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5

한국인터넷신학대학 - 현대신학입문

한국인터넷신학대학
http://www.theology.ac.kr/html/sch-frame.htm

 

[교 직 원 소 개]   
..........................    


교  수  

 강형석 목사  

 김광석 목사  

 김수만 목사  

 이상권 목사  

 이훈구 목사  

 정요찬 목사  

 정정규 목사  

 황선필 목사  

 
겸임교수  

 박준하 목사  

 이용국 박사  

 박윤선 교수  

 유순도 교수  

 조규현 교수  


 

초 빙 교 수  
 

 김정수 행정 

 김야례 교무  

 


현대신학입문

현 대 신 학 입 문
목차
  • 1. 파니카의 신학
  • 2. 폴 니터의 신학
  • 3. 칼 라너의 신학
  • 4. 한스 큉의 평화신학
  • 5.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 6. 존 힉의 신학
  • 7. 가빈 드코스타의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론
  • 8. 래너드 스위들러의 대화신학
  • 9. 폴 틸리히의 신학
  • 10. 송천성의 아시아신학
  • 11. 야기 세이이치의 불교적 신학
  • 12. 한스 발덴펠스의 자기 비움의 신학

제 목 : 현대신학(1)-파니카


1. 머리말

그리스도인은 이 땅 끝까지, 그리고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도록 초대받았다. 선교사들이 험한 곳으로 가서 그곳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모든 역경을 딛고 사는 모습이 그러한 초대이다. 또 자신의 삶 터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 노력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할 실천은 선교와 복음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이하 성서 구절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따랐음.)라는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교 진리가 삶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과학과 교통, 통신 등의 발달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지구 반대 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거의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이제 그야말로 지구촌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현대인은 서로 손잡도록 요청받는다. 이를 위해 종교간의 평화가 한몫을 담당할 것은 여러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여러 종교들이 자신의 교리를 고집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고유함과 진리를 존중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요구되고 있다.

파니카(Raymond Panikkar, 1918- ) 역시 그의 삶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아버지는 힌두교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참되고 보편적인 진리의 길을 찾으며, 종교간의 대화가 지니는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파니카는 그리도교와 힌두교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지 않고, 두 종교의 대화 가능성과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다른 한편으로는 힌두교의 교리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진리는 흔히 완고하지는 않지만 특수하고 제한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실제에 있어서 그것들은 보다 보편적인 진리가 문화적 요인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제한된 공식화이다."

파니카의 이러한 전제에 동의하면서 종교 다원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태도와 그리스도교의 개방성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여긴다.

2.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앞에서 밝힌 대로, 파니카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라는 두 종교 전통 사이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그는 인정받는 가톨릭 신학자요 신임받는 힌두교 학자로서 유럽과 미국 그리고 고향인 인도에서 교육하고 있고, 현재 산타 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재직 중이다. 그는 '변화 무쌍한 인간'으로서 '지구의 변화를 이미 자신 안에서 경험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의식이 이미 구체화된 인간'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종교 다원 시대를 선구자적으로 이끄는 인물인 것이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로서 종교간의 대화에서 가장 걸림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해석한다.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an authentically universal Christology)이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제안한다.

역사 안에 우리처럼 한 인간으로 살았고 죽고 부활한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역사에 한정된 인물인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전부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그리스도는 특수한 예수, 역사의 예수와는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파니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실재이다." 여기서 실재란 신과 인간과 우주가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상징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스도는 범우주적인 측면을 지닌 동시에 신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 지닌 존재임을 뜻하는 말이다. 즉, 신과 인간 간의 '친밀하고도 완전한 통일'을 그리스도와 실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과 신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신'과' 인간(세계를 포 함)의 두실재가 있는 것도 아니요, 신 '혹은' 인간 둘 중의 하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실재 그 자체는 신·인 양성적이며.... 신과 인간은 실재 형성과 역사 전개 및 끊임 없는 창조를 위해 긴밀하고도 본질적인 협력을 한다.... 신, 인간, 그리고 세계는 하나의 독특한 모험 안에서 연대하며, 이로써 참된 실재를 이루어낸다."

파니카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세계가 창조된 처음, 즉 알파와 오메가요.... 시·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영감을 주고 인간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신적 섭리의 역사적 행위'이다. 또, 그리스도는 "신적위치를 잃음이 없이 참으로 인간적이며 현세적이고.... 두 극을 연결시키는 실재이자 결코 하나로 해소됨이 없는 두 극'이다

'." 이처럼, 영원하고 보편적 로고스인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 역사의 예수를 통하여 실제로 육화하였다. 가톨릭이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통해 이 땅에 강생하신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모든 역사적 사실 너머에 있는실재인 그리스도를 구체화하였기 때문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파니카는 보편적 그리스도를 오직 예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파니카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육화가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거부'한다. 그리고 "구세주 그리스도는.... 단순히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한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파니카에게 있어서 실재 자체인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나자렛 예수보다 더 보편적이고 큰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실재를 역사의 한 모습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모든 종교가 나름의 일정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없이 부요하'시며(에페3,8) '어느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필립 2,9)인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예수말고도 힌두교의 라마(Rama), 크리시나(Krishna), 불교의 불타, 이슬람의 무함마드(Muhammade) 등 많은 역사적 이름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예수라는 역사적이고 특정한 인물을 통하여 보편적인 그리스도가 육화하였다는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상대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주장은 그리스도교가 범해 온 우상 형태의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주적 사랑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다음 장에서는 파니카가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토대로 하여 실천 방안으로 내놓은 종교간의 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3. 종교간의 대화

파니카는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하여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속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어야만 구원받는다.'라는 식의 주장이 종교 다원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맞지 않음을 밝히고,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제안한 것이다. 이로써 새롭게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하고 종교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그는 종교간의 대화가 서로를 배척하거나, 혹은 우월한 입장에서 상대를 포용한다거나, 아니면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자신의 종교와 신앙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대화란 서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데에 근본 목적을 둔다. 이것은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려니와 종교간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기와 다른 종교 전통과 신앙 세계를 존경의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파니카는 거듭 강조한다. 따라서 파니카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평행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한 종교에 몸담은 신앙인들은 자기의 종교가 참되고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해 준다고 굳게 믿는다. 이 굳센 믿음은 대개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양식을 띠고는 한다. 자기의 종교가 절대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거짓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허위라고 비난하기 일쑤이다. 이것은 소위 배타주의적 태도이다. 파니카는 다음과 같이 배타주의를 비판한다. 

