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이 위태롭다
구원론 종말의 시대(1)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3.20
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이 위기의 본질이 교회가 맞고 있는 중대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앞서 나는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 질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간단히 훑어보았다.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을 할 것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금이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상황임을 보여 준다.
뒤로멈춤앞으로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또 다른 패러다임 전환 상황이 우리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론이 종말적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대 교회는 전통적인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것은 특별히 개신교회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이는 개신교회가 칭의론에 기초해서 구원론을 구성하고, 그 신학적 기초 위에 교회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2. 칭의론의 위기
칭의론은 개신교 신학의 정수다. 지난 500년 전, 루터(Martin Luther)가 칭의론의 기초를 놓은 후, 그 위에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칭의론은 교회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맞고 있다. 이러한 도전으로 개신교회는 전통적인 칭의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 가지 원인이 이 위기를 불러왔는데, 한 원인은 교회 내부의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했고, 다른 한 원인은 세속적인 방식의 칭의론이 구성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1) 칭의론 논쟁
오늘날 현대 교회(특히 개신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구원론의 중대한 변화는 개신교 칭의론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칭의론 논쟁'이 그것을 반영해 준다. 신학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나름 일가견이 있을 줄로 안다. 최근 영국성공회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를 필두로 새 관점(new perspective) 학파가 신약성서를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성서 독자를 자극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관점이란 바울을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바울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을 강조한 신학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생각보다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본래 성서신학, 그중에서도 신약신학적 주제였다. 그러나 어느덧 그러한 관점은 조직신학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구원론, 그중에서도 칭의론에 중대한 도전을 가하고 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이들에 의하면, 개신교 구원론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 구원만 주장해 왔다. 이들은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바울 신학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이에 발끈하며, 개신교 신학의 기초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을 수호하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John Piper)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와 Piper, <칭의 논쟁> 등을 참고하라).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 나는 여기서 이 논쟁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도전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떠받들어 온 기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이 중대한 위협에 처해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칭의는 두 번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회심의 때'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다. 물론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 둘을 각각 제1칭의, 제2칭의라고 불러 보자. 단순화시켜 설명하면 제 1칭의는 '은총/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에 끝에 있을 제2칭의는 '율법/순종'으로 가능하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7장 참조). 이 때문에 보수적 신학자들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공격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이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만 그는 단서를 붙여서 '언약적 율법주의'로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나아가 제1칭의는 개신교회 칭의론을 다소 포함하는 개념이고, 제2칭의는 가톨릭교회 칭의론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론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칭의론을 에큐메니컬하게 통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9장 참조). 그러나 일부 개신교 신학자는 그의 칭의론이 개신교 칭의론을 뿌리째 뒤흔드는 도발이라고 간주한다.
톰 라이트의 도전은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이 행위를 좀 더 강조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00년 개신교 신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개신교회 칭의론이 값싼 은총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신칭의'를 고수하면서도 행위를 강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 왔다. 루터(Luther)의 변증법, 칼뱅(Calvin)의 실천적 삼단논법, 웨슬리(Wesley)의 완전 성화론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시도는 당대에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일부 개신교회 칭의론을 '값싼 은총'이라고 거세게 공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그러한 식의 대안 말고 아예 율법주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 내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균형 있는 강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칭의론의 시효 만료에 대한 논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의 한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 세속 칭의
구원론의 곤경은 신학적인 요인 외에도 비신학적 요인에 의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칭의론의 기본 얼개는 죄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하나님의 칭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무서운 죄책감이 루터를 짓누르지 않았다면 '탑의 체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교도 설교자들의 복음 설교의 절반 이상은 죄에 대한 무서운 고발과 불지옥에 대한 공포스러운 묘사에 할애되었다. 그런데 죄의식과 칭의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던 개신교 칭의론은 세속적 정신에 의해 점차 낯설고 이상한 것이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지성인은 개신교회 칭의론을 시대착오적이며, 부조리하고, 낯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개신교회가 제공하는 칭의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신교회의 칭의 신학이 없이도 자신들만의 세속적 칭의론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 칭의는 기존의 개신교 칭의론을 곤경에 처하게 하며, 구원론을 종말적 상황으로 내모는 세속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세속 칭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한자어인 칭의(稱義)란 '(누군가에 의해)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영어로 칭의는 justification, 곧 정당화이다. 필자가 '세속 칭의'라고 했을 때, 이는 '세속적 방식의 자기 정당화 논리(secular justification)'를 말한다. 즉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성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 정당화 논리를 가지고서 자신의 양심에 위안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 칭의는 최소한 세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계몽주의적 톨레랑스(관용) 정신이고, 둘째는 정신분석적 원리이며, 셋째는 사회과학적 원리이다.
가. 톨레랑스 정신
계몽주의자들은 톨레랑스 정신을 지닌 자들이다. 톨레랑스는 쉽게 말해서 논쟁은 하되 폭력은 쓰지 말자는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사상(신앙)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외칠 때,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의자유'에 대한 투쟁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의자유를 위해서는 기꺼이 투쟁하고자 했으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이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생각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편협한 자유관을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온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존 로크, 존 밀턴, 존 스튜어트 밀, 볼테르 등은 자신들의 자유는 물론이고 자신과 논쟁하는 논적들의 자유도 지켜져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투쟁했다.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나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싸우겠소)."
