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기독교사상2011년6월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기독교사상2011년6월


<기독교사상> 2011년 06월호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665&page=5&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1&view_month=06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

- 정지석-


퀘이커가 아닌 사람이 퀘이커리즘에 빠지다

나는 퀘이커 교도가 아니다. 감리교 신앙으로 세례 받고, 장로교 신학을 공부한 목사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에서 목회하기보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같은 에큐메니칼 연합기관에서 주로 일했기에 나 자신 종교적 정체성을 말하자면 ‘에큐메니칼’이라고 말하고 싶다. 종파와 교파의 구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와 세계가 하나의 큰 포괄적인 하나님의 집에 속하듯이, 나도 하나님의 큰 집에 소속해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런 에큐메니칼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나는 퀘이커리즘을 소개하고자 한다.


10여 년 전 나는 퀘이커리즘이라는 소종파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감리교와 장로교 신앙, 그리고 에큐메니칼 정신의 세례를 받은 나에게 퀘이커리즘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퀘이커’(Quaker) 또는 ‘친우’(Friend)라고 부르는 이들의 신앙 추구의 모습,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 역사와 세계에 대한 태도 등에서 기존 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도, 나는 그것이 이질적인 거부감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뭔가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려 온 기독교 신앙의 원형과 본질을 상기시켜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것은 오래된 진리를 만나는 각성과 같은 경험이었고, 마음 깊이 숨겨진 빛을 발견하는 기쁨 같은 것이었다. 확신하건데, 오늘 절망적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 안에서 새로운 영성을 찾는 이들에게 퀘이커리즘은 영적으로나 실천적 삶의 면에서 의미 있는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이다.


퀘이커리즘의 세계는 비록 소종파지만 역사적 전통이 깊고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 퀘이커리즘을 소개할 때, 오늘의 한국교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 퀘이커리즘의 주요한 면모로서 침묵의 영성, 예언자적 영성, 그리고 평화의 영성이 차례로 소개될 것이다. 퀘이커리즘은 신학의 종교라기보다는 영적 체험의 종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앞으로 퀘이커리즘을 소개하면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경험의 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나는 신학적 토론보다는 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 식으로 풀어가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최근 나는 10년 만에 미국 펜들힐(Pendle Hill)에 다시 와 있다. 펜들힐은 미국 퀘이커들이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하는 ‘공동체형 성인교육 기관’이다. 공동체형 성인교육기관이란 말이 우리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수도원과 학교와 휴양소를 하나로 모아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펜들힐 같은 공동체형 성인 교육기관이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 이곳 펜들힐에 다시 와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 펜들힐이 있다면 퀘이커 운동의 발상지인 영국에는 우드부룩(Woodbrook)이 있다. 한국 퀘이커였던 함석헌은 이 두 곳을 모두 가 본 후에, 퀘이커리즘을 경험하려면 펜들힐에 가고 공부하고자 한다면 우드부룩에 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도 10년 전 이 두 곳에 머물면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했다. 영국 버밍험에 있는 우드부룩은 퀘이커 대학원으로서 아카데미즘을 강조한다면 미국 펜들힐은 퀘이커리즘과 공동체의 경험을 강조한다. 나는 한국에 펜들힐 같은 공동체 형 교육기관에 우드부룩의 아카데미즘을 도입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추진을 모색 중이다. 펜들힐의 비전은 20세기 초반 퀘이커들이 내외적인 위기감을 느끼면서 설립한 것인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갱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 생각되기에 퀘이커리즘을 소개하는 지면을 빌려 상세하게 소개할 것이다.

