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pyo Hong
Stronpa11n10h2rJ30a 874uulya ·
덴마크 잡감 – 1
(새마을운동과 류달영 선생의 유훈)
독일에 숨어 있는 줄 알았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 생뚱맞은 덴마크... 독일의 승마 도시 드레스덴언에 이어 이번엔 덴마크의 승마 도시다.
박정희 시대의 DNA를 온몸에 품은 손녀 정유라와 증손뻘 되는 갓난 아기는 그렇게 덴마크 경찰에 의해 영어(囹圄)이 몸이 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자 내 입은 벌써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1970년 시작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널리 퍼친 노래 ‘잘 살아 보세’의 가사이다. 박정희, 최태민, 박근혜, 최순실, 그리고 정유라와 그 아이에게 "잘 사는 것"은 무엇이며, ‘부귀영화’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 중심이었다. 따라서 인구의 70%가 살던 농촌의 경제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유달영 선생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를 읽고 실의에 빠져 있던 덴마크를 부흥시킨 국민운동가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목사와 황무지 개간운동가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에게 큰 감동을 받고 소위 ‘새마을운동’을 기획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새마을 정신도 덴마크 사례를 그대로 모방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세 잎 마크)을 강조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정신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그 목적이 추악한 동기에 기인한다면 결국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을 만들려는 꼼수밖에 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 경우였다. 69년 삼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해 다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농촌 방방곡곡까지 관제 선거와 상명하복 체제를 구축하고자 허울 좋은 ‘새마을운동’ 조직을 구상한 것이다.
내 고향 동해시의 쌍용양회에서 과잉 생산 중이던 시멘트 재고를 잔뜩 사들여 새마을 운동에 투입, 전국 리 단위 마을에 600포씩 마구 뿌려댔다. 다리, 댐, 도로 건설 등 기간산업과 방공호 구축이 더 시급했던 상황에서 전국 초가집을 없애 외견상 ‘새마을’을 일구자는 구호는 2년 뒤의 ‘유신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효과적인 민심 정지작업이 되었다. 심지어 그 때 초가 지붕을 없애고 놓았던 슬레이트 자재들은 모두 석면으로 범벅된 것이었다. 석면의 해악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알려졌던 바, 1970년은 국제적으로 석면이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 해었다. 그런데도 박정권은 그걸로 산천지붕을 도배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고 무지한 국민들은 환호했다.
시읍면 등이 주도하던 관제 부정선거의 전국적 ‘점 조직화’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민간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공고해졌다. 농촌 마을을 새 마을로 살리겠다는 당초 구호와는 달리, 공업 올인 정책으로 농촌은 갈수록 붕괴되었고, 농민들은 전태일 열사와 같은 살인적인 노예 노동 현장으로 내 몰렸다. 김대중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 됐다는 선전은 속임수”라고 일갈한 것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독재 체제 완비를 위한 조급증으로부터 탄생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위로부터의 권위적 근대화 정책의 연장선이었고, 더 나아가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매우 유사하다. 그 정책은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로 있을 때 입안한 것이었는데, 박정희가 장교로 근무한 관동군이 만주국 예하였음을 감안하면 그 뿌리는 덴마크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덴마크를 끌어들인 것은 과거 일본이 유럽의 농촌 근대화 모델 중 하나로서 덴마크를 참고한 것을 다시 모방하여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의 이러한 관제 사업에 류달영 선생(전 서울농대 교수)이 동원되었던 사실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류달영 선생의 스승인 김교신 선생은, 일본의 우치무라 선생이 근대 농업국 덴마크의 부흥 사례를 일본에 처음 소개하기 위해 쓴 책 『덴마크 이야기』를 류달영에게 전달했고, 그 책에 감동받은 류달영은 평생을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농대 교수로 부임한 류달영 선생은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책 한 권을 낸다. 제목은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책이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의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일에 박 의장이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본부장직을 수락했다고...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곧바로 덴마크 모델로 국민운동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하지만,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이관구도 류달영의 방향을 이어나갔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박정희의 위촉으로 류달영이 주도한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누어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하고자 애썼다.
