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바탐방 무료구제병원 - 건치신문
원불교 바탐방 무료구제병원
이동호
승인 2008.07.09 16:39
[캄보디아 친구들 이야기] 20
한국의 원불교는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불교가 '참선'과 '기복'의 양면성을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앉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원불교는 현실의 생활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원불교 교당은 시내 한가운데 있고 복지시설과 학교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무님들은 마치 카톨릭의 수녀님들처럼 결혼대신에 평생을 공부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원불교는 비교적 일찍 NGO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한국의 마더데레사'로 잘 알려진 박청수 교무에 의해 난민지원사업이 시작된 것이 벌써 20년, 영국의 할로재단과 함께 지뢰제거운동에 처음 동참한 것이 1989년이고 바탐방지역의 전쟁고아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위한 지원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9년입니다.
지금까지 원불교의 박청수재단을 통해 수 억원의 지원금과 물품들이 지뢰제거사업, 지뢰피해자지원사업, 전쟁고아지원사업, 난민지원사업, 의약품지원사업 등을 통해 캄보디아에 지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탐방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한 무료구제병원이 2003년 3월 2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원불교의 박청수재단을 통해 수 억원의 지원금과 물품들이 지뢰제거사업, 지뢰피해자지원사업, 전쟁고아지원사업, 난민지원사업, 의약품지원사업 등을 통해 캄보디아에 지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탐방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한 무료구제병원이 2003년 3월 2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바탐방은 원불교와 좀 특별한 인연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 곳의 교무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박청수 교무님의 자서전을 통해 그분이 처음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게 된 일에서부터 무료병원을 세우고 최지운 교무님을 파견하게 된 사연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당이 위치한 곳 인근에 고아원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고아원이 박청수재단이 처음 바탐방의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던 곳이며 그 고아원의 설립자이며 지역유력인사인 손수베르씨와의 인연으로 그 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구제병원부지 2천 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교당과 병원건물 2개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2년 2월에 시작된 공사는 3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박청수 교무님과 최지운 교무님의 헌신에 힘입어 이듬해 완공되었고 지금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습니다.
병원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조용한 동네로 정문 앞으로는 논밭도 제법 펼쳐져 있는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오전 8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제법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병원건물 앞에 자리잡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낮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빨리 진찰을 받고 약을 타서 다시 그들의 집으로, 혹은 일터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가끔은 한 시간, 두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모토를 타고, 또 걸어서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 이른 시각에 병원에 도착해서 병원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녀노인들부터 젊은이들, 그리고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이, 처자를 데리고 온 이도 있습니다. 또 붉은 승복을 입은 스님도 있습니다.
병원건물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병원이라고 하기엔 턱없는 시설입니다. 진료소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과거 7,80년대 도시변두리 달동네와 공단 등지에서 활발했던 주말진료소는 병원갈 형편이 안되었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큰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료장비래야 청진기가 고작이고 요즘 우리나라의 어느 개인병원에나 다 있는 초음파조차도 갖추지 못한 장비수준은 캄보디아의 의료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게다가 진료를 맡고 있는 현지의사는 이미 나이가 60대를 넘은 것처럼 보입니다. 주사놓는 것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고 오직 청진기만으로 환자를 보는 늙은 캄보디아의사. 옛날 베트남에서 의사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그는 문진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비교적 정학히 짚어낼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투약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진료과정을 보고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상설진료소이기는 하지만 진료수준은 거의 주말진료소와 다름 없습니다.
이틀 후, 프놈펜에서 방문했던 한국의사들이 세운 기독교선교 무료병원인 헤브론병원과 여러가지로 비교가 됩니다. 병원건물이야 두 곳 모두 훌륭하지만 헤브론병원은 초음파와 혈액검사기 등 기본적인 진단장비와 검사장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20년 이상 개업의사로서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진 훌륭한 의사들이 진료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캄보디아 사람들이 가진 생활습관과 풍토병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이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바탐방의 원불교구제병원은 묵묵하게 오랜 시간을 지켜온 교무님들의 헌신에 의해 훌륭하게 가꾸어져 왔지만, 한편으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아빠가 진료를 받는 동안 아이는 병원 앞마당의 그네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엄마 곁에서 아빠를 기다립니다. 병원은 쉬기에 참 좋은 공간입니다. 게다가 한 쪽으로는 아주 널찍한 공터가 있어서 교무님들은 여기에 배구코트와 농구대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아마 주민잔치나 체육대회라도 여는 모양입니다. 진료활동 외에도 한글학교와 컴퓨터교육, 그리고 아주 가난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생활지원사업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공터 일부를 잘라서 건물 한 두 채를 더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희들같은 손님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새 공간이 생기면 다른 사업을 더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지겠지요. 건물이 더 들어서더라도 배구코트는 남겨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언제라도 와서 운동할 수 있게요.
무료구제병원의 운영에 대해서만큼은 교무님들도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투약에 의존하는 좁은 진료범위, 예산의 문제로 인한 현지의사 고용문제 (젊은 의사를 구하려면 급여를 두 배 이상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짧은 진료시간(대개 오전에 진료가 끝납니다), 갈수록 조금씩 감소하는 환자 수 (요즘은 하루 평균 50~70명) 등등..
