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5

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 한국성결신문, 뉴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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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기자명 조재석 기자
입력 201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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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예수’ 아닌 ‘살아있는 예수’ 증언
성서, 전통, 예배와 성도 생활 등으로 예수 배우기 요청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로 미국과 전 세계 성경학계 등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세계적인 신약성서 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이 그 후속작으로 ‘살아있는 예수’(청림출판)를 펴냈다. 그는 전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예수의 진리를 재확인했던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약성서 전체를 학문적인 논리, 통찰력을 기초로 고찰,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믿는 살아있는 예수를 증언한다.

그는 이 책에서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다루는 연구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는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복합적인 이미지 모두를 보아야 하며 그분은 부활하여 현재도 살아있는 예수임을 다양하고 신비로운 묘사로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재정립하기 위해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방법으로 재구성한 예수에 근거해 그 신앙을 재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지적하고 “역사적 방법이 추구하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살아있는 예수를 배우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해 가기 시작한다.

저자는 예수를 배우게 되는 복합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성서와 신경, 신앙공동체의 교육 등 전통을 비롯하여 공동체의 예배와 성도들의 생활, 섬기고 포용하는 작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배우기를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예수를 배우는 것은 결과적 산물보다 과정에 관심을 둘 것을 요청하면서 아내와의 상호 배움을 예를 들어 침묵과 묵상, 고난과 인내, 지속적인 배움, 공동체와 함께 배울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주님으로서 현존하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아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메시아의 특성을 풍부히 계시하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근거해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유다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서신과 히브리서 등 서신서에 나타난 예수의 독특한 칭호를 살피며 예수의 현재적 실제와 신앙인의 관계성 진술 내용을 찾아간다. 이어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예수가 가지는 의미를 보여준 최초의 증언인 바울서신과 예수에 대한 네 가지 묘사를 하고 있는 사복음서와 누가행전으로 통칭되는 사도행전의 예수 증언을 되살펴간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2000년전 어느 한 시점만이 아니라 역사와 신앙 속에서, 오늘의 현재에 살아있는 예수를 우리에게 생생히 경험케 한다.

이 책은 살아있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 각 글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생이나 성도들에게 신약성서를 종합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개론으로서, 예수 연구나 기독교 과목의 교재로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루크 티머시 존슨/청림출판/268쪽/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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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비추] 루크 티머스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2-02-26 09:36 조회(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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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예수를 죽은 자로 여기는가, 아니면 살아있는 분으로 생각하는가?”

교회가 탄생하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제한된 상상력과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이미지를 구축해 자신들이 만든 예수가 더 사실에 가까우며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텔레비전이나 순회강연에서 예수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텔레비전 전도자들’ 역시 암암리에 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조직화된 기독교를 경멸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약성서 학자인 루크 티머시 존슨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이 가진 한계를 폭로하고 새로운 방향의 포괄적인 연구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 『살아있는 예수』에서 역시 존슨은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죽은 인물로 다루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주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저자 소개
저자 : 루크 티머시 존슨 Luke Timothy Johnson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로 미국과 전 세계의 성경 학계와 교계 및 언론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세계적인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이 그 후속작으로 『살아있는 예수』를 출간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약성경 해석』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초기 기독교의 신앙체험』 등을 비롯해 저명한 주석서와 연구서를 많이 집필해 참다운 기독교 학문의 정체성을 제시한 그는 2011년에 종교 부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 인디애나 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신약신학 석좌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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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 정신의 도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신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유로이 답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만남은 인간 예수와 관련된다.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부활한 주님으로서의 예수 말이다.

우리는 그런 예수와의 만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수를 과거에 가두고 싶어하는 역사주의와 예수의 구체성을 증발시키고 위협하는 신비주의 사이에 또 다른 영역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종속적인 학습 과정, 즉 신약성서에 기술된 다양한 예수 묘사가 부정적인 기능보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영역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여러 차원에 대한 이해를 격려하려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만일 예수를 단지 죽은 자로 바라본다면, 그 업적이나 생애에 관여할 수 있는 얼마의 방식이 있다. 이 경우 예수에 대한 자료 중에서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좀 더 명확히 밝혀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변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인 기록과 관련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문제이다. 예수가 살아있다면 생명을 주는 자임이 틀림없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분이다. 다시 말해,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 1장 “그는 살아있는 분이다” 중에서

