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7

불족적- 불교미술을 찾아서 6 / 조정육 / 부처님의 상징(2)

불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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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을 찾아서 6 / 조정육 / 『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

부처님의 상징(2)

 

                         <불족적>

 

1. 불족적의 유행

탑과 더불어 무불상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배드렸던 대상이 불족적이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뜻하는 불족적(佛足跡)은 주로 돌 위에 새겼기 때문에 불족석(佛足石)이라고도 불린다. 불족적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누구나 부처님의 발자취를 보고 존경하고 기뻐하면 한량없는 죄업을 소멸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것을 만들어 숭배하고 공경하는 일이 유행하였다.’고 되어 있다.(『불교사전』, 동국역경원)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의 남방불교권에서는 불족적을 돌에 새기거나 그리는 것이 대단히 유행한 반면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불교권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방불교권에서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보고 존경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지역 환경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남방불교권과 북방불교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연 환경일 것이다. 남방불교권은 날씨가 따뜻해 겨울에도 맨발로 걸어다닐 수 있지만 북방불교권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어도 발이 시릴 정도로 북방불교권의 한겨울 추위는 혹독하다. 자연히 두 발은 양말이나 신발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다보니 맨발의 중요성이 반감된다.

그렇다면 남방불교권에서는 어떠한가. 날씨가 따뜻해서 맨발로 다녀도 무방하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수행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도 맨발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므로 불족적의 유행을 단순히 ‘부처님의 발자취를 보고 존경하고 기뻐하면 죄업이 소멸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맨발로 다닐 수 있는가, 없는가의 환경과의 관련성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맨발로 다닌다는 것. 그것이 쉬워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뜨거운 여름날에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을 맨발로 걸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뜨거운 바닥을 걷다 사원 안의 차가운 돌바닥을 걸을 때면 온도 차이 때문에 마치 발바닥에 불이 붙는 것 같다. 더구나 신발이라는 충격 흡수 장치 없이 먼 길을 맨발로 하루 종일 걸을 때 보행의 충격은 그대로 온 몸으로 전달된다. 피로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힘든 길을, 내게 도움이 되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중생의 행복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45년 동안을 걸어 다녔다고 생각해보라. 저절로 감동의 눈물이 흐를 것이다. 내가 뭐라고, 나 같은 사람이 뭐라고 그런 지극한 정성을 쏟아주시는 겁니까. 나같이 하찮은 사람이 당신처럼 고귀한 성자의 애틋함을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요.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더구나 그 중생 속에는 고생 고생해서 맨발로 걸어온 분의 마음을 곡해하여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생명을 해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어떤 마음을 가졌든 상관없이 오로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 하나로 불볕더위 속을 맨발로 걸어 왔을 팔순 노인을 생각해보면 누구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그러므로 불족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심의 현현(顯現)이고 구도심의 결정체다. 베풀되 베풀었다는 마음조차도 내지 않는 무주상 보시의 전형이다. 조금 주고 많이 받기를 바라는 중생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 분을 따르는 이들은 ‘귀의불(歸依佛) 양족존(兩足尊)’을 서원한다. 두 발을 가진 존재 중에서 가장 높은 이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다. 이 때 양족(兩足)은 복덕과 지혜, 계(戒)와 정(定), 대원(大願)과 수행을 원만하게 갖추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그런 분이 걸어간 길이 너무나 숭고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자들이 이어지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닮으려는 수행자들이 계속 이어지는 한 불족적도 지속적으로 조성될 것이다.

 

2. 불족적의 도상적 특징

이런 깊은 뜻을 지닌 불족적은 도상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을까. 조형적인 특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체의 다른 부분은 생략한 채 오로지 불족적만 표현한 것인데 주로 윤보가 중심 문양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는 불족적만 표현하되 108문양이 표현된 경우다. 세 번째는 부처님의 열반상이나 휴식상처럼 부처님의 신체의 일부로 불족적이 함께 표현된 것이다.

 

1) 불족적만 표현된 경우

첫 번째 경우는 발바닥 중앙에 윤보무늬만 새기고 나머지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이다. 발바닥 중앙에 윤보무늬만 새긴 예로는 인도 아마라바티에서 출토된 <불족적>(도1)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서기 1세기 경에 조성되었는데 발바닥 중앙에 둥그런 윤보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수레바퀴 모양의 윤보는 우주를 통일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상징이다. 전륜성왕은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뜻한다. 후대에 신체의 일부로 표현된 불족적이 대형화되고 문양이 복잡해지는 것에 비하면 윤보무늬만 강조된 불족적은 시원적인 양식에 속하지 않을까 추정된다.  