어떤 일이든 변화와 발전이 없으면 매너리즘과 함께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는 법이지요. 한국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아니어서 다를지 모르지만 이 곳이 현재 처한 상황은 두 분의 교무님에게 크나큰 숙제를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오는 지원금은 한정되어 있고, 그 빠듯한 예산으로 의약품 구입과 의사급여 등 병원도 운영해야 하고 게다가 교당도 운영하면서 포교활동과 주민사업까지도 해야하는 바탐방의 원불교교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금의 확대일까 아니면 변화와 발전을 위한 어떤 특별한 계기일까? 이런 저런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기에 섣부른 제안이나 계획을 말씀드리기는 어려웠습니다. 헌신과 봉사의 마음 하나로 이 머나먼 이국에 와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교무님들을 그저 존경의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지금 교당이 위치한 곳 인근에 고아원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고아원이 박청수재단이 처음 바탐방의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던 곳이며 그 고아원의 설립자이며 지역유력인사인 손수베르씨와의 인연으로 그 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구제병원부지 2천 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교당과 병원건물 2개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2년 2월에 시작된 공사는 3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박청수 교무님과 최지운 교무님의 헌신에 힘입어 이듬해 완공되었고 지금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습니다.
병원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조용한 동네로 정문 앞으로는 논밭도 제법 펼쳐져 있는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오전 8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제법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병원건물 앞에 자리잡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낮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빨리 진찰을 받고 약을 타서 다시 그들의 집으로, 혹은 일터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가끔은 한 시간, 두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모토를 타고, 또 걸어서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 이른 시각에 병원에 도착해서 병원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녀노인들부터 젊은이들, 그리고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이, 처자를 데리고 온 이도 있습니다. 또 붉은 승복을 입은 스님도 있습니다.
병원건물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병원이라고 하기엔 턱없는 시설입니다. 진료소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과거 7,80년대 도시변두리 달동네와 공단 등지에서 활발했던 주말진료소는 병원갈 형편이 안되었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큰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료장비래야 청진기가 고작이고 요즘 우리나라의 어느 개인병원에나 다 있는 초음파조차도 갖추지 못한 장비수준은 캄보디아의 의료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게다가 진료를 맡고 있는 현지의사는 이미 나이가 60대를 넘은 것처럼 보입니다. 주사놓는 것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고 오직 청진기만으로 환자를 보는 늙은 캄보디아의사. 옛날 베트남에서 의사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그는 문진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비교적 정학히 짚어낼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투약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진료과정을 보고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상설진료소이기는 하지만 진료수준은 거의 주말진료소와 다름 없습니다.
이틀 후, 프놈펜에서 방문했던 한국의사들이 세운 기독교선교 무료병원인 헤브론병원과 여러가지로 비교가 됩니다. 병원건물이야 두 곳 모두 훌륭하지만 헤브론병원은 초음파와 혈액검사기 등 기본적인 진단장비와 검사장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20년 이상 개업의사로서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진 훌륭한 의사들이 진료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캄보디아 사람들이 가진 생활습관과 풍토병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이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바탐방의 원불교구제병원은 묵묵하게 오랜 시간을 지켜온 교무님들의 헌신에 의해 훌륭하게 가꾸어져 왔지만, 한편으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아빠가 진료를 받는 동안 아이는 병원 앞마당의 그네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엄마 곁에서 아빠를 기다립니다. 병원은 쉬기에 참 좋은 공간입니다. 게다가 한 쪽으로는 아주 널찍한 공터가 있어서 교무님들은 여기에 배구코트와 농구대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아마 주민잔치나 체육대회라도 여는 모양입니다. 진료활동 외에도 한글학교와 컴퓨터교육, 그리고 아주 가난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생활지원사업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공터 일부를 잘라서 건물 한 두 채를 더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희들같은 손님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새 공간이 생기면 다른 사업을 더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지겠지요. 건물이 더 들어서더라도 배구코트는 남겨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언제라도 와서 운동할 수 있게요.
무료구제병원의 운영에 대해서만큼은 교무님들도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투약에 의존하는 좁은 진료범위, 예산의 문제로 인한 현지의사 고용문제 (젊은 의사를 구하려면 급여를 두 배 이상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짧은 진료시간(대개 오전에 진료가 끝납니다), 갈수록 조금씩 감소하는 환자 수 (요즘은 하루 평균 50~70명) 등등..
어떤 일이든 변화와 발전이 없으면 매너리즘과 함께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는 법이지요. 한국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아니어서 다를지 모르지만 이 곳이 현재 처한 상황은 두 분의 교무님에게 크나큰 숙제를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오는 지원금은 한정되어 있고, 그 빠듯한 예산으로 의약품 구입과 의사급여 등 병원도 운영해야 하고 게다가 교당도 운영하면서 포교활동과 주민사업까지도 해야하는 바탐방의 원불교교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금의 확대일까 아니면 변화와 발전을 위한 어떤 특별한 계기일까? 이런 저런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기에 섣부른 제안이나 계획을 말씀드리기는 어려웠습니다. 헌신과 봉사의 마음 하나로 이 머나먼 이국에 와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교무님들을 그저 존경의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