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8

<웰컴투 지구별> - 중요부분 요약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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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지구별> - 중요부분 요약 영성 / 독서

2012. 5. 7. 1:34


https://blog.naver.com/true_fruit/11013785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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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다. 넋두리처럼 늘 존재하는 일상 속의 어려움이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커다란 사건이든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 놓여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사실 그 ‘왜’라는 물음에 속 시원한 답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이때 그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이 일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이처럼 인생의 커다란 시련 앞에서 ‘왜’라는 물음을 ‘어떻게’라는 물음으로 바꾼 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만난 이들은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 극심한 장애아를 자녀로 둔 부모, 불의의사고로 사지마비가 된 사람, 사랑하는 이를 연거푸 잃은 사람, 반평생을 알코올 중독자로 보낸 사람 등 어느 하나 그 고통의 무게가 가벼운 이가 없다. 그런데 그들이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영매와 채널러 들을 만나 자기의 ‘전생 계획’을 알게 되면서 지금의 고통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그로써 고통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전생 계획이란 태어나기 이전, 영원한 영혼 상태의 우리가 지금의 생을 위해 짜놓은 계획을 말하는데, 그 계획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녀로 태어날지, 어떤 학교를 다니고,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미리 정한다고 한다. 물론 그 안에는 삶의 어떤 시련을 겪을지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 보이는 시련을 계획하는 것일까? 바로 그 고통을 겪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 영혼이 더 높은 존재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혹 견디기 힘든 고통을 스스로 계획했다는 말이 충격적으로 들리거나 전생 계획과 같은 개념이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초점이 거기에 있지는 않다. 저자 역시도 독자에게 전생 계획을 전부 납득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지, 내가 정말 태어나기 전에 이 경험을 계획한 것이라면 나는 왜 그랬던 것일지” 한번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삶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여행”이라는 문장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저자가 이 책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기를 권했듯이, 시련을 껴안고 용기 있게 고통의 숨은 의미를 찾아 들어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독자들도 공감의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면 좋겠다.



1. 태어나기 전에 삶을 계획하다.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정말 태어나기 전에 이 경험을 계획한 것이라면? 나는 왜 그랬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삶의 시련에 새로운 의미가 생기고, 자기 발견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마음으로 읽기를 권한다. 마음은 머리보다 더 높은 형태의 앎, 더 위대한 지혜를 준다. 지적인 분석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영원한 영혼인 당신이 이번 생을 계획했을 때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알게 될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물질계에서의 삶으로 인해 생길 여러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감정은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머리는 장벽이 된다.

많은 의미에서 삶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여행이다. 우리가 삶의 시련을 계획하는 것은 바로 이 여행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이고, 닫힌 마음을 깨뜨려 열기 위해서이며, 그리하여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가치를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지구로 들어올 때 우리는 영혼이었던 우리의 기원을 잊는다. 신성한 영혼인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기억해 내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기에 우리의 진짜 정체성을 잊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는 이처럼 더 깊은 앎을 얻기 위해 기쁨과 평과, 사랑의 세계인 비물질 영역을 떠난다. 거기서는 자신의 반대항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빛만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빛을 어떻게 이해하고 온전히 음미할 수 있겠는가? 빛이 무엇인지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억해 내게 하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평화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으며, 때로 증오를 품기에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전생계획은 ‘진정한 내가 아닌 나’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데, 이는 그 경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깊은 연민의 마음을 가진 어떤 영혼이 연민 자체인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고자 소망할 때 그는 불화가 깊은 가족 사이에서 태어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는 연민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며 연민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된다. 무엇인가의 가치와 의미를 가장 잘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것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바깥 세계에서 연민을 찾을 수 없으므로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 안에 있는 연민을 기억해 내게 된다. 영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일시적이고 짧지만, 그로 인해 얻는 지혜는 진실로 영원하다.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것은 삶의 시련을 넘어서는 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몸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몸을 심하게 다치면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몸을 다쳤을지라도 자신을 영혼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그보다 고통을 덜 느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에 닥친 시련의 의미를 자각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시련에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시련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에너지의 길’을 낸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모두가 에너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세상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기회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큰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의 현재 진동수 안에 심어진 씨앗과 같다. 우리가 시련을 통해 성장하며 자신의 진동수를 끌어올릴 때 세상의 진동수 역시 안으로부터 상승한다. 물잔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우리 각자는 세상 전체의 색조를 바꿀 수 있다. 비록 산꼭대기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쁨의 느낌을 만들어냄으로써 다른 이들이 기쁨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는 파동을 보낸다. 평화의 감정을 만들어낼 때는 전쟁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되는 에너지를 퍼드리는 것이며,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는 그 만나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우리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시련을 계획한다. 공통된 목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치유다. 특히 지난번의 생애에서 풀어버리지 못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치유다. 예를 들어 어떤 생에서 두려움에 잠식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다. 그 생애를 마감할 때 그에게는 두려움의 에너지가 흔적으로 따라 붙는다. 그가 깊은 두려움에 직면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특히 그렇다 두려움이라는 낮은 파동의 에너지는 영혼들이 사는 높은 파동의 비물질적인 영역으로 고스란히 옮겨지지는 않지만, 에너지의 잔여가 영혼의 세계로 전달된다. 그는 이 에너지의 잔여를 느끼고 앞으로의 삶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이를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카르마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련을 계획하기도 한다. 카르마는 때로 우주적인 빚으로 개념화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균형이 맞지 않는 에너지로 설명되기도 한다. 우리는 각기 자기 영혼 그룹과 함께 카르마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이전 생애를 함께했으며 진화의 같은 단계에 있는 이들이다. 그 과거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영혼에게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부모, 가장 친한 친구, 숙명의 적 등 많은 역할을 맡겼다.