"이러한 입장이 타인에 대한 편협, 교만, 경멸이라는 명백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또, 비록 우리가 신이 어떤 배타적인 하나의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은 그 신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기에 우리의 해석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배타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이들 중에 포괄주의적 태도를 지닌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교를 예로 들어 볼 때, 이 태도를 지닌 이들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비하여 불완전하고 편협한 면을 지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고 관대한 입장에서 그 종교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태도는 그리스도교가 "결국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만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고 보고 파니카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에 대하여 평행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파니카는 지적한다.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한 종교인이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거나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 끼어듬 없이 자신의 신앙과 종교 전통을 심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의 끝에 가서 모든 종교들이 각자의 신앙 세계와 전통의 깊이 속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본다. 이 평행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파니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선 이 입장은 세계 내의 서로 다른 종교적·인간적 전통이 대개는 서로 교차하며 영향을 미침으로써 더욱 풍성해짐에 따라 출현했다는 역사적인 경험과 어긋난다. .... 한마디로 말해 이 입장은 모든 전통의 자체적 완결성을 상정함으로써 전통이 서로서로 배어야 할 필요성이라든지 그 이점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특수한 인간 전통의 담 밖으로 나서야 할 필요성을 배제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파니카는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배타주의적, 포괄주의적, 평행주의적 태도가 결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 전통의 신앙인과 만나 대화할 때, 이 세 가지 태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 대화는 일방적인 강요이거나 아니면 독백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를 경험한 이들은 종교간의 대화가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를 염려하여 아예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조차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가 인간 존재 전체와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파니카의 다원주의적 입장에 주목할 때, 그리스도인은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의 의미를 올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파니카는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라는 전체성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또 이 전체성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가 나자렛 예수를 통해 역사 안에 강생하여 실제로 역사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이 역사적 체험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낳았고 이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생하고도 진실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진리이고 사랑의 하느님을 밝혀 주는 참 빛임을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한다고 파니카는 지적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체험을 그들의 언어와 교리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체적 체험과 역사적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으며 더불어 살도록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를 사랑이라는 언어로 담아 내고자 한다. 이것이 신앙이요 삶의 언어인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인간과 신의 세계 속에 살도록 해 주는 살아 있는 상징을 지녔기에, 인간의 모든 경험을 반영하는 삶의 언어와 분리할 수 없다. 여기에 종교간의 대화가 가지는 의미가 있다. 파니카는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와 행복, 인간에게 놓여 있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 종교간의 대화가 절실히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 종교에 몸담고 있는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좀더 나은 상황으로 향하기 위해 대화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파니카는 말한다.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과 우주의 화합임은 물론 참된 우주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단순히 방법론이 아니라 탁월한 종교적 행위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종교적 행위 말이다."

4. 맺음말

"나는 나를 찾지도 않은 이들에게 발견되었고, 내게 빌지도 않은 이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로마 10,20;이사 65,1).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의 비참과 희망을 발견하고, 진리의 길을 가는 힘을 얻는다. 또 이웃과 함께 사랑의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다. 이와 더불어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사랑의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는 죄인과 이방인을 사랑하신 역사의 예수 안에서 드러나고 무상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계시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그들과 연대하여 우주적 사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종교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로써,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에 스스로 갇힘 없이 종교 다원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합당한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제 목 : 현대신학(2)-폴 니터




1.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한번쯤 이러한 질문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믿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고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또한 무엇인가?"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의 전통을 지닌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 물음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더구나 여러 종교가 삶 깊숙히 파고들어 민족성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 더 그러하다.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와 더불어 종교간의 대화에 관해 다른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갖는 요즈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제 다른 종교 전통 체계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사는 이들과 함께 이 지구촌의 평화와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배타적인 선교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라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기 어려운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는 타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한 형제 자매임을 선포하였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과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자신의 종교를 통해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한 그 종교를 인정하며 존중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타종교를 인정하고 함께 대화하며 평화를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앞에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폴 니터(Paul Knitter)도 그중 한 명의 가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지녀 왔던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로부터 벗어 나려면 교회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 구원 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살면서 보여 준 것은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구원 의지라고 니터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니터는 종교 다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찾기를 바라며 그의 신학을 전개한다.

2. 예수의 신 중심주의

니터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문제삼는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 복음(14,6)과 바오로 서간(1디모 2,5)에서 볼 수 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느님께로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절 속에 나타난 '유일성과 배타성'에 대한 주장이 예수라는 인물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영향을 말해 준다고 니터는 주장한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진리는 하나이고 확실하며 규범을 지니고 불변한다고 믿었다. 이로써 초대 교회는 자기들 주변 세계에 있는 수많은 진리 주장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수를 유일하고 궁극적인 진리라고 확실하게 믿었던 것이다. 둘째, 초대 교회 공동체는 유대교의 세말론, 묵시 문학의 영향을 많이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가 역사의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을 이미 성취한 분이라고 선포하고, 예수를 통한 체험이야말로 최고요 궁극적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셋째, 초대 교회 공동체는 유대 공동체와 로마 제국에 비해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존을 위해 예수의 '유일성과 배타성'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이처럼 '하나이며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 주장이 초대 교회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방도였다고 이해한다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절대성과 배타적 유일성을 고집하지 않고도 예수와 그의 선포에서 구원을 얻으며 신약성서의 올바른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니터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니터는 예수를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예언자로, 또 역사의 유일한 중심으로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새 하늘 새 땅을 앞당길 구원자로 선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 끝 날까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힘차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구원자로서 말이다.

이상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이요 하느님 나라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주의 기도'(마태 6,9-10; 루가 11,2)에 명백히 나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처럼, 주의 기도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관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일관할 뿐, 예수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즉, 예수는 우리에게 그의 사명에 관한 얼마간의 암시를 주었을 뿐 자신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을 세말론적 예언자로 여겼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마지막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숨결)에 의해 살고 행동하면서, 과거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마지막 예언자로서 처신하였다.

예수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몰입하였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아들이라고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이 친밀하였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에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 빼어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아들이라는 자아 의식을 지녔다. 그리고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신약성서 안에 유일한 구원자요 계시자로 선포하였고 하느님 체험과 진리로 인간을 이끄는 '특별한'증보자로 믿었다.

니터는 이것을 보편성을 지닌 하느님과 특수한 계시자로서의 예수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한 공동체가 보편적 실재인 진리와 만나려면, 그 공동체의 특수한 증보자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만나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깊은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이 측량할 수 없이 크고 신비한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니터에 따르면 하느님의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을 그의 역사적 삶으로 증거한 계시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진리의 길이다. 그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랑이신 하느님이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 계시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니터의 입장이다.

따라서, 니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참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느님 나라 중심으로 궁극적 관심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3. 해방 그리스도론과 종교 해방 신학

니터는 예수가 자기 자신이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그 나라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해방 신학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본다. 예수의 참된 보편성이 오직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터는 실제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지 못하였기에 그의 절대성과 유일성은 말하지 않아도 그를 따르는 실천에 몰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이며 유일한' 분이라고 말할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헌신할 가치가 없다."는 것보다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한다."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고백을 통해 다른 종교의 구원자들을 배척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니터는 자신의 종교에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종교 해방 신학' 안에 담아 낸다. 남미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신학적 노력의 결실인 해방 신학이 지닌 해방적 측면을 다른 종교를 향한 열림으로까지 넓힌 것이 바로 이 '종교 해방 신학'이다. 이 신학으로 그는 가난한 남미인들의 해방을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의 해방으로, 모든 사람들의 복지와 평화를 위한 실천으로 넓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니터는 해방 신학자와 종교 신학자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보다는 참 인간과 참 평화 실현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라는 관점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갖고, 모든 종교들이 협력하여 이 땅의 평화와 복음화를 이루는 실천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종교 대화의 장에서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존재 규명에만 머물 때, 불교는 불타와 공(空)만을 고집하기 쉬울 것이다.

