가 되는 저녁 식사 시간이면, 아직도 성이 안 찬 사람들은 특별한 음식 가게로 가득 찬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야시장으로 지칠 줄도 모르고 모여들었다. 접기
P. 433-434 송의 지폐는 세계 역사상 국민경제에 쓰인 최초의 자립 지폐 제도였다. 몽골인들은 송을 멸망시키기 약 20년쯤 전에 지폐를 채택하였다. 그들이 1260년에 견사(絹紗)를 본위로 하여 발행한 ‘사초(絲紗)’는 1294년에 페르시아에, 그리고 1296년에는 한국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1334년에 자체 지폐를 만들고, 베트남은 1396년에 지폐를 받아들였다. 서방 국가들의 지폐 사용은 꽤 늦은 편이었다. 1661년에 스웨덴에서 시작하여 1690년에 미국이, 프랑스는 1720년, 러시아는 1768년, 영국이 1797년, 그리고 독일이 1806년에 받아들였다.
송대에 지폐가 사용된 것은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첫째, 국민경제의 번영으로 인하여 온갖 제품 생산에서 구리나 철의 수요가 높아졌으며, 지폐의 등장은 이러한 금속을 제조업에 사용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둘째, 지폐를 다량으로 또 (위조가 어렵도록) 높은 품질로 인쇄할 수 있을 만큼 인쇄 기술이 발전했다. 셋째, 송대 학자들은 화폐제도에 주목하여, 화폐가 금이나 은의 가치처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불과 교환의 수단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섭적(葉適, 1150~1223)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창조한 요물 중 하나인 돈은 그것이 지속적으로 유통될 때에만 이를 만든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그것이 시장에서 벗어나 철궤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유통의 용이함이 바로 돈의 기능이고, 지폐가 주전보다 이 기능을 더 잘 수행한 것이다. 접기
군대의 역량, 전략적 혁신, 국가의 패권으로 평가한다면 송은 허약한 왕조였고 마침내 짓밟히고 말았다. 천천히 진행된 송 왕조 멸망의 이유를 한 가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나, 군사적 효율성보다 문치를 강조한 것이 국가의 약화와 정부의 사기 저하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송의 필사적인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그러나 전성기의 송은 중국 역사,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세련되며 지성적인 사회로 꼽을 수 있다. 송이 통치한 3세기 동안 유교 이념이 공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 고대 사상의 도덕관과 교육관이 정부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송 제국의 창의적인 통치자, 학자인 관리들, 예술가들이 회복시키고 재가동한 유교 가치와 사고방식이 뒤이어 건립된 모든 왕조들의 교육 제도, 정부 체계, 민간 사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한족의 후예들 사이에 수백 년간 지속될 중국인 특유의 의식을 강화하였다. (28) 접기 - 不二
북부 구역은 거란 고유의 제도인 ‘국제…’로 다스렸는데, 이 구역에 상경과 중경이 있었으며 거란족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부 구역은 ‘한제…’로 다스렸다. 남경, 동경, 서경이 있고 한족과 발해 및 다른 정주 민족의 본거지였던 이 지역은 계획적으로 당…의 조정을 모방한 체제로 운영되었다. 북부 행정부는 거란족만 관리로 채용하고 남부에 비해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남부 지역은 황족인 야율 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야율 씨족 남자들은 모두 소…씨 종족으로부터 아내를 들였으므로 소씨 씨족은 이 점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이러한 지배 체제는 다민족 사회의 독특한 특성과 요구에 잘 들어맞았다. (57) 접기 - 不二
요 황제들은 금고에 넉넉히 보유한 은괴를 이용해 신하들의 충성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있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세폐라는 명목으로, 그러나 사실상 조공으로 받은 비단 제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물건이었으므로, 요는 충분한 이익을 남겨가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성종은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 988년에는 한족 신민들만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진사 시험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요의 영토 내에 있는 한족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였다. 얼마 안 되여 해마다 20~40명의 진사들이 배출되었다. … 994년에는 중국 방식을 본뜬 요의 역법…이 소개[‘창안’이나 ‘도입’이겠지]되었다. (59) 접기 - 不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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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디터 쿤 (Dieter Kuhn) (지은이)
독일 비르츠부르크대 교수. 그가 1988년부터 이끌어온 중국학 연구소는 현재 유럽의 20여 곳의 중국학 연구소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섬유 기업에서 일하다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게 되었다. 조셉 니덤이 편찬한 “중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 중에서 방직기술 편을 저술하였으며, 물질문화와 기술사 분야의 전문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연구 관심은 기술과 경제, 장례문화와 고고학에 걸쳐 있으며, 시대적으로는 전통시대에서 근대에까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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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하버드 중국사 송> … 총 42종 (모두보기)
육정임 (옮긴이)
이화여대와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으며, 2003년 고려대에서 <송대 가족과 재산상속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5년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송대의 가족, 종족, 여성을 주제로 논문을 써왔다.
디터 쿤(지은이)의 말
근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송대 사람들은 중세의 다른 사회에 비하여 보기 드물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천자에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규칙과 제재를 따랐으며 이러한 규율은 유교적인 행동 규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주택 건축과 의상에서의 기호부터 위생, 오락, 자선의 범주까지 사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방임적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골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이 누리던 자기 결정적인 생활 방식의 편안함은 끝나버렸다.
육정임(옮긴이)의 말
저자는 책 제목에서 송대의 표상이 된 혁신이 아니라 유교를 내세웠다. 나는 의아했다. 유교와 변혁은 역설적 관계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송대부터 나타나는 외래문화에 대한 거부감, 국수적 중화주의, 종족 의식의 강화, 전족의 유행 등은 송대 신유학의 발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 과연 송대 유교와 변혁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역자의 고민이 무색할 만큼 저자의 주장은 명쾌하고 단호하다. 한마디로 변혁의 시대 송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유교라는 원칙이었다는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유교가 중국의 발전을 방해한 족쇄였다는
‘20세기의 견해’를 반박한다
이 책의 키워드는 ‘유교’와 ‘혁신’이다. 언뜻 상충하는 가치로 보이지만 유례없는 변혁의 시대를 이끈 원동력은 유교 원칙이었다. 긴 역사 과정에서 그랬듯이 21세기 유교가 변신과 부활을
준비 중이다. 과연 유교는 어떤 형태로 우리와 동아시아에 다시 나타날까?
송 왕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이었다. 인구는 인류 전체의 절반 정도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누렸다. 이 시대의 창조성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능가했다. 특히 신유학은 송대와 동아시아 사회의 정치와 공적 영역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질문화와 기술사 분야의 전문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학자 디터 쿤(독일 비르츠부르크대) 교수는 혁신의 시대 송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유교라는 원칙이었음을 주지하며, 유교의 가치를 중국의 발전을 방해한 족쇄였다고 보는 근대의 견해를 재고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 역설한다.
과거시험을 통해 배출된 사대부 계층은 중국 사회를 개조하는 과업을 맡아 유교 원칙의 시대를 열었다. 사대부들은 재정 개혁을 통해 조세 부담을 완화했으며 지폐를 유통시켰다. 그들이 다시 설계한 수도는 상인들로 부산스러웠고, 교육제도는 평민 집안의 수재들에게 출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의 합리주의적인 태도는 인쇄, 조선, 방식, 도자기 제작, 광업, 농업 분야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고 사실주의적인 안목은 자연 세계를 탐구하였으며, 그 관찰 결과를 예술과 과학에 적용했다.
3세기에 걸쳐 거란(요)-여진(금)-몽골(원)로 이어진 침략자들과의 관계에서 외교 전략은 전쟁보다 평화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목 민족들의 군사적 위협이 끈질기게 지속되자, 세계에서 중국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다시 정의하였고, 중국인이라는 정체감이 견고해졌다.
