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4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야기 세이이치 씨의 사상

"통합체의 철학"의 새로운 구축을 향해

다나카 유

소개

야기 세이이치 선생님의 발표 요지는

첫째, 신약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신약성서학)

둘째, 그것을 현대인에게 통하도록 말씀하면 어떻게 될까(종교철학 혹은 철학적 신학)

셋째,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방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실천론)

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저 『창조적 하늘로의 길』, 한층 더 「내 일에 대해」에서 참고문헌으로서 나타낸 야기 선생님의 반세기에 걸친 저작군을 안내해, 상기의 3개의 시점으로부터의 선생님의 일에 대해서 회고 한편, 그것이 미래에 대한 의미를 말했다.

야기 세이이치 선생님(이하 경칭 생략)의 일은 신약 성경의 텍스트 석의를 모체로 하면서 언어/사유 이전의 직접 경험에 몰두하는 종교 철학으로서 전개되었지만, 그 연구 발표의 하나의 중요한 장소 가 동서종교교류학회(The Japan 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였다(1). 불교자와 그리스도자와의 영성 교류와 종교 철학적인 대화를 목표로, 1982년에 설립된 이 학회에 제가 입회한 것은 1985년이었지만, 그 해 의 대회 테마는 「불교와 기독교의 접점」이며, 강연자의 니시타니 계치를 둘러싸고 이틀간에 걸치는 집중 토의가 행해졌다. 니시타니 케이지의 강연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개인·공동체·세계'의 세 가지 관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접점을 고찰할 필요성의 지적이다. 34년의 세월을 경과한 후 다시 니시타니의 말을 회고하고 재인식한 것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세계 종교에 공통되는 종교적 실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경우 특수·보편의 3자를 불가분한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상호매개·상호내재의 구조를 동태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또 하나는, 「친무의 <이쌍사중의 교판> 이후, 일본의 불교자가 <교상판석>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왜인가?」라고 하는 니시타니의 질문이었다. 종교간 대화로 말하는 inclusivism(포괄주의)의 대승불교적 형태로서 「교상판석」이 있어, 단 하나의 선택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진실한 것으로 하면서도, 다른 여러 종파를 단적 허위로 척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를 채택하지 않고, 진실한 가르침으로 이끄는 잠정적인 가르침(방편), 혹은 부분적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는 입장이다. 잡다한 제종교·제종파가 세속화하고 형체로 된 현대에 있어 포괄적인 통합적 진리에 대한 질문에 일본 불교도 다시 한번 돌이켜서는 안 된다는 질문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니시타니는 '심전을 경작한다'는 표현으로 농부가 논을 경작하고 씨앗을 뿌리고 벼의 성장을 지켜 결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인의 마음에 언급됐다. 불교도 한때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외래 종교였지만, 토착민의 종교심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을 섭취하여 일본 문화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보편적인 세계 종교의 '문화 내 개화'라는 문제는 대승 불교에 한하지 않고 기독교에게도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서종교교류학회와 함께 제가 30년 이상에 걸쳐 계속하고 있는 또 다른 학회 활동은 일본 화이트헤드 프로세스 학회이다. 이 학회의 초대 회장인 야마자키 마사이치는 경시, 고마바의 대학원의 비교 철학 연습으로, 오전중에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오후에 도원의 「정법 안장」을 텍스트로 하고 있었다. 야나카 흥젠지의 주직인 동시에 일본철학회 회장이었던 야마자키는, 「수문기」의 교정 주석의 일을 하고 있어 그 「정법 안장」독해는, 임제종이나 조동종이라고 하는 때와 종파 의 구별을 넘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구별을 넘은 보편적인 문명론의 시점으로부터 길을 논하는 것이었다. 야마자키의 칸트 해석 내지 비판도 마찬가지이며, 종래의 일본에서 지배적이었던 강단적인 칸트 해석보다, 존 록으로 시작되는 영국의 경험론의 전통을―평명한 말로 일에 맞춰 라고 말하는 철학이면서도 전통적 권위를 비판하는 근원성을 안에 숨기고 있는 것으로서 평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선·미의 세 가지 가치를 통합하는 칸트의 근본 자세에는 공감을 기억했지만, 칸트 철학 자체는 '단지 이성의 한계' 속에서 에서만 종교를 말하는 점에 종교 철학으로 보는 한 불만이 남았다. 그와 동시에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의 연구로부터 철학으로 전환한 것으로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아프리오리즘은, 그대로의 형태로는, 대단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공의 주관적인 직관 형식과 순수한 오성 개념이 경험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아프리올리한 종합 판단이 가능해져, 그것이 순수 수학과 물리학을 기초로 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그 논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에 개정 불가능한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한 후, 그 인식론적인 근거를 묻는다는 논의가 되었다. 그 때문에, 20세기에 생긴 수학과 물리학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환에, 칸트의 인식론 그대로는 대응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칸트의 논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내장하는 상대성 이론, 비인과적 상관을 내장하는 양자역학, 비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를 주제로 하는 현대 논리학의 현장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

고마바 대학원에서는 나에게 또 하나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비상근 강사로서 가미치 대학에서 동대 고마장에 출강된 栁瀨睦夫의 「과학기초론(양자역학의 관측이론)」의 세미나였다. 이 연습에는, 친숙한 비상근 강사로서 고마바에 출강되고 있던 혼고의 철학과의 야마모토 노부, 그리고 동대 물리학과에서 栁瀨과 동기였던 오모리 장장도 참가해, 원생들과 3명의 선생님 에 의한 백열한 논의가 계속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 되어 회상하면, 과학·철학·종교의 3개의 영역의 교차하는 장소에서 일을 해 온 나는, 다양한 형태로 야마자키 마사이치, 야나세 아츠오 양 선생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해 (2).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분리 불가능한 전체를 테마로 한다는 생각, 양자론과 상대론을 통합하는 (향후) 물리 이론의 기초가 되는 실재 이론은 어떤 일이 되는가, 라는 질문을, 나는 栁瀨 선생님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리학자인 동시에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야나세에는 '신의 원래 과학-숨겨진 실재론'이라는 유저가 있으며, 거기서는 '과학과 기독교 신학'이라는 두 영역을 통합 하는 독자적인 사상이 말해지고 있다.

「숨겨진 실재론」이란, 나의 이해하는 곳에서는, 「숨겨진 신」이―과학・철학・종교(무신론자도 포함한다)의 입장의 차이를 넘어―만 사람들에게 공통의 실재로 있다는 전제하에 과학과 종교의 통합을 목표로 만인에 대해 열린 논의를 하자는 栁瀨의 실재론의 입장의 태도 표명이었다. 거기에서는 「참인가 거짓인가, 중간은 없다」라고 하는 2치의 형식 논리를 넘어,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언어의 애매하지 않고 양의성을 허용해, 모든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생각 가 중요하다. 그리고 栁瀬은 스콜라 철학의 경직된 형식주의를 넘어 이성과 신비 사이에 사려 깊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점으로 돌아가 쇄신된 토마스적 실재론의 철학 ─ 거기서 “초자연은 자연 을 파기하지 않고 완성한다”─를 자기의 철학의 입장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영원과 시간의 중간에 있는 '영재장'으로 파악한 곳에 그 실재론의 특징이 있었다. "하나님의 원래 과학"에는 栁瀬의 자전적인 회상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히로시마의 원폭을 계기로 물리학자로부터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게 된 栁瀬의 프린스턴 오펜하이머와의 교류, 또 쿠바 위기 뒤에 '지상에 평화를'라는 회칙을 낸 요한 23세 교황에 접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요한 23세는 제2바티칸 공회의를 소집하고 전쟁 위기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현대적 쇄신을 시작한 교황이었다. 이어 교황이 된 바울 6세의 '우리 시대에 Nostra aetate'라는 선언은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가톨릭 교회가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종교의 입장을 넘어 모든 지상의 사람들에게 열린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보편의 교회'의 이름에 상당할 것이다.

과학, 예술, 종교의 3개 영역을 통합하는 철학이라고 하면, 그런 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능한가 묻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이름에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했다. 교토 학파의 철학, 특히 장소적 논리에 의해 종교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의 쌍방을 말하는 니시다 기타로, 「실재의 실재적 자각」을 말하는 니시타니 케이지의 「하늘과 즉」의 철학도 그러한 통합을 지향한 것 이다.

추상적 관념을 현실과 어긋나지 않고 항상 직접적인 경험을 거듭하면서 과학, 예술, 종교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 화이트 헤드의 철학은 고마바의 대학원에서의 내 연구 테마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저작을 읽을 때 오카결의 문화와 교육, 학문에 관한 사고방식과 통저하고 공명하는 말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관념을 실존에 선행시키는 독일 관념론의 비판을 통해 그 만년의 철학을 구축했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분별지의 비판이 있다.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에 있어서 명확하고, 의식적인 분별지(clear, conscious discrimination)는 하나의 우유사이다. 그것(분별지)이 우리를 인간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분별지)에 의해 인간이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분별지)은 우리의 인간성의 본질(the essence of our humanity)에 속하지만, 우리의 실존의 우유사(an accident of our existenc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유의 여러분” 원저, 116페이지)

1960년대에 출판된 영국의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의 '종교와 반항인'은 '인간은 종교 없이는 완전무결할 수 없다'는 주제에 썼다. 저작이었다. 그는 이 저작에서 파스칼, 스웨덴 볼리, 뉴먼 추기경, 킬케골 등 종교자나 신비주의자를 논한 후 최종장에서 화이트헤드를 “그 자신의 헤겔과 킬케골을 통합했다. 존재이다”라는 말로 마무리해 최대급의 평가를 주었다. 윌슨은 아카데미즘의 철학자는 아니지만, "실존주의자로서의 화이트 헤드"라는 관점에서 화이트 헤드의 텍스트를 읽은 아마 첫 번째 평자일 것이다. 의식(한 존재)에서 존재(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그 자체) 쪽에서 '의식된 존재'를 사유하는 점에서, 화이트 헤드는 사르트르와 같은 대륙의 실존주의자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철학자라는 윌슨의 통찰은 "실존한다"는 동적 사건 - 그 역사성, 개성, 사회성, 인격성 및 모든 범주의 기초에있는 창조성에 대해 -의 적절한 철학적 해석과 설명이 이루어지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 몸에서 헤겔과 같은 사망 철학자와 키르케골과 같은 실존주의자 모두의 삶을 살린 인물로서의 화이트 헤드는, 니시다 기타로에 시작되는 교토 학파의 철학자들과 함께, 나 자신이 철학 때 항상 참조해야 할 기본적인 철학적 텍스트가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화이트 헤드의 철학은 그 자신에 의해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현재 "유기체"의 말을 피하고 "통합체의 철학"이라는 말로 그의 우주론과 사회 이론을 말하기로 하고 있다. 그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나는 「유기체」라는 말로는, 화이트 헤드가, 본래 말해야 했던 「형이상학적」 함의가 충분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한층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분별지'에 인간적 '본질'을 보면서도 우리의 실존은 인간적 본질보다 일에 앞서 있다는 독특한 의미에서의 '실존주의자'로서의 화이트 헤드의 중요한 일면이 버려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해하는 곳에서는, "갈등 일치"가 통합학의 기본적인 사유 작풍이다. 진리는 객관성인 동시에 주체성이기도 하다. 헤겔인 동시에 킬케골이기도 하다는 것-그야말로 중요하다.

