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신학자 유동식 선생 > 표지 이야기 | (재)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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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 표지 이야기 > 신학자 유동식 선생
표지 이야기 (2007년 9월호)







고향을 그리며 바람 따라 흐르다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하늘 저편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
새 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살으리라. (소금(素琴) 유동식)

‘하늘 나그네’는 여전히 길(道)을 가고 있다. 정처(定處)는 없다. 다만 고향을 향하고 있을 뿐…, 이유는 묻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이므로, 헤아릴 뿐이다. 아버지가 주신 시간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렀으나, 사람의 마음인지라 간혹 더디기도, 빠르기도 하였다. 길 위의 동행은 보이다가도 사라지고, 있다가도 없어졌다. 다만 변함없는 길동무는 바람, 흐르는 바람일 뿐. 그렇게 바람에 밀려 흐르는 대로 살아온 세월이다. 이승에서의 85년, 변함없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폴 발레리)”
연세대 뒷산 기슭, 유동식 선생의 자택을 찾아간 날은 바람 사이로 비가 묻어 있었다.
2층집으로 오르는 계단 옆 한쪽 어깨에 얼굴을 기댄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무릎을 세우고 웅크려 있는 자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고, 잠이 든 것 같기도 하다.(김효숙 작 <동그라미>) 유 선생이 회갑을 맞아 발간한 『한국신학의 광맥』 출판회 겸 그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는 행사에 동료와 후배들이 보내 준 축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종교와 예술을 필생 업으로 삼아 살고 있는 유 선생의 집으로 안내해주는 여인이다.
크지 않은 거실에 한쪽 벽 책장에는 신학서적이 가득하고, 맞은편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소금이 그린 20호 크기의 <용유도에서>와 <자화상>, 또 회갑 때 받은 오당 안동숙의 <천록도>이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유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약했던 그에게 건강을 준 것은 수영이었고, 지금은 기공으로 유지하고 있다. 새벽에 기도를 마치면 그는 30분 정도 기공을 한다. 기공은 30분가량만 해도 예전에 했던 수영만큼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가까이 앉아 말씀을 나누실 때 얼핏 눈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그의 눈빛은 나그네의 그것이었다. 유유자적하고, 평온하고 또 슬퍼보였다. 집착이 사라진 비어있음 일까. 그는 여전히 바람 부는 길 위에 있었다. 그가 쓴 글에서 멋을 지닌 풍류객 율곡의 시에 대해 말한바 풍류도를 배웠으면 집착이 없어진다고 했다.

초당에 하룻밤 묵어가는데 草堂聊寄宿
매화에 달이 걸렸으니 이것이 풍류로다 梅月是風流

‘인생이란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인데, 매화나무에 달이 걸렸으니 이것이 풍류가 아니겠는가’
풍류신학으로 한국신학의 한 획을 그은 나그네의 지나온 길들을 더듬어 본다.
유동식 선생의 길은 신학의 길이었다. 그 신학은 우리 문화에 토착화된 한국신학을 모색한 길이었다. 그는 한민족의 빛나는 종교, 예술적 문화를 창조해 온 것이 풍류도임을 찾아내었다. 그는 밝히 말했다. 그 풍류도에 접목된 복음의 전개에 실마리를 찾아간 것이 풍류신학이라고.