이 말은 계몽주의자들의 톨레랑스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설령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할 자유와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이러한 톨레랑스의 정신은 제퍼슨주의(Jeffersonian)로 이어져 자유의 나라 미국을 건설하게 만들었다. 제퍼슨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미국이 계몽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이기를 기대했다.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상 사회는 한마디로 '자유의 왕국'(the kingdom of freedom)이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왕국에 살고자 한다면 그는 톨레랑스(관용의 정신)를 가져야 하며,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매너부터 익혀야 한다. 자유의 왕국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기만의 사적 공간, 곧 프라이버시(privacy)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몽주의적 톨레랑스 정신은 기독교적 죄에 대한 관념과 충돌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이 전도하기 위해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은 "당신은 죄인입니다"였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에서는 이것만큼 무례하며, 불관용적인 말이 또 없다. 자기 혼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향해 "당신은 죄인이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대단히 교양인답지 못한 말을 내뱉는 것이 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복음 전도가 무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꾸로 현대인은 다른 누구로부터도 죄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즉 톨레랑스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은 오직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자기를 정당화(justification; 칭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세속 칭의의 첫 번째 원리이다.
나. 정신분석적 원리
두 번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19세기 말에 개척한 학문인 정신분석이 또 다른 세속 칭의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임상 치료를 진행하면서 성인 환자의 심리적인 문제가 어린 시절 부모나 가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프로이트 이후, 현대인은 성인이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100%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어떤 성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나 가족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분석의 원리가 세속 칭의론을 구성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원리를 추가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예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은 영양분만 공급받는 것이 아니고, 성적 욕구을 충족하는 행위다. 만일 그 아기가 아들일 경우, 아기의 욕망은 근친상간 욕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이디푸스적 살부혼모(殺父婚母) 콤플렉스로 이어진다(Freud,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유아기의 성욕' 참고).
이러한 근친욕뿐만 아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인간 안에 동성애,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의 성향이 '어느 정도는' 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어느 정도 근친상간, 불륜, 동성애, 페티시 같은 변태적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앞의 책, '성적 이상' 참고).
어찌 보면 이러한 그의 분석은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분석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선언이나 "모든 인간은 죄인"(롬 3:23)이라는 바울의 주장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 이론으로는 첫째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욕망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인지 악하다는 것인지 평가하기 어렵다. 마치 길바닥에 돌이 존재하듯이 인간 안에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건 그냥 '본능'이고, 그 기원은 생물학적이다. 본능은 죄가 아니다.
두 번째로, 프로이트는 억압한다고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변형될 뿐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자칫 이렇게 변형된 욕망은 신경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하여 욕망의 억압은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욕망에 대한 억압을 주로 일삼는 도덕과 종교는 신경증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욕망은 억압하기보다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프로이트는 아무하고 끌리는 사람과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식의 범성욕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욕망의 적절한 해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프로이트의 파격적인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정신분석학적 원리 속에서 '욕망을 긍정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욕망은 죄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원리를 다른 욕망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욕망을 뻔뻔스럽게 내세우는 이들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광고 카피나 이미지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풍조라는 것이다. 욕망은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며,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욕망의 긍정이 정신분석학이 현대인에게 선사한 세속적 칭의론의 또 다른 주요 원리라고 생각한다.
다. 사회과학적 원리
에밀 뒤르켐(Emil Durkheim)의 <자살론>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목숨을 끊는 선택은 누가 한 것인가. 당연히 본인이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뒤르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학적 요인을 분석해 냈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여성보다 남성이, 가난한 자보다 부자들이,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Durkheim, <자살론>, 제2부 참조). 뒤르켐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인의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뒤르켐의 통찰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인간은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원자적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범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 높은 범죄율의 원인을 전적으로 흑인들 개인의 도덕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할 뿐더러 현실적이지 않다.