‘퀘이커’란 낯선 이름의 종교인
퀘이커리즘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니던 교회 전도사는 군대를 반대하는 이상한 종교들이 있으니 그 꼬임에 빠지면 안된다고 설교했는데 퀘이커라는 이름이 그 중에 들어 있었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지킨단 말인가. 참으로 허무맹랑한 교리를 전파하는 그런 종교는 이단 종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기독교 종파들은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것인가? 누구도 그런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단지 그런 종교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말고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말라는 엄한 금지령만을 내릴 뿐이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있던 감리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다. 나에게는 감리교가 제일 좋은 기독교이고 옆 마을에 있던 장로교회조차 이상한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로 보였다. 가톨릭교회는 천주교로서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라고 알던 시절이었다. 조금 더 자라나서 알게 된 성공회, 구세군, 침례교, 순복음 교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라고 믿고, 다른 교파 교회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경계심과 경쟁심을 품고 지내던 때였다. 이런 터무니없는 자기 종교 우월감에 빠진 청소년기에 애국심은 또 얼마나 열렬하고 무조건적인가. 이런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이름도 이상하고 낯선 ‘퀘이커’라는 종교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군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주장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니 좋지 않은 인상은 마음 깊이 심어졌다. 최근 종교적 병역거부 문제로 많이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을 퀘이커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둘은 종교적 배경에서나 전통에서 많이 다른 종파이다.

종교적 동아리 의식과 사회정의 운동
종교적 배타심을 품고 사회 정의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고등학생 시절 받은 신앙 교육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학에 가서도 교회는 감리교뿐인 줄 알고 지냈다. 친구를 만나도 감리교회 신자라고 하면 다른 교파 교회나 종교를 가진 친구보다는 무언가 더 친근한 신앙적 동질감을 느꼈다. 장로교 신자라면 왠지 다른 종교 신자처럼 느껴졌다. 단지 같은 교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 이외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더 친근함을 느끼는 이런 감정적 유대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종교적 신앙은 동종 집단을 결속시키는 반면 이종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배타적인 동아리 의식을 결속하는 묘한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이것은 예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본질적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강력한 힘이다. 나 역시 그런 배타적 신앙문화 흐름에 편승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나는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가담했다. 이것은 사회의식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다 궁극적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었다. 사회 불의와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예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사회 참여 운동에 가담했다. 종교적 배타심을 갖고 있으면서 사회 정의와 평등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내던 때였다. 이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마음속으로는 다른 종파 교회와 경쟁적인 라이벌 의식을 가지면서, 사회 평등과 정의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묘한 심리상태일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 수준이 이런 정도에 있지 않나 싶다. 뭔가 정리되지 않고 일관성이 없이 시세(時勢)에 따라 춤을 추던 시절이었다.


함석헌을 알게 된 것도 이 시절이었다. 함석헌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나의 신앙과 생각의 껍질들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경험이었다. 우물 밖에 나와 본 하늘이 너무 넓고 광막하여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가 나만의 하늘을 갖고 싶은 심적 갈등과 유혹도 많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감리교회도 한 우물이란 것을 깨달았다.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 온 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참 쓰라린 것이었다. 그러나 보상도 있었다. 그동안 바라보지 않았던, 그러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을 바라보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교파의식, 교단의식이라는 마음속의 담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의식의 변화로 그치지 않았다. 감리교 신자로서 감리교회만이 진짜 교회인줄 알았던 내가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다. 소문으로 듣기에 굉장히 자유로운 신앙과 진보적(liberal) 신학을 한다는 한신 신학대학원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신학 풍토 역시 정통신학이 주를 이뤘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같은 비정통 신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퀘이커리즘 같은 소종파 신앙 전통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없었다.

퀘이커리즘과의 만남
내가 퀘이커리즘을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장학생으로 아일랜드 에큐메니칼 평화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평화교회전통(Peace Church Tradition)을 이어오는 기독교 종파 가운데 퀘이커리즘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퀘이커리즘을 다시 듣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가졌던 질문이었던 왜 그 사람들은 군대를 거부하는지,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예수를 잘 믿고 따른다면 폭력을 쓰지 말아야 하고, 예수의 정신은 군대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라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하고, 국민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군 복무는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에는 군목과 교회도 있고, 군대와 기독교 신앙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서로 잘 협력하여 나라를 잘 지키는 일에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명령을 위반하는 종교는 뭔가 잘못된 종교이다. 불교도 호국불교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가. 그런데 평화교회는 이런 생각과는 다른 신앙을 말하고 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진보적 열린 신학을 추구한다는 한신 신대원에서도 듣지 못하던 이야기였다. 국가와 정부가 잘못하면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폭력, 군대,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양심과 일치 될 수 없다고 믿고 또 그 믿음을 실천해 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은 것이다.


