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묘앙 에오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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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2020. 8. 1. 14:45
무묘앙 에오가 일본의 한 아파트에서 고독사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쉽게 고독사니 굶어 죽었니 하면서 불쌍한 느낌으로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에오의 수준은 아무리 못해도 그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진정 평한 할 줄 아는 인간이었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 뿐이라는 거예요.
스스로 아파트에서 고요히 누워서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평안한 고요 속에 머물다가 그냥 간 거예요.
그렇다고 완벽하게 깨친 것이 아니니....
돌아돌아 다시 온 것으로 보고요...ㅎㅎㅎㅎ
그러나 그 평안함은 알고 있기에.....
그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이해 할 수 있어요.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일으키지 못했을 거예요.
그냥 저냥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평안하다는 것...
그냥 살짝 즐겁다는 것...
그 수준에서 죽음을 맞는 거예요.
그러니 절대 고독하지도 않았고, 비참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놓아 버리는 것인데...
어떻게 고독하고 비참 할 수 있겠어요.
그냥 평온한 상태였을 뿐이죠.
무묘앙 에오의 책을 통해서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이런 느낌인 것인지....
나이가 들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인지...
ㅎㅎㅎㅎ나이가 들어도 이야기 해 보면 나이더라는...
하여간 이렇게 된 상태를 감사 드릴 뿐이라는...........
에오의 죽음의 직전의 상황을 이해 할 뿐이고...
그렇게 고요하게 갔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뿐이고...
다시 돌아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 할 뿐이고....
깨친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일 뿐이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사진 개수3
simplicity of spirituality: 무묘앙 에오의 死心傳
무묘앙 에오 無明庵 回小 EO
깨달음과의 거리 죽음과의 거리
----
삶과 죽음을 다루는 많은 사상들은 그저 혼미할 뿐이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이 지구에서는 단언컨대 긍정적인 사고라고 알려진 기만의 도구는 결코 필요하지 않다.
자아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결정화된다. 즉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면 자기 동화自己同化(하나가 됨)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매번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인간은 자기동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명상의 체계 중에서 주요한 부분은 <반복되지 않는 것>만을 실습자에게 경험시킨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자아가
결정화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마스터들은 명상의 기법 속에 익숙치 않은 상황이나 예측할 수 없는 것만을 계속적으로 부여한다.
어떤 경험이 전혀 반복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일 때에 자기(自己)는 붙을 수 없고, 나아가 자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는 주로 동적인 명상 혹은 고풍스런 선(禪)의 세계에서 사용되어 왔다. 진정한 마스터는 당신을 매일 매일 실망시키려 한다.
그들은 몇 번이고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는 짓을 계속적으로 행한다. 그들이 당신을 비참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선험적인 기대나 희망이야말로 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수 없는 원인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당신의 희망을 계속적으로
때려부술 따름이다.
당신이 완전한 무위의 정적 속에 빠지기까지, 가령 논리적으로
바른 것을 말하든 틀린 것을 말하든 마스터는 그것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부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스터가 진정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정합성을 갖춘 올바른 것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선악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져서 <절대 침묵이 되는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에게 끊임없이 동적인 변화와 부정을 던져주는 것과는 반대의 방법, 가령 그저 앉아서 정적 속에 머물러 객체와 주체가
동시에 사라지게 하는 경험도 실제론 반복되지 않는다.
지긋이 앉아 있는 것이 만약 당신에게 매번 똑같이 되풀이되는
감각을 만들어낸다면 그 명상이나 좌선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명상은 당신의 자아가 결정화되는 장이 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명상을 하면서 똑 같은 것이 반복되는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명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만약 그것이 형태 있는 것이라면 <반복>될 것이다. 만약 무언가
특정한 대상이라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이란 절대적 허공에 드는 것이다. 만약 그 허공에 든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것도 반복되지 않는다. <기억에 머무는 것조차 없는> 허공과 고요 속에서는
경험되는 것은 어느 것도 반복될 수 없다. 그렇다고 순간순간 매번 새로운 것도 아니다.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오래된 것도 아니다.
새롭다, 오래되었다 등은 모두 비교에 의한 구별이다. 완전한 마음의 침묵과 고요 속에서는 오래된 것이나 반복되는 것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울 것조차도 없다.
그것은 새롭지도 않고 오래되지도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무형無形>이기 때문이다. 무형에 대해서는 새롭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오래된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 무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고요나 침묵이나 허무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거기에 명칭과 형태를 부여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원에 대해서는 결코 무엇 하나도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볼 수조차도 없다. 그저 당신은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1.EO
-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의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행위>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에 대해서 가장 명확한 논리적 해답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 당신은 왜 수행을 하는가?
<타인과 사회, 인간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기 한 사람이 진정 정직한 모습으로 발가벗는 것이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한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좌선과 무심가운데 심리적으로 무장하고자 한다.
그 목적은 오직 살아남기 위함일 뿐이다.
- 인간은 "편안해지고 싶다' 고 자주 말한다.
"나는 영원히 괴로워하고 싶다" 고 진심으로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일곱가지 재난과 여덟가지 고통을 달라" 고 말하는 위대한 성자라도
"나에게 <영원히> 일곱가지 재난과 여덟가지 고통을 달라" 고 말할 수는 없다.
<일시적으로 괴롭더라도 그 댓가로 나중에 편안해지고 싶은> 어디까지나 자아의 흥정이다.
당신은 가장 편안한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비록 고행의 길이라도 궁극적으로는 편안해질 수 있는 길만을
간다.
