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불교

불교









불교 (1) 불교란 무엇인가







무신론 바탕한 불교 이념은 '참 자아' 찾는 것

샤머니즘·무속 결합되며 변질, 귀신세력에 미혹 돼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이후 우리의 삶과 문화와 정서 속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생활 양식 속에는 불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 많다. 흔히들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아이구 내 팔자야 전생에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았는고"라고 한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전생'이나 '업보'에 대한 불교 사상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시 다른 육체로 전화하여 환생하게 된다는 생각은 불교의 영향을 반영해준다. 또한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면 그 공적으로 환생해서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생각 역시 불교에서 유래한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 후 지내는 삼우제나 49제 역시 불교에서 온 풍습으로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따를 정도로 토착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교가 전통의 샤머니즘과 결탁하여 생활 깊숙이 침투하면서 사람들을 귀신의 세력에 잡히도록 미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절에서 승려들이 무당들처럼 굿을 하고 점을 치며, 또 달마대사나 용의 형상을 그린 부적을 파는 일을 보게 된다.



사실 절에서 승려들이 굿을 하는 풍습은 고려 왕조의 숭불 정책 속에서 타락해버린 불교가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배척을 당할 때 생활에 곤경을 느낀 승려들이 호구지책과 위정자들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당시 무당들이 하던 굿을 흉내 내어 징과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춤을 춘 것에서 기원한다. 중들이 추고 있는 바라춤이란 바로 무당의 춤인 것이다.



요즘에는 기독교의 의식을 모방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 절에서도 찬불가를 부르고, 하기불교학교를 개최하며, 수요법회, 금요 철야법회, 조찬기도회 등을 열기도 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석가모니가 의도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종교의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이요 의식 자각 운동이었다. 그것이 역사적인 실천의 과정 속에서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불교 자체에 수양의 방편으로서 종교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불교란, 그 본래의 이념을 가지고 말하면, 지혜를 얻어 헛된 망상을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참 자아를 찾자는 운동이다. 불상을 세워 그 앞에 절하면서 복을 빌고 화를 면하자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절에 가서 시주 돈을 바치고 불상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절하면, 사업이 번창하고 못 낳는 아이도 낳게 되며,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식의 그런 기복적인 미신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부질없는 탐욕과 애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니, 그렇게만 보면 불교 역시 유교와 함께 일종의 고차적인 윤리 운동으로서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살이에서 탐욕에 찌들어 살다가 어쩌다 절에 가서 종교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불교도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석가모니가 보아도 민망한 일이다.



석가모니 스스로도 죽으면서 그의 제자 아난에게 "더 이상 나를 의지하지 말고 너희 스스로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 내가 가르쳐준 법과 계율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당부했지 자신을 우상화하여 신으로 경배하고 복을 빌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부처'라는 말도 인도 고어인 싼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를 한문으로 음역한 '불타'(佛陀)를 다시 한글로 표기한 것인데, 이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의미하는 일반 명칭이다. 누구나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부처가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는 절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은 결코 신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며, 인생의 모든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깨달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철저한 인본주의적인 성향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점차로 추종자들에 의해 신으로 추앙되면서 부처는 화를 면케 해주고 복을 부어주는 우상 존재가 된 것이다. 인류의 사상사나 문화사를 볼 때, 시작 단계에서 아무리 고차적인 윤리 운동이나 문화 운동이라 해도 결국 저급한 미신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사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고차적인 윤리나 문화 운동을 통해 인간 스스로가 죄와 죽음과 고통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된 신념에 빠지는 일 자체가 이미 사탄의 역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우리는 원래 석가모니에 의해 주창된 이념으로서의 불교와 역사적인 실천 속에 나타난 불교를 동시에 보면서 불교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불교 철학은 기본적으로 고대 인도의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그 근저에 깔고 있다. 범(梵)은 우주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인 '브라만'(Brahman)을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다. 브라만은 세계의 근원이요 변화지 않으면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아는 세계는 마치 다양한 이름과 특성을 지닌 개체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보이는데, 그러나 실상은 브라만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我)는 '나'라는 주관적인 존재의 궁극적 실재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음역한 것이다. 아트만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브라만으로서 그런 점에서 각 개인들은 참 '나'가 아니다. 참된 '나'인 아트만은 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며, 모두에게 평등하며 하나인 그런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를 학자들은 영어로 "the universal self"라고 부른다.