「개체」를 존재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톰으로서 실체화하는 「개별주의」를 비판한 점에서 유기체론을 설득하는 것은 옳지만, 「관계의 제일의성」을 너무 강조하는 '개성'을 관계성의 네트워크로 해체하는 '전체주의'를 설한다면 - 그 경우 '전체 존재'가 스스로를 넘어가는 '무한'으로의 열기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수반 없으면─“개별주의”라고 친숙해지는, 대립 규정의 한쪽만을 증거해 다른 쪽에 어두운 도그마에 낙락할 것이다. 그런데, 「통합체」라는 말은 야기 세이이치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키워드이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새로운 「통합체의 철학」의 구축에 맞추어 논의를 계속하고 싶다.

독일의 카셀에서 야기의 불교적 세계에 개안을 촉구받은 빌리헬름 군델트에게 “나는 좋은 그리스도자가 되기 위해 불교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 있다. 즉 불교와 기독교를 통합하여 양자를 양기하는 제3의 세계 종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라는 「타자」의 전통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그것과 대화함으로써 그리스도자 자신이 , 기독교 속에서 지금까지 자각되지 않았던 자기의 전통의, 지금까지 숨겨져 온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해, 그에 의해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전통의 은사 중에 머물면서도, 그것을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변용되어 새롭게 쇄신된 의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야기 세이이치의 입장에는, 불교와의 대화에 의해 창조적으로 쇄신된 기독교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종교 이후의 현대인의 니히리즘을 「자연체로 게다가 주체적으로」 넘어간다는 부정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대화에 의해 상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한 혼련도 모방도 아니고, 자기의 전통의 창조적 쇄신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우선, 니시타니 케이지의 논문 「하늘과 즉」에서 발견되는 불교적인 법계연기(특히 사물무조)의 설명과 거기에 촉발되어 쓰여진 야기 세이이치의 「프론트 구조의 철학」에 대해 논하고 싶다. 여기서의 논의는, 프론트 구조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인 동시에, 종교간 대화를 의미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니시타니 케이지의 철학적 논란 「하늘과 즉」 및 야기 세이이치 「프론트 구조의 철학」에 전해

니시타니 케이지의 논문 「하늘과 즉」(저작집 13권 111~160페이지)은, 1시가에 있어서의 하늘 2바쇼의 일례(연구의 고찰) 3「문」과 문법 4이사 무리의 로고스 5 사물 무리와 신의 세계 6 근원적인 구상력에 대한 6장으로 이루어진다.

최초의 3장은 직접 경험과 언어의 문제, 특히 시가에 있어서의 말의 사용, 특히 바쇼의 배우사연가의 발구에 있어서의 「절자」―자르는 것에 의해 연결한다―미학적적 고찰을 통하면서, 「말과 무언, 어와 默의 상호 침투 같은 곳을 표현에 가져오는 힘을 포함한다” 일본에서 특히 세련의 극에 이른 언어 예술에 틀림없는 배우 諧連歌의 근저에 있는 말의 작용을 고찰하고 있다. 「비연속의 연속」혹은 「자르는 것에 의해 연결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즉」이라고 하는 논문의 주요한 모티프이다. 그것은 「분별적 지성」의 조작에 의해 언어를 대상화해 「문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원래 <주어진」 것으로서 현성하고 있는 경우, 사실이 원칙적으로, 모든 반성에 앞서 하고, 사실 자신의 「사」로서 체험되는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방향」에 따라서 고찰을 진행해,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구조가 성립하는 이전의 직접 경험의 현장에 있어서 「말이 그 원본 적인 모습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장소를 해명한다. 그곳은 지성뿐만 아니라 정의를 겸비한 인간의, 원본적인 자기 표현의 장소이며, “인간의 숨결, 숨결과 한숨과 한식 등이 말과 함께 전해지는 정의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가의 언어의 작동을 안내해 니시타니는 「이사 무리의 로고스」의 고찰에 옮긴다. 즉, 사실이 주어져 현성하고 있는 본원에서 사실을 말하고자 하면, 말은 언제나 시가 되어, 「문」의 맥락으로서의 로고스(이법)를 나타낸다고 하는 의미로, 시작과 는, 그러한 원본적인 사실을 가능한 한 이사 무리적으로 몰아넣어 표현에 가져오는 영업 만남을 확인한 데다, 니시타니는, 다음으로 화엄 불교의 4번째의 법계 연기인 「사들 무리」 의 고찰로 옮긴다.

이사 무리의 입장은 예술이나 철학에 의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을 획기하지만, 그 입장이 가능성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 한계의 한가운데에 열리는 것이, 「사들 무리」 그런 것, 그리고, 「종교라고 하는 것의 근저에는 사물 무리적인 입장이 포함된다」라고 니시타니가 말하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다.

야기 세이이치 「프런트 구조의 철학」의 시작 부분에서 인용되고 있는 「방을 나누는 벽」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니시타니가 이 일들 무리의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니시타니의 설명 요약

두 영역(A, B)을 구분하는 한계선은 명확한 절단선에 의해 각기 상호 투사를 가능하게 한다. 한계선은 두 방을 나누는 한 장의 판과 비슷하다. 판이 A면을 향하고 있는면 x는 A실의 한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B실을 대표한다. x면은 그 「본질」에 있어서 「A에 나타난 B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B의 표현인 x면은 A실의 일부로서 A실에 소속된다. A에 나타난 한, 「현상」으로서는 A의 것이며, A의 구조 계기이다. 마찬가지의 것은, 그 판이 B실을 향하고 있는 면 y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재단이 접합이기도 한 것

일반적으로 한계라는 것은 재단이 접합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접합은 차별되었지만 상호 투사라든가 상호 침투와 자꾸 부른 것 같은 연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회호성이라는 것

위와 같은 관계의 구조를 니시타니는 '회각적'이라고 부른다. 번갈아 가는 상호 연관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하나는 본질적으로 A에 속하는 것이 B중에 스스로를 우울하다(비추는, 옮긴다)라든지 투사한다든가 하여 현상할 때, 그것이 B 중 A와

, ,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B의 일부로서 현상한다는 것이다.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A 「몸」이 A 「몸」에 스스로를 전달할 때, 그것은 A 「상」이 아니라 B ​​「상」으로 전달된다. 니시타니의 '회호성'이 가지는 분여와 분유의 구조

니시타니의 논의를 검토하기 위해서, 회호성의 설명에 나오는 동사적 표현(분여와 분유)에 주목해, 이 논의를 이하의 4점에 정리한다. (1) A는 스스로를 B에 B상으로 분여(mitteilen)하고, (2) B도 A로부터 그것을 B상으로 분유(teilhaben)한다. (3) 이것이 B로의 자기 전달이라는 A의 「용」이다.

(4) B의 측으로부터 A로의 전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시타니에 의한 상기 도해의 문제점

방의 구획, 또는 벽의 대담에 의한 회호성의 설명에서는, 역동적인 관계(mitteilen/teilhaben이라고 하는 동사가 의미하는 것이라)를 성립시키는 시간성이 버려지고 있는 곳에 문제가 남는다.

이 설명에서는, 2개의 방의 분할이라고 하는 정적인 공간적 이미지에 의거했기 때문에, A의 측의 벽면이, A의 일부로서 별실의 B를 표현한다고 하는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 A의 내부에있는 것은 벽면의 반대편에있는 방 B가 어떤 것인지를 "벽"을 매개로 인식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방 B가 있음을 인식 할 수 없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방 A도 방 B도 "벽에 닫힌 창없는 모나드"가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도입해야 할 일

공간적 이미지에만 의존하는 설명의 문제점은, 분여와 분유를 교대로 행하는 방 A와 방 B를 2개의 주어적 기체로서 말하기 위해, A, B 모두 동사적인 관계성이 성립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어적 실체로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적 설명을 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하늘과 즉"로고스에 도입해야 한다.

둘째, 전면 구조의 역동성

실재성(reality)과 현실태/활동태(actuality)의 구별과 관계

화이트 헤드의 "프로세스와 실제"에서 "프로세스

스는 그 자체가 현실태/활동태이다(the process

is itself the actuality). 여기서 말하는 프로세스는 운동변화(키네시스)와 현실태/활동태를 명확하게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θ권의 논의를 근거로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들어 '보는'이라는 일을 분석하고, '보는' 일이 바로 '보고 있는' 일과 일치하는 것, 완료태가 동시에 활동태인 것 같은 '일자'를 에너게이어라고 불렀다. . 키네시스(운동적화)는 이와는 달리, 과정의 어느 곳을 매우 완료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운동의 종점 내지 목적점(테러스)에 도달했을 때에만 그 운동이 완료된다. 그런데,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프로세스란, 그렇게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

, , , , , , , , , , , , , , ,

, , 이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에너지 게이어론은 '완전성'이라는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된 개념의 의미를 쇄신하는 것이다.