높은 범죄율에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차원이 존재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적 도덕관은 확실히 현대사회에는 설득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간관은 이러한 사회구조적 차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과 함께 사회구조적 차원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뒤르켐의 교훈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과학적 원리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논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가히 살인 기계라고 할 정도로 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서 유린과 학살을 당하게 했는데, 스스로 자기 손으로 500만이 넘는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당시 독일 사회의 구조 속으로 자신의 책임을 던져 버렸다. 자신은 그저 거대한 국가 시스템 일부로서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히만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처벌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책임과 사회구조적 문제와의 관계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 제기를 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얼마만큼 책임적 존재일까?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구조에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현대인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서, 세속적 칭의론의 또 한 원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세속적 칭의론의 원리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욕망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은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뻔뻔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는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다소 낯선 새로운 윤리적 관점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예컨대 인권이라든지, 자유나 평등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도덕적 탁월성에 대한 강조는 확실히 시들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도덕'은 굉장히 낯설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현대사회는 덕이 상실된 사회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MacIntyre, <덕의 상실> 참조). 도덕의 상실은 기독교적 칭의론의 상실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높은 탑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며 씨름하는 인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은 천연기념물보다 더 찾기 어렵다. 온통 뻔뻔스러운 인간들뿐이다. 이들에게 기독교 칭의론은 설득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을 초래하는 또 다른 원인이다.(계속)
신광은
신광은 (기자에게 메일 보내기)
===
천국과 지옥의 실종
구원론 종말의 시대(2)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3.26 01:27
SNS 기사보내기SNS 기사보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지금 상황을 기독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으로 본다는 말은,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개신교 신학의 시효가 만료됐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 이후 진행되어 온 세속화 현상과 맞물려 기독교 신학 및 신앙의 내용이 설득적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뒤로멈춤앞으로
세속화(secularization)란 이 세계 속에 충만해 있다고 믿었던 초월적이고 영적인 차원이 해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는 종종 탈마법화(disenchantment), 혹은 탈신성화(desacralization)와 연관된 개념이다. 세속화 과정은 세계관을 변화시켰고, 이것은 언어와 개념을 변화시켰다. 그러는 사이 기독교 언어와 개념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말하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앞서 나는 세속화 과정이 칭의론의 설득적 구조를 허물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천국'과 '지옥' 개념도 해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독교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천국과 지옥'일 것이다. '상징'이라는 말을 썼다고 발끈할 독자들이 있을 줄로 짐작하는데, 이 말 뜻은 천국과 지옥이 상징적인 장소라는 게 아니다. 이 두 개념이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에 강한 상징력(symbolic power)을 행사해 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세속화가 진행된 결과 오늘날 천국과 지옥의 상징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개념들은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오래전부터 서구 교회는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으며, 천국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많은 설교를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여전히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선포하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이들의 간증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인에게 천국과 지옥은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2. 지옥의 실종
벌써 꽤 지난 일이 되어 버렸는데, 저명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지옥은 영혼의 멸절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내가 속했던 공동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그때 한 형제가 "지옥이 없다면 뭣하러 힘들게 예수 믿나"라고 했던 말이 나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나는 멸절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지옥이 없다고 천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옥이 없다고 예수 믿을 이유가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 형제는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형제에게 구원은 '지옥 면피책'이라는 말이 된다.
복음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는 것은 그 형제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C.S. 루이스 전문가인 웨인 마틴데일(Wayne Martindale)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종종 죽은 뒤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것은 단지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0쪽)
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구원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게 만든 것은 지난 수백, 아니 수천 년간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회가 복음을 전해 왔던 방식이다. 예컨대 18~19세기 대부흥 운동가들의 복음 설교 내용을 보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무시무시한 고발과 함께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청중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등이 전한 복음 설교 역시 비슷했다. 그들의 실감 나는 지옥에 대한 묘사 때문에 청중들 중 더러는 실신하고, 더러는 땅바닥을 뒹굴면서 회심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지옥관은 몇몇 성경 구절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예컨대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사람들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막 9:48-49)이라거나, 유황 불못(계19:20; 20:10)의 이미지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음부의 이미지(눅 16:23-24)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완성된 형태의 지옥관은 성경구절뿐만 아니라 여러 신화와 설화, 상징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Turner, <지옥의 역사> 참조). 사실 단테를 모르는 문화권에서도 유사한 지옥 관념이 있었다. 어쩌면 천국이나 지옥은 집단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는 원형적 이미지일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회화적 묘사가 보여 주듯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는 한결같이 지옥을 굉장히 뜨거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지질학은 땅속 세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장 깊은 내핵 지대는 땅속 5,100km부터 자리하고 있는데 온도가 무려 5,400도나 된다고 한다. 지질학은 내핵에서 외핵과 맨틀과 지각에 이르는 상세한 지질학적 묘사를 제공해 준다. 이를 통해서 인류는 마치 엑스레이 사진과 같이 땅속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세 지식은 도리어 지옥의 실존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날려 버린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발전에 발맞춰 19세기부터 진보적 신학자들은 일찍부터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톰 라이트(N. T. Wright)는 1차 세계대전이 지옥을 추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Wright,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9쪽).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지상이 지옥인데, 무슨 지옥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와 굴락, 원자폭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인종 청소…. 20세기 현대인은 무저갱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고통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 내세의 지옥을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는 실존적 상황에 내몰렸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내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지옥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하며 천국을 소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니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앙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무책임한 방기로 간주되고, 적극적 참여, 곧 앙가주망(engagement)이야말로 책임적 자세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점차 지옥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게 되었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진보적 신학자뿐 아니라 보수적 학자 중에서도 지옥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C.S. 루이스는 상당히 참신한 방식으로 지옥을 해석했다. 그는 사실적 묘사보다는 문학적 묘사를 통해서 지옥을 그려 내고자 했다. 또한 그는 지옥을 영원한 고통의 장소라기보다는 "인간성의 쓰레기통이며, 폐허"로 보았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4쪽) 그렇다고 루이스가 지옥을 알레고리로만 본 것은 아니다. 지옥의 실존을 인정하면서도 현대인의 정서에 맞도록 지옥을 재해석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는 존 스토트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지옥을 '영혼 멸절'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옥은 영벌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불살라 멸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랍 벨(Rob Bell)은 아예 지옥을 없애 버렸다. 지옥이 없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사랑이 이긴다>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Bell, <사랑이 이긴다> 참조). 이 책 덕분에 그는 교회도 사임해야 했다고 전해지는데, 논쟁이 한참일 때 존 파이퍼(John Piper)는 그와 결별했지만, 반대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과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등은 그를 지지했다. 지옥을 부정하는 랍 벨에게는 논적만큼이나 든든한 지지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 지옥이 실종되어 버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지옥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현대의 비기독교인은 랍 벨의 책이 논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생경할 것이다. "아직도 지옥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하지만 만일 지옥이 없다면 기독교 구원론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전통적으로 기독교 구원론이 공포 마케팅에 기초해서 지옥 면피책을 제공해 준다는 약속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만일 지옥이 없다면 전통적 구원론은 어떻게 존속될 수 있을까.
