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발길에 채여서 총회장까지…생태본부 강화하고 여성 교역자 처우 개선하고 싶어"
[인터뷰] 한국기독교장로회 김은경 총회장 "성소수자 이슈 더 깊이 논의해야"
기자명 이은혜 기자
승인 2021.10.10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국내 주요 교단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회장을 선출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던 교단 총회장 자리에 여성이 오른 것이다. 물론 뿌리를 알 수 없는 군소 교단에서는 여성 총회장을 종종 목격할 수 있지만, 직영 신학대학교를 운영하는 주요 교단 중 여성 총회장을 배출한 건 기장이 처음이다.
일반 언론에서도 "개신교 최초"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김은경 목사(익산중앙교회)의 총회장 취임 소식을 보도했다. 여성이 대통령도 되고, 국회의원도 하고, 대학 총장도 하는 시대에 교인 20만 명 조금 넘는 작은 교단에서 여성 리더를 배출한 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장뿐만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류영모 총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이철 감독회장)도 여성 목사가 있지만, 정작 여성은 총회장은커녕 총회 임원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익산중앙교회에서 10월 8일 김은경 총회장을 만났다. 논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아담한 교회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은경 총회장의 이력을 보면 지금까지 봐 온 교단 총회장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교계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젊은 시절 광주·전남권 여성들이 만든 최초 여성 민주 단체 '송백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결혼 후에는 전북성폭력예방치료센터 부설 성폭력상담소 소장, 전북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전북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전북겨레하나 이사장,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장, 익산중앙교회 담임목사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었다. 여기에 '한국기독교장로회 106회 총회장'이 추가된 셈이다.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듯 김은경 총회장의 소명은 '목사' 직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석헌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교류하면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삶을 보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삶을 고민하다가 2000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그가 지금도 '짝꿍'이라 부르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담임 목회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김 총회장은 "돌이켜 보면 '할아버지' 말씀처럼 '하나님 발길에 채여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에서 지내는 김은경 총회장은 취임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을 오가고 있다. 서울에서도 각종 회의와 언론 인터뷰 등으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김 총회장이 살아 온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응했다. 인터뷰는 10월 8일 익산중앙교회에서 진행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듣다 보니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김 총회장은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동안의 삶과 신앙을 고백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과 코로나 이후 힘들어진 작은 교회 목회자, 혐오와 차별로 스스로 삶을 등진 이들을 언급할 때는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함석헌 '할아버지'에게 배운 세상 보는 눈
민주화 운동하다 자연스럽게 한신대 진학
군부독재 저항하다 남영동서 조사받기도
대공분실서 만난 '임마누엘' 하나님
김은경 총회장은 광주 전남여고 재학 시절부터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즐겨 읽었다. 원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사회 비평지를 읽으며 역사와 사회, 사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광주양림교회에 다녔던 김 총회장은 "나는 교리적인 것보다 예수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했는지가 더 눈에 들어왔다. 개신교 신앙이 사람에 대한 이해의 층을 깊게 해 주고, 다양한 삶을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키워 주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을 보류하고 지역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광주·전남권 여성들이 조직한 첫 여성 민주 단체 '송백회'를 동지들과 창립했고 서기로 활동했다. 1970년대 후반, 독재 정권 치하에서는 반정부 강연을 기획하면 사용하려던 장소가 폐쇄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광주한빛교회 장로였던 조아라 광주YWCA 회장의 도움으로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열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은 김 총회장을 손녀처럼 아꼈고, 김 총회장 역시 그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한신대에 가게 된 것도 함석헌 선생의 영향이었다. 당시 김 총회장은 원효로4가 70번지(그는 지금도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 기자 주)에 있던 <씨알의 소리>사무실을 드나들며 그곳에 있는 한신대생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슈바이처처럼 전인적 봉사자를 꿈꾸며 의대 진학을 희망했던 김은경 총회장에게 함석헌 선생은 "이제 그만 한국신학대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1978년 한신대에 입학한 그는 서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광주를 수시로 오가며 청년운동을 이어 갔다. 워낙 열심이다 보니 그와 함께한 광주 사람 중에는 김은경 총회장을 전남대학교 출신으로 오해는 이도 있었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역시 그때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윤한봉 씨는 '5·18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져 있다. 윤 씨는 김은경 총회장의 도움을 받아 1981년 4월 경남 마산에서 미국으로 밀항했다. 김 총회장은 윤 씨를 세상과 이어 주는 마지막 끈이었다.
