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1

밍규르 린포체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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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규르 린포체

프로필
임기영불교연구소
2019. 1. 9. 22:40

미래에 대한 너무 많은 생각으로
사람들은 더 큰 그림을 놓칩니다"

​티베트의 떠오르는 별 ‘밍규르 린포체’ 인터뷰

“마음챙김은 내면 보면서 현재순간에 머무는 것”

기사제공 :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는 다가가기 쉽고 분명한 우리 시대의 언어로 티베트 불교의 오래된 지혜를 전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왔으며, 공부와 수행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떼가르 명상 공동체(Tergar Meditation Community)를 이끌고 있다. 솔직하고 걸림 없는 유머로 다양한 사람들과 독특한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며 고통을 기쁨으로, 혼돈을 지혜로 바꾸는 가르침을 펼쳐 온 밍규르 린포체를 지난 13일 저녁, 엠티 스카이가 만나 뵈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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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게이 밍규르 린포체

오늘날 국제 재정 위기가 중대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작년에 취리히에서 마음과 생명 (Mind and Life)의 20번째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를 비롯해서 경제학, 신경 과학, 심리학, 철학, 현대 과학 등의 분야를 이끄는 지성들이 함께 모여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재정 위기를 겪는가를 질문하면서, 문제는 재정 위기가 아니라 영적 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했는데 첫 번째는 탐내는 마음이고 두 번째는 이기적인 마음, 세 번째는 무명입니다. 끊임없이 욕심을 내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바로 오늘날 재정 위기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A: 경쟁과 다른 사람을 자극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훌륭한 자극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법을 수행하면서 저는 늘 부처님처럼 되고 싶고 부처님께서 배우신 모든 것을 다 배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부처님과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이루신 지혜와 자비를 다 갖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것은 경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 자극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과 경쟁하겠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질투가 생겨나고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행복이 당신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Q: 하지만 우리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자기 아이가 일등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관여하는 모든 영역에 경쟁의 체계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가는 삶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A: 절에 가서 법당을 청소하거나 절을 올릴 때, 혹은 향이나 초를 공양할 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동기입니다. 그것이 설령 나 자신과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는 한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공덕은 아주 작고 제한적입니다. 그것이 한량없는 공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차원에서 이런 수행을 한다고 합시다. 나 자신, 내 아이들, 내 부모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해서 절을 하고 촛불을 밝힌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중생들에게까지 고루 미치는 공덕이 됩니다.

 Q: 초심자가 수행을 할 때, 이를테면 열심히 절을 하면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빌거나 아이들이나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수행이 궁극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어떻게 좀 더 한 걸음 나아간 수행을 할 수 있을까요? 

A: 자아에 대한 집착은 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정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오직 이기적인 것,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면, 그 자아가 우리의 삶에서 보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은 이기고 다른 사람은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에 대한 집착의 주된 관심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동기에 기반을 둔 행위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둘 다 지는 상황을 만들 뿐입니다. 

Q:린포체께서는 지난 10여 년 간 미주와 유럽, 아시아에서 명상 수행을 가르쳐 오시면서 자아에 집착하는 우리 태도가 삶의 많은 문제를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설령 보시와 같은 바라밀을 행한다고 해도 자아에 집착하면 그것은 독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자아에 대한 집착과 관련한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밍규르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Q: 삶의 큰 그림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의 보편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이 뭔가 멀리 있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오직 특별한 사람만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작은 깨달음 그리고 큰 깨달음이 우리에게 가능한 것입니까?

A: 사람들은 불필요한 계획을 너무 많이 세웁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90% 이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서 더 큰 그림을 놓칩니다. 

Q: 우리는 어쩌면 미래의 계획을 세울 것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을 계획하면서도 어떻게 현재의 순간의 머물 수 있을까요?