“이 길고 광활하며 복잡다단한 역사 여행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두 가지 코드는 ‘유교’와 ‘혁신’이다”
『하버드 중국사 송_유교 원칙의 시대」는 시간과 공간, 사회 계층, 분야, 자료 등 모든 방면에서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1장에서 당의 혼란기와 오대(五代)십국(十國)의 전반적인 역사를 서술하고 2~4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송(宋)의 정치·행정·군사·대외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이것만으로도 한 권의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송대 개론서를 일독한 셈이 된다. 8개 분야 별로 엮은 그 뒤의 장에서도 저자는 송 제국에 나타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당(唐) 제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종종 그 이전 고대까지 불러내기도 한다. 공간적으로도 이 책의 무대는 송 제국을 넘어 송과 이웃했던 요, 금, 서하, 몽골까지 넓혀져 있다.
저자의 폭넓은 관심은 사회적 계층의 위아래로도 두루 미친다. 송의 황제와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한 사대부와 지식인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부유한 지주와 상인 계급, 도시와 농촌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서민들과 여성, 그리고 요와 금의 황실과 귀족들의 삶도 책의 곳곳에서 소개된다. 시험장에 앉아 있는 과거 응시생, 개봉과 항주의 번화가를 빼곡히 채운 갖가지 상점·음식점·오락 시설을 운영하거나 드나드는 사람들, 관영 물레방아 제분소의 일꾼들, 한겨울 다른 나라로 떠나는 송의 사신과 세폐를 싣고 가는 수레꾼들, 삼협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끌어올리는 배꾼들의 삶의 현장을 읽노라면 피부에 와 닿듯이 생생하다. 정사를 비롯한 기본적인 문헌 자료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이러한 모습은 저자가 문학, 시, 그림, 발굴 자료 등 다양한 물질 사료를 통해 풍부하고 세밀하게 드러낸 송대의 삶이다.
저자는 이 길고 광활하며 복잡다단한 역사 여행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면서 두 가지 코드를 가지고 이 시대를 이해하라고 권한다. 하나는 이 책의 제목으로 내세운 ‘유교’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이다. 유교는 종래 우리에게 변혁과 역동성보다 복고와 보수적인 반작용이라는 인상을 주었는데, 이처럼 얼핏 상충하는 가치로 보이는 송대 유교와 변혁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10세기, 당 말기에서 송 초기로 이행하는 시기는 중화제국사에서 가장 뚜렷한 단절을 나타냈다. 수백 년의 계보를 이어온 북부의 세습 귀족 가문들의 ‘구세계’는 880년부터 960년 사이 오대십국의 혼란과 내전을 겪으면서 마침내 사라졌다. 대신에 유교 이념의 교육을 받고 치열한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대부 계층이 중국의 전통을 다시 만들 계층으로 새로이 부상하였다. 송대 산업기술과 물질문화 분야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는, 송대의 사대부들이 정치, 이념, 철학, 문화, 문학, 예술, 과학 분야에서 이룬 성취와 더불어 일상생활을 변화시킨 당시의 강한 경제력에 대해 “근대성의 여명을 예고한 중국의 ‘르네상스’였다고 평한다.
하버드대 피터 볼(Peter K. Bol) 교수가 송대 신유학을 ‘사문(斯文)’으로 축약하였던 것처럼 저자는 변혁의 시대 송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유교라는 원칙이었다고 단언한다. 유교 원칙은 무(武)가 아닌 문(文)의 원리였다. 국가 이념인 유교가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탄생부터 무덤까지 전 생애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변혁- 범중엄의 ‘소규모’ 개혁, 왕안석의 ‘중대’ 개혁 등-을 추진한 것도 유교적인 국정 운영이 허락한 자유로 인해 가능했으며, 유교의 합리적·이성적 사고는 도성의 디자인, 상업과 유행, 기술과 과학, 문화의 영역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정이·정호 형제와 주희 그리고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유학은 사회 모든 계층에게 스며들어 중국 공산혁명 때까지 지속되는 중국 문화의 확고한 기반을 형성하였다고 이 책은 기술한다.
19, 20세기의 개혁가들이 신유학에 대해 중국의 근대 사회적·교육적 개혁의 단행과 기술 발전의 수용을 방해한 융통성 없는 사고 체계라고 혹평한데 대해 저자는, 명·청대에 벌어졌던 활발한 토론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송대 신유학에서 물려받은 그 ‘전통적’ 가치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면서 중국인의 문화 정체성의 감각을 강화시켰고, 이러한 감각은 6세기가 넘는 정치적 역경을 거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비록 종종 공격을 받았지만 ‘전통 중국’의 윤리 체계가 지성과 문화가 파편화되지 않도록, 또 정치적으로 분열되지 않도록 국가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유교의 원칙을 추구했던 송대가 이룩한 성취는 어느 왕조보다 유교에서 상정한 이상적인 통치에 근접했던 황제들, 실용주의적 분위기에서 행정적·경제적 효율성을 이룬 안정된 정부, 절제와 사회적 책임 의식을 지닌 사대부 계층, 경제 분야의 발전과 사회적 역동성 등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저자가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북방 이민족 왕조와 평화적 “공존”을 선택한 외교 정책이다. 무능으로 평가되어온 송의 국제적 위상과 그 원인으로 지목된 문치주의의가,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실용적인 외교 전략이며, 유교는 그것을 떠받친 이념적 토대로서 21세기 초 독일 역사학자인 저자에 의해 다시 평가된 것이다.
“학자라면 송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1194년, 조여우
송대의 ‘문치’라는 새로운 질서는 문인 관료층이 대두하면서 지탱될 수 있었으며, 이들은 전국적으로 치러진 유교 경전 시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고전 교육을 받는 것이 영향력 있는 직위와 특권, 부와 권력 그리고 명성을 얻는 데에도 관권이 되었다. 새로운 관료 자리는 사대부, 부유한 지주와 상인 가문의 자제들로 충당되었다. 두루마리 필사본 대신 급속히 성장한 출판사들이 인쇄 제본한 서책이 보급됨에 따라 평범한 집안의 자제들도 사설 글방이나 나라에서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194년 수석 시험관의 자리에 있던 조여우(趙汝愚)는 “학자라면 송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분위기에서 정치·윤리·실천 이념인 유교가 상류층의 공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사적인 생활까지도 규제하게 되었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문치에 의거한 관료체제의 필수 요건들은 1000년이 넘도록 중국의 북부나 남부 전체에서 지속되었으며, 중국의 모든 왕조에서 수만 명의 야망 있는 서생들의 염원이 되었다.
사대부들이 주도했던 엘리트주의적인 삶에는 특권과 혜택, 정치적·지성적인 영향력 그리고 당시 평민들은 모르던 가문의 명망과 같은 특별함이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한 그들은 중국 사회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수십 년의 교육 훈련 과정과 그 힘든 시험을 견뎌내고, 고향의 가족과 멀리 떨어져 관리의 책무와 과제를 이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또 때로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희망과 욕구보다 황제와 왕조의 이익을 중시하였다. 개인주의, 자기결정, 자아실현에 가치를 두는 21세기 시민들에게는 송대 사대부들이 강조했던 이타적인 자세와 삶이 이상적 또는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그것이 중국인들이 충성, 규율, 용기를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중국에 살았으며,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누렸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5~12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 분야가 다채롭고 흥미롭다는 것이다. 장별로 종교, 과거와 교육, 혼례와 장례, 시와 그림과 과학, 수도인 개봉과 항주, 산업, 화폐와 조세, 일상생활로 주요 분야를 나누었고, 한 장 안에는 더 많은 세부 주제들이 있다. 저자의 전공인 산업 기술과 장례·무덤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회화, 도성의 구조와 도시 생활, 화장법과 위생 관리까지 소개된다. 송대 물질 문명사를 연구하는 디터 쿤 교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해박하고 충실한 내용을 담아내기 어렵지 않았을까.
