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2

사랑도 배워야 한다ㅣ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도 배워야 한다ㅣ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인생책100권
사랑도 배워야 한다ㅣ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인생책100권 2022 11 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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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2:42 PM 사랑도 배워야 한다ㅣ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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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랑을 배워야 하는 이유
사랑은 기술일까요?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이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우
리가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사랑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닌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
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질지, 몸매를 가꿀지, 돈
을 모을지, 유쾌한 대화술을 익힐 지에만 치중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림
을 그리고 싶어하는데 기술은 배우지 않고 그릴 대상만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하나의 거래의 관점으로 보고, ‘매력’이라는 것도 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멋진 포장입니다.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기 때문입니
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에 빠져 친밀한 관계를 맺는 합일의 순간(눈에 꽁깍지가 씌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친해질수록 상대에 대한 실망감과 권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1번째 인생책] 에리히 프롬ㅣ사랑의 기술ㅣ'사랑'에 대해 배워본 적이 …
1/22/24, 2:42 PM 사랑도 배워야 한다ㅣ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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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하는 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Ⅱ. 사랑의 이론
그 다음으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이론에 대해 크게 3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분리 상태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대인간적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
면서 자신의 인생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나고 죽게 되며, 사랑하던 사람들이
먼저 죽거나 내가 먼저 죽게 되리라는 인식, 또 고독감과 자연/사회 힘 앞에서 무력함, 다른 사람
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인식합니다.
이러한 분리 상태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동물숭배를 하기도 하고 군사적인 정복이
나 사치, 금욕적인 단념, 예술적 창조, 신에 대한 사랑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알코올과
마약, 성적인 것들에 의존하면서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나아가 내가 속
해 있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서 군중 속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내가 만든 작품과의 결합을 하지만 이것들은 진정한 합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합일은 대인간적
인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인간적인 사랑, 성숙한 합일이란 어떤 것일까요?2가지의 성숙한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1. 성숙한 사랑은 상대를 나의 소유로 만들거나 내가 상대의 일부가 됨으로써 결합을 하는 것
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을 진정으로 독립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합일’입니다.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라는 것입니다.
2. 성숙한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 즉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준다’는 행위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주는 것이 잠재적 능
력의 최고 표현입니다. 준다는 행위에서 우리는 나의 힘과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하며 잠재력
과 큰 환희를 느낍니다. ‘주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 이해, 지식, 유머, 슬픔, 모든 표현, 생명을 줌
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하고 타인의 생동감도 고양시킵니다. 이것
은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고 참으로 줄 때, 우리는 되돌아
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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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능동적인 사랑에는 준다는 개념 말고 4가지 개념을 더 설명합니다.
가. 보호입니다. 모성애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거나, 젖을 주지 않거나, 목욕
을 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 또한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물 주는 것을 잊
는 다면 이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나. 책임입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자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요구에 책임을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 존경입니다.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입니다. 존경의 어원
(respicere=바라보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입니다. 즉, 나
는 사랑하는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과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 지식입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나 자신
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화를 냈을 때 단순이 화 냈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그가 근심, 외로움에 싸여 있다고 알 수 있
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즉,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고,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
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불안 상태로부터의 사랑 다음에 둘째로 에리히 프롬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
다. 아이는 태어나서 어머니의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이가 보답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획득될 수도, 만들어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는 젊은이가 되면
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워 지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
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
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관점이 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또 다릅니다. 아버지는 사랑,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 모험 등의 세
계를 대표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아이가 세계로 들어서는 지식을 지시해주
는, 조건이 있는 사랑을 합니다.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에, 의무를 다하기에, 나를 닮았
기에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기에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지만 긍정적을 본다면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
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결국 아이가 잘 자라려면 어머니는 아이가 독립해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소망을 가
져야하고 아버지는 관대하게 대하고. 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
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아이가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 자신
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
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여기면서 동시에 아버지처
럼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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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는 두 가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의 대상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입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
머지 동포에게 무관심 한 것은 사랑이 아닌 이기주의입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
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대
상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기에 5가지 대상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 첫째는 형제애입니다. 이는 모든 사랑의 기본입니다. 다른 말로는 책임, 보호, 존경, 지
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인데, 성서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
과 같은 것입니다. 형제애는 동등한자의 사랑입니다.
2. 둘째는 모성애입니다. 여기에는 단순이 아이의 생명유지와 보호를 하는 것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산다는 것은 졸은 일이고 소년 또는 소녀인 것은 좋은 일이고 이 지상에 있
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어머니는 많지 않습니다.
또한 모성애에서는 아이를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자아도취적 요소가 있는데 진정한 모성애
는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분리에 대해 관용하고 후원해야합
니다. 이것은 모성애의 비이기성, 곧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
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
은 분리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셋째는 성애입니다. 형제애와 모성애와 다르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배타적이고 기만적인
형태의 결합입니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받는’ 사람
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되면서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데, 개인의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세계에 대해 공통 관심을 확립하면서 가능합니
다. 하지만 이러한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박해지고 그 결과 새로운 사람과의 사랑을 추
구합니다.
성애에는 독점욕이 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동일시 하면서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독을 극복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자신들로부
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의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합니다.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기에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 의지입니다.
