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4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박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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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tSunp7nhonsored ·



안팎으로 많이 우울했던 날, 8월말에 낸 책에 대한 마음다한 서평을 만났다. 이 책이 왜 한달여동안 고작 백몇십부 팔리고 , 책을 보낸 모든 이들이 침묵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는 시간 들여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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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북리뷰]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박유하, 뿌리와 이파리 2020, 전자책)
오늘 어디선가 내게(당신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나는(당신은) 어떠한 반응을 할 수 있을까? 목소리의 존재를 애당초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면야 모를까, 목소리를 들었다면 일단 두 가지 반응 중 하나일 것 같다. 도대체 어떤 목소리인지 좀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서 집중해 보던가, 아니면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든 말든 다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던가. 물론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봤는데 별로 신경을 써도 되지 않았을 그런 잡음이나 소음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또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듣고 싶었지만 일단 어쩔 수 없이 무시했을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어떠했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행위란 어떤 개인에게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결과적으로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옴을 감지한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의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나는 (우리는) 그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무시할 것인가? 그러니 어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뿌리와 이파리, 2020)” 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해보기로 한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나에게 어떻게 전달될 목소리일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이 책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2013년 초판 발행, 2015년 삭제판 발행, 뿌리와 이파리) 출간 이후에 이어진 고소, 고발사태,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지난한 법정 싸움이 연속되고 있는 중에 낸 두 권의 책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뿌리와 이파리, 2018)”그리고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뿌리와 이파리, 2018)” 이후 2년 만에 나온 저자의 또 한 권의 책이다. 지난 5월 위안부 피해자 이셨던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 회견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정의연의 기부금 횡령 의혹, 그리고 이어진 나눔의 집 사태, 그리고 얼마 전 기소당한 윤미향 의원의 사건을 온 국민이 현재진행형으로 지켜보는 와중에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저자의 “목소리에 응답하기”란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남기신 “증언을 대신해서 말하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나는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저자가 에필로그를 통해서 밝히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느낀 상태에서 다시 복귀하자면, 즉 저자가 말한 그 “목소리에 응답하기”란 물리적인 발화능력을 잃어버린 망자로서의 그 누군가의 과거의 기억을 대신해서 발화하는 그런 권위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도미야마 이치로가 「전장의 기억」에서 표현했듯이, “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함께 어떤 시간성 속에서 대화해 나갈 수 있게 됨으로써 짜여지는 이야기로서의 증언” 이란 생각이 든다 (도미야마 이치로, p.95, 2002).
“이분들의 목소리를 나는 왜 들으려 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들었는가? 나의 맥락 속에 함부로 구겨넣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변’시키려 했던/하는 것은 아닌가? 결과적으로 잠시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분들의 목소리를 나 역시도 ‘이용’(이용수)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닌가? [………] 특히 배춘희 할머니의 경우 자신의 생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살아생전에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배춘희 할머니가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이었을지 대해 명확히 이해했다는 확신이 들고서였다[……] 정말은 여기에 담긴 이야기들이 배춘희 할머니의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확신,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란 결국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확신, 생전에 또다른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 그 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뿐 지금 다시 여쭌다면 오히려 직접 전하고 싶어했을 거라는 확신”. (박유하, 2020, 전자책 p.175)
또한 그 “목소리에 응답하기”란, 누군가가, 세상이 제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던,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자물쇠로 채워, 또한 그 목소리를 두꺼운 창문으로 꽉 닫아 가두어 버려서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던 그런 누군가의 외롭고 고독한(했던) 그 목소리를 우연히, 가까이에서, 실제로, 그렇게 운명적으로 듣게 된 한 사람의 이웃으로서,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가둔 그 자물쇠를 대신 부수고, 창문을 열어, 그의 갇혔던 목소리가 밖으로 자유롭게 들릴 수 있게 “돕는 행위”로서의,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세상에 자유롭게 들려주고 싶었던 그 ‘소원에 대한 응답하기’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들은 ‘모든’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그분의 말에 귀 기울여줄 ‘모든’ 이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건, 이 기록의 공개가 가져올 파장을 염두에 두면서 공개 여부를 고민했던 ‘지식인’으로서의 나, 다시 말해 ‘관리’자가 되려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고 그저 ‘말하고 싶어한’ 한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들을 우연히 들었던 사람으로서의 책무를 우선시하기로 한 결정이기도 했다. 특히 배춘희 할머니가 호소했던 남모르는 분노와 절망에 대해 우리 사회가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나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박유하, 2020, 전자책, pp.175-176)
첫 장을 열면서 바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만나게 되는 배춘희 할머니의 목소리는 일단 많은 독자들이 당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어, 한국어, 그것도 왜관 사투리가 자유롭게 섞여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할머니의 말씀을 거의 가감 없이- 저자가 밝혔듯이 실질적인 취사선택 없이, 글자 그대로 녹취, 옮겨놓는 과정에서 어찌 보면 상당히 난삽하게, 즉 산만하고 내용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내겐 낯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는 점.
