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6

박길수 | Facebook ) 동학-천도교를 공부하고, 살아가는 데서 경계해야 할 태도는

박길수 |

박길수
38 m  · 
[개벽통문-171] (1) 동학-천도교를 공부하고, 살아가는 데서 경계해야 할 태도는 동학-천도교의 '유일한 실체적 진리'가 어딘가, 혹은 어느 지점에 '실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찾아내거나, 그것에 '간극[隙]' 없이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부터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는 시시비비가 발생한다.  그것은 동학-천도교를 사유화하는 것이며, 박제화하는 것이고, 결국은 '생명'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살아 있는 물고기를 죽여서 해부하며 생명의 원천/원리/원형을 찾겠다고 나서는 격이다.
(2)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동학에 대한 어떠한 이해 방식이나 어떠한 서술도 "모두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발화' 자체가 그 '발화의 기표' 자체만으로 옳고 그름이 결정되고, 그 결정이 '다른 반박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는 유효'한 식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동학-천도교의 사고 방식[뿐만 아니라, 사실은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세상에 어떤 문제에 대하여 '단 하나의 유일한 옳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똑 같은 말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하느냐에 따라서 그 말은 '참'일 수도 있고, '사(似/詐/邪)'일 수도 있다. 
(3) 도올은 '동학'의 '동'은 '서쪽'에 대비한 '동'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동학을 '서학에 반대하는 학'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기표상'으로 '도올의 말'은 '옳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이미 오래전에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동'은 '서에 대비한/반대한' '동'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는 점을 누락한 채 말하는 도올 선생의 방식까지를 관조한다면, 도올 선생의 말은 '옳음' 이상의 '잘못됨'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동학-천도교는 '유일무이 / 무오류'한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가 여정의 끝에 있다기보다는 "진리를 향하는 태도"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 삶, 살아감, 살림, 모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물론 '진리'를 탐색하고, 궁구하고, 심정(心定)하는 부문도 포함이 되지만, 그것이 동학-천도교의 유일한 목적도 아니고, 그것이 동학-천도교의 최상-지고의 공부/실행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5) 동학-천도교를 공부하고-'동학하는' 바른 태도, 마음가짐을 해월 선생의 말씀을 빌려서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향벽설위(向壁設位)의 태도에서 벗어나 향아설위(向我設位)의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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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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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통문-0170] 1. 개벽학스튜디오가 다시 <신인철학> 강독에 들어갔다. 내가 처음 <신인철학> 강독을 한 것은 1987년, 지금은 교수가 되신 2년 후배 철학도와, 지금은 교사가 되신 1년 후배 국문학도와 함께... 겨우 몇 차례 만나고, 모임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이후로도 최근까지 <신인철학> 공독(共讀) 모임은 몇 차례나 꾸려졌다. 그 사이 나는 <개벽신문>에 신인철학 '현대어역'을 연재하기도 했다. 
2. <신인철학>은 교단 내에서, "천도교 교리와 신앙을 너무 '과학적' '철학적'으로 해설하고 무엇보다 '한울'님에 대한 이회(理會)에 치우쳐 '신앙성'을 탈각시켰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해방 이후에는 야뢰 자신도 <신인철학>의 섣부름에 대해 반성하고, <수운심법강의>를 집필하였다고도 한다. 그렇게 구전되어 오는 '평가'에 더하여, 그 '읽기 어려움'까지 합해져서, 단언컨대, 현재 천도교인 중에 <신인철학>을 완독한 사람이 천도교인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을 꼽지 못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3. 최근 <신인철학>을 읽으며, 이 책이야말로, '오래 전의 미래' '미리 온 현재'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 책은 말하자면, 100년 전에 씌어진 "빅히스토리"이다. 정확하게 "우주의 발생 - 은하계.태양계.지구의 발생 - 생명의 탄생 - 식.동물계의 생성 - 인간의 탄생"이라는 경로를 따라, 그것을 지기일원론과 창조적 진화[=조화]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양자물리학" 적인 관념까지 더해져서 서술되고 있다.
4. 최근 "토마스 베리의 통합생태학"에 대한 기본적인 서술을 읽고 보니, <신인철학>을 관통하는 논리는 말하자면 "통합생태영성학"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도 있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인류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을 겸비한 철학이란 뜻이다. 
5. 최근 도올 선생은 야뢰 이돈화가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흥비가 구절로부터 "한울"이라고 하는, 오늘날 천도교에서 통용되는 '신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긴 논변이 필요하기에 여기서 상세히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최종 결론이 도올 선생의 논리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거쳐야 할 관문이 적지 않다. 그리고 도올 선생의 논리는 결국 '국외자'의 논리를 넘지 못한다. 국외자 =객관자라는 도식도 가능하겠으나,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찰이 요구된다. 
6. 무엇보다, '야뢰 이돈화'라고 하는 우리 근대사의 최초의, 자생적, 동학적 철학자에 대한 평가는 '한울'과 관련된 이야기로 퉁치고 넘어가며, 제껴 버려도 좋은 인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7. 이번 <신인철학> 강독은 원문 강독 위주가 아니라, 주해본을 발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 1차 모임에서, 흥미진진한 "함께 읽기와 주해본 발간의 경로"에 관한 토의와 결정이 이루어졌다. 
8. 동학+천도교 시대... "오직 동경대전"만이 아니라, 지난 160년간의 동학-천도교 역사 전체와 더불어 동학을 읽고, 동학을 공부하고, 동학을 하며, 동학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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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치
네 박 선생님
