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
202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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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원
심효원은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전(前)영화사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동(同)대학 매체와예술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있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경험과 감각을 넘어서는 포스트인간중심주의가 가능한지 살피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인류세의 비가시성」(2021), 「희토류와 전자폐기물에 대한 미디어 유물론 연구」(2021) 주요 공저서로는 『교차 2호: 물질의 삶』(2022), 『21세기 사상의 최전선』(2020) 등이 있다. 유시 파리카, T.J. 디모스, 에드워드 샹컨 등의 글을 한국어로 옮겼다.
기술 미디어와 습관적 지각으로부터의 탈피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 고유의 특징을 전면화하는 것은 인간의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곤 했다. 여기서 습관적 지각은 “[사진·영화 카메라의] 렌즈만이 사물에서 습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내 지각을 감싸고 있는 모든 정신적 때를 벗긴다”1는 20세기 중반의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말을 차용한 표현이다. 바쟁은 사물의 외연을 이미지로 복제하는 카메라가 지닌 기술 미디어적 속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기에 작동 양상이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비록 바쟁의 논의는 영화를 포함한 사진 기술 미디어를 특정하고 있지만, 그의 전제는 각 시대에 주류였던 기술 미디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당대 사람의 지각의 근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예술 전반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기술 미디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작동 원리를 짚을 수 있는데, 하나는 기술 미디어가 대상의 어떤 특성을 그 장치의 고유한 방식으로 데이터화한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데이터가 대상의 특성 일부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장치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 장치적 특성이 드러내는 양상은 인간의 감각, 인지 방식을 거친 그것과 다르고, 그래서 다른 각도에서 대상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의 의미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정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üll)의 ‘환경세계(Umwelt)’ 개념처럼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은 생리학적으로도 지각 기관이 협응할 수 있는 선에서 외재적 세계와 공명할 수 있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를 정의한 적 있었듯 그동안 기술 미디어는 지각·감각의 능력들을 보완하거나 없는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순수한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닉과 테크놀로지가 언제나 결합되어있었던 인간의 기술 미디어 문화의 특수성이다.2
기술 미디어의 이러한 역할은 동시대 예술에서 어떤 시의적인 특정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이 명명한 ‘초객체(hyperobject)’처럼, 많은 경우 기후 온난화처럼 시공간적 규모와 양상이 인간 인지와 감각의 능력을 넘어서는, 우리에게 닥친 거대한 상황, 환경, 조건들을 그려보기 위한 시도의 일환에 있다. 모턴은 2010년 『생태적 사유(The Ecological Thought)』에서 초객체가 “스티로폼이나 플루토늄처럼 생각 불가능한(unthinkable) 시간 규모로 존재하는 것이며 (…) 이것은 우리의 제한되고 고정되어있으며 자기지향적인 틀을 와해시킨다.”3고 처음 명명하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동명의 책에서 그 개념을 생소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묘사하는데,4 여기에는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 생태계의 총체적인 종말이 우려되는 가운데, 생각하고 보고 행동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불안감과 공포를 느꼈으면 한다는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5 한편 인간의 한계로 인해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포는 유진 새커(Eugene Thacker)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In The Dust Of This Planet)』에서의 전면적인 주제이기도 하며, 그는 그 경험적 불가능성을 동시대의 몰인간적 신비주의로서 설명한다. 새커는 이를 불교적인 ‘공(空)’, 즉 텅 빔이라고 말하지만, 그 속성은 아무것도 없음의 허무함이 아니라 인간의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드러낼 수 없는 와해된 기반에 가깝다. 이러한 시의적 상황에서 초객체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인류세나 지구 행성과 관련한 것들을 논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리고 고유의 방식으로 형상이나 수치를 제시하는 기술 미디어의 작동을 전면화하는 방법론이 초객체적 주제와 결부된 인류세적 예술로서의 한 가지 경향이 되었다. 이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려 한다.
