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5

신학,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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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하


카이노스

2017. 1. 3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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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 하

저자 우찌무라 간조

출판 크리스챤서적

발매 2002.01.10.상세보기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 하'는 로마서 8장부터 로마서 16장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로마서 연구 하'는 '로마서 연구 상'과 함께 총 60강으로 되어 있다. '로마서 연구'에 있는 모든 내용은 우찌무라 간조가 1919년 5월부터 1923년 6월까지 만 4년 동안 도쿄에 있는 일본 위생 회관 강당에서 했던 직강을 기반으로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우찌무라 간조는 로마서를 깊이 연구하며 로마서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비록 이 책과 우리 사이에 100여 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존재하지만, 우찌무라 간조와 우리 사이에 로마서라는 다리가 있으니 우리는 이 다리를 통하여 우찌무라 간조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우찌무라 간조의 기독교 사상은 사실 여러 위인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인도의 간디는 우찌무라 간조가 기독교인으로서 전쟁을 반대하고 피스메이커로 살아가도록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러일전쟁 즈음에 톨스토이의 '회개하라'라는 논문을 읽고,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으로서 러일전쟁을 반대하였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인으로서 러일전쟁을 반대한 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와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사상을 매우 가치있게 여기며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평생 노력하였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우찌무라 간조가 같은 예수를 믿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대조해보면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다른 믿음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를 통해 톨스토이와 우찌무라 간조가 어떤 부분에서 서로 대조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톨스토이는 철저한 무정부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애국심이 투철하여 일본의 정치제도에 철저하게 순응하였다. 즉 톨스토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국가와 정부에 저항하였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 정부 역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이 잘 담겨 있는 로마서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이다.



어느 시대의 어떤 정치 조직하에서도 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은 반드시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권력에 복종하여 질서를 존중하는, 평화와 순종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라고 권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훈계는 어떤 시대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바울의 이 국권 복종론은 12장의 사랑 및 원수 사랑의 가르침에서 저절로 나온다.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길이라면, 좋은 국가에 대해서나 나쁜 국가에 대해서나 복종과 사랑으로 대하고, 비록 포학한 정권하에 있더라도 오히려 나를 학대하는 권력자에게 복종하고, 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252p.


로마서 13장을 강해하며 우찌무라 간조는 나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사랑의 구현으로 보았다. 설령 국가가 너무 악하여 그 악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국민은 피의 혁명이 아니라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변혁을 꿈꿔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우찌무라 간조의 국가관은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된다. 톨스토이는 국가 그 자체가 필요악이며, 국가를 통해 모든 악이 발생하기 때문에 국가라는 체제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래서 개인이 국가를 의지하지도 말고,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거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우찌무라 간조는 국가의 권력에 순응하는 게 평화의 길이라고 보았지만, 톨스토이는 국가의 권력에 저항하는 게 평화의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우찌무라 간조와 톨스토이는 종말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일단 톨스토이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인간 예수에 주목하지 예수의 부활과 재림 같은 죽음 이후의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톨스토이가 생각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이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는 톨스토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다 믿으면서 예수의 부활과 재림 역시 로마서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



"지금은 너희의 때, 암흑의 세력이다"라고 예수가 말씀하신 시대다. 지금은 밤이며 박쥐, 올빼미, 두더지 등 어둠을 사랑하는 동물들이 날뛰는 시대다. 그러나 닭 울음이 한 번 새벽을 알리고 의의 태양이 솟아오르면, 이른바 야생 동물 곧 야간에 활동하는 동물은 햇빛을 피하여 구멍과 굴 속에 숨으며, 그 대신 종달새는 하늘을 향하여 치솟고, 비둘기 소리는 숲 속에 들리며, 물총새는 물장구를 치고, 우주는 바뀌어 낮의 세계가 된다. -287p.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재림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강조하셨다. 예수의 초림은 겸손하였지만, 예수의 재림은 강렬할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예수의 재림이 현실의 부조리를 전복시킬 가장 강력한 사건임을 믿었다. 그가 보기에 비정상의 정상화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가 장차 재림했을 때 가능한 체제 전복을 자신의 살아생전에 시도하였다. 그렇기에 톨스토이의 급진적 사상에 저항하는 반대자들이 러시아 종교계와 정치계에 많았었다. 그들이 보기에 톨스토이의 사상은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와 우찌무라 간조의 차이점은 톨스토이는 예수의 4복서에만 집중하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복음서뿐만 아니라 바울서신에도 집중한다.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이 4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책인 로마서를 일본인들에게 강해할 수 있음을 큰 기쁨이자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누구나 로마서를 읽어야 한다. 오늘을 위하여 또는 후일을 위하여 누구나 로마서를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나타나 있는 복음의 길을 거쳐야 이 책에 나타나 있는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모든 일보다 먼저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가장 큰일이다.
-343p.


우찌무라 간조는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로마서를 읽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로마서에 삶과 죽음, 정의와 평화,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인간 예수의 숨결을 거의 느낄 수 없는 로마서의 성자 예수에 대해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편집한 신약성경을 보면 서신서는 아예 없고, 복음서에 있는 수태고지와 예수의 기적과 부활을 빼버렸다.

이처럼 우찌무라 간조와 톨스토이는 같은 예수를 믿었지만 서로 다른 국가관, 종말론, 성경관을 가졌었다. 우찌무라 간조와 톨스토이의 지성과 영성에 감히 비길 수도 없는 내가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조금 부당하지만 내 생각에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이라는 한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톨스토이는 계몽주의라는 한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을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끼친 막대한 해악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기에, '로마서 연구'에서 인도의 간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하지만, 1919년에 조선의 3.1운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중앙아시아의 인도보다, 바로 옆에 있는 조선이 훨씬 더 가깝고 조선에서 3.1운동이라는 평화시위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찌무라 간조는 그 사건을 의미 있게 평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3.1운동은 일본의 국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찌무라 간조가 그 당시 일본의 그 어떤 사람보다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치게 일본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했다. 반면에 톨스토이는 국가라는 한계는 넘어섰지만, 지성과 합리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충분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내용들로만 예수의 삶을 재구성하였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인간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믿을만한 것일까? C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도 미치광이의 언행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는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여서 고난 당하였는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진실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톨스토이는 인간 이성의 한계에 갇혀, 초월성이 거세된 자신만의 예수를 믿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찌무라 간조와 톨스토이의 글을 읽으며 그의 한계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동일한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의 마음으로 그들의 한계 너머에서 새롭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