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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쓴 공약삼장, 논란 재연?
3·1독립선언서 공약삼장 ‘한용운-최남선’주장 논란 재연
2019.04.23(화) 20:30:53홍주신문(uytn24@hanmail.net)추천하기 0 공유하기
박찬승 등 일부학자 “최남선이 다듬었을 것으로 추정”주장 논란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의 작성자(집필자)에 대한 논란이 또 다시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가 저서 ‘1919’ 출간기념회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을 쓴 사람이 만해 한용운이 아니라 최남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또 논란에 휩싸이는 분위기이다.
박 교수는 “공약삼장은 행동지침을 담은 부분이어서 본문에 비해 단호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고 밝히고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의 경찰·검찰·예심판사·법정심문기록을 훑어보니 한용운은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며 “천도교 쪽에서 내용을 주문하고 최남선이 문장을 다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50년 만에 또 다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 공약삼장, 한용운이 추가해 작성
반면 지금까지 “3·1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추가해 작성했다”는 주장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은 선언서의 핵심이고, 3·1독립운동의 이념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특히 3·1독립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일제의 재판과정에서도 공약삼장의 표현과 의미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제기됐었고,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에 비해 민족의 자주독립에 더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던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었을 뿐 아니라 각종 자료에도 ‘공약삼장’은 만해가 작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만해 한용운의 제자였던 김법린은 그의 회고록(‘신천지’제1권 3호, 1946)에서 ‘독립선언서’의 작성 배경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면서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만해가 수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지 못하겠다”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본 만해 한용운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공약삼장’을 추가해 ‘독립선언서’를 수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썼을지라도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이후 1969년 민족대표 33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 등이 “만해가 ‘공약삼장’을 추서(追書)했다”는 증언을 했고, 이것이 다시 효당 최범술 등이 중심이 된 만해 전공학자들에 의해 ‘한국독립운동사’에 수록되면서 학계에서는 “만해가 ‘공약삼장’을 썼다”는 사실이 통설로 굳혀졌다.
■ 일부학자 한용운-최남선 갑론을박
하지만 1969년 3월 문인 조용만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공약삼장’은 만해가 쓴 것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의 작품”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또 신용하 서울대 교수도 “△최 린의 자서전에 의하면 만해가 육당의 기초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기초하겠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최 린이 거절한 점 △최 린은 만해에게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맡기지 않았고 ‘독립선언서’를 수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만해는 스스로가 자신이 추가했다는 사실을 주장한 바가 없다”는 이유를 들며 “공약삼장은 최남선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와 관련해 김상현 교수는 “△만해가 선언서 인쇄 이전에 초고를 보았으며 수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점 △만해가 일본인 판사에게 독립선언서의 내용 중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이 있어 개정한 사실이 있다고 답변한 점 △이갑성, 김관호, 최범술 등이 만해가 ‘공약삼장’을 추가했다고 증언한 점”을 이유로 들며 신용하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나아가 육당 최남선의 변절, 공약삼장에 스며 있는 불교의 삼보정신과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에 스며 있는 내용이 불교의 세세생생의 사상이라는 점까지 제시했다.
한편 신국주 교수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공약삼장의 과격한 문구를 육당이 사용할 수 없으며 △육당이 독립선언서에서 ‘최후에 착수가 곧 성공’이라며 다소 온건적 태도를 고수했던 점 △한용운도 공약삼장에 대해 추궁 받은 점 △한용운이 선언서를 수정할 시간이 있었다는 점 △한용운이 선언서를 개정까지 했다는 점”등을 들며 김상현 교수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에 반해 홍일식 교수는 ‘3·1독립선언서 연구(1989)’라는 논문에서 “증언 등과 같은 간접적 자료로 만해가 ‘공약삼장’을 썼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당시의 상황논리로 볼 때 ‘공약삼장’을 포함한 독립선언서 전부를 최남선이 썼다”고 주장했으며, 박걸순 박사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기도 했다.
