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1

알라딘: 날마다 한 생각 마하트마 간디 (지은이),함석헌,진영상 (옮긴이)

알라딘: 날마다 한 생각


날마다 한 생각  
마하트마 간디 (지은이),함석헌,진영상 (옮긴이)삼인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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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256쪽

책소개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운 위대한 영혼 간디가 제자 아난드 힝고라니에게 매일 한 생각씩 2년여 동안(1944년 11월 20일 ~ 1946년 10월 10일) 보낸 말씀을 힝고라니가 정리하여 엮은 것을 진영상과 함석헌이 완역한 책이다.

목차
1. 마음을 씻는 생각 / 함석헌
2. 책을 엮으면서 / 아난드 힝고라니
3. 생각 1 (1944.1.1~12.31)
4. 생각 2 (1945.1.1~12.31)
5. 생각 3 (1946.1.1~10.10)
6. 발문 : 왜 간디인가 / 양화규

책속에서

친구가 나와 정신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만큼이나 그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1945.9.18)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화내지 앟는 사람만이 분노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1945.9.19)
마음속에는 분노가 차 있는데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분노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침착하게 분노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뽑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정복이다.(1945.9.20.)
친구가 나와 정신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만큼이나 그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1945.9.18)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화내지 앟는 사람만이 분노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1945.9.19)
마음속에는 분노가 차 있는데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분노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침착하게 분노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뽑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정복이다. (1945.9.20.)
친구가 나와 정신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만큼이나 그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1945.9.18)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화내지 앟는 사람만이 분노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1945.9.19)
마음속에는 분노가 차 있는데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분노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침착하게 분노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뽑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정복이다. (1945.9.20.)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화내지 앟는 사람만이 분노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194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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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 책은 간디가 일생을 통해 발견하고 확인한 진리들의 요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진주 같은 삶의 원리들이 수없이 많이 들어 있다. 물론 요즘 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금욕주의적인 부분들이 그렇다. 하지만 간디가 평생을 통해서 실천한 진리 파악의 노력을 하루 아침에 이해하려 하거나 쉽게 비판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구절이라도 부여잡고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해 봄이 좋을 것이다. 한 인간이 걸어갔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 길을 한번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 양희규 (철학 박사·간디학교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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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씻는 생각
 
 
말씀이 있기를 이렇다. “맨 처음에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하나님이 그 생각이었다. 그이가 맨 처음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이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이 아니고는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어진 것이 그이 안에서 생명이었고,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의 빛이었다.” (로고스를 이렇게 생각이라고 하면 알기가 쉽지 않을까? 노자의 도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무한하다.
그러나 사람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하자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孔子) 가운데[中]를 말했고 고르게 함[和]을 말했다. 가운데란 여기나 저기가 아니다. 여기면서 저기요 저기면서 여기인 곳이다. 고르게 함이란 함이나 아니함이 아 니라, 하면서 아니하고 아니하면서 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노자가 빔[虚]을 말했고 됨[化]을 말했다. 빔이란 있음이나 없음이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음이다. 됨이란 달라짐이나 그대로 있음이 아니다. 달라지면서 그대 로 있고 그대로 있으면서 달라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새로 남을 보여주었다. 십자가란 죽음이나 삶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음이다. 새로 남이란 육이나 영이 아니다. 육이면서 영이요 영이면서 육이다.
그래서 석가가 반야[智慧]를 말했고 해탈을 말했다. 지혜란 안다 모른다가 아니다. 앎으로 모르고 모름으로 아는 지리다. 해탈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면서 저 세상이요 저 세상이면서 이 세상인 삶이다.
그래서 가장 정확하노라 자랑하던 물리학이 불확실론에 이르게 되고, 물질과 운동이 따로 있는 것 아니라 하나라고 하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이 첨으로 일어났을 때 하나님과 우주가 따로 있지 않았고, 우주와 만물, 만물과 사람, 인생과 종교, 종교와 정치, 나라와 씨알, 나와 너가 따로 있지 않았다. 그저 산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나 둘의 하나가 아니다. 그저 두루뭉수리지, 그러므로 살았고, 빛 속에 사는 줄도 모르리만큼 살았다. 사는 줄을 몰랐으니 죽는 줄을 알았을 리가 없다. 생 각은 생각하는 줄 모르게 하였고, 말은 나오는 줄 모르게 나왔으며, 행동은 하는 줄 모르게 했다. 그러니 안다 모른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화다 복이다, 선이다 악이다가 있었 을 리 없다. 그래서 후에 와서 어렴풋이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다. 어느 눈이 본 것 아니요, 어느 입이 말한 것 아니다. 그러므로 그 ‘좋아’ 는, 좋다 나쁘다 하는 사람의 ‘좋아’가 아니고, 하나님의 ‘좋아’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는, 사림이 아는(만든) 이 세계에서는. 한정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은 가다가(절대의) 벽에 부딪치게 마련이고, 일단 부딪치고 나면 반드시 부서져 갈라지고 제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란 것이 나오고. 하나님이란 우상이 생기고, ‘이럴까 저럴까’가 일어나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창세기의 인간 타락의 신화는 그 어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벽에 부딪쳤다고 했지만 그 벽이 무슨 벽일까? 하나님 밖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인데, 생각하는 마음이 그만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믿을 이일 따름이지. 다시 말하면 받아들일 하나 됨이지. 뜯어보고 알 물건이 아니다. 믿으면 아는 데에 이르지만, 감히 알기부터 먼저 하려 하면 뒤집힌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했다. 그는 그 앞에 우리가 보일 이이지 우리가 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아갈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면 입으로 불러 우상화한 하나님도 사라지고 영이 된다.
 