아마라바티 출토 <불족적>이 발가락 열 개 길이가 일정하게 맞춰져 있고 도안화되어 있어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느낌이라면, 보드가야 대탑 부근에 조성된 <불족적>(2)은 훨씬 실제적이고 현실감이 느껴진다. 원형의 틀 안에 두 발을 새기다보니 실제 살아있는 사람의 발처럼 자연스럽게 엄지발가락이 가장 크게 배치되고 새끼발가락이 가장 작게 놓여진다. 사각의 틀에서 원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움이다. 이 <불족적>(2)은 발바닥의 형상을 음각으로 새긴 까닭에 그 안에 물이 고이게 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진흙탕을 맨발로 걸어 다니신 부처님의 발자국을 보는 듯하다. 그 발자국 위에 누군가가 공양 올린 꽃잎이 놓여 있다. 딱딱한 돌조각 위에 놓인 고운 꽃잎은, 부처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꽃처럼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누군가가 장엄한 꽃잎이 아니더라도 부처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진리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불족적 주변에 연꽃 테두리가 광배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1)(왼쪽)<불족적>, 석회암. 길이 67.5cm, 서기 1세기, 인도 아마라바티 출토,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2)(오른쪽)<불족적>, 인도 보드가야 대탑 부근 소재(자료제공: 한북스님)

 

이 <불족적>을 새긴 사람은 이 장면까지도 예상했을까? 몇 백 년, 혹은 몇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먼 이국땅에서 온 나그네가 빗물에 고인 불족적 속에서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발걸음을 발견하리란 걸 알고 있었을까. 당신이 바로 부처라고, 지금 있는 남루한 모습 그대로 온전한 부처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45년 세월을 쉼없이 걸어오신 분의 넘치는 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빚은 돌조각에서 깨달을 것이라고 예측했을까. 한 예술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합일되었다는 점에서 <불족적>(2)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그런데 인도의 이런 시원적인 양식과 비슷한 불족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계룡산 갑사에 소장된 <불족적>(도3)을 보면 그 근원이 인도의 <불족적>에 가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윗부분에 ‘석가여래유적도’라고 적힌 이 작품은 목판에 새겨 찍어낸 것으로 중앙에는 바퀴모양의 윤보가 배치되어 있고,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卍’자가 새겨져 있다.

윤보 주위에 새겨진 꽃병과 물고기 형상은 정확히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지 좀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할 듯하다. 계룡산 갑사에 소장된 <불족적>과 크기는 다르지만 도상적인 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는 작품이 몇 점 전해지고 있다(도4)(도5). 목판 원형도(도6) 한 점 전해지는데 목판 윗부분에 ‘석가여래유적도’라고 새긴 글씨의 배치가 갑사 소장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상적인 특징은 네 점이 거의 똑같다. 또한 ‘불족적’이라는 용어 대신 한결같이 ‘석가여래유적도’라는 단어를 고집한 것도 한 가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왼쪽)<불족적>, 계룡산 갑사소장 목판 인쇄/ (4)<불족적>, 조선후기, 79×15.5cm,

 

    

  (5)(왼쪽)<불족적>, 목판, 19세기, 각 66×33cm/ (6)(오른쪽)<불족적>, 판목, 조선 후기, 73×37cm,

 

2) 108문양이 표현된 경우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이 모두 불족적에 윤보와 간단한 상징물을 표현했다면 108개의 특징적 문양이 새겨진 예도 있다. 108개 문양은 3계를 나타내는데, 28개는 욕계를, 21개는 색계를 그리고 59개는 무색계를 나타낸다. 부처님 발바닥에 굳이 3계를 표현한 것은 부처님이 3계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선명하게 새겨진 108개의 특징을 보고 한 예언자는 ‘아이의 발에 전륜성왕의 문양이 있기 때문에, 그 왕자는 부처님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불족적에 새겨진 108개의 특징적인 문양을 보며 예배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세계의 제왕(tilokagga)’, ‘만물과 세상의 끝에 다다르신 분(tilokantagu)’, ‘3계를 뛰어넘은 자(lokavidu)’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흑백이 두드러진 <불족적>(7)은 윤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연꽃을 배치하고 나머지 부분을 108개로 구획한 후 각각의 칸 안에 상서로운 이미지를 새겨 넣고 있다. 전체를 108개로 나눈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 반면 그 안에 그려 넣는 탑, 물고기, 용, 연꽃, 코끼리 등의 이미지는 자유스러웠던 것 같다. 금분을 칠한 바탕 위에 원색으로 108문양을 그려 넣은 <불족적>(8)은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두 발 사이에는 결가부좌를 한 부처상을 연꽃 위에 그려 넣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총천연색으로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불족적>(8)을 보면,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맨발로 걸어 다닌 부처님의 수고로움이 많이 변질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하면서 본래의 의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7)<불족적>, 67.5×45cm, 천에 채색, 미얀마/(8)<불족적>, 48×32cm, 금분에 채색, 미얀마

 

3) 신체의 일부로 표현된 불족적

불족적의 마지막 유형은 부처님의 신체의 일부로 표현된 경우다. 불족적이 열반상이나 휴식상에서 부처님의 신체의 일부로 표현됨으로써 독립적으로 조성된 불족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약화된다. 그러나 거대하게 조성된 열반상이나 휴식상의 신체 부위 중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불족적은 단연 화려하고 눈에 띄게 강조된다. 태국의 왓포 사원에 조성된 열반상은(도9) 그 길이가 46m에 이르는 대작인데 발바닥에 108문양을 시문하여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열반하실 때까지 걷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부처님의 자비심을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걸까.

