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알라딘: [전자책] 박노자의 만감일기



알라딘: [전자책] 박노자의 만감일기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0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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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00자평(15)리뷰(42)

제공 파일 : ePub(14.32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367쪽, 약 19.6만자, 약 5.1만 단어


책소개
<당신들의 대한민국>,<나를 배반한 역사>등의 지은이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부교수 박노자가 인터넷 블로그에 쓴 자신의 일기들, 다양한 고민과 번뇌의 흔적들을 모은 글 모음집.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나를 넘어', '우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경계를 넘어'등 총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 자신이 일관되게 고민해온 사회적 문제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상적인 고민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 둘은 때로는 따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기도 한다. 그는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해 고민하고, 귀화인으로서 민족주의와 국가를 고민한다.

때로는 학자적 통찰로,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 인간 박노자가 바라본 한국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일기를 쓰는 의미에 대하여: 번뇌가 깊어지면 ‘꽃’이 핀다

1부 나를 넘어

조국애란 무엇인가 | 타향살이, 불안의 일상화 | 거절의 미학 | 부처님 오신 날 | 절망을 느끼는 순간 | 너무 쉽게 망각된 그들, 고려대 출교자 | 자리가 사람을 명예롭게 만든다? | 학문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근대적 ‘민중’에 대한 생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노르웨이 직장의 송년회 | 성욕과 종교에 대한 짧은 생각 | 등수 없는 학교의 추억 |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 ‘친절’이라는 국제자본주의체제의 코드 | 불만과 불안의 수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 우리들의 중독(들) | 마광수 교수의 연구실을 보고 | 인권, 아직 오지 않은 ‘근대’ |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 <효자동 이발사>와 지배?복종의 심리 |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

2부 우리를 넘어

한국 유학생들의 핸디캡 | ‘테러리스트’는 욕인가? | <겨울연가> 열풍, 그렇게 자랑스럽기만 한가? | ‘악플’의 문화 | 한국 자본주의 미래 비관 | KTX 여승무원의 단식을 보며 | 여행잡감, 영어를 못(안)하는 유럽 | 포섭, 감옥보다 더 무서운…… |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행위 | 한국의 자유주의, ‘말의 잔치’ |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 | 전교조 죽이기, 골프 버금가는 한국 지배계급의 취미 | 아니, ‘백인’이 뭐가 좋다고 이러는가? | 대학 신문을 보다 눈물 흘리다 |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한다 | 내가 현실정치를 평생 못할 이유 |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 | 한국사 교과서를 쓰면서 역사 속의 선악을 생각하다 | 숫자놀이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 내가 방효유 선생을 내심 좋아하지 않는 이유 | ‘삼성관’에서 회의를 해본 느낌 | 제 손으로 제 무덤파기, 과잉성 혹은 예방성 폭력 | 강정구 선생 유죄 판결, 혹은 절망의 시간 | 우리가 도대체 그때 노무현에게 왜 기대를 걸었을까? | ‘바람직한 우익’, 한국에서 가능할까?

3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민족주의자’를 포용하는 방법 | 희망과 절망 사이, 북한 학자들과의 ‘만남’ | 사회주의자가 ‘예수쟁이’ 구출에 사활을 걸어야 할 이유 | 국기에 대한 쓴웃음 | 통일,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 한국 사랑? | ‘일심회’ 판결 유감 | 의사 폴러첸의 강의를 갔다 와서 | 귀화인도 ‘한국인’인가? | ‘노무현’에 대한 가장 위험한 착각 | ‘국민’, 해체되지 않는…… | 미국의 주요 일간지가 전하는 북한의 ‘진짜 의도’ | 김일성 대학 기숙사의 국제 사랑 이야기 | 황장엽의 회고록을 읽다가…… | ‘그들’의 ‘민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 북한 인권 문제를 생각한다 | ‘반미’보다 차라리 ‘반미제’ | 역사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면? | 극단주의는 왜 위험한가 | 남이 하면 ‘우경화’, 우리가 하면? | 김영남, 그리고 ‘일본인 납치’ 문제 | 월드컵, 스포츠, 그리고 국가 |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 북한은 과연 ‘깡패 국가’일까? | 불교는 평화의 종교? |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4부 경계를 넘어

