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3. 판단하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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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차원 아닌 개인 차원에 한정해서 하는 얘기.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그것대로 병행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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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은 이기심나 자기방어 심리가 그 근본 동력이며 자타에게 오로지 문제만을 초래하므로 생각이라는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특히 남을 판단하는 일은 '에고'의 '교만'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전통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 역시 최소한 초기불교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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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어떤 종교들에서는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제1의 윤리덕목으로 삼지만, 불교는 남에게 피해나 스트레스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제1의 윤리덕목으로 삼는다. (코로나 상황에서 마스크 안 끼고 사람들 만나는 것은 불교 관점에선 용납 안 되는 일. 종교행사는 언감생심이고 그 만남의 목적이 자선활동이라 하더라도.) 그렇기에 부처님은 당신이 출가하기 전 얻은 아들이 나중에 찾아왔을 때, 행동 (생각과 말 포함) 하나 하나마다, 그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사후에, 자신이나 남에게 어떤 스트레스/피해를 초래하는지를 살핌으로써 분별력과 윤리성을 제고하라고 가르치셨다. 실수했을 때는 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상의함으로써, 혼자 합리화/정당화하고 넘어가는 일을 삼가라고, 그래야만 실수의 재발과 자기기만을 막을 수 있다고도 하셨다 (MN 61). 글자 그대로 깨어 있는 시간동안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마다 이런 성찰과 검증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비판적 분석적 사고를 해야 한다. (생각은 물론 空하다. 초기불교에서 이 말은, 그 '생각'이라는 도미노 효과를 일어나게 한 조건들을 이해하고 생각에 집착하지 말으라는 뜻이지, 모든 생각을 무조건 dismiss 하는 것이 능사라는 얘기는 아닌 것 - 일단 이해하고 난 후에는 때로 dismiss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건 인간이 하는 생각의 대부분이 자기합리화이기 때문인데, 탐진치 없는 생각은 실은 지혜계발에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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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런 성찰이나 자기객관화가 인간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기에, 그리고 실수했을 때 서로 바로잡아 주고 충고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기에,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수행에서 지극히 중요함을 기회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하시고, 심지어 "수행의 전부!"라고까지 표현하셨다 (AN 9.1, SN 45.2, Ud 4.1). 그런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 한다면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셨으며 (Sn 1.3. 사교/친목 활동 일절 하지 말고 글자 그대로 홀로 수행하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라는 뜻), '어리석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들은 가까이 않는 것이 "최고의 부적"이라고도 하셨다 (Sn 2:4). 내가 잘못 했을 때 깨우쳐 주고 충고해 줄 수 있는, 내가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 내는 일은, 타인을 늘 유심히 관찰하면서 판단력을 키워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타인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AN 4: 192, AN 7:64, MN 110), 심지어 어떤 이가 함께 대화/토론할 만한 상대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셨다 (AN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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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사람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조련사가 말을 훈련시키는 방법과 같다고 하셨으며, 배우려는 태도/준비가 떨어지는 사람을 부처님이 '버리는' (가르침을 그만두는) 일을 훈련에 반응하지 않는 말을 조련사가 죽이는 일에 비유하셨다 (AN 4:111). 배우려는 태도/준비가 떨어지는 사람을 harsh 하게 야단치시는 장면도 초기경전 곳곳에 나오는데, 누구에게나 언제나 무조건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할 거라는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달리 부처님은 필요한 경우엔 매우 신랄한 언어도 기꺼이 사용하셨다 (MN 22, MN 38, MN 58, MN 136). 브라만들을 개와 비교하면서 브라만들의 도덕적 타락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하셨다 (AN 5:191). 논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공부를 부처님은 경계하셨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특별히 위험하다 생각되는 견해들 (영혼이 있다, 인과가 없다 등)을 가르치는 이들을 부처님은 몸소 찾아다니면서 논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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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사람을 '해치는' 것은 타인이 A를 향해 사용하는 '모욕적인 언어'가 아니라 A 스스로 저지르는 불선업이므로, A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자비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논리. 