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8

예언자- 머리말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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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예언자- 머리말
작성자 바보새 14-01-27 16:36 조회1,9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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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영어를 말하는 나라에 한번 가본일도 없이, 영어로 자기를 발표하는 사람들과 한마디 말도 하여 본 일 없이 영어로 된 글을 번역하는 것은 영어에 대한 모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겨보고 싶었다.
문학을 모르고, 더구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를 번역하는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업신여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글을 꼭 우리 귀에 들려주고 싶었다.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있고, 또 이미 먼저 번역한 이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만두고 나 자신에 대한 잘못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꼭 한번 내 말로 해보고 싶었다.
어떤 이들, 나를 아노라 하는 이들은, 내가 말을 또 하고 글을 또 쓰는 것을 보면 “저 거짓말쟁이가 또 말을 해?” 할 것이다. 사실 분명히 죄를 지은 것이 있는데 얘기를 하는 것은 미운 일이요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천도 알고 만도 알면서도 이것만은 기어이 말하고 싶었다. 말하면 꼭 들을 귀가 있을 것 같고,들으면 틀림없이 혼의 피어남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만 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남의 글 옮김이 아니라 내 혼의 마주하는 얘기다.
나의 칼릴 지브란 알아들음이요, 거기 대한 고개 끄덕임이다.
따라서 ‘그이’ 알아들음이요. ‘그이’ 눈동자 보고 내 눈동자 반짝임이다.
정말『예언자』쓴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또 내 영원의 뱃길 뱃동무 보고 하는 나의 손시늉이요 몸짓이다.
따라서 ‘그이’에게 드리는 내 손모음(合掌)이요 내 반벙어리 노래다.
 
그것은, 정말 내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고생하고, 아파하고, 싸우고, 한끝까지 같이 가서 하나 되는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바로 풀었나 잘못 풀었나가 문제 아니다. 어느 나라 말도 어떤 문장도 하늘나라 말에는 다 서투른 사람들이다.
그보다도, 하늘나라에 문법 있을까?
말을 아름답게 다듬었나 못 다듬었나가 문제 아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짐승과 꽃과 똥덩이와, 만물을 다 불러 넣어 가지고 하는 생명의 노래에 곱고 미운 것이 어디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살았노라,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았노라, 죽음이 곧 삶이더라, 지옥 밑에 천당이 뚫렸더라 하는 말밖에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을까?
죄를 지었으면 죽은 체하고 가만 있거라,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반밖에 못되는 진리다. 죄인이야말로 말할 자격이 있더라. 그것은 죄인이 되어보니 알겠더라.
 
‘빛이 있을지어다.’는 캄캄한 혼돈(渾池)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말씀이 생명의 빛을 낸 것은 살(肉)속에 갇혀서야 했다.
꿀 먹은 사람은 벙어리가 되어도 좋아도, 독을 삼킨 사람은 큰 소리로 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듣기 싫다는 사람이 참 시, 참 음악을 알까?
방안에 단정히 옷을 입고 앉은 사람은 돌부처와 다름이 없을 수 있어도 똥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 거기서 뛰어올라오는 사람의 팔다리는 그것이 정말 생명의 춤일 것이다.
물이 완전히 맑아진 다음에 마시려다가는 목이 먼저 타 죽겠더라. 맘이 다 깨끗해진 다음에 말하려다가는 혼이 질러 말라 버리겠더라.
죄는 무섭지만 삶은 죄보다 더 무섭더라.
벙어리는 남의 귀를 아프게 해서야만 남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이를 수 있고, 천성이 까마귀인 줄 안 다음에는 창파에 씻자던 생각은 어서 그만두고 해가 아주 지평선 아래 떨어지기 전 사뭇 서편 하늘로 날아드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겠더라.
또 해가 져도 괜찮아, 맨 처음의 어둠속에 학이 어디 따로 있고 까마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어둠 속을 노래로 밝히자!
혼의 노래에는 웃음, 울음이 따로 있지 않더니라. 잘잘못도 없느니라.
그리하여 내 소리는 못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 못하는 말 대신 해 주는 입을 빌리기로 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나를 똥간에 빠진 데서 이끌어냈다, 제 손에도 똥을 쥐면서…….
그럼 내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의 꾸부림이 나의 일어섬이요, 그의 더러워짐이 나의 깨끗해짐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그를 부쩍 쥠이 그에 대한 고맙담 아니겠나?
나는 그의 말을 내 말이나 되는 양, 그이 보고, 또 그의 사랑이요 내 사랑인 저 오르팔리스 사람들보고 하리라.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하고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어 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며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깉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 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 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건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내가 장 발장이 되어보고자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밀리에르가 아니고 자베르 뿐인 듯이만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인제 아까운 생각이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들었다.
누구 원망이 아니라 내 생각에 그러했단 말이다.
멍청히 서울과 천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한가하여 물에 산에 놀기나 하는 듯, 동해로 남해로 싸다니는 동안 내 혼은 이렇게까지 맥빠지고, 비뚤어지고, 떨어져 영원의 바닷가에 죽은 솔피처럼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갔다 하는 줄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그 물결과 싸우며 기도를 했다면 어느 누가 곧이 들을까?
누구 들으라고 한 기도야 아니지만……
그런데 가을도 깊어 사나운 서풍이 또 불기 시작하여,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드렸노라, 피 흘리노라.
오, 바람아, 나를 일으키려마, 잎새처럼 물결처럼 구름처럼.”
하는 셸리의 노래만이 생각나는 날, 문득 한 소리가 날아왔다.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일어나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을 건너 로키 산맥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뛰어오는 소리였다.
 