러시아의 ‘인간 사냥’ | 악의 일상성에 대한 명상 | ‘고향 방문’의 슬픈 회상 | 노르웨이 국치일 | 발이 빠지기 쉬운 징검다리 | 원칙을 배반한 타협의 결과 | 일본 잡감 | 일본공산당원이 서대문 감옥을 둘러보는 심정? | ‘진짜 사회주의’? 슬랴프니코프와 트로츠키 | 배울 것만 배우자 | 노르웨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오해 | 사담 후세인과 서구인들의 인종주의 | 러시아에 스킨헤드라는 망종이 생긴 까닭 |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의 발흥 조짐? |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이유 | 후쿠오카 단상, 의아한 평화 | 성개방과 보수성의 관계? | 일본공산당을 생각한다 | 트로츠키 아이러니 | 모리타 어민의 죽음 | 다민족 국가 미국의 진일보한 인재등용책 | 미 제국이 몰락해버린다면……? | 언어를 빼앗긴 자의 언어, 프랑스 무슬림 청년들의 봉기


책속에서



매우 독선적으로 보이는 전통시대 지배계층, 사대부의 문화에서도 '대의명분'과 얽힌 지점에서는 '거절'이 잘 통했다(물론 미화할 순 없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이상은 '둥글게 둥글게' 관계를 잘 관리하면서 '거절'로 거래처를 화나게 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는, '민간 외교관'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p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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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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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와 불교사 등을 연구했고 지금은 근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에 몰입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1·2) 『우승열패의 신화』 『주식회사 대한민국』 등이 있다.


최근작 : <전환의 시대>,<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총 87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얼굴
사적 번뇌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소통의 세계를 꿈꾼다

‘노르웨이의 한국인’ ‘우리 시대의 반항아’ 박노자는 궁금하다. 대체 어째서 인터넷의 악플들은 사라지지 않는 건지, 한국에서 유난히 ‘거절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뭔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에 표를 몰아주고, 경제만 살리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궁금증을 박노자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간 인터넷 블로그에 쓴 그의 일기들은 이러한 ‘번뇌’의 흔적이며,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바로 그 흔적을 모은, 최초의 사적 기록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에는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그간 너무 민감해서 혹은 너무 개인적이라서 신문, 학술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단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걱정, 민족주의와 국가,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한 염려까지, 다양한 소재와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고민들은, 때로는 학자적 통찰을 담아,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일기를 들춰볼 때 느껴지는 은근한 즐거움과 함께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넓은 관심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접기







개념없는 정부에 따끔한 일침을 가할 이런 책을 많이 많이 읽혀야되지 않을까?
순오기 2008-05-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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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은 한국인의 아픈 지적들이 가득
소금연못 2008-12-0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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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아프게 찔러주시는 박노자 님, 책 잘 읽었습니다.
zikomo 2011-05-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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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의 전작들의 연장이자 확장. 순발력과 시의성을 겸비한 공유와 소통. ▩
befreepark 2011-01-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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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모두 매한가지. 우리는 그걸 보지 않고(또는 않으려 하고) 박노자 교수는 그걸 보려 하는 것의 차이.
감기군만쉐 2013-08-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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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께 보내는, (다 쓰지 못한) 만감편지