그런데 생각하는 인간이 그만 잘못 생각하여 자기를 절대 자유인 양 착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어두워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변해 사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참으로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두워진 것이다. 살리는, 참인 선을 잃었으므로, 갈라진, 죽이는 선악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 유혹에 넘어갔다지만, 그 ‘여인’이 누군가? 사람의 자아의식 곧 “나는 나다”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인 나를 속였다. 이로 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 “나다” 히는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참 나는 아들로 표시되는 지경이다. 둘이면서 하나란 뜻이다. 대립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다” 하신 지경이다. 그것은 창조의 뜻을 참으로 깨달은 말이다. 생각에서 지어져 나온 만물을 맨 첨같이 다시 살리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아버지가 또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로 표시했다. 생각에서 만물이 나왔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이 깨달으면서도, “나다” 하는 생각 때문에 잘못된 것을 그 맨 첨[元初的]의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생각하는 인간은 절대의 하나님의 압도 속에서 평안을 얻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문명이요 발달이라 하지만 그것은 참말이 아니다.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첨으로 아들 됨을 자각하여 다시 산 생명의 하 나됨에 돌아간 예수는 인간들을 향해 “당신들은 악마의 아들입니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며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했다.
이제 그 거짓말의 문명과 그 철학이 절정에 이르렀다. 첫 바벨탑의 운명이 그랬던 것같이 둘째 바벨탑의 운명도 멸망일 것이다. 기술은 행동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기술이 절정에 오른 오늘의 철학이 거의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참말이다.
참말은 참 생각에서 나온다. 그 참 생각은 어디 있을까? 모든 교리와 의식, 제도를 가득히 갖춘 여러 종교들은 금으로 테를 두른 그 경전을 들고 나올 것이다.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되돌려 묻고 싶은 것은, 그러면 왜 그 경전을 가지고도 이 기울어지는 담 같은 문명을 건지지 못하는가? 그러면 아마 또 대답하기를, 우리가 하고 있지 않으냐, 시대가 달라졌다, 시간이 든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거짓말인 것은 이 인간주의 문명의 필연적인 산물인 농촌과 공장과 전쟁터와 유흥가에 우글거리는 인간 아닌 인간의 무리가 잘 말해 줄 것이다. 그런 거짓말을 예수 시대의 바리사이파들이 했고,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가 했으며, 중세기의 성직자가 했고, 석가모니 전과 후의 모든 철학자・종교가가 해 왔다. 말의 살리는 힘이 어찌 그 글자에 있을까? 그 입에 있다. 일러 말하기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하지 않았나? 하나님이 어찌 입이 있을까? 그의 생각으로 뚫린 사람의 입이 곧 그것 아닌가?
 
아주 중요한 핵심을 말하면 지금 종교에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 그것은 종교까지도 현대 문명의 물결에 휩쓸려 거기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오늘의 종교 중에 국가주의에 야합하지 않은 종교가 어디 있나?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 부처님 나라는 사실 없지 않은가? 그 나라가 없는데 그 사람이 어찌 있으며, 그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을 어찌 전할 수 있을까? 진리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한 점이 이지러져도 죽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현대 사람이 학문주의에 기울어 잘못된 아주 치명적인 점이다. 마음을 다, 뜻을 다, 영혼을 다…하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주의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고는 크고 작고를 서로 다투는 이 정치적인 나라지 결코 하늘나라, 진리의 나라가 아니다.
 