다른 종류의 언어를 통합된 형태로 사용하는 트랜스랭귀징(Translanguaging)형태의 언어구사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사실 어색하거나 위화감이 생기기 보다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형태로, 특히 여러 다른 국가에서 살면서, 여러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 속에서 경험된 초국경적 이주(transnational migration)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주로 보이는 언어형태인데, 배춘희 할머니와 저자와의 대화를 보면서 내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배춘희 할머니는 그런 초국경적 이주자(transnational migrant)의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생의 디테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난 그것만큼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국경을 넘어서, 국적을 넘어서, 언어를 넘어서, 민족을 넘어서 이동하면서(on the move) 살아가신, 그런 생생한 이동과 이주의 경험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 나 역시 그런 초국경적 이주자의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하나여서 그랬던지, 어떤 동질감마저 느껴지면서, 할머니의 목소리에 더욱 한 발자국 가까이 가고 싶어졌고, 더욱더 그분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내 시각과 청각을 밀접하게 접촉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도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인 「01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 그리고 세 분의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담은 「02 또 다른 목소리 - 사죄, 보상, 기억」, 이렇게 두 부분. 첫 번째 파트인 “01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는 독자로서 상당히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따라가게 되었다. 2013년 12월부터 2014년 5월 사이에 저자와 할머니의 통화를 기록한 녹취는, 한 날 한 날의 녹취 가운데 그 대화 남겨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주고자는 어떤 실마리를 따라 다시 각각 소제목이 달려져, 사진, 운명, 귀국, 침묵, 으로 부터 시작해, 고독, 증언, 폭력의 기억, 두려움, 병, 추위, 호소, 눈치, 고민, 통곡, 불신, 분노, 꿈, 발각, 체념과 같은 주제로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배춘희 할머니와 대화 기록 중 표현, 용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거나, 할머니 말씀 가운데 불분명한 부분은 저자의 주가 달려있는 형태로, 이 책은 단순한 대화의 녹취록이라기 보다는 르포르타주에 가깝게 느껴졌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민족지학적 인터뷰(ethnographic interview)로까지 충분히 느껴지기까지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첫번째 스테이지와, 짧게 기록된 두 번째 스테이지를 통과하며 목소리 듣기와 목소리 반응하기를 마치고 나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피로해졌다. 도대체 나눔의 집과 정대협, 그리고 나눔에 집에 계신 할머니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이 앞으로 계속 벌어질 것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개인적으로 그 들려온 목소리에 괜히 반응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배춘희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첫 번째, 이 책의 독자로서 나는 ‘학대’라는 키워드가 그 무엇보다 먼저 떠오를 만큼, 배춘희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할머니가 겪으신 외로움, 괴로움이 다가올 때마다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누구보다 진정한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셨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과연 그런 위로와 위안의 경험과 현재는 과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두 번째, 한일관계와 내 개인의 일상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져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일그러진 한일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그리고 그사이의 각종 갈등, 그리고 최근 붉어져 나온 한국의 위안부 운동을 둘러싼, 바로 오늘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온갖 답답한 상황, 광경들이 배춘희 할머니의 고통과 오버랩이 되었기에 유감을 넘어선 짜증스러움마저 몰려들어 일단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이, 살아생전에 기록의 공개를 원치 않으셨던, 고인이 되신 배 할머님의 의향에 반해 그 ‘목소리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을 앞두고 저자가 가지게 된 깊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기록의 공개가 가져올 파장에 대한 저자의 염려, 두려움의 무거운 공기가 그저 책을 읽었을 뿐인 독자인 내게까지 너무나 강하게 전달되어왔기에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누군가 이 책을 꺼내어 들어 읽기 시작한다면, 즉 그 목소리를 듣겠다고 선택하고, 결심해서, 그 목소리에 응답하기를 시도하는 누군가라면, 그도 역시 꽤 고통스러운 책 읽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마 적어도 그렇게 ‘목소리를 듣는다’는 선택을 한 누군가라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 고통을 자연스럽게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이 책은 쉽게 응답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최근에 읽은 철학자 와시다 키요카즈가 쓴 '듣기의 철학’ 보면 그런 구절이 나온다.