농업 기술과 효율적인 토지소유 제도는 송대 3세기 동안에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 제국의 지역별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농업 산출량을 보면, 송대의 산출량이 최고를 기록하는 지역이 많다고 한다. 소출의 10퍼센트 정도를 조세로 납부하는 수백 만의 자영농 납세자를 보유한 농촌의 경제 번영은 세계 어느 지역도 맞먹을 수 없는 수준의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저자는 몽골의 침입으로 송대 인구가 감소하였던 13세기를 보더라도 당시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가 중국에 살았으며, 이 많은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누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중국인들의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양한 형태의 방추차, 생사 감는 기계, 견·마 수력방적기 등이 있었다. 11~13세기 사이에 일어난 송의 ‘산업혁명’은 유행을 선도하는 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이를 원동력으로 하여 새로운 시장들과 상업 조합이 생겨났다. 송대의 중국은, 수익성 높고 효율적이며 지속적인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필요 전제조건들-말하자면 상업화와 소비, 재정적 성취, 특히 강력한 신용 시장과 지폐의 도입, 교통수단의 발전, 도자기 생산, 구리와 철 광업, 종이 제조, 인쇄와 출판, 기계와 기술 용어의 표준화 등-에서 중세 유럽보다 훨씬 앞섰다. 물레방아의 동력으로 기계식 절굿공이가 작동하고, 농지에 물을 대며, 곡물을 갈고, 산업용 재료를 분쇄하였다.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를 지나가는 정보 통신망이자 교역로였던 길, 즉 19세기에 실크로드라고 이름 붙여진 그 길을 통해 중국의 기술이 유럽으로 퍼져갔고, 유럽은 수 세기 이후 자신의 상업과 산업 혁명 때에 동양의 고안들을 모방하고 흡수하고 개량했다.
한편, 유교적인 장례 관습인 매장을 지키기 위해 송 정부나 기부자들의 출연으로 조성된 자선 공공 묘지가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매장을 기다리는 수천 구의 시체가 대형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사실, 한족에게서 매장을 배운 거란족이지만 그들의 무덤 건축은 송이 아니라 당의 문화를 따랐다는 사실, 송대 관리들의 휴가와 도시인들의 다양한 단체 활동, 매춘업소와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음식점이나 찻집,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형편없는 목욕 상태와 치아 관리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송대의 깊숙한 일상 구석구석까지 들추어 보여준다. 이처럼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간결하고 정확하게 읽힌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라 해도 친절한 교사가 학생을 대하듯 현재의 감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또 쿤 교수의 문장이 서양 특유의 수사적 표현보다는 담백하고 직설적인 표현 위주여서 더 쉽게 다가온다.
당·송의 시대 단절을 한눈에 보여주는 도성 비교 -당의 장안, 북송의 개봉과 남송의 항주
당 제국와 송 제국의 뚜렷한 단절은 도성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이 책에서는 당의 수도 장안, 북송의 수도 개봉 그리고 남송의 수도 항주를 한눈에 비교하며 송 사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중화제국 전체 역사에서도 영화로웠던 천자의 도성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은 늘 탁월한 중국의 수도로 인정되었다. 인구가 100만이 넘었으며 일본의 나라와 교토의 새로운 도성을 비롯해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도시 발달의 모범이 되었다. 도성의 성벽이 제도용 컴퍼스의 격자 판처럼 정렬되어 있었던 것은 천자의 절대적 통치와 공공질서를 구현함이었다. 황궁을 정점으로 도시 구획은 문벌 귀족과 관료층의 저택, 사찰 등 엄격한 계급 차별에 맞추어 정렬되었다. 특권층의 저택이나 사찰에는 대부분 일가족이 일용할 작물을 재배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넉넉한 땅이 있었다. 방(지금의 동)별로 담장이 높게 둘러싸여 있으며, 시장은 동시와 서시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도성에 산다고 해도 대부분 시골에서의 삶과 비슷했다.
송대 사회의 통화 제정, 그리고 특히 지폐의 사용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이전과 같은 농업 부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도시와 성읍에서 상업의 성장을 확대시켰다. 대운하와 연결된 북송의 수도 개봉은 다기능적인 도심지가 되었는데, 이런 도시는 그 이전 중국사에서 없던 유형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그의 궁궐에서 제국을 통치하였지만, 그의 수도는 더 이상 당대 수도인 장안과 같은 제국이념과 공공질서의 전시물이 아니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방이 아니라, 도로를 향해 개방된 주택과 점포로 가득 찬 크고 작은 거리가 등장했다. 또 통금이 폐지되면서 도시 주민의 생활 방식은 즉각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도성은 꽤나 진보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소비자 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1127년에 개봉이 여진에게 함락된 이후 고종은 1129년에 임안(후에 항주)을 ‘행궁(行宮)지로 결정하였다(개봉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에서). 서호와 접하고 운하를 따라 흐르는 전당강에 위치한 항주, 즉 남송의 수도에서는 상인과 무역업자들의 부와 화려한 생활 방식이 관리들의 그것을 앞질렀다. 중국 역사를 통해 상인은 필수불가결하면서도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송대 사회에서도 이론적으로는 상인의 지위가 이전 왕조 때보다 별로 좋아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보면 개봉과 항주에서 상인들은 도시의 생활과 문화적 삶에서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 가족은 사대부 가족과의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부유한 상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대부들의 부러움을 쌌다. 당시의 작가들은 이 역동적인 도시의 상업적인 활력과 혼잡을 칭송하며 이곳이 온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3세기에 걸친 거란-여진-몽골의 침략과 공존으로 가는 길
문민 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송 왕조는 전례가 없는 이익을 거두기는 했지만, 군사력이 취약해지는 대가도 치러야 했다. 당 제국이 와해될 때 중국의 서북쪽에는 탕구트(서하), 동북쪽에는 거란(요) 왕조에게 속해 있었고, 중부 평원과 중남부 지역은 오대(五代, 907~960)와 십국(十國, 902~979)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이 붕괴하던 격동기에 한족의 영토가 이렇게 갇혀버린 상황은 송 제국에게는 갚을 수 없는 빚을 떠맡은 꼴이었다. 송의 영토는 전성기일 때도 겨우 260만 제곱킬로미터를 웃도는 정도였는데, 이는 당 제국이나 현재 950만 제곱킬로미터를 차지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영토였다.
1126~1127년에 여진족 금 왕조의 침략을 당해 송 조정은 중원의 개봉을 포기하고 멀리 남쪽의 낯선 땅 항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서 1279년까지 다시 152년간 권력을 유지했다. 송은 멸망할 때까지 모두 네 번에 걸쳐, 즉 1005년, 1123년, 1142년, 1208년에 북쪽 정권의 신하 지위를 인정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송은 천하에는 오직 한 명의 천자가 있어야 한다는 일세일주(一世一主)의 원칙을 희생하는 대신, 호전적인 이웃과의 평화적 합의와 현실 정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1250년대 송의 변경에 등장한 몽골은 단순히 또 다른 야만족 약탈대들이 아니었다. 몽골은 송을 정복할 작정이었다. 군대의 역량, 전략적 혁신, 국가의 패권으로 평가한다면 송은 허약한 왕조였고 마침내 짓밟히고 말았다. 천천히 진행된 송 왕조 멸망의 이유를 한 가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나, 군사적 효율성보다 문치를 강조한 것이 국가의 약화와 정부의 사기 저하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송의 필사적인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하버드 중국사(전6권) 시리즈
21세기의 화두인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버드대의 특별기획이다. 『쾌락의 혼돈』, 『베르메르의 모자』,『능지처참』등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티모시 브룩 교수가 책임편집을 맡았다. 이 시리즈는 기원전 3세기, 진 제국의 통일을 시작으로 20세기 초반 청 제국의 종말까지 중화제국의 역사를 추적한다. 쉽고 정확하게 쓴 이 책들은 광범위한 범위의 주제들을 간결한 길이로 다루면서도 최신의 학술적 성과에 기반하고 있다. 중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필수 시리즈이다. 최초의 제국 진부터 열린 세계 제국 당 왕조까지의 세 권 역시 올해 출간될 예정이다.
