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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아름다운 영혼과 용기
기자명 김조년
입력 2012.10.2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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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가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짜증스러운 소식과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또 그보다 더 산뜻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아마도 아름답고 용기 있는 영혼들이 있어서 우리가 이만큼 품위가 있고 진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날처럼 차차 국경이라는 것이 흐려지거나 없어지고, 경제와 재정, 국방과 정치와 문화와 종교, 그리고 의사소통과 생각과 학문의 교류가 한 국가단위나 종파단위 또는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자유스럽게 오고가는 때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더 진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하였던 가치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아주 급속하게 거대한 강물처럼 흐를 것이란 말이다. 물론 그 반대의 흐름도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들이 종국에는 어느 곳으로 흘러갈 것인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흐름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압된 분위기 속에서 깊은 속으로부터 ‘아니’라고 부르짖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삶으로 표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작은, 그러나 용기 있는 몸짓 하나로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들고 껑충 뛰어오르는지 모른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러배마주의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여인이 봉재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를 탔을 때다. 빈자리에 앉았으나 다음 승강장에서 백인이 올라왔다. 그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흑백의 구별이 명확하던 때, 그녀는 당연히 그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기사의 말을 ‘나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란 말로 거부하였다. 그녀는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구치소에 갇혔다가 나왔다. 바로 이 작은 사건은 380여일이 넘는 긴 기간 버스타기거부 운동으로 번졌고, 워싱턴까지 몇 년을 걸친 대행진이 이루어졌으며, 흑백을 구별하던 차별정책들이 속히 사라지게 하는 시작이 되었다. 오늘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영혼의 용기 있는 몸짓이 역사를 어떻게 짓는가를 말해준다.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미국 뉴욕시에 있는, 미국의 경제 권력을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를 적이라고 여긴 세력의 두 대의 비행기가 공격하여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미국 전 지역에 갑자기 옛 시대에나 있을 법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거대한 파도처럼 춤을 추었다. 집집마다, 승용차와 거리를 달리는 모든 차들도 성조기를 달았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 어디에서나 알카에다가 존재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바숴버려야 한다는 흐름이 거대하게 일고 흘렀다. 대통령은 그들을 향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선포하고, 국민들은 들끓는 여론으로 지지하였다. 그 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미국의 퀘이커(Quaker)교도들과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공격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반국가적인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양심들은 그 성명을 크게 지지하고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국가주의의 반이성적 흐름을 걱정하였다.
최근 일본의 우익정치가들의 수없이 많은 발언으로 독도를 사이에 둔 한·일 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센카쿠열도(尖閣列島) 또는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중심에 둔 일본과 두 중국 사이의 긴장이 매우 날카롭게 대립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그 문제되는 열도 주변에서 군사작전 비슷한 무력시위를 양 중국은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그 섬을 사서 자기 영토로 등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때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아사히신문에 긴 글을 썼고,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1270여 명의 지성인들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논쟁이 되는 그 지역들은 한국과 중국이 약할 때 일본의 침략의 산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토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잘못했던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참신함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작가 옌렌커(閻連科)가 응답하는 글을 썼다. 국제적인 지성인들의 모임이나 연대운동으로 정치가들이 바람을 일으키려는 국가주의의 흐름을 평화의 흐름으로 바꾸는데 함께 힘쓰자는 발언이었다. 이 두 발언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소수에 속하거나 별로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작고 맑은 소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의 소리일지 모른다.
최근 우리나라 동부전선에서 북한을 탈출한 병사가 휴전선 양쪽으로 쳐진 철책선을 넘어 아무런 제재 없이 초소의 문을 두드려 귀순한 일이 보도되었다. 남과 북의 양측에서 철책선을 아주 철저하게 감시하고 지키지만 그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과 동시에 우리 정치권에서는 NLL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선들은 언제부터 있었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것이 없었던 때와 사라진 뒤의 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제한적 존재이기에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미래의 밝은 세계를 염두에 둘 때 현재의 복잡한 문제들이 풀릴 실마리가 생긴다. 남북의 경계들은 통일 된 뒤에는 하나의 아프고 슬픈 추억과 기억으로 남을 것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또한 비극이요 슬픔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들을 미래의 자리에서 그 경계의 무의미성을 상징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표를 의식하지 않고 근본문제를 바라보는 지점에 설 때 우리의 논쟁은 훨씬 더 창조적이고, 평화적이며,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차원의 것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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