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 불교신문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 불교신문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일아스님 승인 2012.01.17 18:59 댓글 0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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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뻐할 것도 없다

행복과 불행은 돌고 돌기 때문

게송 213) 애착에서 슬픔이 생긴다. 애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새김 : ‘애착’은 뻬마(pema)의 번역인데 뻬마는 ‘사랑, 애정, 애착’의 뜻이 있다.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앞의 게송의 ‘사랑하는(piya:삐야)’이라는 말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애착’으로 번역하였다. 애착은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든, 개든, 화초든, 물건이든 애착이 강하면 집착하게 되고 거기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강한 애착의 관계는 이별이나 배신, 죽음 등의 여러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극도의 슬픔을 느낀다.



또한 지나치게 애착하여 집착할 때 애착하는 것과의 이별이 두렵고, 돌아서서 남에게로 갈까 두렵고 마침내는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워진다. 그러므로 애착의 강한 집착을 놓아버린 사람에게는 슬퍼할 것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감정을 가진 인간인 이상 애정을 갖게 되고 애착이 가고 호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가르침은 끈질긴 집착을 동반한 자신을 옭아매는 강한 애착을 경계한 것이다. 이것은 걸림 없이 훨훨 나는 자유로움을 묶기 때문이다.



게송 214) 집착에서 슬픔이 생긴다.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새김 : ‘집착’은 라띠(rati)의 번역으로 ‘사랑, 집착, 쾌락, 좋아함’의 뜻이 있는데 ‘쾌락’이라 할 수도 있지만 ‘집착’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 같다.



집착은 번뇌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집착은 무조건 맹목적인 눈먼 사랑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틀림없이 강한 집착의 결과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이어지고 집착하는 대상이 떠날까 두렵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강한 집착이 없는 사람은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게송은 애착과 집착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착과 집착이 없으면 슬픔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집착을 떠났기 때문에 기쁨도 슬픔도 없다는 가르침을 보자.<상윳따 니까야> 2:2.8.



까꾸다가 부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사문이여, 당신은 기쁘십니까?”



“그대는 내가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기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슬프십니까?”



“그대는 내가 무엇을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사문이여, 그러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습니까?”



“벗이여, 그렇다네.”



“오, 수행자여 그대는 어떻게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습니까?”



“진정으로 나에게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네. 슬픔은 기뻐하는 사람에게 따라오네. 수행자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네.”



“오랜 세월 후 나는 드디어 만났네. 온전히 해탈한 성인, 세상의 집착을 멀리 떠난 분, 기쁨도 슬픔도 없는 수행자.”



이처럼 부처님은 기쁨과 슬픔의 파도 그 너머의 부동의 경지에 이른 분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얻음도, 잃음도 부처님을 흔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애착과 집착의 그 너머 평온의 경지에 이른 분, 무한한 자유의 영역에 머무는 분이었다.



사실 인생은 그렇게 기뻐할 것도, 그렇게 슬퍼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행복이 오면 다시 불행이 오고, 행복과 불행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착과 집착을 멀리 떠난 사람 그에게는 슬퍼할 것이 없음에 틀림없다.



[불교신문 2784호/ 1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