나는 한번 듣고 일곱 해 동안을 잊었던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내 속에서 자고 있지 않았었다.
그 부르는 소리가 이러했다.
“너희가 너희 모래 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가 쪽으로 가져왔고
또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릴 때는 바다도 또 너희와 한가지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단순한 것들과 함께 웃더라.”
“너희 영그러운 몸은 바다 같으니라.
영원히 더럽히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해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능히 붙잡을 거냐?”
“너희 고통은 너희 깨달음을 둘러싸는 껍질를 깨침이니라.”
“악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내 어릴 적에 똥간에 빠졌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날 학교에서 변소에 갔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가느다란 둥글나무 둘을 건너 놓은 데서 반 길이나 되는 밑엘 떨어져 옷이며 얼굴이며 왼통 똥칠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가는 나무를 놓은 다음에는 어느 놈이 빠져도 빠지게만 되어 있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이 밥을 먹는 이상 똥은 누게만 생겼고, 변소가 있는 이상은 어느 때 어느 누가 똥을 묻히는 일이 있어도 있게 마련이건만, 아무도 그렇게 된 나를 보고 제 일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거 어째 그랬느냐?” 하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선생님도 동무들도 흉을 볼까봐 두려운 생각뿐이요,
때 마침 여름이 되어 강냉이가 길 넘게 자란 때라, 그 강냉이는 아무 시비도 흉도 아니 볼 듯해, 그 푸른 터널 속을 혼자 걸어 집으로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잠깐 놀래는 듯했으나, 욕도, 때리지도 않고 곧 옷을 벗기고 씻어주었다.
평소에는 새 옷을 줄 때면, 더럽히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요, 그래서 사실은 맘도 별로 놓지 못하고 놀군한 어머니건만…….
그렇지, 어머니밖에 없지.
 
글을 읽다 말고 나는 책머리에 있는 초상을 다시 보았다.
보나마나 이 책을 쓴 것은 우리 어머니다. 지브란이 뭐라 했나?
“또 너 망망한 바다여, 잠잘 줄 모르는 엄마야
너 만이 강물과 시내에겐 평화요 자유더라.”
나는 내 옷을 들여다보고 내 손을 맡아보았다.
지금은 아무 얼룩이도 아무 냄새도 없다.
또 다시 보았다. 이 옷이 왼통 똥이요, 이 주름진 살이 왼통 똥이다.
그 순간 억만 화살이 몸에 와 박힌다.
마른 기억아 물러가라, 나는 지브란과 함께 노래하련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 물결 위에 타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 꿈속에 얼마나 자주 찾아 왔었느냐? 인제 너희는 내가 깨는 때에 왔구나. 그 깸은 나의 한층 더 깊은 꿈이니라.
가야지, 어서 가야지, 순풍에 돛을 잔뜩 달고 어서 가야지.”
우리 엄마는 바다요, 나도 바다다.
 
