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3

알라딘: 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도나 해러웨이 (지은이),최유미 (옮긴이)


최유미 (옮긴이)










알라딘: 종과 종이 만날 때


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은이),최유미 (옮긴이)갈무리2022-08-26

원제 : When Species Meet





























과학철학 주간 10위, 인문학 top100 2주|
Sales Point : 4,595

9.1 100자평(20)리뷰(2)

464쪽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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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pecies Meet (Paperback) Paperback

책소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늘날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을 비롯해서 다른 생명체들, 경관들, 그리고 기술들로 매듭이 묶인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반려동물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종과 종이 만날 때』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이 크나큰 현상을 파헤치면서 인간과 여러 종류의 크리터들, 특히 가축이라 불리는 것들과의 상호 작용을 숙고한다. 명품 반려동물에서부터 실험실용 동물 그리고 훈련된 우울증 치료견에 이르기까지, 해러웨이는 동물과 인간의 마주침의 철학적, 문화적, 생물학적 측면들을 능숙한 솜씨로 탐구한다.

이 대단히 개인적이면서도 지적으로 획기적인 작품에서 그녀는 ‘반려종’ 개념을 발전시킨다. 반려종들은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하지만 소화불량을 겪기도 한다. 결국 그녀가 찾아낸 것은, 존중과 호기심 그리고 앎이 동물과 인간의 조우에서 비롯되며 이것들이 인간예외주의에 대항해서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목차


감사의 글 5

1부 우리는 결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1장 종과 종이 만날 때 : 서문 11
2장 가치를 띤 개와 살아있는 자본 62
3장 고통 나누기 : 실험실 동물과 인간의 도구적 관계 90
4장 검증된 삶 : 순혈종 개 세계의 사랑과 지식의 실천들 123
5장 잡종견을 복제하고, 호랑이를 구출하기 : 생명윤리의 불안과 풍요의 문제 170

2부 스포츠 기자 딸의 노트
6장 유능한 신체와 반려종 202
7장 우정으로 맺어진 종 225
8장 접촉지대에서의 훈련 : 어질리티 스포츠에서 권력, 놀이, 그리고 발명 255

3부 얽힌 종과 종
9장 크리터캠 : 자연문화 속의 겹눈 309
10장 치킨 328
11장 테크노문화에서 반려종 되기 340
12장 마지막 식사 : 영양가 있는 소화불량 351

옮긴이 후기 372
후주 380
출판 이력 454
인명 찾아보기 455
용어 찾아보기 458
접기


책속에서


P. 53 돌보기는 호기심이라는 떠들썩한 의무의 주체가 됨을 의미하고, 하루의 시작보다 하루의 끝에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 1장 종과 종이 만날 때
P. 73~74 줄기세포와 개에 관한 논의는 불가피하게 황우석과 국립서울대학교로 이어진다. ... 황우석의 연구 이력은 농산업의 동물연구가 인간 생의학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일이다. ... 분명한 것은 농산업 연구와 인간 생의학 사이의 상당한 정도의 종-횡단적 왕래가 인간 줄기세포 기술, 기대할 수 있는 치료 혹은 생식의 경이를 다루는 미국의 “윤리적” 논의에서 애매하게 되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 2장 가치를 띤 개와 살아있는 자본 접기
P. 136 나는 윤리적 채식주의가 필요한 진실을 체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갖는 극단적인 잔인성에 대한 결정적 증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인간예외주의의 근거가 되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양육하기와 죽이기를 필멸의 운명을 진 반려종 얽힘의 불가피한 일부로서 대면하게 하는 명령인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수종 공동의 번영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진실들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 4장 검증된 삶 접기
P. 171 반려종이라는 용어는 개와 인간 사이의 오랜 공-구성적 연결을 말하는데, 이 관계에서 개들은 단순히 행위를 수용하는 자가 아니라 행위자였다.
― 5장 잡종견을 복제하고, 호랑이를 구출하기
P. 207 모든 종은 복수종 집단이다. 인간예외론은 반려종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 파트너는 정확히 육신을 갖추고, 중요하며, 기호론적-물질적인 존재가 상호 및 내부 관계를 맺은 결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캐리스 톰슨이 이야기하는 존재론적인 안무(ontological choreography)이다.
― 6장 유능한 신체와 반려종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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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당신은 방주에 올라탔다. 그 배에는 와이파이도 있고 이메일도 있다. 개뿐만 아니라 개코원숭이, 양, 그리고 불확실한 상태의 인간들도 많다.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서로를 훈련시킬 방법을 애써 찾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노아는 여자다. 홍수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에게는 그녀와 그녀의 짐승들이 있어야 한다.
- 브뤼노 라투르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공헌적인 저작 이상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 이자벨 스탕제르

『종과 종이 만날 때』는 인간과 개, 철학과 과학, 그리고 거시 문화와 미시문화의 교차점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이다.
- 카메론 우 (『바크』 편집인)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국일보
- 한국일보 2022년 9월 2일자 '새책'
경향신문
- 경향신문 2022년 9월 2일자 '책과 삶'



저자 및 역자소개
도나 해러웨이 (Donna J. Haraway) (지은이)