3대째 기독교인으로 1922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 때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 와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어버지가 상인이셨고, 늘 외지로 돌아다니신 탓도 있지만, 장남의 장손인 까닭에 그는 조부 밑에서 성장하였다. 한학자이신 할아버지는 완고한 신앙인이었다. 조부는 일이라고는 춘천중앙감리교회의 유사부장(재정 담당)만 맡으셨다. 생계는 돌보지 않으시고, 낚시를 하시거나 집 근처 향교에 가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마땅히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어려울 때이기도 했다. 그는 6살 차이 나는 막내 숙부와 잘 어울렸는데, 숙부는 감신대를 졸업한 목사였다. 그분 또한 세상일에 시달리지 않고 사셨다. 가까운 분들로부터 그는 이래저래 영향을 받으며 지냈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한국문화나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없었다. 신사참배나 창씨개명 같은 일제시대의 억압은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이 생리화 되어 있었던 그에게 민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태평양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신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그는 동경으로 건너갔다.
“집을 떠나 동경으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떨어지면 재수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신학교와 미술대학교 두 곳에 원서를 냈지. 신학교에 떨어지면 미술대학이라도 가려고. 그런데 두 군데가 다 된 거야. 그러니 원래 가려고 했던 신학교를 간 거지. 그러면 뭘 해? 겨우 1년 공부하고 학병으로 끌려갔는데…”
학병으로 사람 죽이는 연습을 훈련받는 동안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사람을 살리는 신학을 공부하던 신학생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연습을 하는 것은 고문보다 지독한 형벌이었다. 그는 훈련 뒤 남양으로 파송될 예정이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일본은 패망했고,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그 일은 그에게 일생의 큰 사건이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나그네 인생의 자유와 기쁨을 체험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그는 돌아와 감리교신학교에 편입하여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무렵에 반려자가 될 윤정은 씨도 만나게 되었다. 졸업 후 공주여자사범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에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 와중에 화가였던 동생 유병식을 잃었지만 한편, 사랑하는 연인 윤정은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공주에서 지내다가 그는 전주에서 교사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주로 향했다. 전주는 전쟁의 흔적이 없었다. 마치 그가 늘 꿈꾸던 고향과도 같았다. 거기서 남문밖교회 고득순 목사를 만났다. 그가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 고 목사는 당시 일흔의 한학자였다. 고 목사는 여러 가지 한문 공부도 가르쳐주었다. ‘소석’이라는 호를 받은 것도 고득순 목사에게서였다.
“그분이 나보고 호가 있느냐? 그래. 없습니다. 했더니 선비가 호가 없으면 되냐면서 지어 주신 게 소석이야. 묵시록 2장에 흰돌,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긴 돌이라는 거거든.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무거워서 나중에 호를 바꿔야지 했어. 도연명이 무현금, 줄 없는 거문고를 들고 다녔거든. 그것은 뭔 말이냐면 그분은 줄이 없어도 음악이 늘 있었던 거야. 그걸 내가 멋있다 생각했거든. 그렇다고 무현금이라 하기도 그렇고, 고 목사님께 받은 ‘소’자는 살리자 해서 찾아 봤더니 소금(素琴)이 바로 무현금이란 뜻이야. 도연명처럼 줄이 없어도 그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나는 소리는 내고 싶은데, 소리를 못내는 존재라 그래서 겸손하게 소금으로 고쳤어. 허허. 그게 결국은 풍류랑 관련되는 말이에요.”
그에게 있어 풍류라는 개념은 어찌 보면 신학적인 차원이 아닌 풍류에 대한 소박한 개념으로 막연히 예술에 대한 동경심을 늘 가지고 살아온 것이었는데 그게 결국 풍류신학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고득순 목사는 그에게 심처위복(心虛爲福)이란 말을 써주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산상수훈의 첫 구절이다. 그는 이것을 ‘하늘 나그네’라 표현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그는 서울의 배화여고에서 교목 일을 맡았다. 3년 남짓 학교의 종교주임 일을 하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자유와 함께 사랑을 강조해 왔다. 미국으로 유학가기에 앞서 <배화>지에 “여장(旅裝):도(道)와 로고스론 서설”이란 수필 형식의 논설을 실었다. 그것은 앞으로 그가 전개해 나갈 연구 방향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준 것이었다.
그 뒤 유동식 선생은 미국 보스톤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떠날 때 그는 성경 전서와 콘사이스, 그리고 『노자』를 들고 갔다. 노장사상은 신학교 다닐 때 탄허스님으로부터 배워서 좋아했던 터였다. 신약성서를 공부하면서 불트만의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논문을 썼다. 서구의 기독교를 보면서 한국 문화 속의 기독교를 고민하게 되자, 그는 민족과 문화의 문제,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깊이 천착해 들어갔다. 본격적인 복음에 대한 공부와 다양한 문화를 접촉하면서 민족 문화에 대한 관념이 달라져갔다. 그러자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신앙하는 행위는 문화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신학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공부를 해 보니까 우리 신학에서 한국문화는 배제되어 있어. 서양 사람들의 신학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희랍철학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는 건데, 한국이라는 문화는 아예 빠져 있잖아. 그걸 자각하고 선교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신학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50년대만 해도 한국학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고, 더군다나 기독교 안에서는 더 없었을 때니까,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한국학을 시작했어요. 60년대 토착화 신학 논쟁이라는 것도 이런 논의를 한 거야. 토착화라는 게 선교신학이거든.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생명화 될 수 있겠냐는 거지. 50년 말부터 60년 말에 걸쳐 선교론에 대해 내가 많이 얘기했어.”
미국에서 돌아온 그의 논문 등은 신약학이 아니라 선교학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 정리되어 나온 것이 『도와 로고스』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감신대에서 강의를 하며 오후에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편집부 일을 봤다. 그는 1962년 토착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것을 계기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토착화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독교 안에서 그처럼 활발했던 논쟁의 장은 없었다. 그 와중에 그는 한국 종교문화사에 대해 꾸준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기독교의 입장에서 정리해 낸 것이 『한국 종교와 기독교』이다.
그 후 그는 한국인의 영성을 규명하기 위해 한국 무교를 연구했다.
“한국의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기층문화를 이끌고 온 종교는 유교도, 불교도 아니거든. 무교야. 내가 무교라고 하는 건 무속, 샤머니즘이라 그래가지고, 경시하고 있지만 그 바닥에 깔려있는 종교 구조는 그게 아니거든, 원시 종교 틀을 못 벗어났지만 그래도 종교적인 영성에 있어서는 굉장히 기독교적이야. 한국인의 영성에 대해 언급한 이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었어요. 그분은 9세기에 당나라에 가서 유불선 을 공부하고 그 눈을 가지고 고국인 신라에 와 보니 신라는 당나라와 다르거든. 특히 화랑도가 그랬어요.”
유 선생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이 한 화랑의 비문에 쓴 글을 보고 바로 이거구나 하며 기뻐했다. 거기서 찾은 풍류도의 구조를 가지고 보면 한국의 종교문화가 전부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는데 이것을 풍류라고 한다.…이는 실로 삼교(유·불·선)를 포함한 것이요(包含三敎), 뭇 사람들을 교화하여 사람되게 한다(接化群生).