칼릴 지브란을 내가 첨으로 만난 것은 일곱 해 전이다.
전쟁 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와서 우리가 불사조(不死鳥)라면 이 속에서 살아나련만 하고 있던 때이다.
그 잿더미를 들추적거려 보느라고 구약의 인물들을 고쳐 읽고 있는 때에 미국에 가 있는 신영일 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보내준 것이 이 『예언자』였다.
듣는바 첨인 이름이요, 보내는 이도 지브란에 대해 아무 소개도 없었다.
한 번 읽고 곧 이것은 한때 유행하고 지나갈 글이 아님을 알았다.
혼자 읽기는 아까운 마음에 타자를 해서 몇 사람이 몇 차례 모여 읽은 일이 있었고 우리말로 옮겼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내 영어에 감히 엄두가 아니 났다.
그 후『사람의 아들 예수』(Jesus the Son of Man)를 얻어 읽게 되자 지브란을 알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으나 이날껏 그리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높고, 그렇게 넓고, 그렇게 아름다운 혼인데, 차차 알고 보니 벌써 몇십 년 전에 세계적으로 이름났던 글이요 마흔 가까운 말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는데, 어째 우리나라에선 이리도 모를까?
미국 갔다 온 사람들, 문학 한다는 사람들이 미웠다.
아니다, 내가 듣고 봄이 좁아서 그렇겠지.
남을 나무랄 것이 없지, 나 자신 일곱 해를 두고 때때로 읽는다 하면서도 지브란을 참 알지는 못하였다.
인제 내 모래 탑이 무너져 보고, 똥간에 빠져 강낭밭 고랑밖엔 몸을 둘 곳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이 났고, 다시 읽어 그의 입을 통해 오는 어머니 음성을 들었다.
인제 생각해보니, 지브란이라는 말의 뜻이 ‘영혼의 위로자’ 혹은 ‘고치는 자’ 아닌가?
나도 몇 십 년 전부터 그리 생각했고 그도 그러지만 ‘우연’은 없다.
그럼 그는 저 자신이 이때에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려 뽑힘을 입고 고임을 받은 예언자신지도 모르지.
 
사상으로 하면 지브란은 반드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는 소위 새 것을 내두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맨 처음의 호수에서 흘러나는 한 줄기 흐름이다.
처음부터 있는 말씀을 새 옷을 입혀 내놓은 사람이다.
옛 곡조를 새 마음으로 새 소리갈로 노래한 사람이다.
그는 ‘한삶(大生命)의 깊은 마음의 한 가닥’ 이로라 한다.
그는 사상가가 아니요, 무슨 주의자가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었다.
시를 지었으나 그 시는 미장원에서 나온 미인 같은 시가 아니요,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렸으나 그의 그림을 본 사람은 말하기를 “그저 그림만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는 그저 산 사람이요 살잔 사람이었다. 너희가 나를 구태여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살기주의자(Life-ist)다” 했다.
그는 단순을 좋아하고 위선(偽善)을 미워했다.
그는 시꺼먼 좋은 흙(Black good earth)을 사랑하여 자기가 내는 책도 시꺼먼 책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날개 돋쳐 올라간 자아(自我)”라 하고, 우리 혼을 허공의 에델 속에 펼칠 것이라 하면서도, 겸손한 마음에 사람은 어디까지 땅의 아들이라 하여, 현대 문명이 정신의 자람은 없이 몸부터 난다 하여 비행기를 싫어하였다.
나무를 좋아하여 나무가 만일 한 그루만이었더라면 사람들이 엎드려 예배를 했을 것이라 하며,
뉴욕 시의 가로등이 없어지고 달빛, 별빛에 본다면 참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 한데 녹아든 점이다.
그는 그 난 곳이 저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이 서 있는 브샤리의 산촌인 것같이 그의 사상도 한편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있으면서 또 한편은 매우 인도적이다.
그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결코 셈 인종식의 예언자가 아니요, 차라리 인도의 성자 같은 성격이다.
 