- 사고 활동 전체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항상 <생존명령이나 사활문제>로 기능하고 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주어진 기본 운명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여 생존에 유리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생물의 기본 프로그램이다.
- 무욕이 되고 무심이 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는 종교,
동양의 선이나 불교에서도
깊이 통찰되지 않는 망언이 항상 있을 뿐이다.
" 고苦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전제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욕망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을 즐겁게 해 준 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욕망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의 도피처로
"무심과 무욕이 소중하다" 는 말 따위를 내뱉는다.
욕망이 너무 커서 달성되지 못했거나 여러가지 욕망이
다 충족되지 못했을 경우에도
무욕이 진리라거나 무욕이야말로 도道 라는 말을 내뱉는다.
좀 더 정직해 보라.
결국은 <욕망도 무욕을 향한 욕망도 모두 동일한 욕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떻게든 만사를 해결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술도 없이 그때 그때 무력한 채 상황에 직면하는 쪽이 훨씬 용기있는 방법이다.
당신은 용기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최선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허용량을 초과할 정도의 움직임에 접근할 때
고를 느끼고 또, 자기 허용량을 초과하는 <고요>에 익숙해지는
데도 고를 느낀다.
만약 신이 존재에 진정 만족하고 있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법칙으로 만족 속에서는 일체의 생산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산 행위는 항상 어떤 필요성에서 오는 것이 법칙이다.
그 필요성이란 무엇인가? 언제나 그것은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해진다. 먹히는 것과 먹는 자들(신들)을 단순한 왕바보들의 집단으로 본다고 해도 이미 자신의 생과 되풀이되는 윤회로부터
받는 고통을 덜어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우주는 본래 절망적인 고의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는 속임수를
<구실>삼아 우리들은 환상적인 위로에 의존하게 된다.
더구나 환상은 오래 가지 못하고, 반드시 무료함이 다가오므로
항상 새롭게 바꿀 필요가 생겨난다. 생명이란 고행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헛수고이다.
- 자아, 사고, 윤리, 우주, 사상, 문명..
이것들은 모두 생존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 속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수단이다.
만약 생존이라는 목적이 제거되면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의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그리고 <굶주림> 내지 <부족감>이라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고통은 모든 생명체가 움직이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부족감> 이란 <고통>과 같은 말이다.
고통은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생명체 본래의 이 부족감 때문에
당신은 의식주가 채워져도 지긋이 있을 수가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구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부족감 이외의 다른 원인일 수가 없다.
그저 지긋이 있어 당신이 만족할 수 있다면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배우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저 지긋이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완을 위해 명상하거나 혹은
명상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 자신이 품은 의문과 화두에 대해서 그 답을 끝까지 찾아가는 것은 진정한 통찰이나 사색이라 할 수 없다.
가장 깊은 탐구의 자세는 의문 그 자체에 당신이 의문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탐구와 자기 확립 이전에 의식이나 정신, 살아가는 방식이
왜 처음부터 ' 명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질문해 보라
누가 대체 <또렷이 하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단 말인가?
어떤 의문이나 결말을 짓고 싶을 때는 스스로 답을 내리기 전에
'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좋지 않은가' 라고 솔직한 반대의견을 제시해 보라.
제대로 사고하려면 정반대의 가치를 양측 면에서 생각해 보고
자문하는 것이 올바른 사유방법이다.
정당한 목적, 세간에서 위대하다고 칭하는 목적을 갖는다 해도
자신의 과거를 잘 생각해 보면
그 목적의식은 모두 타인, 책, 스승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조합된 것일 뿐이다.
나는 명료하게 해야 한다고 왜 생각할까?
세계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가?
알고 싶다는 나의 질문은 확실한 것인가?
무엇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 자체가 정말 확실한 것일까?
나는 만물의 존재의미를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럼 < 만물 > 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만물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말해도 지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입으로 만물이라 말해 본들 정작 나는 만물을 알고 있지 못하다.
또 의미를 말해 본들 각 생물의 생존상태 시점에 의해 실로
그 의미가 무한해 진다.
그 속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렇다면 나는 사는 의미에 꼭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의 법칙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자신이 지각할 수 있는 좁은 범위에서 대해
명료히 할 것 같은 좁디 좁은 진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칫하면 나는 만물에 대한 물음을
마치 정신적인 탐구인 양 거짓으로 과장해서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 내가 알고 있는 최대 원칙은
' 만물은 결코 명료해 질 수 없다' 는 것이다.
아무리 정합성을 가지고 지식을 조합해 본들
곧장 명료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하나의 답은 항상 100가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확실한 체험이나 지식을 가진다면
당신이 얻은 그 확실함에 대립하는 실제 현상 혹은 대립하는 의견과 반드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사물을 확정하는 것 자체가 <보편성>을 빼앗는 최대원인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그 확실함이 만약 당신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당신은 생애 내내 어디서 무엇을 경험하든 생명의 경험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꽉 틀어쥔 확실함의 재확인을 오로지 지속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생生의 신선함은 모조리 잃어버릴 것이다.
확실함이란 무한을 유한으로 제한하는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언어란 모두 반대어를 갖는다.'
- 불안정하고 불확정한 사물 속에 만족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확실함>을 찾는 것을 그만 두었을 때
비로소 <족함>이 되는 것이다.
- 사고는 내용이 변화하고 감각은 대상이 변화하며 의식은 밀도가 변화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때 주체의 존재의식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어느 특정 체계를 접하거나 혹은 스승 아래에서 배우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방법에 과연 어떤 진리가 있는 것일까?
나의 최대관심..
그것은 인간이 완전히 무학 그리고 무위인 채로
그저 혼자 자신을 대면할 때 생겨나는 무언가이다.