기술적 유형 1: 초객체를 가시화하는 데이터 시각화
첫째, 데이터 시각화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추이나 변화 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에 용이한 기법이다. 일례로 건축가 에이드리언 라후드(Adrian Lahoud)의 〈기후 범죄(Climate Crimes)〉(2018)6는 전 지구적 규모로 기후 관련 데이터를 시각화한 영상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3세계’가 쇄신된 동시대 용어로서의 ‘남반구(the Global South)’의 기후가 미국, 유럽, 중국 등의 국가가 포함된 ‘북반구(the Global North)’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 인과성을 시각화한다. 그에 따라 남반구에서 특히 취약한 가뭄, 홍수 등의 기후 재난이 국지적 현상이 아니며 전 지구적인 연쇄적인 흐름에 의한 결과임을 암시한다. 북반구로부터 남반구로 내려오는 대기 이동이 파란색과 빨간색의 상징적인 색깔 대비를 통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한편 데이터 예술가 한윤정의 〈더 퓨처 이즈 레드〉(2021)는 지난 8년간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자연적인 화재와 기후 변화와의 관계를 데이터 시각화로 제시한 미디어 기반 설치작품이다.7 작품의 일부로서 모니터 패널에는 한반도 전체 지도가 비추어지고, 지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역 위에는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빨간 원 모양의 표식이 띄워져 있다. 그 앞에 마련된 장치를 통해 수용자가 그 지역들의 정보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상호작용식이다. 마지막으로 건축가 에얄 와이즈먼(Eyal Weizman)이 주도하는 골드스미스 대학 산하 프로젝트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8를 언급할 수 있다. 웹사이트, 전시 기반 등의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포렌식 아키텍처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위계적 폭력을 조사하고 수집한 영상 푸티지, 사건 경위, 지역 및 공간 정보를 데이터 시각화로 구현한다. 여기에는 전통적 지도처럼 수평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보다 수직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3D 모델링뿐 아니라 데이터 마이닝, 원격 탐지, 패턴 분석 등의 동시대 기술이 적용되어있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사례들이 폭로하고자 하는 기후 재해나 위계적 폭력 같은 것들은 ‘폭로’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언론이나 대중매체에서 범람하고 산재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나아가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것에는 최신 동시대 시각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광범위한 대상·현상 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규모 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 공개출처정보(open source intelligence, OSINT), 즉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오픈소스들을 주요 원데이터로 삼아서 분명한 맥락으로 시각화했다는 것, 수용자들이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도록 그래픽 표식과 색깔 등으로 강조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작업들을 포함한 데이터 시각화의 예술적 사례들은 습관적인 지각의 각성적 계기일 뿐 아니라, 보다 폭넓은 층을 상대로 널리 알릴 수 있는 교육물로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데이터 시각화는 다루기에 매우 까다로운 파르마콘이다. 예술사가 T.J. 디모스(T.J. Demos)가 글로바이아(Globaïa)의 최초의 인류세 교육 포털 웹사이트를 비판했던 것도 이 점 때문이었다.9 예술과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사진이었고 데이터 시각 도구를 통해 그림이 된 그곳의 디지털 합성 이미지들이 왜곡과 은폐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라온 전 지구적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용이하게 들어오도록 규모를 축소한 시각 기술에 기반하여, 나사 홈페이지나 구글어스 같은 곳에서 촬영된 실사 이미지를 가공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행성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보조해주고, 디지털적 근본은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서 취합한 데이터들을 하나로 조합하기에 최적화되어있다.