『하버드 중국사 진·한_ 최초의 중화제국』(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이성원 옮김)
2천년 동안 지속될 진 제국의 특징을 살피고, 관료와 학자들의 핵심적인 도전을 조명한다.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_ 분열기의 중국』(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조성우 옮김)
3세기 이후, 북과 남의 분열에서 가족, 학문, 종교 등까지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외부세계와의 교섭을 추
적한다.
『하버드 중국사 당_ 열린 세계 제국』(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한신 옮김)
한국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상업, 종교, 문화가 연결된 황금시대다. 여성의 역할과 왕유, 이백, 두보 등도 포착한다.
『하버드 중국사 송_ 유교 원칙의 시대』(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당시의 송 왕조는 지구상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제국으로, 특히 신유학은 동아시아 사회의 정치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그 거처가 되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_ 곤경에 빠진 제국』(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
1270년 전후 몽골이 지배한 뒤 4세기 동안 관료제와 상업화의 증가 등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탐구한다.
『하버드 중국사 청_ 중국 최후의 제국』(윌리엄 로 지음, 기세찬 옮김)
이 광활한 영토와 온갖 긴장 상태를 수반하면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거대한 인구는 청의 계승자인 중화민국과 현재의 중국에 유산으로 남겨졌다. 청은 중화제국의 2천년 역사를 마감하는 장이 되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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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의 시대‘에 걸맞으면서도 활력적이고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송나라의 면모를 잘 조명한 책입니다. 시리즈의 전권인 당나라에 이어 읽으면 왜 송이 문치의 꽃을 피울 수 밖에 없었는지 납득이 되지요. 다음 권인 명.청 제국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구매
얄리 2022-05-0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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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중화제국의 원형이었던 송나라를 그리다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있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해서 그런 진 몰라도 역사서 특히 이번에 읽은 하버드 중국사 같은 개론서 스타일의 역사책은 술술 읽히는 편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태사공 선생의 <사기>를 비롯해서 중국사에 관심을 많아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다 보니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시너지 효과가 생긴 모양이다. 서구 학자로 중국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도 컬렉션하고 있는 중인데, 최근 서구 역사가들이 통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미시사적 차원에서 역사연구를 인도해 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독일 출신의 역사학자 디터 쿤 교수는 정통사 차원의 정치사와 사회경제사를 적절하게 잘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왕조마다 다른 연구자들이 저술해서 기존에 나온 청나라시대와 원명제국에 대한 기술은 또 어떨지 기대가 된다. 사실 작년에 하버드 중국사 청제국편을 사긴 했지만 지금까지 묵혀 두고 있었는데 왠지 왕조사를 역순으로 가기 보다는 차례대로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서론이 길었다. 저자는 <송 유교 원칙의 시대>에서 천 년 전(자그마치 밀레니엄이로구나) 당말의 혼란기를 거쳐 오대십국 시절의 분열을 통일한 송제국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오대시절 중원의 마지막 패자였던 후주의 장군이었던 조광윤은 동료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중원을 차지한 왕국이 통일에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비록 무인 출신이긴 했지만, 제국의 영속적인 통치를 위해 당말 절도사들의 발호와 전횡을 똑똑히 목격했던 송 태조 조광윤은 사대부 엘리트에 의한 문치주의를 국시로 삼게 된다. 이를 위해 비교적 공정한 관료 선발을 위한 시스템이었던 과거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나라 시대처럼 국가의 최고통치자는 황제였지만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출중한 역량을 갖춘 사대부야말로 최고의 국정 파트너가 아닐 수 없었다. 지배층이었던 사대부 역시 그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정이 정호 형제와 주희로 대변되는 유교 철학자들은 한나라 시대 이래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유효했던 유학을 개조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유학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신유학의 합리주의 정신과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사대부 엘리트들이 국정의 전반에 진출하게 되면서 당대까지 지속된 문벌귀족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됐다. 당나라가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뤘다면 상대적으로 송나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화제국의 원형을 형성했다.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오랑캐인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서방의 당항족의 서하 등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송나라는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적국에게 세폐를 제공하며 평화와 균형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북방민족에 비해 전쟁 수행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화제국 송나라가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신유학자들이라면 치를 떨 화이론을 압도했을 것이다. 사실 전쟁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겠다는 일부의 주장은 이상론이었을 뿐이다. 북송 중기 신종 시대의 왕안석이 모두가 아는 신법으로 국가중흥을 시도했지만, 보수반동파의 역공으로 그가 추진하던 개혁들이 모두 엎어지면서 결국 북쪽 여진족의 남하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양자강 남쪽의 항주(임안)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디터 쿤 교수는 상대적으로 정치사보다 나머지 사회경제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송제국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송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신유학이었지만, 사회의 많은 부분에 불교와 도교가 침투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처럼 송대 신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를 탄압하려고 했던 것 같지 않다. 상대성을 인정하고 북방민족들과의 그것처럼 공존을 선택했다고나 할까.
저자는 종래의 정사(正史) 뿐만 아니라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풍속도, 회화 등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송대 역사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시도한다. 중원 중심에 자리 잡은 송나라 수도 개봉은 당나라 시대의 장안과는 달리 천자의 권위나 세계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용보다는 철저하게 계획된 수도로서 제국 신민의 경제적 효용 가치를 따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국 수도 입안자들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겠지만, 사방이 트인 평원에 위치했다는 방위상의 약점보다는 변하를 이용한 물산의 집결과 교역에 더할 나위 없이 유리했다는 장점을 중시했던 걸까. 방적기와 농업기술의 발달, 자작농의 활성화 등의 조건으로 제국의 재정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비록 막대한 세폐를 오랑캐 제국에 바치기는 했지만 그렇게 돈으로 산 태평성세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송나라 재정은 튼튼했다는 것이 저자 관찰의 핵심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11세기 송나라의 수도 개봉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는 경제활동 중심지로서의 경제수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개봉의 시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화들이 거래되었고, 이러한 상업의 발전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한 송대 관료들은 상품의 지불과 용역의 교환에 더 용이한 지폐나 태환이 가능한 어음 발행에 열성적이었다. 아울러 지폐와 화폐 주조에 따른 인플레이션 관리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국가에 충성한다는 신유학에 충실한 신유학 관료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금은 제기보다는 검소하면서도 실용적이고 뛰어난 미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던 자기들을 송대 사대부들은 선호했다. 늘어난 경제력은 소비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했고, 다양한 상인 조합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정치, 사 회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사대부들은 당대의 환영을 쫓던 화려함에서 벗어나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사대부들의 긍정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사회 전반에 대유행하게 된 금련이라 불리는 전족 풍습은 당대에 말을 타고 격구를 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에 예속시키기에 이르렀다.
디터 쿤 교수는 중화제국이었던 송나라 뿐 아니라 주변국가였던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몽골의 풍습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서술을 이어간다. 다만 아무래도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중심 주제인 송나라에 비해 빈약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거시사적 차원에서의 세법 문제라던가 신유학이 도입된 이래 사회전반에 걸친 인식의 변화 같은 이슈도 그렇지만, 몇몇 그림을 통해 드러난 보통 사람들의 미시적 삶을 다룬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강행초설도>에 나온 어부들의 고투에 대한 스케치를 비롯해서, 개봉 황궁에 설치된 천문 시계 장치 <수운의상대>의 기구한 운명, 개봉의 다양한 주루와 물레방아 그리고 변하의 수로를 오가는 대형 바지선들에 대한 분석은 역시 미시적 차원의 접근을 어떻게 디터 쿤 교수가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 아닐까 생각된다.