"범아일여"는 "브라만이 곧 아트만"이라는 뜻으로, '나'라는 주체의 궁극적 실재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서로 동일하며, 따라서 나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곧 신"이라는 일원론적인 범신론을 의미한다. 이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공 사상(空 思想)을 통하여 발견할 수가 있다. 공 사상(空 思想)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물과 현상이 서로 인과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緣起)에 의존하며, 따라서 실체를 갖지 못하는 공(空)이라는 사상을 말한다.











불교 (2) 공(空) 사상 뒷받침하는 연기설(緣起說)







우주의 모든 사물 · 사건들은 인과적 관계로 진행

인생의 총체적 고통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무지





공(空) 사상과 함께 불교 철학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 연기설(緣起說)이다. 모든 사물과 사태가 서로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空)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연기설이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서 석가가 설법한 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 단독의 힘으로 생겨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물이나 사건들과의 인과적인 관계를 통해 생겨나고 진행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그의 부인 힐러리와의 만남이 있기까지 수많은 인연의 사슬이 작용하였을 것이고, 또 그 만남은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와 전 세계의 수많은 변화에 대하여 중요한 인연의 사슬을 형성해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여기서 기침을 하니 온 우주가 뒤흔들린다는 식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이런 식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는 점에서 연기설은 개체중심의 분석적 관점이 아니라 전체중심의 종합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기설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풀이해보면 윤회사상이 나오고, 윤회에서 다시 전생의 개념이 나오게 된다. 환생이라는 개념은 전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 사상과 연기설을 바탕으로 이른 바 불교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의 보다 구체적 특징을 형성하는 세 가지 내지 네 가지 징표라는 의미에서 삼법인(三法印) 내지 사법인(四法印)의 사상이 등장한다. 그 첫 번 째 징표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이는 인연의 결합으로 생성되는 자연과 인생의 모든 과정들은 본질도 실체도 없이 흘러가는 강의 물결과도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무상한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석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강의 물결과도 같은 것이요, 아지랑이나 파초와 같은 것이니 헛되고 헛되다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두 번 째 징표가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 세상의 모든 각각의 현상은 서로 인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실체성을 띠거나 독자적인 존재 근거를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아를 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나'의 여러 모습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용모도 변하는 것이요, 성격이나 기질도 변하는 것이다. 사상도 변하며 사회적 관계도 변한다. 우리의 마음은 또 얼마나 더 변화무쌍한가? 잠시잠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 진정한 '내 것'이고 무엇이 '나의 실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 번 째 징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회상하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그 하나요, 원수를 만나는 괴로움이 그 하나다.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을 잡으려니 이것이 괴로움이다. 한 때 즐거움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한껏 피다 이내 시들어 버리는 꽃과도 같은 것이니 이 허망함이 또한 괴로움이다. 이 집착이 강할수록 잡히지 않는 괴로움이 더 크며, 누린 즐거움이 클수록 그것이 깨어지고 사라지는 데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 더 크다. 부자로 살든 거지로 살든,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징표를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헛됨을 통찰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실천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결단과 실천의 방향을 결정해주는 이상의 징표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그 해탈로 인해 마음에 불안, 격정 등의 번뇌의 불이 없어져 마음이 지극히 순수하고 청정하고 편안하게 된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우리를 참되고 영원토록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해줄 것을 찾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그러한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는 데서 오는 경지를 말한다.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의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징표를 살펴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전도서에서 표현된 인생 관찰, 세상 관찰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도서 1:3을 보면,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고, 1:6에는 우리의 인생이 바람과도 같으며 1:7절에는 우리 인생이 죽음이라는 바다를 향해 가는 강물과도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5:10-17에서는 인간의 욕망이란 만족함이 없기에 육신의 소욕을 구하면 구할수록 번뇌와 심신이 피곤함과 분노만 더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도 무언가 인생이 근본적으로 총체적인 고통과 저주 가운데 있다는 것, 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3장의 문제요 불신자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사실적으로 통찰한 셈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 근본 원인을 알지 못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인생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 가운데 빠진 원죄의 문제를 모르고, 또 그 원죄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완전하고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무리 똑똑하고 의식이 예리하다 해도 오히려 그럴수록 엉뚱한 열심 속에서 더 깊은 미궁과 착각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불교를 통해 또한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덧없이 돌고 도는 세상으로부터의 출구를 그러한 세상에 대한 체념과 달관에서 찾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본질상 덧없고 무상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의미와 목적과 희망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석가모니가 최소한 전도서만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토록 원인 모르게 고통과 저주 가운데 던져진 인생의 근본 문제 때문에 고민이 되어 집 나가 돌아다니면서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불교 (3) 사성제(四聖諦)







인간문제 관찰한 '사성제', 그리스도 구원 역사 이해하는데 실패





  불교에도 기독교의 사영리와 유사한 구조의 기초적인 교리 체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을 말해준다. 연기론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이 교리 체계는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고 난 직후 녹야원에서 처음 다섯 명의 비구에게 설법한 법문에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들을 포괄하는 근본 가르침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제(諦)'라는 말은 변함없는 진실을 뜻하는 '삿트아(satya)'를 번역한 말로서 그래서 '체'가 아니라 '제'라고 읽는다.