디모스는 이러한 규모 축소가 환경 재난에 연루된 행위자들, 특히 기업의 산업적 활동과 국가의 의무까지 축소시켜 버리고, 디지털 합성은 그 이미지가 최종물이 되는 전 과정에서 개입된 주체의 존재를 지워버린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논의는 더 폭넓게는 니콜라스 미르조에프(Nicholas Mirzoeff)가 말하는, 어떤 잠재적인 것을 명확하게 그려 보이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시각화’로 수렴된다. 미르조에프는 시각화가 군사적 맥락으로 문헌에 처음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것이 지금까지 군사/국가/기업에서의 위계/권위의 유지 수단으로 기능해왔음을 지적했던 것이다.10 시각화의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데이터 시각화는 디지털의 통합적인 구성력으로 강도 높은 맥락화가 가능할뿐더러, 맥락을 구성하는 주체의 직접 발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와 수치를 경유하여 전달된다는 면에서 수용자에게 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감추려는 의도와 폭로하려는 의도 둘 다에서 유용하게 쓰이며, 이렇게 겉보기에 중립적인 이러한 이미지들의 보이지 않는 뒤편에는 이해관계와 권력 문제와 관련한 주체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기술적 유형 2: 기술에서의 비가시성 전면화
두 번째 유형으로 인간의 가시적 범위에 잘 맞도록 가공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시대 기술 미디어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비가시성을 전면화하는 방법론을 들 수 있다.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s)’와 ‘가동적 맹목(operational blindness)’ 개념이 그러한 경향을 비춘다. 그것들은 21세기에 들어서서 기술의 시각화가 인간 본위의 시각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먼저, 가동적 이미지는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가 처음 명명했고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동하는 일부로서의 이미지”11 라고 정의 내렸던 개념이다. 이미지란, 라틴어로 유령을 의미하는 이마고(imago)라는 어원을 탐색했던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12를 포함해서 죽음 극복이라는 인간의 오래된 희구에 이미지의 존재 의미를 두었던 이들에게는 어떤 실물의 재현을 전제로 한다. 그 관점에서라면 이미지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존재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파로키는 1920년대 미국에서는 인간이 촬영할 수 없는 카메라 구도를 팬텀샷(phantom shot)이라고 불렀다면서 전쟁에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폭탄의 시점샷으로부터 동시대 기술 이미지의 특징을 도출했다. 그에게 유령적인 것이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무인 처리하는 기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파로키는 세상을 구현하지 않게 된 기술 이미지의 예술적 실천으로서 2채널 설치작품 〈눈/기계〉(Eye/Machine, 2001–2003)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전쟁(1991년 걸프전)과 산업에서의 자동 이미지 프로세싱을 다루고 있다.
한편 약 십여 년 뒤 지리학적 미디어 작가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은 짧은 시간 안에 기술이 변화하여 인간과는 무관한 기계적 시각의 양상이 한층 더 달라졌기에 가동적 이미지의 의미가 구시대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드론의 자동화 패턴 인식 시스템 같은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품질 관리 시스템, 자동 번호판 인식기, 상점의 동선 추적 시스템 등 일상으로 광범위하게 침투했다. 페글렌은 아래 인용에서처럼 파로키의 〈눈/기계〉에서 화살표 같은 그래픽 표식들과 강조하는 색깔들은, 첫 번째 유형에서 인간 본위적으로 가공되었고,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목적을 지닌 그것들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한다.
가동적 이미지는 점점 더 그저 인간에게 이질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비가시적이다. 돌이켜보면, 파로키의 〈눈/기계〉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파로키의 영화는 실질적으로 가동적 이미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판독 가능하도록 설정된 가동적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기계에게는 궤적을 계산하거나 움직이는 몸체, 객체들을 인식하기 위해 자글거리는 비디오 푸티지에서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노란색 화살표, 녹색 박스 모양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이점을 위한 것, 그러니까 인간에게 기계가 보는 방식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졌다.13
그런데 페글렌이 보였던 문제의식과 그가 감지한 시대적 변화는 최근 마크 한센(Mark B.N. Hansen)의 ‘가동적 맹목(operational blindness)’ 개념과 더 적절히 부합한다. ‘가동적 이미지’가 기술을 여전히 가시적인 이미지의 영역에서 논의한 것이라면, ‘가동적 맹목’은 그것이 완전히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한센은 “인간 의식이 온전히 접근할 수 없는 인지 체계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14이라고 정의한다. 근대의 렌즈 기반 기술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확장했다면 21세기의 기술에는 인간 본위적 방식과는 다른 고유의 지각 방법이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기술 미디어가 가동하는 순간에 직접 경험될 수 없으나, 이로 인해 미래에 일련의 정신적인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용어를 차용해 정신적 개체화라고도 수식되기도 하는 가동적 맹목 개념에서 강조되는 것은 기술의 작동과 인간의 지각 사이의 필연적인 시간적 간극이다. 그 예증으로서 20세기 전후의 에티엔 쥘 마레(Étienne-Jules Marey)의 연쇄사진(chronophotography)기술이, 동시대의 〈소노라 패스 위 아홉 개의 정찰 위성(Nine Reconnaissance Satellites over the Sonora Pass)〉(2008)을 포함한 페글렌의 작품들이 거론된다. 기술 미디어는 우리의 지각과 일치하지 않는 기계적인 지각을 제공함으로써 경험 불가능한 인간 지각을 자각하고 일어난 상황에 사후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여기에 속하는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보다 그러한 잠재성을 생성하는 기술 미디어의 가동 그 자체다.
