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동향 : 김훈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
강성민 기자
승인 2004.04.28
독자들이 발견한 '수난받는 영웅'...정치적 행위로서의 책읽기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이문열과 황석영이었다. 1990년대는 군소작가들이 많았는데 그 중 꼽으라면 신경숙이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이건 매우 불확실하다. 문학이 워낙 바닥세이고 반짝이는 신예와 약진하는 소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스타 부재현상을 한방에 날리며 등장한 원로급 신인작가가 있다. 바로 유려한 에세이스트로 잘 알려진 김훈(56·사진)이다.
그는 2001년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로 동인문학상, 2004년 ‘화장’(문학사상사 刊)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기성문단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야말로 문단에 김훈 현상이 생겨난 셈이다. 아울러 이런 문학적 배경과 맞물려 우리 사회에 ‘김훈 읽기’라는 신드롬이 생겨나고 있다. ‘칼의 노래’라는 작품이 2001년에 이어 또 다시 화제가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이후 손에 쥔 책,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단식투쟁 중 탐독한 책이라 알려지면서 온갖 매체의 가십란을 도배했다. 이것은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과 그의 시대’가 오늘날과 유사하게 묶여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 yes24
‘대통령도 읽었다’는 기사 전까지 20만부였던 ‘칼의 노래’ 판매량은 이후 10만부 이상이 더 팔려나갔고 최근엔 텔레비전 사극의 시나리오로도 각색되고 있다. 이런 유명세에 힘입어 올 2월 출간된 그의 신작장편 ‘현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도 벌써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3만부 판매를 기록중이다. 그 동안 김훈을 대표해왔던 기행산문집 ‘자전거여행’이 지난 5년간 6만부 팔린 것에 비하면 ‘소설’과 ‘에세이’의 장르차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상승세다.
‘대통령도 읽었다’ 보도 후 10만부나 더 팔린 ‘칼의 노래’
‘김훈 현상’은 기본적으로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의 선전 효과다. 하지만 이것을 매체의 영향력에 기대서 해석할 수만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요즘 인문교양서들의 베스트셀러화 과정엔 ‘정치적 행위로서의 독서’의 제도화가 동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행위’와 ‘독서’는 세가지 차원에서 연관된다. 첫째, 책을 읽는 것으로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 혹은 우량 가치를 함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을 어떤 특정 가치의 담지자로 간주하고, 책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책을 읽었다는 ‘경험 그 자체’에 중요성을 부과한다. 이럴 때 독서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둘째, ‘권력효과’ 혹은 ‘후광’에 의존한 독서다. 김훈의 소설이 널리 읽힌 데엔 대통령의 언설, 대중매체의 역할, 권위있는 문학상의 효과가 도사리고 있었다. ‘칼의 노래’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 선택한 책이었고, 그 책의 무성한 후광에 노출된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는 인터넷 서점의 독자서평들에서 확인된다.
마지막 하나는 아직까지 물렁물렁한 상태인 잠재적 가치를 다수 대중이 읽고 토론함으로써 그것을 확고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게 하는 ‘참여’로서의 독서행위다. 정치로 따지면 정책결정과정에의 참여인 셈인데, 이를 통해서 독자대중은 가치의 생산자로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칼의 노래’의 정치적 메타포는 허무주의
그렇다면 이런 세가지 차원을 통해 어떤 가치가 함양되고 있는 것일까. 김훈의 ‘칼의 노래’의 배경은 임진왜란, 즉 전쟁터다. 전쟁터는 적과 동지로 양분된 공간이다. 주인공은 이 이항대립의 어느 하나에 안주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적과 동지의 구분을 없애고, 이순신을 적과 적이라는 이중 적에게 둘러싸인 뿌리없는 존재로 만든다.
첫번째 적이 일본군이라면 두번째 적은 “승승장구하는 힘있는 신하를 두려워해 여차하면 베어버리려는 선조임금”이다. 我와 彼我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소속감도 목표도 불확실하며, 희망을 삶의 엔진으로 삼는 이념적 존재가 되기란 매우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허무주의’가 ‘칼의 노래’의 메타포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그는 허무주의를 ‘성숙한 남성’의 액세서리로 치환한다.
이순신은 허무의 파도 위에서나마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위한 순간순간의 결단들을 해나가고, 여기서 바로 ‘영웅’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이 부분이 ‘칼의 노래’가 우리 시대와 가장 강렬하게 겹치는 부분이 아닐까. 김인환 고려대 교수는 “이광수는 ‘원효대사’를 쓰면서 자기가 원효인 체하였으나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쓰면서 결코 그가 이순신인 체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성공이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작가가 임금을 향한 충의로 자신을 희생시킨 ‘국사’ 속의 ‘영웅’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인인 오늘의 ‘고뇌하는 인간’의 한 모델을 이순신이라는 역사인물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완성해나갔다는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역사와 상상의 절묘한 균형감각”은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고.