세계적인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이다. 남성/여성, 인간/동물, 유기체/기계 같은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고 종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사유로 명성이 높다. 콜로라도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예일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와이 대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여성학과 과학사를 가르쳤고 1980년부터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스 캠퍼스의 의식사학과의 교수였으며, 지금은 동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고전인 「사이보그 선언」을 비롯하여, 『반려종 선언』,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등 해러웨이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인 선언문은 사이보그, 개, 혈연관계의 친척 등 익숙한 이미지로부터 아이러니를 드러내면서 유머를 통해 새로운 형상을 제시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해러웨이 선언문』, 『영장류의 시각』,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 만나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등 널리 읽히는 많은 책과 논문의 저자인 해러웨이는 과학기술학에 대한 그의 공로로 2000년에 <과학사회학 학회>로부터 J. D. 버날 상을 수상했다. 접기

최근작 : <종과 종이 만날 때>,<트러블과 함께하기>,<해러웨이 선언문> … 총 38종 (모두보기)

최유미 (옮긴이)

KAIST 화학과에서 이론물리화학 박사학위를 하고, IT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에 참여했다. 
지금은 지식공동체 <수유너머 104>에서 철학과 과학학,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는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공저)이 있으며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 『종과 종이 만날 때』를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2.봄>,<감응의 유물론과 예술>,<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 총 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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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닥치고 훈련! 빨리 뛰어, 세게 물어!
도나 J.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세계적인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이다. 1944년생으로 콜로라도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와이 대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여성학과 과학사를 가르쳤고 1980년부터 캘리포니아대학 산타크루스 캠퍼스의 의식사학과 교수였으며, 지금은 동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해러웨이는 남성/여성, 인간/동물, 유기체/기계 같은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고 종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사유로 명성이 높다.
1985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이보그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세속적(earthly) 생존을 위해 사이보그를!”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사이보그 선언」은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진보 진영의 무조건적인 반대가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만약 정보통신 시스템의 최말단에서 일하는 유색인종 여성 같은 페미니스트가 사이보그가 된다면 테크노사이언스는 어떻게 바뀔지를 물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는 1980년대 중반 레이건의 스타워즈 시기에 페미니스트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말한다.
2003년 발표된 해러웨이의 두 번째 선언인 『반려종 선언』의 주인공은 보통의 개다. 이 두 번째 선언에서는 “닥치고 훈련!” “빨리 뛰어, 세게 물어!”로 슬로건이 바뀐다. 해러웨이는 부시의 후예들이 ‘자연문화’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구호는 이것이라고 말한다.
이 구호와 ‘자연문화’의 연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우선 ‘자연문화’는 자연과 문화를 가르는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해 해러웨이가 사용하는 용어다. 해러웨이는 ‘자연문화’가 띄어쓰기 된 두 개의 단어가 아니라 붙여 쓰는 한 단어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문화를 뜻하는 영어 낱말 “네이처컬처”를 다른 단어보다 빠르게 발음하며 강의하기도 한다.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에 따르면 자연에서 태어난 생물종 중 자연을 개조하고 변형하여 문화를 만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은 인간이다. 해러웨이는 여러 저작들에서 다양한 개념무기들로 이 이분법을 내파해 왔다. ‘반려종’도 한몫을 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인간예외주의는 반려종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반려종 선언』의 구호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사실은 해러웨이가 반려견과 함께하는 스포츠 어질리티의 참여자라는 점이다. 『종과 종이 만날 때』는 해러웨이가 반려견 카옌과 장애물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통과하는 어질리티 스포츠를 함께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 맺게 된 연결들로 가득하다. 해러웨이에게 어질리티 스포츠는 반려종들이 상호 훈련과 돌봄을 통해 존중의 관계를 맺는 법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이 책 『종과 종이 만날 때』(2008)는 『반려종 선언』(2003)의 문제의식을 이어받는 후속 이론서라 할 만하다. 2장과 4장의 일부분은 그 초고가 『반려종 선언』에 실리기도 하였다.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 : 반려종의 복잡한 그물망이 숙고되어야 한다