예술적 수단으로서의 동시대 기술 미디어
위에서 초객체적인 것을 인간의 지각과 감각 범위에 들어오도록 가공하는 데이터 시각화와, 이미지 처리 기술에서의 비시각성을 강조하는 시각화로 나누어 동시대 예술의 경향을 살펴보았다. 전자가 이해하기 쉬운 정보 전달과 강력한 각성을 꾀할 수 있지만 그만큼 조작적 이미지에 대한 위험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한편 후자는 기술의 비본위적 성질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되었음을 것을 강조하고, 그중에서도 ‘가동적 이미지’, ‘가동적 맹목’은 기술 자체가 초객체적인 것이 되어버린 동시대적 경향을 가리킨다. 이 두 갈래의 유형은 서로 대비되는 듯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현시대에는 기술 미디어에서 대상의 정확한 재현이나 현실의 객관적인 전달의 목표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기술 미디어가 그러한 목표의 수단이었을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최종적으로 재현, 현실, 객관성에 함의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와 그 무근본성을 발견하는 데 가닿는다. 그에 따라 시각기술과 시각성에 대한 동시대적 경향과 논제는, 인간 인식과 감각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인류세 예술의 실천과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나아간다. 동시대 시각예술은 인류세라는 주제와 기술 미디어라는 수단의 두 가지의 초객체를 동시에 다루는 까다롭고 어려운 과업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 초반에 언급했듯이 기술 미디어는 대상의 일부를 가시화하지만, 매개되는 고유의 장치적 특성으로 그렇게 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이미지에는 프레임 속 대상의 특성과 기술 가동적인 특성이 불가분으로 얽혀있으며, 둘 다 우리가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불가능하기에 그 결합으로부터 각각의 성질을 분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답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명확성에 중점을 둔다면 기술 미디어의 이미지나 수치 등의 특정 시각적 형태와 특정 객체의 성질을 등치 시키는 실수를 부지불식간에 저지르기 쉬워진다. 인간의 통계학적 연구에서 종 모양의 가우스 곡선과 그 측정의 정확성에 골몰하다가 도표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평균인간(homme moyen)’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19세기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를 그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15
분별이란, 그 동기가 인류의 뒤늦은 자기반성이든, 태커나 모턴이 말했던 공포든, 멸종 위기에 놓인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존본능이든 관계없이, 어떤 성질을 정확하게 밝히고 파악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오래된 이분법적 앎이라는 습관이다. 그러나 인류세적 상황에서는 어떤 것을 더 알아야 하기보다는 저 너머의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의식적인 실천이 더 중요하다. 어쩌면 과거에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다뤄졌던 것들이 지금 가장 실질적인 층위에서, 초미의 실천적 문제로 돌아와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시대의 여러 사상적 실험들이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저쪽 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층위와 각도에서 강조하고 있다. 퀑텡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권리상 불가능한 세계[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지 사실상 [언제든지 과학의 관계로 발전될 여지가 있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16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듯, 어떤 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저 너머의 것들을 언젠가 우리가 파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잠재적인 상태로서 대하는 또 다른 인간중심주의일 수 있다.