■ 독립선언서도 한용운이 윤문
하지만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 동국대 김광식 박사는 “한용운의 3·1운동은 지금껏 그의 민족운동 연구 분야의 중심을 이루었다”며 “그중에서도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한용운이 작성해 추가했다는 것, 그리고 독립선언서도 한용운이 윤문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라며 “이렇듯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대한 논란과 연구가 가열된 것은 육당 최남선의 친일 행적과 그에 반해 만해 한용운의 항일 행적이 극명하게 대비됐음에서 연유한다. 육당과 같은 나약하고 친일적인 인사가 공약삼장을 쓸 수 없었으리라는 감성적인 판단이 작용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쓰고 추가했다는 다양한 회고와 증언이 나왔던 것”이라고 밝히고 공약삼장의 집필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과 검증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학자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대한 고찰(불교평론 8호, 2001)’에서 “자유·비폭력을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은 불교의 해탈, 불살생, 보편·도덕주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따라서 이 같은 ‘공약삼장’의 필자는 만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박 교수는 “기미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만해(1879∼1944) 한용운이 아닌 최남선이 집필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공약삼장에는 만해의 번민과 수양, 득도와 사색 등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주장했다.
박노자 교수는 2004년 ‘기미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의 집필자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 “공약삼장은 매우 간단·명료하지만 독립선언서의 ‘눈동자’일뿐 아니라 만해의 사상과 인격, 구도와 신념의 축약판”이라며 공약삼장의 자유·비폭력·국제주의 이념과 만해 사상을 비교 검토한 결과 “불교의 해탈, 불살생, 박애, 보편, 도덕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 온 만해가 자유, 비폭력, 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의 필자였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박 교수에 따르면 당시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만해도 양계초(1873∼1929)로부터 자유의 개념과 사회진화론 등 영향을 받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불교사상의 ‘해탈’을 통해서 수양적·정신 발전적·비폭력적 방향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최남선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의 대대적인 살육이 갓 끝난 1918년의 글에서조차 ‘강한 것은 도덕적이며, 약한 것은 패륜적’이라는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즉 “자유적 정신과 그 정신의 발휘를 늘 강조하는 만해의 사상과 사회진화론자이자 국가·민족중심주의자였던 최남선의 사상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약삼장에 나타나는 비폭력 정신은 평소 폭력·살생을 거부하는 불교의 기본 정신에 확고한 기반을 두면서도 일제의 살인적·불법적 행위를 부정하고 거부했던 만해의 사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과 자유를 지향하고 종교적 비폭력주의에 투철했던 만해 한용운이 공약삼장의 폭력방지 사항을 집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교적 구도 정신에 입각한 한용운이 눈앞에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타협을 거부할 힘을 충분히 가졌음에 비해, 물질적 강권(强勸)에 매료된 최남선이 결국 강자 일본과 타협하고 말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조용만, 신용하, 홍일식, 박걸순, 박찬승 등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김상현, 신국주, 김광식, 박노자 등이 주장하는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썼다’는 의견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일반화 보편화돼 있다. 이는 자주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현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을 자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조차 서명하기를 꺼려했던 육당 최남선이 썼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공약삼장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집필자 문제와 관련해 만해 한용운 집필설이 학계의 대다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1960년 후반부터 몇몇 학자들에 의해 최남선 집필설이 제기돼 왔다. 이번 논란도 박찬승 교수가 저서 ‘1919’출간기념회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을 쓴 사람이 만해 한용운이 아니라 최남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재연되고 있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홍성지역 향토사학자는 물론 만해 한용운 관련 단체에서도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기념사업회 이소용 회장은 “신문보도를 봤는데 분명하게 정리된 명백한 사실에 대해 왜곡된 주장을 펴는 의도가 무엇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만해 한용운 선사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3·1독립선언서 公約三章(공약삼장)은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이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로 기록하고 있다.
올해로 3·1독립운동 100돌을 맞았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누가 썼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진정한 3·1독립운동 정신을 후세에 계승한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학자들의 올바른 평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