제가 두 달 전에 네팔의 고향에 갔었습니다. 첫날은 카트만두에서 차로 산까지 갔고 나머지 8일은 아무런 교통수단의 도움 없이 자연 속에서 그저 온전히 걷기만 했습니다. 50명이 그 산행을 함께 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걷기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아주 빨리 걸을 수 있습니다. 특히 광활한 계곡을 볼 수 없는 좁은 길에서 저는 더 빨리 걸을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광활한 계곡에서 걸을 때는 빨리 걸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행렬의 처음을 보면 ‘아, 한참 더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처음 출발했던 곳을 돌아보면 ‘아, 아직 조금밖에 못 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미래를 여기 가져오고 과거도 여기 가져옵니다. 그리고 미래와 과거 사이에서 현재를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좁은 길에 있을 때는 행렬의 처음도 볼 수 없고 처음 출발한 곳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더 빨리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저에게 아주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A: 그들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챙기고 현재에 머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긋하게 그저 운전하는 일과 함께 합니다. 그러면 신호도 더 잘 볼 수 있고 시야가 더 확대됩니다. 빨리 가야한다는 걱정과 스트레스로 주변의 차들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마음은 더 산란해지고 사고도 더 많이 납니다. 그러면 더 많은 딱지를 떼게 되고 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되겠지요. 

Q: 이를테면 대도시의 택시 운전사는 하루하루를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보냅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요?  

티베트 속담에 한 방울의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결국 커다란 빈 물동이를 다 채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짧게 짧게라도 여러 번 일상에서 마음 챙김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요즘은 숫자를 세어 주는 기계도 있으니 그런 것들을 활용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 30번 마음 챙김을 되새기겠다고 목표를 세워도 좋습니다. 50번이나 100번도 좋겠지요. 하루에 100번씩 마음 챙김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질 것입니다.

A: 물론 문제는 우리 마음 안에 있고 그것은 습관 때문입니다. 그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수행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습관을 쌓아왔습니다. 그러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에 명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짧게 자주 명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마음 챙김을 되새길 때마다 염주로 숫자를 세어도 좋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마음 챙김을 놓칠 때마다 ‘아, 내가 잊었구나.’ 라고 되새기면서 염주를 한 알씩 돌리는 것입니다. 단 몇 초라도 좋습니다. 

누군가가 명상을 하면서 도시의 소음에 대해 불평하자 아잔 차 스님은 “소음이 너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소음을 방해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안에만 있는 것입니까?

Q: 우리가 불법을 공부할 때조차도 문제의 어느 부분은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잔 차 스님의 말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친 원숭이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을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마음 챙김을 가져오고 원숭이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원숭이 마음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에 있으면 산을 볼 수 없습니다. 산에서 나오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강에 빠지면 강을 볼 수 없습니다. 강을 본다면 그것은 강 밖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예로 공부를 할 때 마음 챙김이 있다면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집니다. 그럼으로써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마음 챙김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찬 머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듭니다.

일상에서 이와 같은 마음 챙김은 감정과 행위에 도움이 됩니다. 때때로 당신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떨 때는 스스로 생각지도 않았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거울이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스스로를 비출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촛불과도 같습니다. 촛불은 자기 자신을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마음 챙김을 가져오는 것은 일상의 삶에 아주 도움이 됩니다.

A: 그렇다면 그것은 화를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깊이 들어가서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화를 진정으로 마주하고, 화를 진정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화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특히 화가 날 때 몸에 어떤 감각과 느낌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면도할 때 쓰는 비누 거품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잔뜩 부풀어 올라 커다랗게 보이지만 속은 온통 거품일 뿐인데,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커다란 바위가 되고 맙니다. 

Q: 설령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마음 챙김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해도 상대방을 탓하는 마음을 삭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시비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선뜻 내려놓아지지 않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작은 예로 화가 날 때 내가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화를 더 낼 것인가, 아니면 덜 낼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화로구나. 안녕! 아 내가 화가 났구나. 바로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마음 챙김은 자각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이며 현재의 순간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갈등이 소통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이나 화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많은 문제가 바로 거기에서 옵니다. 하지만 자각을 가져오면 달라집니다.

A: 마음 챙김은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멋진 방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안에는 맛있는 음식도 있고 멋진 가구도 있고 꽃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등불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불편할 것입니다. 물병을 엎질러 물을 쏟을 수도 있고 가구에 부딪쳐 혹시 귀신이 있나 생각하며 놀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등을 켜면 방은 다시 멋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때 등불은 방의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고 다만 방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뿐입니다. 방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Q: 마음 챙김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일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같은 삶의 여러 측면에 마음 챙김을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실제로 어떻게 마음 챙김을 삶 속에 가져갈 수 있을까요? 마음 챙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A: 그것은 부정적인 업을 소멸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의 원인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조건과 원인에 대한 올바른 해독제를 지금 쓴다면 미래에 그 결과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업을 정화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Q: 부정적인 업을 정화한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A: 업은 우리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업의 의미는 연기적 관계, 보편적 법칙, 원인과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업이 당신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업을 바꾸는 것은 오직 미래에만 가능합니다. 업을 정화한다는 것은 좋은 업을 짓는다는 것이고 나쁜 업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업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좋은 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적인 업을 정화시킵니다. 