프로세스 신학과 동방 기독교 신학의 통합

찰스 하츠혼을 비롯한 미국의 프로세스 신학자는 안셀무스의 본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으로 친숙한 '완결성의 논리'를 동적으로 쇄신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보다 더 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완전성의 정의를 변경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능가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능가됩니다. 일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 즉 시간적 세계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자신도 거짓말의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더욱 큰 것이 된다는 훌륭한 사고방식을 세웠다(3). 서방교회의 신학적 전통에서는 완전성이 정적으로 파악되므로 이를 '완성된 완전성(perfected perfection)'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적 과정을 중시하는 동방교회의 영성의 전통에서는 '완성되고 있는 완전성(perfecting perfection)'이 강조된다(4).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곳에서는

(1) 화이트헤드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가치 있는 기물로 보려고 해도, 일절의 유한한 「활동적 존재(actual entity)」의 생성의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에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 그리고, (2) 「프로세스가 그대로 에너지 게이어이다」라고 하는 사상의 가장 래디컬한 점은, 「완성된 완전성」이 즉 「완성되고 있는 완전성이다」라고 하는 곳에 요구한다

, 해야 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의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은 그대로 "이미 실현 된 완전한, ,,,,,,,,,,,,,,,,,,,,,,,,, 성" 되는 무결성(자기 초월적인 무결성(,,,,,,,) self-surpassing perfection)을 목표로 하는 다이나미(,,,,,,,,,,),,,,,,,,,,, , , , , , , , , , , 줌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화이트 헤드 "통합체의 철학"에서 프로세스 개념의 근본적인 생각

,,,, 5 상이다.

셋째,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의 장소적 논리

장소론적 사유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에너지 게이어로서의 프로세스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유"의 본성은 그것이 일체의 "생성"을 위한 잠재적인 힘인 것이 속한다. (It belongs to the nature of a “being” that it is a potential for every “becom-

ing')('과정과 실재' 원저, 22페이지)

, , , , , , , , , , , , , , , , , , , , , 통합체의 철학의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이 원리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 과정이 우주의 존재와 모든 "유"를 내재시켜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라는 말은, 대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유(広義の物)를 말하고 있다. 그렇듯이 모든 "유"를 내재시킴으로써 하나의 활동적 존재(actual entity)가 생성된다는 의미를 화이트헤드는 "...에 있어서 현재한다(being present in)" 라는 장소론적인 말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무시할 수 있는 관계를 견인한다면, 모든 활동적 존재는 모든 다른 활동적 존재 내에서 현재한다(every actual entity is present in every other actual entity) 해야 한다. 통합체의 철학(the philosophy of organism)은 이 "다른 존재 안에 현재 한다"는 의미를 해명하는 과제에 종사하는 것이다. (『과정과 실재』 원저, 50페이지)

「상의성의 원리」는, 니시타니 케이지의 「회호성」에 근거하는 법계 인기의 설명, 및 야기 세이이치의 「프론트 구조의 철학」이나 「장소론으로서의 종교 철학」으로 말하는 장소의 논리를, 프로세스 을 그 자체로 에너지 게이어로 간주하는 생성론에 의해, 다이나믹하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성의 과정에서 다른 일체의 유를 내재시키는 "활동적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하는 의미에서의 제일 실체가 아니다. 첫 번째 엔티티는 "다른 어떤 주체 subject 안에 없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안에 현재 한다(be present in)" 대신에 "객체화(objectification)"라는 표현을 선택하게 된다. 즉, "활동적 존재 A가 다른 활동적 존재 B 중에서 현재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활동적 존재 A가 다른 활동적 존재 B 중에서 개체화된다"는 것이다.

그 경우, B의 내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에 다르지 않은 A의 개체적 존재가, 「프론트 구조의 철학」으로 말하는, 「B의 내인 A의 프론트」이며, 「하늘과 즉」 의 회호성의 로고스로 말한다면, 「B상으로 전달된 A의 몸」이며, 그 자기 전달의 작용(분여/분유)이, 화이트 헤드의 말하는 objectification에 해당한다 그럴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전달 내지 자기양여의 작용은 어떤 종류의 관계인가. 「생성의 프로세스」가 「다른 일체의 유를 안에 포함시켜 성립한다」라고 하는 경우, 거기서 말해지는 관계는 어떠한 종류의 관계인가.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미국의 프로세스 신학자에 의해 "프로세스와 관계성의 철학(process-relational philosophy)"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관계와는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해명하지 않으면 미안해.

외부적으로 내부적이고 내부적으로 외부적인 관계의 논리

(the logic of relatedness)

외적 관계설과 내적 관계설의 두 가지 입장을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여기서의 요점은 관계의 본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 실재론과 관념론이라는 인식론에 있어서 두 개의 대립하는 입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관계에 앞선다는 사고방식, 즉 일체의 관계 빼고 본질적인 속성에 의해 실체가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관계라는 것을 실체에 있어서 외적이라고 생각하는 실재론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나무를 우리가 보는 경우, 그 나무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외부 관계를 전제한다. 상식은 소박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물리학의 관찰 가능량(observable)-위치·운동량 등이 관찰자(observer) 없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실재론도 또한 관찰 대상과 의 관계를 외부적인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와 관련하여 관계항은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실재성이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내적 관계설이다. 내적 관계설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고, 어떤 논리학에 의해서 그것을 표현하는지에 차이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의를 간략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지각되고 있는 것이다 esse est percipi = to be is to be perceived '라는 버클리 흐름의 관념론의 정식을 취한다면, 그 입장은 지각을 내적 관계로 포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버클리는 외적 세계에 있는 물질적 실체를 부정했지만, 그 논리는 지각이라는 관계를 정신에 있어서의 내적인 관계로서 파악한 것에 요구된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하나의 주어에 하나의 술어를 귀속시키는 명제를 특권시한 것을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실체와 속성을 제일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관계를 부대성으로 삼는 존재론에 대한 길을 열었기 때문에 다항관계와 다중량화의 논리를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셀과 화이트 헤드에 공통적 인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의 포인트입니다.

러셀은 인식론에 있어서는 내적 관계설에 입각하는 브래들리의 절대적 관념론과는 정반대의 입장, 즉 전면적인 외적 관계설의 입장을 채용하여 관념론을 논박하려고 했다.

러셀의 신실재론은 소박실재론도 아니고, 소입자를 궁극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과학적인 실재론도 아니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명제의 주어를 실체화하는 '물건의 아토미즘'이 아니라 개개의 요소 명제에 의해 기술되는 개개의 사실 그 자체를 아톰으로 하는 '사물의 아토미즘'으로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으로 정식화된 '사물의 아토미즘'은 '부정적 사실(negative fact)'을 사실로 보는 점에서 실증주의자가 의거하는 긍정적인 사실 와는 일선을 그렸지만, 「사」의 여러가지 아톰 상호의 내적인 관계성은 완전히 버려진 것이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라이프니츠적인 형용을 한다면 '창문이 없는 원자적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개별의 「사」가 어떻게 하여 생성하는가 하는 역동적 고찰도, 또 그 생성에 있어서 다른 「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는 활기찬 관계성의 사실에 관한 고찰도 버려지고 있다 (6).

그렇다면 "프로세스와 관계의 철학(process-relational philosophy)"이라고도 특징지어지는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관계에 대해 내적 관계설, 외적 관계설의 어느 견지를 취하고 있었을까.

화이트헤드의 '프로세스 철학'의 관계설의 한 특징은 동일한 관계가 관계항 중 하나에 대해서는 외부적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이라는 생각을 채용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이 독특한 관계설로부터, 예를 들어 버클리류의 「존재한다고는 지각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관념론의 도그마로 전제가 되고 있는 지각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자. 나 앞에 하나의 나무가 보인다. 있을 때, 존재하는 곳에서 그 나무를 보는 나에게, 객체(object)로서의 그 나무의 존재는 주체(subject)로서의 나에게 내적이며, 나의 세계(그 때, “세계는 나의 세계 이다”)에 사는 것이고, 그 나무를 떠난 나의 세계도, 나 자신도 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므로, 나에게 보여지는 관계는 그 주체에 있어서는 외적(external)이고 우유적(accidental)이다. 인식론에 있어서의 실재론과 관념론과의 「대립의 일치」를 표현하는 하나의 길이, 이와 같이 동일한 관계를, 외적으로 해 내적, 내적으로 해 외적이라고 보는 관계설에 의해 열린다 되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외적/내적이라는 이중성을 가지는 관계설을 「기상」의 경험에 적용해 보자. 만약 내적 관계설을 철저히 하면 과거와는 상상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자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고, 이른바 과거와는 「과거의 현재」, 즉 생각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통합체의 철학」에 있어서의 장소적 논리에서는, 과거는 완결된 실재성을 가지지만 따라서 현재 내적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양해는 일상생활의 전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작위로 바꿀 수 없는 것이 거기에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우리의 작위를 넘은 과거의 실재성에 의해 우리의 현재의 행위와 제작이 뒷받침되고 그 의미로 완결된 과거가 우리의 현재의 활동 속에 내재하고 살아 과거로 일한다는 것이 우리의 과거의 이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 신약성경의 장소론적 신학에 대한 성찰

야기 세이이치 씨는, 「신약 성경에 있어서의 장소론」(동서 종교 연구 제5호 2006년)에서, 신약 성서에 있어서의 장소론적 신학을 내포하는 개소로서, 전부 21의 대표적인 텍스트군 를 들고 있다. 그 중 주요한 것에, 나의 입장(7)으로부터 코멘트를 더하고 싶다.