예수의 부활로 탄생한 교회는 예수에 관한 후대의 어느 문서 자료보다도 선행한다. 그리고 예수에 관해 말하는 내용은 그 양식이 설화든, 환상이든, 서신이든, 육신으로 알던 예수가 지금은 영으로 살아서 그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났음을 확신한 사람들이 저술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예수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을 통해 선별되고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현재의 체험이 결코 그분의 과거를 지우거나 허구화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지금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예수가 과거에 누구였는지를 더 잘 통찰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오순절 날부터 우리 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교회 전승이 없었다면, 오늘날 예수에 관한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2장 “전승을 통한 예수 배우기”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변화를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낸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그런 성인들의 생애에서 예수를 배우므로 전적으로 온당하다. 우리는 성인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과 인격에서 예수의 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예수의 복음 설화에서처럼, 말씀과 행동의 온전함이 없다면 성결함은 있을 수 없다. 예수의 본보기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타락과 망설임에서 풀려나지 않는다면, 예수의 행동 방식처럼 죽음까지 희생하는 섬김과 사랑이 없다면,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해 타인에게 주어지는 지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타인이 갖게 되는 강함, 우리의 상처를 통해 타인에게 주는 치유, 우리의 빈곤을 통해 타인이 받는 풍요, 우리의 죽음을 통해 타인이 얻게 되는 생명이 없다면, 신성함이란 있을 수 없다. --- 3장 “영화로운 주님의 육체적 임재” 중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요구된다. 삶이 정상적으로 순조롭게 전개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상호 주체적 배움에는 항상 긴장과 도전이 따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통해 배우려는 노력은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하나의 실습이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일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과 중첩되는데, 더 많은 사람과 관련될수록 스트레스가 더 높아지며 고통도 한층 커진다. 조이는 나보다 열 살이 많고,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이다. 또 교육, 문화, 재산, 정치 등에 대해 각자 다른 체험을 가진 상태였다. 우리 가정은 20여 년에 걸쳐 일곱 명의 자녀, 특히 사춘기에 처한 자녀를 여러 명 두고 있다. 함께하려는 우리의 결정은 조이에게는 그녀의 첫 번째 가정이 붕괴되는 것이었고, 내게는 수도원 가족을 등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지탱하던 신앙 공동체에서 고립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우리는 함께 살아오는 동안 만성 질병에 자주 걸렸다. 다시 말해, 즐겁게 휴가를 보내기보다는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러 날을 집에서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다. 조이와 나는 “배움은 고통이다”라는 격언에 동의하면서, 거기에 “고통당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라는 우리의 말을 부연하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겪으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도전이 없는 평탄한 생활이었다면 이런 교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 4장 “예수를 배우는 과정” 중에서

성서의 문헌들은 예수 배우기가 형식적 고백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를 배우는 것은 예수의 말에 따라 살고 예수의 신앙 척도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며, 예수가 증인으로 살았듯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증언하는 생활을 뜻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걸어간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걸어간 고난의 길이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예수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된 분이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한 신앙의 모델이다. --- 5장 “살아있는 예수와 계시적 글” 중에서

바울에게 ‘예수 배우기’는 과거에 존재한 인물에 대한 단순한 정보 수집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과 일치하는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예수의 형상을 닮도록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활 방식과 그들이 한때 속해 있던 이방인 세계의 생활 방식을 명확히 대조하기 위해,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권고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0-24). --- 6장 “바울의 예수 증언” 중에서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배경을 초월한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모든 아테네 시민이 소크라테스는 아니었다. 모든 로마 귀족이 카이사르는 아니었다. 모든 로마 황제가 아우렐리우스는 아니었다. 모든 노예가 스파르타쿠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 소작인이 예수는 아니었다! 예수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석이 매우 진부하게 끝나는 이유는 그 해석이 추출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예수 이미지’를 원하지만, 그런 이미지에는 진정한 인간 존재의 표상인 특수성과 복합성이 결여되어 있다. 예수를 좀 더 ‘인간적으로’ 묘사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약성서에서 묘사한 것보다 예수를 더 추상적으로 만든 것이다. --- 7장 “한 인물에 대한 네 가지 묘사” 중에서

마가는 독자들이 제자들을 닮지 말고 예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해한 두 장면을 소개한 뒤, 변화산상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밝히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라는 음성으로 끝을 맺는다. 그 메시지는 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한 음성이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를 따를 때, 우리는 제자들의 언어와 행동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에게 배워야 한다.