21세기에 천년도 더 지난 중국 역사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이웃 중국은 이제 대국굴기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현재 중국은 아편전쟁 이래, 서양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던 굴욕의 시기를 벗어나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중화)이 되어 일로일대(신 실크로드 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어쩌면 가깝지만 먼 이웃인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중국 원형의 모델이었던 송나라 역사를 읽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사회질서의 원천인 유교 원칙을 형성한 시대의 역사를 접해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6권으로 구성된 하버드 중국사의 첫 도전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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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04-1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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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 사회 송나라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책.
대학에서 출판된 책이라 믿음이 갔는데 표지도 예뻐 더욱 기대됐다.
500 페이지 정도라 분량이 많고 어려우면 어쩌나 약간 걱정되기도 했는데, 의외로 너무 쉽고 평이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 약간 실망스러울 정도.
한 시간에 100 페이지 남짓 읽어 상당히 빨리 본 편이다.
시리즈를 전부 통독해 보려고 한다.
송나라라고 하면 화약, 인쇄술, 나침반 같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있었을지라도 국방이 약해 북방 유목민에게 유린됐던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저자는 송의 외교 정책을 평화공존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다.
중국 통일 왕조 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되지만,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유목왕조와 조약을 맺어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갔다는 평가가 현대적 시각 같기도 하고 새로웠다.
송나라는 문벌귀족이 다스렸던 기존 당나라와는 달리, 과거를 통해 합격한 관리, 즉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새로운 국가였다.
귀족이라는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험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했다는 점은 상당히 진보적이긴 하다.
저자는 신유학 역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었다고 본다.
조선 중기 이후의 송시열 등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주자학만 떠올리는 나로서는 꽤 신선한 관점이었다.
격물치지, 즉 사물의 원리를 연구함으로써 이치를 깨닫는 방법론 덕분에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림에서도 영묘화 같은 세밀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주희의 이론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비판에 직면해 살아 생전에는 큰 영화를 보지 못하고 훗날 금이나 몽골에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이 제자들에 의해 빛을 발해 이후 주자학으로 자리잡았다고 하니, 주희 역시 당대에는 일종의 선구자로써 고난을 겪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주자가례는 기존의 관혼상제 의례보다 훨씬 간단해서 널리 퍼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전족이 유행이긴 했으나, 송나라 때만 해도 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되어 여성의 수절을 강조하는 당시 신유학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여성의 법적 권한도 꽤 높았다고 한다.
오히려 원나라가 들어선 후 여성의 재산권이 가장에게 예속되어 비로소 유학자들이 원하던 종속적 지위로 떨어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백자를 좋아했던 것처럼 송나라 때도 기존의 귀족적인 당 문화와는 달리, 금은 세공기 대신 점잖고 담백한 도자기를 선호했다.
장례 풍습 역시 기존의 후장과 달리,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고 묘실도 만들지 않는 등 매우 간소하게 치뤘다.
오히려 요왕조에서 화장을 하던 풍습이 바뀌어 귀족들은 묘실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런 걸 보면 문화는 확실히 시대 정신을 쫓는 모양이다.
인쇄술이 발달한 덕분에 경전이 널리 퍼질 수 있었고 비로소 과거제가 가능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만 종교개혁 등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어 낸 줄 알았는데 송대의 인쇄술도 마찬가지였다.
인쇄술의 발전 덕분에 지폐도 정교하게 디자인해 위조 지폐를 막으면서 널리 퍼졌다.
반면 나침반은 서양으로 건너간 후에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는 점은 좀 다르긴 하다.
기존 왕조가 황궁을 중심으로 한 행정 도시였던 반면, 송대의 개봉과 항주는 모두 상업적 성격이 짙은 경제도시였던 점도 독특하다.
이러한 상업의 발전 덕분에 북방 유목왕조와의 평화공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marine 2015-06-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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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주의의 꽃
송나라는 10세기 전후까지의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문화적 꽃을 피운 시기이다. 그리고 가장 상업이 발달한 시기였으며 가장 개혁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진관료의 출현에 따른 개혁적이고 참신하고 능력있는 관리들이 합리적이고도 깊이있는 정책을 통해 송나라를 이끌었던 시기이고 황제는 그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인재등용책을 통해 그 지배를 공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고 또 가장 학문적 사상적 기술적 상업적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송나라의 번영의 원인을 우선은 문치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송태조는 자신의 개국을 도왔던 무인세력들에게 신뢰를 주면서 무장해제를 시킨 후 정신적이고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문인들을 등용했고 그들의 정신적 수준으로 송나라를 통치하게 되고 이는 불문율이 되어 후대의 황제들에게 되물림되는 문화적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황제이든 간에 당대의 가장 훌륭한 문인들을 등용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그것이 송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안다.
그 밖에도 송나라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달하여 상품화폐관계가 정착화되었다. 개봉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상업과 화폐제도는 송나라를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는 곳이며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문화적 번성을 구가했던 사회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북방 민족들이 아무리 괴롭히고 지배하고 억압해도 송나라가 가진 우월적이고 매력적인 문화에서만은 동화되고 만 점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송나라는 북방의 민족에 대해 무력과 전쟁으로 상대하지 않고 비록 굴욕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참하리만큼 몸을 낮추어서 실리를 얻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들에게 조공으로 바치는 물량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송의 경제적 능력으로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되었다는 점과 문치주의에 근거한 성숙한 시대판단과 형세판단으로 더욱 오래 평화적으로 왕조가 존속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은 역사에서도 많은 교훈을 남겨 준다. 그래서 송대에는 그 평화와 번영의 바탕 위에 시와 사, 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시기가 되었다. 한유, 구양수, 소식, 육유, 정이 정호 형제 등의 사상가와 문학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는가 하면 왕안석, 주자 등의 개혁적이고도 학문적인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서 송대는 그 후 천년의 역사를 써내려갈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다간 많은 사람들, 때로는 역사적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다운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을 지도 모를 그 많은 지배와 전쟁의 역사 속에 세상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나라였던 송나라의 평화롭고도 행복했던 한 시대의 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매력적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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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15-05-0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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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질문:
"그는 주국 서북부를 다시 정복한다는 희망을 버렸으며 다만 난주... 한 곳만이 송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지도4)." p. 121 > 그런데 지도4에 난주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 와이?