이런 때에 진영상 님과 함께 간디의 「날마다 한 생각」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크게 뜻있는 일이다. 이야말로 “죽을 병에 청심환”이다. 간디처럼 제 나라를 사랑하고 제 종교에 충실한 사림이 어디 있을까? 옛날은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우리에게 그 숨결이 와 닿을 만치 가까운 사람은 간디뿐이다. 그런데 그 간디는 결코 정치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의 사람이었다. 그는 참이 하나님이라 하리만큼 철저하고 거짓이 없었다. 그러므로 참에 반대된다면 인도(印度)를 버리기도 주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인도를 건질 수가 있었다. 더구나 여기 내는 글은 무슨 논문도 아니요 전략도 아니요, 순수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알기를 자기 신발의 티끌처럼 겸손히 여기는 마음의 사색에서 나온 생각이다. 그것은 모든 허깨비를 쫓아내고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자기를 잊고 살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솟아나온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숨쉼이다.
 
그는 인류의 살 길을 보여주는 것이 없으면 인도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인도를 살리는 길은 촌락을 생각하는 생명체로 만드는 데 있다고 했으며, 촌락을 살리는 길은 봉사 생활에 있고. 봉사는 참을 지켜서만 가능하고, 참은 아힘사[不殺生]를 지켜서만 기를 수 있고, 아힘사는 부라마챠랴 곧 감각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가능하고, 감성의 극복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돌아가야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마하트마’란 존칭을 받았다. 마하트마는 성인(聖人)이란 뜻이다. 돌아가신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은 성인을 우리말로 ‘씻어 난 이’라 했다. 무엇을 씻는단 말인가? 생각을 씻음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더러워진 생각을 씻고 씻어 영의 빛에 이름이다. 그래서 물과 영으로 다시 난다 하지 않았던가?
생각은 생각으로만 씻을 수 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인류의 장래를 마음 아프게 걱정하며 나 자신을 참으로 하나님께 바치고자 애쓰는 혼들에게 한번 씻음의 생명물을 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1981년 9월 15일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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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으면서
 
 
내 생애에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바푸여(Bapu, ‘아버지’ 라는 뜻의 인도 말. 글쓴이는 마하트마 간디를 ‘바푸’ 라고 부른다ᅳ옮긴이)께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 나를 위기에서 건져 주고, 나를 내리막길에서 보호해 주셨다. 1943년 7월 20일에 내 아내 비댜(Vidya)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로서는 가장 힘든 위기를 맞았다. 나에게는 내 아내가 바푸 다음으로 큰 영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바푸께서는 내 아내를 딸처럼 여기면서 진정으로 사랑해 주셨다.
그 무렵 바푸께서는 푸나의 아가칸 궁전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1944년 5월 6일에 석방되실 때까지 나는 혼자 슬픔을 견뎌야만 했다. 1944년 6월 2일자 편지에서 바푸께서는 이렇게 밀씀하셨다.
“이젠 슬퍼하지 말아라. 네가 배워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 어느 여인이 내게 보내준 진실한 생각을 전한다. 속으로 깨달아라. 비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머물던 육체를 떠나서 자기 때에 맞는 다른 새로운 몸을 가지려고 딴 곳으로 떠났을 뿐이다.”
그러면서 존경하는 카스투르바(Kasturba,간디의 부인ᅳ 옮긴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의 글렌 스나이더(Glen E. Snyder) 여사가 바푸를 위로하려고 그분에게 보냈던 아름다 운 글귀를 함께 적어 보내 주셨다.
 
당신은 말할 수도 없거니와 말해서도 안 되오,
그녀가 죽었다고.
그녀는 떠나갔을 뿐.
쾌활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며
그녀는 미지의 땅으로 걸어 들어갔소.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를 꿈꾸게 하면서.
 
그녀는 그곳에 머무니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래서 그녀가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시오.
그곳도 이곳처럼 사랑하면서.
그녀를 그 전처럼 똑같이 생각하시오.
그리고 말하시오,
“그녀는 죽지 않고 그저 떠났을 뿐”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죽지 않고 떠났을 뿐”이라고 믿으려 해도 아내를 여읜 슬픔을 달랠 수가 없었고, 내 마음은 계속 서글펐다. 1944년 6월 20일자로 보낸 또 하나의 기쁨의 편지에서 바푸께서는 이렇게 쓰셨다.
“비댜의 죽음을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도 말고 마음 산란해 하지도 말이라. 그가 육체로 살아 있을 때 네 삶의 영감이었다면. 그가 쉴 곳으로 간 지금은 더 큰 삶의 영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영혼의 결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고, 가깝게는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은 죽고 난 뒤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정신이 죽지 않았듯이 비댜의 혼 또한 죽지 않았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네 앞의 의무에 대해 생각해라.”
 