또, 이슬람교는 마호메트에만 집착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가 지닌 고유한 영역의 강조에만 치우칠 경우 종교간의 대화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종교에 있는 고유성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의 고유성이 종교 대화에 있어서 존중되어야 함은 기본이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는 모든 종교에 있는 고유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그 기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입장에서 모든 종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찾은 것을 힘 모아 실천하는 데 종교 대화의 진정한 목적과 의의가 있다.

인간다운 삶을 박탈한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모든 종교들이 함께 헤쳐 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니터는 종교 해방 신학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삶 역시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즉, 예수의 참된 보편성은 그 무엇보다도 그의 처신, 역사적 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마태 6, 33),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2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여기서, 니터는 인간의 복지와 인류의 평화를 위한 역사적 실천의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특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4. 맺음말

이 글의 처음에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를 물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다종교적이고 초문화적인 세계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신앙언어로 되살리려는 신학자들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니터 역시 그중의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니터는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처신에 일차적인 관심을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던 마지막 예언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지적하는 데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기보다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투신한 특별한 아들, 즉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아들이라고 의식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보편성, 세계성에 대한 예수의 특수성을 나누어 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니터의 예수 인식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에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 공동체 이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가장 결정적이고도 역사적인 모습으로 드러내 밝히신 분으로 고백되어 왔다. 예수는 비록 2000년 전에 한 역사적 인물로 오셔서 30년 남짓 사시다 가신 분이지만, 그분은 이 땅에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개입하고 계시고,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 계심을 깨치게 해 주시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저 젊은 기운이 이 세계를 관통하여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셨기 때문이다.

니터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분명해진 것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가장 중요하게 보여 주신 분이시고, 이 신앙을 초대 교회 때부터 심어 주셨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변적이고도 분열된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용서의 신앙 언어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로만 선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삶으로 선포하는 데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제 목 : 현대신학(3)-칼 라너의 신학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초월론적 신학'(transcendental theology)으로 하느님과 온 인류의 원천적인 연결성을 설명하고, 그 신학의 자연스런 산물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론으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의 관계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규명한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종교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라너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종교간 다원성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지 검토함으로써 현종교 상황에 대한 한 가지의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우주 중심적 세계'(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중심적 세계'(안셀모, 토마스 데 아퀴노)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로의 전환을 이룬 근대의 상황을 반추하면서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이 신학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에 선행하여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온 인류에게 자신을 이미 내주셨다는, 즉 은총을 베푸셨다는 선험적 진리를 인간의 주체성 안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전하면서도 조건 없이 자신을 인간에게 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실존론적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분, 종파에 관계없이 하느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1디모 2,4) 하느님의 보편적 인간 구원 의지의 구체적 표현이다. 라너는 하느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 만일 이 구원 의지가 널리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전체 인류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여전히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느님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보통의 평균적인 인간에게도, 보기에 시야가 놀랄 만큼 좁고 인생을 고생스럽게 겨우 연명해 나가는 사람에게도, 고생스럽게 긴박한 생활고로 시달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 마당에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너는 묻는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아주 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무수히 많은 형제들(고생물학은 이들의 지평을 계속 확대시키고 있다.)은 물론 현재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무수한 형제들의 무리가 원칙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충만한 삶으로부터 제외되고 영원히 무의미성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이 한시라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스스로를 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또 구조론적으로 아무런 차별 없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의 이와 같은 상태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했다. 그리스도교적이긴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이다.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묘사하려 들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 불려야 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시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과소평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오롯이 보전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형제적인 자세로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너는 생각한다.

3. 그리스도론

이와 같은 논의는 '초월론적 신학'의 자연스런 결론이다. 라너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칙적인 연결성,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밝히기 위해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주신다. 하느님을 받아 모신 인간은 신적인 본성으로 성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본성상 반드시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자 한다. 인간의 초월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역사적으로 중개된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의 육화'이다. 라너에게 '육화'란 말씀의 외적 표현이며,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주시는 수단이다. 이런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개들 가운데 라너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본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며 살고 있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이고도 논리적인 완성이며, 인간 존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의 실현이자, "인간 실재의 본질이 전적으로 현실화한 유일하고도 최상인 예증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말씀의 육화의 전형을 예수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를 앞당겨 실현한, 결정적인 말씀의 육화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고, 그렇게 고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대립되지 않을 뿐더러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가능한 형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맏이이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궁극적이면서 명백한 완성", 즉 예수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루어진 완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아우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시되고 예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고 라너는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참사랑이자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근본적 단일성을 성립시켜 주는, 그러한 사랑의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예증이므로 라너에게 이 하느님 사랑, 예수 사랑, 인간 사랑은 동일한 뿌리를 가지면서 서로를 조건 짓는다.

4. 교회론

이런 인간 규정은 그의 교회론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속이고...우리 역사 내에서의 그의 영원한 가시적 현존이며.... 세계 안에서의 그의 계속적인 역사적 현존"이다. 한마디로 교회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신비'인 탓에 유형적 틀로 제한될 수 없고, '구체화'인 탓에 우리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다. 교회란 제도도 아니고,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가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공동체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으로 표현되는데, 건물 자체에 제한되지도 않고 제한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의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사실상 별의미가 없다. 교회의 안과 밖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교회의 범위도 정확히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교적상으로나 인습상으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종교 사회학적으로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두 부류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종교 사회학적인 우연한 요인에 있으며 신학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는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

이 마당에 가시적 교회 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뭐 그리 결정적이랴. 그보다는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bona fide)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일 수 있다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교회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도 타당하고,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5.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교회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성,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타종교인에게 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가? 이런 문제들을 두고 여러 학자들이 라너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한다. 가령 한스 큉(Hans Ku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폴 니터(Paul Knitter)나 존 힉(John Hick)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왜 신실한 타종교인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는 수구적 의미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런데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그리스도',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서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등의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교회 안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시키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람들을 가시적, 유형적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될 뿐더러, 만일 그러고자 했다면 굳이 '익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리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라너는 교회의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과제는 단순히 인간들의 '그리스도인화'에만 결부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의 교회의 여러 제도-이들이 아무리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밖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교회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아 파견된 바 있다고 해서 교회의 가견적 형태 밖에는 구원이란 없으며 세계의 점진적 구원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새로운 그리스도를 얻는 일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뜻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기보다 세계 도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인에게 뚜렷이 밝혀 주는 증인들을 얻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과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코 타종교인들을 가시적 교회 안으로 몰아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휩싸여 사는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모시고 사는 고귀한 존재임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바, 보다도 무한히 더 큰 존재임을, 가이없는 자유와 행복을 지니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인간임을" 밝혀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불교에서 중생이 부처라는 선험적 원사실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세파에 휩쓸려 때에 찌든 중생이 그 자체로 부처라는 말씀을 두고 도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 미천한 것을 어떻게 거룩한 부처님과 동등하다 할 수 있느냐 따진다면, 그것은 온갖 분별지를 타파하는 불교적 진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라너도 이미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온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줌으로써, 종파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본래적 고귀함, 원천적 하느님의 자녀됨을 교회안에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범위를 줄여서 그리스도교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넓힘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려는 라너의 신학적 노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6. 종합적 반성