따로 물보다 오르는 겨자도, 天さけゆき, 鴿(하토)처럼 자신에게 내리는 것을 간과. 가다가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다 『뭐 아는 내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 나나를 기뻐한다』(마가 1장 10~11절(8))

(댓글) 예수님의 세탁 장면. 일본어 번역에서는 장소론적 함의는 명확하지 않지만,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의 ἐν σοὶ에 장소론적 함의가 있어, 「무슨 안에서 我悦る(in you I was well pleased)」가 직역. 성령을 받은 예수의 공생의 시작을 나타내는 수세의 그림은 태서의 종교화의 주제로서 반복적으로 그려졌지만, 장소론적 해석에서는 예수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각' (객관화된) 표현이며, 부자의 상호 내재/감응이라는 직접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어 원문의 시제는 아오리스트였고, 일회한 시간과 곳에 생기게 되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원 사실이나 원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먹이면,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또 그들을 우리 손보다 빼앗는 사람 아라지. 그들을 내게로 급히고 우리 아버지는 일체의 것보다 크면 누구에게도 아버지의 손보다는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어』(요한 10장 28~30절(9))

(코멘트) 「우리와 아버지는 하나가 된다」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란, 장소론적인 석의에서는, 「예수와 아버지가 역사에 있어서 하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하나'를 '실체적인 하나'라고 유대인들은 풀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삼는' 모욕 때문에 예수를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시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는 <신들>이라고 불렸다”이기 때문에, 하물며 “하나님에 의해 성별된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불편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한다.

이 인용은 사람이 사는 「창조적 하늘」의 「장」으로서의 「아버지」, 그 「장소」(개별의 1회 한정의 「때」와 「곳」)에 있어서, 그 사람이 「텐부 과의 작용적 일을 살아, 「아버지」도 또 그 사람에 있어서 「천의」의 실현을 기뻐한다(εὐδόκησα)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장」 「장소」 「작용적 일」 「 상호내재/감응이라는 성경의 장소론적 해석이 적용되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나의 아버지에 있고 아버지의 나에게 거주하는 것을 믿지 않는가? 우리 여의 등에 있어 불언은, 자신에 의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우리에게 있어 어업을 행하여 급급해. (요한 14장 10절(0))

(코멘트) 히브리어로는, 「신」을 나타내는 말에, (1) 안심·신뢰를 연상시키는 바타하(bāṭaḥ)와 (2) 견고·확실을 암시하는 아만(āman)의 2어가 자주 사용된다 . (1)은 70인역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희망"을 나타내는 "엘피스", 신뢰를 나타내는 "페포이테시스"가 주어지고, (2)는 "신앙"을 나타내는 "피스티스", "진리"를 나타내는 「아레테이아」가 꼽힌다.

신약성경에서는 (2)의 인식에 관계가 있는 ‘신앙’이라는 말이 주도적인 위치를 갖게 되지만, ‘신’이 가진 위의 두 가지 측면은 이어지고 있다. 즉, (1) 지성스러운 신에게 전 인격을 던져 귀의하는 신뢰와 (2) 말이나 징을 단서로 하여 불가시의 현실에 다가가는 이성의 행보이다.

히브리인에 대한 서신(11장 1~2절)의 “신앙은 원하는 곳을 확신하고, 보지 않는 것을 진실로 하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세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지고, 보이는 것의 현(明るく)의 것보다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피스티스)'이 '신'이 가진 두 측면을 통합하고 '證(あかし)'과 '悟(사토)'를 초래하는 자임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신앙'이 '보이는 세계' 속의 '겁쟁이'에 불과하며 '마치(에피스테이메)'에 이르기 위한 학문의 길 준비단계라고 하는 플라토니즘과는 다른 믿음 이해이다. 또, 플라토니즘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상」이지만, 성경의 장소적 신학에서는, 「보이는 것의 현(다시) 루루물보다 성립되지 않는 것」, 즉 「현 전하는 아이디어(불가시의 실물)」도 포함하여 「루루물 φαινομένων」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 것이 신앙에 의해 깨달을 것이다. 단순히 '사상한다'가 아니라 '창조한다'는 것이 플라톤주의와 성서신학을 분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디, 우리 여덟들을 사랑하게 하자 서로 사랑하라. 사람 그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之보다 큰 사랑은 없다. 여의등 만약 내가 목숨을 걸면, 우리친구. 지금부터 나아라 등을 종 나라고 하지 않고, 나는 주인이 이루는 일을 모른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 아버지에게 부끄러워하고 범한 것을 너희에게 알려야 한다(요한 15장 12~15절(b))

(코멘트) 예수님의 이시메 서명(ἐντολὴ)이란 여기서는 "우리를 사랑하자 서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그 "사랑(ἀγάπη)"은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강조하는 가장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공허'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일(self-emptying)'에 의한 '사랑의 충만'으로 포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 됨으로써, 지상의 군주의 노예의 가시에서 자유로워진 신도들이 더욱 진행되어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의 역사”에 살려 하고 있는 것을 자각했을 때에, 더 이상 「나( 종)」로서 뿐만이 아니라 「친구」라고도 불리고 있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5.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신의 편재성'과 '작용적 1'에 관한 장소론적 성찰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일부 제8문제 제1항의 이론 박론(sed contra)으로,

물건의 일, 거기에 반드시 그 자체가 있다 (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그러므로 이사야서 26장 12절 “주여, 우리의 행위는 모두 우리에게 있어서 여의가 된 낫다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c)e)”를 인용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물에 존재한다 (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물이 존재하는 한을 통해 하나님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각 방법에 따라 그 사물에 현재 하고 있어야 한다(quandiu igitur res habet esse, tandiu oportet quod Deus adsit ei , secundum modum quo esse habet)”, 그리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있어도 그 가장 안속한 것, 무엇보다 더 깊게 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Esse autem est illud quod est magis intimum cuilibet, et quod profundius omnibus inest)

부터,

, , , , , , , , , , , , , , 하나님은 모든 사물에 속하며 깊게 그 안 안에 있다 (,,,,,)이어야 한다 (Unde oportet quod Deus sit in omnibus rebus, et intime)

라고 결론한다.

또한 제8문제 제2항에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열거한 후 예레미야서 23장 24절의 “나는 천지를 채우는(caelum et terram ego impleo)”를 인용한 후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있다”고 결론한다. 다만, 하나님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해도 그 장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공간적인 장소를 점유하면 반드시 다른 사물을 배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모든 장소에 있거나 모든 장소를 채운다고 하는 경우, 그러한 방식으로 편재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어떤 장소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힘」, 즉 「사물의 공간적 위치를 규정하는 힘」을 주는 것이 신이라는 의미에서 그 장소에 내재하는 것이다 . 게다가 「장소에 놓여 있는 사물(locata)」도 「어떤 사물」인 한, 그 「존재」를 주고 있는 것도 신이기 때문에, 「공간적 장소」와 「공간에 있는 사물」 양쪽 모두 그 존재와 힘을 부여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떠한 장소에도 어떠한 사물에도 편재한다"는 취지의 논의를 토마스는 수행하고 있다. 6, '작용적 1'의 장소 론적 철저 - 신과 인간의

주체적인 「능작의 동일성」

니시타니 케이지는 엑하르트의 본래의 입장을 범신론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만한 해석을 감행하고 있다.

엑하르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합일의 입장

,,,,,,,,,,,,,,,,,,,,. 절대적으로 두 가지가 주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 , , , , , , , ,, 범신론에는 걸리는 절대의 둘도 없고, 절대의 일도 있을 수 없다...순한 일은, 그것을 볼 수 없다. 단지 주체적인 '생'이라든지 '작용'이라든지의 하나로서만 살아 있고 능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능작적인 합일에 있어서, 자유가 어떠한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깊게 포착되고, 또한 가장 깊고 가장 눈부신 자유, 무저한 자유로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가장 자유로운 자유는 가장 필연적인 필연과 함께 파악된다. 왜냐하면 만유의 창조와 생성은 하나님의 자의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고차의 필연성을 포함한 신적 생명의 발동 때문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만물의 차별을 없애는 것으로, 만유를 지배하는 필연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에서는 자유도 생각할 수 없다(d).

니시타니의 '능작적 합일'은 '주객 합일'이 아니라 '주주 합일' 즉 '노에시스적 합일'이다. 이 의미에서의 「주체적 합일」을 범신론으로부터 판별하는 니시타니의 논의는, 「무의 자각적 한정」의 기독교론 이후의 니시다 기타로의 종교 철학, 즉 「절대의 하나」와 「개별적 다 의 모순적 자기 동일, 역대응, 장소적 논리에 의한 「인격」과 「역사적 신체」의 위치설정 등의 과제를 앞둔 니시다의 사색과 함께 참조되어야 할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장소론적 사색의 잘 나타나고 있는 텍스트로서, 「몸 속에 있는 사람을 아레레미타마에」(Populoeius qui in te est, miserereberis)라는 호세아서 144 「자(아하레미) 슬픔 기도의 인용으로 시작되는 독일어 설교를 고찰하자(f). 가장 뛰어난 학자들에 의하면, 지성은 (모든 것을) 벗겨내고, 신을 덮기 위해서, 신 자체인 순수한 본질 존재로서. 지성인식은 진리와 선성을 돌파(durchbrechen), 순수한 본질 존재로 돌진하며, 이름도 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신을 포착한다고 한다. 지성인식도 사랑도 연결하지는 않는다고. 사랑은 하나님이 선한 것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받지만, 만약 하나님이 선성이라는 이름을 잃으면 사랑은 결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사랑은 모피, 즉 의상을 입은 신을 포착한다. 이런 것은 지성은 하지 않는다. 지성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알려진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닥 없이 바다 속에 포착하는 것은 결코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두 가지, 지성인식과 사랑보다 자비(아하레미) 쪽이 위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곳에서 자비를 행하신다(g).

