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인류를 사랑한 애국자 : 여론칼럼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한용운, 인류를 사랑한 애국자
며칠 전 광복절이 지나갔다. 이 날에 자주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는 식민지 시대 ‘민족 지도자’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일제와의 일체 타협을 거부한 걸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다. 만해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한 명인 사회주의자 홍명희(1888~1968)를 비롯한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 인사들을 최근 몇 년전까지도 거의 언급할 수 없었던 데에 비해서 만해의 ‘사후의 운명’은 비교적으로 순탄했다. 군사 정권들도 만해를 민족독립운동가로서 기리지 않을 수 없었고 1960~80년대의 재야 지식인들에게도 만해는 애국애족과 권력자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한마디로 만해의 모습은 수난 시기의 민족 영웅의 상이었다.
민족 영웅. 만해가 일찌기 1900년대 후반부터 근대적인 민족주의의 이념을 익히고 1920~30년대의 민족 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해의 가장 귀중한 측면은 바로 서구가 만든 근대적 민족주의를 동시에 뛰어넘을 줄을 알았던 것이었다. 만해가 늘 ‘석가모니는 인도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전우주를 위하면서 깨달았다’고 강조하는 등 그는 종교에 있어서는 국경과 민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일본 불교의 국가주의적인 편향을 조선에서 불교의 세계주의적·우주주의적 원리의 원리로 비판한 사람은 만해뿐이었다. 러·일 전쟁 직전에 러시아 연해주를 여행하고 일제의 강점 직후에 만주를 여행했을 때 민족 운동가들에게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두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긴 만해는 민족주의적 폭력이 때로 무고한 사람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해를 비폭력주의자인 간디(1869~1948)와 자주 비교하는데, 그는 ‘민족 단결’의 이념 이면에 도사리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예리하게 지적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1861~1941)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근대성의 비판자’였던 만해는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인류가 지나가야 할 낮은 발전의 단계로 생각했다. 그는 소작 쟁의를 일으켰던 농촌 빈민을 지지하고 미래의 이상을 ‘불교적 사회주의’(소유욕 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설정하는 등 ‘종교적 진보주의자’로서의 성향을 지녔다. 그럼에도 그는 소련을 ‘지상낙원’쯤으로 생각했던 그 당시의 좌파와는 달리 소련에서의 종교 탄압에 대한 자료를 발표하는 등 실천의 문제점에 대한 예리한 비판 의식을 가졌다. 소련뿐만 아니고 우파의 숭배 대상이었던 서구에 대해서도 만해는 지적인 관심을 가지면서도 늘 비판적으로 봤다.
대다수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서구 국가들의 ‘국민 통합’이나 ‘국민 정신’을 선망했지만, 만해는 1910년대 초기부터 ‘국가와 종교의 미신으로 민중의 정신을 세뇌시켜 무고한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만드는’ 서구의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의 모든 우파 지식인들이 서구의 사회진화론적 등식대로 약육강식을 ‘절대 법칙’으로 생각했지만 만해는 ‘인종의 우열을 논하지 않는 세계주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일제로부터의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서구로부터의 지적인 독립,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
폭력 숭배와 민족주의 등의 서구적 관념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등으로 점철된 근대사를 생각한다면 만해의 존재는 삼복더위 속의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한국학자로서 만해의 사상이 나라밖에서 잘 알려져 있지 못한 점을 아쉽게 여기지만, 필자가 알고 있는 탈(脫)근대 사상가로서의, 정신적인 아나키스트로서의 만해의 모습이 국내 저술에서마저도 잘 찾아지지 않은 것은 더욱 아쉽다. 그래도 한국 역사 속에서 근대의 환상을 넘어선 박애주의자 만해가 있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