김은경 총회장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임마누엘' 하나님을 이야기하며 손에 낀 반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이듬해 군산에서 발생한 오성회 사건과 윤한봉 밀항 사건이 엮이면서 김은경 총회장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김 총회장은 "남들이 당한 고문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은 고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말을 잘못해서 혹시라도 우리를 도왔던 이들이 발각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시달렸다. 그때 만난 게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김은경 총회장이 손에 낀 반지를 들어 보였다. 그가 한신대를 졸업하면서 받은 반지인데 안쪽에 '임마누엘'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는 "대공분실에서 이 반지를 만지며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름간 각종 조사를 받으면서도 순간순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결혼을 했고, 이후 목회 현장에 발을 들였다. 남편 목회지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전북 익산에 정착했다. 하지만 처음 목회하던 교회에서 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 총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우리 '짝꿍' 그때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도 교단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그게 상담을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우리가 목회하는 지역을 알고, 사람을 미워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개척한 지금의 익산중앙교회에서 상담 전공을 살려 '청소년 전화 상담실'도 운영했다. 그게 인연이 돼 전북성폭력예방치유센터 부설 성폭력상담소 소장도 맡았다. 소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김 총회장에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설득했다. 결국 김 총회장은 2000년 6월 15일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던 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남편 권유로 안수를 받긴 했지만 담임 목회를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 떠난 남편
실존에 대한 고민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를 붙잡아 준 교인과 가족들
교인들 전폭적 지지·신뢰 속에 꽃피운
성매매 피해 여성, 결혼 이주 여성 사역
2001년, 평생 동지라 생각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달리했다. 이 일은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김은경 총회장은 "5·18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 광주에 내려갔는데, 금남로에 떨어진 수많은 핏자국 위로 흙들이 덮여 있었다. 남편도 그렇고, 어떻게 이렇게 건강한 존재들이 눈앞에서 한순간에 스러지는지… 실존에 대한 물음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아직 학생인 두 자녀를 데리고 어떻게 삶을 꾸려야 할지 고민하던 중 교인들에게 연락이 왔다. 김은경 총회장은 "그때 우리 교인들이 회의한다고 모여 있었는데, '목사님, 상담소 내려놓으시고 교회 와서 우리와 함께하셔야 한다'고 하더라. 내가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인게 그때 교인들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나에게도 남편 애도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선배 목사들이 '담임목사가 죽었는데 어떤 교회에서 사모에게 애도할 시간을 몇 개월이나 주느냐'며 혀를 찼다"고 웃으며 말했다.
기장 68회 총회장을 역임한 시아버지 송상규 목사에 이어 며느리가 총회장을 역임한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기장 68회 총회장을 역임한 시아버지 송상규 목사에게 미래에 대한 조언을 구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더니 "너는 이미 평범하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익산을 떠나고 싶다던 아이들도 "엄마가 이곳에 남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 줬다. "다른 곳에 가서 당장 눈앞의 환경을 바꾼다 해도 떠난 남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내 마음속 괴로움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현실을 마주하고 헤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고 김 총회장은 말했다.
그때부터는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이전부터 소외받고 차별받는 이들에 대한 선교를 꿈꿔 왔는데 그동안 해 온 여성 인권 운동에 더 힘을 쏟게 됐다. 처음에는 성매매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를 세웠고, 나중에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해 갈 곳이 없어진 결혼 이주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다. 전부 교인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교인들은 외부에서 난 자를 우리 가운데 난 자처럼 대하고, 너희가 나그네 됐을 때를 기억하라는 성경 말씀을 익히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목회자가 어떨 때 보면 정말 외롭고 힘들다. 하지만 우리 교인들은 개척할 때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로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 준다. 그동안의 사역이 가능했던 건 모두 교회 덕분이다."
서로의 신뢰 속에 교회는 작지만 내실 있게 성장했다. 지금은 장년 70여 명, 교회학교 50여 명이 모여 알콩달콩 재밌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각 구성원이 맡은 분량대로 충성하면서 "교인들도 목사도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김은경 총회장은 말했다.
김은경 총회장은 익산중앙교회에서 꼬박 20년 목회했다. 활발한 여성 인권 운동은 교회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행복한 목회'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무슨 이유로 총회장까지 생각하게 된 것일까. 2015년경, 네팔 지진 피해 복구 지원을 위해 네팔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가 속한 익산노회에서 네팔로 선교사를 파송했기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선배 목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기장도 여성 총회장 나올 때가 됐는데 여기 준비된 총회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김 총회장은 손사래를 쳤다. 교회가 큰 것도 아니고, 돈 많은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라며 '세속적' 이유를 줄줄이 댔다.
