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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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薰育[편집]
덕(德)으로써 사람을 인도하여 기르는 것.
2. 訓育[편집]
가르쳐 기르는 것. 순화어는 '타이름'.
3. 獯鬻·葷粥·薰育[편집]
3.1. 역사[편집]
훈육, 귀방(鬼方), 험윤, 흉노는 동일한 민족이지만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고 여겨진다.[1] 다만 《사기》에는 험윤과 훈육을 개별로 적고 있어 그들이 두 개의 다른 민족이라고 보기도 한다.[2] 또한 이들 모두가 황제 헌원씨의 후예라고 보기도 한다.[3] 그러나 사실상 훈육, 귀방, 험윤 등의 융적(戎狄)과 흉노 등의 유목민족은 모두 어떠한 계승관계도 찾을 수 없다.[4]
주나라의 시조 고공단보는 원래 빈(豳)에 살았는데, 훈육의 공격을 받아 그들에게 신하로 복종했으며, 이후 기산(岐山)으로 옮겨갔다.[5][6][7] 《맹자》 또한 고공단보가 신하로서 훈육을 섬긴 고사를 기록하지만[8] 고공단보가 기산으로 옮긴 이유는 강녀(姜女)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지 훈육이 원인이 아니라고 적은 점은 다르다.[9]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 량치차오, 우치다 간푸(內田吟風) 등의 학자들은 모두 훈육, 험윤, 흉노 모두가 공통의 선조를 가진 동일한 민족이라고 여겼다.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훈육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10]
주나라의 시조 고공단보는 원래 빈(豳)에 살았는데, 훈육의 공격을 받아 그들에게 신하로 복종했으며, 이후 기산(岐山)으로 옮겨갔다.[5][6][7] 《맹자》 또한 고공단보가 신하로서 훈육을 섬긴 고사를 기록하지만[8] 고공단보가 기산으로 옮긴 이유는 강녀(姜女)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지 훈육이 원인이 아니라고 적은 점은 다르다.[9]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 량치차오, 우치다 간푸(內田吟風) 등의 학자들은 모두 훈육, 험윤, 흉노 모두가 공통의 선조를 가진 동일한 민족이라고 여겼다.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훈육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10]
[1] 《晉書》卷97〈四夷傳〉:「匈奴之類,總謂之北狄。匈奴地南接燕趙,北暨沙漠,東連九夷,西距六戎。世世自相君臣,不稟中國正朔。夏曰:薰鬻,殷曰鬼方,周曰獫狁,漢曰匈奴。」[2] 《史記》〈匈奴列傳〉:「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3] 《魏書》卷1〈帝記第一〉:「昔黃帝有子二十五人,或內列諸華,或外分荒服。昌意少子,受封北土,國有大鮮卑山,因以為號。其后世為君長,統幽都之北,廣漠之野。畜牧遷徙,射獵為業,淳朴為俗,簡易為化,不為文字,刻木紀契而已。世事遠近,人相傳授,如史官之紀錄焉。黃帝以土德王,北俗謂土為托,謂后為跋,故以為氏。其裔始均,入仕堯世,逐女魃于弱水之北,民賴其勤,帝舜嘉之,命為田祖。爰歷三代,以及秦漢,獯鬻、獫狁、山戎、匈奴之屬,累代殘暴,作害中州,而始均之裔,不交南夏,是以載籍無聞焉。」[4] 林沄《戎狄非胡論》[5] 《吳越春秋》〈吳太伯傳〉:「其後八世而得古公亶甫。脩公劉后稷之業,積德行義,為狄人所慕。薰鬻戎姤而伐之,古公事之以犬馬牛羊,其伐不止;事以皮幣、金玉重寶,而亦伐之不止。古公問何所欲?曰:欲其土地。古公曰:『君子不以養害害所養。國所以亡也而為身害,吾所不居也。』古公乃杖策去邠,踰梁山而處岐周。」[6] 《史記》〈周本紀〉:「古公亶父複脩後稷、公劉之業,積德行義,國人皆戴之。薰育、戎狄攻之,欲得財物,予之。已複攻,欲得地與民。民皆怒,欲戰。古公曰:『有民立君,將以利之。今戎狄所為攻戰,以吾地與民。民之在我,與其在彼,何異。民欲以我故戰,殺人父子而君之,予不忍為。』乃與私屬遂去豳,度漆、沮,逾梁山,止於岐下。」[7] 여담으로 기산으로 옮겨간 고공단보의 해당 고사를 근거로 건물 이름을 지은 것이 임시수도기념관의 사빈당이다.[8] 《孟子》〈梁惠王下〉:「孟子對曰:『有。惟仁者為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惟智者為能以小事大,故太王整事獯鬻,勾踐事吳。以大事小者,樂天者也;以小事大者,畏天者也。樂天者保天下,畏天者保其國。《詩》云:「畏天之威,於時保之。」』」[9] 《孟子》〈梁惠王下〉:「對曰:『昔者大王好色,愛厥妃。詩云:『古公亶父,來朝走馬;率西水滸,至於岐下;爰及姜女,聿來胥宇。』當是時也,內無怨女,外無曠夫;王如好色,與百姓同之,於王何有!』」[10] 林沄《戎狄非胡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