 · Reply · 54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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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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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통문-169] 어제는 "개벽라키비움-개벽강독회" 22회차 모임을 진행하였습니다. <개벽 제21호(1922.3.1)>를 읽었습니다. 저는 18-22호까지의 "권두언+사고(社告)+편집후기" 부분을 집중 발제하였습니다. 그중 22호(4월호)의 권두언 내용에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그 1단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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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현상 [惡現狀]  대체 어떻게 되려는 셈인가, 현재의 우리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없지 않아 있도다. 젊은이는 늙은이를 가리켜 “부패한 늙은이[老朽], 고루한 무리”라 하여 더불어 대하기를 싫어하고, 늙은이는 젊은이를 깎아 내리기를, “경박[浮薄]하고, 제멋대로[無範]인 무리”라고 하여 같이 논의하고자 하지 아니하며, 여자는 남자를 비판하되 “말은 그럴듯하되[厚言], 실천은 뒤따르지 못하는[薄行] 사람”이라 하여 그의 신뢰 부족을 꾸짖으며 욕하고 미워하며, 남자는 여자를 깎아 내리기를 “화려함을 쫓고[浮華], 생각머리 없는[無謀]의 사람”이라 하여 그와 함께할 수 없다고 질책하며, 가난하지만 유식한[無産有識] 사람은 부자이지만 무식한[有産無識] 사람을 가리켜 “부(富)의 횡령자(橫領者)”라 하여 그의 앞길[前途]을 저주하고, 유산무식(有産無識)자는 무산유식(無産有識)자 깎아 내리기를 조폭(粗暴: 거칠고 폭력적임), 야비(野卑)한 무리라 하여 그의 행동을 냉소하며, 아직 사회적 기반[地盤]을 얻지 못한 사람은 일찍이 기반을 쌓아 얻은 사람을 가리켜 “과도(過渡)의 시대가 낳아 놓은 일종의 괴물[傀類]일 뿐”이라고 하여 그가 말하는 전부를 부인하고자 하며, 일찍이 기반을 쌓아 얻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되, “시대 사조의 중독자(中毒者), 시기심(猜忌心)의 소유자”라 하여 그가 말하는 것을 불허(不許)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현상은 고용주[雇主]와 고용인[雇人], 학생과 사회 사이에도 있고, 나아가서는 한 단체 내, 한 가정의 내에도 있으며. 그 결과는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며 서로 증오하여, 자기 살가죽[自皮]을 스스로 벗기지[自剝] 아니하면 말지 아니 할 기세[=죽어도 타협하지 않음: 역자주]를 보이며 있나니, 우리가 하는 말을 한갓 추상(抽像)의 관찰이라 생각하거든 한번 각 신문지의 제3면[=사회면: 역자주]을 주시하라. 우리는 이를 칭하여 ‘악현상(惡現像)’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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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꼰대론"과 "무책임한 청춘" "남성혐오와 여성혐오" "유산자와 무산자" "지식인과 일반인" "기득권자(586?)과 청년층(2030)" 등의 갈등 현상이 이미 100년 전에도 보고(報告)되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세대간, 남녀간, 유-무산자간, 지식-민중 간 갈등은 시대와 장소(국가사회)를 넘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갈등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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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관점을 달리해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사회적 과제'는 100년 전과 비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해 '사회구조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소위 말하는 '근대 시기'의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19세기 이래 한국 사회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어 서구로부터 밀려 오는 '근대문명'을 어떻게 수용하거나 대응할지를 두고 대립하던 구조적 흐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근 "개벽파"가 다시 목소리를 내면서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의 새로운 길 찾기, 되찾기, 놓기를 주장하는 것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개화파' '수구파(척사파)' '개벽파'의 구도에서 보면, 현재 한국 사회는 전 세계가 직면한 '기후위기' '생명위기'의 상황의 최첨단에 서서 우리 사회는 물론 우리 시대[세계]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최소) 1백년 묵은 과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첨예하게 드러나는바 - 그에 대응하여 그 해결을 위한 기회 역시 그만큼의 크기로 분명하게 주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개벽파"의 운동[공부와 발언과 활동]을 좀더 깊이, 넓게, 빨리, 높이 해야 할 필요성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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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생각점은, 현재의 (40)5060세대와 2030세대의 갈등은 이 시대에 유독 특별나게 생겨난 갈등이 아니라는 점을 (40)5060세대와 2030세대 모두가 다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어른들은 40세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2030세대에게 무조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말하고, 어떤 어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떼는~'"이라는 논리를 고수하며, 오히려 지금의 2030세대가 더 많은 사회적인 혜택의 기반 위에 서 있음에도 '징징대기'만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00년 전의 저 글은 그 두 양 극단 모두가 오류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남자[여성혐오]와 여자[남성 혐오] 사이의 상호 비판(비난)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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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1단에 이어지는 제2단에서는 이러한 상호 갈등이 오히려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적(敵)에게 향하지 못하는 분노, 스트레스를 대신해서 풀어 내는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를 오늘의 현실로 가져와 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비등하는 온갖 종류의 갈등들은 그 양상과 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의 '비/반 생명성' '극단적인 경쟁' 등등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의심을 해 보게 됩니다. 각각의 갈등(세대, 남녀, 유-무 등등)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보면, 의심의 여지 없는 구체적인 사안들이 있어서, 시대적-환경적 조건과 별개로 각각의 비판과 비난이 모두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이면에 더 근본적인 갈등 유발 구조가 놓여 있고, '현상적인 갈등의 원인'들은 그 근본적인 갈등 유발 구조-원인은 은폐하고, 그 근본적인 구조-원인으로부터 조장된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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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입니다. 적공(積功)만이 아니라 적덕(積德)을 아우르는 공부입니다. [사진은, 어제 아침, 지구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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