"그렇게 말하고는 후회했다. 이주 여성·아동들에게는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나는 교단과 교회 안의 통념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동안 하나님이 해 오신 일들을 얕잡아 보는 것도 같았고, '베들레헴아 네 고을이 결코 작지 않다'는 말씀도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익산중앙교회가 결코 작지 않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안에 소망을 불어넣고, 이것이 결국 통념을 넘어서는 힘이 되었다.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총회장까지 오게 됐다. 하지만 역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후 위기, 여성 사역자 차별 문제에 관심
"성소수자 관련 통일된 교단 입장 없어,
기독교가 혐오 자리에 서는 것 안타까워"
기장은 9월 28~29일 106회 총회를 진행하면서 주요 헌의안 대부분을 심의했다. 덕분에 실행위원회나 임원회에 위임한 주요 안건은 지난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김은경 총회장은 총회 구조 개혁, 한신대 이사회 구성 등 구성원들의 관심사가 모이는 부분도 잘 지켜봐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생태 및 여성 관련 이슈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기장은 이번 총회를 마치며 '기후 위기 극복과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한 한국기독교장로회 탄소 중립 선언문'을 채택했다. 교단의 온 교회가 탄소 중립 실천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은경 총회장은 기후 위기 상황과 관련해 기장 생태공동체운동본부가 좀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또 하나 눈여겨보는 부분은 여성 교역자의 임신·출산에 관한 유급휴가 제도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출산을 축하해 왔다. 동시에 여성 사역자의 임신·출산에 있어서는 부정적이었다. 김 총회장은 "출산이 정말 귀하다고 여기면 과정도 존중해야 한다. 여성 교역자가 임신했을 때 유급휴가 제도를 실시하면 좋겠다는 게 강력한 소망이다. 임신한 사람이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뽑지 않으면서 출산을 축하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성 사역자가 출산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다고 느끼게 하면 안 된다. 여성 사역자가 경력 단절을 겪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좀 더 논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은경 총회장은 성소수자 이슈와 관련해서는 지속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사진은 내용과 상관 없음) 뉴스앤조이 이은혜
한국교회는 반동성애 기류가 우세하다. 주요 교단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 연합하기도 한다. 기장 내에서도 일부 목회자들은 외부 반동성애 세력과 연대해 교단을 압박하는 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동성애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은경 총회장은 일단 성소수자 이슈와 관련해서는 지속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장이 입장을 표명해야 할 부분이 맞긴 하지만, 아직 교단 이름으로 입장을 발표할 만큼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다. 사역 현장에서도 가끔 이주 여성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분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낯선 문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 동성애, 성적 지향 역시 우리가 잘 모르는 분야다. 그렇기 때문에 격렬하더라도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다만, 우리 교단의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고 씨름하면서 성서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동료·후배 목회자는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소수자들 뉴스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단순히 불쌍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가슴이 아팠다.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실존의 이유를 놓고 혐오·차별해서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자리에 기독교가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주제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면 어떻게 하실지 묵상하게 된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를 생명과 사랑, 그리스도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은경 총회장은 기장이 '데모하는 교단'으로만 오해받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교단에서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성육신한 예수를 발견했다. 기장이 앞으로는 이러한 예수의 역사성이라는 날개에 더해 복음의 순수성이라는 또 다른 날개 즉 장공 김재준 목사와 만우 송창근 박사라는 두 기둥으로 굳건히 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는 교단이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여성 총회장' 외에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김은경 총회장은 먼저 '공감하는 지도자'를 꼽았다. "공생애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곳곳에서 약자들을 만나실 때의 태도도 그렇고 하나님도 사실상 공감이시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었다'고 하시지 않나. 코로나19로 사회적 약자들이 더 어려워졌다. 목회자들도 작은 교회 특히 미자립교회가 더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일단 많이 듣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녀리(문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전라도 사투리로 첫 열매를 '무녀리'라고도 한다. 문을 여는 것 혹은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첫 열매는 보통 못생기고 자잘하다. 그럼에도 첫 열매가 주는 기쁨이 있다. 첫 여성 총회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만나는 분들이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말씀하신다. 부족한 총회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내가 무녀리여서 그렇구나 생각한다. 일단 나는 문을 열었고, 회기를 잘 마친 후에는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뒤에 올라오는 후배들이 많은 사람과 더불어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늘 그 자리에 있고 싶다."
==
한겨레 신문
등록 :2021-09-30
정대하 기자 사진
정대하 기자
[짬] 전북 익산중앙교회 김은경 목사
김은경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장이 지난 9월29일 제106회 총회에서 당선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기장 제공
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 여성 총회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개신교 전래 136년, 장로회 선교 106년 만이다.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은경(66) 익산중앙교회 목사는 지난 28·29일 충북 청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제10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1983년 기장 교단 총회장을 지낸 송상규 목사는 김 총회장의 시아버지다. “장로회 교단에서 여성 총회장 당선도 처음이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2대 총회장 당선도 처음”이다.
김 총회장은 30일 전화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선한 역사를 이루는 데 빛의 도구로 쓰이겠다”고 말했다.