몸하나 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라면 인간에게 필요없다.
나는 사고도 믿지 않는다.
사고란 본래 일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의 감각도 믿지 않는다.
그것 역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명료함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 행위 자체로 이미 일정할 수 없는 것(도가 아닌 것)을 다루려 한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노력은 헛수고일 수밖에 없다.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구하지 않고
사고도 없이 존재감도 잊어버리고
20분이라도 좋으니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
이것이 수행의 궁극적 의미이다.
일체의 언어로 부터 떠나라
질문 : 나는 머릿속의 독백(사념)이 멈추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요?
에오 :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신기하게도 여러 동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경계 하지 않았다.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면식도 없는 개나 고양이 하늘의 새까지도 그녀에겐 모종의 친숙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동물들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흡사 했다.
동물도 아이에게는 경계심을 덜 갖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작은 탓일까?
(한층 내면적인 문제가 따로 있다.)
--- 그 여성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태어나면서 언어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물에 대한 표현이 곤란했다는 것이다.
( 그녀에겐 말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 그런데 언어의 역활이란 무엇인가?
원래 언어란 --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귀 기울여보라.
그러면 당신은 하루 중 당신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양의 독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말로 사고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애초 말은 사고의 순서를 세우려던 것이 아니다. 오직 상대가 있을 때만이 말이 필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차 저차 하여 이렇게" 되어 등으로
줄곧 말을 앞세우며 사고한다. 그런데 말을 사용하면 사고력의
효율은 크게 떨어진다.
--- 그래서 시험 삼아 하루만이라도 온종일 머릿속에서 말 하는 것을 그치겠다고 결심해 보라
*印象(인상)과 畵象(화상)을 통해서만 사고하라. 가령 당신이
쇼핑하러 갈 때 보통 때처럼 언어화시키지 말고 그 모두를 영상으로 사고해보라. 사고는 괜찮지만 그 어느 것도 언어화해서는 안 된다.
1) 화상이나 영상이나 소리의 기억 그리고 짧은 인상의 배열로
사고하도록 하루 온종일 마음을 집중해보라. ---
그러면 지금까지 자신의 머리가 얼마나 언어에 의해 오염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언어 속에는 무수한 습관적인 반응이 배어 있다.
2) 자신의 머릿속에서 언어화를 그친 하루 동안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 하나하나 까지 이미지나 화상(영상)으로 변환시켜보라. -- 이처럼 사고의 과정에 언어가 개입하면 얼마나 왜곡 되는지를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기억하는 언어수가 적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인상에 대해서도 일일이 언어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것이 동물이나 아이들이 사고하는 방법이다. -- 말로써가 아니라 (실감을 동반한 인상이나 화상의 단편을) 늘어놓고 사고하는 방법이다. 본래 그대로의 비언어적인 사고방법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은 특히 동물과는 아주 친숙해지기 쉽다.
또 언어가 만들어내는 망상의 폭주와 유착이 없어져 인상의 나열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소위
텔레파시가 극도로 민감해지기 쉽다
* 무명암에서는 사인선 행법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근거로 : 그 사람의 직종이나 언어습관을 체크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직업적으로 언어화가 습관이 되어있는 자는
행법의 효과면에서 그 효율이 낮기 때문이다.
1) 가령 매스컴. 변호사. 세일즈맨. 편집자. 번역가. 집필가 혹은 무언가를 팔기위해 극단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직업이나 글을 다루는 직업들이 대표적이다.
2)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적인 직업들 (목수. 미장이. 이발사 등) 육체노동자와 오직 신경만을 사용하는 직업은 폐해가 적다.
그것은 아무런 실감도 없이 단지 언어의 오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3) 자신의 사고가 언어화되고 마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각물을
언어화 하고 마는 것.
4) 그리고 타인의 말을 이미지로 변경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변경하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을 반복하면 결국은 언어가 폭주되는 연상방법으로만
사물을 판단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 실제로 인간은 언어로 사고 할 수 없다.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망상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은 아무런 실감도 없는 망상이다. 사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언어화해서 사고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폐해를 말 할 따름이다. 가령 아이디어나 발명을 해 내는 사람은 결코 언어로 사고하지 않는다.
언어라는 것은 사물의 발상과는 전혀 적합치 않다. 언어화로는
사고의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일일이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의 그림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로 된다. 그림. 개념. 인상을 나열하는 비언어적인 사고 말이다. 따라서 우선 머리와 감성을 명료하게 하고 싶다면 일체의 언어화를 떠나는 일정한 기간 혹은 시간을 스스로 계획해야 한다.
그 기간은 단 한마디도 머릿속에서 말 하지 않는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 대신에 사고할 때는 느긋해도 좋으니 화상이나 인상의 단편을
마치 동영상처럼 나열해서 사고한다. 지면 위에서 사고하는 경우도 그림의 배열로 사고 해 본다.
1) 그리하면 당신은 자기머리가 얼마나 언어의 피해를 입고 있는가를 통감할 것이다.
2) 언어로 사고한다면 즉 혼잣말로 사고한다면 당신의 사고는 평생 멈추지 않고 계속 될 것이다. 머릿속의 혼잣말 --- 미치광이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이미 많은 인간이 빠져든 병이다.
사실 이미 많든 적든 언어에 의해 미치광이가 되어있다.
* 고대 티벳 우수 사원은 입문한 이후 5년은 일체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솔한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강한 인상으로 모든 개념이나 체험을 교육시키기 위함이다.
--- 수다쟁이 인간. 독서광인 인간. 언어에 일일이 반응하는 인간을 잘 관찰 해 보라.
