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주유팔로] [신인간선언2-2] 동학, 인류세의 철학
모시는사람들
신인간선언 2-2 : [필자주] 이 글은 포덕 164년 한 해 동안 ‘신인간(新人間) 선언 2024’라는 연간기획의 두 번째 글(2 - 2/4)입니다. 지난호(2023.12) 프롤로그에 이어 신인간 165(2024)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1월호 게재분량 중 2/4를 소개합니다. 온라인 버전은 신인간 연재 내용을 토대로 수정 보완된 것입니다.[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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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신인간의 조건
2. 동학, 인류세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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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이 인류세 선언을 폴 크뤼천보다 앞서서 이미 160년 전에 한 분이 수운대신사이고, 그 이후의 해월신사, 의암성사이다. 동학은 창도 이래로 끊임없이 ‘인류세’의 도래를 경계하며 그 환난의 시간을 돌파할, 넘어설, 이겨나갈 지혜에 관하여 말하였다.
수운대신사가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다”고 할 때 운(運)은 선천운을 의미한다. 나아가 “개벽 후 오만년” “오만년지 운수(五萬年之 運數)”(이상 <용담가>), “오만년지 시호(五萬年之 時乎)”(<검결>) 등의 말도 모두 선천(운)의 종결과 후천(운)의 개시라는 거대한 전환을 말한다. 초-인간의 시간이면서 지구적인 차원의 시간이다. “지금은 노천(老天)이라 영험이 없다”(<도덕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험이 없다는 건 생명을 낳고 살리는 힘(生生之德)이 거세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구적 수준의 대변혁을 일컬어 “다시 개벽”이라는 한마디 말로 지칭하였다.
해월신사는 <개벽운수편>에서 “만년에 대일변하고 천년에 중일변하고 백년에 소일변하는 것은 천운(天運)이고, 천년에 대일변하고 백년에 중일변하고 십년에 소일변하는 것은 인사(人事)이니라”고 한 천운(천운)이란 천지, 즉 지구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홀로세 11,700년과 ‘만년 대일변’의 시간적 일치는 우연일 뿐, 더 본질적인 것은 ‘변화한다’는 통찰이다. 그동안 이 만년-천년-백년의 변화는 ‘자연적인 시간(天運) 흐름’에 의한 것이고, 인간사의 변화는 천년-백년-십년의 단위여서 서로 교차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되었으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인간 외부의 자연(천지, 우주)만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상호 작용하면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동학의 시간관을 모두 운수에 관한 예언적 선언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오늘 인류세에 즈음하여, 대신사와 신사의 이러한 언명은 인심세태와 천지기운의 변화를 영적 예지력으로 통찰한, 사실적인 선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영적 예지력’은 신비한 초인적 능력, 초월적 계시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운을 맑고 바르게 함으로써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현상의 심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간-한울사람(=신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나아가 의암성사는 결정적으로, “천지의 기수로 보면 지금은 일 년의 가을이요, 하루의 저녁때와 같은 세계라. 물질의 복잡한 것과 공기의 부패한 것이 그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사이에 있는 우리 사람인들 어찌 홀로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큰 시기가 한번 바뀔 때가 눈앞에 닥쳤도다. 무섭게 죽이는 가을바람이 쌀쌀하고 쓸쓸하게 서쪽으로부터 동쪽에 불어오니, 우거졌던 푸른 초목이 아무리 현재의 모양을 아직 보존하고 있지마는 하룻밤 지나면 산에 가득 차 누렇게 떨어지는 가련한 서리 맞은 잎뿐이리니, 이제 이 유형의 개벽을 당하여 정신상으로 무형의 개벽을 하지 않으면, 천하로 옷을 입고 우주로 집을 삼고 사해로 밭을 가는 그 사람이라도 「한번 가지에서 떨어지면 문득 적막한 서리 맞은 잎」과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사람과 물건이 개벽하는 때이니라.”(<인여물개벽설>)라고 하였다. 오늘 인류세의 정황을, 100년 전의 언어로써,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현대 학문의 글(용어)과 100년 전 ‘한국인’의 글(용어)의 차이로 말미암은 이질감은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오늘 세계적인 학자들이 인류세와 관련하여 내놓는 담론과 판박이로 일치한다. 종교적, 신앙적 믿음에 기대어, 이러한 수운-해월-의암 스승님의 예언적 통찰력은 한울님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만보지는않는다동학의스승님들이이러한선언을할수있었던것은이미그당시에훗날‘인류세’라고명명되는지도서
게만 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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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학문의 글(용어)과 100년 전 ‘한국인’의 글(용어)의 차이로 말미암은 이질감은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오늘 세계적인 학자들이 인류세와 관련하여 내놓는 담론과 판박이로 일치한다. 종교적, 신앙적 믿음에 기대어, 이러한 수운-해월-의암 스승님의 예언적 통찰력은 한울님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동학의 스승님들이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당시에 훗날, ‘인류세’라고 명명되는 지구사적인, 세계사적인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산업혁명’이 시작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을 들여다보는 감수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취천하(攻取天下)의 기세로 밀려오는 서양 근대 (산업)문명이 겨우 그 기미만 보이던 때에, ‘산업혁명’의 여파로 오늘 21세기에 비로소 본격화되는 인류세를 감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당시는
기후위기의 징후를 느낀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괴질이 수시로 유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전 지구적인 위기와 연결지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해월-의암으로 이어지는 동학의 스승님들은 각자위심하고 각자도생하는 인심과 천지부모의 살보다 한낱 버선(물질)을 중히 여기는 세태 속에서 천지(부모)와 어긋나는 패륜적 인간이 초래한 부모-자녀 공멸의 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긴급 전문으로 회복적 치유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것이 다시개벽 동학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은 곧 인류세 시대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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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그러므로 인류세에 기후위기, 지구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동학을 배우라, 천도교에 귀의하라’고 할 것이냐, 아니면 동학의 진리, 천도교의 감수성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설 지혜와 용기와 힘을 갖도록 하느냐이다. 세상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 기획-신인간 선언-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개벽은, 혁명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동학은 지구의 변방 동아시아 조선, 조선의 변방 경주 용담에서 창도되었고, 해월은 평생 변방을 떠돌며 고비원주(高飛遠走)를 계속하였으며, 의암의 시대 천도교는 국내에서는 최대의 종단이 되었으나, 이미 조선이 전 지구적 지평 속에 놓이게 된 바에야 역시 변방임을 면치 못하였다. 무엇보다, 지금 동학(천도교)는 변방이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가 변화하는 것이 옳다.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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