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믹 이후의 중국과 세계 - 지구와에너지
판데믹 이후의 중국과 세계
입법과 정책
지구와에너지 - 2020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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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 재학 중인 학생. 중국에 대한 관심을 발전 시켜 덩샤오핑부터 시진핑까지 중국의 대내외적 변화를 다룬 책 『거대 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을 저술했다. 서울신문의 2030세대와 인터넷 언론 슬로우뉴스에도 다양한 주제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020년 1월 23일, 중국 정부가 우한시에 전면적 봉쇄령을 내리면서 세계인이 모두 알 수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를 인식했을 때만 해도, 이 바이러스가 세계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한시, 이후에는 후베이성 전역을 봉쇄했음에도 중국에서 바이러스는 엄청난 속도로 퍼 져나가면서 국가 전체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한 셈이었다.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그치지 않고, 육로, 해로, 항공로를 통해 세계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2월에는 중동에서는 이란, 동아시아에서는 한국,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에서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지역적 감염 중심지들이 등장했다. 3월, 4월이 되면서 사태는 더욱 점입가경으로 흘렀다. 한국처럼 아웃브레이크를 막아내고 사태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사례도 없지는 않았지만, 바이러스가 퍼진 대부분 국가들은 이 새로운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침내 태평양 건너편 미국마저도 뉴욕을 중심으로 바이러스에 차츰 함락되기 시작하면서, COVID-19는 지구를 휩쓴 ‘판데믹’의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공산당 리더십의 부활
그런데, 판데믹이 세계를 뒤흔드는 와중에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초기 대응에 실패해 세계 각지로부터 질타를 받던 중국이 어느새 가장 먼저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대신 정말로 통제 불능 상태를 맞이한 것은 중국을 무시하고 비난했던 서구 국가들이었다. 우한시에 봉쇄령이 떨어질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상당수 중국인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왜냐면 실제 사태 초기 중국 공산당의 지도력과 권위가 큰 타격을 입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후베이성 지역당이 바이러스에 관한 보고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사태를 일파만파 키웠다는 비판이 봉쇄령 초기부터 중국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우한 시민들은 봉쇄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시에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가려고 했다. 중국의 인터넷 망에는 스마트폰으로 찍어 올린, 길 가던 사람이 픽 쓰러지는 모습, 병원에서 울부짖는 의사들, 공산당을 비판하는 청년의 영상이 넘실댔다. 당의 입장에서 이는 총체적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외부의 관찰자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은 사태를 신속하게 진정시켰다. 모두가 경악한 우한시의 봉쇄령 이후, 감염자 그래프는 위 방향으로 치솟다가 어느 시점부터 거짓말처럼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통계 조작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현지 분위기와 공산당의 후속 정책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상황이 통제되기 시작된 것 자체는 거짓말이 없었다. 거기에 중국에서 위기가 진정되어가는 가운데 서유럽과 미국에서 확진자가 폭증하며 의료 시스템이 붕괴하고, 중국보다도 심한 아비규환이 펼쳐지자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다. 확진자 지표로 ‘입증’된 중국의 우위로 인해 공산당의 주요한 통치기반인 애국주의가 먹혀들 공간이 생긴 것이다. 중국은 우한 봉쇄를 비롯해 혼란을 종식하기 위한 과단성 있는 조치가 현명한 대처였다고 선전했다. 이는 상황 통제에 실패한 서구 국가들에 대한 우회적 비난이기도 했다.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 세계적으로 고조된 반중감정 또한 중국인 들에게 국가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애국심을 일깨웠을 것이다. 여하튼, 1월 23일에서는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공산당은 리더십 위기에서 생존했다.
그러나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는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 공산당 리더십의 부활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는 않는다. 바이러스 이후의 중국과 세계는 어떤 식으로라도 이전과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선, 공산당이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긴 변화, 각국이 바이러스 위기에 대처하면서 새긴 경험이 판데믹 이후의 세계를 다른 식으로 재편할 것이다. 더하여, 위기는 늘 그러하듯 이미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던 변화를 더욱 격렬히 만들어 사태의 진전을 훨씬 가속한다. 그렇기에, 바이러스의 진원지이자 세계화 시대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한 중국이 세계 속에서 갖는 의미를 고찰하기에 지금보다 좋은 시기는 없을 것이다.