“포함삼교란 풍류도 속에 유불선의 핵심이 다 들어 있다는 말이거든. 그 개념이 뭘까 해서 난 그걸 ‘한’이라고 보았어요. ‘한’은 하나인 동시에 전체야. 또 크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지. 그리고 접화군생한다는 것이 사람을 만드는 건데, 이걸 줄인 말이 삶이야. ‘한과 삶’ 종교적인· 초월적인 신앙의 개념하고, 역사·현실적인 개념, 이 둘을 수렴한 개념이 ‘멋’이라는 미의식이야. 그것을 내가 풍류도라 그랬거든. ‘한 멋진 삶’이라는 말이 이제는 거의들 상식화되었는데, 처음에 그 말하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했어요. 그 틀을 가지고 맨 처음 한국의 기독교 사상을 점검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멋·한·삶’이 한국인의 얼(영성)이며, 한국인의 문화적 틀이고, 한국기독교의 사상적 틀이며 복음 선교의 틀이라고 보았다.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은 그가 풍류도의 입장에서 한국의 종교 사상을 본 것이지만 반 이상이 기독교 사상을 다룬 것이다. 그는 세계 종교사 차원에서 제1밀레니엄은 종교 문화가 지배했고, 제2밀레니엄은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한 기술 문명, 세속문화가 지배했으며, 제3밀레니엄은 종교와 과학 기술의 세속문화를 수렴한 예술문화가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한국에서도 기독교는 짧은 역사지만 신학적으로는 보수신학에서 민중신학으로 와서 이제는 예술신학이 전개되리라고 전망했다. 서구 기독교의 흐름과 한국 기독교의 흐름이 교차되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 그는 우리 문화의 틀부터 봐야한다는 인식을 당부한다. 유 선생은 작년에 『풍류도와 예술신학』을 냈고, 올해 4월에는 『풍류도와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냈다. ‘성서와 문화’모임에서 지난 3년간 강의했던 내용이다. 그가 신학수첩이라고 이름 붙인 그 책은 조그만 책들이지만 그가 평생 한국신학을 어떻게 전개해 왔는가를 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한국인의 영성인 풍류도와 성서의 꽃인 요한복음에 관심이 쏠려왔다고 고백한다.
“나는 부활이 뭐냐는 핵심을 요한복음 14장 20절을 가지고 얘기했거든. ‘(십자가 부활)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우리도 삼태극적 관계란 말이야. 우리에게 복음이 뭐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우리와 하나님은 삼태극이야. 셋이 모여 하나야. 이게 말하면 요한복음의 핵심이지.”
한국인의 복음 이해라 하는 것은 이 삼태극적 관계에서 우리가 구원과 해방, 사랑 일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태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의 조화를 이룬 우주를 나타내는 것이며, 종교와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류도의 구조를 나타내는 형상이기도 하다. 삼태극은 항상 그의 신앙과 삶의 화두가 되어 왔다. 그는 긴 얘기 끝에 당부했다. “성령의 신학인데 예술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것에 한국의 신학적인 사명이 있지 않겠어요?”