4. 네 번째는 자기애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기심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을 보면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분리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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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
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
른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5. 다섯 번째는 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내용이 꽤 어려워서 간단히만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
들은 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며 어린 아이처럼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고 벌을 주고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어떠한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합니다. 인간적 힘을 더욱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에만, 그의 전 생애는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충분한 능력의 획득, 신이 그의 편이 되어주는 일의 실
현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의 무조건 적인사랑과 아버지의 조건적인 사랑, 보호와 명령의 부모에게
서 해방된 것처럼 인류 역사에서 여신에 대한 애착과 남신에 대한 순종을 거쳐, 인간이 사랑과 정
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속에 흡수하여 신과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
적 의미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Ⅲ. 사랑의 붕괴
다음으로는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특정 문화가 평범한 사
람들에게 영향을 주는데,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시장경제 안에 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써
서 그의 자본이 가장 유익한 투자가 되게 일하도록 명령하고 노동자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현재
시장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합니다. 즉, 자본이 노동력을 지배하고 생명 없는
물품이 살아있는 인간의 노동보타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권위나 원리,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명령에 순응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
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됩니다. 사람은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 시장 조건에서 최
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 고
독을 의식하지 않게끔 오락산업을 수동적으로 소비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만족스러운 소
비와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책, 영화 등을 수집하는데서 찾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성격은 모
든 것을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교환과 소비의 대상으로 대하도록 변했습니다.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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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작가 헉슬리는 이런 관점에서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결혼에 대한 개념도 변했습니다. 결혼을 하나의 ‘팀’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남편
은 아내의 새 옷이나 요리를 칭찬해야 하고, 아니는 남연이 시무룩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해해
줘야 하고, 생일을 잊었어도 이해해야 하는,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 예의 바
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
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팀의 정신, 상호 관용 등에 대한 강조와 성적 만족으
로서의 사랑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표준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신경증적 예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남
자들은 계속해서 어린아이 같은 감정으로 어머니의 보호, 사랑, 배려, 칭찬을 바래서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사랑하지는 않는 표면적이고 무책임한 관계를 맺습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경우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 상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흔히 사회적 경력에서 매우 성공적이고 양심적이고
성실하지만 여자 관계에는 초연하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 숭배’하기도 하고,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되는 ‘감상적
사랑’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추상화’하면서 사랑의 기억이나 미래의 환상에만 빠져 오늘을 살
지 못합니다.
때로는 ‘투사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에만 관여
하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 자기 삶의 의의를 느끼려고도 합니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구원을 최고의 관심으로 삼지 않고 물질적 안락과 personality 시장에서
의 성공만 갈망합니다. 신 은 사랑과 정의, 진리로서 일체가 되기 보다 오히려 사업에 있어서 동
업자로 전락했습니다. 신은 멀리 떨어진 ‘우주’라는 주식회사의 사장인 것입니다.
Ⅳ. 사랑의 실천
지금까지 이론에 대해 배웠다면 이제는 실천할 때입니다. 여기에는 4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전 생애를 통한 훈련입니다. 현대인은 일을 위한 규격화된 훈련
은 많이 하지만 자기 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합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규격화된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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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 게으름만 피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훈련을 외부로부터 부과된 규칙으로 실행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의지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정신집중’입니다. 우리는 책일 읽으며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십니
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데 열중하고 입을 크게 벌린 소비자입니다. 따라서 홀로 있는 것을 배
워야 합니다. 예컨대 마음 속의 온갖 상념과 생각을 제거하고 자신과의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입
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무
엇’을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쓸데없는 대화, 순수하지 못한 대화를 피해야 합
니다. 진부한 표현으로 말하거나 말하는 대상에 기울이지 않을 때 보잘 것 없는 대화가 됩니
다. 상대에게 경청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살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가 필요합니다. 현대 모든 산업 조직은 신속성을 촉구하고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지
만 빠른 결과만을 바라면 결코 기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넷째,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기술 실용에 필요한 것이 검토했다면 이제는 사랑의 중요한 성질을 검토할 것
입니다.
첫 번째,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 경험하고, 외부 세계는 나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
라 경험한다. 자아도취를 극복하기 위해 객관성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
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대인관계에서 보자면
어린이가 스스로 느끼는가를 알아차리거나 관심을 갖는 대신에, 어린아이가 어버이에게 순종하
고 기쁘게 하고 믿고 따른다는 등의 관점에서 자식의 반응을 경험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
까? 어머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어떠한 요구도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자기 아
내를 군림하는 자로 생각하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이러한 객관성의 결여는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에서 들어나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입니다. 이성의 배
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자아도취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겸손, 객관성, 이
성의 발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
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민감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앙을 요구하는데 이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확신
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사고력, 관찰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하지 않고 생애를 통해 지속
되는 자아, personality의 핵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하고, 미
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다른 사람
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아이에게 갖는 신앙은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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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류’에 신앙을 갖는다면, 인간이 적절
한 조건에 주어지면 평등, 정의, 사랑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비합리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은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믿이 없기 때문에 권력에 의존하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성정을 믿
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
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사랑하
려면, 어떤 가치를 판단하고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순간에 연습할 수
있는데, 아이를 기르고, 잠들 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면서 가능합니다. 언
제 신앙을 상실하는지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혜하는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
서 우리가 비겁하게 행동하는지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자신을 맡
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할때는 내면적인 활동, 사랑받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활동을
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사회적 영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록 자본주의 하에서는 ‘받는 만큼 준
다’는 말은 교환/공정성의 원리가 크지만 온갖 사회,경제적 조직이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바탕을 둔, 이기주의적 원칙에 지배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존하는 사회 틀 안에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생산 중신의 탐욕스러운 사회이고,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에 목
표를 두고,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하도록 해야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사
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멸망할 것입니다. 사랑
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성실을 분석한 것
은 오늘날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이러한 결여 상태의 책임이 사회적 조건에 있는 것
을 비판하고자 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