3. 천국의 실종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지옥의 실종과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은 천국의 실종이다. 천국의 실종 역시 세계관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태양과 하늘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천동설을 정교하게 만든 사람은 2세기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지만 그 사람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과 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통 우주관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하늘과 땅을 상호 대응 관계로 본 것이다. 땅은 하늘에 대한 땅이고, 하늘은 땅에 대한 하늘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였다. 동양에서도 하늘과 땅, 곧 천지(天地)는 만유(萬有)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늘과 땅, 혹은 천상과 지상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원적 요소였던 것이다.
둘째, 땅은 존재의 위계상 최하층을 의미했고 하늘은 최고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 저 너머에는 신(神)의 거처로서 천상(heaven)이 있었다. 하늘을 신의 거처로 보는 생각은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다. 천상은 눈에 보이는 푸른빛의 하늘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세계다. 천상은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고, 인간의 상상 너머의 세계다. 그리고 바로 이 천상에 천국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천상이 천국이 위치한 자리였다.
그런데 500여 년 전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이 나타났다. 물론 과거에도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영향력 면에서 미미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수많은 지지자를 만들어 냈으며, 머지않아 주류 이론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지동설은 먼저 지상과 천상의 이분법적 우주관을 뒤흔들었다. 만일 태양이 중심이라면, 지구가 그 태양을 도는 여러 행성 중 하나라면, 더 이상 지상과 천상은 일대일로 맞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지상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을 떠다니는 조그만 암석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 천상이 사라졌다. 파란 하늘 너머에는 천상이 아니라 스페이스, 곧 암흑의 허공인 우주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 찍어서 전송한 푸른빛의 지구 사진은 인류의 마음속에서 아예 천상을 추방해 버렸다. 우주 공간(space)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현대인은 더는 고대인과 같은 방식으로 지상과 천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상은 전통적인 기독교 천국관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휴거 때 들림받은 성도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성층권을 떠다니는 구름 위에서 살아야 하나? 아니면 화이트홀을 통과해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야 하나.
펄시 콜레 박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은 현대인의 우주관과 나름대로 조화를 꾀한 천국관을 보여 준다. 천국은 지구에서 수조 마일 떨어져 있으며, 지구에서 천국까지 도달하는 데 6시간 정도 걸리고, 크기는 지구보다 80배나 큰 행성이란다. 만일 그 행성이 우주 어딘가 존재하는 행성이라면 그곳에서도 뉴턴의 만유인력의법칙이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몸무게가 굉장히 무거워질 것인데, 무거운 몸으로 천사와 함께 공중을 날아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식의 천국관은 천국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세계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가능한 관점이다. 천국의 실존이 위태로워졌다.
실종된 천국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천상(heaven)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새로운 방식으로 천상의 자리를 찾으려고 시도했는데, 20세기 초반에 예술가들에 의해서 추구된 쉬르 레알(surreal), 곧 초현실이라는 개념이나 뉴에이지 운동은 잃어버린 천상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과학자나 수학자는 차원(dimension)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예컨대, 애드윈 A 애벗(Edwin A. Abbott)은 <플랫랜드>라는 책에서 3차원보다 높은 다차원 세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묘사해서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천상은 4차원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예컨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초현실에 대한 추구를 '절망선을 넘은' 신이교주의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필자가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신이교주의인도 문제지만, 옛날과 같은 보편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천상이 회복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천상은 큰 소리를 내고 떠나가 버렸다.
2) 유토피아의 도래
천국이 사라진 자리를 세속적 천국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토피아(Utopia)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인은 지옥도 지상에서 발견하고, 낙원도 지상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현세에 있다. 유토피아가 도래했다는 말이 독자들에게는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사회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GDP의 성장 그래프를 그려 본다면 지난 수천 년간 수평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9세기 이후 수직으로 상승하는 그래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좌우로 뒤집힌 'L'자 형이다. 물론 전 세계에는 여전히 기아와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빈부 격차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인은 더 이상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지난 세대에 비하면 놀라운 진전이다. 흥부 씨네 가족의 소원은 "이팝에 고깃국"이지만, 현대인의 고민은 과체중이다. 현대인이 회식 자리에서 먹는 음식은 그 옛날 임금의 수라상보다 진수성찬이다.
