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학 낳은 ‘송대 르네상스’
등록 2005-04-17
김수중교수의 철학산책
신유학은 송대에 형성되어 천년 가까이 동아시아에서 지도적인 이념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 오백 년을 이끌어 온 신유학은 아직도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바탕이 되고 있다. 우선 신유학 형성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한다.
송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회는 크게 변화를 겪는다. 당대까지는 지방 호족과 귀족들이 사회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당 말기 오랜 혼란기를 거치면서 귀족들은 몰락을 거듭했고, 송대가 되면서 지식인 관료라 할 수 있는 사대부 계층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한편 수 나라 때부터 이용되던 운하는 송대에 들어와 남과 북을 연결하며 경제를 활성화했다. 운하를 중심으로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성했다. 석탄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제철 등 공업이 발전했으며 이런 배경으로 송대 사회는 장기간의 호경기에 들어서게 된다. 활자 인쇄 덕택에 서적이 보편화하고 이에 따라 지식이 더욱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송 초의 지식인들은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귀족적인 글짓기 등을 경멸하고 현실 사회에 필요한 윤리와 이념을 새로이 추구하였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불교를 배척하고 자기 전통의 유교 경전을 새로이 해석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중국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공부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존경을 받았다.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는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이 개가하여 성이 바뀌었다. 청년 시절 공부할 때 “겨울철에도 피곤하면 찬물로 세수했고, 음식이 부족하여 거친 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나중에 재상이 된 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많은 지식인들을 돕고 격려하며 사회개혁의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지금도 동정호의 악양루에 걸려 있으니, “지식인은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 한 다음에 즐거워 해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것이다.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