1944년 7월 17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쓰셨다.
 
“비댜는 위대한 성인이었어. 그의 마음은 금(金)같은 마음이었지. 자기 부정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고, 그의 사랑은 바다 같았지. 너는 그러한 비댜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해.”
 
바푸께서 1944년 9월 30일에 세바그람(Sevagram)으로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서둘러 세바그람으로 떠났다. 아슈람(Ashram)에서 바푸와 함께 보낸 여덟 주일과 그때 그 분이 내게 보여주신 사랑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매일 아침 기도가 끝난 뒤 내가 그분의 축복을 받으러 발밑에 엎드리면 동정과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뿐더러, 그날 내가 명상할 말씀을 종이에 적어 주기도 하셨다. 1944년 10월 13일부터 두 주일 동안은 날마다 써 주었고, 그 뒤로도 이따금씩 써 주셨다. 그분이 그렇게 슬픔에 잠긴 내 마음을 달래려고 적어 주신 명상의 글을 몇 개만 소개해 본다.
 
“하나님만 바라보려는 사람은 죽은 사림이든 산 사림이든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그만두어야 하네. 자네가 이것을 이해하면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지.”(1944년10월13일)
 
“「다시 한 번」(Try Again)이란 시를 아는가? 포기하지 말게. 다른 믿음은 모두 허사라네. 오직 하나님만 믿게. 그것이 비댜의 죽음에서 배워야 할 것이지. 자네 사랑이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 거네.”(1944년 10월 14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네. 물레질은 하고 있는가? 물레질은 모든 희생 중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이지. 울면서도 물레질을 해 야 하네.”(1944년 10월 15일)
 
“모든 일은 평화와 안정 속에서 가능하다. 물레질은 배고프고 괴로운 사람들의 위안이요 또한 밥과 의복이지 슬픔 가운데서도 물레질을 포기해서는 안 되네.”(1944년 10월 16일)
 
“한 순간도 헛되지 않게 그날 그날의 일을 배정해야 한다. 이것이 떠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다. 영국 사람들을 보게. 그들도 그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오히려 더욱 더 봉사하는 데 자기를 바친다네.”(1944년 10월 17일)
 
“죽은 사림이 산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울어서는 결코 안 된다.”(1944년 10월 18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으로 봉사함으로써 할 수 있다.”(1944년 10월 18일)
 
“가난한 사람이 자네의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게. 그가 만일 아내를 잃었다면 전보다 두 곱절이나 일해야 하네.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내면의 기쁨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얻는다네. 늘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네. 그리고 자네의 귀먹음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야 해. 한 순간이라도 게으르게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일이지. 나는 이밖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행복에 이르는 다른 어떤 길도 모르네.”(1944년 10월 19일)
 
“오늘은 자네에게 경사스런 날이다. 나는 자주 비댜를 울렸네. 비댜는 자네처럼 울곤 했지. 자기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조르면서 말이야. 그러면 나는 그를 꾸짖으며, 물레바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지 내 곁에 앉아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해 주었네. 마침내 그는 그 진리를 깨달았어.”(1944 년 10월 20일)
 
“우리는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인 동시에 기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기계이고 영혼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사람이다. 오늘 자네는 기계 같은 일을 자네 몸으로 택해서 나 에게 보고해야 한다.”(1944년 10월 20일)
 
“사람이 무슨 대상을 놓고 명상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 물레바퀴는 그 중 가장 좋은 매개체이고 그 결과 또한 분명 그렇다.” (1944년 10월 21일)
 
“아슈람 같은 단체가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편지 왕래나 명상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툴시다스(Tulsidas, 간디가 영향을 많이 받은 라마야나의 작자)에 의지하여 살아가듯이, 돌아간 이들의 성스러운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1944년 10월 21일)
 
“희망은 영원하다. 그에 대한 예배는 결코 헛되지 않다.” (1944년 10월 22일)
 