예를 들어 같은 그룹에 있는 어떤 영혼이 몸이 아픈 누군가를 돌보는 데 삶의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하자. 만일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맡은 그 영혼이 다음 생에서 병을 앓는 시련을 겪기로 계획했다면, 보살핌을 받았던 그 영혼이 그의 병수발을 들어줌으로써 에너지 교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몸을 가지고 태어나면 두 영혼 모두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보살핌을 주는 자가 되기로 선택한 이는 누군가를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에 부담을 느낄 수 있고, 어쩌면 전생에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카르마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단순한 소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연기할 역할을 미리 대본으로 짜놓았기 때문에 희생양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탓할 일이 아니다.

우주는 ‘나쁜’ 일들을 일으켜서 우리를 벌주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카르마는 마치 중력처럼 세계를 작동시키는, 중립적이고 공평한 법칙이다. 우리는 넘어지거나 고꾸라졌을 때 중력을 탓하거나 중력의 희생양이 되었다거나 중력이 우리를 벌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르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시련에 대한 원망, 희생양이 되었다는 감정, 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그 대신 우리가 배우기를 희망했던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영혼을 더욱 성숙시켜 준 시련에 깊은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영혼인 우리는 윤회를 거듭하며 그 사이에 많은 것을 배우지만, 배움은 물질계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때 더욱 깊이 각인된다. 영혼의 세계에서 배우는 것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같지만, 이 지구의 삶에서 배우는 것은 배운 것을 적용하고 시험할 수 있는 실습과 같다. 그리하여 앎은 깊어지며, 이는 영혼에게 더없이 중요한 경험이 된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사랑 그 자체다. 삶의 시련은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그리하여 사랑인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하는 기회를 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공감, 용서, 인내, 판단치 않음, 용기, 균형, 받아들임, 신뢰 등 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또한 이해, 평온, 신념, 선한 마음, 감사, 겸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병을 앓기로 계획하다




존의 이야기-에이즈와 자기 존중




존은 1956년, 앨라배마 주의 인구 2,500명 정도 되는 리빙스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부는 인종 차별이 심하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존은 십대가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신문의 고민 상담란 기사를 보여주며 자신의 성적 지향을 털어놨다. “그러니까 아버지, 저는 …. 동성애자예요.” 아버지는 오열했다. “정신 차려. 넌 엘모어 집안의 독자야. 우리 집안의 대를 끊어놓을 작정이냐? “

학교에서는 그의 성적 지향을 눈치 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반 친구들은 그를 ‘호모’라고 부르며 따돌렸다. 존은 또 자기가 자란 지역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저희 집안은 감리교였어요. 감리교에서는 동성애를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거라고 보죠.”

“리빙스턴에는 주로 어떤 교파의 신자들이 많았나요?”

“침례교요”

“존, 당신의 인생에서는 학교든 시구들 사이든, 심지어 종교적으로 까지도 늘 수치심이 붙어 다녔네요. 그런데 당신은 한 인종 전체가 공공연하게 수치를 당하는 곳에서 태어나기로 선택을 했어요. 제게는 그 점이 참 특이하게 생각되는군요.”

“맞아요. 수치심이 늘 붙어 다녔죠. 그렇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난 수치심을 주는 가정에서, 수치심을 주는 학교에서, 수치심을 주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에이즈는 수치심과 직결되는 것이었는데, 이런 일은 존이 미국 남부라는 곳에서 늘 보아온 것일 뿐 아니라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했다. 에이즈 진단을 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말하자면, ‘드디어 벌을 받는구나’ 그런 기분이었죠.”

그 후 존은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임사 체험을 했다.

“존, 에이즈와 임사 체험이 수치심을 극복하는 데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나요?” 내가 물었다.

