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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4 21:00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33
지금 삼학수행 11개 과목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삼학수행의 정기훈련법이 11가지로 나누어있다보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할지 길이 막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의 일상생활하기도 빠듯한데 거기에다 수행이라는 명목 하에 11개 과목을 하나하나 챙기려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예비교무 시절에는 주어진 시간에 시키는 것만을 따라하니 흉내는 내었지만 교도들을 교화하면서 그 바쁜 와중에 자신의 삶까지 스스로 돌보아야하니 정말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가자들이 그러할진대 재가교도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소태산 그 분께서 익산 총부에 주석하고 계실 때는 재가출가를 불문하고 여름 한철 겨울 한철 하선과 동선을 통하여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전통이 사라진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수행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습니다, 좌선이야 시간을 내서 하기는 한다지만 생활에 쫓기다보면 설교를 준비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냥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일과로 하루를 끝내고 맙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처해있으면서 치열하게 신앙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자니 시간과 정성이 부족하고 그러자고 앞으로 더 나아가자니 꽉 막힌 은산철벽에 갇혀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깨달음의 길을 포기하고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일상적인 삶과 생활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당연히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자신뿐만 아니라 원불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죠. 살긴 살아가는데 열정과 희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연히 교화가 정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교단의 현실이 됩니다. 교화자 스스로 구도자로서의 열정과 열망이 지극하다면 그는 생명에너지가 충만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그 열정과 열망은 당연히 그 자신을 넘어 주변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자신의 집 안에 갇혀 나올 수 없으니 그는 정체할 수밖에 없고 에너지는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교단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태산 그 분께서 이루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슴깊이 받아들이면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일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필연적인 과제입니다. 원기 100년 안에 그 기반이 닦이고 그 기반을 통하여 이웃과 사회로 전이되어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세워나가지 못한다면 소태산 그 분의 비전과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삼학 수행을 11개 과목으로 정리해놓고 그 방법들을 제시해놓았지만
실질적으로 삼학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고자하는 목적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바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것입니다!
집착심은 고통의 근원이며
스스로를 구속시켜나가는 원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난후
최초로 밝히신 가르침이 바로 집착을 벗어버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苦集滅道! (고집멸도)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그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팔정도를 닦아라!』
『세상은 無常한 것이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無常한 것이기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諸法無我 제법무아)
그를 깨닫지 못하고
그 무엇엔가 집착되어있으므로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음이니! (一切皆苦 일체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涅槃寂靜 열반적정)』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며 작업을 취사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마음을 맑히고 마음을 밝히며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궁극은, 불교적 세계가 표방하는 중생 구원의 실질적인 과제는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함을 비롯한 반야, 금강, 화엄, 법화의 세계는 바로 마음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집착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집착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리고 그 집착을 넘어서면 또 어떠한 세계가 전개되어지는지를 밝혀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마음공부의 표준, 즉 삼학 수행의 표준은 집착심을 어떻게 제거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좌선의 일미를 이야기하고 염불의 공덕을 자랑한다면 그가 하는 좌선과 염불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능력을 더 내세움으로서 그는 깨달음에 더 멀어지고 맙니다.
정신 수양, 즉 마음을 크게 쉼으로서 定을 기르고 빈 마음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정 간에 불리선법이 될 수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홀로 좌선하고 있을 때 - 그것도 적적성성한 선의 일미를 맛보고 있을 때를 기준으로 - 그리고 상대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마음의 청정함을 느끼고 희열에 차 있다가 경계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고 어두워지며 감정의 기폭에 휩쓸려 마음의 근원을 잃어버린다면 그의 수양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적적성성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혼란스러우면 앉아있어도 오히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는 것이 훨씬 편하지요. 그러니 수양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젖어 수십 년을 앉아있는다 해도 그는 마음의 한 자락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포기를 하고 말기도 합니다.
