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한용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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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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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1][2]
사망
1944년 6월 29일 (향년 65세)
본관
별칭
아명은 한유천(韓裕天)
본명은 한정옥(韓貞玉)
아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
활동 분야
학력
동국대학교 1기 졸업
종교
저서

1. 소개
1.1. 생애의 기록1.2. 유년 시절에서 출가까지1.3. 출가 후 독립운동 참여까지1.4. 민족대표 33인1.5. 출소 후 입적까지
2. 대처승 인정 논란
2.1. 왜 대처승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나?2.2. 불교 사회주의자 논란
3. 생전의 일화
3.1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봉변3.2. 굴라재의 신불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3.4. 개만도 못한 놈들3.5. 조선일보 지지자
4. 항일운동
4.1. 사진 합성을 당하다
5. 친일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6. 작품
6.1. 작품속 글귀들

1. 소개[편집]

한국의 시인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속명은 유천(裕天), 호는 만해.[5]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 태생. 동국대학교는 1기 졸업생인 그를 높이 기려 만해관, 만해광장, 만해시비 등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1. 생애의 기록[편집]

1.2. 유년 시절에서 출가까지[편집]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출가의 원인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하급관리였던 부친 한응준(韓應俊)이 의병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를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 출가 후 독립운동 참여까지[편집]

1905년 영제(永濟)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으로 이때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6] 법호는 만해(萬海)였다.

이후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그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4. 민족대표 33인[편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1.5. 출소 후 입적까지[편집]

3년을 복역한 뒤 출소, 민족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며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다림이 무색하게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 만 64세 나이로 입적했다. 사인은 뇌졸중. 왜인지 체온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마침내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대한민국 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한용운이 생전에 지은 시집 님의 침묵은 그 불교적인 비유와 상징적 수법으로 지금도 초ㆍ중ㆍ고등학생 국어책에 수록되어 있다.

제자 중에는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 스님이 있다.

2. 대처승 인정 논란[편집]

대처승[7]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노자도 자기 칼럼에서 스님이나 그 외의 종교인들도 사랑을 할 권리가 있다고 했으니, 시대를 앞서갔다. 한용운 본인도 대처승이 되었는데, 원래 출가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 1명(한보국)을 두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승려 시절인 1931년에 재혼하여 외동딸(한영숙)을 보았다. 첫째 아들인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둘째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 행사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북동의 심우장을 지켰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아버지처럼 이를 보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떠났다는 야사가 있었으나, 이는 한영숙 씨가 부인했다.

한용운의 대처승 인정 요구는 주장할 당시에도 파격적인 소수파였고 해방 이후의 한국 불교의 주계종파가 된 조계종도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아 현대에도 소수파다. 태고종이 대처승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파이다.

2.1. 왜 대처승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나?[편집]

한용운은 이른바 '근대적 불교'를 추구하고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대처승의 인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한용운의 근대적 불교 추구는 사회진화론적 색채가 보인다고 비난받으며 불교 사회주의라거나[8] 하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용운이 근대적 불교를 추구한 것은, 일제침략기를 거쳐 불교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세대이며 동시에 그가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진화론은 사상적인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독립운동과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준 학파이기 때문이다.

2.2. 불교 사회주의자 논란[편집]

이른바 '불교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불교의 근본 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하다못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유명한 뉴라이트 학자 안병직도 한용운의 '불교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평했으며 관련 글 내내 한용운을 '선생'으로 칭하고 있다.

또한 한용운 처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안창호와 캉유웨이가 있으며 애국 계몽 운동 등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딱히 사상적인 문제를 엮을 이유는 없다.

3. 생전의 일화[편집]

3.1.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봉변[편집]

한용운이 스님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고 싶었던 한용운이 배를 타고 가다가[9]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동료 스님들과 같이 있었던 한용운을 한 무리의 조선청년들이 포위했다. 당시 일제의 앞잡이나 친일파들이 스님으로 많이들 위장했다하는데 진짜 스님인 한용운이 엉뚱하게 친일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 맞아죽을 위기에 처한 스님들이 '우린 단지 중일 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청년들은 쉬이 의심을 풀지 않았고 분위기는 험악해져갔다. 그때 한용운이 "우릴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주시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들이 친일파가 아님을 안 청년들이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3.2. 굴라재의 신불[편집]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쏜 사람을 욕하거나 허둥지둥 대지도 않고 침착한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을에 도착하였으며, 병원에서 무마취수술을 할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치료를 해준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한의학에선 풍두선이라고 칭함) 증상이 생겼으며, 뼈 속까지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편집]

어느 날 한용운이 친일 주지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 우연히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입니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3.4. 개만도 못한 놈들[편집]

이광수최린 등의 유명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파로 전향하자 격노한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와서 "이보게, 만해.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놈들이 있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용운은 "벽초, 그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홍명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냐고 따지자 한용운은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네. 하지만 이들은 민족과 조국을 배신했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개들이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하겠나?"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홍명희는 "이런, 개에게 큰 실례를 범했구만."이라고 수긍하고는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옛날부터 있던 드립이었다

3.5. 조선일보 지지자[편집]

살아생전 조선일보를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이던 1930년대 초 뿐만 아니라 폐간하던 1940년까지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했다. 조선일보가 친일 행적을 남긴 1938~1940년에도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한 사실을 보면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친일 매국 신문으로 변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4. 항일운동[편집]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10],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11]. 일례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 저입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께선 이 육당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정인보, 이광수-홍명희에게도 있다.