송대에는 (정신적 명상의 반대로서) 문학적인[문학적?? 어떤 의미로 쓰인 것?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 명상이 자연스러움을 얻고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기술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정토종 추종자들은 ‘아미타바 부타(아미타불)’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염불 행위가 개인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믿었다. 송대에는 정토 사회가 도처에 생겼고, 특정한 행사 때면 수천 명의 신자가 모여 1000번씩 부처의 이름을 불렀다. 당시 인기를 얻었던 두 종파의 승려들이 서로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가운데, 연수…는 처음으로 선과 정토 불교를 모두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212)
송대 불교의 교리는 현상적인 세계는 실제가 아니고 다만 환상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유학자들은 모든 현상이 환상임을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고, 세계의 공허함이라는 불교의 교리를 원리(이)와 물질적 힘(기)의 개념으로 대체했다. 11세기에 장재는 기가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고 스스로 물질로 굳어졌으며, 모든 물질은 기로부터 일어나서 또 기로 흩어지며, 그리고 또다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세계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로 끝나지 않는다. 장재는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 관계에도 생명력이 되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의 이론을 아주 요령 있게 설명하였으며, 지치거나 병든 자, 장애인과 불구자, 과부와 고아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이 형제라고 결론 내렸다. 유교의 인… 개념을 지각을 가진 존재 모두를 포함하는 범위까지 확대함으로써, 유학자 각자에게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는 가족을 떠남으로써 일상의 임무에서 도피할 것을 옹호하는 불교와는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거이었다. 장재는 한편으로 불교를 공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박애주의적 공익 개념뿐 아니라 그 학식[학식?? 장재의 학식? 아니면 불교의 학식? 당시, 불교에 대한 유교의 포지셔닝을 아주 요령 있기 설명한 단락인데 요 단어만 뜻이 불분명하네.]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216)
해시와 진사과 시험 외에 각종 과거 시험인 ‘제과…’는 행정직에 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길이었다. 왕안석은 1072년에 제과를 폐지했는데, 아마도 오직 하나의 문학 부문[제과는 우리 식으로 하면 잡과일 터인데 “하나의 문학 부문”이란 전혀 안 맞는 번역. Literature라는 단어가 쓰였다면 문헌이라는 의미이겠지, 왠 문학??]을 외는 공부만 가지고서 관리가 되는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50)
군대의 역량, 전략적 혁신, 국가의 패권으로 평가한다면 송은 허약한 왕조였고 마침내 짓밟히고 말았다. 천천히 진행된 송 왕조 멸망의 이유를 한 가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나, 군사적 효율성보다 문치를 강조한 것이 국가의 약화와 정부의 사기 저하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송의 필사적인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그러나 전성기의 송은 중국 역사,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세련되며 지성적인 사회로 꼽을 수 있다. 송이 통치한 3세기 동안 유교 이념이 공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 고대 사상의 도덕관과 교육관이 정부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송 제국의 창의적인 통치자, 학자인 관리들, 예술가들이 회복시키고 재가동한 유교 가치와 사고방식이 뒤이어 건립된 모든 왕조들의 교육 제도, 정부 체계, 민간 사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한족의 후예들 사이에 수백 년간 지속될 중국인 특유의 의식을 강화하였다. (28)
북부 구역은 거란 고유의 제도인 ‘국제…’로 다스렸는데, 이 구역에 상경과 중경이 있었으며 거란족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부 구역은 ‘한제…’로 다스렸다. 남경, 동경, 서경이 있고 한족과 발해 및 다른 정주 민족의 본거지였던 이 지역은 계획적으로 당…의 조정을 모방한 체제로 운영되었다. 북부 행정부는 거란족만 관리로 채용하고 남부에 비해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남부 지역은 황족인 야율 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야율 씨족 남자들은 모두 소…씨 종족으로부터 아내를 들였으므로 소씨 씨족은 이 점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이러한 지배 체제는 다민족 사회의 독특한 특성과 요구에 잘 들어맞았다. (57)
요 황제들은 금고에 넉넉히 보유한 은괴를 이용해 신하들의 충성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있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세폐라는 명목으로, 그러나 사실상 조공으로 받은 비단 제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물건이었으므로, 요는 충분한 이익을 남겨가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성종은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 988년에는 한족 신민들만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진사 시험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요의 영토 내에 있는 한족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였다. 얼마 안 되여 해마다 20~40명의 진사들이 배출되었다. … 994년에는 중국 방식을 본뜬 요의 역법…이 소개[‘창안’이나 ‘도입’이겠지]되었다. (59)
10세기 서하와 요의 관계는 송과 북방 국가들과의 관계만큼 갈등이 컸다. 송 진종의 조정은 군사력으로 요와 서하를 무찔러서 당 제국에 속했던 북쪽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송은 호전적인 북쪽 국가들과 감당할 만한 평화 조건을 협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005년 요와의 쌍무적인 평화협정과 1042년의 재협상, 그리고 1044년 서하와의 협정 등을 이루었다. 1980년대 초 서하 전쟁을 제외하면, 성의 북방 정원들에 대한 외교 정책을 특징 짓는 현대의 단어는 "공존"이었다. 송은 비단과 은으로 해마다 교부금(세폐)를 지불함으로써, 무익한 전쟁 출동에 낭비될 거액의 돈을 절약하였다. 요와 서하는 그 수입을 가지고 자기 종족들과 동맹자들을 부양하여 충성을 확보하며 정치적 권력을 유지했다. 세폐를 통해 확보된 공존은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송이 북방 변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이었다. (63)
서적 편찬 작업이 황제와 학자 관리들 사이의 업무상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중국의 문화와 지성의 역사에 대한 상호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종의 서적 편찬 사업에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는 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심쩍은 상황에서 형을 이어 즉위한 태종은 태조 밑에서 복무했던 학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자기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잠재울 수 있었다. 더욱이 태종이 다시 송이 정복하거나 평정한 나라의 학자들을 편찬 사업에 채용한 사실도 분명, 자국 왕들의 죽음으로 인한 하자들의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800년 뒤에 건륭제는, 송 태종의 편찬 활동이 가진 주요 목적은 태종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제위를 "찬탈"한 황제로서 덕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고 논평했다. (86)
불교의 대중적인 출판에 비교하면 200년 이상 뒤떨어지긴 했지만, 이 책들의 출판을 시작으로 10세기 중기가 되면 유학자 사회에서 인쇄물이 소통의 매체로 인식되었다. (87) ……
송 사회의 경제적 풍요와 일상적인 인쇄본의 통용이 없었다면, 특히 문관으로 출세하고자 열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절한 가격으로 인쇄본 책을 이용할 수 있는 변화가 없었다면, 중국 전역에서 유학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부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90) ……
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20~30년 전 개인용 컴퓨터가 타자기를 대신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났던 문서 쓰기와 작문 분야의 혁명에 비교할 만하다. (91)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화 조약은 송 황제가 요의 황제를, 또 요 황제는 송 황제에 대해서 자신의 상대로 인정함으로써 거의 대등한 관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 중국은 자신의 우위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형제애’라는 허구에 합의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오래된 중국의 가족관계를 모방하여, 요 지배자가 ‘동생’이 되어 송 지배자를 ‘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같은 조약이 가져올 형제 국가의 실제 결과에 대해 송 시대의 사람들은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송 왕조는 한 번도 ‘당 왕조의 충만한 영광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사실은 1042년에 이른바 외교적 대등 관계와 형제 관계를 강화한다면서 1005년 조약의 내용을 재협상하게 되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송의 세폐 의무가 비단 30만 필과 은 20만 냥으로 증가했다. (96)
진종의 몰락은 1006년 구준의 유배에서 시작되었다. 구준이 고하는 성인의 충고가 없어지자, 진종은 자신의 정치적 허약함에 굴복하여 점차 소인배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들은 1022년 3월 23일 진종이 사망할 때까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다. (98)
