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8

사람의 아들-옮긴이의 말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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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사람의 아들-옮긴이의 말
작성자 바보새 14-02-07 16:38 조회1,2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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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지브란이『예언자』를 낼 때는 본래 3부작으로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예언자』를 출판하자마자 곧 둘째 것에 착수했습니다. 그 제목은 『예언자의 동산』(The Garden of Prophet)이었습니다. 지브란의 말대로 하면 첫째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 것이고,『예언자의 동산』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자는 것이고, 마지막『예언자의 죽음』(The Death of Prophet)에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예언자의 동산』은 이 부분 저 부분 써놓고, 아직 그것을 정리하지 못한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후 1933년에 그의 일을 돕던 바바라 영이 그것을 정리해서 출판했고, 마지막『예언자의 죽음』은 아직 초안도 아니 됐고 다만 마지막 끝절 하나를 미리 말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그는 오르팔리스 성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장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숨지게 할 것이요, 그는 그 돌 하나하나를 축복하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런데『사람의 아들 예수』는 그가『예언자의 동산』을 쓰고 있는 동안에 또 한편으로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사람의 아들 예수』도『예언자』도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속에 있은 지가 오래 됐습니다. 그런 것을『예언자의 동산』을 쓰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해서 옆의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모양을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1926년 11월 12일 밤 그 순간이 왔습니다. 내 기억력이 있는 한 영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지브란은 그때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예언자의 동산』을 쓰느라고 방안을 가만히 못 있고 왔다갔다하며 불러주다가는 또 멈추어서고 섰다가는 또 불러주고 하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멈칫 서더니 얼굴에 이상한 어둠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무슨 덮개가 얼굴을 덮어씌우는 듯한 갑작 변동이지만 나는 지난 경험에 의해서 그것이 무슨 갑작스런 놀라운 말을 하려는 전조(前兆)인 것을 알았습니다.
방안은 고도로 긴장된 분위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옆에 누런 노트를 펴놓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찡그리고 늙은 것 같았습니다. 전에 있던 광채나 아름다움은 어디로 가고 날카롭고 슬픈 빛을 띠었고, 나이 많고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그러자 한 목소리가, 지브란의 목소리는 아닌, 한 떨리고 생기 없고 더듬더듬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고통과 절망이 내 가슴을 칼처럼 뚫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50년 전 이 밤이었다. 그 기억이 도사린 전갈처럼 내 가슴에 서리어 있다. 이것은 쑥보다도 쓴 잔 같다. 이것이 내 모든 낮들을 어둡게 했고 내 모든 새벽들을 망그러뜨려 버렸다. 그놈의 밤이 천 번도 더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는 다시 왔다갔다하며 그 말을 되뇌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그것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그 말이 계속되는 동안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이상하고 비통한 음성은 애절하고 무서워 듣기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내 가슴은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인간 때문에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고민은 내게 이상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갑자기 딴 사람이 됐던 것같이 또 갑자기 지브란 제 자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의자로 가서 주저앉아 말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는 완전히 천연스런 태도로 나를 보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내가 누구였었는지?”
나는 ‘몰라요’ 했습니다.
그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먼 거리가 있는 듯한 말로.
“나 유다였어, 가엾은 유다. 생각해봐, 그가 만일 자살을 아니했담 어떠했을까? 그가 오십년을 계속 살았다고 해봐, 백년을 살았다 해봐, 그 살림이 어떠했겠나?”
그는 오랫동안 잠잠히 곳곳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 받는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거기에는 고뇌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눈이 캄캄해지는 빛을 띤 얼굴로 소리를 쳤습니다.
“나 이제 그 책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밤에 그 책, 자기 가슴 속에 몇 해를 두고 품고 있었던『사람의아들 예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대개 어떤 심경을 가지고 얼마만한 노력을 가지고 이것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시는 이들이 물론 생각이 있을 줄 알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술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직접 신앙과 관련 시켜서 교리나 신학의 토론을 일으켜서는 아니됩니다. 앞으로 읽어가시노라면 알겠지만, 지브란이 그리는 예수에는 성경 중에 나오는 말과 물론 대체로는 그것을 따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예술가의 특권에 의하여 맘대로 자유로이 상상하는 것이 있으므로 성경과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체험을 보여주려는, 그 말과 붓으로는 그릴 수 없는 모습에 접하도록 해야 할 것 입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그는 형식화한 신앙 속에서 거의 죽어버린 예수를 살려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날카롭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수 당시의 77인의 사람을 동원시켜서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전해주게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성공했습니다. 보는 우리 가슴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감동을 받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성경의 말과 반대되는 듯한 한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는 예수님을 아주 온유 겸손한 인격으로 말했는데 지브란은 그 말들을 좋아 아니합니다. 그것도 참으로 이해하고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글자에만 잡힌다면 상당히 문제를 일으킬만한 것입니다. 지브란도 예수의 온유 겸손하신 것을 반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위 믿고 공경한다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것을 못 견디어 하는 지브란의 강한 성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미카일 나임시가 전해주는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얼마 전부터 내 마음과 상상 속에는 예수의 모습이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어, 나는 이젠 그를 믿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믿기는 하노라면서 언제나 예수라면 예쁜 여자 모습에 수염만 난 것같이 그리는 그 사람들에게 싫증이 나고 진력이 났어. 그들에게는 예수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또 낮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 것이야. 나는 또 그를 부정하려는 사람들도 싫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 예수를 요술쟁이나 협잡꾼이 되는 것처럼 말을 해. 그보다도 더 구역질나는 것은 저 학자라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예수가 역사적으로 있었나 없었나를 증거하기 위한 길다랗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옛날 일만 파고들지만, 예수라는 그 인격처럼 위대하고 가장 실재적인 인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예수를 반은 하나님 반은 사람이라는 튀기로 만들어버리는 저 신학자라는 늙은 요술쟁이들 이야기야 할 것도 없지. 내 예수는 너나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다…….
 
과학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시는 토론하는 심정을 가지고는 못 읽습니다. 이것은 시입니다. 글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읽어야합니다. 내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그 시인과 시를 알 수 있습니다. 작자를 작자의 마음으로 읽어주는 사람만이 또 자기는 자기로서의 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지브란의 예수를 지브란의 심정으로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지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지브란은 바로 레바논 산록에서 났고, 예수가 생전에 쓰셨던, 혹은 쓰셨던 것과 가까운 말을 하면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아주 특색 있는 메노나이트파 교회에서 자랐으므로 살아 움직이는 예수를 그리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유다의 심정을 체험해 보려고 노력했던 그 한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의 태도가 얼마나 진지했음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친구를 보아서도 알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그의 대적을 보아서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유다를 체험한 후 “자, 이제부터 나는 그 책을 쓸 수 있다” 한 것은 옳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