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연찬문화연구소 | 21세기 마을공동체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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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마을공동체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

20.11.06

21세기 마을공동체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


이남곡(인문운동가)

 

1. 물질도 마음도 풍요롭게

 

행복의 첫째 조건은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질 때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을 위한 1차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2500여년 전에 이것을 말했습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교양을 길러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그러나 그 첫째 조건 즉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오랜 세원을 보내야 했습니다.

부족한 재화를 둘러 싼 계급 간의 대립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 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한 때 세상을 풍미한 것도 이것이 근본 배경으로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看過)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공급이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집니다.

사실 혁명적 변화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족한 시대를 살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바탕입니다.

물질은 풍부해졌는데, 정신이 진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신 진화의 방향에 대해서 공자는 두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이 말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빈이락 貧而樂’과 ‘부이호례 富而好禮’라는 두 방향의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구체적 삶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들이 깨달아가는 것이 새로운 문명으로 가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 '빈이락(貧而樂)'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영성, 생태적 가치, 자연과의 조화, 예술 등에 대해 눈을 뜨고 그러한 삶이 깊어질 때 ‘단순소박한 삶’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이호례(富而好禮)'입니다.

어떤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은 빈이락貧而樂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방법으로 부유해져서 부이호례富而好禮하는 사람들로 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됩니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됩니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을 때라야 진정한 진보 즉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2. 소통이 원활하고 사이가 좋은 마을

 

우리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인식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사이좋음의 출발입니다.
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따라서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다투는 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로 진화시키는 것이 최근의 우리나라 실태를 보면서 가장 절실한 과제로 생각됩니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립니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斷定)함이 없이 출발합니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추구하여 따릅니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이것이 정의’라고 자기 생각을 틀림없다고 단정(斷定)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정의파라고 싸우는 모습이 우리가 흔히 보는 현실입니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 진리나 정의(正義)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중학교에서 배우는 정도의 과학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지만, 실제의 삶의 태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 단정하는 습성이 몸에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입니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공자 말하기를, “자기와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나라와 사회의 정체(停滯)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자신이 틀림없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삶을 살게 되면 사이가 좋아집니다. 사이가 좋아지면 진정한 소통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인(里仁;어진 마을)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꿈이지요. 객관적 조건들은 공자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3. 의무나 규범이 아니라 기쁨으로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시도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들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요즘 빠른 속도로 확대 심화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제도’와 ‘의식’만 뒷받침되면 새로운 생산관계 즉 즐거운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토대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제가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에 인문운동가로서 큰 관심을 갖는 배경입니다.

 

개별적인 깨달음의 추구는 자칫하면 결국 ‘자기 본위’에 그치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얼마 전 협동운동가들의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출발이라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나에게는 15세기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한 ‘거룩함’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자발성• 전념(專念)• 기쁨’이 그 내용입니다.

아마 이것이 동기(動機)로 보편화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심이 될 때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자가 스스로 평생을 관통(一以貫之)했다고 하는 ‘서(恕)’와 ‘충(忠)’이라는 말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서(恕)’와 통하고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 ‘충(忠)’과 통한다는 느낌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는 충(忠)과 서(恕)는 단지 마음의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恕)는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충(忠)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恕)는 참는 것(忍)과 다르며, 충(忠)은 의무나 사명감과 다릅니다.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신장하는 것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생산력으로 전화(轉化)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상당히 갖추어진 조건과 경쟁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의 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등은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중견 기업들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꿈을 가끔 꿀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그 내부의 동력은 표현을 무어라 하더라도 서(恕)와 충(忠)의 현대적 살림이 될 것입니다.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와 경쟁을 넘어선 새로운 동기에 의한 생산력이 인간의 물질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제도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그것을 옛 사람들은 대동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길을 함께 가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