“자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이무런 해도 없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마하데브(Mahaderv, 간디의 제자)나 크리파라니 (Kripalani, 간디의 제자)처럼 타그리(Takli)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타그리는 우리의 침묵의 벗이다. 이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고 세상에 필요한 실(絲)을 제공해 준다. 타그리를 열심히 하는 동안은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일에 몰두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네 귀가 밝아질 수도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카르마 요기 (Karma Yogi)가 될 때면 지네는 자네의 귀에 대해서는 거의 상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바나르선생(Vanar-Guru)은 일부러 귀를 막았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말이야.” (1944년 10월 23일)
 
“나의 침착함과 나의 기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니는 하나님 안에 있고, 내가 하는 것은 무엇 이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불행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모두 나의 선(善)이 된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행복을 지킬 수가 있다. 하나님이 내 아내 카스툴바를 데려가신 것은 카스툴바의 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와 헤어진 것이 나에게는 슬픔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네도 비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한다.”(1944년 10월 24일)
 
이와 길이 바푸께서는 내 어지러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마음의 양식을 계속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내 몸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여, 내가 안드라 프라대쉬(Andhra Pradesh)의 비마바람(Bhimavaram)에서 자연 요법 과정을 이수하도록 해 주셨다. 그 과정을 밟기 위해 나는 1944년 11월 28일 그분 곁을 떠나야 했다. 내가 그 동안 바푸와 친밀한 동무가 되어 그분과 영감 넘치는 대화를 나눌 만큼 자랐다고는 해도, 바푸와 헤어지는 것은, 그분의 뜻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 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날마다 좋은 글을 써서 보내 달라고 바푸께 부탁드릴 수 있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 일찍 그분께 이 생각을 밝혔다.
바푸께서는 아버지처럼 내 말을 귀기울여 듣고는 “참 좋은 제안이다” 하며 생각해 보겠노라고 하셨다. 바푸의 호의적인 대답에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부탁 드렸더니 여전히 생각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셋째날에 가서는, 언제나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쓰실 수 있도록 적당한 종이 한 첩을 마련해서 바푸 옆에 갖다 놓겠다고 말씀 드렸다. 마침내 바푸께서는 그러겠노라고 하셨고, 나는 종이첩을 마련하여 1944년 11월 16일에 바푸께 갖다 드렸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잠잠히 있으면서 모든 일을 바푸가 뜻대로 하시도록 맡겨 두었다. 1944년 11월 22일 아침 바푸가 밝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내가 느낀 희열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난드, 자네를 위해 쓰기 시작했어. 20일부터 써 오고 있네.”
 
그날부터 바푸는 나에게 ‘한 생각’을 계속 글로 써 주셨다.
1946년 6월 나는 푸나에서 다시 바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바푸께서 그 동안 나에게 써 보내 주신 ‘한 생각’을 출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바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이 출판할 만한 값어치가 있을까? 만일 꼭 출판하고 싶으면 나 죽은 다음에나 하게. 내가 과연 내가 쓴 생각대로 살 수 있을는지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 숨을 넘길 때까지 내 가 실제로 그 생각대로 산다면 혹시 출판할 만할지도 모르겠네.”
 
바푸께서는 계속해서 날마다 한 생각을 글로 쓰시다가 1946년 말경에 그 일을 멈추었다. 뒤에 1947년 3월에 한 보름 동안 뉴델리에서 바푸와 함께 지내게 되어 그 까닭을 여쭈었다.
 
“내 나오카리(Naokhali) 일을 (일을 을 모아 수행하기 위해 나는 모든 일을 접었다네. 아슈람도, 친구들도. 그리고「하리잔(Harijan)」지에 기고하던 일도. 모두 그만두었네. 그래서 자네에게 써 주던 매일 매일의 생각도 그만두게 되었네."
 
바푸께서는 2년 동안 ‘날마다 한 생각’을 써 주셨다. 이 생각들은 그분의 지혜와 성스러움의 알짬을 담고 있다. 마치 우유의 바다에서 버터를 짜내듯이 그의 마음의 바다에서 정수를 짜 내셨다. 나에게는 이 명상록이 무엇보다 큰 축복이여 유산이다.
내가 그분의 깊은 사랑을 받을 자격은 없지만. 이 말씀들은 바푸께서 내게 보여주신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이 귀중한 사랑을 값있게 하고 또 항상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날마다 한 생각』의 영문 번역본을 한 줄 한 줄 교정해 준, 존경하는 스리 바리바이 데사이(Shri Valjibhai Desai, 간디의 측근으로서 구자라드 비쟈피스Gujarat Vidyapith의 전교수이자 유명한 학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 소중한 그의 도움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1968년 10월 2일 아라하바드에서
                                                    아난드 힝고라니(Anand T. Hingor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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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을 옮기면서
 