(그들은 단지 언어에 대해 언어만으로 머릿속에서 반응한다 )
simplicity of spirituality: 무묘앙 에오의 死心傳
무묘앙 에오 無明庵 回小 EO
깨달음과의 거리 죽음과의 거리 삶과 죽음을 다루는 많은 사상들은 그저 혼미할 뿐이다....
201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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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느긋하게 앉다 (무묘앙에오)
그저 느긋하게 앉다 (무묘앙에오) 편안히 쉴 때는 그저 무심히 앉거나 혹은 옆으로 누워 무엇을 하기 위해서도...
2019.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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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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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느긋하게 앉다 (무묘앙에오)
그저 느긋하게 앉다 (무묘앙에오) 편안히 쉴 때는 그저 무심히 앉거나 혹은 옆으로 누워 무엇을 하기 위해서도...
2019.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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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라는 이름의 도박장 // 무묘앙에오
기억하고 싶은 글
우주라는 이름의 도박장 // 무묘앙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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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
2018. 2. 17. 19:59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 ■ 우주라는 이름의 도박장 또는 학교 // 무묘앙에오
어떤 붓다들은 이 지구 또는 우주를 영적성숙을 위한 학교에 비유하고 어떤 붓다들은 마야(환영)에 비유합니다.
일본의 깨달은 붓다인 무묘앙에오는 우주를 도박장 비유하고 있읍니다.
무묘앙에오의 저서에 보면 인간은 인간 위에 상위차원의 우주 관리자 존재들의 먹이감이며 그들은 인간의 고통,분노,사랑,기쁨,슬픔 및 심지어 인간이 깨닫기 위해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에너지 등 인간이 발산하는 모든 감정을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것들을 <루슈>라고 한다는 군요.
인간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뿐이며 그것은 인간이 가축을 길러서 잡아먹는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우주는 도박장 또는 정교한 모형정원이며 도박장을 나가는 출구는 해탈(깨달은 붓다가 되는것) 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깨달음(광명)과 해탈은 다른 길이라 합니다.깨달아도 또다시 윤회할수 있으며 해탈은 거기서 더 나아가 완전히 우주 도박장 밖으로(?) 붓다들의 근원인 무(無)로 나가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는 그들이 애써 가꾸고 있는 그들의 사육장이라고 합니다.그들에게 인간은 개량형 작물이랍니다.^^
너무 억울해하거나 두려워할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인간도 가축과 식물을 길러서 잡아먹지 않습니까? 마찬가지겠죠. 더 상위차원의 존재들에게는 인간이 발산하는 모든 것이 먹이가 되겠죠.
누군가 처음 인간과 모든 생물체들을 설계할때 남을 잡아먹지 않고도 존재할수 있게 만들것이지 굳이 남을 먹어야 내가 살수있게 만든것에 대해 심한 의구심이 듭니다.
이 우주에는 우주관리자가 있으며 우주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은 깨달은 붓다들의 대량출현을 싫어한다고 하는군요.
붓다들은 우주 도박장을 나가서 무(無)에 존재하는 존재들이라 붓다가 대량출현하면 우주가 정지,소멸한다고 읽은것 같습니다.
에오의 가르침 책에 보면 인간은 상위차원의 존재들에 의해 동물들보다도 더 예민하고 약하게 그리고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 내도록 회로가 설계 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사념이 정지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합니다.그래야 그들의 먹이인 루슈가 계속해서 많이 생산되고 우주가 돌아가니까요.그들은 이런 루슈를 섭취하기도 하고 다른 우주에 팔기도 한답니다.
우주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안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감정을 발산하고 먹고 마시고 싸우고 뛰어 놀고 괴로워하고 열심히 창조를 하고 기뻐하고 ... 마구 마구 활동을 해야하며 붓다들 처럼 사념도 정지하고 무의 상태가 되버리면 우주가 정지해버려서 도박장 사업은 망한다고 하는군요.^^
무묘앙에오의 저서에 보면 아주 상위차원의 존재들은 무(無)가 두렵고 질려서 우주속에서 존재한다고 하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주의 존재들에게 진화를 말하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에오는 그들에게 물었답니다.<진화의 끝은 어디인가?> <당신들은 왜 진화를 하려하는가?>
그들의 대답은 <진화의 끝은 없다><그냥 진화할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답니다.^^
근원인 무(無)로 돌아가는게 두려운것 같습니다.거기에는 자아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에오는 깨달음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주도박장을 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그냥 계속 윤회하며 우주를 돌리는데 열심히 기여하라고 말한것 같습니다.^^
모든 붓다들은 지복(至福)의 상태에 있다고 읽은것 같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사념과 욕망이 정지한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야 되며 거짓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한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읽었읍니다.
한번 도전해 보시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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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종교의 본질 // 무묘앙에오
■ 외계인과 종교의 본질 // 무묘앙에오 *아래 글은 무묘앙에오의 저서 <EO가 본 얼간이들> 1권의 한국어판 서문에...
201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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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종교의 본질 // 무묘앙에오
■ 외계인과 종교의 본질 // 무묘앙에오 *아래 글은 무묘앙에오의 저서 <EO가 본 얼간이들> 1권의 한국어판 서문에...
201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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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글
무묘앙에오 < 반역의 우주 >
곡두
2018. 2. 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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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활동은 반드시 중독 된다. // 무묘앙에오 < 반역의 우주 >
*아래글은 무묘앙에오의 저서 <반역의 우주>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여기는 양방향 도서관이니까요.여러분들에게 중요하게 생각되고 필요한 내용들만 얻어가시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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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개념이나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경우,세속적인 인간들은 대부분 <지금 좋은 일 해서 나중에 좋은 곳에 태어나야지>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 좋은 <곳>이라는 게 최근 10년 사이에 크게 확장되었다.