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오슬로의 먼 하늘 아래에서 강건하신지요? 저는 선생의 10년 독자이자, '88만원세대'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30대 초년병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생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최근 펴낸 선생의 『만감일기』을 읽고 10년 독자로서 느낀 바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선생께 한풀이도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일기가 던져주는 "그 어떤 정답도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 뜨거운 '화두'들에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오랜 독자로서, 매번 선생의 저서들은 나온 즉시 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만감일기』도 읽은 것은 몇 날 전의 일입니다. 읽는 내내 선생의 "무거운 번뇌, 번민"들이 제게도 뜨겁게 다가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쓰기까지는 여러번 찢고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찮게도 이명박 씨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더군요.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선생께 편지 띄우기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88만원세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해 준 우석훈 선생의 책 『88만원세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이 '88만원세대'는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이 시대 20대들에게 비극적이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88만원세대'라는 명명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30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제는 이 사회의 그 비열한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에 바등거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와 함께 바리케이이드도 짱돌도 들지 못하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일 뿐입니다.

제 20대의 오롯한 10년을 저는 선생의 독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을 읽는다는 것의 결과였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선생께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선생이 부르짖던 좌파적 심성들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제 현실, 우리 현실은 그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20대의 10년을 선생을 알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땠을까? 지금의 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이 사회가 한결 좋게 여겼을까? 삶에 희망이 있었을까? 저는 그랬을 것이었다고 봅니다. 선생을 알지 못했고, 선생의 사유들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제 20대의 10년을 타인을 이기기 위해 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경쟁 속에서 보다 가열차게 싸워 이겼을 것이고, 경제적 부를 꿈꾸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언젠가 나도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박노자 선생을 알고, 선생의 사유에 지극히 공감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빛과 희망도 이 사회에서는, 지금의 제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에 갇혀 인간이 인간을 밟고 뭉개야 하며, 내 민족, 내 나라만이 제일이고, 타인을 배제하는 이 사회에서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아니 어떻게라도 살아남는 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록 무서운 것이기만 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패배주의자의 자기 변명이라고 욕하겠지만, 적어도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대로라면, 제게는 지금의 이 패배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선생을 통해 이 사회의 배반적 역사, 국가와 제국주의의 폭력,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무한경쟁,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척, 권위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구속 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누구 못지 않게 분노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가 검은 청년들을 노르웨이 오슬로 시의 캄캄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날 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겁'을 느낀다. 이것을 인터넷 일기에서 솔직히 '고백(?)'할 때 무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나'의 인종적 편견을 스스로에게 알려 '자정'을 다짐함으로써 나름의 반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읽은 독자들이 '아, 나에게도 그러한 부분이 있구나!'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같은 반성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순기능이 아닐까?(7쪽)



도대체 저는 얼마나 고백하고, 자정을 다짐하며, 반성해야 할까요? 선생이 줄곧 비판해 온 그것들을 제 몸이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때마다 반성은 한다지만, 또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선생의 독자로 10년을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마다 뼈아프게 아파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이 사회의 그 모든 악을 몰아낼 듯한 의분을 갖지만, 거기까지 뿐입니다. 선생은 고백하고, 자정하며, 반성하는 '소통'을 말하지만, 그러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왜 저는 그러하지 못 하는 걸까요?

솔직히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겹습니다. 더 솔직히는 잘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건강하며, 풍족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을 이기고, 그들 위에 홀로 우뚝 서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이 사회가 요하는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허황된 이 사회 지배층들의 교묘한 술법임을 알게 되었고, 머리속에서나마 함께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함께 연대하고, 사회 곳곳의 그 악한 이데올로기에 맞서 부르짖고,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지금은 무척 괴롭고 아픕니다.

선생이 꿈꾸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지위와 돈, '국민에의 소속' 여부 등의 매개가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적 사회"를 선생의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좌파라 욕하고, 빨갱이라 낙인 찍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가까운 친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런 저의 생각과 사상을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선생도 느끼듯이 이것은 "우리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선생께 한탄하고 울부짖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씨가 취임하면서 말한 바는, 기업이 잘 되는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명박처럼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향후 5년의 절망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어쩌면 선생도 저와 같은 절망을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현실에서 저는, 그리고 선생은, 나아가 선생께 공감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선생의 글을 꾸준히 읽어간다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답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인 줄 알지만, 얼마나 더 그 답을 찾고자 괴로워 할 수 있을지 저 스스로도 저를 믿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워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지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선생이 계시는 곳은 먼 하늘 너머 노르웨이의 오슬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춘향전의 아름다움보다 이 나라 이 땅의 잔인하고 참혹하며, 무자비한, 폭력적 현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우십니까?