지브란 저 자신이 어릴 적에 ‘작은 화산’이로라고 자칭했듯이 맹렬한 점이 있었고, 한번 노하여「반항정신」이란 시를 쓰면 그것이 젊은 아라비아 혼을 온통 불붙여 그때의 터어키 제국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고 그 자라났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파문령을 내리게까지 되었지만 후일에 그 혼이 훨씬 자라고 나면 그 모습은 차라리 ‘녹아서 흘러 밤을 향해 노래불러주며, 조용히 흘러가는 시내’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 이름이 세계적으로 높아지자 본국의 유지들이 돌아 와서 지도자가 되어 달라 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들의 정치적인 기대를 맞추어주지 못할 것을 알고 욕을 먹으면서도 거절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제국주의적인 물질문명이 한참 맹렬히 일어나던 20세기 첨에 있어서 그는 그 운명을 벌써 예언하였고, 괴물 같은 소위 진보라는 것이 아직도 동트기 전의 동틈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을 주장하였다.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지옥으로 가라 하라” 하였다.
“내가 저 바닷가에 도시를 하나 세운다면, 나는 바닷가 한 섬에다가 자유의 신상(神像)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울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의 발밑에서는 사람들은 항상 싸울 것 밖에 없지만, 아름다움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형제같이 손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긴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지면서도 생존경쟁의 사나운 물결에 휩쓸려 자포자기의 지경에 이르렀던 아라비아에 났다.
그는 그렇게 된 민족에게 굳어진 도덕 교훈과 말라빠진 종교 교리가 아무 산 기운을 소생시키는 힘이 될 수 없고 그저 몰아치고 비판하는 책망만으로는 죽은 시체에 채찍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가졌다” 하는 그는 또 한편으로는 다 썩은 듯한 그 살 속에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고, 바람에도 마르지도 않는 혼이 살아있는 것을, 구름바다 속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듯이 보아냈다.
그는 꽉 믿었다.
따뜻한 햇볕만 쬐면 씨는 곧 굳은 껍질을 터치고 나올 힘을 그 속에 가진 것을 꽉 믿었다.
필요한 것은 짐승 잡아 피 흘려 하는 제사도 아니요,
화 있을진저 하는 책망도 아니요,
칼날 같은 비판도 아니요,
두더지같이 하는 지하운동도 아니요, 타락한 중에도 믿어주고, 무지한 중에도 알아주고, 넘어진 중에서도 같이 붙들어 일으켜주고, 같이 흙이 묻은 손으로나마 서로 떨어주는 혼의 아름다운 빛뿐이다.
구약의 예언자가 늦은 가을 몰아치는 서풍 같다면, 지브란의 예언자는 이른 봄에 얼음을 녹이는 봄바람이다.
그리고 거기 예수의 어느 면목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지브란의 예수전을 지브란 복음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지브란의『예언자』는 그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것을 쓴 것은 열다섯의 소년 때였다.
파리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도 그는『알무스타파』는 늘 끼고 다녔다.
몇 번을 고쳐 써 스물다섯 살 때에 어머니께 보였을 때,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는 그 어머니는 “좋다, 그러나 아직 때가 멀었다” 했다.
그것은 아직 ‘푸른 과일’이어서 그 빛과 향기와 맛이 무르익지 못했었다.
그가 서른다섯 살에 미국에서 그것을 영문으로 발표한 때는, 발표하기까지 다섯 해 동안에 다섯 번을 고쳐 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그의 글이 결코 미문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수수한 말이다.
그는 글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제 혼을 다듬은 것이다.
그 따뜻한 빛이 아라비아의, 또는 세계 허다한 지친 혼에 소생하는 힘을 주었다.
지브란이 곧 민족의 위인이 되고 그의 글이 아라비아 문학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브란에게서 한 친구를 발견하였다.
그는 말했다. “벗을 사귀는 데 정신을 깊이 하는 밖에 아무 목적도 주지 말라.”
그는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바닥, 멸망할 자만이 있다는 그 바닥에 내려와서 따뜻한 손으로 일으켜 거기서도 오히려 일어설 수 있게 함으로 내 정신을 한층 깊게 하여 주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내게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들을 가지고 나를 찾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내촌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없이 되었다.
인젠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개 배 깨어진 자다.
다만 칼릴 지브란만은 들의 한 송이 작은 풀꽃같이 이름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자유로 그 의로운 나그네의 옆에 올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말하기를, “알아줌에는 구속함이 들어 있다”고 한다.
혹은 지브란은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영혼의 위로자요 의사이신 ‘그이’가 그 의인의 구속을 면하고 몰래 나 같은 것에게 오시려고 허술한 옷을 갈아입으신 것인지도 모르지.
어느 의미로는 내가 이 나라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의인보다는 죄인이 많지 않을까?
제 잘못으로거나 남의 잘못으로거나 세계의 큰길 위에 앉은 늙은 갈보요, 수난의 여왕이지.
또 어느 의미로는 우리나라는 세계의 대표 아닐까?
이리하여 나는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겼다. 군인에게도, 학생에게도, 농사꾼에게도, 엉터리 장사꾼에게도, 깡패에게도, 사창굴의 짓밟힌 꽃에게도, 철창 밑에 매어 논 승냥이에게도 다 한  권씩 주고 싶어서…… 그들도 다 내 마음일 것만 같아서…….
인제 보니 미운 사람, 몹쓸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옮기자니 부족한 내 영어에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일찍이 이것을『여원』(女苑)지에 발표했던 윤정은 님께로 갔더니, 다 번역해 놓은 원고를 아낌없이 빌려주고 또 같이 읽으며 고쳐주어서 많이 도움이 되었고, 칼릴 지브란의 짤막한 전기를 부탁하여 실리게 되었으므로 그 고맙단 말을 여기 붙여둔다.
1960년 겨울 함석헌
 