더 이상 지구상에만 한정되지 않게 된 것이다.콘텍티(외계인 접촉자)가 전하는 외계인 정보에 따른 영향이나 또는 채널러가 말하는 플레아데스나 오리온과 같은 <헛소리> 덕택이기도 하며,또는 로버트 먼로가 말하는 평행하는 다른 세계,어떤 종류의 <중간 천국> 같은 장소,또는 영혼의 학습 세계라는 의식 계층의 시스템 개념을 널리 선전한 탓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사후에 갈 곳은 무언가 무턱대고 희망을 갖게 하는 곳만이 나열되고 있다.<고차원> <천국 같은 곳> <또 다른 지적 혹성>과 같은 식이다.그런 세계에 <자 - 시시한 지구는 버리고 떠나자>며 우리들이 이동하고자 하는 범위도 최근 20년 사이에 크게 확장되었다.
예전에는 고작해야 지구의 다른 풍요로운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극락이나 지옥 말고도 다른 혹성이나 다른 차원의 세계가 당신의 사후 <쇼핑 목록>에 첨가되었다.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유쾌함을 가져다준다.
지금 세계에서 샐러리맨이나 주부인 사람들은 아무리 지루하고 절망적이라도 <다음번 윤회에선 이렇게 되겠다>는 목적을 위해,여러 가지 <심리적인 저축>을 할 수도 있다.따라서 윤회 개념의 일반화를 토대로 에오이즘이 부상했다고는 하지만,실제로는 정신<세상>이라는 세계에서 윤회를 제멋대로 자기 잇속에 따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에오이즘은 전혀 다르다.당신은 사후에 갈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멋대로 상상한다.더욱 고차원의 다른 세계나 다른 우주의 혹성,다른 차원의 세계나 천계 등,나아가 세속적인 것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좋은 집안에 태어나고 싶다,더 멋있는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더 유복하게 태어나고 싶다,더 정신적인 탐구를 할 수있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싶다>라든가 <아트만의 자각이나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로 가고 싶다> <이 다음에 태어나면 더 재미있는 생명체로 태어나고 싶다> 등등 온갖 기대와 상상이 어우러져 있다.이렇게 <죽은 다음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당신의 그 모든 희망을 철저하게 <때려부순> 것이 에오이즘의 우주론이다.
어느 차원의 세계에 가더라도 <똑같다>.모습은 바뀌어도 하는 일은 똑같다.우주의 다른 차원의 세계든 고차원의 세계든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무엇이 같은가? <만물은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만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들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우리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즐기는 것이지,즐기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것은 우리들이나 다른 차원의 지적 생물,우주인,그리고 신들을 포함해서 만약 우리들이 즐기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생물에게는 <고통 회로> 같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들이나 차원의 존재들에게는 여러 가지 고(苦)가 있다.우리들한테는 심리적인 고나 병리적인 고도 있다.그것은 몇 만 년이 지나도 전혀 개선된 적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들이 즐기기 위해서 또는 진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흔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진화하거나 즐기기 위해서라면 더욱 효율적으로 생물을 설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병이 없다든가,1년에 한 번 먹으면 된다든가,수면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하다든가,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하지만 현 상황을 직시하면 <어떤 자>들은 도무지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 역시 즐기기 위해서 생존하고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당신의 보잘것없는 <즐거움과 행복한 시간>이란,결국 당신이 살아갈 기력을 분발시키는 연료에 불과하며 당신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마약이다.<평화란,다음 전쟁까지의 준비 기간>인 것처럼 <행복이란,다음 불행까지의 휴식 기간>에 불과하다.
당신은 즐겁게 살려고 하고,괴로워하며 죽으려 한다.당근과 채찍처럼 주어지는 생(生),사(死),쾌(快),불쾌(不快)의 자극에 의해서 당신은 세뇌되어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괴로운 것을 싫어하며,즐거움을 늘리려고 한다.놀랍게도 이것이 인간의 <정신 활동>이라 불리우는 것의 전부다.<괴로움을 줄이고,즐거움을 늘리고 싶다>는 유일한 충동.모든 정치,경제,종교는 오직 이 쾌락과 불쾌라는 2가지 신호만을 모든 활동의 발단으로 삼고 있다.
당신이 살고자 해서 고통을 줄이고,쾌락을 늘리려고 하는 그 충동은 결국 당신의 <생존 연료>다.왜,연료인가?당신 자신에게서 그 연료들을 빼보면 알 것이다.즉,당신이 지금까지 당연시하던 <당신의 즐거움을 전부 뺏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 재미가 없어진다.살아갈 기력도 없어진다.그리고 당신은 죽고 싶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꼭 즐기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살아 있으니까 즐겨야지>라고 말하는 자는 빗자루로 쓸어버릴 만큼 많지만,중요한 것은 예술가든,과학자든,일반 서민이든,수행승이든,결국은 기본적인 쾌락과 고통에 격려를 받으면서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는 충동적 영혼에 불과하다.
육체는 본능적으로 생존 연료인 음식물을 끊임없이 원한다.당신의 고차원의 정신체 역시 살아 남으려고 한다.머리 또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가 된다.그곳에서는 지적 차원에서의 고(苦)가 있기 때문이다.또 감각이라는 것도 그냥 두면 기아 상태가 된다.아무것도 보지 않고,듣지 않으면 이번에는 당신의 감각이 기아에 빠지기 때문이다.음식물,정보,감각,이 모두가 당신의 생존을 위한 연료다.