‘덴마크’의 농촌진흥 정신으로 제대로 실천해 보려 했던 류달영 선생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독재 연장 도구로 점차 전락해 가는 이 사업이 훗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관제화되는 것을 보시면서 류달영 선생은 아래와 같이 통렬한 비판을 남기셨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 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중략) 군정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 역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혁명만이 용납될 수 있다. 그것은 민중 자신의 자아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고요한 국민의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유신시절,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율적, 창의적, 혁신적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오히려 후진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덴마크’와 바로 위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그 주장이 얼마나 억지이며 허구적인지 잘 증명해 준다.
이들 북구의 나라들이 채택한 사회적 민주주의 모델은, 오히려 독재보다 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이 경제 성장에 더욱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유럽에서 상대적인 낙후 지역이었고, 1인당 GDP도 1만 달러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윤택한 국가들이 되어 있다.
바로 그러한 땅 덴마크에서, 박정희와 최태민의 손녀, 그리고 젖먹이 증손이 체포되었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가 유린했던 덴마크의 참 개혁정신, 농촌 살리기 정신의 통쾌한 복수극을 보는 듯하다.
이제 정유라는 한국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금 우리의 몫이다. 덴마크에서 체포된 정유라와 그 어미 최순실과 박근혜를 우리가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류달영 선생이 못 다 이룬 ‘동양의 덴마크’ 건설의 꿈이 다시 좌초할지 아니면 부활할지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기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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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http://weekly.donga.com/List/3/all/11/151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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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⑫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1962년 6월 3일 경기 김포에서 모내기를 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과 최고위원들. 5·16 군사정부 시절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됐다.
류달영이 보여줬던 김교신에 대한 전적인 존경과 신뢰는 유명하다. 후일 그는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이 김교신을 만난 것은 18세가 되던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이 해는 김교신도 양정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첫해였고, 이후 류달영이 졸업할 때까지 5년간 담임을 김교신이 맡았다. 당시 양정고보는 한번 신입 1년생을 담임하게 되면 졸업까지 5년간 맡는 구조였다.
류달영은 양정고보 졸업 후 수원고등농림학교(3년제, 서울대 농대 전신)에 재학하던 시절에도 김교신의 주일 성서모임에 출석했고,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고보(4년제, 미국 감리교 계통 학교) 교사로 있을 때도 근처 송도고보로 옮겨온 김교신과 일상을 같이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터진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개성에 있을 때였다. 류달영에게 김교신이라는 존재가 지닌 절대성을 생각해보면 류달영이 김교신, 함석헌 등과 같이 가장 오랜 기간 감옥에 있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성서조선 그룹에 합류
평생을 농촌운동에 바친 류달영 전 서울대 교수(1911~2004)는 5·16 군사정부가 주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으나 본부가 해체되자 1964년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 차원에서 운동을 계속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무교회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 여타 우파 민족운동 진영과 마찬가지로 청년교육과 농촌계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류달영이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간 곳은 개성 호수돈여고보 박물(식물·동물·광물) 교사 자리였다. 수원고농 졸업 즈음 김교신의 권유가 있었다. ‘성서조선’ 창간 동인의 한 사람인 양인성이 호수돈여고보를 떠나면서 후임 추천을 함석헌에게 부탁했는데, 그 자리를 김교신이 류달영에게 권한 것이었다.