“수치심을 극복하는 긴 여정에서 꼭 대면해야 하는 시련들이었지요.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거예요. 그렇게 다정하게 껴안으면 두려움은 사라지지요. 임사 체험을 하면서 ‘그들’이 나한테 더는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웃과 교사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내게 손가락질하고 사라지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들은 이제 내게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사는 거, 진실하게 사는 것뿐이에요.”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수치심을 주는 말들은 내 인생에서…. 옮길 수 없는 단단한 무엇이라고나 할까요? 단단하고 옮길 수 없는 것이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밟고 올라서 넘어가야지요.”



글레나 디트리히와 세션




채널러 글레나 디트리히가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존재의 의식이 그녀를 통해 말했다.

“당신들이 셋이므로 우리도 셋이 왔습니다.” 접신된 존재가 입을 열었다. …

“존은 이번 생에서 에이즈 환자로 살겠다고 태어나기 전에 계획했나요? 그렇다면 까닭은 무엇이지요?”

“물론입니다.” 천사가 답했다. “성장을 방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을 가로막는 무거운 에너지 같은 것은 이 세계(비물질적 세계)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들은 사이 시간(죽은 뒤 몸을 얻어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에 다음 단계, 다음 상태로 올라가기 위해 영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의논하고 계획합니다. 당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

서로 돕기 위해 한데 모인 영혼들은 각자의 성격, 각자가 존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동원하여 그가 넘어야 할 장애물을 세웁니다. 그 장애물은 존으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분명히 보게끔 해주지요. 이는 장애물 경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같은 장애물을 많이 맞닥뜨리다 보면 여유가 생겨 나중에는 장애물 위로 몸을 날리기도 하고 아래로 기어가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그것이 더는 장애물이 아닌 것이 됩니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중요하지 않다거나,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거나, 소중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거나 하는 생각을 존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를 막고 있던 장애물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의 말을 듣고 시련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시련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이런 점에서 시련은 선물이다.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시련이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존이 에이즈라는 병을 경험함으로써 어떻게 영혼의 성장에 도움을 받지요?”

“진정한 자기를 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만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끝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신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존의 전생 계획에 참여한 영혼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조건적인 사랑을 계획했어요. 기존의 가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존의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사랑해 주지 않았습니다. 존의 자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지요. 즉 자기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고, 다른 이의 기대에 부응해 인정을 받을 때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이에요. 여기서 혼란이 시작됩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믿어온 그 인격체는 쪼개지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에이즈라는 병은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하지 않다는 믿음과, 조건 없는 사랑을 향한 갈망 사이의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존의 영혼이 안에서부터 빛을 발하고 존의 인격체가 그 빛이 자신임을 믿을 때 치유가 일어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윤회는 더 낮은 어둠의 단계를 거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증오의 진동이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분리의 진동이 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음의 진동이 있으며, 두려움의 진동도 있습니다. …

그런 세계에 있는 여러분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지요. 여러분은 자신이 두려움이고, 증오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죽이는 일도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착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더 낮은 파동으로 행동합니다. 영혼이 몸으로 들어올 때 명철한 지혜가 대부분 사라지므로 인간인 당신은 당신이 곧 몸이라고 믿게 됩니다. 당신이 영혼이라는 기억이 멈추어버리는 겁니다. 이것 역시 계획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신성을 잊어버린 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니까요. 그 진실은 엄청난 힘을 일으키고, 믿음을 굳게 하며, 파동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존의 영혼 그룹에 있던 영혼들이 그에게 에이즈 환자로 살겠느냐고 물었고, 그가 동의했으며, 다른 이들은 그의 주변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를 판단하고, 거부하고, 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않는 역할을 맡기로 동의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제 말이 맞나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꽤 위험한 계획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존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강요한 믿음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그래서 자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어 버렸을지도 모르잖아요.”

“맞습니다. 존은 그 이전 여러 번의 생에서 그랬습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의 치유를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왜 그런 식이어야만 하나요? 조건 없는 사랑을 풍족하게 받으며 기쁘게 사는 삶은 왜 계획하지 않나요? 누구나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걸 배우게 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균형은 빛과 어둠을 모두 경험할 때라야 얻어집니다. 여러분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영혼은 여러 번 태어나기를 거듭하면서 빛과 어둠을 다 경험합니다. 인간 종 정체를 멸종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아동을 학대하는 삶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은 배움과 앎의 단계를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곳은 선과 악의 양극이 존재하는 영역입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의 균형을 찾으면 비로소 그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이원성이라는 개념을 버릴 수 있으며, 자기 내면에 만유의 주재에 대한 믿음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의 영혼 그룹은 기쁨과 사랑의 삶뿐 아니라 에이즈와 같은 시련을 주는 삶도 동시에 거치도록 함으로써 수치심을 극복하게 하려 한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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