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0

알라딘: [전자책]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박홍규

알라딘: [전자책]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epub 
박홍규 (지은이)필맥2013-02-20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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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15쪽, 약 13.9만자, 약 3.4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E-ink(크레마 터치,크레마 샤인, 페이지원, SNE-60)
ISBN : 978899775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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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한 평전. 소로를 ‘숲 속에 들어가 살았던 자연주의자 내지 환경보호론자’ 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 소로를 물질만능주의, 노예제, 전쟁을 야기하는 정의롭지 못한 지배질서에 항거한 반항아이자 자유인으로 그리며 그의 삶과 저작을 종합적으로 서술한다.
목차
머리말
인용에 대해
1. 내 친구 소로
2. 시대와 청년 소로
3. 소로의 자연
4. 소로의 저항과 희망
5. 소로가 끼친 영향
맺음말

책속에서
《윌든》을 읽고서 전원생활을 꿈꾸게 되어 귀농했다는 사람들은 《월든》을 무슨 성경인 것처럼, 소로를 무슨 성인인 것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로는 귀농은커녕 제멋대로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대략 2년 정도 건들건들 놀았을 뿐이다. 그 기간에 그는 심심해지면 마을에 가서 놀았고, 세금을 내지 않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가 숲 속 호숫가로 잠시 은둔한 이유는 농촌생활을 동경해서도 아니었고, 농사짓는 일을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일로 여겨서도 아니었다. 돈독이 오른 사람들이 돈벌이에 미치는 것밖에 달리 사는 방법이 없다고들 하는 통에 화가 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죽어라 일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한 그는 일주일에 엿새 일하고 하루 쉴 게 아니라 하루 일하고 엿새 놀자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말한 것도 그가 숲으로 간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험, 하나의 모험일 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늘 정신적인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멋대로의 삶’이었다. - p.24~25 중에서  접기
1844년 4월에 소로는 낚시를 하고 고기를 굽다가 숲에 불을 냈다. 소로는 마을로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언덕 위에 올라가 숲이 불타고 사람들이 불을 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을 끄는 사람들이 보여준 넘치는 에너지의 아름다움이 숲의 소멸을 충분히 보상했다는 식으로 일기를 썼다. 함께 불을 낸 사람이 마을 유력자의 아들이어서 구속은 면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숲을 태운 자’라고 불렸다. - p.96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홍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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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 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영국 노팅엄대학 법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다. 1... 더보기
최근작 : <혼돈의 시대, 리더의 길>,<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저항하는 지성, 고야> … 총 2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19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 1862)에 대한 평전이다. 숲 속 생활 체험기인 《월든》을 비롯한 소로의 일부 저작은 그동안 국내에서 여러 차례 번역, 출간되어 널리 읽혔지만 소로에 대한 평전은 이 책이 국내에서 처음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소로를 ‘숲 속에 들어가 살았던 자연주의자 내지 환경보호론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마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소로는 물질만능주의, 노예제, 전쟁을 야기하는 정의롭지 못한 지배질서에 항거한 반항아이자 자유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소로의 삶과 저작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평전 작가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굳히고 있는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이번에는 《월든》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에 대한 평전을 내놓았다. 지은이 박 교수는 《월든》을 ‘전원생활 기록’이나 ‘자연예찬의 책’ 정도로만 간주하고 소로를 자연주의자나 환경보호론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마는 우리의 독서풍토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월든》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물질문명에 의해 타락한 인간사회에 대한 비판이고, 소로는 인간성을 억압하는 권력과 제도의 개혁을 추구한 저항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는 것이다.