하느님의 은총은 특정 종파에 속한 의인에게만이 아닌, 절대적으로 모든 이의 구체적 실존에 현존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신적인 생명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바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 하느님 자신이 언제나 인간의 일상 안에, 인간의 깊은 자아 안에 머물러 계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구체적인 역사의 범주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일상사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무리 일상의 언어 안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는, 언제나 더 넓고 깊은 분이다. 하느님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비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에는 우리의 개념, 언어가 너무 짧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 하느님 체험을 표현할 때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는 저렇고"내지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 역시"와 같은 상호 보완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라너는 지적한다. 심지어는 대립적인 개념들마저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표현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는 데는 언제나 긴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마당에 서술된 것보다 언제나 넓고 깊은 하느님과 그에 대한 표현을 혼동할 수 없으며, 또 표현 자체에 얽매일수도 없다. '익명'이란 말마디에, 라너가 선험적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말 자체에 매여,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서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불교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주는 예수는 대자 대비한 보살의 다른 표현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교인'이라고 명명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건데 '불자'(佛者)라는 낱말 자체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생생하게 살려 내려는 것일 뿐 불자, 모슬렘, 힌두인이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수용해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야말로 종파에 관계없이 이미 신화(神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타종교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익명의 그리스도인(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나 가능한, 그리스도교에만 적용되는 표현이지,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일반 규정은 아니다. 비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신학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종교들을 깎아 내린다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며 라너에게 가한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종교를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전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을 뿐인 것이다.

제 목 : 현대신학(4)-한스 큉의 평화신학




머리말

한스 큉(Hans Kung)은 1928년 스위스 수르세에서 태어나 1948-1955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5년 파리 소르본느 대학과 가톨릭 대학에서 공부하고 1957년 가톨릭 대학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에는 요한 23세가 공의회 신학 자문 위원으로 지명하여 활약하였고, 1963년 이래로는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과 교회 일치 신학 교수 겸 일치운동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다. 그는 다양하고 복잡해져 버린 이 땅에 일치와 평화를 위한 실천과 신학이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청됨을 절감하여 이를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다.

오늘의 복잡하고 바쁜 현실은 현대 과학 기술 문명에서 비롯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 시대는 점점 더 그물처럼 복잡하게 연결되고 얽혀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중심적인 세계가 되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사회와 교류하고 색다른 문화를 접하며,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살고 있다. 한스 큉은 이런 세계에 걸맞는 질서가 당연히 필요하다고 보고 이에 토대가 될 새로운 윤리를 구상한다. 아래의 6가지 새로운 질서는 한스 큉이 말하는 평화 신학의 토대를 이룬다.

첫째, 사회적인 세계 질서이다. 한스 큉은 '자유만이 아니라 정의도'라고 말하면서,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서로 연대하여 공존 공생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자고 가다.

둘째, 다원적인 세계 질서이다. '동등성만이 아니라 다원성도'라는 표어에서 드러나듯이 현재 우리들은 세계의 전통과 민족 문화 간의 화해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기와 다른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는 노력, 즉 다원성을 끌어안는 길을 함께 찾자고 한다.

셋째, 동반자적인 세계 질서이다. '형제애만이 아니라 자매애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억눌려 왔던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들의 자리를 찾아 줌으로써, 교회와 사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새롭게 쇄신하여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자고 제안한다.

넷째, 평화를 증진시키는 세계 질서이다. '공존만이 아니라 평화'가 이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끊일 새 없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내 민족이 잘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함께 손잡고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지구촌의 공동체를 이루자고 한다.

다섯째, 자연을 보호하는 세계 질서이다. 경제 제일주의에 도취하여 살아온 현대인들은 '생산성만이 아니라 환경과의 연대성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창조물과 인간이 더불어 사이 좋게 공동체를 건설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인간만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이 존중되어야 한다.

여섯째, 일치를 이루는 세계 질서이다. '관용만이 아니라 일치도'생각해서 서로에게 사랑과 자비로 다가서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신 예수의 복음과 다름없다.

부단한 용서와 자기 쇄신을 통해 온 마음으로 하느님 바라기를 하는 공동체를 이루자고 한다.

이처럼 평화와 일치는 오늘날의 다원 현상을 넓은 시야와 열린 가슴으로 끌어안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스 큉은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인이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복음화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땅의 소리, 삶의 진솔한 외침을 듣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 다른 종교에 앞선 그리스도

한스 큉이 다원 세계에 어울리는 신학을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리스도는 비판적 촉매로써, 그리고 세계 종교들의 종교적, 윤리적, 명상적, 금욕적, 미학적 가치의 구체적 정점으로써, 용납과 거절의 변증법적 일치 안에서 세계 종교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배타적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포용적인 보편주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분명하게 독특함을 선언하게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목적이며 모든 신앙인들의 결정적인 모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규범과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는, 다른 종교가 오로지 비판적인 촉매제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근대의 기술 세계'에 적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2000년 이래 그리스도교의 원천으로 인정받아 온 신약성서의 모든 진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 신약성서를 위해 규범적이고 결정적이다. 예수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고-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략한 신약성서의 신앙고백-예수만이 '길,진리,생명'이다."

한스 큉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충실하고 최종적인 계시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규범이 되는 계시라고 말한다. '비판적 초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이 세상, 하느님과 그리스도교인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까지도 사랑의 끈으로 맺어준 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가 얼마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그 타당성을 판결하고 그들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는 마지막 규범이다. 비록, 다른 종교들이 나름대로 좋은 뜻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완전해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스 큉은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것이 아드님께 굴복하게 되면 그 때는 아드님도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 몸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 15,28)라는 성서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어떤 구원자보다 그리스도가 앞서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한스 큉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배타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종교 신학자인 폴 니터나 존 힉을 비판한다.

한스 큉은 그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닌 규범을 포기하고 마호메트, 고타마 붓다, 크리슈나, 공자 등을 예수와 동일한 의미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평가 절하시켰다고 본다. 예수를 '주 황제'나 '주 고타마'와 같다고 보아 신약성서가 요구하는 신앙의 확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폴 니터나 존 힉의 입장이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한스 큉은 지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잣대임을 포기하라는 듯이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즉 마호메트, 고타마 붓다, 공자나 크리슈나를 예수와 똑같은 의미의 그리스도로 믿거나, 그들과 예수를 맞바꾼다면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진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이것을 그가 1963년에 쓴 글인 "이교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종교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진리를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길에서 구원받는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면 그만이다.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 이 의견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교인이 믿는 것은, 인간은 부처나 마호메트나 그 밖의 여러 예언자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인만 구원받는다. 그리스도교 안에만 진리가 있다. 은총은 교회 안에만 있다."라는 말에 대해, 그리스도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2.종교간의 대화

다른 종교의 구원자들에 앞서서, 그들을 재는 잣대이며 그들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종교와 만날 수 있다는 한스 큉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대화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종교도 자기네의 특유한 진리 기준으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한스 큉에게 있어서 대화란 단순히 자기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타인과 대화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고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비판은 우선 자기가 속한 종교를 위한 것이지 결코 다른 종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포기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를 놓치고 무엇으로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스 큉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묻는다. 다른 말로 만일 종교간의 대화에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성서를 포기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과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면,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자신의 경전에 의지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 한스 큉은 지적한다. 이런 대화에서 진정 무엇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제쳐놓고 만난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한스 큉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이 참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진리를 고수할 태세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참으로 이해하고 따를 때, 불자라면 부처의 뜻을 참으로 보고 실행할 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이 믿는 진리라고 솔직하게 열어 보일 때, 참된 대화는 이루어진다.