부처님이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을 조각한 열반상과 휴식상은 두 발의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왓포사원의 불상처럼 두 발이 나란히 놓여 있을 경우에는 열반상으로, 두 발이 엇갈려 편안하게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은 휴식상으로 볼 수 있다. 미얀마의 차욱땃지 사원의 와불이 <휴식상>(도10)이다. 어느 경우나 발바닥에 108문양을 시문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은 부처님이 성도 후 열반하실 때까지의 전 생애가 중생을 향해 걸어 다닌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9)<열반상>, 왓포사원, 태국 16세기, 길이 46m

 

 (10)<휴식상>, 차욱땃지, 미얀마, 67m

 

3. 마치면서

무불상시대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탑, 불족적 외에도 보리수, ‘무우수’, ‘사라수’, ‘불좌(佛座)’, ‘윤보(輪寶)’ 등이 있다. 보리수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명하는 나무라면 무우수는 부처님의 탄생을, 그리고 사라수는 부처님의 열반의 자리에 서 있었다. 불좌는 부처님의 자리를 상징하고 윤보는 전륜성왕의 표시다. 어느 것이나 부처님의 생애의 특별한 장면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해되고 예배되어 왔다. 이런 상징들은 불상이 출현하기 전 500년 동안 부처님을 대신하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았다. 

대부분의 상징물들은 불상이 출현한 후 그 의미가 미미해져 불상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보는 듯한 32길상 80종호를 갖춘 불상은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교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탑만은 불상의 출현과 상관없이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상징했다거나 성도를 지켜봤다는 등의 간접적인 의미보다는 부처님 신체의 일부인 사리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사람을 등불로 삼지 말고 법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것이었지만 뭔가 눈에 보이는 실체가 필요한 범부중생들에게는 불상과 탑 같은 언제나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하다. 굳이 여러 가지 상징물을 만드는 이유도 결국 범부중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 외에도 탑이 불상과 함께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특징은 조형상의 자유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보리수나, 사라수 혹은 불좌나 윤보는 아무리 작가의 상상력이 뛰어나다 한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개성있게 표현한다해도 보리수를 감나무로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탑은 어떠한가. 성스러운 사리를 모셔 놓은 장소라는 큰 원칙에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탑은 불교가 전파되는 각 나라에서 각기 그 지역의 문화에 맞게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명나게 예술적인 역량을 표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약이 많은 종교예술품이라 해도 그것을 제작하는 작가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줌으로써 수많은 땅에서 독특한 탑들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미얀마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서 거대한 벽돌탑이 만들어졌다면 중국에서는 전탑이, 한국에서는 석탑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목탑이 만들어졌다. 2,500년의 역사 속에서 불상과 더불어 탑이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유이다.

 

                                        (11)진안 마이산 탑

 

*다음에는 삼국시대의 불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붓다의 나들이 』3.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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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안金剛眼2010.03.11불족적 도상의 전파양상을 환경적 요인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매우 신선합니다. 서역의 혹독한 환경을 통과하여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가 맨발의 족적을 이해하기는 쉽지않았겠지요. 하지만 인도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남방불교도 무우수,불족적, 삼보표, 금강보좌 등 석가모니 부처를 대신했던 불적도의 도상들이 불상과 탑보다 더 중요시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그리고 윤보가 그려진 불족적이 시원적일거란 말씀은 정확한 내용인것 같습니다. 불족적의 최초작례인 바루후트 난순에 조작된 불전부조중 삼십삼천하강도에서 윤보가 표현된 불족적이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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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육2010.03.11그러믄요. 불상과 탑은 그 어떤 상징보다 보편적이고 인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족적이 많이 조성되지 않은만큼 불족적에 대한 연구자료가 많지 않아 글 쓰는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혹시 제 글에 오류가 있다면 많은 지적 있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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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안金剛眼2010.03.11아이고 지적이라뇨..그럴 능력이 안됩니다..
    불족적 연구자료가 많이 없군요..아무래도 팔상도를 제외한 불전도가 거의 유행되지 않았기 때문인가봅니다.
    회화뿐 아니라 불교미술 글을 보는 재미도 좋습니다...힘드시겠지만 자주 올려주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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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er2010.03.14이렇듯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고 보여주셨는데도 여기까지 오니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셔서 먼길을 마다않으셨다는,
    그래서 그 고마움을 감사하는 의미라는 두리뭉실한 뭔가만 남으니...
    이럴때 과문하다는 표현을 쓰는구나 싶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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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육2010.03.14그것은 아마 글쓴 사람의 표현력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미얀마에 가서 맨발로 걸을 때의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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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er2010.03.15그렇게 말씀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읽는 이가 한참 몰라서 알아듣지 못하는 거라구요^^
    맨발로 걷는 그 공력, 그 부분이 얼마나 생생하게 와닿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