국민 4명 중 1명이 개 집사이거나 고양이 집사인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에 ‘반려종’이라는 말은 반려동물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해러웨이의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띤다.
해러웨이의 반려종 여정의 입구에는 그녀의 반려견이자 어질리티 스포츠 파트너인 오스트레일리언 세퍼드 견 ‘미즈 카옌 페퍼’가 있다. 해러웨이는 『종과 종이 만날 때』의 도입부에서 카옌이 자신의 세포를 모조리 식민화하고 있다고 쓰며, 책의 끝에 이르면 카옌과의 얽힘으로부터 퍼져간 끈적끈적한 실들이 이 책을 이끌어나간 안내선이었음을 고백한다. 해러웨이는 이 책에서 시리아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입식자들의 목장, 파리의 프렌치 불도그, 미국 감옥에서 개와 수감자들을 관계 맺게 하는 프로젝트, 개 용품 문화 산업의 투자 전망, 생쥐 같은 실험실 동물을 취급하는 연구실과 유전학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일, 야구나 어질리티 스포츠 현장 문화의 보수성과 가능성, 대학의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채식주의 및 태반 먹기 논쟁, 해양동물 몸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크리터캠> TV 프로그램이 던지는 흥미로운 쟁점들, 공장식 닭고기 산업의 잔혹한 현실, 개 유전학 활동가의 존경스러운 활약상, 길고양이 지원 단체들과의 우연한 연결, 멸종위기종 북쪽털코웜뱃와 예술 상상력의 조우 등을 실뜨기한다.
이는 해러웨이가 카옌이라는 다른 종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먹고 마시고 관계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연결들이다. 해러웨이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쓰면서 디테일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관해 연구하고 “닥치고 훈련!”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복수의 종이 일상에서 식사동료(messmate)로서 관계 맺으며 생기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 돌보게 하고 정치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관계할 수 있게 하는가”(370쪽)가 이 책을 이끄는 질문이라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동물 : 고통받고, 죽임당하며, 먹히는 반려종들에 대하여
“동물들은 도처에 있고 세계-만들기와 함께 되기에 있어서 빈틈없이 완전한 파트너”라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도심의 출퇴근길에서 길고양이와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새들은 아침마다 지저귄다. 해러웨이의 말처럼 동물은 도처에 있다. 인간은 매일같이 동물을 보고, 듣고, 만나고, 또 먹기도 한다.
많은 철학자가 동물에 대해 사유해 왔다. 데리다는 반려 고양이 앞에 나체로 있게 된 체험을 소재로 한 유명한 발표문 「그러면, 동물은 응답했는가?」를 썼고 거기에서 동물을 수동적 존재로 폄하해온 ‘철학의 스캔들’을 비판했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그는 철학적 고전들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독해방식을 우리에게 남겼지만, 동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데 있어서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않았다. 해러웨이는 개코원숭이 연구자인 바버라 스머츠의 관점과 데리다를 대비시킨다. 스머츠는 “개코원숭이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에서 걷는 법과 앉는 법, 자세 유지 방법, 눈과 목소리의 사용법 등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바꿨다.”고 썼다. 시간과 훈련의 과정이 지나자 개코원숭이들과 스머츠는 서로 존중을 표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들뢰즈/과타리는 어떨까? ‘동물되기’를 포함해서 ‘되기’에 대한 들뢰즈/과타리의 사유는 많은 후속 세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들뢰즈/과타리의 동물에 대한 서술 속에서 소형 반려견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에 대한 경멸을 발견한다고 쓴다. 그들이 늑대와 개를 대립시키고, 무리 동물과 그 밖의 부르주아 동물 및 국가적 동물을 대립시키면서 자신 같은 소형견 애호가에 대해서 혐오를 개진한다는 것이다.
반응하는 기계로, 인간 이하의 것으로, 상품으로, 장난감으로, 인간의 감정 풀이 노예로, 실험실에서 도구 이상의 쓰임을 가지지 않는 실험체로 격하되어 왔으며, 먹히기 위해 잔인한 조건에서 사육당하고 죽임당하는 식품의 원료인 동물들과 어떻게, 어떤 세계-만들기에 연루될 것인가? 『종과 종이 만날 때』의 여러 장은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과 반려종 관계에 놓여 있으며, 지금까지 인류와 학문이 이 관계를 어떻게 경시 또는 무시해 왔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떤 관점과 질문들이 긴급한 것인지를 살펴본다.
채식주의에 대한 해러웨이의 입장에서 해러웨이 사유방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해러웨이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예/아니요의 답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채식주의, 비건주의, 동물실험 반대가 페미니즘의 강력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페미니즘의 교의는 아니라고 말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은 우리 일상을 만들어내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실험동물들의 임상노동, 실험노동자들의 노동, 축산업의 닭, 돼지, 소들의 노동, 축산업 노동자들의 노동 등)에 존중을 표하는 법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가 아니라,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이다.

