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가스 3% 줄이는 원전,
핵 재앙 또다른 위험이 문제
[중앙선데이] 입력 2017.09.10 01:11 | 548호 27면 지면보기
[기후변화 리포트] 원자력의 기후 영향
일본 후쿠시마원전 사태로 핵 위험 문제가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중앙포토]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사회가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석유·석탄·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의 약 80%를 차지하므로, 이를 줄이는 것이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는 평균 수명이 200년 이상 되므로 당장 배출을 멈추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계속 진행된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해 기후변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 450개 원전, 석유 대신해
산업·운송·농업은 가동 못 시켜
화석연료의 속박 탈피 어려워
과거 위험은 기술 결핍서 발생
지금은 문명의 과잉 진보가 초래
에너지 수요 증가해야 한다는 것
왜 당연히 받아들이는지 따져봐야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이 기술로만 달성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에너지원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재생가능에너지로는 지금 소비하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전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기후변화를 막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석유 수입 국가들의 에너지 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은 전력을 생산하는 데만 사용된다. 화력발전소 대신에 원전을 사용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온실가스는 전력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전체 온실가스의 3분의 2 이상을 배출하는 산업, 운송, 농업 등은 원자력으로 가동될 수 없다. 즉 원자력은 온실가스 배출의 일부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450개 정도의 원전이 운행되고 있다. 이것은 약 3%의 온실가스를 감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파리 기후변화협약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온실가스 배출이 2050년에는 2010년에 비해 절반 수준이어야 하고 2100년 이후에는 거의 없어야 한다고 전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원전을 증가시켜 줄여야 할 온실가스의 6% 정도를 감축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런 맥락에서 원전은 기후변화 대응의 완전한 해결책은 못된다.
프랑스는 원자력으로 전기의 약 75%를 생산해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 하지만 1인당 석유 소비량은 원자력을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하는 주변 유럽국가와 비슷한 수준이다. 석유와 원자력의 용도가 같지 않아 원자력이 석유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전을 사용하든 말든 석유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원전이 에너지 안보를 위한 수단이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알지 못한 원인으로 원전 사고 날 수도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뿜어 낸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일으켰듯이, 원전은 또 다른 위험을 일으킨다. 원전 확대는 기후변화 문제로부터 다른 문제(핵폐기물, 핵 재난, 핵 확산)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원전 확대는 괜찮은 선택이다. 원전의 위험을 뒤로 감추고 기후변화 위험과 안전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일 뿐만 아니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위험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다.
위험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목걸이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위험에 가장 취약한 곳이 전체의 안정성을 결정한다. 스리마일섬,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은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취약한 문제로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앞서 발생한 원전 사고는 그 원인이 각기 달랐다. 앞으로 사고가 발생한다면 또 다른 미처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선형적인 단순계가 아니라 복잡계이므로 우리는 취약한 모든 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험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감당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 제한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 무슨 문제라는 게 있겠는가?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사용에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부의 의사결정과 전문가의 의견이 신뢰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와 전문가만이 위험 담론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도 자기 분야 외에선 전문가가 아니긴 매한가지다.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과학기술은 일부의 요소일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와 원자력 사용에 따른 혜택과 이에 따른 위험은 결코 전문가들의 논의만으로 정해질 수 없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시민들 사이의 논쟁은 불가피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은 어떤 과학적 사실에 어떤 가치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우리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위험은 우리 세대가 이익을 누렸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래에 아무런 이익도 없이 위험만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미래 세대들도 의사결정과정에서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정보가 널리 공유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민주적 합의를 이뤄 내는 데 있다. 이는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찬반을 떠나 민주사회에서 위험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민주적 합의는 단순히 당위적으로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불안과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인류가 최대한 밝혀낸 불완전한 지식이다. 이 때문에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과학기술을 동원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위험의 원인이 되어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결이 문제를 낳고 문제가 다시 해결을 낳는 순환고리로 인해 미지의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가치를 다시 점검해야만 한다.
울리히 벡은 이를 ‘위험사회’로 특징지웠다. 과거 위험은 홍수·가뭄·지진·전염병처럼 자연에서 발생하는 외부적인 위험이며, 방재기술이나 보건위생 등의 결핍 때문에 발생했다. 선진사회에서는 결핍을 채움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반면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AI), 원자력과 같은 현대 위험은 과거의 결핍을 메웠던 산업과 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내재적 위험이며, 그것은 주로 결핍이 아닌 인류 문명의 과잉으로 발생한다. 이 위험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성공에서 오기 때문에 위험을 제어하기가 더욱 어렵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 바꿔야 기후변화와 원자력은 각각 문명의 결과이자 동력이었지만, 이로 인해 새롭게 직면한 위험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에 기반을 둔 현재 삶을 유지하는 한,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원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에너지 과잉소비인데 기술적인 해결 방안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곤경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하게 하는 사고방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기후변화는 대기의 화학 조성의 변화로 일어난 과학 문제이지만, 이 변화는 사회경제 체계의 변화에서 출발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으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근원에는 에너지 소비를 더욱 늘리려는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그 대응으로 원전을 선택하게 하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왜 에너지 수요가 항상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발전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를 바꾸는 선택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선택이 아닌 시련을 겪어야 한다. 위험은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피하려고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미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이루어 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위험은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바꾸는 발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
“빈곤은 위계적, 스모그는 민주적”
현대 위험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문명에서 비롯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은 이 위험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합리적 통제와 제도를 동원하지만, 불확실성만 더욱 증대되는 것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였다. 이 위험은 ‘눈앞의 위험’이라기보다는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 위험’이다. 직접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사회에 불안을 일으킨다.
울리히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 시대였지만, 현대는 위험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사회의 변화 동력이 ‘나는 배고프다’에서 시작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나는 두렵다’는 불안을 기반으로 한다. 울리히 벡은 풍요로운 사회를 향한 근대화 과정이 위험 사회로 귀착한 과정을 되짚어 보고,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부의 분배를 위험의 분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천호 국립기상과학원(책임운영기관) 원장
국립기상과학원 원장. 연세대 대기과학 박사. 국립기상연구소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역임. 미국 지구시스템과학원 지구대기감시연구소 탄소순환연구실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