동시대 기술 미디어가 예술적 실천에서 무엇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지를 한센의 논의를 참고해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기술이 인간과 분리된 독자적인 능력으로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재설정할 수 있는 전개체(pre-individual)적 역량일 것이다. 그에게는 맹목이 인간을 감각적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며, 지각 못하는 영역으로 확장시켜 인간을 변화시키도록 촉진하는 개체초월화(transindividuation)와 더 맞닿은 동시대 기술 미디어의 매개적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시대 미디어 기술의 가동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과 기술의 짝지음을 ‘기술적 대상’의 형상을 넘어서서 재개념화해야 한다.”17 확실히 인간중심주의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돌이켜보고 자각할 수 있는 여러 방편으로 사례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는 중요한 목표로 보인다. 기술 미디어를 기존의 습관적 지각에서 벗어나는 창조적 수단으로 삼는 것이 이러한 시도에 합류하는 시의적인 방법론이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는 ‘제작’입니다.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1945)」,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194. ↩
존 더럼 피터스, 『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옮김(서울: 컬처룩. 2018), 135-140 참조. ↩
Timothy Morton, The Ecological Though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19, 130-135 참조. ↩
다음의 책 참조.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한편 가장 최근의 저서인 『저주체 인간 되기에 관하여』(Hyposubjects: On Becoming Human)를 통해 인류세의 고유종으로서 ‘저주체(hyposubject)’라는 개념을 제시 및 탐구 중이다. 저주체의 특징은 ‘transcendental(초월적)’인 것과는 반대말인 ‘subscendent(하부적)’이라는 또 다른 신조어로 묘사되는데, 이는 다양한 개별존재들이 지닌 외재적인 활동 양태를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류세라는 거대한 규모로 압도될 수 있는 존재의 다양한 면면들을 희석하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 논의를 세부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저주체들은 그동안 초객체의 영향 하에 대부분 있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Timothy Morton and Dominic Boyer, Hyposubjects: On Becoming Human (London: Open Humanities Press, 2021). ↩
Laura Hudson, “At the End of the World, It’s Hyperobjects All the Way Down,” Wired, 2021. 11. 16, https://www.wired.com/story/timothy-morton-hyperobjects-all-the-way-down/. ↩
Victoria and Albert Museum, “The Future Starts Here project focus | Adrian Lahoud: Climate Crimes,” https://youtu.be/Rn8o7zLIUCc. ↩
Yoon Chung Han, “The Future is Red,” http://yoonchunghan.com/portfolio/the_future_is_red.html. ↩
Forensic Architecture 웹사이트, https://forensic-architecture.org. ↩
다음 책의 1장 “Welcome to the Anthropocene!” 참조. T.J. Demos, Against the Anthropocene: Visual Culture and Environment Today (Berlin: Sternberg Press, 2017). ↩
Nicholas Mirzoeff, “Visualizing the Anthropocene,” Public Culture 26(2) (2014), 216. ↩
Harun Farocki, “Phantom Images,” Public 29 (2004), 17, https://public.journals.yorku.ca/index.php/public/article/view/30354. ↩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서울: 시각과 언어, 1994), 21. ↩
Trevor Paglen, “Operational Images,” e-flux, Issue 59 (November 2014), https://www.e-flux.com/journal/59/61130/operational-images/. ↩
마크 B.N. 한센, 「트레버 페글렌의 현상기술적 미학」, 『기계비전』, 박신희 외 옮김(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9, 24. ↩
케틀레는 인간의 특성을 양적 측량으로 수치화한 데이터를 복수로 비교함으로써 유의미한 관계를 도출하고자 했던 19세기 벨기에 통계학자다. 당시 체중과 신체의 비율을 수치화한 케틀레 지수(Quetelet index)가 현재 BMI(Body Mass Index)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그는 가우스와 라플라스의 천문학적 측정 방식을 사회와 인간에 처음 적용했고, 언뜻 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생물학적·사회적 특질에서도 어떤 집단적 인과성을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집중했다. 평균인간까지 가 닿은 오차이론 관련한 그의 시도와 당대 통계학적 맥락에 대해서는 다음의 국내 논문을 참조할 것. 조재근, 「19세기 중반 오차와 정규분포의 역사」, 『CSAM』 15권 5호 (2008.09): 737-752. ↩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엄태연 옮김(서울: 이학사, 2017), 11. ↩
Mark B. N. Hansen, “Technics, Transindividuation, & 21st-Century Media,” SubStance, Volume 41, Number 3 (2012), 51. ↩
(출처: 지각 너머의 이중적 초객체들: 인류세 예술에서 기술 미디어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