마가는 예수 이해와 제자도 이해를 가장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부활한 예수의 현재적 능력을 권력과 특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리는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배우는 것은 작은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는 방식을 배우는 것, 즉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준 방식을 따라 종이 되는 길을 배우는 것이다. --- 8장 “마가복음의 예수” 중에서

마태는 제자도에 대한 마가의 이해를 근본적인 변경 없이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마태는 예수를 유대적인 유산에 좀 더 명확히 연결시키고(예수는 토라의 화신이다) 교회의 운명에 확실히 연결시킴으로써(예수는 부활한 주님이며 교사이다) 예수 이미지를 한층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교훈이 개인과 교회를 가르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야고보서와 바울 서신 못지않게 마태복음에서도 예수 배우기는 예수 자신의 생애와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이다. --- 9장 “마태복음의 예수” 중에서

제자들은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저서에서 상이한 역할을 맡는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한 후 예언자 예수의 계승자로 활동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가 활동한 대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예수의 ‘선택받은 증인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가가 묘사한 우둔하고 불충한 제자들의 모습을 마태처럼 누가 역시 완화시키리라는 예상이 들 것이다. 누가의 첫 저술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 중 가? 묘한 것은 예수의 예언자적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함으로써 본보기가 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소유물을 모두 포기한 자이며 죄인이다(눅 5:11, 28, 18:28-30).
 
예수와 여행할 때는 소유를 함께 나누었고(눅 8:1-3) 예수가 군중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에 참여했다(눅 9:10-17). 그러나 제자들의 모든 행동이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이해했지만(눅 9:20) 메시아가 고난받아야 하며(눅 9:44-45, 18:34) 그를 따르는 자들은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납득하지 못한다(눅 9:23-25). 부활한 예수는 이처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했다(눅 24:25-27). --- 10장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예수” 중에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은 많은 차이가 있으며, 요한복음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시자로 활동한 예수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에서 역시 신약성서 전체에서 만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스스로 목마름을 체험함으로 성령을 부어주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부른다. --- 11장 “요한복음의 예수”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영’이라 불리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도야하거나,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이나 고난에서 탈피해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타자’인 하나님의 성령에 자유롭게 위임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는 예수에 의한 만남이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복음 중심적이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과 예수가 보여준 유형에 따라 우리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예수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온 복음을 의미한다. --- 12장 “계속 이어지는 신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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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다!
세계적인 성서학자가 현대세계에 다시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교회가 탄생하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제한된 상상력과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이미지를 구축해 자신들이 만든 예수가 더 사실에 가까우며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텔레비전이나 순회강연에서 예수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텔레비전 전도자들’ 역시 암암리에 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조직화된 기독교를 경멸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약성서 학자인 루크 티머시 존슨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저술이 가진 한계를 폭로하고 새로운 방향의 포괄적인 연구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 『살아있는 예수』에서 역시 존슨은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죽은 인물로 다루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주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진정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만일 예수를 단지 죽은 자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예수에 대해 과거에서 온 메아리만을 들을 수 있으며 예수에 대한 자료 중에서 모호한 부분이 좀 더 명확히 밝혀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더 이상 역사적인 기록을 묻지 않고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분이다.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으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의혹이 아니라 신뢰로 접근하는 복음해석의 개가
『살아있는 예수』는 예수를 향한 신앙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무적인 증언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영성이라 불리는 것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본디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 정신의 도야가 아니라 성령인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유로이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만남은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부활한 주님인 예수를 만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책에서 존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믿는 살아있는 예수를 진정한 예수로 묘사하기 위해 학문적인 논리, 통찰력, 그리고 신약성서의 모든 문헌들을 동원한다.