또한 그리스도교인은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은 동시에 현대 다원 현상 안에서 자신의 진리 고백을 포기할 권리 역시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종교를 거짓이라고 배척하고 매도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고 선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거나 게울리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가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 더 열심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데서 벗어나, 다른 종교에게 최대한으로 자신을 열어보이고, 비판하도록 하는 것이 결코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종교간의 대화에 참여하는 자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요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가지 한스 큉의 대화론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규범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포기할 때,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참된 대화는 경직된 자세를 떠나 자신과 상대방을 키우고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에 따라,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과제로부터 출발해서 끊임없이 고민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교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로부터 배워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교 전승 밖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 역량은 평화 역량을 내포한다고 한스 큉은 말한다. 다른 종교 앞에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다가서서 대화해야 하는 것은 모든 종교 전통들이 각각 걸어온 실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다. 참 평화는 고뇌하는 인간의 숨결, 시행 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새로워지는 공동체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3.평화 신학과 새로운 교회

참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한스 큉에게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를 구상하게 한다. 전통을 가장한 구습이라는 편안한 안식처에서 떠나지 못하고, 이 시대의 아픔과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신학과 교회는 더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 종교는 더 이상 삶과 이웃을 향해 영감을 불어넣을 수 없다. 이러한 직관은 한스 큉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를 바라게 한다.

한스 큉은 창조적이고 구체적인 평화 신학을 다음과 같이 구상해 본다.

첫째, 새로운 신학은 신학적 근본 연구에 대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적 근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처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지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의 의미, 이웃의 의미, 사랑의 의미를 오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신학은 잘 정리된 사고와 행동 구조의 배후를 캐묻는 신학이어야 한다.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묻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처신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학이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신학은 종교 안에 그리고 종교들 사이에 내재하는 핵심적인 차이점을 파악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무조건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다는 식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넷째, 새로운 신학은 모든 측면에서 자아 비판과 자아 수정을 요구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자신이 믿는 진리만이 절대적이라는 사고 방식을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분이고, 이 절대적이라는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임을 자각하는 데서 올바른 자아 비판과 자아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의 신학을 계속 세워 나가면서도 개방적 자세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평화를 창조적으로 이끌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면, 삶의 소리를 듣고 이에 답하기 위한 아주 필수적인 구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이 구상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살아나가는 교회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한스 큉은 새로운 교회를 통해 평화 신학을 실천해야 한다도 주장한다.

먼저, 새로운 교회는 새롭게 다가오는 정신적, 종교적 도전에 대해 교계 제도적, 관료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문제 의식에 가득차서 반응하는 교회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악을 율법에 사로잡혀 있던 바리사이들처럼 제도적이고 관료적인 틀로 막으려 하기보다는, 그 현상 배후의 근본악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뿌리뽑는 데 앞장섰던 예수를 닮은 교회이다.

둘째, 새로운 교회는 중앙 집권적으로 조직되는 교회가 아니라 다원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미 나누어질 대로 나누어진 사회와 인간 삶을 억지로 한 통속으로 묶어 놓고 명령 체계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하느님의 백성임을 밝히셨던 예수처럼 다원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이에 맞는 구조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밝혀 주는 교회이다. "바깥 사람에 관한 말씀"(마르 9,38-41)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하는 사람"(루가 9,49-50)이라는 말씀은 그 좋은 예이다. 교회 밖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예수가 인정했던 것은, 그들이 결코 자기에게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쓸데없는 간섭이라든가, 그들의 그릇된 사명감이라든가, 또는 그들의 명예심이나 지나친 열광적 정열 등으로 해서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임을 헤아리셨던 처신이라고 한스 큉은 해석한다.

셋째, 새로운 교회는 교의적이 아닌 대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메시지를 제자들과 삶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함께 사는 가운데 전해 준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생생한 현장 체험 속에서 우러난 복음적 삶을 나누는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넷째, 새로운 교회는 자만 자족하는 교회가 아닌 신앙의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자아 비판적으로 그리고 개혁적으로 미래의 물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이다. 율법에 갇혀 그것을 지키는 것만이 전부인 양 처신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거스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예수, 이로 말미암아 그 새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버림받아 죽어간 예수,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던 예수이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맺음말

종교는 참된 인간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근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모든 종교가 실현해야 할 최소한의 요구이다. 참된 종교는 참된 인간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은 절대자 안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이종교와 인간의 삶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은 이런 까닭에 자신의 조직과 교리에 연연하여 가장 중시해야 할 인간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종교 분쟁의 대부분은 자신의 종교조직을 양적으로 확대시키고 다른 종교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어리석은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이 아닌 조직 중심의 종교 역사, 종교라는 이름하에 인간을 희생시켜 온 분쟁의 역사를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로써, 종교들간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그 결과로 철저하게 변화해야 한다.

의식의 변화, 심리적 태도의 변화, 전체적인 정신 상태의 변화, 인격의 핵심, '마음'의 변화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변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메세지의 핵심을 이루는 회심이다. 아울러 사회의 변화, 구조의 변화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상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혼자 회심한 후 사랑으로 가득 차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사회라는 구조와 이웃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느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회가 부조리와 불화로 덮여 있는데, 혼자 깨끗하고 평화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해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신앙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모두 풍요로워지는 대화는 종교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종교 평화는 곧 세계 평화를 위한 절대 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한다. 따라서 한스 큉은 "종교 대화 없이 종교 평화 없다.",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고 선언한다.

제 목 : 현대신학(5)-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머리말

오늘날 우리는 종교 다원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에서 전승된 종교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다.

아직도 자기가 속하는 종교만이 참되고 다른 종교들은 헛되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배타적 자세는 오늘날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종교들간의 교류와 만남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 한다.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갓 은퇴한 존 캅은 이러한 현실의 변화 과정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과정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아, '사물'(things)보다는 '사건'(events) 속에서, '본질'(substances)보다는 '활동'가운데서, 그리고, 완성된 창조보다는 과정중에 있는 창조에서 자연과 인간 생활의 질서를 더 잘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도 살아 있는 전승으로서 역동적인 '과정 속에'(in process)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승은 하느님과 인간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역사 안에 보여 주는 삶의 지속이

다. 그리하여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과정중에 있는 교회 현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새롭게 제기되는 생태학적 문제나 여성 차별 문제, 다종교 상황으로 빚어지는 각종 문제에 교회가 올바르게 응답하지 못할 때, 퇴보의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 발전에 있어 그 극치를 보여 주나, (현재는) 모두 퇴보 단계에 와 있으며, 그래서 (미래에는) 어느 것도 다른 종교에 의해 보완되지 않는 한 그 활기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선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선불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만남을 통해 존 캅은 종교간 대화의 목적이 '상호 변혁'에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모든 종교 전통들의 상호 변혁을 가져올 대화가 그들을 창조 과정 속에 있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종교 전통들이 대화를 통해 참된 인간성과 풍요로운 삶의 실현을 위한 창조에 진일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의 독특함을 견지하고 있다. 단순히 대화를 원활히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변두리로 몰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태도이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이다.