약 700년 전,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 민중들은 얇은 옷으로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이들도 오리털 파카 몇 벌은 가지고 있다. 옛날 부산 유생들이 과거 시험 보러 한양까지 가는 시간이 한 달 정도였지만 지금은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조만간 상용화될 하이퍼루프(hyperloop) 음속 열차로는 16분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사 없이도 개인용 드론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영국으로 여행 간 딸과 길을 걸으며 얼굴을 보고 영상 통화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공짜로! 평생 글 한 줄 익히지 못하며 죽어 갔던 옛날의 민중들에게 인터넷은 기적의 교육 공간이다. 고조선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모든 학자들이 가졌던 지식보다 더 많은 지식이 인터넷에 있다. 50%를 넘나들던 유아 사망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떨어졌으며, 호환·마마 등의 많은 질병과 재난은 극복되었다. 19세기 평균 수명은 37세지만 지금은 80세를 너끈히 산다. 그런데 구글은 2050년까지 평균 수명을 500살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가동 중에 있다. 가히 불사의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 이후 대중 여행의 폭발적 증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중동 지역을 헤매지 않는다. 대신에 실존하는 지상 낙원들을 방문한다. 블로그와 카페, SNS 등에는 지상낙원을 방문한 여행객들의 견문록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다.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Lift) 헤드셋을 쓰면 영화 '아바타' 속 행성처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도 방문할 수 있단다. 더 나아가 아예 2차원 픽셀(pixel) 대신 3차원 박셀(voxel)로 구현된 3D 영상으로 입체 영상 속을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업은 지복점(bliss point)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극치의 지점이 바로 지복점인데, 지복점을 찾으면 많은 소비자를 불러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커피, 소스, 음료, 제과 등의 지복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에 현대인은 극치의 감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 과학은 섹스에서의 극치점, 곧 오르가즘(orgasm)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를 돕는 상품이 개발되고 있다. 현대 기술은 현대인에게 최고의 기쁨, 최상의 만족, 천상의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의 도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토피아와 관련해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중요한 사람이다. 본래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만든 말인데, 그 말뜻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를 도래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주장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말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의 영향으로 복지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북유럽과 스위스 같은 복지사회는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유토피아이다.
그럼 점에서 스페인의 마리날레다(Marinaleda)는 흥미로운 도시다. 스페인 자체는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지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투쟁한 결과, 고도의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자치 구역을 만들 수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1일 6시간 노동, 부족함이 없는 생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회를 유럽과 같은 곳에서는 이미 실현했다.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있다.
기독교의 천국은 사라지고 대신에 세속적 유토피아가 도래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를 살고 있다. 지옥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옅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from 지옥 to 천국'이라는 기독교 구원론의 공식은 종말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묵상하고, 전할 수 있을까.(계속)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구원-'론'(logy)의 종말
구원론 종말의 시대(3)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4.13 17:48
SNS 기사보내기SNS 기사보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설명해 오던 언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옳다. 특히 그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천국 지옥 기독교'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통렬하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그러나 나는 그가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정확히 짚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천당 지옥 기독교관'과 '문자주의'에서 찾았는데(위의 책, 13쪽),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 두 원인이 전부인지는 묻고 싶다.
뒤로멈춤앞으로
만일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본다면 그것은 구원론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전체의 위기요, 나아가 기독교 신앙 전반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유달리 '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라는 정황 속에서 보자면 이 위기는 무엇보다도 구원론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 몇 차례 지적했듯이 개신교회는 구원론을 초석 삼아 세워졌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글에서 나는 구원론과 함께 기독교 신앙 및 교리 전반이 언어의 위기로 말미암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게 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2. 게토화된 기독교 언어
기독교 언어의 위기 징후는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및 신학의 언어가 게토화된 사실에서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의 언어를 교회 밖의 사람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교회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 갔을 때 주고받는 '집사님', '권사님', 혹은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낯선 호칭이 그 작은 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의 생경함은 더욱 말할 것이 없다. 갑작스럽게 전철에 올라탄 50대 여성이 지하철을 휘젓고 다니며 쏟아 내는 종말의 메시지, '회개하라'는 둥,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둥,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는 둥… 노스트라다무스류의 묵시적 언어들은 목사인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말에 성경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인용과 세상 문화에 대한 번득이는 비판과 통찰이 들어 있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럽다. 차라리 정신병자의 횡설수설이면 좋을 뻔했는데, 진리의 편린들이 들어 있는 바람에 기독교 언어 자체가 청자들에게 미친 소리로 들려지겠다 싶으니 낯이 뜨뜻해진다.
한 구도자가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안에서 듣는 말은 분명 '한국말'인데 도통 모르겠는 말들뿐이다. 안내하시는 분들의 한복이나 양복도 어색하고, 갑자기 자신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황스럽다. 찬송가나 복음성가 내용도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 통성 기도할 때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고 중얼거리는 청중들을 보면 어딘가 섬뜩하다. 장로님의 길고 긴 기도는 거의 외계어 수준이고, 설교도 알 듯 모를 듯하다. 설교 본문이 하박국서라는데 이게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가. 목사가 설교하는데 중간중간에 사람들은 왜 자꾸 '아멘'하면서 끼어드는 걸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데 그건 또 무슨 뜻인가. 복음서·제자·훈련·리더·목장·사역·선교·지상명령·성령 충만·창조·심판·영성·성숙… 암호들은 끝이 없다.