레스페체레! 반려종은 존중하는 관계를 향해가야 한다
해러웨이는 이 책 1장에서 반려(companion)와 종(species)이라는 영어 낱말의 어원을 탐구하면서 반려종을 위한 윤리로서 ‘존중’을 끌어낸다.
컴패니언(companion, 반려)은 라틴어의 ‘쿰 파니스’(cum panis), 빵을 함께 나눠 먹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에서 컴패니언은 반려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띠는데, 해러웨이는 그 의미 스펙트럼을 검토한 뒤 거기에는 성적이고 생식적인 의미도 들어있음을 지적한다.
스피시즈(species, 종)는 어떤가? 이 단어는 보다, 응시하다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스페체레(specere)에 뿌리를 둔다. 해러웨이의 용어사전에서 종(species)은 생물학적인 것이 무엇인지와 차이를 정의하는 철학적인 방법이자, 돈, 금, 똥, 부와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론적인 낱말이기도 하다. 종의 다양한 어원적, 사회적 의미 분화를 탐사한 끝에 해러웨이는 종의 어원이 되는 단어 스페체레에 ‘거듭’이라는 접두사 re가 붙은 레스페체레(respecere)에 주목하게 되고, 종과 종의 중요한 윤리의 하나로서 존중하다(respect)를 제기한다. ‘보다’라는 뜻의 스페체레에 ‘거듭’을 의미하는 레(re)가 붙은 레스페체레는 거듭 보다, 뒤돌아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과 종의 만남에 임해서는 상대에 대한 예의 바른 존중, 예의 바른 인사, 다시 보기, 뒤돌아보기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되기라는 공동의 미래를 만드는 관계는 불가능하다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해러웨이는 책의 여러 곳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주문을 외듯 “레스페체레!”를 외친다.
반려종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번창하고 있는 ‘애완동물’ 문화와 연결되는 용어라기보다 이처럼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 끝에 해러웨이가 도달한 곳이다. 해러웨이는 “나는 포스트휴머니스트가 아니라, 반려종과 함께 되는 누구이다. 이때 반려종은 ... 유한한 놀이에서의 정말로 기이한 식사 동료들.”이라고 쓴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명명법을 의식하면서, 스스로 포스트휴머니스트도, 포스트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식사동료들과의 시끌벅적하고 지저분한 그물망 속에 역사적, 상황적으로 위치 지어진 반려종과 함께 되는 누구라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종과 종이 만날 때』의 두 가지 물음
이 책의 서두에서 해러웨이는 두 개의 물음을 제기한다. 첫째 물음은 “내가 나의 개를 만질 때 나는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만지는 것일까?”이다. 두 번째 물음은 “ ‘함께 되기’(becoming with)는 어떤 의미에서 ‘세속적이게’(worldly) 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다. 첫 번째 물음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해 근본에서 존재론적인 물음을 다시 제기하게 만든다. 이 물음은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근본에서 되묻는 것이다. 두 번째 물음은 존재의 변신에 결부된 세속성(worldliness)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 물음에서는 해러웨이 사유의 독특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존재론적인 물음이 일어나는 자리가 일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지만, 일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은 그저 통념에 사로잡힌 삶이기에 철학적인 물음 따위가 일어날 리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의 바깥 그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 또한 일상을 말끔히 치웠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여겼던 것이 ‘누구’의 모습으로 만져질 때, 그리고 상대가 ‘누구’가 되었을 때 나는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 함을 알아차릴 때이다. 이러한 존재의 변신인 “함께 되기”는 이용하고, 이용되면서 함께 살고, 일하고, 놀고, 죽고 죽이는 일상의 고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 책은 반려동물이라고 불리는 관계에 있는 동물과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에 한국 사회의 많은 반려인들에게도 해러웨이의 질문들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보호자가 아니라 존중하고 존중받는 동료 어른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임을 이야기한다. 반려동물들이 반려인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만큼 반려인들은 그들에게 어떻게 책임을 다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종과 종이 만날 때』 책의 구성