에크하르트가 '이탈'과 '돌파'에 의해 신성의 근저까지 극복하려고 하는 지성인식을 '사랑'을 이기는 것으로서 설명해 온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뛰어난 지성에 의한 인식에도 이기는 ‘일’로 ‘자비(Barmherzicheit)’를 꼽고 있는 것에 주의하고 싶다. 이탈로 인한 지성인식의 철저함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성도문의 극한 때인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지성인식을 넘은 하나님의 역사로서 '자비(아하레미)'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아마 전례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주여, 아하레미타마에」란, 최초로 노래되는 성가[키리에]이다. '말의 전례'에서 읽히는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의 비원, '자비의 복음'이라고도 불려온 루카의 '평화 가운데(vade in pace)'라는 파견의 말 ,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사랑에 있는 자는 하느님께 계시고 하나님도 그에게 거주하”라는 요한 제1서 4~16절을 인용한 후, “영혼은 그 근저에 그런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혜택에 의하여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비(아하레미)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설교를 맺고 있다.

그런데 자연 본성적인 사랑과 미사 전례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자비(아하레미)'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서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니글렌이 비판한 토마스의 '신학대전'의 사랑에 관한 논의를 가이드로 고찰하고 싶다. 토마스에 있어서는 자연 본성적인 사랑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다. 즉,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사랑이 근본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부자연스럽다고 하는 관점이 남아 있다는 것이 비판 의 포인트였다.

실제로 『신학대전』 제2부 26문 제3항에서 토마스는 「사랑의 순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사랑하는 근거의 전체는 하나님이 인간의 선의 전체라는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사랑하는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순서에 대해 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 다음에 가장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니글렌은 토마스 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애론에 의해 기독교적인 이웃 사랑을 기초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가페'에 기초를 두는 기독교적인 이웃 사랑에 '엘로스 모티프'가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미즘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니글렌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쿠와하라 나오토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의 '사랑'과 '정의(h)''로 토마스의 입장에 비해 인간론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토마스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애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밟아 성경과 성전에 입각하는 독자적인 '우애론'을 세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없는 성경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제일의로 세운 다음,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선의 전체를 분별하는 이웃사랑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다음 에 「자기 사랑」을 긍정적으로 파악해, 그것을 범형으로서 이웃을 「자기와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가 「사랑」의 순서 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은총(초자연)은 자연을 파기하지 않고 완성시킨다」라고 하는 것이 토마스 자신의 기본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자연 본성적인 자기 사랑도, 결코 파기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신 사랑에서 긍정된다는 것이 토미스트 측에서 니글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미니코회의 토미스트의 전통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계승한 에크하르트의 경우는 어떨까. 앞서 인용한 '자비(아하레미)를 지성과 사랑에 맞는 일로 하는 설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이웃사랑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애에 의해 기초로 한다고 말하는 논의를 복음서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전거로 논쟁을 비판하고 있다. Eckhart는 이웃을 "자

, , , , ,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한다 "

,,,,,,,,,

자신과 같고, 또 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

, , , , , , , 이웃사랑과 자기애의 동등성 혹은 오히려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i). 이처럼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것이 차별을 넘은 하나의 능작의 주체가 되는 곳에, 에크하르트의 장소론적인 「일」에 철저한 실천적 사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이웃사랑에 있어서의 「능작의 동일성」은 자기의 선을 제일로 생각하는 「사랑」보다 높고, 「이탈」과 「돌파」에 의해 신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지성인식조차 무한히 미치지 않는 「무저의 바다의 깊이」를 가진다는 것이 이 설교의 취지일 것이다.

일곱, 성체 친교의 천영에 관한 성찰

일본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미사의 성체배령의 천영으로

사제 :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교제 가운데 전능하신 아버지인 당신에게

회중: 모든 존경과 영광은 세상에 이르기까지.

를 갖고 있다. 라틴어 전례에서는 일본어 전례에서 세 번 반복되는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ipse( self = 자기 자신)인 것, 또 '성령의 교제'란 in unidad Spiritus Sancti(성령의 일치에서)로 있다는 것을주의하고 싶습니다.

라틴어 전례: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Est tibi Deo Patri omnipotenti, in unidad Spiritus Sancti

Omnis honor et gloria per omnia sæcula sæculorum

일본어 전례에서는, 영어 전례와 같이 Through him, and with him, and in him 과 ipse 를 평판인 3인칭 단수의 대명사로서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지만, 그 근저 소성 의 파기」와 상대성 이론과의 관계가 제 2 논문의 주제로

Ipse를 단순히 「그」라고 번역하고, 「그에 의해, 그와 함께, 그 안에」라고 번역해 버리면, 「그리스도에 의한」구제 행위도, 동반자 혹은 친구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도, 「 내면 그리스도'도 자기 자신과는 무연한 '타인사'에 울린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하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를 '에 의해' '함께' '안에'의 3어로 표현함으로써 감사의 제례의 성체배령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심 적인 위치가 명료하다. 또한 "성령의 교제(communio)"는에 있는 것은 "성령의 일성" 즉 "사랑의 일의 일성"이다(j).



1 강연자:니시타니 케이지, 응답자:다마기 야스시로, 오노데라 공, 사회자:야기 세이이치의 이 제4회 동서 종교 교류 학회(1985년)의 강연과 질의는, 다음해의 「대승선」 잡지에 게재되었지만, 그 전자판이 남산 대학 종교 문화 연구소의 웹 사이트 http://nirc.

nanzan-.ac.jp/en/publications/jjsbcs/에서 열람 가능

2 내가 『과학기초론연구』에 발표한 최초의 논문은 「아인슈타인 포들스키 로젠의 논의와 벨의 정리─양자론에서의 분리 불가능성」(Vol.19 No.3), 두 번째 논문 는 "아인슈타인 포들스키 로젠의 상관관계와 상대성 이론"(vol. 19, No. 4)이었다. 이는 당시 화제가 되었던 벨의 부등식의 반증이라는 실험적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둘러싼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점에 결착을 붙인 것이 아니라 “국소적 실재 의 분리 불가능성"이라는 것이 나의 제1 논문의 주제, 그리고 "국이 있었다. 둘 다 불확정성 원리의 실재론적 해석과 양자역학적 원거리 상관-비인과적 상관의 해석 을 주제로 하고 있다.

3 Charles Hartshone, The Logic of Perfecti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62.

4 시미즈 미츠오, 「웨슬리의 구제론」, 교문관, 2002년, 삼삼 페이지 참조. 화이트헤드의 '통합체의 철학'이 존 새끼로 대표되는 감리교 신학자에게 수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쪽도 동방 기독교의 영성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이펙터시스(자기초월적인 사랑)나 '만들지 못하는 에너지게이어'라는 동방신학의 에너지게이어론과의 깊이관계를 지적한 저서로는 George A. Maloney, SJ, A theology of Uncreated

Energies,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78 참조

5 니시타니 케이지의 「하늘과 즉」에는 「현성한다」라고 하는 표현이 다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성'을 동사화하여 사용하는 용법은 길가의 '정법안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정법 안장」의 요인 색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도모토에서는 「무」나 「하늘」과 같은 부정적 언론보다 「현성한다」라고 하는 긍정적인 동사 표현이 압도적으로 중요 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성'이란 현대 중국어에서도 그렇지만 '기성'과 같은 의미이며, 그 동사 표현에의 전용은 길에 고유한 것이다. 즉, 「현성」을 「현성한다」라는 동사 표현과 하나로 함으로써, 수행을 깨달음(증)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증상의 수」를 함의하는 「수증 일등」의 수도론 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6 이 외적 관계설은 러셀의 제자였던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논리 철학 논고에 따르면, 개별 요소 명제로 기술 된 사태는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요소 명제의 진리값의 함수로서 표현되는 복합 명제는, 토토로지와 모순을 들여다보고, 모두는 우연성의 지배하는 일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요소 명제의 구체적 사례를 비트겐슈타인은 하나로 들 수 없었다. 그것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아톰이 다른 아톰과 어떠한 내적 관계를 갖지 않는 이상, 각 아톰의 상호 교류 또는 상호 침투라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개의 아톰이 어떠한 것인지, 그 아톰의 성립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논리철학 논고'가 반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도그마에 아직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엄청 지적되어 왔지만, '일의 아토미즘'이라는 도그마도 아톰 상호의 인과적 독립성을 독단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점에서, 악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빠져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7 나는 '보편의 교회'에 보존된 '문자화 이전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 입장에서는 '전통'에서 분리하여 '성경'을 단순한 책으로 '읽는다'가 아니라 교회의 '전례' 속에서 '말씀을 듣고' 교대로 '말씀', '신앙선언'하는 것 , 「성체를 배령」하고 「천영한다」라고 하는 언어 행위의 「일의 장소」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장소론적 석의」를 시도하고 싶다. 「말의 전례」에 참가하는 그리스도자가 직접 경험하는 「말씀」이 가지는 시간적인 원실성(원역사성)을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

8 Mark.1:10–11, καὶ εὐθὺς ἀναβαίνων ἐκ τοῦ ὕδατος εἶδεν σχιζομένους τοὺς οὐραν αὡς περιστερὰν καταβαῖνον εἰς αὐτόν. καὶ φωνὴ (ἐγένετο) ἐκ τῶν οὐραν῱ ὁ ἀγαπητός,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

9 John 1:28–30, κἀγὼ δίδωμι αὐτοῖ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χειρός μου. ὁ πατήρ μου ὃ δέδωκέν μοι πάντων μεῖζο δύναται ἁρπάζειν ἐκ τῆς χειρὸς τοῦ πατρός.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0 John 14:10 οὐ πιστεύεις ὅτι ἐ감마 λέγω ὑμῖν ἀπ' ἐμαυτοῦ οὐ λαλῶ: ὁ δὲ πατὴρ ἐν ἐμοὶ μένων ποιεῖ τὰ

a Heb 11:1–4, Ἔστιν δὲ πίστις ἐλπιζομένων ὑπόστασις, 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 οὐ βλεπομένν ἐμαρτυρήθησαν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Πίστει νοοῦμεν κατηρτίσθαι τοὺς αἰῶ νας ομένων τὸ βλεπόμενον γεγονέναι.