그러면,왜,당신은 그것들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되는>것일까.사람들은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견해와 경험을 넓히고 심화시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읽지만,읽지 못했거나,배우지 않았거나,듣지 않았거나,보지 않았으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당신 내면에서 무언가가 죽기 시작한다.당신의 무언가가 쇠퇴하고 기아라는 이름,쇠약이라는 이름의 고(苦)가 시작되는 것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지고,감각을 먹지 않으면 에텔체가 쇠약해지고,감정을 먹지 않으면 아스트랄체가 쇠약해지고,정보를 먹지 않으면 멘탈체가 쇠약해진다.
인간의 지적 활동이라 일컫는 것과 인간성이나 정보,사랑이나 감성 따위의 발달을 <당연한 것>이라며 우리들은 믿었지만 육체를 발달시키고,마음을 발달시키고,감성을 발달시키고,사랑을 발달시키고,지식을 발달시키고,풍요롭게 풍요롭게,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마음도 풍요롭게,그렇게 말하지만...
도대체 무얼 위해서 우리들은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살아 남기 위해서>라는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다.몇 억 년씩 질질 되풀이되는 그것이 생명 활동이다.그러면,그 생명 활동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우주 만물의 활동 자체가 단순한 연명 행위일 따름이다.
게다가 다른 세계에 태어나도 생명은 그것을 되풀이한다.물론 다른 세계에서의 생명 체험은 다를 것이고 거기에서 받는 쾌락도 인간 노릇을 하고 있을 때보다 클 것이다.하지만 거기에 <반드시 끝이 찾아온다>. 그러면 당신은 또 다른 쾌락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오락과 쾌락의 탐구>를 우주에서 살아가는 방침으로 삼는 정도는 누구한테나 간단한 일이지만,시작하면 <끊지 못하는> 중독성을 갖고 있다.그만두려고 하면 엄청난 반동이 당신을 찾아온다.이는 미식가의 말로와 상당히 비슷하다.
미식가는 <더 맛있는 것,더 자극적인 것>을 찾으며 맛있는 음식을 엄청나게 먹어치운다.그러다 허기지면 <더 맛있는 것>을 찾아 나선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마음 고생이 늘어간다.그런 일에 지쳐 잠깐 쉴라 치면,엄청난 반동이 찾아온다.
당신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당신은 생명 활동 자체에 이미 중독된 것이다.
고차원의 신체라 하더라도 생명 활동 자체는 먹는 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감각,지식,경험 등을 섭취하지 못했을 때,당신에게는 <정신체의 기아>가 찾아온다.당신 또한 그만 살 수도 없고,쉬지도 못하기 때문에,정신체에 공급할 음식으로서의 정보나 오락이나 쾌락을 계속해서 필요로 한다.당신은 늘 그것을 <조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스스로 체험하고 윤회의 고(苦)로 인식해서,당신의 다음번 윤회에 그야말로 즐겁고 풍요로운 보수가 예약되어 있다 해도 거기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으며 <윤회를 단순한 헛수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것이 사인선 문하의 핵심적인 조건이다.
우리들은 인생의 발전이나 영혼의 숙성이 아닌,단순히 똑같은 중독의 울타리를 빙빙 돌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생명 활동이라는 똑같은 유원지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태어날때마다 놀이 기구는 항상 바뀌어 있겠지만,그것에도 질려서 결국은 다음 놀이 기구를 찾아 나선다.우리는 <생명 활동이라는 이름의 놀이 동산 순례자>라고 불리울 만한 유원지족(遊園地族)이 되어간다.
점차 우리들은 질려버린다.그러나 막상 그만두고 싶어도 자기 의지로는 그만둘 수가 없다.생명 활동이라는 유원지가 없으면 우리들은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사인선 문하에서의 고(苦)란,죽는 것에 대한 고(苦)도 아니며,지옥행 공포에서 오는 고도 아니다.우리들의 고란,<똑같은 곳으로 되돌아와,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다.결국은 빙글빙글 똑같은 생명 활동이라는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에게 <김 새는 것>,그것이야말로 불교의 고다.
당신이 어떤 고차원의 세계에 태어나,무언가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당신은 본능적으로 <절대 무(無)로부터 도망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당신은 움직일 것을 강요당하고 모든 차원의 음식을 먹는 일에 중독된다.
드디어 그것을 그만두고 싶어도 중독으로 인해서 죽었다가는 태어나고,쉴 틈도 없이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고,당신은 끊임없이 생물로 존재할 것을 강요받는다.게다가 당신이라는 톱니바퀴는 우주에 의해서 점점 더 고가 늘어나도록 설계되고,더 움직여서 에너지를 생산하도록 늘 <끊임없이 개량된다>.그렇게 <영원히 계속해서 살아가는> 당신의 영혼을 상상해보라.
당신이 죽어도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죽고 싶어도 영원히 죽을 수조차 없다.
2018.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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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가 본 얼간이들 1권
EO가 본 얼간이들 1권 지은이: 무묘앙에오 지음 옮김이... 한국어판 서문 이 한국어판 서문은 무묘앙에오의 제자...
201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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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가 본 얼간이들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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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
2018. 2.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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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가 본 얼간이들 1권
지은이: 무묘앙에오 지음 옮김이: 박취산, 손성애
출판사: 모색
읽어두기
저자 EO의 어법은 독자의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무엇보다 본문 전체에서 (분쇄), (해체), (죽음) 등등의 격렬한 표현이 갖는 의미는 개인의 에고를 향한 집중적인 폭격의 의미가 강하고, 특히 명사를 규정하는 데 EO가 자주 쓰는 (--라 하는 것)의 표현은 언어의 규정 속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뜻이 담겨있다.