사실 소로가 작품 《월든》의 배경인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인근 숲 속의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생활한 기간은 2년 2개월여에 지나지 않았고, 그 기간 중에도 종종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과 세상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게다가 그는 당대 미국사회의 최대 쟁점이었던 노예제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철저한 노예제 폐지론자의 입장에서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심지어는 도망치는 흑인노예를 직접 돕기도 했다. 이 책에서 부각되는 이런 사실들은 소로가 은둔자이기는커녕 현실비판에 적극적으로 나선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소로가 20세기 들어 재평가되면서 주목받게 된 과정도 흥미로운 동시에 소로의 진면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지은이에 따르면 소로는 자신의 나라인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 먼저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특히 “소로를 스타로 만드는 데 처음으로 기여한 외국인”은 러시아의 작가인 레오 톨스토이였다. 톨스토이는 1900년경에 우연히 소로의 《시민저항》을 읽었고, 이 글에 감동을 받은 그는 “미국인은 왜 국가를 거부하는 모범을 보인 소로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백만장자나 장군 등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또한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소로의 《시민저항》을 언제나 곁에 두고 읽었다고 하고, 미국의 흑인인권 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서 킹도 《시민저항》에 표현된 저항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보수화의 기류가 지배적이었던 1970년대 미국에서는 소로가 거의 망각됐지만 1980년대 이후 자연주의, 생태주의가 세를 얻게 되면서 소로가 자연문학(Nature Writing)의 선구자로 부활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이후에 소로의 책을 찾아 읽는 독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부활한 소로의 모습은 그 전과 달리 자연주의자의 색채가 강한 반면에 정의롭지 못한 기존질서에 맞섰던 저항적 자유인의 이미지는 탈색된 것이라는 점에서 “마치 박제된 표본 같은 느낌을 준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반문명의 자연인 소로’도 중요하지만 ‘반체제의 자유인 소로’를 보지 않고는 소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지은이는 소로의 삶을 살펴보고 그가 남긴 저작의 주요 내용과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함으로써 ‘소로 읽기’의 길안내를 해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소로의 저작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소로를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소로의 저작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을 먼저 읽으면 ‘보다 깊이 있는 소로 읽기’에 도움을 받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은이는 자신이 관심을 두는 소로의 측면은 그가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멋대로 살았다’는 측면이라면서 “나는 소로를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멋대로’ 산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을 뿐이다. 여러분 중 이미 ‘멋대로’ 살고 있거나 앞으로 ‘멋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 이 책을 읽고 소로를 친구로 삼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라고 말한다. 소로가 부쩍 친근하게 느껴진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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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한 소로를 기억하며... 새창으로 보기 구매
사실 신문에 소로의 책이 소개되기까지 소로는 나에게 낯선 존재였다.

늘 그렇지만 책을 선택하고 만족스런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 삶의 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인물을 만났다.

자기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애쓴 소로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보고 이야기하는 박홍규 선생님의 글 속에서

소로를 향한 애정을 키울 수 있었다.

단지, 소주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글에서 다소 반복적인 느낌이 들지만

소주제를 끌고 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이 책을 지인에게 소개해줬더니 몇시간 후에 가슴 뛰며 책을 읽은 것이 얼마만이냐며

밤늦게 문자가 들어왔다.

또 한 지인은 이미 소로에 대해 심취해 있었고

책 읽는 모임에서 소로를 하자고 했더니 만면에 웃음이 ....

 

- 접기
juji 2008-03-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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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의 소로가 그런 사람이었어? 새창으로 보기 구매
<월든>의 소로가 그런 사람이었어?