이 글은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 전통의 신앙인들과 대화하려는 존 캅의 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적 실존

존 캅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한다. 그리스도교의 특성과 고유함은 하느님의 육화인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근거한 실존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을 존 캅은 그리스도교적 실존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언적 실존으로부터 나온 이 실존을 두 가지 측면, 즉 예수의 실존과 원시 그리스도교 실존으로 나눈다. 예언적 실존이란 예언자들의 활동 결과로 이스라엘 안에 생겨난 실존 구조를 의미한다.

구약 시대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살아 계시며 행동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침묵하며 멀리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하느님은 하늘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을 위한 존재이심을 결정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바리사이의 하느님 이해로부터 예언자의 하느님 이해를 회복하였다. 예수는 바리사이의 율법위주의 하느님 신앙으로부터 하느님을 해방시켜 예언시켜 예언적 혁명을 쇄신하고 완성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느님과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율법 준수만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늠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고 사랑은 이웃의 요청에 대한 이타적인 개방이라고 선포하으며, 유대 율법이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았다. 예수는 사랑을 수많은 원리에 예속시키지 않고 마음의 문제로 보았다. 바리사이들은 인간이 율법 앞에 정의로울 때만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신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인간의 실천을 중요시하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36)라고 말씀하셨다.

존 캅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존이 사랑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실천하는 영적 실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실존은 전인격적 변화를 가져오며 사랑으로 향하는 자기 초월의 실존이다. 존 캅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이 그리스도교 실존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타인에 대한 참된 관심 속에서 자기 중심성을 유일하게 초월하는 사랑이다."

2.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존 캅은 예언적 실존이요, 사랑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실천하는 영적 실존이며, 근본적으로 자기 초월의 실존인 그리스도교 실존이 다른 실존 구조들을 완성하고 변혁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근거인 그리스도는 궁극성을 띠기 때문이다. 또 그는 [다원주의 시대의 그리스도]에서 창조적 변혁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보편적 현존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에만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 구조들 속에는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궁극적과 보편성을 띤 그리스도는 세 차원을 갖는다. 첫째는 창조적 변혁의 현재 역사인 로고스, 둘째는 창조적 변혁의 과거 역사인 예수, 끝으로 창조적 변혁의 미래 역사인 희망이다. 여기서 창조적 변혁인 로고스는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변혁하지만, 로고스 자체는 불변한다. 이 로고스의 유과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보편적으로 현존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존 캅은 말한다.

선불교와 많은 대화를 나눈 그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모두에서 그리스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미타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와 그리스도가 똑같이 궁극적이라 하더라도, 아미타에 대한 불교인의 경험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다르다는 점도 함께 말한다. 아미타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은 바로 그 역사 혹은 문화에 의해 제약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 캅은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특수한 문화성과 역사성을 띤 그리스도교, 불교를 구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새로운 상황, 특별히 다원주의의 상황 속에서 변혁될 필요가 있지만, 그리스도는 창조적 변혁 그 자체이기 때문에 변혁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 캅이 주장하는 상호 변혁은 개종을 의미하지 않고 더 나은 불교, 더 나은 그리스도교를 목표로 한다. 서로를 내면화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미래 통일을 지향한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존 캅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구체적이고 역사적 인물인 나자렛 예수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변혁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의 이미지인 그리스도는 변혁되지 않을

것이라고 존 캅은 말한다. 변혁되어야 할 것은 불교적 실존 구조일 뿐, 그리스도교적 실존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를 제외한 모든 구조들은 그리스도(그리스도교 신존 구조)에 의해 변혁될 것이지만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그리스도)는 창조적 변혁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변혁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신존 구조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실존 구조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창조적 변혁 과정일 뿐이라고 존 캅은 말한다. 그는 우주에 현존하는 실존 구조로 변혁되어야 할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의 파편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나 논지에 따라 존 캅은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의 궁극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다원 신학을 제안한다.

그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신 중심적 다원주의를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한다.

첫째, 그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에 속한 학자들이 제시하는 공통 기반들이 실제로 모든 전통들에 공통적인가 하는 점을 의문시한다. 존 캅은 이러한 주장이 비유신론적(非有神論的) 종교들, 특히 선불교와 같은 종교에는 맞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든 안 하든, 불교인들은 하느님을 모든 종교 전통 기반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인정할 수도 없다. 존 캅은 "참으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길은 공통 기반에 대한 물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설혹 모든 종교 전통들에 공통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공통 기반을 대화의 선행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각 전통의 특성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는'결과를 가져오며, 이로써 자기 전통에 대한 애정과 신뢰와 투신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통 기반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이 개별 전통의 독특한 내용들을 상당히 무디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셋째, 이러한 공통 기반에 대한 믿음은 실제로 대화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존 캅은 공통 기반을 강조하면 할수록 배움의 기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것이라고 예측한다. "변혁의 가장 좋은 기회는 차이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 캅의 다원 신학에서 공통 기반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존 캅에게 공통 기반은 대화의 선행 조건이기보다는 대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산물이다. 그러므로 공통 기반은 대화 과정의 마지막 종착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통 기반은 종교 전통들간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존 캅은 말한다. 즉, 다른 종교 전통과 깊은 만남을 가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공통 기반'과, 상호 변혁을 통해 다른 종교 전통의 진리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더 많이 '생산될 공통 기반'이 그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통 기반이 성격상 언제나 대화 상대자와 관련을 맺는다고 말한다. 유대교와 만나 '발견된' 공통 기반은 유대교와 관련을 맺는 것이고, 불교와 만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어떤 요소를 받아들여 '생산된' 공통 기반은 불교와 관련을 맺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발견된 공통 기반'이든 '생산된 공통 기반'이든 대화 상대자들간에 이루어진 공통 기반이 계속 확대 되는 한, 서로 점점 더 가까와지고 닮아갈 것이라고 존 캅은 전망한다. 즉 모든 종교가 '세계화'(globalize)의 여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존 캅은 신 중심적 다원주의가 아닌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충분히 종교 전통간의 대화와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종교간의 대화

"대화는 각각 다른 역사적 현상들을 각자의 언어와 각자의 전승 속에서, 각자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여 각 종교가 지닌 다른 점을 충분히 밝힌 후, 대화자들 사이에 공유되거나 더 가까와질 수 있는 길들이 있는지에 대해 물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통점을 먼저 찾고 그로부터 차이를 규명하기보다는 차이를 먼저 강조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들의 관계를 찾아가는 방법론을 취한다."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는 각 종교 전통의 독특한 차이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의 특성, 즉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통 기반이라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고 그는 강조한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모든 종교 전통에 중립적으로 고루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속에서 다른 종교 전통에 자신을 개방할 때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존 캅이 신 중심주의를 넘어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종교 전통들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차이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각 종교 전통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되살려 진리의 모습을 인식함으로써 각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전통 안에서 진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차이에서 대화를 이끌어 내어, 모든 종교 전통들 속에 있는 중요하고도 미묘한 차이들을 주의 깊게 듣고자 한다. 이로써 모든 대화 상대자들이 자신의 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고유한 진리 요소를 배워 자기 것으로 소화할 때, 훨씬 생동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 존 캅이 차이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공통 기반보다 더욱 강조하는 이유는, 대화를 더욱 결실 있고 생산적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종교 전통들의 공통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할 때, 대화 상대자들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기 것만 주장하다 끝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종교적 길들 사이에 주어진 동일성에 대한 주장은 서로로부터 배워야 하는 절박하고도 중요한 과제를 계속 차단하기 때문이다." 존 캅은 대화의 목적이 종교 전통들 사이의 유사성이나 공통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 전통속에 전혀 없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을 다른 종교 전통들을 통해 배우는 데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특수하고 우월한 점을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교가 지닌 배타적 주장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교 배타주의나 우월주의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에 특수한 것들을 분명하게 밝혀서 다른 전통들이 그리스도교 진리를 배우게 하라는 것이다.