 
나는 내가 하지는 못하면서도 남을 나무라기는 잘한다.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읽고는 왜 이날껏 이『예언자』를 번역한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하고,『바가바드 기타』를 얻어 들고는, 이런 보배를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주지 않았을까 했다. 내가 나무라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재지(才智)가 없으니 나은 선배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간디의 자서전도 그렇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외국 인물로서 일반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것은 간디 아닐까? 그런데 3.1운동 이후 그렇게 좋아하는 간디인데 어째서 그 전기는 해방될 때까지 하나도 번역된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라가 씨알에게 있는 줄 알고, 씨알을 깨워주고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요,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라면, 글을 배운 책임을 하기 위해서라도 씨알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 주었어야 할 것인데 아니했다. 생각해보자, 해방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방방곡곡을 파고들어 쑤셨듯이, 간디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그만큼 씨알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겠나? 붉은 군대가 북한 사람을 속이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조만식 선생을 내세우며 ‘조선의 간디’ 라고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무슨 뜻인가? 자기네와는 180도 반대 방향의 간디인데 왜 그 이름으로 조선생을 내세웠을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조선놈을 잡으려면 조선놈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도리어 그렇게 못했는데 우리 대적은 간디주의를 내세우면 조선놈은 다 속일 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길은 그만큼 우리에게 들어맞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울 손, 그것을 우리가 못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워하는 소리지, 남을 나무랄 것 있겠는가, 나를 채찍질해야지.
겨우 1958년에 와서야 ‘간디 연구회’란 것을 몇이서 시작했는데, 시작 하자마자 7월 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이상기후를 탓해도 소용없고, 생명은 제 책임을 제가 만들어 지는 거다. 내가 했어야 할 것인데 약했다. 지금 와서야 솔직히 하는 고백이지만 모든 책임은 내게 있었다.
 
이번에 삼성출판사에서『간디 자서전』과 도로우의『시민의 불복종』을 한 권으로 만들어낼 것을 계획하면서 그 번역을 부탁해왔기 때문에 첫 마디에 응했다. 이제는 간디가 유명은커녕 잊혀지려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사양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번역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때 다른 것은 별로 없으나 걱정되는 것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병석에 누워 7년 동안 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언제나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늙은 아내요, 그 다음은 약속해 놓은 간디의 자서전이었다. 다행히 일을 잘 풀려 일을 할 수는 있었으나 너무 늦어서 삼성출판사에 대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본래 6월 말까지 약속한 것인데 9월 15일로, 또 10월 15일로 연기를 하다가 이제 11월 15일이 됐으니 사과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지연은 됐지만 그 대신 얻은 것이 많다. 병석에 있던 아내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의 뿌리를 들추어내고, 그것을 청소하고 책상에 앉아 간디를 대하면 폭풍 속을 가르고 나가는 사공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하여서 나는 지난 70여 년보다 이한 해에 배운 것이 더 많다.
이번은 정말 한 자 한 자, 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서 하노라고 했고, 첫 번 번역에서 잘못이 있던 것도 더러 발견한 것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전보다는 간디에 조금 더 가까이 선 것 같은 느낌이다.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될 수록이면 주를 많이 달려했으나 그래도 출처를 알 수 없어 못한 것이 많고, 혹시 잘못된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유명사의 발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저히 인도인들이 하는 대로는 할 수가 없고 부득이 보통 하는 로마자 발음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빈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 그냥은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의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연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부질없는 내 탄식이나 적자. 내가 10년 전에 이 태도로 간디를 읽었다면 내가 조금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요, 우리나라 역사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지나간 것이 문제랴, 앞이 문제지.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야 하지.        
 
                                                                                                                            함석헌
 
 
 
 
영문 번역자의 머리말
 
 
간디의 자서전 초판 두 권으로 출판이 됐었다. 1권은 1927년에, 2권은 1929년이다. 정권 1루피의 구자라트어 원판은 5판을 거듭하는 동안 근 5만 부나 나갔다. 영문 번역판(문고판으로 나온)의 값은 인도인으로서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염가판의 필요를 느낀 지 오래다. 이제 이것을 단권으로 낸다.
번역을 『영 인디아』에 연재로 낼 때는 다행히 구자라트어 판을 수정을 해가면서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체에 걸쳐 다시 자세한 수정을 했다. 또 언어면에서 특히 영문학에 소양이 깊은 친구가 세밀히 수정을 해주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그는 그 일을 맡으려 할 때 자기의 이름은 발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승낙을 했고 나도 그 조건을 능낙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제5편의 29장부터 43장까지는 내가 1928-29년 브룸필드 위원회에서 주최한 바르돌리 농업연구회에 나가 있는 동안 나의 친구요 동업자인 파렐랄이 번역한 것이다.
 