정신수양 즉 定을 함양하는 공부는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데 있습니다.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신 수양을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경계를 만나 요동을 치고 혼란스러운 것은 마음을 흔드는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無明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無明의 시원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홀연연기라 말합니다. 홀연히 그 어디에선가 집착을 부르는 그 어리석은 마음이 나타났다고 말이죠. 제가 위에 밝혀놓은 <마음의 원리> 장을 참조하시면 그 집착의 시원이 되는 無明이 어디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났는지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정신 수양의 요지는 바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시간이 나서 조용한 곳에 머물러 좌선을 할 때는 마음을 비움에 그 표준을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나는 無者 화두를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無는 없다는 無가 아니라 비워져있음을 마음의 눈으로 통찰해나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은 상대할 그 어떤 대상이 없기에 몸의 감각기관이 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며 육근이 쉬어짐으로 해서 마음의 비워져있음을 통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앉아 있다고 해서, 감각기관이 교류할 수 있는 그 대상 사라졌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마저 쉬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의 작용들로 인하여 잠재의식 안에 가두어져있던 대상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들은 몸이 쉼으로 해서 더욱 더 요동을 치기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심상을 일으켜내서는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바로 집중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죠. 그 집중의 방법이 호흡이 되었건 관찰이 되었건 화두가 되었건 관계없이 그 심상의 요란함을 지워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염불도 흩어지고 산란한 마음들을 묶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좌선과 염불을 11개 과목 중 정신 수양을 위한 과목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좌선은 앉아만 있다고 해서 더 깊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집착심이 얼마나 제거가 되었는가에 따라 좌선의 깊이도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집착심은 내려놓지도 못하면서 좌선의 일미를 맛보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좌선의 깊이는 그 집착심의 무게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런데 집착심은 혼자 있을 때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즉 어떤 대상을 통하여 그 집착심은 드러납니다. 몸과 마음이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마음의 파장이 일어납니다. 그 파장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고통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며 자신도 억제할 수 없이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를 깊이 관찰해보면 그 과정을 통하여 마음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처럼 마음의 실질적인 움직임들을 살펴나갈 수 있는 것이죠.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예전에 스님들이 홀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하다가 탁발을 하러 시장에 내려가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 깊은 마음의 흐름들을 깨닫기 위해섭니다. 똑 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자신이 대하고 있는 관계와 그 일들과 그 상황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들을 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 집착심을 제거해야한다는 그 강력한 목적성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러한 기회는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실질적인 것은 집착심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들을 통해서 그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면 그는 언젠가 자신에게 드러났던 그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 간 불리선법인 무시선 무처선은 매우 훌륭한 소태산 그 분의 마음 훈련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일일시시로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와 일과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고 그를 통하여 집착심을 제거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생활선이자 정신수양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정좌하여 마음을 비우고 마음의 근원성을 통찰하며 마음이 일을 당해서는 마음의 작용과 그 흐름들을 인식하고 마음의 본질, 즉 그 허상을 통찰해나아가라!
이것이 바로 정신 수양의 요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연구의 목적은 집착심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깊이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을 넘어서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사랑에 눈이 먼 사람들은 오직 그녀 그이만이 관심의 대상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그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일과 사물의 이치나 세상사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죠. 집착하는 대상에만 관심을 둔다면 실은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나가는 그러한 존재요소들과 그 변화에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변화와 존재의 실상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원리를 알 수가 없기에 그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반적인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사리연구는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존재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지만 이 또한 그 길을 찾아내지 못하면 마음의 주변을 빙빙 돌 뿐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과 이치는 바로 마음에 관한 일과 이치를 말합니다. 물론 주어진 세계 - 즉 우주와 지구와 생명과 역사등 - 를 관찰하고 비교 분석하고 깊이 연구해나감으로서 지혜를 터득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자칫 마음의 근원을 벗어나면 그가 아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영혼의 자유로움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앎에 묶이고 그 앎에 집착하기에 권위와 권력적 속성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터득하고 통찰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집착심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집착심의 일어나고 사라져가는 그 전 과정을 깊이깊이 통찰해나가는 일이 바로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 아무리 경전을 외우고 의두와 성리에 밝다고 해도 그 몸과 마음의 원리에 의해서 드러나는 그 집착의 전 과정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없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앎이 칼날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어둠 속에 묻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앎이 오히려 집착의 원인이 되어 질 수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일과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작용을 깊이 세밀하게 통찰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 그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해있으며 또 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그의 경험과 체험은 그를 원하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해본 길이기에 다른 이들의 상태를 이해하고 온전히 바라봐 줄 수 있으며 그를 통하여 올바른 안내를 해줄 수 있습니다.
사리연구는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공부입니다. 이는 경전의 뜻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경전의 의미는 그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깊이와 차원을 달리 하기 때문에 그 경전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더욱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아야합니다. 그냥 믿고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그것이 교조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크게 낭패할 일입니다. 수행자는 더욱 더 깊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감으로서 또 다른 깊이와 폭으로 자신의 의식을 확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의 의미도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묶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는 자칫 길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쌓아올린 장벽에 갇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리연구, 즉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앎과 행위를 비쳐 보아야합니다.
끊임없이
왜?
왜 그러한 것인가?
나의 앎이 진실한 것인가?
나는 근원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운가?
살려주는 마음으로 살았는가?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무시선 무처선을 어떠한 심법이며 행법일까?
등등
끊임없는 회의와 물음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앎과 행위들을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무턱대고 믿고 따르는 일이 무척이나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혹으로부터, 맹신으로부터, 자기적 체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진정한 깨달음을 행하기 위하여 멈추어질 수가 없는 구도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나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앎, 즉 지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두발로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그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비로소 주변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일과 이치에 눈이 떠집니다.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만큼 세상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인위적인 앎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지혜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무엇엔가 집착해 있음으로서
관심은 당연히 그 집착의 정도만큼 그 대상에 기울어질 것이고
그에게 보여지는 세계 또한 그 만큼 밖에 열려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만큼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올바른 지혜는 집착을 벗어버림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 상태를 온전히 통찰해냄으로서 존재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존재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리연구의 올바른 수행방법인 것입니다.