 
 
 
새 판에 붙이는 말

내가 예언자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이십여년 전 일인데 오늘까지도 이 책을 놓지 않고 다시 맛보고 다시 맛봅니다. 이것은 씹을수록 맛나는 영을 살찌워 주는 글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나는 될 수 있으면 번역 냄새가 아니나도록 하고자 노력도 했습니다만, 그보다도 어떻게 하면 그 글 뒤에 숨은 지브란의 정신과 그 혼의 입김을 붙잡아 전할 수 있을까 해서 내 딴으로는 애를 쓰노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다 아는 단어인데도 붓대를 놓고 몇 시간 며칠도 있어야 했고, 심하면 원고를 인쇄에 넘기는 날까지 의문표를 질러 놓고 지브란과 계속 문답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 덕택에 좋은 친구를 많이 얻었고, 요새는 지브란 붐까지 일어난다니 어쨌거나 고마운 일입니다.
‘씨알의 소리’에 특집으로 낼 때 부수도 넉넉히 하노라 했는데 다 나가고 없습니다. 이번에 내는 것은 거기 조금 수정을 했고 또 원판에 있는 그림이 좋기 때문에 분발해서 그것을 다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브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기에 거기 도움이 될까 해서 생전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미카엘 나이미의 ‘칼릴 지브란’에서와 그의 일생의 협조자였던 바바라 영의 「레바논에서 온 이사람」에서 한 절씩을 옮겨 넣어습니다. 나이미는 유명한 아랍 문학가요, 영은 당시 미국의 젊은 여류 시인으로서 지브란이 처음으로 예언자의 낭독회를 열었을 때 그 매력에 사로잡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원고를 받아쓰며 정리하며 충실한 협력자 노릇을 했던 친구입니다.
 
지브란은 자기가 만일 이상향을 건설한다면 그 입구에는 정의 신상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우겠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의의 신 앞에서는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지만 아름다움의 신 앞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오늘의 아랍, 오늘의 레바논을 지브란이 와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할까요? 아랍은 그만두고, 나는 이 살벌해지고 썩어지고 매정해진 이 우리나라에 지브란을 읽음으로 인해서 다 죽어 없어져 가는 이성과 인정과 혼에 얼마쯤이라도 소생하는 기운이 돌아왔으면 합니다.
 
1976. 2. 22.  함석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