  사성제의 첫 번째 원리는 고제(苦諦)로서 인생의 근본 현상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고통의 바다 위를 끝없이 돌고 도는 항해와 같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인과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회상하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괴로움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네 가지인데, 이를 인생사고(人生四苦)라 한다. 이 네 가지에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얻고자 하되 얻지 못하는 괴로움( 求不得苦), 생명의 다섯 가지 작용인 오온(五蘊)이 서로 맞지 않거나 생각의 발로가 맞지 않아 느끼는 괴로움(五陰盛苦)를 더한 것이 인생 팔고(人生八苦)다.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으로 큰 궁전에서 맛있는 음식과 온갖 화려한 것에 둘러싸여 누릴 수 있던 편안한 삶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고행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것이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고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의 모습과 조그마한 미물이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일 뿐임을 관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인생의 이 근본 문제에 대한 번민을 해결해보려고 집을 나가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주전 531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기까지 거의 육 년 동안을 처절한 고통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이란 아무리 화려해도 한 낮의 꿈이요 나타났다 이내 사라질 안개와 같은 덧없는 것일 수밖에 없고, 결국 여러 가지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문제 속에 시달리다가 후손에게 저주의 유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석가모니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인생의 근본 문제를 사실적으로 관찰한 셈이다.



  사성제의 두 번 째 원리는 집제(集諦)로서 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이 총체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원인을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들을 향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과 애착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갈망과 애착은 기본적으로 착각과 망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진단이다. 사람들이 흔히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과 같은 것들은 강의 물결이나 아지랑이나 안개와도 같이 덧없는 것들인데, 마치 그것들이 확고부동한 것이며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괴로움이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곧바로 부질없는 갈망과 애착으로 연결된다.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애타게 찾고 얻으려 하며, 뿐만 아니라 영원히 누리려 하니 이로써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잡으려 하나 잡히지 않으며, 잡은 것 같은데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욕망의 실상인데, 이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끝없는 갈망과 애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이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집제의 원리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생령이 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파스칼이 말했듯이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결핍과 공허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만족함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세상의 덧없는 것들로 만족함을 얻으려는 것에 대하여 이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본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다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왜 세상이 덧없고 괴롭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석가모니는 그저 덧없고 괴로운 세상의 것들에 매달려 사는 것 자체만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상 고통의 근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아담의 실패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난(창3:1-6) 데서 시작된 문제요, 그 결과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고(롬3:23), 사단에게 사로잡히게 된(요8:44)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상실하고 죽음의 저주와 온갖 재앙의 고통에 빠지게 된 인생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석가모니의 한계는 석가모니 자신도 결국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러한 한계는 곧 불교가 왜 답이 될 수 없는지를 밝혀준다.



  사성제의 세 번째 원리는 멸제(滅諦)로서 이는 인생의 원래 상태나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향한 감각의 집착, 의식의 집착, 욕망의 집착 등 일체의 집착과 갈망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청정하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인간 실존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 멸제의 원리다. 다분히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영역에서 원래의 상태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불교의 독특한 인식론적 원리 때문이다.



  그러나 멸제의 원리도 성경적으로 볼 때 분명하게 풀어진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존재라는 점(창1:27)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창1:28)에서 설명이 된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통해 회복될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존재 차원에서 살펴보아야지 단지 주관적인 의식 체험의 영역에서만 보면 안 된다.



  사상제의 마지막 원리는 도제(道諦)로서 이는 인생의 원래 상태나 모습에 도달하는 길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오랜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은 진리란 우리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맡기는 쾌락의 길과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중도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관찰, 사유, 견해, 언어, 행동, 마음가짐, 수행 노력 등을 바르게 하는 일로서 이를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철학적인 정신 수양(골2:8)이나 종교적인 열심(행4:12), 또는 선행을 쌓는 것(사64:4)으로는 결코 인생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받는 길(요14:6, 행4:12)이 되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함으로써(요5:24; 롬10:9-10)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도제의 원리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이다.