b John15:12-15: 12αὕτη ἐστὶν ἡ ἐντολὴ ἡ ἐμή, ἵνα ἀγαπᾶτε ἀλλήλους καθὼς ἠς ονα ταύτης ἀγάπην οὐδεὶς ἔχει ἵνα τις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θῇ ὑπὲρ τῶο φ ῖς φίλοι μού ἐστε, ἐὰν ποιῆτε ἃ ἐγὼ ἐντέλλομαι ὑμῖν 15 οὐκέτι λέγω ὑμᾶς δούλους, ὅτι ὁ δοῦλος οὐκ οἶδεν τί ποιεῖ αὐτοῦ ὁ εἴρηκα φίλους, ὅτι πάντα ἃ ἤκουσα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ἐγνώρισα ὑμῖν.

c ubicumque operatur aliquid, ibi est. Sed Deus operatur in omnibus, secundum illud Isaiae XXVI, omnia opera nostra operatus es in nobis, domine. Ergo Deus est in omnibus rebus. d 니시타니 계지 34페이지

e 나 자신은 「합일」이라는 용어보다 「능작의 동일」이라고 하는 말 쪽이 일에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합일」이란, 2개로 나뉘어진 자가 하나에 합한다는 의미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f Meister Eckhart, Deutsche Werke, Bd. 1, Predigt 7.

g Ich spriche: über disiu beidiu, bekantnisse und minne, ist barmherzicheit; dâ würket got barmherzicheit in dem hœhsten und in dem lûtersten, daz got gewürken mac.

h 쿠와하라 나오토미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의 『사랑』과 『정의』』(2005 지천서원) 종장 433쪽 참조.

i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의 동등성 혹은 오히려 동일성(plena aequalitas sive parilitas aut potius identitas dilectionis sui et proximi)”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텍스트의 상세한 분석이 마츠다 미카 “에크하르트의 이웃사랑 논」(중세 사상 연구 xlvii, 2005)에 있다.

j 타키자와 카츠미는 칼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을 안내하고, 신인의 제일의 접촉과 제2의 접촉을 구별하여 「불가분・불가동・불가역」의 신인 관계를 기초로 한다 '신인학'을 구상했다. 야기 세이이치씨의 장소론적 신학에서는, 「가미와 함께 있습니다」의 「와 함께」보다, 신인의 상호 내재를 설득하는 「가운데」가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례의 말은 '함께'(공동체성), '가운데'(내면성 내지 개인성) 및 '에 의해'(비가역성)을 분리하지 않고 한숨에 말하며, '성령의 일성 속 그러므로, 즉 사랑의 하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자의 공동체의 형성으로 향하고 '여호'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세상에 이르기까지' 천영하는 역동적인 신인관계를 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타나카 · 유타카

토의Ⅳ

응답자·사회 금 승철

가미치 대학 명예 교수

다나카 프론트 구조라는 개념에 저는 매우 끌렸습니다. 야기 선생님의 기호 표현에 관해서는, 먼저

2002년의 동서종교 교류학회에서 이야기가 되었을 때는, 나 자신이 수학을 거짓말하고 전공하고 있었으므로, 조금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야기 선생님은 신약 성경의 시대에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코이네 그리스어의 텍스트의 해석과 연결해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야기 선생님의 기호 표현은 기호 논리학과 비슷하지만, 일종의 상징 형식 - 심볼릭 양식 -으로 말한 것이며, 하나 하나의 진술문에 0 하나의 진리값을 맞추는 명제 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야기 선생님의 장소론의 상징화는 표현언어의 상징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의의가 인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기호화해 버리면, 무언가 그것으로 대언하거나 옮겨놓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되어 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듣는 사람에게 주어 버리는 위험성 입니다. 요컨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기호를 사용하는 것에 의해 가려지기 때문에, 기호를 사용하면, 그 기호에 대해서 한층 더 설명을 하는 불필요한 사태가 생기기 위해, 한없이 기호가 상징하고 있다 사물 자체로부터 우리의 관심이 어긋나 버릴 것입니다. 역시 도식적 기호보다 살아있는 말이 일하고 있는 현장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은 야기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말했는데, 프론트라는 말을 말할 때, 나는 「전위」라든가 「주변」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프론트에 가서 경계를 향하는 구조가 기독교적인 진리의 실천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불교의 말을 항상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임제록 안에, 혼자 있는 劫를 논하고, 도중에 있어 집을 떠나지 않고. 그리고, 집을 떠나 도중에 존재하지 않고. 나는 그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만, 요컨대, 내면의 자기의 세계에 닫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질적인 타인의 프런트에 나간다고 하는 「행인의 정신」이야말로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중요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야기 선생님의 프런트 구조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굳이입니다. 이웃이란 누구를 특히 이 굳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이굴에 호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직접 호소하는 예수의 말씀의 하나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교의 정통파인 '우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종파의 벽을 넘어 프런트에 간다는 곳을 야기 선생님의 프런트 구조라는 개념에 또 하나 내가 덧붙이고 싶은 곳입니다.

즉, 프런트에는 「주변」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경계가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는 독특한 그리스어입니다. 플라톤이나 그리스 비극의 그리스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네요. 그러면 히브리어법이 매우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적인 히브리어도 아니고, 그리스어도 아니고, 성경 독자적인 그리스어입니다만. 그러나 근대 루터 번역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라든지 영어의 귀정 번역은 거의 그 직역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근대 성경에 영향을 받은 국민문화라는 것을 낳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문어역 성경의 번역자는 일본의 고전에 잘 통하고 있어, 영령의 역사라는 것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 번역은 살아있는 영이 가득한 말이지요. 현대의 산문어역은 알기 쉬움을 주체로 해 버렸기 때문에, 근대인의 해석이 들어 버린다. 안도 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문서의 당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말령의 역사를 느낍니다. 전후의 교육을 받은 현대의 일본인에게는 상식이며, 통념인 것이, 3백년 전, 400년 전의 일본인에게는 결코 통념이 아니었다. 즉, 통념은 그러한 때와 장소라는 것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념을 통해 뭔가 거기에 보편적인 것이 항상 표현된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저는 기독교 신화나 이야기라는 것을 사실이 아닌 단순한 방편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 방편에 의해 현대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이 반대로 비추어져 비평되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서 처음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직접적인 것, 살아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미래에 가려면 저는 퇴보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퇴보와 진보라는 것이 하나이다. 그 하나인 곳을 나는 길을 따라 운보라고 부르고 싶다. 아오야마 상운보, 석녀 야성아(아오야마는 항상 운보하고, 우선 여자가 매일 밤 아이를 낳는다)라는 정법 안구라야마 수경의 말은, 저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기독교 해석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노령인데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이상으로, 낳지 않고 여자, 이제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이 실은 어둠 밤 속에서 아이를 낳고 있다고. 그것은 역시, 에크하르트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영혼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라고 하는, 그 경험이군요.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나 방편 이상의 것이 있어, 나는 역시 그러한 말에 엄청난 액츄어리티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방편이라고 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므로, 합리화해 그것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군요.

금 감사합니다. 뭔가 질문있는 분이 계시면 부탁하고 싶습니다.

모리 교토 산업 대학의 숲입니다. 매우 감명 깊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말의 문제」라고 하는 것으로, 야기 선생님은 언어를 3개의 것에 비교, 구별되고 있는 이야기로, 그것은 그것으로 매우 명확한,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다나카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하나는 종교언어라고 한다면 성경의 말과 신학의 말 사이에는 상당한 낙차가 있지 않거나 , 종교 언어와 동시에, 나는, 역시 형이상학 언어라고 할까. 철학적인지, 형이상학적인 언어라든가, 그것은 가볍게 볼 수 없다. 니시다의 「장소」의 논리는, 엄청난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고, 「주어」라고 할까, 「주체」를 너무 가볍게는 볼 수 없다. 역시, 유럽의 형이상학, ​​혹은 신학, 독일 관념론을 합쳐도, 「주어」의 무게는 상당한 것이 있어, 조금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범신론의 문제도, 쉘링 따위는 자유론의 전반을 사용해 계속 말하는군요. Pantheismus라고 하기 때문에, Allles ist Gott(일체는 신이다)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Gott ist alles(신은 일절이다)이라고. 이것도 굉장히, 주어의 위치와 술어의 위치는 역시 불가역으로, 그렇게 간단하게는,

"장소"가 될 수 없어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성경의 근본 메시지가 있지만,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혹은 말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큰 의미가 있는가.

사실,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성경의 말과, 여기에서 나오는 신학의 말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낙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은, 더 말하면, 바울의 그리스어는 매우 소박한 그리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예수도 그리스어를 말하고 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군요. 이것은 모두 번역어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이 전부 그리스어가 되는 것 자체 속에 이미 이미 큰 전환이 있는 것이며, 모두 역시 그것은 해석이지요. 말해 보면. 그러면 성경의 말까지 포함하여 한 번 더 무언가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야기 선생님의 하나의 착안인, 말 이전의 곳까지 다시 한번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그러한 시도도 아무래도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이야기는 매우 특히 카톨릭의 전례입니까, 그들을 포함해서 아니, 대단하다고 생각해 들었습니다만, 여기에, 역시 굉장히, 말의 낙차 같은 것이 상당히 있는 것은 아니다 걸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역시, 니시다의 장소론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의 언어를 뒤집은 곳이 있어. 조금 그것도, 즉, 그래서 니시다의 무의 장소라고 할까, 이런 생각과, 야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장소론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꽤 내용이 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다만, 그러한 점 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좋은지, 조금, 선생님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우선, 타나카 선생님으로부터.