박홍규,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필맥, 2008.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비단 영화 속의 그 인간만도 아니고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물론 잘 나가는 인간들이야 여전히 앞만 보고 가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귀환희망족(?) 부류에서 빼드려야겠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돌아가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될 선생을 찾았다. 나 역시 열심히 찾아 다녔다. 몸은 빼고 머리로만. 그렇게 대리 만족만 했다. 그래도 그게 하나의 큰 경향이었다. 특히 웰빙이니 귀농이니 마음 수련이니 하는 단어가 강아지 입에 물린 핸드폰 마냥 낯설지 않을 만큼 생태주의가 상업화된 2008년 대한민국에선 더욱더. 그래서 10년 전쯤부터 니어링이니 타샤 튜터 같은 사람들을 많이 찾았다. 소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싶었다. 아니 소로가 원조처럼 보였다. 니어링 부부나 타샤 투터보다 앞선 세대에 ‘월든’ 숲 속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니.
그래서 소로를 환경보호론자, 동식물연구가, 박물학자, 시인, 금욕주의자 등으로 묘사하기도 했단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이단자 박홍규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비틀며 소로에 대한 평전을 냈단다. 호기심. 나는 박홍규의 그 올바른 비틀기를 좋아하니까 당연히 읽어야지. 그래 놓고 책을 사긴 했는데 처박아 두었다. 몸이 안 따라줘서 그랬다.
방학을 하니까 그래도 여유가 생겨 이 책을 들었다. 역시 박홍규. 물론 오버 하는 느낌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소로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
박홍규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그동안 소로가 한국에는 너무 일면적으로 알려져 왔다는 것. <월든>만 많이 소개되고 <시민저항>은 별로 소개되지 않은 관계로 ‘자연’만 알려지고 그의 ‘저항’ 특히 폭력적 저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려져도 그렇게 ‘생태주의 운동’과 ‘근원적 민주주의’적인 면만 주목을 받았을 뿐, 그의 반체제적 성향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로는 禪僧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한마디로 정의하면 ‘제멋대로 살기의 달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규정이다. 과격한 규정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것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확실히 우린 지금까지 소로를 잘못 본 것 같다. 웰빙이니 자연이니 하는 시대 조류에 맞게 그를 요리해서 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는 성자이기는 커녕 반역자이고 성인이 아니라 무법자라는 것이다.
이러면 거부감이 드는가. 아니다. 나는 이런 규정이 좋다. 나의 성격 결함? 설마. 소로가 그때 그렇게 살았던 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완전히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 그 속의 이웃들은 ‘돈에 미쳐 싸우는 짐승’ 같았기 때문에 소로가 그렇게 그 틀을 벗어나 제멋대로 살았던 것이다. ‘돈에 미쳐’라는 대목은 2008년 한국사회를 닮았다. 그러니 땡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세태에 소로는 미리부터 경고했다.
“생계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인간만큼 치명적인 실패자는 없다”고. 맞는 말이다. 예전에 공선옥의 글에서 읽은 ‘생존 이상의 부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상통한다. 예전엔 말로만 이해했는데 요즘은 제법 몸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살아질 것 같다.
그런 소로이건만 사람들은 그를 전원생활의 모범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고급 승용차에 골프채를 싣고 다니면서 경치 좋은 변두리에 별장 지어 놓고 사는 사람들까지 ‘소로’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박홍규가 열 받을 만도 했겠다.
책 마무리에서 그가 강조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고급 아파트, 고급 승용차, 골프, 별장, 성형수술, 고급 브랜드, 사치스러운 관광여행, 상업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중을 현혹하는 저급한 공연물 등 모든 천박한 사치와 허영 그리고 퇴폐를 당장 거부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시골이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 다만 그런 것들 가운데 일부를 갖고 가서 안락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위선이며 해악을 초래한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모든 물질문명을 거부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을 정도로는 그것을 거부해야 인간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다. 돈이 많아야 자유가 아니라 그 돈을 추구하는 미친 풍토에서 벗어날 때 자유다. 그렇게 해서 다가간 자연이 진짜 자연이다. 이익을 만들어 내는 데에 활용하는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저지른 야만에 이용되는 대상일 뿐이다.
아나키스트 박홍규. 예전에 그의 책에서 자유, 자연, 자치의 기치를 읽었다. 이번 소로 평전에서도 그 가치관이 녹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로를 왜곡했다. 은둔 성자처럼.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예전에 <월든>을 읽으며 의문스럽긴 했다. 그가 월든 숲에서 지낸 기간이 불과 2년이다. 그 2년 생활로 삶을 마친 게 아니다. 다시 도시에 와서 살았다. 근데 이 대목에서 황당한 건 그가 월든 생활로 영양실조에 걸렸고,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 뒤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대목이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칭송하는 월든 숲에서의 생활이 남긴 게 그런 것이었나. 암튼 2년 만에 그 숲 생활을 정리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무슨 은둔 성자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 더럽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러 잠시 숲 생활을 했을 뿐인 것 같다. 왜곡 과장하지 말지어다.
또한 내가 놀란 것은 <존 브라운 대장을 위한 변호>에 나온다는 그의 폭력저항에 대한 동의 부분이다. 흔히 간디도 이 소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소로가 폭력저항까지 옹호했다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하긴 사람은 변한다. 처음엔 비폭력 저항을 내세우다가도 어떤 극한 상황에 대한 체험으로 그렇게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그의 저항 방법은 불복종이다. 인두세 납부 거부였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 즉 정부가 그런 못된 짓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게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쁜 곳에 쓰일 게 뻔한데도 세금을 내는 것은 어쩌면 공범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니 납세 거부. 참 마음에 든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못한다.
실제 그로 인해 투옥되기까지도 했다. 물론 친척이 세금을 대납하는 바람에 감옥 체험은 이틀 만에 끝났다고 하니 좀 싱겁긴 했다.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폭력저항에도 긍정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암튼 전반적으로 그는 그 사회의 이단아였음은 분명하다. 당시 기득권자들은 그를 심한 꼴통으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울림이 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박홍규가 비틀어 본 것 말고, 예전부터 소로를 논하던 관점도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 빈곤’을 주장한 점.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일을 적게 하는 정부’라는 주장.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는 말.
그렇다고 단순히 사회개혁운동가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제도의 완성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새로운 인간상의 창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와 자유가 인간의 선량함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끝내는 승리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반은 공감하고 반은 부정하고 싶다. 제도 개선만으로 안 되는 것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상 창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일단 구체적이지 않으므로 보류 입장을 취하겠다.
그럼에도 그의 좌충우돌은 상당히 선구적인 작업이었음을 인정한다. 본받고 싶지만 나는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한다. 부럽다.
솔직히 이런 사람을 보면 요즘 나는 일단 그의 결혼 유무와 자식이 있나 없나부터 따지고 본다. 역시나. 그는 미혼이었다. 홀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이단아 짓기 가능했지 싶다.
그렇다고 그가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퇴짜를 맞은 경험도 있다. 암튼 이런 사람을 보면 그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다름을 일단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알갱이는 챙기고 싶다.
“생계 이상의 돈벌이에 연연하지 말고 자유인이 될 것. 그것은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그 자연 역시 돈벌이와 관련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일 것.” 그것을 방해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싸울 것. 하지만 그 싸움도 단순히 제도 개선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
나도 숲에 들어가 살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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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08-11-1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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