작업취사는 실질적인 행위에 관한 수행을 말하며 그 역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합니다.
원불교 정전에 『작업이란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하였습니다.
육근 즉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자칫 정의를 사회적 혹은 역사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작업취사의 요지는 그 목적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작업취사는 마음의 근원을 밝혀나가는 수행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정의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이나 역사적 관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필요합니다. 그 기준을 올바르게 세워놓지 못하면 자기적 견해에 따라 정의는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근원성을 찾아나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삼학을 이야기하고 그의 수행을 말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곧 집착심을 놓아버림으로서 드러나지는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착심은 이기심을 낳습니다.
이기심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며 따라서 관계는 언제나 마찰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둘 사이에 일어나는 파장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 둘은 서로서로 충돌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정의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정의란 이기심을 버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연민의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서나 드러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바로 집착심을 내려놓고
그 집착심을 내려놓음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를 바라봄으로서, 세계를 포용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기심을 내려놓음으로서 관계를 사랑과 자비로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이기심의 원천은 자기 집착이며 이러한 자기 집착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라는 삼독심을 관계 속에서 발현하게 합니다. 불의, 즉 올바르지 못한 행위의 원천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는 그리 어려운 공부가 아닙니다.
즉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발견하고 그를 발견하면 즉시 내려놓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집착심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발견했다하더라도 쉽게 놓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의지와 열망과 열정은 필수불가결한 준비과정입니다.
나는 꼭 내 존재의 끝을 보고 말리라!
나는 부처를 꼭 이루고 말리라!
나는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주인이 되어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 가정을 세상에서 낙원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어떤 나름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마치 죽음의 경계에서도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그 의지의 산악인들처럼!
그러한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애초에 삼학 수행은 그 올바른 길을 걸어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쌓아놓게 되고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쪽으로 나아가다보면 그는 마음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등반가에게 희열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 속에 세상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오감으로 신비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자기 성취의 기쁨을 만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공부나 삼학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존재 세계의 실상을 스스로 경험해나감으로서 보여지는 세계의 신비로움과 조화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에게는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마찰과 충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삼학수행을 실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바로 내가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의 표준은 생활 속에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나가면서 옳은 것은(德) 취하고 이기심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가 걸리거나 막히는 것이 있으면 깊이깊이 탐구하여 왜 그러한 것인지를 깨닫고 어떻게 구속된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탐구하면서 그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면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인 마음을 취하면 됩니다.
작업취사의 요점은 바로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불의를 제거하는 일은 근원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는 일입니다.
바로 그 뿌리인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면
나와 너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하나의 마음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줌으로서
관계는 따뜻함으로 서로를 살려주게 됩니다.
포용하고 품어주고 살려냄으로서 관계는 아름답게 꽃이 핍니다.
내가 대하고 있는 일과 그 사람 사이에서
품어주는 마음
포용하는 마음
살려내는 마음이 아니거든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깊이 통찰해 보아야합니다.
왜 그러한 마음이 되지를 못하는가를 깊이깊이 바라본다면
당신은 당신이 볼 수 없었던 그 무명의 어두운 마음들, 즉 자신이 인식할 수 없었던 집착심의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하다보면 어느새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 따사로운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삼학 수행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 셋은 하나의 공부 과정이며
그 하나의 과정 속에
그 셋이 다 함께 합니다.
정기훈련법에 나타난 삼학수행 11개 과목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들이 아니며
충분한 시간을 내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그 기본적인 토대를 구축해나갈 수 있는 훈련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처해있는 삶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치열할 생존경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먹고 산다는 자체가 가진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달픈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지켜내지 못하면 가족은 자칫 해체될지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살아나가는 이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가득합니다. 치열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교도님들은 이렇듯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 가족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아가는 구도자들이 치열하게 수행해나가지 못하고 그들의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줄 수 없다면 그 빚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구도의 끝은 결국 사랑과 자비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삼학 수행의 끝 역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구도자가 생활 속에서 그 마음을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욱 깊이 통찰해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내가 관계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나누기 위하여 구도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무언가를 향해서 수직적으로 나아가 지혜의 빛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는 수평적인 나눔의 길입니다.
구도의 끝은 그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지혜는 결국 사랑과 자비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며
사랑과 자비의 길은 결국 지혜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지혜 없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또한 따뜻함이 없는 지혜는 지혜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가두어놓은 앎은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심을 내려놓는 그 모든 작업들!
그 일을 그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작업이 어떤 종교, 어떤 영적 그룹들 사이에 일어나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더 좋은 길이라고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나는 과연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유롭고 따뜻한 마음들이 서로 전해질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