중국 특색의 방역 성전 : 국가의 힘과 디지털 감시 기술의 위력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이 이전의 다른 질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무서운 확산 속도에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높고 낮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질병의 확산은 병원체 자체의 특성뿐 아니라 병원체가 퍼져나가는 인간 사회의 특성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번 판데믹이 마치 전격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것은, 저가 항공의 보급으로 인한 해외여행의 대중화, 글로벌 공급 사슬을 통해 고도로 연결된 세계 경제와 같은 21세기적 요인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촘촘한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바이러스 전쟁에서 인간 문명은 상당한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인간 문명이 핸디캡만 안고 전쟁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우군도 존재했다. 세계화의 또 다른 견인차인 인터넷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인터넷 그 자체는 바이러스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성원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사회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정부는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망에 남긴 기록을 통해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손쉽게 재구성해낼 수 있었다. 이런 추적을 신속하게 실시한 나라는 바이러스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확진자의 동선을 재구성해내고 접촉자를 추려내어 빠르게 격리하는 적극적 대응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샐 틈 하나 없이 구멍을 틀어막는다면 2차, 3차 감염을 최소화하고 확산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런 추적 조치가 중국만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 싱가포르, 대만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도 모두 이런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바이러스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다(싱가포르는 이후 성공이 다소 빛이 바랬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활용된 기술들은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이 채택한 수단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안면인식 기술을 통한 개인 통제, 발열을 확인하는 드론, 시민에게 부여하는 건강 코드를 통한 출입통제 같은 수단들이 그것이다. 이런 수단들은 사회 안정을 위해서라면 프라이버시 공간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는 중국 공산당의 통치 철학이 반영된 결과 개발되어 채택된 것이다. 바이러스 위기 이전부터 중국은 데이터 기록을 수집해 각종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중 몇몇 기술은 소수민족 억압으로 악명 높았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경험에서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중국 밖의 시민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일종의 조지 오웰식 디스토피아가 구현된 SF 정도로 간주 되곤 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관념이 철저한 자유주의 국가에서 중국과 같은 감시 수단을 채택하는 것은 불가능까지는 아니어도 몹시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리라. 하지만 판데믹이 발생하면서 ‘중국 예외주의’로 여겨지던 디지털 감시 기술은 갑작스레 중국 바깥에서도 현실성을 얻게 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대만 등 유사한 수단을 채택한 국가가 압도적으로 우월한 방역 상의 성취를 거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프라이버시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중국을 필두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사생활을 희생한 대가로 공동체의 안정을 확보함으로써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앞서나갈 수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때문에, 바이러스 위기는 시진핑 정권 들어서 진행되던 중국 공산당의 감시 시스템의 효과를 입증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그 위상을 강화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바이러스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체적인 진화를 계속할 것이다. 마치 신장에서 활용되었던 수단이 이번에 전국적인 차원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소환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영국의 경찰 제도는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발전하였고 본토에는 그 이후에야 정착했다. 전염병 같은 질병은 언제나 감염원, 즉 인구 통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근대 국가는 식민지와 군대와 같이 통제하기 쉬운 대상을 필두로 신체 정보 수집과 적극적 방역 조치를 실험했다. 이 조치들은 이후 전체 사회로 확대되어 오늘날의 보건 행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 전반에서 감시 시스템이 바이러스를 기점으로 더욱 큰 정당성과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며, 그 발전이 더욱 가속될 것을 예상해볼 수 있다. 이 같은 감시 시스템이 수집한 데이터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장하는 중앙 기구 에 다시금 막강한 힘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과 사회를 읽어내는 당 의 힘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마스크 외교 : 달갑지 않은 친구
코로나 바이러스가 촉발한 위기는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바이러스는 적이 었고, 현장의 의료진들은 전사였고, 의료 행정을 맡는 기관들은 참모본부나 다름없었다. 실제 전시를 상정하고 준비한 국가 동원 체제가 잘 갖춰진 국가들(중국, 한국, 대만)이 그렇지 않은 국가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거둔 것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사람이나 조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군수품이다. 이번 ‘코로나 전쟁’의 군수품은 마스크, 방호복,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수많은 의료물자들이었다.