공통점을 강조하는 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차이를 강조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로부터 종교간 대화를 시작하려는 존 캅은, 다른 전통과 만나는 단계를 다음의 네 가지로 도식화한다.

만남의 첫번째 단계이면서 가장 근본적인 만남의 이유는 자기 종교 전통의 위기에 대한 자각이다. 매순간 급속도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전혀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자신이 속한 종교 전통이 답하지 못할 때, 신앙인들은 이를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각 종교 전통의 내적 위기 의식이 개방의 모든 이유는 아닐지라도 배움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기 의식은 만남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충동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교 전통들로부터 듣고 배운 것을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 전통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종교 전통들의 독특한 면들, 즉 진리와 이를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배우려는 자세가 요청된다. 이렇게 하여 배운 것들 중에서 참된 진리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 때 다른 종교 전통이 자신의 종교가 갖지 못한 요소들을 가졌다고 하여 섣불리 그리로 개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화와 만남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존 캅은 지적한다.

세 번째 단계는 배움을 통한 '내가 속한 종교 전통의 자기 변혁'이다. 존 캅은 만남을 통한 자기 변혁이야말로 만남의 실제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을 통해 변혁된 그리스도교는 이전의 그리스도교와는 분명 다를 것이고, '더 나은 그리스도교'일 것이다. 자기 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종교 전통과 만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그리스도교, 더 나아지는 그리스도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제들에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로 변하는 것이 바로 종교 전통간 만남의 제일차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존 캅은 말한다.

종교 전통들간 만남의 네 번째 단계는 '대화 상대자의 자기 변혁'이다. 물론 이것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라기보다 대화의 부수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참된 대화는 대화 양편이 서로를 설득하는 노력에 있고 그리스도교의 자기 변혁과 함께 다른 종교 전통들의 변혁도 기대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종교 전통간의 대화를 존 캅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 적용시킨다. 그에 따르면 불교에 의해 변혁된 그리스도교는 아무리 많은 점에서 불교적인 요소들을 공유하게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과거와의 연속성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그리스도교로 남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에 의해 변혁된 불교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여전히 과거와의 연속성속에서 불교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 채 불교로서 남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화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화된 불교는 서로의 차이를 통하여 계속하여 서로를, 그리고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 문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살펴보았다. 다른 종교 전통과 만나 대화하고 또 이를 통한 변혁에도 자유로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움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즉, 자신의 특성을 대화의 중심 내용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행적, 그리고 그 신앙을 대화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존 캅의 주장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다. 먼저, 존 캅은 종교 전통간 만남의 궁극적 동기는 자기 전통의 위기 의식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이에 대한 강조가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 위기 의식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충분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존 캅은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의 궁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의 궁극성이 다른 종교 실존 구조의 궁극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는 기존의 신 중심적 다원주의가 가지지 못한 여러 강점을 지닌다. 첫번째 강점은 '신 중심적 다원주의'에 의해 약화되었던 그리스도교 전통의 특성을 다시 회복하여 대화의 전면에 내세우고,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강한 신뢰로부터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강하면 강할수록, 다른 종교 전통에 개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며, 만남도 그만큼 생산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존 캅의 다원주의는 '상호 이해'에서 '상호 변혁'으로 대화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변혁 과정은 종교 전통간 대화가 끊이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 전통들은 과정 중에 있다.

셋째, 존 캅은 각 종교 전통이 다른 종교 전통들과 계속 만남으로써 변혁된다고 이해하여, 한편으로는 '고립주의'니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 전통을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어느 종교 전통도 현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모든 종교 전통이 서로의 특성을 끊임없이 전하고 받아들일 때 '세계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이상에서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살펴보았다. 그의 신학이 약점과 강점을 지녔다는 것은, 세상의 어느 주장,어느 논리도 완벽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단, 필자는 그의 신학이 신 중심적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종교학적 접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고집한다는 점과, 각 종교 전통의 고유성과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아울러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제 목 : 현대신학(6)-존 힉의 신학



머리말

존 힉(John Hick, 1922- )은 영국 출신 미국 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로서, 이른바 '종교 다원주의 논쟁'을 낳게 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글에서는 다원적 종교 신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존 힉은 젊은 시절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던 전형적인 개신교 정통주의자였으나, 목사가 되고 철학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점차 생각이 바뀌어 갔다. 특히 외국 노동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 놓은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등의 다양한 종교 공동체들을 앵글로색슨의 가치관으로 평가하던 당시 그리스도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면서 이들도 인간에게 사랑과 정의를 요구하는 신적 실재(divine reality)를 향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배웠고, 인도, 스리랑카 등을 일 년여 동안 방문하면서 동양 종교의 심원함을 한껏 체험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한편에서는 점점 더 텅 비어 가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과연 이 다종교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고민했다.(이런 점에서 아직은 건재한 우리 나라 교회의 현실과 힉의 종교 신학적 출발점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 신학은 출발한다.

1. 종교론

흔히들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저마다의 독자적인 복음이나 교리 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들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다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어느 종교가 참된 종교일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종교이며 다른 종교들은 모두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불자는 불교를 최고의 종교로 보았고, 모슬렘 역시 그랬다. 힉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관을 갖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종교학자 스미스(Wifred Cantwell Smith)가 지적하고 있듯이, 무엇보다 종교라는 것을 교리, 경전, 의례, 제도 등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표현만으로 파악하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표현이 다양하다 보니 종교도 여럿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중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우월한, 혹은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에서는 절대성을 보았고, 남에게는 배타성을 띠었다. 그러나 힉에 의하면 그러한 외적 표현 자체보다는 그 표현을 낳게 한 근원적 실재, 다양한 문명 안에서 표혀되면서도 언제나 그러한 표현을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와 인간의 상호 작용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교란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주어진 문화적 맥락 속에서 상호 작용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교란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주어진 문화적 맥락 속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전개된 인간의 현상이므로 "역사적으로 추적될 수 있고, 지리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경험적 실재(an empirical entity)이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으로 불리는 모든 종교들은 역사·문화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광범위한 인간 문화사의 일부이다. 인간의 문화에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를 매겨 놓을 수 있겠는가? 힉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의 문명이 참된 문명이라거나 거짓된 문명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하나의 종교 역시 참되다거나 거짓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 유형, 인간 성격, 인간 사고가 다양하듯이 문화가 다양하며, 문화가 다양하듯이 종교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다양성은 문화의 다양성으로부터 나온 필연성이다. 물론 단순한 인간 상상의 투사물도 아니다. 종교는 '인간에 의해 체험된 실재'만이 아닌, '초월적 실재 자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종교는 역사적, 문화적 현상이되, 생동하는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현상인 것이다.