다나카 니시다는 미치모토와 나란히, 나의 좌우의 책입니다만, 언제 읽어도 새로운 발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니시다의 경우라면, 그는 자신이 쓴 것을 「악전 투쟁의 토큐먼트」등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만, 무엇을 둘러싸고 악전 투쟁하고 있었는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는 한, 니시다를 읽는 것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로, 모르면서도 몇번 읽어도 발견이 있는 서적이고, 도모토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미치모토는 선문답이 무리회화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면, 하거나 얼굴에 말하는 너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있다. 언어를 넘은 것을 어디까지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요구해 가는 살아있는 언어 사용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중에서는,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넘어 항상 새로운 언어 표현을 요구해 가는 것이 니시다입니다. 예를 들면, 니시다는 「절대무」라는 말을 있을 때부터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숲 그렇네요.

다나카 그러나 「절대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장소적 논리는 남을 것입니다. 만년의 니시다가 스즈키 오오졸에게 향한 서한 속에서, 오오오츠가 말하는 흔히 즉비의 논리로부터, 역사적 세계와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취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기 선생님의 책에서도, 인격적인 언어와 장소론적인 언어가, 처음에는 무언가 대립하는 형태로 쓰여졌지만, 점점, 끝쪽에 가까워짐에 따라, 역시 인격이라는 말 의 재검토에 의해, 장소론적인 사고로부터, 우리가 보통 인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거기로부터 다시 말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니시다가 마지막으로 목표로 한 것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숲 저는 성경의 말과 신학의 말 사이에 역시 큰 격차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말씀했습니다. 그것을 만약 내가 아는 한 선 쪽에서 말한다면 역시 '선문답의 실내의 말'이라는 것은 일반 기술언어나 종교언어와는 다르다. 「표현 언어」라고 하는 테두리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만. 이 표현 언어라고 하는 것도 편리한 말입니다만, 나는 니시다 철학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표현을 너무 일반화해 사용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있습니다.

다만, 가장 알기 쉽게 말하면, 실내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바쇼가 사용하는 하이쿠의 말이에요. 거기에 자신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것 같은 언어는 모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나」가 들어가면 무, 그러니까, 무아의 논리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선생님의 말씀으로 말하면 바쇼라든지, 혹은 문예에 가까운 것 같은. 즉, 별로 자신은 하이쿠 만들기라든가, 그러한 예술성이 있다든가,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보통의, 일상의 수다의 말도 아니면, 개념적인 말도 아니고, 뭔가, 역시 조금 바뀌고 있어요. 거기는, 나는 아마, 성경 안의 말도, 그러한 개념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인가 조금.

그래서 잘 말할 수 없어요. 특히 선문답의 말은 독특하고, 이 사이에, 순식간에,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만, 역시, 그것을 단순한 표현언어라든지, 그런 것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게 할 때 성경과 신학, 그것은 성경 안에 신학 A도 B도 C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학이라고 할 때의 말은 이미 이미 형이상학, ​​혹은 철학의 언어가 아닌가, 는 어떻다는 것을, 매우 고집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다나카 저는 철학 이전에 한번 되돌아가서 철학의 부정을 통해 철학이 어디서 성립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신학의 경우에도 신학이라는 교리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그것이 경험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그러니까, 신학 이전, 그리고 철학 이전부터 사색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후기 타나라나 니시다에 공통되는 사색의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니시다의 경우, 최초의 「선의 연구」로 직감적으로는 모두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재적으로 말이죠.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하는가? 그 언어 표현을 둘러싼 악전 고투는 평생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네요.

그러므로 그 문제는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문제이며, 나의 경우는 사실 니시다를 기독교의 맥락에서 읽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니시다 이해보다는, 니시다 자신이 문제로 하고 있는 일을 기독교도로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까. 그리고 그는 역시 프런트에서 사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른바 최전선에서, 철학의 현장에서 악전 고투하고 있는 그 노력으로부터 배우고 싶어서, 니시다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네요. 니시다와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것은 축소 재생산이기 때문에. 「견사와 싸우면 사의 반덕을 줄이지 않고」라는 선의 말이 있네요. 이 말은, 학문의 한없이 탐구를 촉구하는 정신에 통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고, 종교의 근본에 다니는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반복 반복하면, 그것은 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형태 있는 것을 낳는 것 같은, 근원적인 일에 눈을 뜨는 것이 근본과 같이 생각합니다.

타나베 논집에, 니시다·타나베 기념 강연회에서 이야기한 것을 쓸 예정이 있습니다만, 타나베의 경우도, 니시다를 비판하는 것을 통해, 니시다가 문제로 하고 있던 것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려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느 쪽이라든가 니시다 쪽이, 자신의 체험에 딱 맞기 때문에, 타나베의 개념적인 사고보다 니시다 쪽에 매료되고 있습니다만.

모리 타나 씨는 거의 전부 오해군요.

다나카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리 타나 씨는 상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무」란, 그런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역시 타나베입니다. 그것은, 「무의 장소」 쪽이 적확해요. 왜냐하면, 「보는 사람 없어서 본다」라고 하는, 주체가 아니고 「주체로부터 장소로의 전환」이, 니시다에 있어서 일어났어요. 그것을, 또 한번 절대무라고 하는, 절대적인 원리 같게 해 말했다고 하는 것은, 타나베씨의 굉장히 큰 책임입니다.

대부분, 그래서 타나 씨를 읽으면 개념으로, 전부, 긴 긴 문장이지만, 하나 읽으면 전부 알고 버려요. 아무것도 재미있지 않다. 나중에, 뒤따라 네요. 거기서, 뭔가 새로운 발견이라든지, 새로운 파토스라든지, 그러한 것을 너무 느낄 수 없다. 그 대신 연구만은 본격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틈이 없다. 그것은 대단하고, 우리 선생님도 모두 타나 씨의 제자였기 때문에, 너무 타나 씨의 욕을 말할 수 없었다.

다나카 우선, 니시다의 문제라는 것을, 역시 타나는 전후라고 하는 그 시대에서, 패전을 경험한 후에 썼습니다. 니시다가 구약 성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본이 망국의 위기에 있다는 것은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구약의 예언서를 다시 읽고 그가 거기에 매우 움직였다는 것은 일기 속에 명확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타나베는 패전이 현실화했을 때, 니시다가 이미 보고 있던 일을, 타나베 자신의 말로 말하려고 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야기 아직 너무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즉, 성경의 말과 그 다음 신학의 말은 다르지 않을까. 물론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성서학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은 각 문서에 대해,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서 쓴 것인가를 연구하는 부문과, 그 다음, 성경의 텍스트 하나 하나에 대해서 해설을 해 나간다. 석의가 된다. 그것과 함께 신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신약성경이 포함하는 신학적 사상(제 개념의 명확화와 질서화)을 꺼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리모리 그렇네요.

야기 네. 그래서 처음부터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과, 모르는 채로 말하면 바울 자신이 한 명의 신학자로, 신학적인 언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예를 들면, 진짜는 말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하나님의 아이가 나타나서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만, 더 이상 나는 죽어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그와 매우 비슷한 말로, 좀 더 직접적인 말이지,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빛나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었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뭐야? 그대로 읽고 알 수 있다고 하면 무리겠지요. 다른가요?

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요컨대 성경을 읽어도 그것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아요.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알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작업이 무슨 일인가라고 하면, 지금 말한 것 같은 시대사라든지, 하나하나의 개념의 성립사의 연구라든지, 문장의 석의라든지, 그리고 나서 신학적인 사상, 여러가지 면에 걸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자신은 성경의 말과 다르다는 것은 우에다 씨가 좋고 직접 경험에서 제1차적인 말과 그것을 해석하고 말해 가는 말과는 다르다고. 그렇지만, 또 원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역시 추상도가 다르기 때문에.

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야기 물론 다릅니다.

모리 그러니까, 현대로부터 보고, 얼마나 불합리하거나, 모르는 것이라도, 역시, 우선 깊은 의미는 모르더라도, 아무리 엉망이든, 자의적인 의미는, 일단은 받을 수 있네요.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녀석만이라도. 그 의미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역시, 선의 공안 따위는 더 심해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야기 같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리 아니, 공안은 해석이 아니에요. 역시, 모르는 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야기 해석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해석이라는 것은.

모리 아니, 하지만 그것은 설명이 아니에요.

야기 물론. 설명은 아니지만 같은 근원에서



나온 더 알기 쉬운 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 있어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숲 그렇습니다. 입니다.

야기 말 위에 타고 온 것만의 해석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말로는 물론 다르지만,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보다 정당한 근원에서 나오고, 그 근원을 보다 분절한 형태

확실히 가리키는 의미에서는 현대에는 역시 필연적으로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난

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근원 언어입니다, 그것을 신학이라고 하는가, 철학이라고 말하는지, 무엇이라고 말하십시오.

괜찮지 만. 신약신학의 말이라고 생각해 우에다씨가 말하고 있다. 근원어만으로 좋다고 하기 때문에. 와 버리니까. 오히려, 확실히 그것만의 즉, 내 해석의 방법, 분들에게 썼습니다. 생각합니다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를 단서로 해, 모네. 하지만, 역시 그것을 안심했는데, 그 말이 나온 근원에 접해, 아, 이쪽인가 , 우리는 어떻게 발달한 언어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에 통하는 말로 다시 쓴다고. 그것이 석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와 운과만으로 비교하라고 하거나, 신약신학이라면,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내가 왔어. 다른 분들로부터 볼 수 있으면, 코데라자와 야기 선생님의 회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꽤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만. 선생님, 듣고 싶었습니다만, 최근에는, 367년에, 콘스탄틴의 뒤, 교회의 회의에서 이 성전이 선택되네요. 그래서 배제된 복음이네요, 예를 들면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베드로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마그다라의 마리아에 의한 복음서라든가, 그러한 것이 최근, 매우 토론되고. 특히 저는 토마스의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를 들어 제자를 향해 자신을 믿지 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알고라든지군요. 마지막은, 모두 예수가 되라든가, 불교로 말하는 부처가 된다고. 예수님이 되라든가, 그러한 말을 토마스 따위는 매우 말하고 있는 것으로, 로마 교회가 싫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매우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는 선생님이 말하는 것처럼 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십니까. 그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각합니다만, 선생님의 의견은,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야기 토마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는 전혀 예수와 다르니까.