복음반을 찾았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천국, 지옥은 익숙한 단어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복음반 강사가 가르치는 내용도 알쏭달쏭하다. 중간중간 턱 턱 걸리는 용어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십자가·보혈·부활·예정·칭의·성화·영화·종말·재림… 끝도 없다. 그리고 결론은 '믿음'이 중요하단다. 믿으면 천국에 간단다. 믿으라고? 뭘 믿으라는 거지? 강사가 하는 말에 그냥 동의하라는 말인가? 인감도장 찍을 필요가 없다면 그까짓 거 '믿는다'고 해 두지 뭐. 근데 그 정도로만 믿어도 천국에 가는 걸까? 에이 설마… 그렇게 갈 수 있는 게 천국이라면 그런 천국은 허당일 것이 분명해.
이처럼 기독교 언어는 외부인 입장에서는 어색함과 낯설음으로 충만하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는 잘도 쓴다. 그래서 게토화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어가 마치 갈라파고스제도의 생태계처럼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관념성과 추상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신학적 개념의 남발, 서양 언어의 무분별한 차용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사실 게토화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1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초대교회 공동체도 로마제국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게토화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물고기 표시 같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암호도 많이 만들어 냈다. 초대교회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만만치 않다. 흔히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요, 소통의 달인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예수님은 일반 청중에게 전하실 메시지와 제자 공동체에게 전하실 메시지를 늘 구분하셨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나, 요한복음 12장부터 나오는 최후의만찬 자리에서의 가르침, 특히 새 계명 수여는 고립된 제자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바울도 '외인'과 '교중 사람들'(고전 5:12)을 자주 구분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어느 정도 게토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지금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의 게토화 현상과 사뭇 달랐다는 데 있다. 당시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사이에 두었던 필연적 단절과 대조성의 산물이라면, 현대 교회의 게토화 현상은 대조성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누가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교회를 대조 사회라고 생각하겠는가? 세상의 논리가 거의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가. 기업과 메가 처치는 뭐가 다른가. 마케팅, 경영, 기술의 무분별한 수용은 또 어떤가? 정치 편향성, 물신숭배… 이런,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다.
기독교는 사실 속으로는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해 버렸다. 다만 겉으로만 기독교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종교 놀음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기독교 언어의 고립주의는 실은 교회가 세상과 똑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인 셈이다. 시뮬라시옹은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Baudrillard, <시뮬라시옹> 참조). 결국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은 교회 속에 알찬 신앙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 상징력을 상실한 상징처럼 기독교 언어는 기표만 남았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전문용어(?)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마치 전문가들이 굳이 어려운 전문용어를 휘갈기면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을 배제하듯이 교회는 그러한 게토화된 언어로 외부인을 소위 '세상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이며 배제한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내용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데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다 눈치채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 언어가 외인들 가슴에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 지식인들은 성경의 언어가 주는 충격에 전율했다. 여성과 하층민들은 성경의 평등사상에 뛸 듯이 기뻐했다. 지금이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경멸적 언어의 대명사지만 100년 전 평양 시대에서는 그 말만으로도 뭇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보다 지금의 기독교 언어는 훨씬 더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귀만 간지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사실을 교중 사람들만 모른다. 게토 안에서 여전히 자신들만의 언어가 잘 통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교중 사람들조차 서서히 텅 빈 언어의 실체를 느끼고 있다. 매주 강단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종교 언어가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귀만 간질이는 현상에 이제 교인들도 점차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위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3. 교리의 종말
1) 명제적 진리관의 종말
기독교 언어 위기 문제에서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교리의 종말'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는 바람 잡는 것 같은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해서 현대인은 기독교 교리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기독교 교리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다. 수많은 이단이 만들어진 것도 결국은 교리 때문이고, 수많은 사람이 교리 때문에 죽었다. 신학자들은 신학 개념이나 단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수십 년을 고심했으며, 그 단어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았다. 그런 단어들로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단어들로 사도신경을 비롯한 수많은 신조(혹은 신경, creed)들이 만들어졌다. 그 신조는 정통과 이단을 결정짓는 표준이 되었고, 그 표준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바뀌었다. 필리오케(Filióque)라는 단어 하나가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헬라어로 ‘i’(이오타) 하나로 아리우스(Arius)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와 테오토코스(Theotokos)의 논쟁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이단으로 찍혀져 나갔다.