불교 (4·끝)







한국에 영향 미친 대승불교, 무신론 대신 여래불 등 신적 존재 등장

한국 불교 특징은 기도불교, 귀신에게 절하며 소원 성취 기원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전파된 불교를 보통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대승불교는 일반 대중들을 계도하고 구제하는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함께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세간적이고 적극적인 경향을 띤다. 이에 반해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에서 볼 수 있는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는데, 주로 개인의 해탈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경향을 띤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원시 불교에는 없는 여러 가지 초월적인 종교적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원래 불교는 무신론인데 대승불교로 오면서 여래불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부처가 석가 하나만이 아니라 다수이며 이들이 모두 현존하는 신적인 존재요 구세주라는 것이다. 정토사상이나 미륵 신앙 역시 원래의 석가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었다. '정토(淨土)'란 기독교로 말하면 천국과 같은 곳으로 말하자면 끝없이 변하는 무상의 세계 속에서 영원불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세상 모든 것이 공(空)이요 무상(無常)이라는 원래 석가의 가르침에는 어긋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



우리나라의 사찰에 가보면 대승불교의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는 대소를 막론하고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삼성각이 있다. 대웅전은 부처와 보살을 모신 본당으로 보통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세 부처가 놓여있고 그밖에 미륵불,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 등이 놓이게 된다. 여기서는 예불과 법회 등의 주요 종교 행사가 이루어진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제(齊)를 올리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죽은 자를 위한 사십구제나 백일제 등의 각종 제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세 신령과 그 밖의 여러 신령(神靈)을 모시는 전각이다. 이 전각은 그야말로 한국의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칠성은 생남 연명을 관장하는 신령으로 세 신령 가운데 언제나 중앙에 모셔진다. 산신과 독성은 기도자의 소원성취를 관장하는 신령이다. 이곳에는 입체 조각으로 표현한 불상과는 달리 세 신령을 평면으로 표현한 탱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이 없는 사찰이라 해도 반드시 삼성각은 있기 마련이다. 또 산중에 삼성각만 따로 있어 독립적인 사찰을 이루는 곳도 많다. 그만큼 삼성각은 사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삼성각은 각종 병마와 재앙을 퇴치하는 신령한 능력이 있는 곳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손 번창, 건강과 수명 연장, 사업 번성 등의 현세적인 복을 놓고 소원 성취를 비는 각종 기도회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칠성신에게 드리는 칠성기도가 무속에 있어서는 제석거리 굿과 같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산신기도는 주로 사업 성공과 번창에 집중되고, 독성기도는 입학성공과 같은 그냥 일반적인 소원 성취에 집중된다. 그런데 말이 기도회지 거의 굿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의 재래적인 무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주술적이고 밀교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보통 기도불교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한국 불교 신도들의 종교 행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가 주로 이 삼성각에서 이루어진다.



승려나 불교학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일반 불교 신자들에게는 각종 부처와 보살 역시 신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 신령들을 놓고 현세의 복락(福樂)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찰이란 한 마디로 '귀신 충만, 사탄 충만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대중적인 형태에서 보자면, 불교 본래의 철학적 정신 수련보다는 귀신에게 절하면서 각종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것이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불교의 실상이다. 불교라는 종교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해도 실상은 재래의 신령을 절 안에 모시고 있는 것이요, 또는 부처를 기도의 대상인 신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이 토착 종교의 내용과도 전혀 다를 바 없이 현세의 복락에 집중되어 있다. 무교의 가치 체계와 차별화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불교를 단순히 수준 높은 정신적 종교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서 너무나 많다. 영적인 실상에 무지한 결과다. 역사가에 따르면, 고려 시대에 국가적 규모로 실행된 팔관회와 연등회도 외형상은 불교 법회이지만 몽고의 토착종교행사를 수용한 기복제요 위령제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창세기 3장의 사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인류를 멸망과 타락으로 이끌어온 영적인 문제가 정신 수련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열심을 낼수록 오히려 더 굉장한 착각과 미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세적인 복을 비는 일보다는 마음을 정결하게 다지는 일에 관심을 두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련에 임하는 불교 신자라고 해도 실상 그런 종교적인 노력이란 지극히 인간적인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깨끗하게 비울수록 오히려 더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실제로 마음을 비우는 일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불교 신자들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그냥 비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비워진 마음의 자리에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영, 미혹의 영으로 채워짐으로써 오히려 더 악화되고 더 교묘한 형편과 처지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와 실상을 정확하게 일깨워주는 일이야말로 전도자가 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아닌가 한다.





/양승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