일찍이 대학시절 나는 함석헌이 퀘이커 교도라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퀘이커리즘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함석헌도 대중 앞에서 퀘이커리즘을 설파하거나 병역 거부를 선동한 적은 없다. 1997년 늦은 가을날 저녁, 평화교회 강의를 듣고 돌아 온 아일랜드 더블린의 학교 기숙사에 앉아 나는 퀘이커리즘과 함석헌,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퀘이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퀘이커리즘과의 만남을 계시처럼 받아들였다.

역사적 평화교회, 퀘이커
나는 예수와 군대 사이에는 일치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느끼면서도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신앙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음을 아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데는 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의 삶으로 대치되었다. 군대는 예수 신앙과 맞서는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남북한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외세의 침입과 지배를 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군사력을 강하게 하는 길이 올바른 신앙이요 기독교인의 태도이지 이에 반하는 그 어떤 주장은 비록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현실적인 주장이 우리 신앙생활에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주의적 사고가 매우 그럴듯한 감화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모순이고 비극적인 악순환의 틀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최고로 안전한 나라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전 세계 국가의 군사비 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미국의 군사비 예산이 많은데도 미국은 국가 안보와 시민 안전을 위해 군사비 예산을 계속 증액시키고 있다. 현실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은 끝없는 비극과 공포와 불안의 연속이다. 기독교인은 다만 덜한 악(less evil)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겸손한 신앙에 머물러 있기에는 이 세상의 전쟁과 폭력은 위태하고 심각한 지경에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더욱 평화교회에 끌렸다. 기독교 역사에서 평화교회로 이름 붙여 말할 수 있는 교회 가운데 특별히 퀘이커, 메노나이트와 브레드린 교회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역사적 평화교회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준 집단은 20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던 서구의 현대 에큐메니칼 기독교 그룹이다. 나는 이들 세 기독교 종파들 가운데 퀘이커에 마음을 두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의 평화 사상가인 함석헌이 퀘이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퀘이커가 다른 두 집단들에 비해 현실 역사 참여를 활발히 하는 신앙 전통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들의 평화신앙과 실천론을 좀 더 상세히 소개하는 시간에 말하겠지만, 메노나이트 교회는 재세례파 신앙에 기반한 교회로서 일반 교회와 같이 교회 제도와 체제를 갖추고 신학도 견고하지만 전통적으로 현실 참여가 약하다. 그에 비해 퀘이커리즘은 교회 체제와 형식도 없고, 신학보다는 개인의 영적 경험의 증언을 존중하기 때문에 신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난감한 면이 있으나 현실참여 활동이 활발하다. 최근 퀘이커 연구자들은 퀘이커 신학(Quaker Theology)이란 말도 사용하지만, 그들은 신학자(theologian)란 말보다는 역사가(historian)란 말을 선호한다.

펜들힐과 함석헌
퀘이커 평화 신학을 연구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퀘이커 운동의 발생지인 영국에서 퀘이커리즘을 읽는 시간을 갖고, 20세기 퀘이커 평화운동이 보다 실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미국에 건너갔다. 이것은 영국 지도교수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영국에서는 우드부룩 퀘이커 대학원(1999년, 2002~2003년)에서 있었고, 미국에서는 펜들힐(1999~2000년)에서 머물렀다. 두 곳은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함석헌 선생이 처음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한 곳이 펜들힐(1962년 가을학기)이고 우드부룩(1963년 겨울학기)이다. 함석헌이 이 두 곳에서 머문 지 40년 가까이 지난 후에 나도 퀘이커리즘을 이곳에서 공부하게 된 셈이다. 함석헌은 미국 펜들힐을 특히 좋아했다. 펜들힐에서 만난 미국 퀘이커들도 함석헌의 종교성을 높이 존경했다. 함석헌 이후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펜들힐에 찾아오기 시작하여, 내가 머물었던 2000년에는 5명의 한국인이 머물렀다. 한국 초대 여성 총리였던 한명숙도 이 기간에 가족과 함께 펜들힐에 머물렀다. 펜들힐은 퀘이커만 머무르는 곳은 아니다. 어느 종파이든, 심지어는 종교를 갖지 않은 비종교인에게도 열려있는 곳이다. 이번에 10년 만에 다시 찾아 온 펜들힐에서 들으니 2000년 이래로 제법 많은 한국인 구도자들이 펜들힐을 찾아와 머물렀다고 한다. 아는 이들의 이름도 있고 모르는 이들의 이름도 있다. 소리 없이 새로운 영성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도 알게 모르게 많이 존재함을 느낀다.