글쎄, 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나리님'들에게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이념문제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이다. 물론 이용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 국내 대학들이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인 공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작은 왕국'들이 민주공화제가 되기 전까진 거기에서 녹봉을 받아 먹고살긴 싫다. 물론 어느 날 향수가 하도 깊어져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 다 실체 없는 공상인 듯도 싶다. 어쨌든 '나리님'이 영접받는 광경을 목도한 그때 그 순간은 내겐 절망의 순간이었다.(34쪽)



지금까지 선생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선생의 그런 절망의 순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구태여 태어난 나라를 뒤로 하고, 집도 절도 없는 이 나라의 국적을 갖은 것은 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애써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알고, 행복하게 사실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10년의 독자에게 선생은 선생의 그런 절망만을 얘기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선생을 일러 독설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을 외부인으로 치부하고 내 나라, 내 조국만을 감싸고 돌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기에, 선생의 그런 독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선생을 '경계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 그러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선생을 그 경계 내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부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선생이 있는 그 경계로 나오라고 말이죠. '나'와 '타인'의 그 경계에 설 때, 우리 사회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가운데는 그 경계에 설 것을 상상하지만, 내부에 있는 제 무거운 몸은 한 발걸음도 경계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네킹'이 되고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끔찍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 대다수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마네킹'에 더 가깝다. 무슨 제복이나 장교복, 귀족복을 입히면 입힌 대로 그 모델이 되는 것이다. 외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없어지고 외부의 '표준' 욕망들이 그대로 내면에서 복제되고 만다. SF 영화에서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형 인간'의 비율이 꽤나 높다. 더 끔찍한 문제는 그들을 프로그램하는 자들도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40~41쪽)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 편지를 그냥 접겠습니다. 괜히 한탄만 하고 말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더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선생의 '만감'을 화두로 삼아 되새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1년 후, 5년 후, 아니 10년 후면, 또 이런 한탄만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일 또다시 오늘 말하지 못한 남은 속내를 참지 못하고 토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꾸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그만 그쳐야 되겠습니다. 선생께 이 마치지 못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가 선생께 일말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입니다. 이국의 먼 하늘 아래 오슬로에서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 2월 25일 자정에
선생의 10년 독자 올림.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내 100번째 리뷰가 됐다. 그런데 이것은 공교로운 것만은 아니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렇게 100권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 한 나에게도 일말의 "스스로 깨우침"의 그 경지에 살짝 턱이라도 걸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100번째 리뷰를 쓰면서, 그 백편이 주는 '義自見'을 생각하자니, 이 100번째의 자리에 무언가 뜻과 의미를 두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었던 것이고, 오래 묵혀두다가 이렇게 100에 맞춰 리뷰, 아니 편지를 썼다. 100번째 리뷰가 다 쓰지 못한 편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조금이나마 내 삶에서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 것은 바로 박노자였다. 그러하기에 이 100번째가 박노자의 차지가 되기에 마땅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노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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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8-02-26 공감(7) 댓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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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탕 탕 탕!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는 전생에 이 땅과 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많은 사람들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는 이 땅에 머물고 싶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고 그 먼 곳에서 지내고 있다.