"말에도 우리의 몸과 연결된 부분이 있다. '결이 있다.'고 말해도 괜찮겠다. 말은 메시지로써, 혹은 기호로써 무언가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소리로 이어진다. 말이 이어지는, 혹은 도달한다고 하는 사건은 이른바 내가 내는 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나의 몸을 두드리는, 또는 자신의 피부에 달라붙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소리를 내는 쪽과 소리를 받는 쪽이라는 두 개의 신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리의 이동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동조와 공명, 공진은 사람의 존재에 커다란 '흔들림'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서로 '접촉'하게 만든다." (와시다 키요카즈, 2014, p.172)
‘말을 한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일까, 그래서 ‘말을 듣는다는 것’도 또한 가볍게 여기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일까 요즘 그런 생각이 더 많이, 자주 든다. 와시다 키요카즈의 표현처럼 “타자의 맥박을 접하듯” 그렇게 “신체로 접촉하다’ 라는 표현이 가능한 그런 말하기와 듣기의 감각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요즘 갑작스럽게 더욱 자주 인지하게 된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깊은 불안함과 함께.
이 책,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는 아마도 읽은 이에게, 어떤 무뎌진 ‘듣기의 감각’을 되살려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신체적 접촉’처럼 이어지는 그런 말 하기, 그렇게 누군가가 말을 함으로 누군가에게 닿기를 소망한 그 목소리를 듣고, 그렇게 그런 듣기, 즉 그 목소리에 응답함이라는 선택적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런 ‘목소리에 응답하기’를 통해서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흔들림’이란 분명 독자에게 어떤 의미 있는 ‘접촉’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주]
(1)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p. 95 (임성모 옮김, 이산, 2002)
(2) 와시다 키요카즈, 듣기의 철학, (길주희 옮김, 아카넷, 2014)
https://www.facebook.com/100016123809438/posts/757358521478268/?extid=0&d=n

  • 아..고마워요. 이토록 마음담긴 서평이라니. 특히 뒷부분. 고통스러웠단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네요. 그 말을 들은 것 만으로도 이 책을 낸 보람이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 사실 안팎으로 우울한 날이었는데 울어도 되는 핑계가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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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뭔가 저자와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쁘네요 ^^; "제국의 위안부"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갔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랬습니다. 東京에서 선생님 처음 뵀을 때도 그런 이야기 나누었던 것 같은데, 고통스러웠어요. 읽는 내내. 조금 다시 집중해 보고 싶은 문제입니다. 듣는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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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esung Kwon
       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나도 고통스러운 날이었는데, 뭔가 텔레파시가 있었는지도. 담엔 우리 고통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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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는것 만으로 고통스럽다면 그 삶을 살아낸 분은,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신 분은 어땠을까...
    이렇게 좋은 서평을 쓰고 저자분과 직접 소통하는 너가 멋지다~^^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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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나눔의 집에서도 고독했던, 적은 100만, 우리 편은 나 한 명이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배춘희 할머니. 이 책은 배춘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오는 그 대화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