이순신으로 표상된 오늘날의 ‘어떤 영웅’은 절망을 회피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심진경 씨는 “1990년대의 댄디적인 작가들이 생산한 ‘착한 가부장 이미지’나 하루키 류의 ‘심약한 남성’과는 다르게 생존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며 ‘여성’으로 표상되는 약한 것에 대한 이끌림을 피하는 남성적 스타일도 호응을 얻는 것 같다”라고 해석한다.
개인 속의 역사, 역사 속의 개인
평단의 진단을 더 들어보면, 김훈 신드롬의 원근 배경이 드러난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김훈의 이들 작품에선 심미적 주체 혹은 존재의 심미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유임하 한국문학연구소 연구원), 소설사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이 잃어버린 ‘서사성’의 회복에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것(황국명 인제대 교수), ‘존재를 응시하는 허무주의 탐미성’이 ‘폭포’처럼 드리워 있다는 것(손종업 선문대 교수) 등이다.
이들 평자들의 진단은 어쩌면 김훈 소설미학의 최대 장점이자 치명적 한계점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손 교수는 김훈의 허무주의적 탐미성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기반으로 해 “결국 단순하고, 리얼리즘적 경지에선 비껴서 있다”고 평가한다. 단순 혹은 리얼리즘의 궤도 외부에 그가 서 있다는 것, 탄핵정국의 와류 속에서 거대한 독자들의 城을 이들 작품이 증축해냈다는 것은 병치될 수 있는 풍경일까. 혹시 이것 역시‘바람’이 변화시키는 풍경처럼, 하나의 ‘바람-풍경’ 같은 건 아닐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바람-풍경이든 아니든 간에 시간이 멈춘 역사로서의 인간(이순신, 우륵)이 바로 이곳의 ‘정치적 인간’으로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독한 내면을 획득한 영웅’은 이순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을 사는 한 개인-대통령에서 촛불시위에 나서는 평범한 가장까지-의 비유다. 김훈 읽기가 자명하게 ‘정치적 행위로서의 독서’가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그가 독자들에게 ‘발견’된 것은 요행이 아니다. 광화문 입구에 이순신 동상이 서 있듯, 2004년 오늘 김훈이 바로 거기, 메타포로 서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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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04.28
독자들이 발견한 '수난받는 영웅'...정치적 행위로서의 책읽기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이문열과 황석영이었다. 1990년대는 군소작가들이 많았는데 그 중 꼽으라면 신경숙이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이건 매우 불확실하다. 문학이 워낙 바닥세이고 반짝이는 신예와 약진하는 소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스타 부재현상을 한방에 날리며 등장한 원로급 신인작가가 있다. 바로 유려한 에세이스트로 잘 알려진 김훈(56·사진)이다.
그는 2001년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로 동인문학상, 2004년 ‘화장’(문학사상사 刊)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기성문단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야말로 문단에 김훈 현상이 생겨난 셈이다. 아울러 이런 문학적 배경과 맞물려 우리 사회에 ‘김훈 읽기’라는 신드롬이 생겨나고 있다. ‘칼의 노래’라는 작품이 2001년에 이어 또 다시 화제가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이후 손에 쥔 책,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단식투쟁 중 탐독한 책이라 알려지면서 온갖 매체의 가십란을 도배했다. 이것은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과 그의 시대’가 오늘날과 유사하게 묶여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 yes24
‘대통령도 읽었다’는 기사 전까지 20만부였던 ‘칼의 노래’ 판매량은 이후 10만부 이상이 더 팔려나갔고 최근엔 텔레비전 사극의 시나리오로도 각색되고 있다. 이런 유명세에 힘입어 올 2월 출간된 그의 신작장편 ‘현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도 벌써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3만부 판매를 기록중이다. 그 동안 김훈을 대표해왔던 기행산문집 ‘자전거여행’이 지난 5년간 6만부 팔린 것에 비하면 ‘소설’과 ‘에세이’의 장르차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상승세다.
‘대통령도 읽었다’ 보도 후 10만부나 더 팔린 ‘칼의 노래’
‘김훈 현상’은 기본적으로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의 선전 효과다. 하지만 이것을 매체의 영향력에 기대서 해석할 수만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요즘 인문교양서들의 베스트셀러화 과정엔 ‘정치적 행위로서의 독서’의 제도화가 동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행위’와 ‘독서’는 세가지 차원에서 연관된다. 첫째, 책을 읽는 것으로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 혹은 우량 가치를 함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을 어떤 특정 가치의 담지자로 간주하고, 책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책을 읽었다는 ‘경험 그 자체’에 중요성을 부과한다. 이럴 때 독서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둘째, ‘권력효과’ 혹은 ‘후광’에 의존한 독서다. 김훈의 소설이 널리 읽힌 데엔 대통령의 언설, 대중매체의 역할, 권위있는 문학상의 효과가 도사리고 있었다. ‘칼의 노래’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 선택한 책이었고, 그 책의 무성한 후광에 노출된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는 인터넷 서점의 독자서평들에서 확인된다.
