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9

공 (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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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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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은 순야타(산스크리트어शून्यता, Śūnyatā→비어 있음 · 공허(空虛))를 번역한 것으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 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기본 교의 또는 사상이다.

공 사상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하게 되자 특히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근본사상으로 강조되었다. 원래, 공 사상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서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함)라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하며,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반야경(般若經)》과 용수의 《중론(中論)》 등에 나오는 공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인도 불교의 종파가 중관파이다.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의 삼론종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을 연구 · 강술하는 종파로 인도 불교의 중관파에 해당한다.[1]

공 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이대조류인 중관파와 유가유식파 모두의 근저가 되는 사상이다. 유가유식파에서도 공 사상이 중시된 것은 유가유식파와 법상종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서두에서 논의 저술 목적 중의 하나로, 이공(二空: 두 가지 공)에 대해서 미혹된 견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공(二空)의 교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이 해탈(열반)과 보리(반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2] 또한, 중국 · 한국 · 일본 · 티베트 등의 대승불교는 모두 인도의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하므로, 공 사상은 대승불교 전체의 기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공 사상[편집]

대승불교에서 공은 여러 가지 뜻으로 설명되는데, 특히 허무적(虛無的)인 뜻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은 만유의 모든 현상은 그 성품으로 보면 다 공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경전과 중관론의 주장이다. 이러한 불교 교의를 공 사상(空思想)이라고 한다.

공(空)은 존재물(存在物)에는 자체(自體) · 실체(實體) · 아(我)라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이 교의는 이미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연소생(因緣所生), 즉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해당한다.

즉, 각 개인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 · 法")는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生起)한 것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만 그 존재성이 가적(假的)으로(임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오온의 가화합")이며, 실제로는 거기에는 어떠한 항상불변(恒常不變)한 자아(自我)나 실체(實體) 같은 것은 없는 제행무상 · 제법무아이며, 때문에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 사상에서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또한 대승불교 실천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대승경전 중 《반야경(般若經)》과 이에 입각하여 용수(龍樹)가 저술한 논서인 《중론(中論)》에서 명백하게 밝혀 두고 있다. 《중론》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법 · 존재 또는 현상은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다)"의 게송이 있다.

諸法有定性。則無因果等諸事。如偈說。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眾因緣生法。我說即是空。何以故。
眾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眾因緣故無自性。
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為引導眾生故。
以假名說。離有無二邊故名為中道。

是法無性故不得言有。亦無空故不得言無。
若法有性相。則不待眾緣而有。
若不待眾緣則無法。是故無有不空法。

각각의 법이 고정된 성품(定性)을 지니고 있다면 곧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한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無)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을 공하다(空)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법(法: 존재)은 고정된 성품(性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있음(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없음(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법(法: 존재)이 고정된 성품(性相 · 성상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난다).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법(法: 존재)은 없는 것(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음을 대전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 또는 고정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란 존재할 수 없다.

— 《중론(中論)》 4권 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 한문본

2공[편집]

대승불교의 교의에서 공은 크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2공(二空: 두 가지 공)으로 나뉜다.[3][4] 2공(二空)을 아법2공(我法二空)이라고도 하며,[5]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문에 인법2공(人法二空)이라고도 한다. 이공(二空)의 교의는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교의 또는 사상이 되었다.

이치로서의 2공[편집]

아공[편집]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4],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4] 아집(我執)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2][6]

법공[편집]

법공(法空)은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4],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4]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2][7]

아공(我空)을 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하며 법공(法空)을 법무아(法無我)라고도 한다.[4] 그리고 이 둘을 통칭하여 2무아(二無我)라고 하는데, 2무아(二無我)는 2공(二空)과 같은 뜻이다.[8]

2공(二空)의 교의 또는 사상은 후대에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의 3공(三空)의 교의 또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경지로서의 2공[편집]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해 간다는 입장에서는 2공(二空)은 실제로 증득될 수 있고 또한 증득되어야 하는 특정한 경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유가유식파의 경우, 이 종파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에 따르면 2공 중 아공의 경지에 다다르면 아집인 번뇌장이 소멸되어 열반(해탈)이 성취되고, 법공의 경지에 다다르면 법집인 소지장이 소멸되어 보리(반야 · 대지혜 · 완전한 깨달음)가 성취된다.[2][9]