저자 EO는 자신의 글을 단 한 자도 수정하지 않도록 당부한 바 있다. 그만큼 한국어판으로 번역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해제와 풀이의 과제가 쉽지 않았다. 본서의 번역자들은 저자 EO가 갖는 독특한 문체와 문맥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옮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의 글자체가 일본어로서도 파격적이며, 살아 숨쉬는 새로운 표현들이 많아서 자칫하면 오역될 소지를 많이 안고 있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의 경우 특별한 수정을 가하지 않고 원문이 갖는 말의 의미를 한국의 독자들이 그대로 느껴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즉, EO의 사고와 정신세계의 방대함과 심오함에 비추어 번역자의 능력으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된 부분도 많았고, 이 부분은 가급적 직역에 충실하고자 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편집과정에서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용어에 한해서만 편집자 주를 달았고, 본문에 수록된 이미지 삽화는 일본판 원서에 수록된 것을 부분적으로 반영함과 동시에 새로운 작업도 다수 들어있다. 아무쪼록 저자 EO가 전하고자 아는 메시지가 독자 여러분께 충실히 전달되는 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본문에서 저자가 자신을 (EO) 혹은(그)라고 지칭하는 부분은 글을 작성한 시점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음을 유의바람
2. 원문에서 일본어 고어로 된 표현과 방언들은 번역과정에서 표준어로 표기했다.
3. 저자 EO가 원문에서 보충설명을 했던 부분은 모두 ( )로 표기했다.
4. 편집자가 보충설명을 한 부분은 모두 < >안에 편집자 주로 표기했다.
5. 인용문 및 대화체의 경우는 " "로 표기했다.
6. 본문에서 사용한 편집방식은 일본판 원문에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저자 EO의 문장이 갖는 독특한
묘미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운 편집방식을 시도했다.
내가 도나 선에 관해 말하는 데는 몇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당신들의 탐구를 끝냄으로써, 좀더 당신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는 자주적인 순수 지성의 확립으로 갈팡질팡 이해 관계에 휘둘리는 인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바탕은 깨달음이다.
셋째는 그런 이들은 머지않아 우주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외교적 의식을 지니게 될 터인데, 내가 자주 말한 것처럼 당신이 만약 눈앞에 있는 풀 한 포기에서 빛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과도 의식을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척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을 한 우주인을 마주 대하면서도 결코 기죽거나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내 문하에서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어, 그저<있음>에 깊이 느긋하게 있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우주>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사자선>이라도 해서 <암흑>과 친해지고, 생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저 세계를 바라보듯 고요히 살며, 목적을 갖지 않고 느긋하게, 또는 자기를 되돌아보거나 분석하거나 뉘우치거나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인 채로 있으시길, 결코 <의문투성이 꼬마>는 되지 말기를...
한국어판 서문
이 한국어판 서문은 무묘앙에오의 제자 호오장이 보내 온 것입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께
이 책에는 인간과 다른 별 사람들, 인간과 종교인, 인간과 현자들이 <인류와 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부모, 하교, 종교로부터 가르침받은 대로 우주 의식과 창조주라는 것을 단순히 이미지화시켜 '신은 완전할 뿐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다'라고 기대하고 있던 독자라면 이 책으로 인해 그 희망이 산산조각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스승 EO는 '우리들은 왜 살아 있는가? 우리들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물과 모든 고차원적인 존재를 포함해, 왜 생물은 살고 죽는가? 그리고 우주 그 자체는 왜 존재하는가?' 하는데 의문을 갖고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한 탐구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이러한 물음과 대면할 때는 <자신의 맘에 드는 이야기>나 <자신의 이익이 될만한 이야기>에 달려듭니다.
그러나 EO는 진실만을 탐구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기들 형편에 맞춘 종교를 철저하게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즐거운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인간의 생명과 마음, 사랑과 상상보다 훨씬 더 큽니다. 따라서 우주의 진실이 인간의 감정을 배려하고 타협 하는 따위의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와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인간 본위의 종교라든가 마음 편한 우주의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진실만을 추구하고 탐구한 EO의 말은, 많은 탐구자들이 안고 있던 의문과 정신세계, 그리고 종교의 위선적인 모순을 보기좋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탐구자가 진정으로 갖춰야 할 모습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습니다.
기존의 종교가 말하는 가르침이나 최근의 새로운 채널링 정보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만큼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었습니다.
본서는 모든 종류의 정신세계 정보가 존재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커다란 방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EO는 채널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채널링에 의한 우주인 정보라든가 콘탁티에 의한 다른 우주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종교사기>와 같은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의 디자인이 다를 뿐 그것은 종교와 아주 똑같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신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진화된 천사계급의 존재가 지구를 인도한다'는 환상이 사람들 속에 심어져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두 한결같이 지구인보다 정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다른 별 사람들 쪽이 우리들보다도 더 <진화돼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때문에 '신이 되기는 불가능해도 천사 정도라면 내가 다시 태어날 때 가능한 일이 될지 모른다'고 신자들은 믿는 것이다.
그러나 탐구자들은 조심해야 된다. 어리석은 맹신은 이처럼 <종교 이외의 곳>에서부터 당신의 마음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채널러들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우주적이고 미래적으로 보여도 전부 <옛날이야기와 같은 허구의 천국>을 당신에게 팔고 있는 것과 같다.