                                                                                                      1940년 마하데브 데자이
 
 
 
머리말
 
 
나와 일을 같이 하는 몇몇 분의 권고에 따라 나는 자서전을 쓰기로 했는데, 쓰기 시작하여 첫 장을 넘기자마자 봄베이에 폭동이 일어나 일은 중단되어버렸다. 그 후 연달아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고 나는 결국 예라브다(Yeravda)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나와 함께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 중의 하나인 제람다스(Jeramdas)씨는 나더러 만사를 젖혀놓고 그 자서전을 완성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나는 이미 내 공부를 위하여 순서를 짜놓았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는 다른 일은 생각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만일 예라브다에서 내 형기를 다 치렀더라면 나는 자서전을 정말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 한 해가 남아 있어서 내 일을 마치려면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나는 석방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와미 아난드(Swami Anand)가 다시 그 제안을 해왔는데, 나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진리파지운동(眞理把持運動)의 역사를 쓰던 것도 다 마쳤으므로, 자서전에 손을 대서『나바지반』(Navajivan) 지(誌)에다 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스와미는 따로 단행본으로 내자고 하지만 내게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나는 매주 계속해서 한 장씩밖에 쓸 수가 없다.『나바지반』에는 어차피 매주 무엇을 써야 하니, 그러면 자서전이라고 해서 안될 것이 없지 않은가? 스와미도 나의 제안에 동의하여 지금 나는 이것을 부지런히 쓰고 있다.
 
그런데 한 경건한 친구가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의 침묵일(沈默曰)에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 들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서양 사람만이 하는 짓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동양에서는 서양식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서전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쓴다 합시다, 무엇을 쓰시렵니까? 생각해봅시다. 오늘 당신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시던 것을 내일 가서 버리시게 될 때 오늘 당신이 세웠던 계획을 장차 고치시게 될 경우에 입으로거나 글로거나 당신의 하신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행동해오던 사람들이 방황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자서전 같은 것은 그만두시는 것이, 적어도 아직은 쓰시지 않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 주장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뜻하는 것은 정말 자서전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수많은 진리 실험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 생애는 그러한 실험들만으로 되어 있으니, 이야기는 자연히 자서전의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 매 페이지마다 나의 실험 이야기밖에 쓴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실험을 앞뒤를 가려서 관련된 이야기로 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유익함이 없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렇게 스스로 믿는다고 자위하고 싶다. 정치적 분야에서의 나의 실험은 인도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온 ‘문명 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내게는 그 일들은 큰 가치가 없다. 그 일들 때문에 내게 주어진 마하트마의 칭호는 더군다나 가치가 없다. 그 칭호는 내게 깊은 고통을 준 일이 많다. 그것이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되는 때는 한 번도 없다. 내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정신적 분야에서의 나의 실험이요, 실상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여기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이 참으로 정신적인 것일진대 제 자랑의 여지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다만 나의 겸손을 더할 뿐이다.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아 반성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나의 부족을 느낄 뿐이다.
 