성유식론》에서는 이와 관련된 수행 단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크게 자량위(資糧位) · 가행위(加行位) · 통달위(通達位) · 수습위(修習位) ·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5위 · 五位")로 나누고 있다.[10] 이 중에서 네 번째인 수습위는 다시 십지(十地)의 열 단계로 나뉘는데, 십지는 극희지(極喜地) · 이구지(離垢地) · 발광지(發光地) · 염혜지(焰慧地) · 극난승지(極難勝地) · 현전지(現前地) · 원행지(遠行地: 제7지) · 부동지(不動地) · 선혜지(善慧地) · 법운지(法雲地: 제10지)이다.[11] 《성유식론》에 따르면 아집인 번뇌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7지인 원행지(遠行地)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제8지부터는 아공의 경지에 있게 된다.[11] 그리고 법집인 소지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10지인 법운지(法雲地)에서 완전히 제거 될 수 있는데, 완전히 제거되면 다섯 단계("오위 · 五位")의 마지막인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게 되고 해당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비로소 부처가 되어 법공의 경지에 있게 된다.[11]

유가유식파는 열반과 해탈은 동의어로 사용하는 반면, 열반과 보리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유가유식파의 문맥에서 열반(또는 해탈)은 아집인 번뇌장이 완전히 제거된 아공의 상태를 의미한다.[9] 그리고 보리는 법집인 소지장이 완전히 제거된 법공의 상태를 의미한다.[9] 《성유식론》에서는 열반을 진해탈(眞解脫: 참다운 해탈)이라고도 표현하며 보리를 대보리(大菩提: 큰 깨달음 · 완전한 깨달음)라고도 표현하고 있다.[2][9]

3공[편집]

3공(三空)은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을 통칭하는 불교 용어이다. 3공의 각각은 증득한 경지를 뜻하기도 하고 또는 경지를 증득하기 위한 수단을 뜻하기도 한다.[12]

아공[편집]

아공(我空 · ātma-śūnyatā)은 실아(實我)가 없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색 · 수 · 상 · 행 · 식의 5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존재로, 진실로 "나"라고 집착할 것이 "없다"(공무 · 空無)는 것을 뜻한다.[13] 또한, 수행에 의해 나라는 관념과 나의 소유물이라는 주관적 미집(迷執)인 아집(我執)을 벗어난 경지를 뜻한다.[14]

법공[편집]

법공(法空)은 제법(諸法) 또는 만유(萬有), 즉 물질(색·色)과 마음(심·心)의 모든 존재는 모두 원인과 결과, 즉 인연법에 의해 생긴 임시적인 가짜 존재로서 거기에는 고정된 실체로서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러한 의미에서 만유(萬有)의 체(體)가 "없다"(공무 · 空無)는 것 뜻한다.[15] 또한, 수행에 의해 물질과 마음의 여러 가지에 대한 객관적 미집(迷執)인 법집(法執)을 벗어난 경지를 뜻한다.[14]

구공[편집]

구공(俱空):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경지에 차례로 도달한 후, 다시 그 아공(我空)과 법공(法空)까지도 버려 비로소 제법(諸法)의 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14] 또한, 수행에 의해 이러한 경지를 증득한 것을 뜻한다.

원효는 자신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대의를 기술하는 문단에서, 본성, 즉 마음의 근원[心之源]은 있음(有)과 없음(無)을 떠나 있어 홀로 청정[淨]하며 또한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의 3공(三空)의 바다 즉 마음의 근원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원융하고 있어서 담연하다(湛然: 편안히 다 비추다, 적정한 가운데 대지혜가 있다, 적조(寂照)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원효는 마음의 근원은 깨뜨림이 없으면서도 깨뜨리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면서도 세우지 않음이 없으므로 무리(無理: 이치가 끊어진 자리)의 지리(至理: 모든 것을 세우는 지극한 이치)이자 불연(不然: 그러한 것이 끊어진 자리)의 대연(大然: 크게 그러한 것, 즉 만법을 세우는 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6][1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