1부 우리는 결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의 제목은 ‘우리는 결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이다. 근대 인간학의 산물인,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유일한 생물종 “인간”이라는 개념에 걸맞은 존재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음을 이 제목은 암시한다.
이 책의 서론 격인 1장 「종과 종이 만날 때 : 서문」은 동물, 특히 길들여진 동물인 가축이 철학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사유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철학에서 가축, 특히 개는 주인(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오이디푸스적인 존재로 경멸을 받았다. 다른 가축들의 경우에도 자연에서 붙잡힌 종신형의 죄수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부림과 죽임을 당하는 고통받는 타자로서의 가축이 지금까지의 철학적 사유가 나아간 극단이었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가축이 아니라 공구성적 역사를 함께 만들어온 반려종으로서의 가축을 이야기한다. 이때 반려종은 반려동물의 확장판이 아니다. 해러웨이는 “반려와 종을 함께 묶는 것은 함께 되기의 세계, 누구(who)이고 무엇(what)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라고 쓴다.
2장 「가치를 띤 개와 살아 있는 자본」은 살아있는 자본과 생명정치의 대상으로서의 동물을 다룬다. 해러웨이는 인간의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빨아들이는 자본의 메커니즘에서 살아있는 자본은 인간의 노동력만이 아님을 이 장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만이 아닌 살아있는 자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만이 아니라, 만남의 가치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만남이 존재를 만들기 때문이다.
3장 「고통 나누기 : 실험실 동물과 인간의 도구적 관계」에서 해러웨이는 모든 동물실험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도구적 관계를 악으로 여기는 것은 세속적 삶의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동물, 이 아픈 어린이, 이 마을, 이 무리들...”인 얽힌 그물망 속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책임 있게 고통을 나눌 것인가에 있고 이것은 “당신의 고통을 느낍니다”와 같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 가령, 실험 현장에서 그것은 상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경감시키는 실천이 될 것이다.
4장 「검증된 삶 : 순혈종 개 세계의 사랑과 지식의 실천들」은 해러웨이의 개, 카옌의 견종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언 셰퍼드의 번식과 유전적 질병, 그리고 특정 견종에 헌신하고 그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재야의 개 건강 활동가들을 다룬다. 특히 이 장은 과학학과 관련된 장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개의 유전병을 사실로 만들기 위한 재야의 과학자 C. A. 샤프의 분투를 다루는데, 이는 대학실험실 중심의 실천을 다루는 과학학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5장 「잡종견을 복제하고, 호랑이를 구출하기 : 생명윤리의 불안과 풍요의 문제」는 개의 유전적 다양성 및 복제견과 관련된 담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특정한 견종을 번식시키는 브리더들이 바라보는 개의 유전적 다양성은 호랑이 같은 야생 동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다루는 과학자들과 아주 다르다. 또한 생명의 번식에 개입하는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생명윤리의 담론은 활동이 이미 끝난 후에 그것을 뒷정리하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금지에 국한된다. 이는 과학은 한편에서 지적 탐구 활동으로서의 복제실험을 수행하고, 다른 편에 있는 사회가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 재프로그래밍과 같은 과학 프로세스에서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의 결과를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숙고하는 일이다.
2부 스포츠기자 딸의 노트
2부의 제목은 ‘스포츠기자 딸의 노트’로 3개의 장이 포함되어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스포츠기자였던 해러웨이의 아버지, 프랭크 우튼 해러웨이의 이야기와 해러웨이가 자신의 개들과 하는 스포츠인 어질리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6장 「유능한 신체와 반려종」에서 해러웨이는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 장애인(disabled)인 프랭크 해러웨이였지만 목발과 휠체어 덕분에 누구보다 유능한(able) 신체로 살았던 아버지의 육신으로부터 해러웨이 자신과 그의 형제들이 무엇을 이어받았는지, 아버지가 딸을 어떻게 존중했는지에 관해서 쓴다.
7장 「우정으로 맺어진 종」은 주로 이메일들의 콜라주들인데, 자신의 연구 동료들, 어질리티의 선배들과 동료들, 그리고 그 외 친구들에게 보낸 것이다. 자신의 개 롤런드와 카옌의 훈련, 놀이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들, 그리고 어질리티 경기에 점점 몰두해 들어가는 이야기, 목양견인 카옌이 롤런드를 놀자고 꼬여내기 위해 무엇을 양보하는지, 불임시술을 한 카옌이 어릴 적부터 친구인 피레니즈견 윌렘과 벌이는 성적인 놀이 그리고 치매에 걸린 자신의 시어머니와 개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8장 「접촉지대에서의 훈련 : 어질리티 스포츠에서 권력, 놀이, 그리고 발명」은 어질리티 훈련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이 담긴 글이다. 어질리티는 개와 인간이 협력하여 일련의 장애물을 통과하는 스포츠이다. 접촉지대는 어질리티에서 카옌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장애물 코스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들어가는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접촉지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훈련하지 못하면 공동의 삶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설계하고 만들었고 인간을 핸들러라고 부르는 어질리티 경기에서조차 훈련은 상호적인데, 인간이 개의 실제 퍼포먼스의 권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면 경기가 잘 진행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권위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해러웨이가 서두에 했던 존재론적인 물음을 다시 던져야 한다. 이것은 관계가 새로 짜이기 위한 일종의 열림(the open)이다.