교리는 신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5세기 동유럽의 민중들은 저잣거리에서 단성론과 양성론에 대해서 열띠게 논쟁했고, 16세기 서유럽 시민들은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서 흥분하며 토론했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열렬하게 신앙하고 있는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도 사실은 12세기 가톨릭 신학자 안셀름(Anselm)의 '만족설' 교리에서 빚진 것이다. 교리는 신자들에게도 중요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예전과 전통 대신 교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개신교회 내 경건주의 흐름이 교리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긴 했어도 교리를 강조하는 정통주의(Orthodoxy) 흐름은 개신교회사 속에서 도도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에서는 기독교인조차 기독교 교리를 주제로 밥상머리에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원인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 외부적 원인도 만만치 않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교리의 종말이라는 현상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했던 사람인데, 그는 그 원인을 현대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19세기 전후로 현대 정신이 '절망선'을 넘으면서 명제적 진리가 멸시 당하게 되었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쉐퍼는 헤겔(G. W. F. Hegel)의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의 실존주의가 인류의 정신을 절망선 너머로 인도했다고 개탄했는데, 이러한 진단에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19세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명제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진부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적 진리에 대한 멸시는 기독교 교리의 종말 현상의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제적 진리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쉐퍼의 판단은 정확했다. 현대인은 진리를 명제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가 똘레랑스의 미덕을 강조한 이래로, 사람들은 점차 절대 진리의 선포보다 '사견'을 전제로 자기 생각을 제안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은 점차 사라졌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의견으로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한 토론과 논쟁의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설이 '진리'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그 진리라는 지위는 또 다른 진리가 등장할 때까지 잠깐 누리는 명예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관은 칼 포퍼(Karl Popper)의 '열린사회'의 개념을 통해 잘 나타난다. 영원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다. 영원한 진리라는 개념은 전체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전체주의 사회는 닫힌 사회며, 닫힌 사회는 열린사회의 적이다. 열린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모두가 진리를 경합하는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다른 의견에 의해 반증되기 전까지 그 의견은 진리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Popper, <열린사회와 그 적들> 참조).
절대적 진리관의 해체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급진적으로 개진되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진리'라는 말 자체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대문자 진리(Truth)는 없다. 소문자 진리들(truths)만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정서를 가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단죄한다. 인식론적 제국주의란 '나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식의 진리관이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여하한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도 거부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진리관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명제적 진리는 'A는 B이다'라는 식으로 구성될 것인데, 그 방식이나 내용이 오만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강압적인 아우라가 가득하다. 현대의 교양인이라면,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 따라서 명제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는 독선적인 시도는 자제되어야 한다.
조지 린드벡(George A. Lindbeck)은 <교리의 본질>에서 명제적인 교리의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인식-명제적' 형태의 기독교 교리는 '문화-언어적' 형태의 담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Lindbeck, <교리의 본질> 참조). 교리는 부적절하다. 다만 '담론'이나 '이야기'만 가능할 것이다. 그의 대안에 대해서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지금의 시대정신이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지적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명제적 진리관의 위기는 기독교 교리의 위기 원인이 된다. 대부분 기독교 교리(dogma)는 명제적 진리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니케아신조를 비롯한 여러 신조들(creeds)이나 신앙 공식들(formula)은 압축적 명제의 형태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정리해 주고 있는 것들이다. 신조나 공식, 교리들은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명제적 형식으로 진술만 있다. 정의상 신조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그토록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다. 기독교 교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21세기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지탱해 왔던 교리, 곧 -'론'(logy)의 해체적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 형이상학의 종말
기독교 교리가 종말적 상황에 처한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기술의 정신이 편만하게 퍼져 있는 현대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들,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의 관심은 지독히도 '물질적'이고 '현세적'이다. 천상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거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사고할 줄 모르게 되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뭘까.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말이다. 단어의 뜻을 풀이하자면 '물리학(physics) 뒤(meta)'라는 뜻이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탐구는 물리학(physics)이라고 했고, 물리학 다음에 오는 학문은 존재의 본질(essentia)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물리학은 형이하학(形而下學), 존재론은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번역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형이상학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며, 초과학적인 대상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사고라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발전했다. 신화적(mythos)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logos) 사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근원'(arche)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만물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들은 만물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뒤이어서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이데아'(Idea)가 천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데아 역시 초월적인 존재다. 비슷하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탐구를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자주 '신'에 대한 탐구로 연결된다. 예컨대, 제1원인,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혹은 일자(The One) 등에 대한 탐구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이면서, 신학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신학자들도 형이상학적 방법론으로 신에 대해서 연구했다. 형이상학은 초월에 대한 학문이고, 그것은 신학과 인척 관계에 있다.
17세기를 지나면서 형이상학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과학혁명과 함께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사의사탑에서 이루어졌다고 전설처럼 전해오는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장의 이론을 단번에 폐기해 버렸다. 바야흐로 과학이 새로운 정신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물리학은 더 이상 형이상학보다 열등한 학문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로, 형이상학의 추락이다. 18세기 칸트(Kant)에 이르러서 형이상학은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형이상학을 과학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떼어서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옮긴 사람이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과학적 이성과 형이상학적 이성으로 분리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이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한 유물론자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은 제거되고 오직 과학적 이성만 남게 된다. 초자연적, 초월적, 초과학적 영역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형이상학의 위축과 더불어서 신이 존재할 영역도 지상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니체 이후로, 이제 신은 지상에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형이상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일 없는 철학자들의 말장난'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교리(dogma)가 위기에 내몰린 것도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기독교 교리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었다. 예컨대, 삼위일체론 같은 경우는 단적인 예다. 개신교회 구원론도 마찬가지다. 칭의, 전가, 이중 예정, 중간 지식, 속죄 등… 이런 것들은 일상의 삶과 연관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면서 이러한 기독교 교리도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대인은 더 이상 이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귀를 열 마음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연관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여기에 기독교 교리의 딜레마가 있다. 본성상 다분히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현대인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4. 말의 굴욕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말하는 '말의 굴욕'이다. 말의 굴욕은 앞서 언급했던 것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현대사회는 '말'(word)이 굴욕당하고, 능욕당하는 사회다. 말이 뭘까? 말이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매개다.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 인격과 인격의 교통이다. 나아가 말은 인간 존재 자체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 뜻은 자신의 존재의 내어 준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말'(word)을 통해 세상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성경은 그것을 '말씀'(word)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사도들 말을 통해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는다. 그리고 또한 말로 기독교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한다. 말로 진리가 계시된다. 말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없고, 기독교 진리도 전달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말'이 경멸당하고 있다. 그리고 말의 굴욕이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자크 엘륄의 통찰이다.(Ellul, <말의 굴욕> 참조)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법정에서는 증언보다 증거가 우선한다. 이는 사람의 말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말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진실보다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경험칙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말이다.
