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5

[월드 리포트] 톨스토이의 향기를 찾아서 > 특파원 현장보고 > 국제 > 뉴스 | KBS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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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톨스토이의 향기를 찾아서입력 2010.11.28 (10:02)특파원 현장보고




다음기사단순한 삶이 장수 비결
<앵커 멘트>



톨스토이의 작품 한 두편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대문호인데요.. 올해가 타계한 지 100년이 되는 해라구요?

네.. 82살 고령에 집을 나와 기차여행을 하던 중 병을 얻어 시골 기차 역장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작가의 마지막 길 치고는 쓸쓸했죠?

네.. 그렇네요.. 타계 100주년을 맞은 러시아 현지 추모분위기와 톨스토이의 삶을 김명섭 특파원이 소개해드립니다.

<리포트>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4백여 킬로미터, 기차가 멈춰선 곳은 레오 톨스토이시입니다. 백 년 전 톨스토이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병을 얻어 이곳 아스타파보 역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인터뷰>스테파노바(레오 톨스토이시 주민) : "의사를 비롯해 많은 분이 톨스토이를 걱정해 찾아왔으나 그를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기차역장의 방안에 그가 누웠던 침대와 유품이 그대로 남아 전시되고 있습니다. 아스타파보 역에는 톨스토이가 탔던 열차를 복원해 전시,운행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톨스토이에 대한 추억에 잠깁니다.

<인터뷰>알렉시브나(레오 톨스토이시 주민) : "기관차를 보면 기차 소리가 나면서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오는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을 딴 레오 톨스토이시에서는 어린 아이들까지 톨스토이에 대한 얘기를 기억합니다.

<인터뷰>니키타, 미샤(레오 톨스토이시 초등학생들) : "(톨스토이 할아버지가) 기차 타고 오던 중에 감기 걸려 아스타파보 역에 내렸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레오 톨스토이예요"

야스나야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의 옛저택, 발명왕 에디슨이 그에게 보내 준 축음기에서 톨스토이의 육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녹취>톨스토이 육성(에디슨 축음기로 녹음) : "아이들아 너희들에게 좋을 일이 있을 거야. 내가 세상에 없어도 이 노인이 하는 얘길 항상 기억해라. 안녕."

톨스토이의 집은 그의 흔적을 찾으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빕니다. 그가 태어난 침대 겸용 소파, 바로 그 앞의 소박한 책상에서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부활과 같은 주옥같은 명작들을 탈고했습니다. 무려 15개 언어에 능통했던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영어와 독일어뿐 아니라 일본어 서적까지 눈에 띕니다.

백 년 전에도 그의 집은 찾아오는 손님들로 넘쳐났지만 톨스토이는 말년에 화려한 생활을 뒤로 하고 늘 혼자 사색하고 고민했습니다. 60대에 들어서 톨스토이는 그의 과거의 문학 업적까지 부정하며 성서 연구에 전념합니다.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농노와 서민들의 삶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 지가 그의 최대 고민이었습니다.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그가 가진 땅과 재산을 농민들에게 나눠주려는 시도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부인과 끊임없는 불화를 겪다 마침내 82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인터뷰>나탈리아(톨스토이 저택 안내위원) : “톨스토이는 화려한 저택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평범한 자유의 생활을 찾아 떠납니다.”

톨스토이의 가출에 러시아뿐 아니라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가출 후에도 그의 행방을 추정하는 글이 러시아와 유럽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습니다. 쫓기듯 남쪽을 향해 여행하던 톨스토이는 곧 폐렴에 걸려 기차 여행을 중단하고 아스타파바의 역장 집에서 머물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맙니다. 톨스토이가 마지막 남긴 말은 "진리를 사랑한다." , 그가 막내딸에게 미리 작성한 유서에는 출판권을 딸에게 넘기되 저작권료를 받지 말고 책을 출판하라는 간절한 부탁이 남아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지 3일째 되던 날, 그의 유해는 열차편으로 고향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습니다. 서민들로부터 유리된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다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반국가주의적 사상 때문에 제정 러시아로부터도 철저히 감시당했던 톨스토이, 그러나 그의 죽음엔 많은 사람이 함께했습니다. 톨스토이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관을 메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도 함께했습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6천여 명, 군중집회를 염려해 러시아 정부가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기차편 운행을 중지했지만 많은 서민이 그의 마지막 길을 동행했습니다.

톨스토이의 묘지는 유언대로 아주 소박하고 꾸밈없이 그의 저택 안 한 오솔길 귀퉁이에 마련됐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백 년 뒤, 톨스토이를 그리워하는 문인 등 예술인들과 러시아 대중들이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톨스토이 서거 백주년을 추모하는 정부의 공식 행사는 없었지만 대신 조촐한 기념식이 마련됐습니

<인터뷰>블라지미르(톨스토이 박물관장/톨스토이 고손자) : "이 기념일에 모두가 톨스토이가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사람들은 무덤 앞에 꽃을 놓으며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영혼을 추모했습니다.

<인터뷰>마리야(툴라 시민) : "톨스토이의 깊이와 영원함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인터뷰>이타카바시(일본 대학교수) :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자연과 땅의 작가입니다."

젊은 시절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도박에 탐닉했으나 말년에는 서민을 향한 사랑과 청빈의 삶을 추구했던 톨스토이. 그 인생 자체가 모순 덩어리였지만 그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순수한 작가이자 위대한 사상가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쿠라예프(톨스토이문학상(삼성전자 후원) 수상자) :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을 통해 순수한 정신을 내보인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또 성직자입니다."

톨스토이의 직계 고손자인 블라지미르 톨스토이 박물관 관장은 할아버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평가합니다.

<인터뷰>블라지미르(톨스토이 박물관장/톨스토이 고손자) : “톨스토이는 심리 깊은 곳을 파고들어 인간의 죽음, 종교, 가족생활 등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썼습니다.”

무소유와 서민을 향한 사랑을 강조했던 톨스토이의 철학과 사상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넘어 지금까지 러시아인과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82살에 떠난 자유를 향한 또 다른 구도 여행, 몸은 비록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톨스토이의 자유로운 영혼과 정신의 여정은 오늘도 사람들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녹취>톨스토이 녹취 : "만일 인생이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죽음과 육신의 고통에서 자유로와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