마지막 하나는 아직까지 물렁물렁한 상태인 잠재적 가치를 다수 대중이 읽고 토론함으로써 그것을 확고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게 하는 ‘참여’로서의 독서행위다. 정치로 따지면 정책결정과정에의 참여인 셈인데, 이를 통해서 독자대중은 가치의 생산자로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칼의 노래’의 정치적 메타포는 허무주의
그렇다면 이런 세가지 차원을 통해 어떤 가치가 함양되고 있는 것일까. 김훈의 ‘칼의 노래’의 배경은 임진왜란, 즉 전쟁터다. 전쟁터는 적과 동지로 양분된 공간이다. 주인공은 이 이항대립의 어느 하나에 안주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적과 동지의 구분을 없애고, 이순신을 적과 적이라는 이중 적에게 둘러싸인 뿌리없는 존재로 만든다.
첫번째 적이 일본군이라면 두번째 적은 “승승장구하는 힘있는 신하를 두려워해 여차하면 베어버리려는 선조임금”이다. 我와 彼我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소속감도 목표도 불확실하며, 희망을 삶의 엔진으로 삼는 이념적 존재가 되기란 매우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허무주의’가 ‘칼의 노래’의 메타포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그는 허무주의를 ‘성숙한 남성’의 액세서리로 치환한다.
이순신은 허무의 파도 위에서나마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위한 순간순간의 결단들을 해나가고, 여기서 바로 ‘영웅’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이 부분이 ‘칼의 노래’가 우리 시대와 가장 강렬하게 겹치는 부분이 아닐까. 김인환 고려대 교수는 “이광수는 ‘원효대사’를 쓰면서 자기가 원효인 체하였으나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쓰면서 결코 그가 이순신인 체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성공이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작가가 임금을 향한 충의로 자신을 희생시킨 ‘국사’ 속의 ‘영웅’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인인 오늘의 ‘고뇌하는 인간’의 한 모델을 이순신이라는 역사인물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완성해나갔다는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역사와 상상의 절묘한 균형감각”은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고.
이순신으로 표상된 오늘날의 ‘어떤 영웅’은 절망을 회피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심진경 씨는 “1990년대의 댄디적인 작가들이 생산한 ‘착한 가부장 이미지’나 하루키 류의 ‘심약한 남성’과는 다르게 생존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며 ‘여성’으로 표상되는 약한 것에 대한 이끌림을 피하는 남성적 스타일도 호응을 얻는 것 같다”라고 해석한다.
개인 속의 역사, 역사 속의 개인
평단의 진단을 더 들어보면, 김훈 신드롬의 원근 배경이 드러난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김훈의 이들 작품에선 심미적 주체 혹은 존재의 심미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유임하 한국문학연구소 연구원), 소설사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이 잃어버린 ‘서사성’의 회복에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것(황국명 인제대 교수), ‘존재를 응시하는 허무주의 탐미성’이 ‘폭포’처럼 드리워 있다는 것(손종업 선문대 교수) 등이다.
이들 평자들의 진단은 어쩌면 김훈 소설미학의 최대 장점이자 치명적 한계점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손 교수는 김훈의 허무주의적 탐미성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기반으로 해 “결국 단순하고, 리얼리즘적 경지에선 비껴서 있다”고 평가한다. 단순 혹은 리얼리즘의 궤도 외부에 그가 서 있다는 것, 탄핵정국의 와류 속에서 거대한 독자들의 城을 이들 작품이 증축해냈다는 것은 병치될 수 있는 풍경일까. 혹시 이것 역시‘바람’이 변화시키는 풍경처럼, 하나의 ‘바람-풍경’ 같은 건 아닐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바람-풍경이든 아니든 간에 시간이 멈춘 역사로서의 인간(이순신, 우륵)이 바로 이곳의 ‘정치적 인간’으로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독한 내면을 획득한 영웅’은 이순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을 사는 한 개인-대통령에서 촛불시위에 나서는 평범한 가장까지-의 비유다. 김훈 읽기가 자명하게 ‘정치적 행위로서의 독서’가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그가 독자들에게 ‘발견’된 것은 요행이 아니다. 광화문 입구에 이순신 동상이 서 있듯, 2004년 오늘 김훈이 바로 거기, 메타포로 서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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