류달영이 호수돈여고보 교사로 있던 1939년, 최용신 전기를 쓰게 된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농촌운동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다. 류달영의 ‘최용신 소전(小傳)’은, 심훈의 유명 소설 ‘상록수’ 속 주인공 ‘채영신’의 실존 모델인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1909~35)의 희생적 삶에 대한 논픽션 기록물이다. 당시 이미 출간돼 있던 심훈의 ‘상록수’가 실제 최용신의 삶에 대해 왜곡이 심하다고 판단한 성서조선 그룹이 최용신의 생애를 정확히 기록해 장차 농촌운동의 모본으로 남기고자 책을 낸 것이었다. 류달영이 집필자로 결정된 것은, 그가 최용신이 활동하던 시흥군 샘골(지금의 경기 안산)과 가까운 수원고농 출신인 데다 수원고농의 조선인학생회 일로 생전의 최용신과 몇 차례 만난 바 있었던 까닭이다. 류달영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집필을 마쳤고, 책 서문은 김교신이 썼다. 출판 비용은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등이 거출해 마련했는데 출간 1년 만에 4쇄가 나갔다.
이미 양정고보 시절 농촌운동에 평생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류달영이 구체적인 농촌개발 모델을 그리게 된 것은 수원고농에 입학해서였다고 한다. 우치무라 간조가 농업국가 덴마크의 부흥담을 일본에 처음 소개한 소책자 ‘덴마크 이야기’를 김교신이 여러 권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권을 류달영에게 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훗날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은 전쟁 와중인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몇 년째 구상하던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3년 김교신이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류달영, 가운데가 김교신이다.
1961년 6월 12일 열린 재건국민운동 촉진대회.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앉은 이 가운데 오른쪽 맨 끝)의 모습도 보인다(왼쪽). 심훈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농촌운동가 최용신(가운데). 왼쪽은 독립운동가 황애덕, 오른쪽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이다. 류달영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농촌운동에 대한 기록의 하나로 ‘최용신 소전(小傳)’을 썼다.
1931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제1회 참가자 모집 사고. 브나로드운동은 약 10만 명의 문맹자를 교육하는 성과를 거뒀다.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6월 출범 당시 초대 본부장은 유진오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2개월여 만에 사임했다. 류달영은 그해 9월부터 일을 맡아 새롭게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류달영은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3대 본부장 이관구도 류달영의 운동 방향을 이어나갔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곧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했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눴다. ‘국민교육’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했다.
운동은 추진력 있게 이뤄졌으며, 취임 1년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교육원과 시도지부교육원에서 각각 7000여 명과 6만4000여 명의 농촌운동 지도자를 교육했고 마을 청년회관 약 7000동, 농로 5만4000여km, 수로 3300여km를 개설했다. 부엌, 변소 등 생활환경 개선과 농촌 결식아동 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 41만여 명의 농어촌학생봉사대를 조직했다.
성천 류달영의 생애를 기록한 ‘나라사랑’(성천문화재단, 2006).
류달영의 구상은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국민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국가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군정 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으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인 1964년 2월, 재건국민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도 해체됐다. 결과적으로 정권에 이용당한 모습이 되자 류달영은 격분했다. 오랜 무교회주의 동지이자 ‘스승의 벗’인 함석헌이 정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을 즈음, 류달영은 ‘동아일보’ 65년 5월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국가동원체제에 대한 혐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류달영(왼쪽)과 김교신.
근본적으로 우치무라 간조 이후 무교회주의자의 사상은 국가주의와는 상극에 놓인 것이었다. 류달영은 국가적 단위에서 ‘민간운동’을 전개해보려 했지만, 재건국민운동은 관제운동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기 어려웠고 의도했던 목표도 완성하지 못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되고 나서 류달영은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운동을 계속해나가고자 했다. 민간의 자발적인 자기개조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류달영은 훗날 사람들이 자신이 이끌던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을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했다.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이런 생각은, 국가동원체제를 혐오하는 무교회주의 계보에 류달영이 서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류달영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 운동에 참여케 했던 서울대 농대 제자 가운데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됐던 이유도 있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류달영은 정치 진영과 무관한 자리에서 오로지 한국 농촌과 농민만 생각했다. 82년 국정자문위원회에 참석했을 때 농촌경제를 파탄 낸 “원흉들의 집단이 바로 경제기획원”이라며 정부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류달영이 국가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개정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이다. 이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모델을 참조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룬 결과들은 적어도 스승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던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간동아 1013호 (p6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