존슨은 우선 서구 철학이 단순성과 통일성을 선호해 온 경향에 대해 지적하며, 이런 경향이 배움 그 자체가 지닌 과정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예수 이미지가 지닌 복합성을 억누른다고 역설한다. 또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중대한 자료로 고려하지 않지만, 바울 서신은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해 귀중한 자료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또는 기독교 외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죽은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데 반해, 존슨은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복합적인 이미지 모두를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다양하고 신비로운 묘사로 수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다양한 묘사야말로 참되고 생생한 증언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와 살아있는 예수를 올바르게 구분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각 문서를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간단명료하고도 포괄적인 신약성서 개론으로 읽힐 수 있으며, 예수 연구나 기독 과목을 위해 훌륭한 성서적 기초가 되는 교재로 쓰일 수 있다. 또한 성서 주해를 능숙하게 예시하고 가르쳐주는 성서 주석의 실례요,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신앙의 증언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인격은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이 책은 ‘예수 배우기’의 의미가 단순히 이론적인 과제가 아니라, 제자도의 문제라는 것을 매 순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복음서의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찾아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배우려면, 우리 자신이 거룩한 자가 되어 예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존슨은 성서와 교회 전승을 통해 예수를 배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는 예수의 인격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로, 자신의 살아있는 아내 조이의 인격을 몇십 년에 걸쳐 배워온 방법을 겸손하고 솔직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예수는 살아있는 분으로서 성령이나 다양한 구현을 통해 세상에서 계속 행동하고 말하므로, 예수를 배우는 과정 또한 어느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매 순간 살아있는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신앙이 단지 과거에 죽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라면, 그런 배움은 어느 시점에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매 순간 우리를 압도하는 살아있는 주님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결코 배움을 중지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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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에모리 대학교의 신약신학 석좌교수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을 현대 세계에 다시 증언한 복음 해석의 개가이다. 최고의 지성과 경건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교회 지도자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영적 감동과 깊이를 제공할 것임에 틀림없다. - 신경하(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 회장)

《살아있는 예수》에서 저자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진정한 예수요, 살아있는 예수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혼탁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지금, 이 책은 맑은 공기처럼 우리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줄 것이다. - 한정호(경기도 평택시 서정교회 담임)

루크 티머시 존슨은 지성과 신앙이 겸비된 최고 학자이며,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를 저술하여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잘못 진행된 현대 예수 연구를 혹독히 비판하고, 예수의 진리를 재확언했다. 《살아있는 예수》는 그의 속편으로 인간 예수의 신성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 고수철(서울시 흑석동 제일교회 담임, 전 협성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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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2-02-26 10:06)
 
아무래도 청림출판사는 책을 개념 없이 내는 것 같다. 그동안 보수적인 한국교회 사정을 생각해 상업적으로 잘팔릴 것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들 자신의 신앙이 보수적이라서 이런 책을 내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래도 그나마 학문적이었던 바트 어만의 책을 냈던 점에 비해선 정말이지 이같이 논리적으로도 덜떨어진 보수 진영의 책을 내리라곤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지만 알고보면 두 책의 내용은 서로 충돌한다).

물론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볼 땐 루크 티머시 존슨 같은 이들의 책이 매우 각광받을만큼 인기 있을는지 모르나 내가 보는 평가의 잣대는 존슨 주장에 대한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맥락에서 보는 평가인지라 인기와는 또다른 별개의 사항에 속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혹자는 신앙은 논리와 다르다는 점을 빌미로 오히려 논리 무시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혹은 보수와 진보 기독교 진영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책을 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역시 소신 있는 출판보다는 상업적 고려의 맥락이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존슨의 경우는 내가 볼 때 이는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의도한 바에 놀아날 뿐이며 확고한 원칙이나 개념은 탈각되어 있어 보인다. 이미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테지만, 애초부터 루크 티머시 존슨이란 인물은 기존 진보 기독교 학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공격하기 위해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의도적으로 지원해주며 밀어주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미 그의 포지션 자체부터가 보수 기독교 전통의 예수 신앙을 변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였던 존 도미닉 크로산에 대한 반대 논객으로 티비에 나와 대립각을 세우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당연히 존슨은 진보적 학자들의 예수세미나에 대해선 매우 비난하는 입장 서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너무나 단순 억지에 가깝다.