테라자와 그렇습니까?

야기 응. 조금 전의 다나카 씨의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가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말해 버렸을 뿐이겠지만. 자주 있는 것입니다만,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의 말을 역사의 예수의 말이라고 하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하겠지요.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는, 그건 예수가 아니고, 타키자와씨의 말로 말하면, 「가미와 함께 있습니다」. 내 말로 말하면 "통합 작용". 그것이 한 사람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건 역사의 예수와는 전혀 다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가 하면, 역시 부활 이해에까지 돌아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우선 그러한 구별을 한 후에. 역시, 그러한 구별을 무엇으로 한다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예수의 말 속에서도, 이것은 예수가 정말로 말했다고 생각되는 말과, 그 후, 나중에 교회가 말한 말이 아무것도 있는 것 같다고. 그것은 백% 확실히는 모르지만, 대부분은 구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중에서도 아무래도 예수님께 정말 예수님이 말한 것 같다는 것을, 굉장히 줄어 버리지만, 예수님의 말로 여겨지고 있는 것의 2, 30%가 되어 버리지만, 더 적다 지도 모른다. 그것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감각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이라고 하고, 조금 전 마가 복음서의 말을 끌었지만, 나는 다나카 씨를 전혀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렇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만, 저것은 전설의 말로. 즉 하늘에서 목소리가 났고, 당신은 우리 사랑하는 아이, 당신은 기뻐한다는 것이 있었지만, 하늘에서 목소리가 났다는 누가 듣고 누가 기록했습니까? 정말 하늘에서 목소리가 있었나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예수 위에 머물렀다고. 그것도 마가는 예수 안에 들어갔다고 쓰고 있어. 그런데 누가와 마태에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쓰고 있다(마태 3·16, 누가 3·22). 장소 론적으로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기뻐했다는, 그것도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그런 목소리가 되고, 누가 그것을 듣고, 누가 기록했다는 이야기가 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라져 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예수라 할 때는 역사의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생각되는 말을 적어도 중심에 둔다. 그러면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예요. 그것이 한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있는 말이며, 저것을 예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가지 않기 때문이군요. 다나카 씨가 말하고자 한 것 자신은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저로서 걸리는 점은 그런 점입니다.

다나카 아니. 저도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는 편집, 복음서기가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이자 복음 서기인 요한 자신의 직접 경험, 종교 경험이 없으면 그 예수의 말은 쓰지 않았다. 그래서 결코 그것은.

야기 요한은 누구일지도 모른다.

다나카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는, 다양한 전승이, 나는 전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왜 가톨릭 테제를 소중히 하는가 하면 프로테스탄트의 구약에는 성전으로 채용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솔로몬의 지혜』, 그리고 『집회의 책』. 이것은 『벤 시라의 지혜』라고 합니다만, 이 두 사람은 가톨릭 교회의 전승 속에서 굉장히 소중해져 온 것입니다.

야기 그렇네요.

다나카 그리고, 아마 전례로 인용되는 것이 매우 많고, 이 둘을 빼면, 예를 들면 데카르트도 모르고.

야기 아우구스티누스 어쩐지, 잘 인용하고 있어요.

다나카 중세 철학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토마스 복음서도 매우 좋아해요. 그래서 저에게는 이단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야기 아니, 소중하다고 하면 역사 연구상에서는 중요합니다만.

다나카 모두 소중히 하고 싶다. 그래서.

야기 아니, 그것과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수의 말인지 아닌지 하는 이야기와 사상사 위에서 소중한가 소중한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는 다르네요.

다나카 그러나 물론 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전례 속에서 그것을 통합할 때에는, 그것은 역시 하나의 말, 전례의 데이터로서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통합하는가 하는 미래를 향해 읽혀지고 있어요 . 그러므로 반드시 시적 사실이 어땠다고 하는 것은, 나로부터 말하면 그 탐구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성서학의 레벨, 연구 단계에 따라 바뀌는 것이고, 진보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야기 전체로서는 이제 그다지 변하지 않네요.

다나카 그래서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전례에서 그것을 미래를 향해 통합하고 있는 그 일도 저는 귀중한 동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기 그것은 교회의 일이며 또 다른 문제.

타나카 그렇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성서학의 사적 예수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다양한 견해라는 것을 통합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기 아까의 숲씨의 문제에 바꾸면, 언어는 확실히 여러가지 레벨이 있어요. 같지 않다. 역시 그것은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그 점은 말씀하신대로. 다만, 각각의 기능으로서의, 각각의 독특한 의미는 있다고, 그러한 것. 그리고, 니시다와의, 뭔가, 나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똑같이 하자니 전혀 생각한 적이 없네요.

다만, 스스로 하고 있으면 닮아 버렸다고 한다. 나의 본심을 말하자, 직접 경험이라는 곳에서 시작되어, 자각에 나타난 것을 말로 해왔다면 닮아 버렸다는 것이 나의 감상으로. 예를 들어, 니시다를 사류로 승화하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니시다와 내가 말하는 것, 공통점은 있겠지만,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예를 들어, 나는 예수님이 신이라는 궁극의 장소와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통합작용의 장소를 구별한다. 장소는 일하는 장소이며, 일이 실현되는 곳이 「장소」(인격), 「신」과 사람과의 관계는 「작용적 일」. 그렇지만, 매우 울려 퍼진다고 할까, 니시다가 말하는 것이 울린다고 하는, 그것은 있어요.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세하게 말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만두겠지만, 확실히 다르겠다고 말하면, 확실히 다르다. 처음부터 동일하게 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금 이미 7분 정도 예정보다 지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세션이기도 하고, 이것만은 아무래도 야기 선생님에게 묻고 싶다고 하는 분이 계시면, 한명 두 명은 좋은가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지금의 타나카 선생님의 발표를 근거로 해, 혹은 그것과 다른 각도로.

이시이 아까의 모리 선생님과의 교환으로, 말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 거기로부터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는 말에 되돌아 가는 것이, 하나, 야기 선생님이 생각되고 있는 모델이라고 하는 것 같은 그래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나, 이번에 새롭게 공동역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번역되어, 그 외부 모니터 같은 일을 했습니다만, 그 번역이라고 하는, 식전 같은 것으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 성전에서 비교했을 경우, 굉장히 번역의 역사를 거쳐 일본어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문어역에서 구어역, 그리고 30년마다 개역되어 간다고 한다. 왜, 기독교라고 할까, 성경은 번역되어 가는가 하는 것은, 아마 하나, 공동체성이라고 하는 것에도 관련되어 온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야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번역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근원으로 돌아와 그 공동체 안에서 알 수 있는 말에 되돌아 가겠다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만, 번역이나 혹은 석의 한다는, 나는 일단 개신교이므로, 게다가 루터파이므로, 비교적 설교가 소중해져 온다고 할까, 거기를 기둥으로 하고, 종교 개혁으로 나온 곳을 소지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 석의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성경의 근원적인 말로 돌아가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쪽을, 야기 선생님의 생각을 묻는다면 생각합니다.

지금 폭포 그것과 관련하여, 관련이 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

금 그럼, 또 하나. 질문을 정리해 선생님이 대답해 주시면.

이마타키 방금 전에 모리 선생님이 비판된, 타나베 철학에 있어서의 종의 논리. 그래서, 이것은 방편. 방편을 어떻게, 저해체가 아니라 살릴 것인가라는 의미로, 타나베 철학의 의의를, 반대로 나는, 오늘의 스가와라 선생님과 타나카 선생님의 발표로부터, 무언가 시사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만. 야기 선생님 자신의, 타나베 철학에 있어서의 종의 논리의 평가를 한다.

야기 상당히 다른 문제입니다. 우선, 시작하는 쪽으로부터, 번역은 키리시탄의 시대부터 시작해 하고 있습니다만, 제 느낌으로는, 아무리 번역했다고 좋은 번역이라면 일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 둘째,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공동 번역을 만든 것이 문제가 하나. 뭔가 하면, 교리는 성경의 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대입니다. 교리에 맞게 성경을 번역하기도 한다.

금 그것도 있습니다.

야기 농담이 아니야. 그만두고 싶어. 그럼 또.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번역하고 있어. 예를 들어, 고린도 성경의 4장의 4절에, 나는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그런 말이 있다. 심판은 주로 맡긴다고. 심판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는 것을, “나는 나를 생략해 부지런한 일은 없지만”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슈노이다(σύνοιδα)라고 합니다. 슈노이다라고 하는 것은 함께 아는 것으로, 양심과 자각과 양쪽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어가 그렇고, 라틴어도 그렇다 (conscio, conscientia).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각 쪽이에요. 나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고, 좋았던 것이 나빴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말하고 있네요. 그것을 양심 쪽에 버리는 것이니까, "나는 자신을 빼놓고 부적절한 곳은 없다"고 번역해 버렸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며 심판은 모두 그리스도께 맡겼다는 다음 말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런 중요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

그럼, 타나베 모토입니까? 田邊元의, 개와 종과 종류의 상호 매개, 절대 매개라는 논리이지만, 그 논리 자체는 매우 흥미가 있고,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통합체에는, 개와, 그 다음 통일과, 그런 다음 통합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종(통일)의 면이 매우 강해지면, 개가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그것이 종류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가 비슷하다.

그런데, 어디가 결정적으로 다른가 하면, 적어도 전후까지의 田邊이지만, 국가가 류가 되어 버린다. 국가가 신격화되는군요. 그러므로, 그의 국가론에서는, 국가가 보살의 나라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내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것은 류가 아니고 씨네요. 종류라는 것은 말해 보면 인류이니까요. 국가를 종류로 두면 그것이 신성화된다고 할까. 그게 내가 그의 결정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금 그냥 6시에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네 번째 세션을 마칩니다.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