힉은 스미스의 종교론에 동의하면서 그것을 수용했듯이, 또 칸트에게서는 종교 인식론을 수용한다. 칸트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물 자체의 세계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현상 세계를 구별한다. 마찬가지로 힉도 초월적 실재 자채와 인간에 의해 체험된 것을 구분하면서, 이런 초월적 실재가 특수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인간의 감각을 통해 해석되고 표현된다고 본다. 그러한 표현들은 사회 생할에서도 도덕적 중요성을 지니고, 종교적으로는 신적 실재와 관련하여 인간 상황에 궁극적 의미를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힉에 의하면, 종교적 신앙이란 인간 역사 안에 나타난 신의 행위를 인식하는 자발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인식의 뿌리는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형이상학에 있지 않고,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가변적인 역사 안에 있다. 그래서 문화에 따라, 풍토에 따라 신의 인격성이나 비인격성과 같은 사상도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의 신적 현현이 인간의 인식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여러 측면에서 경험되고 해석된다. 사람은 주어진 맥락 안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혹은 '비인격적'으로 '경험'(experiencing as∼)하면서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응답들은 그 어느 것도 독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상보적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시공간적 제약 조건을 지니고 있으므로.

2. 종교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힉은 스미스의 종교론, 칸트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서 종교를 절대적이게하는 주체를 교회, 그리스도교, 그리스도로부터 '신'(God)으로 옮겨 놓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절대적이게 하는 것은 교회나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뿐이라는 것이다. 이 신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다. 이 궁극적 실재를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로,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로, 힌두교에서는 '라마'혹은 '크리슈나'로 부른다. 모든 종교는 이 궁극적 실재, 즉 '신'을 중심으로 돈다. 이러한 변화를 힉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종교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 아닌, 신 중심적으로 구성되고 전개되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하고 다른 종교들은 그 주위를 맴도는 주변적인 종교로 보았던 과거의 그리스도교 중심적 구원관은 과거 천문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 중심의 우주도(宇宙圖)가 관측 사실과 맞지 앉자 주전원(epycycles)이라는 일련의 보조 궤도를 첨부시켜 관측된 사실에 조화시키려고 애썹던 시도에 비교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처음에 이러한 주전원은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방식이 사람들 마음속에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힉은 이와 거의 같다 할 수 있는 상항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원리에 붙들려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식 신학에 적용한다. 즉,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고 다른 종교들은 그 주의를 맴도는 주변적인 종교로 보았던 과거 그리스도교 중심의 신학은 프톨레마이오스식 신학이라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중심으로 널리 유포된 종교 신학적 노력들 역시 아직도 프톨레마이오스식 신학과 코페르니쿠스적 신학의 양극 사이를 방황하는 움직음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신학에서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한은 보편적인 신앙과 그 보편적인 데서 나의 종교가 처한 위치에 대한 의식의 근본적인 변환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 하느님이 바로 우리는 물론 모든 인류가 받들고 그 주변을 선회하는 중심이 되신다는 생각으로의 전이를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각종 신앙이라는 우주의 중심은 그리스도나 어떤 종교가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쳐야 한다. 하느님이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신론과 구원론

그렇다면 힉은 이와 같은 우주의 중심, 즉 '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의 예배처에서 공통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 종교 전통에서든 "공통적으로 인격적 창조주, 세계의 주님,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살아 있는 도덕을 요구하는 분으로 간주되는, 보다 높은 실재에 마음을 열어 놓는다." 여러 종교에서 부르는 이 초월적인 실재들 갓(God), 아도나이, 알라, 크라슈나 등은 서로 다른 신들인가? 아니면 동일한 궁극적 존재에 이름만 다른 것인가? 힉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은 거부한다: 1).존재론적으로 여러 신들이 있다(다신론), 2)유대 - 그리스도교적 신만이 존재하며, 다른 이들은 인간의 상상(우상)을 헛되이 예배하고 있다(배타적 유일신론). 힉은 이러한 방안들에 맞서 인간의 경험과 이해 저편에서 자신의 무한하 깊이 속에 있는 신성에 대해 말한다. 이미 본 대로 초월적 실재 자체와 인간에 의해 체험된 것을 나누어 생각하면서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영, 하나의 신적 실재 혹은 하나의 절대자, 하나의 로고스가 존재하되, 역사적, 문화적, 혹은 심리학적 맥락에 따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계시적인 종교 경험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해 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실재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응답이라고 본다. 모든 신 표상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해석 행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신 표상도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힉은 이러한 제한 조건을 염두에 두고서 초월적인 실재에 '하느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물론 하느님(신) 보다는 초월자, 궁극자, 궁극적 실재, 영원한 일자 등의 중립적 용어에 우선 순의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고 독자 역시 그리스도인임을 염두에 둔 까닭에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 적용되는 일반 규정으로 쓰고 있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다른 종교를 그리스도교적 신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신 역시 궁극적 실재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므로. 힉은 신 중심주의의 중립적 표현인 '실재 중심주의'조차도 여전히 유신론적 신을 연상시켜 준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실재 중심주의는 반드시 구원론적 실행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며 '구원'을 강조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법률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제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실재 중심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하면 신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 완성의 길이다. 예수 자신이 그렇게 살았고 실제로 보여 준 이 새롭고도 보다 나은 삶에 매료되어, 이기적 자아를 극복하고 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해 자신의 온 실존을 열어 놓는 것이다. 힉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구원을 향한 길들이며 충만한 인간성을 향한 길들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종교는 자아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으로의 전이를 핵심으로 한다. 힉은 이것을 종교에 자아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으로의 정리를 핵심으로 한다. 힉은 이것을 종교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구원론적 실행 능력, '인간 실존의 자기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으로의 전이'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그 종교적 규범성이 획득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힉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 실존의 실질적인 질적 차원에서 생각하면서, 종교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4. 그리스도론

힉은 이런 맥락에서 종교간 대화의 난제이자 걸림돌로 작용해 온 육화 사상과 거기서 비롯되는 전통적 그리스도론도 재검토한다.

힉에 따르면, 니체아와 칼체돈에서 결정된 예수의 신성 교리('동일 본질', '참된 하느님, 참된 인간'등등)는 예수에 대한 유일한 해석일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로 간주될 수 없다. 이 교리는 실체와 존재의 범주로 채색된 형이상학적 이해의 산물이며, 역동적 범례를 따르는 현대의 요구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는 일체의 교리화 작업 이전의 역사적 예수 자신에까지 파고들어가 거기서부터 오늘날 어울리는 예수-하느님-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그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다.

힉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신이 현존과 범위 안에서 일생을 산, 완전한 인간이었다. 예수는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완전히 자유로웠고, 동시에 이웃의 필요에도 완전하게 응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당하는 주님의 종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살았다.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내쫓되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행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신의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언젠가는 보편적으로 실현될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이런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믿음 안에서 살 것과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의식하고 보았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믿음 안에서 살 것과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의식하면서 살라고 가르쳤다. 십자가에 달리 때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라고 했으니, 이것은 극한 상황에도 예수의 마음이 신을 향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마디로 예수의 전생애는 신 의식으로 채색되었고, 또 그에 점령당했다. 그에게 신은 너무도 완전한 실재였으므로, 신 의식을 떼어놓고 그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힉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조차도 그가 실천했던 전적인 비이기적, 이타적 삶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그의 삶과 불리시킨 채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유의미성을갖는다고 보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