함석헌과 퀘이커리즘 사이의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함석헌이 펜들힐에 온 때는 그의 나이 62세였다.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 온 것이다. 일단 펜들힐에 오게 되면 학생 신분이 된다. 함석헌도 학생 신분이었다. 그가 이렇게 늦게라도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함석헌은 무교회 신앙을 신봉하다가 그의 나이 40대를 거치면서 동양 사상과 종교를 읽으면서 보편적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갔고, 동시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넘어선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장준하가 시작한 <사상계>에 사회비판과 종교비판, 특히 날카로운 기독교 비판의 글을 쓰면서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데, 5·16 군사 쿠데타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은 그 후 그의 삶을 반 군사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게 한다. 그 당시 젊은 언론인이었던 송건호는 총칼의 무력시위를 호되게 꾸짖는 함석헌의 글을 읽고 정의의 예언자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글을 읽고 미 국무성은 함석헌을 미국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함석헌으로부터 한국의 정황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함석헌은 이 초청에 응했는데, 그 본심은 미국의 퀘이커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함석헌은 세계 전쟁 중에 퀘이커들의 신앙 양심에 따른 평화운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퀘이커리즘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직접 퀘이커를 만난 것은 한국전쟁 후에 한국에 들어와 평화 구호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을 만난 것이 처음이다. 미국에 와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주로 퀘이커들을 만났고, 펜들힐에서 한 학기동안 퀘이커리즘을 공부했다. 그 후 함석헌은 전 세계 퀘이커들과 가깝게 교제했고, 서울 퀘이커 모임을 이끌었다. 20세기 후반기를 산 우리나라 지식인들 가운데 함석헌을 아는 사람은 한번쯤 퀘이커란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은 2차 세계전쟁 이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함석헌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영미권에서 퀘이커는 평화의 대명사, 정직한 기독교인의 모범으로 통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아직도 퀘이커리즘을 이단 비슷한 기독교 종파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영적이면서도 지성적인 기독교인들로 인식된다. 10년 전 펜들힐에 머물면서 나는 함석헌과 퀘이커리즘간의 관계성과 20세기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연구했다. 이것은 나의 박사 논문 주제였다.

“펜들힐을 불 살라라”
지금 펜들힐에서 ‘펜들힐 80년 역사’를 쓰고 있는 퀘이커 신학자 더글라스 귄(Douglas Gwyn)은 1960년대 펜들힐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함석헌과 펜들힐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 했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떠나는 환송의 자리에서 함석헌은 펜들힐 원장에게 상자 하나를 선물했다고 한다. 원장은 상자를 풀었다. 겉 상자를 풀면 속 상자가 나오고 그것을 열면 다른 상자가 계속 나오는 도깨비 상자 선물이었는데, 마지막 속에서 나온 것이 작은 성냥 상자였다. 함석헌은 거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펜들힐을 불 살라라.” 영적인 불로 펜들힐을 태우라는 것이 펜들힐에 남긴 함석헌의 메시지였다. 함석헌의 ‘펜들힐 영적 방화 사건’을 기억하고 소개하면서 더글라스 귄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그는 초기 퀘이커리즘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함석헌의 이런 ‘영적 선동’에서 초기 퀘이커들의 부활을 느꼈던 것 같다. 펜들힐의 설립 초기 정신은 초기 퀘이커들의 불타는 영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불길은 점차 사그라 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함석헌은 그것을 감지했을 것이고, 다시 펜들힐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했던 것이리라. 함석헌의 영적 방화사건 이야기는 펜들힐 역사에 의미 있는 에피소드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성냥을 그을 곳이 펜들힐 뿐이랴. 나 자신과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도 성냥을 그을 곳이 많지 않은가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
#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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