3부 얽힌 종과 종
이 책의 마지막 부인 3부의 제목은 ‘얽힌 종과 종’이다. 종들의 얽힘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9장 「크리터 캠 : 자연문화 속의 겹눈」은 카메라라는 시각장치를 다룬다. 카메라는 원래 둥근 지붕을 한 판사의 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카메라라는 시각장비는 어떤 표준에 맞추어서 판단하는 기능을 멈춘 적이 없다. 이 장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의 <크리터캠>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 프로그램은 수생동물에게 카메라를 부착해서 인간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수중을 보여주자는 기획이다. 그러나 실제 TV에서 방영되는 것은 시청자가 눈을 뗄 수 없는 영상들로 이는 고도의 제작을 통해 만들어진 효과들이다. 크리터캠에 찍힌 영상은 내래이션이 없다면 마치 태아의 초음파 영상처럼 식별하기 어렵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러웨이는 인간의 매개 없이 수중생물에게 카메라를 장착했다고 인간의 행위성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지적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크리터캠의 해석이라는 노동에서 카메라를 짊어진 동물의 기호론적 행위자성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해러웨이는 “내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한 나도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사용된다”는 돈 아이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경우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사이에는 오랜 적응 시간이 필요하고 인간과 그들의 테크놀로지가 동물에 적응을 요구하는 만큼 동물도 인간과 그들의 테크놀로지에게 요구한다.
10장 「치킨」은 2005년에 개봉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 리틀>의 주인공 치킨 리틀을 내세워서 쓴 글로 식용으로 키워지는 가축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닭의 대규모 양계장이 만들어진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이니 닭이 인간의 식사를 책임진 세월은 아주 길다. 닭은 한해에 도살되는 수가 미국에서만 100억 마리이고 산란계의 75%가 배터리식 닭장에 거주한다. 여기서 해러웨이는 닭들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슈를 탐사한다. 닭들의 열악한 거주 환경, 양계산업에 착취당하는 인간 노동자들, 인간의 윤리결벽주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근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는 유전자재조합 닭고기, 유행 중인 조류독감과 그에 따른 살처분, 동남아 국가들에 양계사업을 이식시켜서 냉전시대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 했던 미국의 야심, 항온 시설을 갖춘 인공 부화장을 만들 형편이 못 되는 아프리카에 밀수출되는 병아리들, 구소련 연방의 접경 지역들에서 밀매되는 닭다리가 무기 암거래보다 수지가 더 맞는 장사라는 것 등. 해러웨이가 희망을 거는 것은 영국의 <희소품종보호협회>와 같은 단체의 활동이다. 이들은 공장식 사육을 반대하고, 산업적 표준화 때문에 없어질 위기에 처한 닭품종의 유전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조류독감의 살처분으로부터 희소품종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고, 인간과 동물 모두의 웰빙에 도움이 될 축산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11장 「테크노문화에서 반려종 되기」는 자신이 거두게 된 떠돌이 고양이 이야기와 자신의 파트너 러스틴이 가르치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낙제점을 받기 위해 학생으로 등록해서 미국의 기술사에 관한 교육을 받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해러웨이는 이 두 이야기 모두 반려종을 만들기 위한 상호 유도과정을 통해서 작동하는 테크노문화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속에서 여러 존재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12장 「마지막 식사 : 영양가 있는 소화불량」은 잘 먹기, 그리고 먹기와 관련된 윤리에 관한 글이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 가설을 참조하는 해러웨이는 진핵세포로의 진화에서 먹기와 소화불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 동물과 인간의 고통스런 관계를 피하기 위해 먹기를 아예 빼버리는 것은 편리한 해결책이지만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이 이야기의 한 꼭지는 호주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북쪽털코웜벳을 소재로 한 피치니니의 작품들이다. 북쪽털코웜벳의 서식지가 급감한 것은 유럽에서 수입된 소들을 먹이기 위해 버펄로 풀이 함께 도입되었고 버펄로 풀이 재래종 풀의 서식지를 대부분을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생태계 복원을 위해 소와 버펄로 풀의 서식지가 축소되고 있지만, 웜벳은 여전히 토끼와 소들과 먹이를 경쟁해야 하고 딩고의 포식 앞에도 노출되어 있다. 피치니니는 전 세계에 25마리밖에 남지 않은 암컷 북쪽털코웜벳을 위해 한 단에 한 쌍식 무려 3단에 걸친 육아낭을 등에 진, 그러니까 6마리의 새끼를 한꺼번에 키울 수 있는 북쪽털코웜벳의 대리자를 그렸다. 해러웨이는 이 대리자를 어머니다운 여성이 아니라 퀴어로 부르면서 영양가 있는 소화불량이라고 한다. 마지막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스에 교수 임용을 위해서 면접시험을 치르러 간 날 저녁의 식사 이야기와 사냥된 멧돼지가 음식으로 오른 학과의 파티 이야기다. 사냥을 좋아하는 동료교수가 제공한 멧돼지 통구이가 학과의 파티에 제공된 것에 대해 학과의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그런 식의 학과파티는 중단되었고 사냥과 먹기라는 중요한 이슈는 더 이상 토론거리가 되지 않았다. 해러웨이는 동료의 수렵 활동을 존중하고 한편으로는 수렵활동에 반대할 뿐 아니라 동물을 먹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동료들도 존중한다. 그러나 이는 상대주의가 아니고 “동시에 진실이면서도 조화가 불가능한 복수의 사물이 낳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다.” 해러웨이는 이 둘 모두 세계에 대해 감정적이고 인지적인 요구를 체현하고 있고 이것은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행동과 존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책의 말미에 자신의 개 카옌이 자신에게 한 키스가 얼마나 많은 친척(kin)과 종류(kind)를 만들어 내었는지를 뒤돌아보고 깜짝 놀란다. 이 책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반려견 카옌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어질리티에서 멋진 달리기를 마친 개와 그의 인간에게 어질리티 동료들이 감탄하면서 하는 말 “그녀가 그녀의 개를 만났어!”를 언제가 꼭 듣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면서 글을 마친다.
이 책의 특징은 미주의 분량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때로 가독성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본문의 말끔한 전개가 실제로 얽혀 있는 여러 일들과 관련 연구들에 대한 풍부한 참조들은 또 다른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본문과 미주를 오가며 읽으면 이 책이 엄청나게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 체감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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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통찰이 담겨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글월마야 2022-09-01 공감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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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스터디에서 역자님의 도나해러웨이 강연 잘 들었습니다. 책도 너무 기대되요!
니나니나 2022-08-05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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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책에게 손을 내밀어보는 것인데, 기대됩니다.
맑스베버 2022-08-13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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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는 해러웨이의 글 기대됩니다. 나와 다른 종, 인간 종이 아닌 종과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함께되기 를 기다립니다:)
서연 2022-08-12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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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책 지금 받았네요! 잘읽어볼께요!
2022-08-31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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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속에서 함께 번영하는 법