전쟁 수행 능력이 국가마다 차이가 있듯이, 바이러스 전쟁의 군수품을 생산하는 역량도 국가마다 큰 차이가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상당한 불균형이 있었다는 말이 더 공정한 표현일 것이다. 중국은 각종 의료물자를 생산 해내는 데 압도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고, 거기에 위기를 최초로 겪은 나라였기에 어떤 의료물자가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에 관한 지식도 갖고 있었다. 물론 ‘세계의 공장’으로서 중국이 막강한 생산 역량을 갖추게 된 것 자체는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 이래로 크게 진전된 세계화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정보화와 세계화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생산과 공급 사슬을 만들어냈고, 선진국들은 부가가치를 적게 발생시키는 단순 제조업은 임금이 싼 다른 국가들로 이전시키고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세계화 게임을 가장 잘 수행한 저임금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고, 그 덕에 그들은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났다.
세계화와 중국의 부상은 세계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도 만들었다.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인적자본 차이에 따른 양극화가 심해졌고, 그 결과 포퓰리즘이 발흥하면서 서구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해졌다. 중국이 세계화 게임에서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했기에, 생산 기지로서 역할, 혹은 잠재적 기회를 상실하게 된 국가들은 정체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구의 많은 논자들은 이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지 않았는데, 중국이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잘 나갈지라도 ‘나무의 높은 곳에 있는 과일’인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으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체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효율적인 저부가가치 영역을 이전함으로써 서구 국가들은 진짜 중요한 분야에서 더 우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고부가가치 서비스 분야와 저부가가치 제조 분야의 분업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사람, 기술의 이동이 자유로울 때 성립하는 것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국경이 닫히고, 당면한 위기에 자국부터 가장 먼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국가이성이 귀환하자 기존의 분업 체계는 순식간에 위기에 처했다. 판데믹 이전에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던 마스크가 갑자기 희귀 전략 물자가 되었고, 각국은 일선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기초적 물품을 구하고자 발 벗고 뛰었다. 이 위기를 피할 수 있던 국가는 오직 자국의 주권이 닿는 영역에 생산 시설을 확보하고 있던 제조업 강국, 특히 중국과 한국이었다. 갑자기 귀환한 ‘실제 물리 세계’의 중요성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중국의 위상을 다시금 재확인시켜주었고, 이 위상을 통해 손상된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태가 중국 내에서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중국 당국은 100개가 넘는 국가에 마스크를 비롯한 필수적 의료장비를 지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공공외교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의 막강한 생산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중국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손해보다는 이익을 더 많이 보장해줄 수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약속이었다. 사태 이전부터 중국에 우호적이던 국가들은 이 ‘마스크 외교’에 곧바로 반응해 중국에 보답했다. 중국의 지원 이후 시진핑과 중국을 극찬해준 세르비아가 대표적인 국가였다.
중국의 마스크 외교는 물론 잡음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잡음이 상수인 것처럼 진행된 것에 가까웠다. 급하게 생산된 마스크와 진단키트에는 불량이 속출했고, ‘중국 책임론’을 두고 중국이 내보인 격한 반응은 마스크 지원으로 얻은 우호적 분위기를 꺾어버렸다. 아무리 중국이 마스크를 많이 보내줘 심각하게 악화된 중국의 이미지를 만회해보려고 해도, 이미 널리 퍼진 세계 각지의 반중 정서를 되돌리는 데는 분명 역부족일 것이다. 거기에 우한으로의 국제조사단 파견에 대해 중국이 보이는 격한 반응, 각국이 중국 정부에게 청구한 배상 문제는 중국의 애국주의를 다시금 자극하고 있기에 반중감정에 관해서 만큼은 호재보다는 악재가 월등히 많은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마스크 외교가 어떠한 효과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스크 외교의 실제 효과는 중국 당국이 기대하는 정도의 효과에는 분명 미치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언제든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의료물자들을 제공할 수 있는 중국의 제조역량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들에 충분히 우호적 신호로 다가왔을 것이다. 예컨대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공들이고 있는 우방인 파키스탄이나, 미국의 제재로 인해 각종 물자 수급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란 등지에서, 정권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국이 보내는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국가들에서는, 설령 대중이 늘어만 가는 중국의 영향력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정권을 이끌어가는 엘리트들 입장에서는 중국에 호의적인 형태로 보답을 해줄 것이다. 그것이 정권과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국가들, 이전부터 중국을 경계하였던 기존의 선진국들 에서는 전혀 상반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이번 위기는 국가 간 경쟁이 본격적으로 부활하고, 국가이성이 최우선 논리로 부상했을 때 국제적 공급망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상기 시켜주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통일된 유럽의 가치에 대한 그 모든 상찬이 무색하게 중국에서 마스크 한 장이라도 더 얻고자 갖은 추태를 보였다. 타국으로 배송되는 물자를 압류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이 같은 자국우선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을 때, 중국의 생산 역량에 모든 것을 의존하려 했던 과거의 정책은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는 과거 19세기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상품, 사람의 네트워크가 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세계대분업’ 시대가 제1차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 나면서 국토 안에 각종 생산역량을 확보하고자 했던 경험과도 일치한다. 물론, 지금의 국면은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국우선주의가 부활하는 것이기에, 세계대전을 방불케하는 공급망의 재편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포퓰리즘과 지정학적 경쟁, 기술경쟁으로 이슈가 되고 있던 ‘디커플링’이 판데믹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판데믹이 초래한 의료물자 수급 문제는 세계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파급효과를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2020 : 블록화된 체제 경쟁의 신호탄?