지난 29일 제106회 기장 총회에서 ‘당선’
개신교 전래 136년·장로회 106년만
‘시아버지·며느리 2대 총회장’ 기록도
부친과 교유 함석헌 영향 ‘한신대’ 진학
‘5·18 수배자’ 윤한봉 밀항 도와 ‘고초’
‘임을 위한 행진곡’ 첫 녹음 때 노래도
1977년 무렵 경기도 다산 정약용 생가 부근 두물머리에서 ‘스승’ 고 함석헌(오른쪽) 선생과 함께한 김은경(왼쪽) 총회장. 그무렵 함 선생의 권유로 그는 한신대 진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은경 총회장 제공
김 총회장이 목회자가 된 것은 사상가 고 함석헌(1901~89) 선생의 영향이 컸다. 광주 양림교회를 다녔던 청소년기 때부터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함 선생은 그를 손녀처럼 아꼈다. 김 총회장은 “정말 소년의 눈높이로 내려오셔서 친구처럼, 손자처럼 저를 가르쳐주셨던 스승이자 할아버지셨다”고 회고했다.
광주 전남여고 재학 시절부터 그는 <씨알의 소리> 등을 읽으며 역사와 교회 등 사회적인 문제로 고민했다. “사회운동하는데 대학이 무슨 필요야?”라고 생각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광주여성기독교청년회(YWCA) 특별사업부 간사로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독교 청년운동을 했다.
김 총회장은 1977년 무렵 ‘평화모임’을 꾸리고 함 선생을 광주로 모셔서 공부했다. 함 선생은 고 장기려 박사가 있던 부산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가던 길에 광주에 들러 청년들을 만났다. “실존과 역사와 신앙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하나님과 함께 진보를 이룩하는 게 물과 기름처럼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경이로운 가르침이 가슴에 꽉 박혔다. 그러던 그에게 함 선생은 “호걸 노릇하지 말고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하라”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는 “지금도 어려운 고민이 생기면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시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가곤 한다”고 말했다.
1981년 4월 김은경 총회장의 배웅을 받고 미국행 밀항선에 올랐던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12년 뒤인 1993년 5월19일 귀국해 기자회견을 했다. 창비 제공
김 총회장은 1980년 5월 서울에서 한신대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송백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광주 재야·청년 운동권 인사들과 연을 맺어온 그가 5·18을 비껴갈 순 없었다. ‘5·18 최후의 수배자’ 고 윤한봉 선생의 1981년 4월 미국 밀항 때 여동생으로 위장하고 마산까지 동행한 것도 그였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한봉 오빠를 만났는데 햇볕을 못봐서인지 꼭 결핵 환자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빠는 마산 병원 가는 결핵 환자고 나는 여동생으로 하자’고 했어요.” 그는 이듬해 윤한봉의 미국 밀항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작에도 참여했다. 널리 알려진대로, 1982년 5·18 시민군 대변인 고 윤상원과 들불야학 노동자 고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들어있는 곡이다. 그해 2월 소설가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녹음했던 이 노래를 대학생 오정묵이 선창한 뒤 그와 임희숙씨가 함께 불렀다. 그는 그해 4월19일 한신대 개교기념일 때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노래극을 그대로 재현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세상 밖에서 불렸던 첫 공연이었다.
1982년 2월2일 광주 황석영 작가 집에서 녹음한 ‘임을 위한 행진곡’ 첫 테이프. 한신대생이던 김은경 총회장이 오정묵·임희숙씨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김 총회장의 삶은 그뒤 오월에서 ‘예수’로 이어졌다.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 그는 두 가지를 고백했다. “무엇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연좌제로 아픔 당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면 이들의 우산이 되겠다고 다짐했죠.” 또 하나는 “열악한 상황에 놓인 여성과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목사 안수를 받던 2000년 6월15일은 남북 정상이 분단 이래 처음 만던 날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잠들어 있던 소명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통일운동을 줄곧 해 온 그는 현재 전북겨레하나 이사장도 맡고 있다. “1987년생 아들을 군대에 보내던 날 훈련소 운동장에 갔더니 많은 사람이 울고 있더라고요. 왜 국가가 개인들에게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새삼 질문을 하게 됐죠.” 이후 그는 기장 교단에서 월요 기도회를 통해 끊임없이 통일과 평화의 마음을 모으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2007년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당한 국제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해 지역에선 처음으로 쉼터를 만드는 등 여성권익운동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해 장로교 총회에서 최초 여성 부총회장에 당선됐던 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했다. 또 최근 총회에서도 ‘성소수자 목회 연구위원회’ 존속안과 ‘2022년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회 개최와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방안’ 등의 사회적 현안을 담은 안건을 통과시켰다.
김 총회장은 “늘 어려울 때마다 빛이 됐던 한국 교회의 역사를 회복하도록 교단과 함께 가겠다”고 다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013453.html?fbclid=IwAR0u_aYxzAQXL-xM82XyK1JrvfvIc-6HV6q63hG8MKahzdK0j2X5cTkUZgs#csidx47bbd050a1b1355bde3a09882917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