바로 그렇기에 공동체 내의 화합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잘못이 있는데도 안으로 곪도록 은폐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정성껏 비판해 줘야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절차를 부처님이 율장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현각 스님이 혜민 스님을 비난한 것. 모르는 척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는 불교 정신에 훨씬 충실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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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가와 판단을 필요로 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우리는 탐진치라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살기 위해 (해탈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남기신 의학서적을 열심히 공부해 가면서 스스로를 치료해야 한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이니 매사 매 순간 악업을 피하고 선업을 택하기 위한 정확한 판단은 필수! 삶은 '여행'이니 매사를 그저 받아들이고 경험 자체를 즐기면 된다는 식의 지극히 낭만적인 얘기들은 불교와는 그 근본 출발점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시각인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 삼아 열심히 노저어 '강'( =윤회의 소용돌이)을 건넌 사람이 뗏목에서 '내리는'( = 모든 생각/관념/노력을 놓는), 해탈을 완성하는 그 마지막 순간의 과업조차 정확한 평가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인데, 다만 세 가지를 늘 기억하고 또 매우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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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세속의 일반인들이 평가/판단을 하는 기준은 '나의 이익/기분' 혹은 '내가 신봉하는 사회/철학 이론'인데 반해 불교에서의 판단/평가 기준은 오로지 탐진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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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평가의 대상은 나의 혹은 타인의 어떤 특정한 하나의 생각/말/행동일 뿐 그 사람 전체가 아니라는 것. (연쇄살인범이 아라한이 되는 얘기도 초기경전엔 나온다. 현재 탐진치에 푹 절어 있는 사람도 마음만 바꾸면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으므로, 현재의 모습만 갖고서 그 사람 전체에 대한 최종 선고를 내리면 안 된다는 메세지. 진심이든 아니든 혜민 스님의 반성을 현각 스님이 두 말 없이 수용한 것도 이런 이유.) 타인이 나의 어떤 특정한 말을 비판할 때, 우린 그것이 '나'라는 인격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석하기에 그래서 take personally하는 것이고, 그래서 타인의 충정어린 조언도 건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이며 (self-image에 대한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無我'), 내가 나의 self-image와 당장의 기분에 집착하기에 남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서, 그래서 무조건 남을 나의 위에/앞에 두고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을 최고의 윤리라 믿게 된 것이지만, 초기불교는 다르다. 초기불교의 최대 관심사는 남에게 피해/부담 안 주면서 탐진치를 최소화해 나가는 것이며, 기분/즐거움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기 위해 mindful 하라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도 그걸 거울 삼아 나 자신을 닦기 위함이며, 서로 충고를 해 준다 해도 결국 각자의 업은 오로지 본인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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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우리가 판단을 금기시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마녀사냥이나 종교전쟁 등의 비극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 그러나 불교에서 하는 판단은 'judgmental' (당장 무언가를 배척/제거하기 위한 판단. 탐진치 증폭됨)이 아니라 'judicious' (인내와 이해의 노력이 수반되는 판단. 탐진치 감소됨)라고 타니사로 스님은 말씀하신다. 타인을 해치기 위한 폭력은 불교에선 어떤 경우에도 결코 정당화되지 않음 역시 물론이고. 어리석은 사람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얘기는, 인간들끼리의 상호작용을 원만하게 유지하려 하다 보면 하향 평준화나 탐진치의 시너지 효과로 귀결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일 뿐, '내가 생각하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 친밀한 상대이든 나에게 적대적인 상대이든 난 모든 존재를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goodwill을 갖고 대해야 하며, 적의나 경멸은 어떤 경우에도 불허된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도움도 얼마든지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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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혹은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 --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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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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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자비희사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95805154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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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崔明淑 and 8 others
7 comments
希修
수행자들 사이의 비판이 금기시된 것은 '제 발 저린' 사람들끼리 서로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카르텔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후기 불교의 어떤 종파들은 수행자와 신도 간의 성적접촉 시의 처벌 규정마저도 율장으로부터 아예 삭제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