판데믹이 중국 국내외에 초래한 파급효과는 엄청나게 거대했기에, 이 질병이 국제질서를 어떻게 새로이 재편할지 알기란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작게나마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를 논해보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모든 시나리오는 크든 작든 틀린 것으로 드러나겠지만, 그 틀리는 과정을 관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중국은 이번 방역을 수행한 경험을 살려 기존에 추진하던 사회공학 정책 도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전 인민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을 통한 실시간 정보 수집과 물리 세계를 언제나 굽어보는 CCTV 네트워크의 조합은 이미 중국에서 다른 어떤 사회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감시사회를 만드는 첨병으로 활약했다. 중국 안팎에서 여러 논란과 우려를 몰고 왔던 이 실험은 이제 바이러스 위기에 대처하여 상당한 효율성과 힘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였으니, 공산당은 더욱 거침없이 기존 정책을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조치를 시행한 중국과 그러지 못한 서구의 방역 성적 차이는 중국 국내에서 애국주의 논리와 결합하여, 공산당이 감시 시스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물론 판데믹에 맞서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는 중국뿐이 아니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유사한 선택을 했고, 국가에 패닉이 찾아오자 서구 국가들도 정도는 다를지라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감시와 추적 시스템의 진화가 오직 중국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뚫어내고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실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국가다. 그렇기에, 공산당은 판데믹 이후에도 무한한 데이터 접근권을 바탕으로 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중국과 분명 다른 속도로 이 실험을 이어갈 세계의 여타 국가들과 중국 사이의 제도적 거리는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반면,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이 절실한 국가들 위주로 중국식 모델이 채택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제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공급망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중국의 지원에 체제의 생존을 의존하게 된 국가들, 특히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그간 의지해온 국가들은 앞으로도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게 될 것이다. 파키스탄, 이란과 같은 국가들이 그렇고, 중앙아시아나 러시아도 그런 나라들일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자본과 물자가 자국의 정권과 체제를 유지해주게끔 하는 데 결정적일 수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세르비아는 물론이고 기존 유럽연합 체제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헝가리와 같은 국가를 중심으로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특히 이제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쇼핑센터로서 중국 수요가 갖게 된 높은 위상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판데믹으로 다급해진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는 수요가 반등하기 시작한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세계의 공장이자 쇼핑센터로서 중국의 높아진 위상에 더 이상 빠 져들면 안 된다는 여러 서구 국가들의 반발로 이어질 것이다. 자체적인 제조 역량을 확보하고, 자국 혹은 자국의 확고한 영향권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구축하고자 하는 시도가 늘어날 것이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이 중국과 더 강한 디커플링을 추진할 것을 의미한다. 물론 중국에서 생산기지를 전면 철수하는 일이 당장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견인차로서 중국이 갖는 위상은 다소 퇴색되고, 부분적으로 블록화된 경제의 리더로서 위상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중국이 추진하는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사회실험과 연계하자면, 판데믹은 이미 진행 중이던 미중 양국 간의 경쟁구도를 더욱 심화시켜, 수렴되던 체제의 거리를 더욱 벌려놓고, 하나의 단위로 기능하던 세계 경제를 더 블록화된 모습으로 재편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미 태동하고 있던 ‘블록화된 세계의 체제 경쟁’이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마침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2020년대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 의존해온 국가, 특히 한국에 힘든 10년이 될 것이다.
– 임명묵
지구와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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