3.1운동때 김윤식이 독립청원서 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한 얼마 뒤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우연의 일치[12]로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자 한용운은 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칭찬하는듯 까는듯 하는 말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 만해 선생의 시는 타고르의 영향을 꽤 받았고,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라는 제목의 시를 쓴적도 있다.

이광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하루는 그의 집인 심우장에 젊은 시절의 이광수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행동을 잠시 관찰하더니 "네놈은 나라를 배신할 인물이니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라!"하고 일갈하면서 내쫓았다고 한다.

하루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린이 딸[13]에게 돈을 쥐어주자 대노하면서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님의 침묵을 비롯해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들은 대단히 여성적인 어조로 쓰였지만 한용운 본인은 대단히 호방한 사람이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도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4.1. 사진 합성을 당하다[편집]

같은 민족 대표였지만 30년대 이후 자치론, 40년대엔 친일이라는 전형적인 변절 루트를 밟은 박희도와의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것도 합성 사진과 함께.

파일:/image/shindonga/2008/08/25/200808010500005_2.jpg

(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 씨 :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女: 키-스를 해주어요.
한: 웨!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
女: 점잔이 다 무어 말너비트러진 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응.
이와가티 섹씨가 조르나 한용운 씨는 그래도 끔적아니하고잇습니다.
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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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 씨 :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
‘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웃긴 것은 박희도의 묘가 바로 한용운 선생 묘로부터 관리사무소 쪽으로 좀 더 내려오면 있다는 것이다. 이도 악연인가.

5. 친일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편집]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대처문제와 관련하여 '헌의서'와 '건백서'를 보냈다. 건백은 정부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殿이란 경칭을 사용했고 조선왕조를 전 한국(前韓國)이라고 표현했다.[14] 또한 1937년 '지나사변과 불교'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을 옹호하고 총후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에 건백서을 올린 것은 당시에는 불교개혁이 절실했고, 개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또한 건백서 제출만으로 만해를 친일로 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사변과 불교' 글은 만해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글은 당시 불교지 편집장이 였던 이종욱[15]이 쓴 것임을 전 만해전집 편집자였던 최범술 씨가 확인했다고 한다. 참조 기사

따라서 이 논쟁은 오래전 1979년도에 끝난 논쟁이다.

6. 작품[편집]

6.1. 작품속 글귀들[편집]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糸)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1] 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2]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출생지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현 홍성읍 오관리 남문마을)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마을은 만해가 7살 때 이주하여 성장한 곳이라 한다.[3]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심우장[4] 이양공파(夷襄公派) 33세손[5] 萬海 또는 卍海. 둘 다 큰 바다, 혹은 가득 찬 바다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6] 그러니까 '용운 스님' 인 것이다. 다만 일부 소개글에는 법명을 보통이름(속세시절 이름)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한용운이라는 이름이 워낙 잘 알려져 있다보니 이걸 본명으로 오해해 생긴 오류로 보인다.[7] 결혼을 하여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 속에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동안 많이 늘어났다. 현재는 기혼승이라고 부른다.[8]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자기의 독재와 줄타기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창한 동명의 이론과는 다르다.[9] 이때 당시에 이런 비범한 일화도 있었다. 난생 처음 백인을 본 한용운이 러시아인 선원을 보고 "여봐라, 이 아라사 뱃놈아! 넌 웬 키가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하냐! 그리고 눈은 또 왜 그런 색깔이냐!"하고 외쳤고, 이를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선원들이 히죽거렸다고 한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백인들을 깔보고 그런 건 아니고, 처음으로 세계에 발을 딛는 젊은 청년으로서의 기개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시비거는 투가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한테 신기하다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한거라서, 배 안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한다.[10] 북반구에서는 태양이 남쪽 하늘에, 남반구에서는 북쪽 하늘에 치우쳐 뜨기 때문에 북반구의 집은 볕이 드는 남향으로 짓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심우장을 지으면서 조선총독부 꼴도 보기 싫다고 북쪽으로 집을 돌렸다. 그래서 여름엔 무진장 덥고, 겨울엔 무진장 추웠다고 한다.[11] 일제는 호적을 조사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가 도장만 가져와 찍으면 성북동의 땅 '20만 평을 그냥 주겠다고 했을 때도 도장이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12] 1919년 암리차르 학살사건 발생에 대한 항의였다.[13] 이 딸하고도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한용운이 신문을 보던 중 일본 글자가 나오자 딸이 '아버지, 이 글자는 무슨 글자에요?'라고 여쭤보니 한용운 왈, '그건 글자도 아니다. 몰라도 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글자인 가나(仮名)의 뜻이 만해선생 말대로 임시로 사용하는 글, 가짜 글이라는 의미라는 건 함정.[14] 출처필요[15] 일제 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