내가 성취하려고 원하는 것, 지금껏 30년 동안 성취하려고 싸우고 애써온 것은 자아(自我)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봄이다. ‘모크샤’에 도달함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말로나 글로나 행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한 모든 모험은 다 이 한 목표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실험은 골방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드러내놓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그 정신적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일에는 자기와 자기의 창조주만이 아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꼬집어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실험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들이다. 혹은 그 보다도 도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종교의 알짬은 도덕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일 중에서도 나이든 사람뿐 아니라 어린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여기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내가 그 이야기를 냉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많은 실험자들이 정진(精進)하는 데 필요한 양식을 거기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 실험에 있어서 다소라도 완전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과학자가 자기의 실험을 더할 수 없는 정확과 신중과 정밀을 가지고 행하면서도 자기가 얻은 결론에 대해서 결코 완전을 주장함이 없이 언제나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처럼 나도 내 실험에 대해 과학자 이상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엄밀한 자기성찰을 했고, 나 자신을 샅샅이 뒤졌으며 모든 심리적 상태를 조사하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내 결론이 완전하다든지, 잘못이 없다든지 하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만은 내가 분명히 주장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즉 내게는 그것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 됐으며, 그때 현재로는 그것이 완전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것을 내 행동의 기초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 걸음마다 취사선택의 순서를 밟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내 행동이 내 이성과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내 당초의 결론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만일 학문적 원리를 토론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자서전은 아예 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 목적은 이 원리들을 실제에 적용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자는 데 있었으므로 내가 쓰고자 하는 이 글의 제목을『나의 진리실험의 이야기』(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라고 정했다. 이 안에는 물론 비폭력의 실험, 독신생활의 실험 등, 진리와는 다르다고 생각되는 그밖의 여러 가지 행동의 원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진리는 최고의 원리요, 다른 여러 가지 원리는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진리는 말의 진실뿐만 아니라 또 행동의 진실이기도하다. 또 우리의 생각으로 하는 상대적인 진리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 영원한 진리 곧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수하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대번에 어리둥절해 버린다. 그러나 그를 진리로 대할 때만 나는 그를 예배할 수 있다,나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를 찾고 있다. 그를 찾기 위해서라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즐겨 희생할 것이다. 바쳐야 하는 그 희생이 비록 나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나는 즐겨 바쳤으면 한다. 그러나 내가 절대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를 굳게 잡는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 진리 가 그때까지는 나의 등대요, 나의 작은 방패요, 나의 큰 방패다. 이 길이 비록 험하고, 좁고, 면도날같이 날카로울지라도, 그것이 내게는 가장 가깝고 가장 쉬운 길이다. 나의 히말라야 산맥 같은 실책조차도 내게 대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은 내가 이 길을 엄격하게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나를 실패에 빠지지 않게 건져주었고, 나는 내 빛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종종 ‘절대진리’, 곧 하나님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이만이 참이요, 다른 모든 것은 다 참이 아니라는 확신이 날마다 자라났다. 누구나 원하거든 내게서 이 확신이 어떻게 자라났는가를 알아보기 바란다. 할 수 있거든 나의 실험에도 참여하고 나의 확신에도 참여하기 바란다. 내게 가능한 것이면 어린아이들에게도 가능하다는 확신이 가면 갈수록 내 속에서 자라났고, 또 내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진리탐구의 방법은 어렵다면 어렵지만 또 쉽다면 쉽다. 교만한 어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순진한 어린이에게는 온전히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 세상은 티끌을 그 발밑에 짓밟지만 진리를 찾는 사람은 티끌에게 조차도 짓밟힐 수 있으리만큼 겸손해져야 한 다. 그런 다음에야만 비로소, 진리의 한 별견(瞥見)을 얻을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 한 아니 될 것이다. 바시슈다(Vasishtha)와 바슈바미트라(Vashvamitra)의 대화는 이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기독교와 회교도 역시 이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이 글 중에 조금이라도 내 자랑을 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나의 진리탐구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고 내가 어렴풋이 봤다는 것도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나 같은 것은 천백이 망하더라도 진리는 왕성해야 한다. 나 같은 잘못 많은 인간들을 심판함에 있어서 티끌만큼이라도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아니 된다.
아무도 이 자서전 속에 여기저기 들어있는 권고의 말을 명령하는 것으로 알지 않기를 믿고 또 바란다. 이 실험담은 하나의 실례로 알아야 할 것이요, 각자는 자기의 의향과 능력에 따라 자기의 실험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하면 이 실험담은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꼭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 나는 아무리 창피스러운 일이라도 숨기지도 줄여서 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실수와 잘못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싶다. 내 목적은 내 실험을 진리파지의 과학에 의해 서술하자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잘했느냐를 말하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 나 는 진리 자체같이 엄격해야 하는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기를 바란다. 이 표준에 의하여 나를 저울질할 때 나는 수르다스(Surdas)와 함께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같이 불쌍한 그렇게 악하고 못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수 있느냐?
내 창조주를 내버렸었구나.
그토록 나는 믿음이 없었구나.
 
왜냐하면, 그분께서 내 생명의 숨의 마디마디를 다 주장하고 계시며, 나를 낳으신 것이 그분임을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분에게서 내가 아직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내게는 끊임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를 붙들어 그분에게 못 가게하고 그분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저 나쁜 정욕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것을 떼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만 그칠 수밖에 없고, 나는 다음 장에서부터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여야 한다.
 
 
                                                                                                              1925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 아슈람
                                                                                                              M.K. 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