요컨대, 루크 티머시 존슨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죽은 예수이며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 골자는 신앙 공동체 곧 교회 전통의 맥락으로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보면 정작 그의 이론들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단지 교회 전통의 예수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곧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라고 줄창 항변할 뿐이다. 이러한 핵심 전제 하에서 그 자신의 논지를 진행해갈 뿐인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성령체험을 받아야 성경을 비로소 잘 알 수 있다는 식의 주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범주 안에 들어와야 너가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깨침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너가 그 어떤 경지에 들어와야 공중부양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주장과도 그 주장의 패턴에 있어서만큼은 유사한 논리다. 일종의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대전제가 밑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무조건 믿어라'의 영역에 속한다.

게다가 예수에 대한 존슨의 입장은 기존 교회의 보수적인 예수 신앙처럼 그 역시 예수의 초자연적인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때문에 한동안 골치 아팠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들이 매우 반갑고 고맙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신앙의 전제들을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을 통해 재확인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말한 예수는 사실상 근본주의 기독교가 쳐놓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요 5대 교리의 그물망을 결코 벗어나진 않고 있다.
구원도 교회 전통의 예수의 구원만이 참된 구원의 역사로 주장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보면 루크 티머시 존슨의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미 교회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죽여놓았던 예수, 교리적 예수, 바로 그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매우 골때리는 저서인 것이다. (오마이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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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머시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게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
기자명 권성권  승인 2012.02.21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7021

▲<살아 있는 예수〉/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펴냄 / 268쪽 / 1만 4000원

18세기 계몽주의는 신학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에서 인간 예수로 분리해 내는 시도가 그렇다. 예수의 일생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조명하는 붐이 일었다. 그로 인해 예수는 유대인 혁명가였고, 십자가에 처형되자 제자들이 그를 신격화했다는 주장도 폈다.


그것이 타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그 뒤에는 사(四)복음서를 놓고서도 역사와 신화를 떼어 내는 연구가 진행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 싼 '역사적인'(historical) 부분과 '신화적인'(mythical)부분들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그거였다.

왜 그런 신학적인 작업을 한 걸까? 고백의 차원에 머물던 신앙심에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존의 규명을 먼저 밝혀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 시대의 예수는 누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너무 앞서 나가면 본질에서 이탈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역사적 예수에 외골수로 매달린 신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를 유대 혁명자로 간주하며, 기독교는 초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사(四)복음서도 초기 기독교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위해 쓴 '문학작품'이라고 항변한다.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한 책이다. 이제까지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부인하고, 지난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가 성서 속에 있는 예수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펀치를 날리는 격이다.

"최근 유사한 전제로 다시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도 복음서의 다양성을 없애려 한다. 이번에는 수세기 동안 신앙인에게 가장 가치 있었던 복음서의 특징, 즉 부활에 비추어 예수를 해석하고 증언하는 것이 '역사적 진리'에 부적합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학자들은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말씀'과 '행위'의 단면만을 그 설화에서 발굴해 낼 수 있으며, 그것만을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가?'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재구성이야말로 '더욱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석 구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므로 사실과 더 일치하며, 불일치 요소가 제거되었으므로 더 일관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163쪽)."

이것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가들의 허점을 찌르는 대목이다. 케네디나, 히틀러나 테레사 수녀도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를 인식하는 관점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필름 조각 더미가 한 편의 영화가 될 수가 없고, 짧은 에피소드를 수집한 것이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은 예수를 하나의 모형으로만 확정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성경을 창밖으로 던지게 만드는 꼴이고, 신약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는 모순을 범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존슨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사(四)복음서에 기초한 예수에 집중하는 데 반해 그는 바울서신과 일반 서신도 눈여겨본다. 특별히 바울 서신 같은 경우는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확신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건대 한 인물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다. 때로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한다. 사실 예수에 관한 칭호도 선생, 메시아, 왕, 예언자, 제사장, 주님, 인자, 하나님의 아들, 말씀, 재판관, 보혜사, 증인, 친구 등 너무나 다양하지 않던가. 또한 예수에게 적용된 은유와 비유도 양, 목자, 문, 포도나무, 빛, 빵, 물, 피, 성전, 영, 닻, 돌, 건축가 등 복합적이다.

그런데 그런 호칭과 은유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친 예수의 모습이지, 예수가 그들에게 비추고자 한 건 아니었다. 예수가 갖고 있는 면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요즘의 언론에 비추면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론이 항상 예수를 답한 것이지, 예수가 항상 언론에 답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구전과 전승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을 한 방 날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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