평점


4점 ★★★★ A-

도나 J.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20세기 후반기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녀는 철학은 물론 문학, 생물학, 과학기술학, 페미니즘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와 관점을 제시하면서 얽히고설킨 지적 모험의 지평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화려한 명성에 비해 생소하고 까다로운 학자가 해러웨이다. 그녀는 인공지능 기술과 유전공학의 발전 속에서 과학과 페미니즘을 접붙인 철학자로 명성을 누렸다. 해러웨이는 1985년에 발표한 논문『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에서 남성 중심 과학이 초래한 여성과 과학기술의 분리된 관계를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인 기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녀에게 사이보그는 남/여, 백인/흑인(을 포함한 유색인), 인간/비인간(동식물, 기계) 등의 근대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존재이다.

해러웨이의 이원론 해체는 단순히 공동체 안에 있는 서로 이질적인 의견과 정체성을 하나로 융합하기 위한 숙원의 과제가 아니다. 다양한 의견과 정체성이 만날 때 생기는 모순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면서 돌보는 주체적인 결속이 가능해진다. 근대적 이원론의 재료인 인간중심주의는 지구상 모든 존재의 공존을 도모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는 단절과 차별,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한쪽만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게 만드는 모든 형태의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한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인간, 기계, 동물, 주류로부터 배제됐던 그 밖의 존재와의 만남을 선호한다. 그들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합일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모순을 외면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모순에 응답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세상을 만들려는 해러웨이의 지적 모험은 2003년에 나온 『반려종 선언』(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에서 이어진다. 해러웨이가 첫 번째 지적 모험에서 만난 존재가 사이보그라면, 두 번째 모험 중에 만난 존재는 개다. 개는 인간과 아주 친한 반려동물이다. 개를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로 보는 관점은 개와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렇지만 개를 친근하게 바라보는 인간의 눈앞에 인간과 비인간을 무 자르듯이 구분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른거린다. 인간중심주의를 투과한 인간의 시선에 비친 개는 반려‘동물’이다. 반려동물이라는 언어로 된 철창에 갇힌 개는 인간의 손길을 받으면서 자라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반려동물은 인간이 허용한 관계의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만든 도시는 반려견이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반려견은 산책할 때마다 목줄과 입마개를 착용한다. 인간의 보호와 통제에 벗어난 반려견이 인간을 공격하는 순간, 그들은 ‘동물’이 되고 안락사해야 할 존재가 된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온정적이지만, 여전히 개를 인간에게 의존하는 비인간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에 갇힌 개를 구출한다. 반려종은 사이보그와 마찬가지로 종(種, Species)의 경계 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반려종에 속한 개와 인간은 자연과 문화 또는 동물과 인간으로 구분되는 이원론을 아늑한 거처로 삼지 않는다. 거처 밖에 이원론에 맞지 않은 기이하고, 잡다한 존재들이 돌아다닌다. 해러웨이는 이들을 묶어 ‘크리터(critter)’라고 부른다. 크리터와의 만남이 지속되면 범주가 무의미해지고, 모든 존재가 뒤죽박죽 섞인 관계망이 만들어진다. 이 관계망 속에서 종과 종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멈추지 않으며 차이를 존중하면서 만난다. 해러웨이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돌보는 ‘함께 되기(becoming with)’의 삶을 강조한다.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은 나온 지 상당히 오래된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은 2019년에 번역되었다(《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황희선 옮김, 책세상). 우리말로 번역되기 전까지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은 일부만 인용된 채 소개되었다. 길어야 서너 줄인 인용문은 해러웨이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에 박힌 장식품에 가까웠다. 그동안 독자는 해러웨이의 철학을 장식품에 의존하면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접근해야 했다. 이러면 얽히고설킨 해러웨이의 철학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는 오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래서 해러웨이는 이해하기 까다로운 철학자다. 《종과 종이 만날 때: 복수종들의 정치》(When Species Meet, 2008)는 해러웨이가 쓴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의 주석서다. 『반려종 선언』에 일부만 소개된 『스포츠 기자 딸의 노트』도 수록되어 있다. 해러웨이는 스포츠 기자로 살아온 장애인 아버지의 삶과 가족 전체의 일상에 영향을 준 반려종을 되돌아본다(respecere).[주1] 독자는 『스포츠 기자 딸의 노트』에 기록된 그녀의 지적 모험을 유쾌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해러웨이는 『반려 종 선언』의 초기 원고를 토대로 《종과 종이 만날 때》의 2장과 4장을 썼다. 그래서 《종과 종이 만날 때》 134쪽에 있는 사진은 《해러웨이 선언문》 222쪽(『반려 종 선언』)에도 나온다.

《종과 종이 만날 때》을 혼자 읽어도 버겁다면, ‘반려 독서’를 해보면 어떨까. ‘반려(companion)’는 라틴어 ‘쿰 파니스(cum pains)’에서 유래됐다. 쿰 파니스는 ‘빵을 함께 하다(먹는다)’라는 뜻이다. 해러웨이가 강조한 반려는 ‘식탁에 함께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서로 돌보면서 식사하는’ 존재다. 내가 생각하는 해러웨이식 반려 독서는 이렇다. 여러 사람이 탁자에 함께 앉아서 혼자 읽은 책을 다시 본다(respecere). 반려 독서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가 읽은 내용을 알려주고, 이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힌다. 이 모임에서 본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이 내 의견과 다르더라도 존중해주고 받아들이자. 반려 독서의 목적은 지식을 더 많이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반려종인 우리는 ‘함께 읽기’를 통해 서로 다른 지식과 정체성이 만나면 생기는 ‘차이(또는 모순) 속에서 함께 번영하는 법[주2]’을 배워야 한다.

[주1] ‘레스프레체’라고 읽는다. respecere는 종의 어원인 specere로부터 나온 말로 respect의 어원이다. specere가 ‘보다’라는 의미이므로 respecere는 ‘거듭해서 보다’는 뜻이다. (《종과 종이 만날 때: 복수종들의 정치》, 제1장 종과 종이 만날 때: 서문, 31쪽 각주)

[주2] 《종과 종이 만날 때》, 371쪽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 196쪽




 

P. T. 바눔 → P. T. 바넘(P. T. Barnum)


* 198쪽 각주(옮긴이 주)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83[주3]~1966)는 간호사로, 산아제한 운동을 활발히 벌였던 여성 운동가이다.

[주3] 마거릿 생어의 출생 연도는 1879년이다.

* 204쪽




콜로라도 록키즈(Colorado Rockies) → 콜로라도 로키스


* 후주, 381쪽





A. N.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오영환 옮김, 서광사, 1990.

[주4]






[주4] 2008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 후주, 402쪽





낸시 파머, 『아프리카 소녀 나모』, 김백리 옮김, 느림보, 2007.[주5]

[주5] 초판이 출간된 연도는 2005년이다.