소금 선생의 아내 윤정은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였다. 은퇴 후 윤 교수는 마지막 여생을 사회에 봉사 헌신하기로 하고 출소자들을 돌보는 ‘흰돌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탓인지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지날 무렵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자궁암 3기, 만 4년을 투병생활 하다가 2004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흰돌 윤정은 교수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영혼의 노래』를 펴냈다. 그 시집을 보면 유 선생이 틈틈이 그린 그림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 그림들이 그려졌을 때 생전의 윤 교수는 첫 감상자로, 평론가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 흰돌 선생은 없지만 언제나 옆에 있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소금 선생은 1973년 연세대학교에서 종교주임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1987년 정년 은퇴하였다. 그 뒤 강연과 원고청탁 등으로 바쁜 세월을 보냈다. 고희를 기념하여 고마운 후배들이 기념 논문집 『한국종교와 한국신학』을 내 주었고, 팔순을 기념하여 한국문화신학회 회원들이 『한국문화와 풍류신학』,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를 엮어서 냈다.
또 지금은 연세대의 젊은 제자들과 후배들이 모여 소금 선생의 전집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흐뭇해하셨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평신도로 지내며 신학에 골몰했던 소금 선생은 지난 60년간 설교를 계속 해왔지만 설교집 한 권이 없다. 왜냐면 원고 없이 설교를 해 왔기 때문이다. 설교만이 아니라 강의도 그렇게 원고 없이 해왔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묻자 그는 말했다.
“신학하는 사람의 책임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전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단 말야. 목회자가 있기도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봉사자도 따로 있고 하는 거지. 모든 사람이 목회자만 될 수 없잖아. 그게 내 기본적인 이해야. 목사 안수 안 받은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아.”
매주 목요일이면 국제화우회의 회원들과 함께 바깥으로 스케치를 나간다. 그때 그린 그림들이 그의 집 곳곳에 가득하다. 1년에 한 번씩 합동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렇게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유동식 선생에게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통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답을 구해 보았다.
“근본적인 것은 탈레반이 잘못이죠. 어떻게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전투인도 아닌데 그럴 수 있어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선교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어떻게 생명력 있게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하기 전에는 힘들어요. 내가 일생을 걸려서 한국문화 조금 이해했는데, 거기 코란도 읽어보지 않고, 그 사람들 생활과 역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가서는 안 되지요. 어느 신문에 보니, 왜 죽였느냐 하니까 가방에서 전도지가 나왔다는 겁니다. 이슬람에 있어 기독교 강요는 자기 종교를 무시하는 거거든. 우리도 누가 그러면 좋겠어? 기독교 가짜니까 불교 믿으라고 하면. 그러니까 전혀 다른 문화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쪽에 대한 충분한 공부부터 해야지. 그렇게 이해를 가지고 그쪽과의 복음의 차이가 뭐냐는 의미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선교 갔다는 말은 그 사람과 내 진리를 나눠 갖겠다는 대화인데, 대화는 상대방을 이해해야지. 한국 기독교가 아직 그런 준비가 부족해.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보낸다는 데 그 열정은 좋지만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 나는 이번 이 기회에 한국 교회가 검토해서 선교, 특히 러시아나, 불교국, 이슬람 세계 같은 나라로 갈 때는 철저히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준비를 해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가서 물품 나눠주고, 노래 가르치는 것으로는 어렵다는 얘기지. 이번 일은 한국교회의 무책임한 선교 정책 때문에 생긴 희생이라고 생각해.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반성의 좋은 기회가 되길 바라요.”
그는 한국 교회가 놀랍도록 양적 팽창을 했는데, 그건 우리들의 영성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그 때문에 부작용도 있다고 했다.
“양적으로 팽창한 것은 잘했다 생각하고, 이제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질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가 뭘 할 것인가를 찾아 그 운동을 전개시켜 나가야 하겠지.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오늘날 재현한다는 얘기를 하지만, 지금은 그 부흥회가 의미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현대에 어떻게 살리느냐는 것을 고민해야 할 때지. 그때 10만 정도의 기독교 인원수가 지금 천 만 명이 넘는데, 어떻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겠어?”
오랜 나그네로 신학의 길을 모색한 학자답게 그는 여유가 있었다. 편하게 말씀하시는데도 듣는 사람에게는 자극을 주었다.
신학의 길과 더불어 예술적 삶을 놓지 않았던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 더 느리게 걸었고, 부드러운 바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신학자, 풍류객은 오늘도 붓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 붓질에는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묻어있다. 그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줄 없는 거문고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거실 창밖으로 비가 죽죽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새 그쳐 있었다. 때마침 말복이었다. 가까운 곳으로 가 함께 식사를 했다. 웃으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평생 바람과 함께 흘러오셨다지만, 때론 그 바람을 가르기도 했으리라. 어느 풍류객 못지않은 품으로, 정신으로 그렇게 살아오신 당신. 건강하시기를, ‘새 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서 평온하시기를 빈다.
그동안 줄 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소리를 내어 주신 소금(素琴) 유동식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이영란·사진/김승범