그 먼 곳에 있지만 그의 푸른 시선은 늘 여기를 향하고 있다. 그런 그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더라도 그가 머물 곳이 없다는 건 이 땅의 큰 부끄러움이다. 그는 언젠가는 여기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그래,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탕 탕 탕!"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는 늘 크다. 돈을 주고 본다고 그 재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니 100퍼센트 동의하면 싫어할 것이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는 넘쳐난다. 우리가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채하는 많은 일들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읽는 사람도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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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보(드)는곤 2008-01-18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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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일기도 예술일세





이건 전에도 했던 얘긴데, 어떤 사람이 사업이 잘 안되어 자살을 하려다 막무가내로 춘천에 사는 모 소설가를 찾아갔다. 그는 소설가를 붙잡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얘기를 했고, “이 사람 안도와주면 진짜 죽겠구나” 싶었던 소설가는 버리려고 창고에 놔둔 원고뭉치를 그와 함께 뒤졌단다. 그 원고는 결국 ‘말더xxx xxxx'이란 제목으로 출간이 됐고, 그 책은 상당한 부수의 판매고를 올려 그 남자의 목숨을 살렸다. 남자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소설가는 상당 기간 동안 그의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소설가의 기대에 걸맞게 사장이 된 남자는 제법 좋은 책들을 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거다. 나같은 사람이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좋은 책이 나오기 힘들지만, 소설가는 버리려고 구겨둔 원고뭉치를 모아도 양서가 된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으면서 그 소설가의 일화를 떠올린 이유는, 박노자 선생이 블로그에 썼던 일기가 훌륭한 책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보통 일기 하면 날 괴롭힌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거나, 직접 말하지 못할 타인에 대한 감정을 써내려간다든지 하는 식이 될 텐데, 어찌된 게 이 책은 일기가 아닌 칼럼 모음집 같다. 그의 주장을 익히 들어왔기에 특별히 새롭다 이런 건 없을지 몰라도, 정신을 좋게 만들어 주는 약은 자주 먹는다고 해로울 건 아니다 싶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발하고, 나 또한 그 가해자의 위치에서 자유로울 게 없기에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자꾸 읽다보니 화끈거림의 정도가 엷어지고,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진다. 이런 것도 면역이 생기는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유부남이 돼서 좀 뻔뻔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되었건 나이가 들수록 바르게 사는 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젊은 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학교 과제로 읽으라는 책도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읽고 그러는 요즘 학생들이 이 책을 사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를 보니 14,016,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지만 재테크의 비밀을 다룬 책이 35,000을 넘는 걸 보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헷갈리기 시작한 사실 하나. 방효유라는 중국 선비가 왕위를 찬탈한 연왕에게 협조를 거부하다 그의 일가친척 847명이 옥사를 했다. 내가 배운대로라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행위일 수 있겠지만, 박노자의 말은 다르다. “지배계급의 정통성 논리로야 찬탈이냐 정통 계승이냐가 중요하겠지만 농민의 입장에서는 세곡을 거두는 게 누구인가가 별 상관이 있을까?... 아이들을 포함한 847명의 목숨이 희생되도록 왕고집을 부린 걸 보면 그 양반이 고집불통이거나.. 허영의 위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169-170쪽)]



그러니까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던 사육신을 우리가 받들어 모시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든 그게 뭐 중요하냐는 거다. 전혀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논리라면 군사독재에 협력하는 것도 용납이 되는데, 이거이거 내가 박노자의 글을 잘못 읽은 건지 심히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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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8-06-03 공감(3)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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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도 국적을 따지는 나라




"에이, 이 더러운 나라. 이민이나 가야겠다"라는 소리를 낸 이, "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욕해. 더러우면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가 일치하는 나라.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하자면서도, 인터넷에서 국가 우열 순위를 매기며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비슷한 레벨이라는 의견에, "어떻게 우리나라를 동남아시아 따위"에 비교할 수 있냐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우리는 이 나라를 괄호나 물음표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의 책을 읽으면 늘 그렇듯이, 괄호나 물음표 안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집어넣게 된다.