* 후주, 428쪽











Brian Harre → Brian Hare [주6]





[주6] 브라이언 헤어는 작년에 화제가 된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이민아 옮김, 디플롯)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이다.















* 후주, 448쪽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닥터 아인의 마지막 비행」 [주7]







[주7] 번역명: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 이수현 옮김, 《체체파리의 비법》, 아작, 2016.


* 후주, 449쪽





드니 디드로의 『달랑베르의 꿈』 [주8]

[주8]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 후주, 452쪽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여장을 한 발데모트 경

→ 볼드모트 경(Lord Voldem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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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2-09-12 공감(26)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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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댄서






해러웨이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나 '존재론적 안무ontological choreography'(스스로 만든 말은 아님), '반려종, '사이보그' 등 새로운 어휘를 사용하는 독창적인 SF적(Science Fiction뿐 아니라 speculative fabulation, string figure, speculative feminism의 두음) 작가다.




값진 논의를 하는 책이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해러웨이는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확증편향의 논리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런 이해 또한 해러웨이가 반기는 반응이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자신의 반려견들과의 세속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반려종'으로서의 견해를 피력한다. 물질-기호적 세계에서 이미 얽혀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중 인간은(비인간 동물과 동등하지도 않고, 동등할 수 없는 위치성을 가진 존재로서) 비인간 동물에게 응답하고 돌봄을 수행할 의무가 있고, 이런 돌봄과 응답의 의무를 지식과 연결하여 세상을 좀 더 비인간 동물이 고통을 겪지 않고 더 잘 살 수 있는(Livable life) 상황을 만들자고 이야기하는듯 하다. 물론,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이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작용(캐런 바라드의 용어)하는 관계 중 서로를 형성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2부는 일종의 스포츠 기자 출신이자 장애를 가진, 해러웨이적으로 표현하면 휠체어와 목발과 연결된 사이보그적인 존재인 아버지에게 바치는 오비추어리처럼 느껴졌다. 경계적인 접촉지대에서 만들어지는 지식과 인식(어질리티의 접촉지대가 촉발한 사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샌드라 하딩의 입장론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의뭉스럽게 회피하는 해러웨이가 사실은 맑스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스러웠던 과거 면모를 언뜻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3부는 종의 얽힘과 테크노사이언스 기술들을 연결한다. 동물 몸에 부착하는 캠을 통해 동물의 시선에 우회적으로 접근한다거나, 치킨과 산업적인 네트워크들, 자신이 적을 둔 UCSC(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교수진들의 식사에 얽힌 복잡다단한 입장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책의 내용은 딱히 흠잡을 데 없고, 해러웨이의 뛰어난 인식론(상대주의를 주장하지 않음)과 놀이에 가까운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번역도 공들여 했다고 생각한다. 존재론적 안무에 함께하는 댄서로서 반려종과 함께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어질리티 스포츠 참여 경험에서 반려종 개와 소통하고 놀고 불통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유익했다.




다만, 내가 이 책에 갸웃했던 이유는, 해러웨이의 견해엔 여전히 충만한 인간 중심성이 놓여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러웨이는 동물권 논의와 육식에 대해 미리 결정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이야기는 도덕적 상대주의로 현 상황을 옹호하거나 방관하자는 것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들이 노동을 하기에, 그들이 단지 대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별의 '세속적' 상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무료급식에 육식이 나올 때, 대체 채식 제공이 충분히 가능한 경제적 여건에 지역에 사는 사람 등 상황적인 측면은 다양하다). 나는 이런 부분도 수긍했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인간이 없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것은 엮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방식으로 엮일 수는 없을까란 질문이다.




동물을 자연에 방목하자는 루소(?)적 견해를 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과 불화하는 동물. 반려종이길 거부하는 '반려종'을 고려할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인류학자 라디카 고빈다라잔(Radhika Govindarajan)은 《동물 친밀성》(Animal Intimacies)에서 인간의 우리를 도망친 돼지, 그 후에 민가를 습격한 (구)가축 돼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길거리 동물, 소문이긴 하지만 곰과 교접하는 여성 등 동물과의 섹슈얼리티 관계에 대한 해석 등 동물들의 다양한 행위성('반사회적'으로 읽히는)을 논한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본 책에는 부재한듯하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물의 섹슈얼리티는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동물과 동물끼리의 섹슈얼리티만 상상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인간이 '인간'이라는 대분류로 묶기가 어렵듯 동물 역시도 아주 다양한 층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과 다른 책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카옌과 키스를 통한 타액의 얽힘과 과학적 층위에서의 상호엮임을 논하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아니다.




또한, '반려종'이라는 표현과 어질리티 '스포츠'도 다분히 인간적인 어법이다. 인간이 없다면 동물들이(데리다는 동물말-animot-이라는 표현으로 '동물들'의 복수성을 단수형으로 표현하고자 했음. 데리다의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참고 ) 어질리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해러웨이는 강아지들이 어질리티를 좋아한다고 즐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난 아직도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다분히 가축화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이 관계가 돌봄 의무에 응답하는 중산층 반려종이 있는 관계라고 해도 그렇다. 집에 있는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domestic not domesticated) 동물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다.




해러웨이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동물들의 아나키적 가능성을 논하는 책은 Jack Halberstam(잭 핼버스탬)의 《Wild Thing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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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9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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