Q:우리는 업장의 소멸에 대해 종종 이야기합니다. 특히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먼저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업의 의미에 대해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지도를 하고 있는 밍규르 린포체.

*인터뷰/번역: John Beaudry, 권선아(Empty Sky Film) 

A: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가 다 똑같습니다. 모두가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가족과 같습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에게 주사를 왼쪽 뺨에 맞을 건지 오른 쪽 뺨에 맞을 건지 질문합니다. 그러면 모두 양쪽 다 싫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양쪽 뺨에 똑같이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도 그 두 뺨과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느낌을 이해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우리 가족이 됩니다. 

Q: 나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 결국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행복을 원하는 것은 자애(loving-kindness)이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은 것은 연민(compassion)입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탕에는 자애와 연민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감정을 자애와 연민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대하면 한량없는 자애와 연민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불성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압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린다고 해도 그 지혜는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A: 그렇다면 그 좋아하지 않는 감정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감정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은 좋아하지 않아도 내일은 좋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느낌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하듯 느낌도 변합니다. 
 
Q: 무상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제 삶 속에서 무상에 대해서 성찰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본다고 해도 무상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그렇습니다. 그런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가르침의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없어도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구글을 찾아보셔도 됩니다. 공부할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있으니 시간이 없어 공부를 못 한다는 말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들을 삶으로 가져오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상을 볼 때마다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노력하십시오.

Q: 재가자도 사성제든, 팔정도든, 삼법인이든 가르침을 힘껏 공부하고 그것이 과연 진리인지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스스로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예를 들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할 때 왜 무상한지, 무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삶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공에 대해서 명상하고 그 가르침을 삶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것으로부터 무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상의 경험은 아주 강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말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가르침에 대해서 지혜와 수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 마음이 무엇을 하고 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 실상의 본질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부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공부는 지식에 머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지로 직접 수행을 통해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공부를 자기 삶 속의 수행으로 가져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A: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수행’입니다. 지혜는 공부에서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불법의 의미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승가든 재가든, 나이가 들었든 젊었든, 그 누구라도 먼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양의 이득은 무엇인지, 법당을 청소하는 것의 공덕은 무엇인지, 그것이 수행의 본질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Q: 한국에 오셔서 몇 차례의 법문과 인터뷰를 통해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3년간의 무문관 수행에 들어가실 텐데 마지막으로 저희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가서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발견해야 합니다.

Q: 가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A: 그것은 개념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주체도 객체도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유롭고 온전히 현존합니다. 그것은 경험할 수 있지만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것이고 극단을 초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A: 어떤 실물(thing)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양도 색깔도 없습니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닙니다.

Q: 그것은 실물(thing)인가요?

A: 좀 화려한 이름이 불성입니다. 아마 직접적인 이름은 모든 존재의 순수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선한 본성, 순수함을 무시(無始) 이래로 지금까지 지녀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무명입니다. 무명은 미혹을 낳습니다. 고통도 역시 미혹입니다. 

Q: 불성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은 때때로 자아나 어떤 것으로 오해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엇이 불성입니까?

A: 그들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본성, 즉 불성, 우리 모두가 안에 갖고 있는 선한 본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직접 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평화롭고 자애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윤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니르바나에 대한 희망도 없습니다. 윤회가 곧 니르바나입니다.

Q: 그 깨달음으로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한 생에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직접적인 깨달음(direct realiz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작은 깨달음입니다. 직접적인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좀 더 쉽고 티베트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나이 많은 거사나 보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인 경우도 많지만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마니주를 돌리고 한결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내일 죽어도 좋고, 내일 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미소 지으며 수행할 뿐입니다.

A: 티베트 불교에서는 한 생에 깨달음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을 가지고도 깨달을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즉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라레빠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밀라레빠는 스님이 아니었지만 재가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물론 밀라레빠는 산으로 들어가서 정진했습니다. 재가자도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출처] 티베트의 떠오르는 별 ‘밍규르 린포체’ 인터뷰 “마음챙김은 내면 보면서 현재순간에 머무는 것”|작성자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