채널러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저차원에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들은 정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그러니 빨리 눈뜨거라. 신나는 일을 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들은 곧 일어날 지구의 위기를 도와주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오히려 지구에 불행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보지 않는가? <단 하나의 종교>조차도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렸건만 여기에 다시, 도대체 몇 개나 더 많은 천국과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채널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지구인의 마음속 열등감을 부채질하고, 위기감을 자극시키며, 우리들에게 자학적이길 강요하는 것뿐이었다.
자, 이제 세속의 행복이 아니라, 영혼의 진화라든가, 신과 같은 능력이라든가, 만물과의 일체화라든가, 또는 이 지구를 벗어난 다른 세계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갖게 되면, 그것들은 충분히 당신의 <에고>를 만족시켜줄 목적이 된다.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던 사람이 이러한 <새로운 목적>을 누군가에 듣고 받아들이면 '드디어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며 기뻐하곤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이웃과 세계 역시 그런 이상적인 상태는 몇천 년이 흘러도 도저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감하면서, 탐구자는 현실에 실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어느새 당신은 <평범한 행복>조차도 순수하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탁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시대가 혼란해지면 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민을 위한 종교>라는 것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썩은 자가 구원받는다. 악인이 구원받는다. 평민이 구원받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비즈니스>로서 커다란 선전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 머릿수 불리는 데는 이만큼 <듣기 좋은 이야기, 귀가 솔깃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서민에게 '당신에게도 선거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종교는 '당신에게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리고 대충 말하고 나서는 <정치적인 종교활동>에 당신을 참가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라고 말하거나, '선택받은 일부 사람들밖에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말하면, 꼭 <우월감을 지닌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들만> 몰려든다.
그러니 당신 주변의 종교와 그 신자들을 잘 보기 바란다. 세속의 욕망과 정신세계의 욕망은 어디하나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욕망도 이상도, 신앙도, 목표도, 불만도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이라는, 미지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다른 지점으로 <도망치고자 할>뿐이다. 때문에 많은 종교가들이 하고 있는 것은 탐구도 아니고 노력도 아닐뿐더러, 더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다. <마음의 죽음><에고의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다. 그러나 모든 희망과 천국, 그리고 모든 미래의 이상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멈추는 도>를 탐색하는 자. 그가 진짜 탐구자다. 진짜 탐구에게는 천국도 우주인도 필요없으며 그 어떤 보편적인 사랑도 필요없다.
(EO의 말에서)
스승 EO의 저작은 전부 9권으로, 이 책은 원래 <폐허의 붓다들>(은하계 끝의 가르침)의 보완용 잡담으로 씌어진 것입니다. 남은 저작에 대해서도 한국에 계신 독자분들을 위해 번역될 예정이므로 기대해주기 바랍니다. 또 이 책이 한국에서 발행될 계기를 만들어주신 취산 선생님, 번역가 손성애님, 도서출판 모색의 권영선님, 그리고 많은 스태프들에게도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묘앙에오, 그의 삶과 사상
무묘앙에오, 36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의 촌철살인적 메시지는 그 생의 짧음만큼이나 간결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서릿발같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통속적인 상식으로 덧칠해져 있는 종교는 물론이요, 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의 맹점(상행위나 온갖 기업활동, 정신세계 등은 인간의 불행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을 놀라울 정도로 부각시키는가 하면, 이른바 속세와는 별개의 <정신세계>라 명명된 갖가지 분야에 속하는 맹신적인 종교, 심령치료, 전통적 신학, 다른 별 사람들의 문제 등을 그는 인간의 따분함과 공포심, 그리고 유치한 지성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하고 그것이 갖는 지독한 어리석음에 대해 원숭이와 장자의 현대판 대화를 통해 명쾌하게 논파해 보이고 있다.
그는 통속적인 정신세계와 종교신앙이 갖는 맹점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어리석은 바보의 짓으로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펼 수 없는 철저한 논리로 일관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정신세계 서적을 모두 헌책방에 내다팔기도 했다.
인류는 입으로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개념을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경향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럴싸한 종교, 모럴, 수행체계라면 자신의 <진짜 자유로운 영혼>을 팔아 넘기면서까지 스스로 따른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최후에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즉 도망갈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기는 사는 법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있다. 이에 대해 EO는 진짜 탐구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일, 그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도의 명백한, 그리고 근원적인 사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만이 그와 교류할 수 있다고 생전의 저자는 언급한 바 있다.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들어가는 건 간단하지만 졸업이어려운 라즈니쉬식 산야신을 사양했던 저자는 그의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단 한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것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 내용까지 포함해서.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나서 23세까지 여러 가지 신비학, 도 등을 섭렵했지만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30세 무렵부터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의 막후 정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총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모든 생명과 존재에 절망했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 후 약 1년 동안 명상센터의 명상가들이나 치료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냈다. 모두가 묵살하는 중에도 3명의 문하가 생겼다.
1993년 8월부터는 그의 지도와 방편이 갑자기 <선>으로 기울면서 선문의 본산, 각 지방 선방의 승려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 문하가 나왔으며 뒤에 그 승려는 대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명상센터와의 마찰과 반감 속에서 그의 글은 많은 명상가나 참선 수행자들에게 개인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일생 동안 단체화, 조직화, 통속적인 사제관계를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그의 선문 직계 문하로 쥬우와 호오장을 둘을 남겼다.
태양계 제 3행성에 남겨진 작품으로 <폐허의 붓다들><속 폐허의 붓다들><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폐허의 붓다들 외전><반역의 우주><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섹스와 죽음의 홈페이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