"어떻게 네가 '한국인'이냐, '귀화인'이라고 말해야지"라는 책 속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어쩌면 우리는 박노자의 한국 비평을, '경계인'이라는 차원에서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노자는 실제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 '되었고'의 차원을 의식하면서, 그를 '타자'로 위치시킨 채, 그의 비평에 뜨끔하는지 모른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그를 상징하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박노자는 '한국인'이지만, '비-한국인'이라는 상징성을 옆에 둔 채, 존재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 묘한 구분의 심리는 따가움을 느끼고 싶은 비평의 참 맛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박노자 개인을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위치 안에서 바라보려는 심리 또한 강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가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보게 되고, 그 경계 짓기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치거나, 아니면 내면 속에서 '과감하게' 그 '경계 짓기' 에 동참함으로써 비평 속 따가운 맛을 받아들이되, 여전히 너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까주거라"고 하는 이상한 '주인의 심리' 또한 이 연약한 자아는 드러내고 만다.

'주인의 심리'라는 이 위험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주인됨'은 마치 (한국이란 나라를) '중국- 일본- 러시아' 가 둘러싼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 나는 태어난 사람이며, '한국적인 것'이라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역사라는 학습 효과를 통해 '한국인 됨'을 가졌다고 인식하는 나를 둘러싼 존재 증명이리라 그러나 이 존재 증명은 다들 알다시피 매우 불안한 것이며, 확언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이 '주인됨'에서 오는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딱 듣고 싶은 만큼의 비판, 듣고 싶은 만큼의 성찰에 머무를 것을 무의식적으로 주문해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노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는 바로 이런 나의 '주인됨'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는 점,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따가운' 비평어들을 과감히 끄집어 내어 그 '날 것'의 효용을 체험하라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만감 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국민의 이중구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국가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당연히 받아들이면서, 그 책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서도,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사태와 사건들에 때로는 그 개인의 책임의식을 '희생양'을 삼을만한 대리적 존재에 맡긴 채, '근거없는' 사회에 대한 힐난을 일삼기. 때론 그 힐난을 무마하기 위해, '국가적 쾌락'을 내면화한 '스펙타클한' 국가적 카니발리즘에 자신의 육체를 던지고, 그것을 긍정의 힘에 맡기기.

우린 이런 지적을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 지적을 이성과 논리로 받아들이려는 경우는 적었다. 그 지적을 '외국인/ 한국인'으로 구분하면서, 비판의 자격을 따지는 게 더 일상화된 것은 아닌가."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거 좀 그렇지 않나요?"라고 심정적 동의를 구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곳의 부정성을 '합리화'하려는 것에 우리는 더 친숙하지 않은가.

재범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주문을 쉼없이 외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야! 네가 뭔데 우리나라(에서 돈 잘 벌면 되었지.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에) 함부로 말해!" 사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정작 우리의 입술에서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독촉한다.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생기는 사태들에 대하여, 우리는 이 '정념의 상품'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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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0-2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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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내게는 요즘 ‘소통’이 화두다.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나와 소통하고 싶다.



그런데 소통할 사람을 만나기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그들의 매너리즘에, 베낀 듯한 사유에 질린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과 그가 쓴 글의 거리에 놀라고, 세상을 바꾸는 그 현장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게으른 사유에 기가 막힌다. 게다가 내가 가족이나, 조직을 안전망으로 선택하지 않은 인간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가족문화와 조직문화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어서 늘 겉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번도 고백한 적이 없지만 사실, 나는 좀 외롭다.


박노자의 글은 내 삶에 위로가 된다. 그의 고독과 낯설음이 내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는 위로. 그와 같이 자기 사유에 성실한 사람도 늘 회의하고 방황하는데, 난들 어떠랴, 라는 위로. 나와 같이 이렇게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위로...



이번에 본 그의 글은 특히나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



늘 자신의 의견을 꼿꼿하게 피력하던 친구의 아픈 속내를 들여다본 듯한 느낌.



나와 비슷한 연배인 그에게 나도 위로 한마디 건네고 싶다.



“당신 덕에 늘 이렇게 다시 기운 차리는 사람도 있으니, 당신도 씩씩하게 사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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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나무 2008-01-29 공감(2)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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