범중엄을 최고 지위에 임명했다는 것은, 공익을 위해서 모든 정치력을 단합시키고자 했던 인종의 기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보다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여이간은 범중엄의 임명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인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범중엄의 개인적 결점이 워낙 잘 알려져 있었고 반대파에게 쉽게 이용될 수 있었다. 그는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동료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대상이 황제일지라도 그의 비판을 피해 가지 못했다. (108)
……
이 원대한 개혁을 실행하는 데만 열중했던 범중엄과 개혁파 동료들은 그들의 정적들이 벌이는 술책을 간파하는 수완이나 외교적 경험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애초에 그들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연호를 딴 이른바 ‘경력신정…’이 실패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종이 우유부단하여 범중엄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고 마지못한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조정의 논쟁이 개인적인 정치 공격의 수위까지 가게 되자, 개혁을 옹호하는 주장은 사라졌다. 적어도 인종의 재위 기간에는 그랬다. (109)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그에 따른 과중한 조세 부담만 가지고는 이주 현상에 대해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화북 지역의 평원과 하천 유역을 따라 형성된 중국의 가장 비옥한 땅은 수백 년 동안 거기에 자리 잡고 있던 대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강수량이 곡물생산에 안정적이며 또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미경지…를 찾아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10세기 말부터 12세기 말까지 지속된 이른바 제3소빙하기의 기후 변화기 동안 평균 온도가 섭씨 1.5도나 떨어졌다…. 그 정도면 약간의 하강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작황의 상황에 생계 문제가 달려 있는 농민들은 그 변화를 알아챘다. 강설, 결빙, 강수와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점점 더 심해지고 불규칙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44)
화북 지역은 토지 소유권이 고착되어 있고 북쪽 이민족 정권의 군사적 침략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 게다가 이제 제멋대로인 자연의 위력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11세기 송의 농민들은 조상들이 수백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환경이 전혀 다른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위험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것에서 정착하면 새롭고 더 큰 경작지를 개척하여 1년에 몇 차례 작물을 거둘 수도 있고, 또 농민과 농토에 대한 정부와 지주들의 통제가 북쪽보다 덜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이러한 인구 이동의 결과로, 개봉이 함락되기 25년 전인 1102년에 이미 중국의 1억 100만 명의 인구 중 75퍼센트가 회수와 한수 이남에 살고 있었다. 회수 대신 양자강을 경계선으로 보면 전체 중국인의 70퍼센트가 당시 남부에 살았던 셈이다. (148)
몽골족은 오늘날 몽골의 동북부 바이칼 호에서 남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케룰렌 강과 오논 강 부근의 초원에 살던 부족민이다. 그들은 양, 소, 말 등의 목축 생활로 몇 백 년 동안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12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제3소빙하기로 인해 연평균 기온이 떨어지고 기후 조건이 악화되어 몽골 부족은 그들 자신들의 영역 밖에 있는 더 좋은 초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이웃 부족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몽골족이 처음으로 중국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139년에 금을 물리쳤을 때였다. 1147년 화의에서 금은 몽골에게 매년 소와 양, 쌀과 콩 그리고 풀솜…과 비단을 진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금이 세폐를 주는 입장이라는 것만 빼면, 그보다 5년 먼저 금이 송과 맺은 합의와 거의 같은 방식이었다. (171)
몽골이 금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킨 1234년에는 동전 대비 지폐의 가치가 급락하여 지폐로 급료를 받는 주민과 병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 정청지의 제안은 대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관리들은 그 대신 상인들에 대한 조세를 추천했다. 지폐 가치를 보전하기 위한 제안들이 결국 모두 실패하자 1246년까지 천문학적인 수치로 통화 팽창이 가속화되는 사태를 막지 못했다. 농사의 풍작 덕분에 국가의 조세 수입은 계속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송 경제에 끼친 그러한 인플레이션의 악영향은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주 계급의 부를 늘리는 데 유리했던 당시의 화폐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어느 누구도 감행하지 못했다. (181)
송이 다시 한 번 오랑캐의 위협에 당면했던 바로 그때에 ‘위학’이 국가의 정통 학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234년에 금을 무너뜨린 몽골 제국이 유교적인 국가임을 과시하는 요소들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자임하기 위해서 송은 강력한 중국적인 이념이 필요했고, 주희가 당시 시대적 변화에 맞게 갱신한 유학은 이러한 요구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206)
요 왕조의 지배자들은 남쪽에 이웃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문화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거란족은 일찍부터 국가 지배를 위한 이념적 기초로서 유교를 받아들였으며, 유교의 번잡한 의식 절차들도 함께 수용했다. 그러나 사적인 삶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거란 부족의 샤머니즘적이 의식은 여전히 번창했다. 거란족은 태양을 숭배하고 부족 조상들의 혼령과 여자 조상들에게도 말, 소, 양, 거위 등의 제물을 풍성하게 바쳐 공경을 나타냈으며, 의례적인 사냥 등 여러 가지 집단 행사들을 가졌다. 황제가 상징적으로 재탄생한다는 때이 치르는 재생의…는 12년마다 황제 자신이 재생실…이라는 곳에서 거행하였다. 그로써 황제의 통치 권한을 확고히 하고 새로운 12년을 위한 거란 귀족들의 자신감을 갱신해주었다. (222)
10세기와 11세기의 정치와 사회 변화는 유교와 불교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조류의 사상가들은 좋은 유학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선 고대의 진정한 학문을 전파하는 것이며, 동시에 개인에게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도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송 황제들이 호의적이라는 점에서 유교는 분명히 경쟁에서 유리하긴 했지만, 불교든 유교든 시대의 도전에 적합한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그들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227)
송대 중국의 승려들이 불교의 중도파 쪽으로 이동하면서 유교적인 사대부 계층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이 커졌다. 불교의 사안들과 맞닥뜨릴 때, 유교 사대부층은 그들과 토론하며 유교의 윤리 체계를 분명하게 규정해서 유교와 불교의 차이를 외부 세계에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지성적 담론은 철학적 설명에서부터 인류애의 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적 분야를 망라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형식들은 불교의 사고와 경험을 조직화하고 또 논변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불교 사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송대에 불교는 신유학에게 성숙한 지성계의 이웃이자 경쟁자가 되었다. (228)
서방 세계에서 이해되는 ‘공무원’이나 ‘행정 사무관’ 같은 단어를 가지고는 송대 사대부들이 누린 지위도, 그들의 지성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 등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송의 군주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얽힌 관계는, 예를 들어 1040년대 장방평…이 인종에게 한 대담한 발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나라를 폐하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관리들과 협조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 송을 창건한 황제 면전에서는 내뱉지 못했을 이 발언은 황제 권위에 대한 달라진 해석을 반영한 것이며, 공자와 다르지 않은 놀랄 만한 독립적인 정신과 자부심이 송대 관리들에게 있었음을 보여 준다. (235)
이렇게 둘로 갈린 등급제는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소모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무런 실무를 하지 않는 관직 소지자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낮은 명예를 가진 관리들이 각계각층에서 정부의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음보제를 통해 관계에 들어간 관리들은, 최하등급에 가까운 차견과 업무가 주어지더라도 그것보다 한두 계급 높은 기록관의 등급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이 신참은 보통 과거 급제자보다 나은 봉록, 혜택, 특권과 더불어 몇 년의 경력이 앞서가는 이득을 얻었다. 남송대에 오래된 권세가들은 이러한 전략을 통해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을 회복했다. (258)