말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말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말은 사물과 1대1 대응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은 대상보다 너무 많은 뜻을 담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램을 짤 때, 인간 말 대신에 기계어를 쓴다. 기계어는 대상과 언어가 완벽하게 1대1 대응 관계를 가진다. 기계어는 간단하고, 명료하고, 정확하다. 예컨대, 수학의 계산식은 항구적으로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하지만 말은 그렇지 않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찰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이러한 말의 부정확성에 대한 혐오가 현대사회에서 말이 무시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말이 경멸당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말이 선전(propaganda)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거 기간 후보자의 말은 철저하게 표 확보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간주된다. 말하는 사람의 본뜻은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상대방 후보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린다. 선의가 악의가 되고, 악의가 선의가 된다. 말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의제를 선점하여,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선거는 전쟁이고 말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사는 무기다. 마치 총알이나 대포알과 같다. 선거에서 말의 가치는 오로지 표 득실로 결정된다. 이런 말은 인격과 무관하다. 오염된 말이며, 선전의 도구이다.
그런데 이것은 선거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사회 속에서 모든 말이 선전의 수단이 되고 있다. 기술 사회에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무관한 기호들이 되고 있다. 말은 말인데 '주인'이 없다. 우리 사회는 광고 카피, 뉴스 멘트,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로 넘쳐 난다. 그러나 그 말들은 하나같이 주인이 없는 말들이다. 이들 말은 오로지 효과로 측정되는 선전의 도구다. 물건을 사게 하거나, 뉴스를 믿게 하거나, 드라마 시청률을 올리거나, 음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선전의 도구이다. 비슷하게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친구 관리를 위한 경영이 된다. '좋아요'와 '공유'의 숫자는 영향력을 의미하며, SNS에서 영향력은 자산이다. 이처럼 기술 사회에서 말은 타인을 현혹하거나, 설득하는 수단일 뿐이다.
현대인은 타인의 인격이 말로써 다가오는 무거운 경험을 잃어버렸다. 인격을 담은 대화는 너무 무겁다. 그런 대화는 즐거운 분위기를 깬다. 무거운 대화는 예의 없는 대화다. 대화가 너무 무거우니 카톡을 보낸다. 카톡 메시지는 인격을 한층 걸러내 주기 때문이다. 말은 가벼워졌다. '아브라카타브라' 같은 뜻 없는 주문을 말하면서 재밌어라 할 때, 조롱의 대상은 말 자체다. 비슷하게 낄낄대며 지껄이는 유행어도 말에 대한 조롱이다.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
말이 당하는 이러한 굴욕은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한다. 기독교 진리는 오로지 말로써만 전달 가능하다. 이때의 말은 정보의 전달이나 선전의 도구, 혹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격이 담긴 말이라야 한다. 그 말은 천금 같이 무거운 말이다. 그런데 말이 위기에 처했다. 말은 가벼워졌으며,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선전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말의 위기와 함께 기독교 진리도 위기에 처하고 만다. 듣기 싫은 말을 할 때, '설교하지 마'라고 대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설교는 권위적인 명령이거나 강요된 설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혹은 설교는 설교란 장황하고, 의미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sound)나 소음(noise)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은 설교 역시 선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설교는 최상의 상품이 되고 있다. 일종의 지적 엔터테인먼트다. 사람들은 설교를 즐기기 위해서 듣는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늘 충돌과 대결이다. 해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투쟁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마치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대결하듯 청중은 설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씨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여 존재의 변화를 겪는 것이 설교의 본래 목적이다. 하지만 설교가 청중을 끌어모으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어 버린 현대 교회에서 설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거나, 자존심을 살살 어루만지는 아첨이 되어 가고 있다.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5. 나가는 글
이상이 기독교 언어가 당면한 위기 상황이다. 위에서 보듯이 기독교 언어의 위기는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지만, 교회 외부적인 문제도 적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이 내가 마커스 보그와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커스 보그의 제안, 곧 기독교 언어를 바꾸자는 제안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는 더 크고, 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담지하고, 전달해 왔던 기독교 신앙의 언어와 교리의 언어는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특별히 구원론을 초석으로 삼고 있는 개신교회의 경우, 구원-'론'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