부유한 집안의 딸들은 문학적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여성의 올바른 행실에 관한 저술들을 통한 교육이 많았다. ...... 그러나 만약에 딸 가진 부모들이 유교적인 원칙의 엄격한 제약을 절대적으로 따랐다면, 송대의 가장 유명한 여류 시인이자 서적 수집가, 또 골동품 애호가였던 이청조…가 순수하고 고상하며 그렇게 감정적 격정이 가득한 시들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277)
몽골이 침입하여 남송을 멸망시키고 몽골의 혼인법을 중국 여성에게 강요함에 따라 젠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유목적인 관습을 보전하고자 했던 몽골은 1260년을 시작으로 여성의 법적 재정적 개인적 자율권을 박탈했고 따라서 여성이 가족의 처분 아래 속박되게 만들었다. 몽골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부계 가족의 강화를 주장하는 정통 신유학 이념과 맞아떨어지며 이용될 수 있었다. "모든 권위와 경제권은 가장에게 있다"는 송대 가부장권 주장자들이 바라던 생각은 그들의 왕조가 무너진 후에야 현실이 되었다. 과부에게 수절과 시가에 대한 봉사, 자신의 개인 재산 관리를 포기하라고 했던 고대의 훈계가 몽골 통치 아래에서 처음으로 법으로도 지지를 받았다. 수절 숭배가 번성하기 시작하고 재혼에 대한 비난이 심해졌으며 여성의 재산권과 재정적 독립성이 증발해버렸다. (281)
매요신은 이 넷 중에서 가장 윗세대 인물인데, 그는 죽기 겨우 9년 전에서야 마침내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동시대 시인들과는 달리 그는 단순하고, 하찮고, 평상적이며, 추하기까지 한 일상의 사물과 사건들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그는 진흙 구덩이 안에 우글거리는 지렁이나 구더기, 이 등 운문에는 거의 출연 못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미물들에 대해서도 시를 썼다. 심지어 차분하고 단조로운 문체인 그의 초기작은 회화법에서 새롭게 나타난 사실주의와 꼭 맞았다. 나이가 들수록 가의 시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사회나 사회 지배자들을 비판하는 시가 많았다. (311)
당대 이전의 회화에서는 관심의 초점이 인물화에 있었고 자연과 풍경 묘사는 그에 비해 부차적이었다. 당대의 풍경화는 교훈적인 기능을 가졌으며 유식한 관람자라면 그림 안에 있는 풍광과 인물의 묘사를 ‘역사적’ 기록으로 읽을 수 있었다. 산수화가 서사적이어야 한다는 그 일차적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9세기 말과 10세기에 중국의 문화적 중심이 북에서 남부와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인간상, 역사적 사건, 종교 의식은 재해석의 대상이 되고 그런 과정에서 회화에서 갖는 중요성이 풍경에 비해 쇠퇴하였다. 산수화는 자연 자체를 모두 아우르는 ‘유기적 통일체’로서 묘사되었다. (324)
……
산과 안개 속의 계곡, 폭포, 하나씩 따로 자리 잡은 나무와 건축물들은 자연에 내재한 정연한 원리에 대한 화가의 신념을 나타내려고 의도된 것인데, 이는 유교적 우주론과 천일합일 이론에 부합되었다. 즉 "사람의 마음을 확장하면 전 세계의 사물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326)
많은 송대 화가들이 과감하게 축소된 화면에다 산수화의 진수를 표착하고자 노력하던 바로 그때, 실제 생활에 대한 묘사가 회화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감수성의 표현은 회화의 주제와 화법 양면에서 나타났으며, 유교를 일상생활과 관련된 생동력을 가진 것으로 되돌린 주희의 <근사록>과 동시대에 발생했다. 주희의 <근사록>은 상세한 일상 경험의 구조와 분석에서 본질론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음을 예증한 것으로, 회화의 변각구도에 비교될 수 있다. (327)
남당의 궁정화가인 조간…의 것으로 전해지는 황권 그림은 ‘강해초설…’이란 제목이 그림 앞에 있으며, 여기에는 중국 그림 수집가로 유명했던 금 장종의 글씨가 있다…. 주제, 솜씨, 사실적인 세밀함이 뛰어나 송대부터 청대까지의 황궁 수장품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독특한 작품은 물길 여행의 어려움과 특히 열악한 조건에서 삶을 꾸려가는 어부들의 고투를 그려낸다. 여기저기 눈에 덮인 겨울의 강 풍경 안에서 이들은 바람 몰아치는 물살을 가르며 납작한 배를 부리고, 복잡한 기술을 써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열려진 그물 안의 내용물을 살피기도 하며, 또 나무 기둥 위에 골풀로 짜서 만든 원통형 움막 안에서 매서운 바람을 피하고 있다. (332)
개봉은 이전에는 한 번도 수도로 채택된 적 없는 곳에 건립된 새로운 종류의 수도이며 전례 없는 도시 배치와 생활 방식을 보여주었다. 중국 심장부에 육로와 강과 운하가 사통팔달로 연결되는 위치의 개봉은, 비옥한 남부와 동남부 지방에서 나는 모든 종류의 먹거리와 기타 생필품들이 쉽게 도시 주민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도로서의 개봉은 송 태조와 그의 관리들이 잘 알고 있던 바와 같이 몇 가지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황하 범람의 위험이 있는 데다가 북방 이적의 군사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어려운, 말 그대로 이전 중국 역사에서 결코 수도로 선정된 적이 없는 개방된 화북 평원이라는 점이었다. (362)
항주에는 상업 조합이 활성화되었다. … 조합의 우두머리는 가격 협상을 통해 집단의 직업적 재정적 이익을 확보하고 국가와 조합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 심지어 점쟁이, 일반 노동자, 넝마주이도 조합에 들어 있었다. 건어물 가게, 선어 가게, 게 장수, 돼지 상인, 닭과 거위 매매인, 채소 소매상, 호두 거래상, 주류 상인들의 조합도 있었다. 빗, 보석, 고급 의류와 모자 등과 같이 유행에 앞서는 사치스러운 물품들을 제작해 파는 상인들을 위한 조합들도 많이 있었다. 칠보, 즉 금, 은, 에메랄드, 수정, 루비, 호박…, 마노의 상인들은 이른바 ‘골동행…’에 함께 가입했다. 진주를 꿰는 보석상은 자신들을 분리기[??] 조합이라는 뜻으로 산아행…이라 불렀고, 제화공들은 스스로 겹줄 조합 즉 쌍선행…이라고 불렀다. (387)
은은 깊은 지하에서 발견되는 은황화물 광석에서 은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내는 기술이 있어야 귀금속이 될 수 있다. 그 생산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은이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소 상품이 되었다. 9세기 중반 연간 은 생산이 14톤 정도에 이르면서 중국사상 처음으로 은이 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중요해졌다. 송대 연간 은 생산량은 15~60톤 정도였다. 이 시기에도 은의 일부가 분명히 수입되었을 것이고, 몇 세기 뒤에는 은 수입이 큰 사업이 되었다. (426)
송대에 지폐가 사용된 것은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첫째, 국민경제의 번영으로 인하여 온갖 제품 생산에서 구리나 철의 수요가 높아졌으며, 지폐의 등장은 이러한 금속을 제조업에 사용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둘째, 지폐를 다량으로 또 … 높은 품질로 인쇄할 수 있을 만큼 인쇄 기술이 발전했다…. 셋째, 송대 학자들은 화폐제도에 주목하며, 화폐가 금이나 은의 가치처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불과 교환의 수단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434)
금의 조세제도는 송 모델을 따랐고 1180년에 상업세를 추가하였다. 금 왕조의 송 화폐제도 모방은 덜 성공적이었다. 상당한 양의 현금을 생산하기 위한 원료뿐 아니라 기술도 부족하여 금 왕조는 북송 주전을 합법적-불법적으로 수입하는 데 크게 의존하였다. 남쪽으로의 이주 기간에 송의 화폐제도가 거의 완전한 붕괴에 시달렸을 때 금 역시 동전 부족 사태를 겪었다. 그러나 송이 연례 보상을 약속한 1142년 조약 이후로 금의 통화 부족 상황은 감소되었다. 금 정부는 1154년에 자체 교환 증권을 도입하고 1157년에는 동전을 주조하고 지폐 교초…도 발행하기 시작했으나, 결코 환율을 안정화시키지는 못했다. (459)
그러나 전족을 시행하고 대중화시킨 여성들의 선택은 송대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가정 내 첩의 존재와 성장하는 유흥 시장이 소녀와 여인들을 상품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당 시대의 남성들은 보통 아내가 자기 아들을 낳지 못할 때에 첩을 들였고, 그의 가족망의 연줄을 통해 첩을 선택하곤 했다. 화폐경제가 사회 모든 부문으로 스며들게 된 송대에 이르자 부유층 남성들은 첩으로 봉사할 여성을 사서 집에 들였다. 매우 경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축첩이 성업하게 되자, 여성의 매력은 아내와 다른 가족원들을 포함하여 모든 송대 사람들의 마음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484)
가볍고 우아한 견직물을 좋아하는 송대 지배층의 기호는, 무거운 금속제 가정용품보다 윤이 나는 도자기를 매우 좋아한 그들의 감각이 직물에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비단보다 얇은 견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조세품의 연간 생산 수치인데, 나의 생산이 금 생산보다 13배 많다. 송 원대의 그림 자료에서 비단이 아니라 얇은 비단을 생산하도록 만들어진 직기를 볼 수 있다…. (488)
"나는 옷자락을 끌며 저명한 인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 우리는 아침이면 노래를 하고 저녁에는 흥겹게 떠들며, 술 마시고 놀면서 세월을 보냈다. 평화로운 시절의 행복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지도 모른 채, 남자의 삶은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493)
근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송대 사람들은 중세의 다른 사회에 비하여 보기 드물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천자에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론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규칙과 제재를 따랐으며 이러한 규율은 유교적인 행동 규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주택 건축과 의상에서의 기호부터 위생, 오락, 자선의 범주까지 사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방임적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골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이 누리던 자기 결정적인 생활 방식의 편안함은 끝나버렸다.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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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2017-02-0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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